유라시아 지정학 변화와 중러관계:
기원과 발전, 그리고 동북아에 미치는 영향
박창희*
요약
이 글은 유라시아 지정학 변화가 중국-러시
아 관계에 어떠한 영향을 주었는지를 분석한
다. 1980년대 중국과 소련이 과거 적대관계에
서 벗어나 현재의 중러관계로 발전할 수 있었
던 기원과 1990년대를 통해‘전략적 동반자관
계’를 심화시키고 2001년 신우호협력조약을
체결할 수 있었던 지정학적 이익을 분석하며,
이를 바탕으로 향후 중러관계 전망 및 동북아
지역 안보에 미치는 영향을 평가한다. 강대국
들의 안보정책을 이해하는 데 유용한 지정학적
접근방법을 사용하여 ‘지전략적 균형’
(geostrategic balance)—지리 및 전략적 수
준에서 형성되는 역학관계—과 ‘영향권’
(sphere of influence)—정치 및 군사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주변국 또는 주변—
이라는 두 개의 지정학 개념을 중심으로 중러
관계를 분석한다. 1980년대 이후 오늘날까지
유라시아 지정학 변화는 중국-러시아 관계를
지배하는 결정적인 요인이었으며, 향후 중러관
계 역시 이러한 영향으로 인해 미국의 지역동
맹이 강화되고 군사적 영향력이 확대될수록 더
욱 심화될 것으로 전망할 수 있다. 중러관계의
강화는 부득불 미일동맹 및 나토동맹과의 대립
및 충돌 가능성을 높임으로써 동북아 지역 안
보환경 및 한반도 현안 해결에 전반적으로 부
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다.
핵심어 : 네트워크국가, 세계화, 국민국가, 변환
『국가전략』2006년 제12권 3호
* 국방대학교 안보대학원 군사전략학부 조교수
I. 서론
중국-러시아 관계는 유라시아 지정학 변화와 어떠한 관계에 있는가? 지난
15년간의 탈냉전기를 통해 중러관계가 밀착될 수 있었던 지정학적 이익은
무엇인가? 향후 중러관계의 미래를 어떻게 전망할 수 있으며, 그것이 동북
아 지역 안보에는 어떠한 영향을 줄 것인가?
9·11 사태 이후 미국이 주도하는 테러와의 전쟁이 본격화되는 과정에서
강대국들간의 관계에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아프간 전쟁시 러시아와 중국
을 비롯한 주요 국가들의 전폭적인 지지와 참여는 마치 19세기 유럽에서와
같은 강대국들간의 제휴(concert)를 연상케 하였다. 그러나 그 후 불과 2년도
안되는 시점에서 발발한 이라크 전쟁에서는 동일한 행위자들 사이에서 표출
되는 갈등과 대립을 목격할 수 있었다. 이렇게 혼돈스러운 국제질서를 반영
하듯이 중국-러시아 관계에 대한 전망도‘편의상의 연대’에 불과하다는 관
점에서부터 장차‘동맹’으로 발전할 것이라는 전망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나타났다. 이제 2000년대의 중반을 넘어 국제테러에 대한 흥분이 차츰 가라
앉고 있는 시점에서 보다 냉정하게 양국관계를 진단해 보는 것은 매우 시의
적절하고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
중러관계를 분석하기 위한 접근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그러나 중러
관계를 분석하는 목적이 단순한 경제교역의 수치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군
사안보적 관점’에서 그 의미를 조망하는 데 있다면, 역사적으로 주요 강대국
들의 안보정책을 이해하는 데 유용하게 사용되었던 지정학적 접근방법을 적
합한 분석도구로 고려해 볼 수 있다. 탈냉전 이후 신안보개념—비확산 및 반
테러와 같은 초국가적 안보개념—의 등장으로 지정학은 한때 곧 사라질 수
밖에 없는 개념으로 간주되기도 하었다. 그러나 탈냉전기 국제관계는 쟁점
영역별로 협력과 경쟁이 공존한다는 점, 즉 테러리즘과 같은 초국가적 현안
에 대해서는 긴밀히 협력하더라도 자국의 이익이 걸린 민족갈등, 종교문제,
영토분쟁 등의 군사안보적 현안에 대해서는 여전히 첨예한 갈등과 대립이
지속되고 있다는 사실은 지정학이 아직까지 현대 국제정치의 중심에 서 있
음을 의미한다(Sicherman, 1996, 7-8).
이 글은 국가안보 환경에 영향을 미치는 두개의 지정학 개념을 중심으로
중러관계를 분석한다.1) 하나는‘지전략적 균형(geostrategical balance)’이다.
이것은 지리 및 전략적 수준에서 형성되는 역학관계의 균형을 의미하는 것
으로, 동맹 또는 제휴관계, 핵 전력, 재래식 전력 등의 요소들의 작용에 의해
결정된다. 넓은 의미에서 본다면 세력균형(balance of power)과 유사한 개념
6 『국가전략』2006년 제12권 3호
1) 이러한 지정학적 접근방법으로 Bobo Lo는 러시아 대외정책을 세력균형, 영향권, 제로섬
게임이라는 세 가지 개념을 사용하여 분석하고 있다(Lo, 2003, 72; 2004, 296).
이나 지리적 측면과 전략적 측면에 초점을 맞춘다는 점에서 다르다고 할 수
있다. 국제관계의 주요 행위자들, 예를 들면 미국, 중국, 러시아(소련), 일본,
그리고 NATO(North Atlantic Treaty Organization, 북대서양조약기구) 간의 관
계변화는 유라시아 역학관계의 불균형을 야기하고, 그러한 역학관계의 변화
는 결국 중러관계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 없었다. 구체적으로 1980년대초
레이건 행정부의 군사력 강화, 1990년대 미일동맹의 강화, 2000년대 미사일
방어 추진 등의 조치가 강대국간 균형에 어떠한 변화를 가져왔고 또 중러관
계에 어떠한 영향을 주었는지 볼 수 있을 것이다.
다른 하나는‘영향권(sphere of influence)’이다. 영향권이란 특정 국가가 정
치적, 군사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주변국 또는 주변지역을 의미한
다(Park, 2004, 29-31). 영향권은‘공간상의 종심’을 제공함으로써 유사시를
대비한 일종의 완충지대로 볼 수 있다. 러일전쟁 직전 러시아세력과 일본세
력 사이에 위치한 한반도, 2차대전 직전 독일과 소련 중간에 낀 폴란드, 한
국전쟁시 북한지역, 1차 인도차이나 전쟁시의 북베트남 등이 대표적인 예이
다. 그러나 영향권은 실제 완충지대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탈냉전 초기 러
시아의 경우 소련에 비해 발트해 3국, 동구, 중앙아시아 지역 일대의 영향권
을 상실함으로써 정치, 외교, 경제, 군사안보 등 모든 면에서 취약성을 안게
되었다. 마찬가지로 중국도 중앙아시아 및 서남아시아 지역에서의 영향력이
약화된다면 신장 및 티베트에 대한 통제력이 약화될 것이다. 1990년대
NATO의 동진과 일본의 안보역할 확대, 그리고 21세기에 들어와 유라시아
전역에 걸친 미국의 군사력 강화로 인해 유라시아 영향권에는 커다란 변동
이 있었으며 부득불 중러관계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 없었다.
1980년대 이후 유라시아 지정학의 변화는 중국-러시아(소련) 관계를 숙명
적으로 지배해 왔다. 1980년대초 소련은 레이건 행정부의 군사적 강경책에
대응하여‘제한적 균형’을 추구할 목적에서 중국과 관계정상화를 시도하였
으며, 1990년대 중러 양국은 미국의 동맹강화 및 NATO 확대에 대응하기 위
해 전략적 동반자관계를 체결하여 보다‘적극적인 균형’을 추구하였고, 21
세기에는 테러와의 전쟁을 기회로 삼아 유라시아 전역으로 영향권을 확대하
는 미국에 대해‘지전략적 균형’뿐 아니라 그들의 전통적인‘영향권 수호’
의 차원에서 보다 협력을 강화해 나가고 있다. 즉 중러관계는 1980년대 이
후 지정학적 상황이 불리해짐에 따라 더욱 긴밀히 발전해오고 있음을 알 수
세계화 시대의 국가 변환 7
있다. 이러한 추세는 향후 미-일동맹과 중-러 연대 사이에 갈등 및 대립 가
능성이 높아지는 것을 의미하며, 동북아 지역 안보환경 및 한반도 문제 해결
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을 것이다.
이 논문은 우선 1980년대초 중국과 소련의 관계정상화 원인을 분석한다.
양국이 지난 20년간의 적대관계에서 벗어나 관계를 정상화하기로 결심하게
된 배경을 고찰함으로써 현재의 중러관계를 지정학적으로 보다 잘 이해하고
분석할 수 있는 출발점으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다음으로 1990년대 중국
과 러시아의 관계가 이념적 차이를 극복하고 전략적 동반자 관계로 변화하
는 과정과 그 원인, 그리고 그들의 관계가 21세기로 접어들면서 더욱 심화
될 수 있었던 지정학적 요인을 살펴 볼 것이다. 마지막으로 향후 양국관계의
발전전망과 한계, 그리고 중러관계가 동북아 안보에 미치는 영향을 결론으
로 제시하고자 한다.
II. 1980년대 중소관계 회복 원인 :
냉전의 부활과 지정학 변화
1. 중소관계 변화 배경 : 냉전의 부활
중국과 소련은 1969년 국경분쟁을 거쳐 1970년대 후반까지 군사안보적
으로 첨예하게 대치하고 있었다. 소련은 1976년 몽골과 군사조약, 1978년
베트남과 우호협력조약, 그리고 1979년에는 아프가니스탄 침공을 통해 이들
지역에 군사력을 주둔시켰고, 중국과의 접경지역에 약 100만명의 병력을 배
치하여 전 방향에서 중국을 포위해가며 군사적으로 압박하였다(Choudhury,
1982, 139; Zagoria, 1980, 72). 특히 베트남의 캄란만 해군기지와 다낭 공군
기지에 대한 사용권을 획득하여 영향권을 인도양으로 확대하는가 하면, 제3
세계에 대한 중국의 영향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북한, 일본, 몽골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려 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중국과 소련은 별다른 관계개선
의 노력 없이 서로“교조주의”와“수정주의”라는 비방전을 주고 받고 있었
다(첸지천, 2005, 27).
8 『국가전략』2006년 제12권 3호
세계화 시대의 국가 변환 9
그렇다면 중국과 소련은 왜 이와 같이 첨예한 정치, 외교, 군사적 대립에
서 벗어나 관계회복을 모색하였는가? 1980년대초 중소관계의 미묘하면서도
질적인 변화는 미국-소련간‘냉전의 부활’이라는 진원지에서 야기되고 있었
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그러한 변화를 촉발시킨 책임은 소련에 있었다.
1977년 등장한 카터행정부는 동서간의 화해를 통해 30여년간의 냉전을
극복하고 국제관계를 정상화하려 하였다(Gaddis, 1990, 303). 소련 공산당 서
기장 브레즈네프 역시 데탕트를 강화해야 한다는 견해를 피력하고 있었다.
그러나 냉전을 종식시키기 위한 카터행정부의‘포용정책’은 3년에 걸친 노
력에도 불구하고 역효과만을 가져오고 있었다. 소련은 1972년 SALT
(Strategic Arms Limitation Talks, 전략무기제한협정)-Ⅰ이 타결된 이후 이에
저촉받지 않는 중거리 미사일 및 초음속 폭격기(Tu-26) 등을 개발해 오고
있었으며, 유럽에 배치된 중거리 핵미사일 SS-4와 SS-5를 고체연료를 사용
하는 최신형 이동미사일 SS-20으로 대체하려 하였다. 1979년 1월 이란에서
는 호메이니 정권이 등장하여 자국내 미군기지 사용을 거부하였고, 니카라
과에서도 반미성향이 강한 정권이 등장하였다. 세계 곳곳에서 미국의 전략
적 입지가 약화되면서 국내외로부터 카터행정부의‘유화정책’에 대한 비난
이 거세게 일고 있었다.
1979년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은 미국의 데탕트 강화노력에 종지부를
찍도록 하는 결과를 가져왔다.2) 1980년 카터 행정부는 임기 1년을 남겨둔
시점에서 소련의 도발적 행위에 대해 강경책으로 전환하였다. 당시 상원에
계류중이던 SALT-Ⅱ 비준안 처리를 중지하고 소련에 대한 식량수출 및 기
술이전을 중단하였으며, 그간 인권문제를 이유로 상대적으로 무관심했던 제
3세계 국가들에 대해 전과 같이 원조를 강화하기로 하였다. NATO 국가들에
게 신형 중거리 핵전력을 배치하는 방안을 검토하는 한편, 인도양 지역에 해
군력을 증강하고 북부 아프리카와 페르시아만 지역에 해군 및 공군기지를
건설하여 소련의 영향권이 아프가니스탄에서 남하하지 못하도록 봉쇄하였
다(Gaddis, 1990, 310-311; Pfaltzgraff, 1980, 26). 1970년대 조성된 데탕트가
2) 아프가니스탄은 인도차이나, 중앙아시아, 중동, 북동부 아프리카 지역으로 뻗어나갈 수 있
는 전략적 요충지이며, 특히 소련 공군은 페르시아만의 출입구인 호르무즈(Hormuz) 해협
까지 타격할 수 있게 되었다. 군사전문가들은 소련이 인도양의 말라카 해협, 홍해의 아덴
만까지 장악할 것으로 예상하였다.
소멸하고 냉전이 부활하는 순간이었다.
1981년 레이건 행정부가 등장한 이후 세계는 강대국간 역학관계에 뚜렷
한 변화가 나타나는 과정을 지켜볼 수 있었다. 레이건은 소련을“악의 제국”
(evil empire)으로 간주하고 제3세계의 분규 등 국제환경이 불안정하게 된
원인이 소련에 있다고 규정하며 봉쇄의 수위를 더욱 높였다. 그는 SALT-Ⅱ
를 아예 철회하였으며, 소련에 대한 군사적 우위를 달성하기 위해 카터 행정
부가 이미 증액하여 설정해 놓았던 1981년도 국방예산 5% 인상안을 7%로
재차 상향조정하였다. 그리고 그 동안 보류되어 왔던 B-1 폭격기 개발을 다
시 추진하는 한편, 1983년에는 유럽인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퍼싱-Ⅱ와 지상
발사용 크루즈미사일을 유럽 전역에 배치하기로 결정하였다.3) 또한 전략방
위구상(Strategic Defense Initiative)을 발표하여 소련에 대한 전략적 우위를
달성함과 동시에 치열한 무기경쟁을 강요함으로써 소련의 자원을 고갈시키
려 하였다.
2. 지전략적 균형 변화와 소련의 선택
냉전기류로 미국과 소련간의 데탕트가 얼어붙고 있는 가운데 중소관계 회
복 가능성을 먼저 타진한 측은 소련이었다. 1982년 3월 브레즈네프 서기장
은 우즈베키스탄의 수도인 타슈켄트에서의 연설을 통해 중소 양국이 협상을
통해 관계를 개선해야 한다는 의사를 표명하였고, 이에 덩샤오핑이 전향적
인 태도로 임함으로써 그 해 10월 소련측 특사 일리이체프와 중국측 특사
첸지천간의 제1차 중소협상이 성사될 수 있었다. 불과 몇 개월 전만 해도
노골적 비방과 위협으로 가득했던 양국관계가 새로운 전기를 맞을 수 있었
던 원인, 특히 소련이 중국과 새로운 관계를 모색해야 했던 원인을 분석하면
다음과 같다.
우선 소련은 냉전이 부활하면서 지전략적으로 불리한 입장에 처하게 되었
다. 중국-미국 및 중국-일본 간의 관계개선은 외교적 고립 뿐 아니라 군사안
보적 위협으로도 작용하였다. 소련은 1971년 이후 형성된 중미 데탕트를
1939년 독일과의 비밀조약에 비교될 만큼 정치적으로 중대한 의미를 갖는
10 『국가전략』2006년 제12권 3호
3) 카터행정부는 최초 3%의 국방비 인상을 고려하였다가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후 4%,
그리고 대통령직 사임직전 5%로 상향조정하였다.
사건으로 인식하였으며, 중국과 미국 사이에 소련을 겨냥한 비밀협약이 존
재하지 않을까 우려하고 있었다(Petro and Rubinstein, 1997, 194). 또한 소련-
일본간 추진된 평화조약 협상이 북방도서 반환문제로 결렬된 반면, 1978년
8월 중국과 일본은 중일전쟁 이후 40년 이상 지속된 적대관계를 청산하면
서 소련을 겨냥하여 반패권주의를 표방하는 평화우호조약을 체결하는데 성
공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소련은 1979년 8월 먼데일 미국 부통령의 중국
방문과 1980년 1월 브라운 미 국방장관의 중국방문에 대해 양국이“준 동
맹관계”로 발전하기 위한 수순을 밟는 것으로 분석하였고 장기적으로 미-
중-일 3국이 결탁하여 반소연대를 구축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다(Zagoria,
1980, 66; Choudhury, 1982, 140; Yahuda, 2003, 117).
한편 소련은 군사적 경쟁력을 잃고 차츰 열세한 위치로 전락하고 있었다.
소련은 1972년 베트남전과 1973년 욤 키푸르 전쟁시 사용된 정밀유도무기
의 위력을 실감하고 레이저유도무기, 크루즈미사일, 스텔스 등 미군의 신무
기 기술에 대해 주목하고 있었으며, 앞으로 이러한 첨단무기가 미래 전쟁양
상의 변화를 가져올 것으로 믿고 있었다. 이것은 소련의 군사전략—즉 대규
모의 기갑 및 기계화 부대를 집중적으로 투입하여 NATO군의 전방 방어선
을 뚫고 종심깊이 돌파하는 군사전략—이 이제 NATO군의 정밀유도무기 공
격에 취약해졌음을 의미한다.4) 이러한 상황에서 미국이 추진하는 신형 중거
리 미사일의 유럽 배치, 한반도 미군철수 백지화, 한국 및 일본과의 동맹관
계 강화 등의 조치는 그나마 아프가니스탄 및 중소 국경에 배치된 전력을
유지하는 데에도 버거움을 느끼고 있던 소련에게 커다란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이와 함께 제3세계 국가들에 대한 영향력도 급격히 약화되고 있었다. 레
이건 행정부는 카터가 내걸었던‘인권’이 아니라‘소련 봉쇄’에 동참하는가
의 여부에 따라 원조를 제공함으로써 제3세계 국가들에 대한 영향력을 강
화해 나갔으며, 소련의 점령지역인 아프가니스탄, 앙골라, 에티오피아, 캄보디
아, 니카라과 등의 국가에 반군활동을 지원하여 세계 곳곳에서 소련군을 궁
지에 몰아넣고 있었다(Petro and Rubinstein, 1997, 294-295). 반면 소련은
세계화 시대의 국가 변환 11
4) 소련 군사전문가들은 군사기술혁명(MTR)이 진행되고 있으며 소련의 전략에 결정적 영
향을 줄 것으로 예상하여 미국의 군사 사고의 혁신을 연구하기 시작하였다(Knox and
Murray, 2001).
1979년 아프가니스탄 침공 이후 동남아시아, 아프리카 등을 비롯한 각 지역
의 거의 모든 국가들로부터 지지를 받기 어려웠을 뿐 아니라 1982년 이스
라엘의 레바논 침공시 팔레스타인에 대한 지원을 제공하지 않음으로써 중동
지역에서의 영향력도 약화되고 있었다. 한때 제3세계의 해방자로 추앙받던
소련이 어느덧 제국주의자의 모습으로 비춰지기 시작한 것이다.5)
결국 소련이 중국과의 관계개선을 모색한 원인은 이처럼 불리하게 기울어
가는 지전략적 균형을 보다 유리하게 조성하기 위해서였다. 1983년 3월 모
스크바에서 열린 소련 외무장관 그로미코와 중국 특사인 첸지천 외교부 부
부장간의 제2차 협상에서 그로미코는“패권주의 반대와 위협해소가 바로 양
국이 관계정상화를 실현할 수 있는 중요한 기초가 된다”고 하면서,“ 중국은
미국이 사회주의 소멸정책을 추진하고 있는 것을 보면서 과연 소련과 어떤
관계를 수립해야 하며, 또 미국과는 어떤 관계를 설정해야 하는지에 대한 결
론을 도출할 수 있을 것”이라고 언급한 바 있다(첸지천, 2005, 27). 이것은 미
국의 신냉전 정책 강화로 수세에 몰린 소련이 중국과의 화해를 통해 현상을
타파하고 새로운 역학관계의 변화를 모색하고 있음을 명확히 보여주고 있다.
3. 중국의 선택 : 독자외교를 통한 이익의 극대화
1980년대초 중국은 소련과 달리 훨씬 유연한 입장에 있었다. 미국이 신냉
전을 통해 소련을 봉쇄하고 있었던 반면 중국은 그러한 미국의 보조적 파트
너였기 때문이다. 중국의 입장에서 미국과의 데탕트는 소련의 군사적 위협
에 대응하기 위한 전략적 선택이었으며, 따라서 당장 소련의 위협이 약화된
다면 굳이 중미관계에만 얽매일 것이 아니라 보다 자유롭게 소련과의 관계
개선도 모색할 수 있었다.6)
12 『국가전략』2006년 제12권 3호
5)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은 당시 카불정권의 무기력함으로 인해 혼란이 가중되는 상황
에서 자칫 친서구노선으로 돌아설 가능성이 농후했기 때문에 이루어졌다. 즉 소련은 아프
가니스탄 침공을 통해 영향권을 공고히 하려 하였으나 반대로 부정적 결과만을 가져오게
되었다(Gaddis, 1990, 321-322; Valenta, 1980, 116-117).
6) 물론 중국이 소련과 관계개선을 모색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대미관계에서 얻을 수 있는
경제협력 및 기술적 지원 등의 이익을 포기하면서까지 그렇게 한다는 것은 아니다. 당시
중국은 4대 현대화 건설을 추진하면서 정책 우선순위를 경제적 이익에 두고 있었기 때문
이다.
중국은 소련이 미국과의 경쟁에서 전략적으로 어려움에 처하고 있음을 인
식하기 시작하였다. 소련의 군사력은 전세계에 걸쳐 과도하게 신장되어 있
었을 뿐 아니라 아프가니스탄에서는 군사적 행동을 정치적 이익으로 전환하
는데 실패함으로써 마치 미국의 베트남전 사례와 같이 장기적으로 좌초될
위험에 빠져 있었다. 또한 1979년 중국이 베트남을 침공했을 때 소련은 동
맹인 베트남의 방위를 위한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않았으며, 이제는 미국의
군사력 경쟁 압력에 밀려 수세적 입장으로 전환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
서 중국은 1982년 3월 브레즈네프의 타슈켄트 연설을 다음과 같이 분석하
였다(첸지천, 2005, 14):
소련은 아프가니스탄 침공으로 엄청난 부담을 안게 됐다. 때문에 지구촌 곳곳에서
미국과 벌이는 경쟁에서 힘에 부치게 됐고 부득히 전략조정을 해야 한다. 중국과의
관계 개선은 바로 이 맥락에서 이뤄지는 중대 조치다.
소련의 전략적 입지의 약화는 중국으로 하여금 미국에 대한 의존도를 줄
임과 동시에 소련에 대한 적대적 입장을 완화할 수 있는 전환점이 되었다.
소련과의 관계를 정상화하는데 가장 큰 관심은 중국 국경지역에 대한 소
련의 군사적 압력을 완화하는 것이었다. 소련은 인도차이나, 아프가니스탄,
몽골, 그리고 중소국경 일대에 현대장비로 무장한 군대를 대거 주둔시키고
있었다. 따라서 덩샤오핑은 소련이 자발적으로 제거해야 할‘3대 장애’로
중소국경과 몽골에서 소련군 철수, 아프가니스탄에서 소련군 철수, 그리고
베트남을 설득해 캄보디아에 주둔중인 베트남군이 철수할 것을 제시하였고,
이러한 요구사항은 1989년 양국 정상회담이 성사될 때까지 집요하게 관철
해 나갔다.
1980년대초 레이건 행정부의 대외정책은 중국의 대미인식에 미묘한 변화
를 가져왔으며, 이 역시 중소관계 변화에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 하나는
양국관계를 진단하는 일종의 리트머스 시험지라 할 수 있는 대만문제였다.
카터 행정부는 1979년 대만관계법을 제정하면서도 중국이 필요로 하는 기
술이전 및 무기판매에 대해 융통성 있는 태도를 보임으로써 어느 정도 중국
측의 불만을 제어할 수 있었으나, 레이건 행정부의 경우 대만에 대한 안보공
약 및 무기제공 의사를 노골적으로 표현함으로써 중국의 의구심을 증폭시키
고 있었다(Lijun, 1994, 10-13; 중국인민출판사, 1994, 142). 다른 하나는 미국
세계화 시대의 국가 변환 13
의 강력한‘반공’정책이었다. 레이건은 1982년 6월 영국을 방문한 자리에서
“전 세계의 모든 공산주의를 쓸어 없애야 한다”고 언급함으로써 중미관계에
대한 딜레마를 야기하고 있었다. 중미관계가 반소 및 반패권을 목적으로 이
념을 초월한 연대임에도 불구하고, 미국이 현 국제정세를 색깔로 구분하면
서 동서이념의 대결로 몰아가는 것은 중국에게 커다란 부담이었다. 그것은
마치 미국이 중소간의 모순을 이용하여 일종의 쐐기전략을 추진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으며, 중국은 점차 미국의 봉쇄정책에 동원되어 이용당하고 있
다는 인식이 팽배해지고 있었다(Sheng, 1994, 34-43).
결국 중국은 1982년 9월 제12차 중국 공산당 전국대표대회에서 독자적
인 외교정책으로 나갈 것을 선언하였다. 이것은 소련과의 관계 정상화를 위
한 협상의 기로에서 내린 결론으로써, 한편으로 소련에 대한‘새로운 인
식’—소련의 위협약화—의 결과였으며, 다른 한편으로 미국에 대한‘새로운
인식’—반공정책 강화—의 결과였다. 그리고 이러한 독자노선은 소련 측에
게 관계회복을 바란다는 회심의 손짓이었으며, 동시에 미국 측에게는 중국
의 전략적 중요성을 인식해 달라는 아쉬운 몸짓이었다.7) 이렇게 볼 때, 중국
이 소련과의 관계개선에 나서게 된 원인은 미국과 소련 사이에서 지전략적
균형을 맞추는 것보다는 미소 양국의 대립구조 속에서 부수적으로 얻을 수
있는 이익—한편으로 소련으로부터 얻어낼 수 있는 군사적 위협 감소 및
그에 따른 영향권 회복, 다른 한편으로 미국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기술이
전, 무기판매, 그리고 중국의 전략적 가치를 인정받는 것—을 추구하는 데
있었다.
요약하면, 1980년대초 소련이 중국과 관계개선을 모색한 원인은 불리하게
기울어가는 지전략적 균형을 바로잡기 위해서였으며, 중국은 지전략적 균형
보다는 소련의 군사적 위협을 제거하고 소련이 점령했던 전통적 영향권을
회복하기 위해 관계개선을 모색하였다고 볼 수 있다.
14 『국가전략』2006년 제12권 3호
7) 독자외교정책이 미국과 소련간의 중도를 지향하는 것은 아니다. 1980년대를 통해 중국은
소련보다 미국에 훨씬 더 기울어져 있었다. 다만 과거 친미반소 반패권 경향이 보다 유연
해져 반소의 개념이 거의 사라진 것으로 볼 수 있다.
III. 1990년대 중러관계 발전 : 전략적 동반자관계 형성
1. 탈냉전과 중러관계 : 이념이냐 지정학적 이익이냐?
1990년대 초반 중러관계는 서로 상이한 정체성에서 비롯되는 딜레마에서
출발하게 되었다. 러시아는 자유민주주의 이념에 대한 기대에 부풀어 소련
붕괴와 함께 당면한‘역사적 모순’을 공산주의의 탓으로 치부하였으며, 반대
로 중국은‘역사의 종말’에 이르렀다는 위기감 속에서 앙상한 구조물만 남
은 공산주의의 기본 뼈대를 부여잡고 있었다.
정치적 혼란과 경제적 어려움에 봉착한 러시아는 애초에 친서구적 외교정
책을 추구하였다(Baranovsky, 2000, 447). 서구 국가들이 민주주의와 시장경
제를 지향하는 러시아를 동등한 파트너로서 지지하고 경제적으로 아낌없는
지원을 제공해 줄 것으로 기대하였기 때문이다. 옐친은 1992년 1월 유엔 안
보리 보고에서 러시아와 서방제국은 동반자이자 우방이며, 러시아는 서방의
가치, 인권, 법치 및 높은 도덕을 공유하고 있다고 주장하며 서구 국가들을
절대적으로 필요한 전략적, 정치적, 이념적 동반자로 간주하고 있음을 감추
지 않았다.
그러나 새로운 이념에 대한‘환상’은 오래가지 않았다. 미국과 서구 국가
들은 냉전의 승리에 도취되어 러시아를 민주주의의 파트너로 보기보다는 신
생파트너 내지는 소비에트‘제국’의 후손으로 간주하였다(이바노프, 2003,
22-23). 러시아가 침체에 빠진 경제를 회생시키기 위해 외부의 자본을 필요
로 할 때 서구 국가들은 국제통화기금(International Monetary Fund)의 돈이
러시아 관리들의 개인구좌로 흘러들어간다는 이유로 약속된 자금지원을 중
단하였다. 러시아 탄생 1년도 안되어 정치 및 경제분야에서의 개혁이 혼란
에 빠졌고 서구지원에 대한 기대와 서구이념에 대한 칭송의 분위기는 수그
러들었다(Deng, 2002, 122). 내심 경제적 지원을 기대했던 일본은 이를 북방
도서 반환문제와 연계시키려 하였고 러시아는 이에 좌절감을 느껴 1992년
8월 옐친의 일본방문 계획을 돌연 취소하였다.
주변국가들에 대한 영향력도 크게 약화되어 과거 바르샤바조약기구 회원
국들 및 발트해 국가들은 러시아에 적대적이었으며 신생독립국가들은 러시
세계화 시대의 국가 변환 15
아를 신뢰하지 않고 있었다(Baranovsky, 2005, 449-450). 일각에서는 냉전
말기 중부유럽에서의 소련군 철수, 독일통일의 수용, 신생독립국가들의 소연
방 이탈 허용 등 서구에 일방적으로 너무 많은 것을 양보했다는 비판이 거
세게 일었다. 1993년 12월 러시아 두마 선거는 그간의 친서구 정책에 대한
일종의 평가로서 선거 결과 코지레프와 예고르 가이다르 등 서구파들이 몰
락한 반면 민족주의자들과 공산주의자들이 실권을 장악하였고, 이후 서구
편향적인 정책에서 벗어나 동서 균형정책, 즉 중국과의 관계를 강화해 나가
는 데 기여하게 되었다(Shoumikhin, 2004, 3; Rozman, 1998, 399). 이렇게 볼
때 탈냉전 초기 러시아의 대중관계는 서구 국가들에 대한 실망과 주변국으
로부터의 소외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중국은 일찍이 이념을 초월하여 러시아와 관계를 개선한다는 방침을 세우
고 있었다. 소련이 붕괴한 직후 중국은 특사를 파견하여 러시아의 정치적 선
택을 존중하고 내정에 간섭하지 않을 것이며, 1989년 및 1991년 구소련과
체결한 양국간 국경문제, 경제교역, 과학기술 협력 등에 관한 합의가 유효하
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와 같은 중국의 태도에는 두 가지의 절박한 이유가 있었다. 하나는 러시
아와 선진기술 및 군사분야의 협력을 강화해야 했기 때문이다. 1989년 천안
문사태 이후 미국 및 유럽연합 국가들은 중국에 무기 및 첨단기술의 수출을
통제하고 있어 중국의 경제발전 및 현대화에 커다란 타격을 주고 있었다.8)
다른 하나는 정치적으로 민주화된 러시아가 서구에 편승하거나 미국과 동반
자관계로 가지 않을까 우려하고 있었기 때문이다(Garver, 1998, 116). 이 경
우 중국은 국제적으로 더욱 고립될 것이며 현대화 추진계획 역시 물거품이
될 수 있었다. 그래서 덩샤오핑은 1992년 봄 러시아 및 독립국가연합 국가
들과의 관계를 설정하는 문제에 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첸지천, 2005,
231):
중국이 국가관계를 설정하는 것은 그 사회제도를 보고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 소련
이 어떻게 변하든 우리는 그와 평화공존 5원칙의 기초하에 정치관계를 포함하여 여
러 관계를 발전시켜야지 이데올로기 논쟁을 벌일 필요가 없다.
16 『국가전략』2006년 제12권 3호
8) 천안문 광장 학살에 대한 제재조치로 미국은 중국과의 고위급 회담, 양국간 군사관계, 군
사관련 기술이전, 공식적 재정지원을 중단하였다. 유럽연합(EU)은 무기 금수조치를 취하
여 현재까지 철회하지 않고 있다(Wezeman and Bromley, 2005, 438-442).
결국 1990년대초 중국-러시아 관계는 다른 주요 국가들과의 관계, 즉 중-
미, 중-일, 그리고 러-미, 러-유럽, 러-일관계가 순탄치 않았기 때문에 부득불
시작될 수 있었다(Deng, 2002, 121-125). 러시아가 서구와의 이념적 연대에
점차 실망을 느끼고 돌아서 중국과의 관계개선을 추진하였다면, 중국은 서
구로부터 고립된 상태에서 어쩔 수 없이 러시아와 이념적 장애를 극복하고
현실적 이익을 추구하였다. 중국과 러시아 모두 이념보다 지정학적 이익을
선택한 것이다 옐친은 1992년 12월 중국을 방문하여 장쩌민과 함께 북경선
언을 통해“러-중의 새로운 시대”개막을 선언하였다.
2. 미국의 동맹강화와 영향권의 충돌
1990년대 중반에 이르러 중국과 러시아는 공동으로 지정학적 이익을 강
화해야 할 필요성을 인식해가고 있었다. NATO의 역할강화 및 동진, 그리고
미일동맹의 강화에 따른 일본의 안보범위 확대는 미국의‘패권적’지위를
강화하면서 기존 중국과 러시아의 전통적 영향권과 충돌하고 있었기 때문
이다.
1990년대는 NATO가 탈냉전기의 새로운 질서에 부응하여 거듭나게 되는
시기였다. 러시아는 바르샤바조약기구가 해체되고 유럽내 이념적 군사적 대
립질서가 해소된 상황에서 NATO는 군사동맹기구에서 정치기구로 변화되어
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하였다(고재남, 2005, 525). 만일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최소한 미국의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난 유럽만의 독자적인 기구가 되기를 희
망하였다. 그러나 1991년 코펜하겐에서 16개국 외무장관들은 NATO의 기능
을 강화하는 데 합의하였으며, 1992년에는 이를 바탕으로 그 활동범위를 동
구 및 구소련 지역까지 확대하기로 결정하였다(이호영, 2005, 234-235).
1994년에는 동구권 3개국에 대한 NATO 가입 문제가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하였고, 결국 이러한 과정을 거쳐 NATO는 1999년 코소보 전쟁을 통해
전혀 새로운 모습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회원국이 확대되었고, 군사력은 더
욱 강화되었으며, 무엇보다도 러시아의 바램과 달리 미국의 확고한 통제를
받고 있었다. 미국은‘인도주의적 개입’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유엔안보리의
승인 없이 NATO를 동원하였으며 아무런 제약도 받지 않은 채 조약에 규정
된 영역 밖에서 군사작전을 실시할 수 있었다. 중국과 러시아는 비로소 자신
세계화 시대의 국가 변환 17
들이 초단극의 세계에 와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국제정세 속에서 NATO의 확장은 러시아 안보에 위협으로 다가왔
다. 냉전종식으로 인해 더 이상‘적이 아니라는 것’과 그것이 러시아의‘영
향권 안으로 들어온다는 것’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NATO는 1991년말
소련이 붕괴한지 2주만에 일종의 포럼형태인 북대서양협력회의(North
Atlantic Cooperation Council)를 창설하여 동유럽 및 구소련 국가들을 참여
시키다가 1994년에는 NATO-PFP(Partnership for Peace)를 창설하여 이들의
회원가입을 추진하기 시작하였다(Kramer, 2002, 736).
1990년대 중반 러시아 대외정책의 최우선순위는 이를 저지하는 것이었
다. 당초 러시아는 구소련의 영토 가운데 중동부 유럽의 영토를 자국의 영향
권으로 삼아 이 지역이 러시아의 안보를 위협하는 도약대로 사용되는 것을
방지하고 외부세계와 러시아를 연결하는 교량역할을 하도록 만든다는 구상
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만일 동구유럽 국가들이 NATO에 가입할 경우에
는 반대로 이들 지역이 러시아 안보를 위협하는 전진기지로 사용될 수 있었
다. 러시아는 가입하는 국가의 수도에 핵 미사일을 겨냥하겠다는 군사적 위
협까지 불사하며 NATO의 확장에 강력하게 반대하였다(고재남, 2005, 525-
526). 그러나 밀고 당기는 줄다리기 끝에 NATO는 1999년 정상회담에서 폴
란드, 헝가리, 체코공화국 등 3개국에 대한 회원가입을 결정하였다. 비록 1차
확장은 종결되었으나 이를 계기로 발트해 3국 및 구소련 연방국가 7개국이
회원이 되기 위해 또다시 줄을 서고 있었다.
한편 아시아 지역에서는 미일동맹이 강화되면서 중국의 안보우려를 자극
하고 있었다. 1996년 4월 클린턴과 하시모토는“21세기 미일 안보동맹에
관한 공동선언”을 통해 양국간의 동맹이 일본의 방위 뿐 아니라 아태지역의
평화와 안정에 기여할 것이라고 발표하였다. 이 선언으로 미일동맹의 활동
범위는 기존의 극동아시아 지역에서 아시아-태평양 지역, 즉 동남아시아, 뉴
질랜드, 태평양 도서들까지로 확대되었으며, 따라서 일본은—비록 유사시 후
방에서 미군에 대한 군수지원 임무를 담당한다 하더라도—한반도, 대만, 남
사군도 등 지역적으로 민감한 문제에 개입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두게 되었
다. 중국 외교부는 1996년 4월 18일 성명을 발표하여“태평양에서 러시아
해군력이 감축된 마당에 미일 안보조약은 역사를 거꾸로 거슬러 가고 있다”
고 비난하였으며, 특히 일본에 대해서는 향후 군사력 증강에 열을 올리지 않
18 『국가전략』2006년 제12권 3호
도록 경고하였다(Tyler, 1996).
1995-1996년 대만해협 위기는 중국으로 하여금 미국과 일본의 군사적 위
협을 재평가하도록 하는 전환점이 되었다. 이전까지 중국은 동아시아에서
미군의 주둔이 일본의 군사대국화를 방지함으로써 지역내 안정과 평화를 유
지하는데 일종의 균형자 역할을 하는 것으로 평가하고 있었다. 그러나 1995
년 6월 리덩후이의 코넬대학교 방문에서 비롯된 대만위기는 1996년 3월 미
국 항모 인디펜던스호와 니미츠호의 개입을 야기함으로써 역내 주둔하는 미
군과의 군사적 충돌 가능성을 새삼 깨닫게 해 주었다. 중국 지도부는 대만
위기 이전에 가졌던 미군에 대한 긍정적 평가를 유보해야 했으며, 동아시아
에서 미국이 주도하는 안보동맹이 중국을 겨냥하게 되는 최악의 상황을 가
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Deng, 2001, 353). 특히 인디펜던스호의 기항지
가 일본이었다는 사실은 유사시 일본과의 군사적 충돌 가능성에 대해서도
경각심을 일깨워주고 있었다(Godwin, 1998, 176). 미일동맹의 역할 범위가
아태지역 전체로 확대되는 상황에서 대만 및 남중국해에 대한 영향권을 강
화해야 할 필요성이 어느 때보다도 대두되고 있었다.
3. 중러의 전략적 동반자관계 발전
1996년 4월 장쩌민과 옐친은 베이징에서 정상회담을 갖고 양국간 전략적
동반자관계를 체결하였다. 이 회담은 시기적으로 대만해협 위기가 발생한
직후에 이루어진 것으로 중국과 미국의 관계가 아무리 악화되더라고 중러관
계는 정상적으로 이루어질 것임을 의미하고 있으며, 또한 여러 악재를 무릅
쓰고 전략적 동반자관계를 구축함으로써 지정학적 협력을 강화하는 새로운
장을 열었다는데 더 큰 의미가 있다.
중국과 러시아가 전략적 동반자관계를 맺은 것은 궁극적으로 다극적 국제
질서를 창출하기 위한 선택이었다(Cheng, 2004, 484). 다극화 개념은 1997년
4월 러시아 외무장관 프리마코프에 의해 공식 제시된 것으로 냉전기 양극
에 의한 전략적 균형을 대체하는 다극질서를 창출하되 만일 러시아가 미국
에 대해 균형을 이룰 수 없다면 중국, 유엔, 이슬람 세계, 경우에 따라서는
서구유럽의 도움을 받아 미국의 행동을 제한해야 한다는 개념이다(Lo,
2003, 77). 1996년 4월 옐친은 양국의 전략적 동반자관계의 목적이“다극세
세계화 시대의 국가 변환 19
계의 출현을 촉진하고 한 국가에 의한 패권추구를 반대하기 위한 것”임을
공식적으로 언급하였으며(Rozman, 1998, 400), 1998년 11월 양국정상은 모
스크바에서“21세기에 즈음한 중러관계”라는 공동성명을 발표하여 NATO의
확대와 미일동맹 강화에 반대하며 국제질서의 다극화가 평등하고 민주적인
신국제질서를 형성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다극질서 구축노력을 통해 중국과 러시아는 지정학적 이익을 공유
할 수 있었다. 1995년 6월 리펑 총리의 모스크바 방문, 1996년 4월 정상회
담, 그리고 1998년 11월 정상회담 등을 비롯한 양국 수뇌부의 회동시 러시
아는 대만을 중국영토에서 떼어낼 수 없는 한 부분이라고 언급하여‘하나의
중국’원칙을 지지하였고, 중국은 체첸 분리주의자들에 대한 진압의 정당성
과 러시아의 아태경제협력(Asia-Pacific Economic Cooperation) 및 세계무역기
구(World Ttrade Organization) 가입의 당위성을 적극 표명하였다(최태강,
2005, 67). 양국은 유엔안보리 상임이사국이면서 전략핵무기를 보유한 군사
강국이고, 또한 국제문제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전통적 강대국으로서
서로 공동보조를 통해‘팍스 아메리카나’(Pax-Americana)를 추구하는 미국
의 일방적 행보를 견제하는 한편, 핵심적 이익이 걸려있는 민감한 사안에 대
해 대내외적으로 각자의 입지를 강화할 수 있었다.
이 시기에 강화된 중국과 러시아의 군사분야 협력은 NATO 및 미일동맹
강화에서 비롯된 양국의 위기의식을 반영하고 있다. 물론 양국의 군사협력
은 기본적으로 중국의 군사력 현대화 추진과 러시아의 군수산업 활성화라는
서로의 이익이 맞아 떨어진 호혜적 산물임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중국과
러시아의 군사협력이 전략적 동반자관계 체결을 전후하여 더욱 강화되었다
는 점을 고려한다면 러시아의 무기판매 및 군사기술 협력은 경제적 가치 이
상으로 전략적 의미를 갖는다고 볼 수 있다. 중국은 대만이 보유한 F-16과
Mirage-2000에 필적하기 위해 1997년 러시아로부터 72대의 SU-27과 함께
SU-27을 제조할 수 있는 기술 및 라이센스를 러시아로부터 구입하기로 하
였다. 또한 1996년과 1997년에는 대만 해상봉쇄에 필요한 소브레메니급 구
축함을 각각 1대씩 구입하기로 하는 등 첨단무기의 구매 및 기술이전에 대
해서도 합의가 이루어졌다(Hua, 1997, 33). 군사기술 분야에서의 협력도 활
발하게 이루어져 홍콩신문에 의하면 2000년 중국기업에 고용된 러시아 무
기전문가들은 1,500명에 이르며 그 가운데 수백명이 중국에 미사일 기술을
20 『국가전략』2006년 제12권 3호
전수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Weitz, 2003, 41-42; Cheng, 2004, 492).
한편으로 NATO의 회원국 확대를 통한 동구권 진출과 일본의 안보역할
범위의 확대는 중국과 러시아의 전통적 영향권을 침식하면서 안보위협 요인
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그러나 중러 양국은 그들의 영향권을 강화해야 한다
는 인식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실제 대응은 그다지 적극적이지 못하여 대
부분 성명과 같은 선언적 수준에 머물고 있었다. 러시아는 동구권 국가들의
NATO 가입문제에 대해 NATO-PFP에 참여하여 대화를 통해 해결하려 하였
으며, 중국의 경우에는 외교적 수사를 동원하여 미일동맹을 견제하는 한편,
‘조용히’군사력 현대화를 추진해 나가고 있었다. 미국 및 서구와의 관계를
경색시키면서까지 구체적인 대응책을 강구하고 실천하기에는 역부족이었기
때문이다. 다만 1996년 결성된‘상하이 5개국’은 관련국간의 국경문제를 해
결하고 이 지역의 안정을 도모할 목적에서 출범하였으나, 상대적으로 다른
지역에 비해 중러 양국의 영향력을 공고히 하는 결과를 가져다 주었다.
결국 1990년대 중국과 러시아의 전략적 동반자관계는 궁극적으로 미국이
주도하는 동맹체제의 강화에 따라 유라시아의 지전략적 균형이 불리해지는
것을 막기 위한 연대였으며, 부차적으로는 NATO의 동진 및 일본의 안보역
할 확대를 견제함으로써 영향권을 수호하려는 공동보조였음을 알 수 있다.
IV. 21세기 지정학 변화와 중러관계의 심화 :
準동맹으로?
1. 21세기 전략적 균형과 영향권의 문제
21세기로 넘어오면서 유라시아 지정학에는 급격한 변화가 일어났다. 불과
5년도 안되는 시기에 미국의 미사일 방어(Missile Defense), 테러와의 전쟁에
따른 미국의 군사동맹 강화 및 군사적 영향력 확대, 두 번째의 NATO 확장,
그리고 일본의 안보활동 확대 등은 지전략적 균형의 변화와 함께 영향권에
커다란 지각변동을 일으키기에 충분하였다.
2001년 12월 부시는 미사일 방어계획을 추진하기 위해 탄도탄요격미사일
세계화 시대의 국가 변환 21
제한조약(Anti-Ballistic Missile)을 탈퇴한다고 선언하였다. 그리고 2003년말
일본은 미국과 지상 및 해상 미사일 방어체계를 공동으로 개발하기 위해 우
선적으로 10억 달러를 투자한다고 발표하였다. 미사일 방어는 불량국가 또
는 테러집단의 대량살상무기 사용 위협을 무력화하기 위한 선택이지만 결국
에는 러시아 및 중국과의 전략적 균형을 와해하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다
만 러시아의 경우에는 다량의 핵탄두 및 운반체계를 보유하고 있어 미국의
미사일 방어체계가 완성된다고 해도 어느 정도 억지력을 보유할 것으로 예
상되지만 중국의 경우는 다르다. 현재 보유한 20-30기 정도의 대륙간탄도미
사일로는 미국은 물론, 일본 등 주변국에 대한 전략적 우위를 상실할 것이
며, 만일 해상 미사일 방어체계가 대만에 제공될 경우 대만에 대한 억지력
약화로 이어질 수 있을 것이다(Gill, 2004, 227; Godwin, 2003, 37).9)
9·11 사건 이후 미국은 아시아 지역의 5개 동맹국—일본, 한국, 호주, 필
리핀, 태국—과의 관계를 강화하고 있다. 미일동맹과 한미동맹은 미국의 군
사변환(transformation)에 발맞춰 그 역할과 기능을 재설정하고 미군기지를
재배치하여 보다 강하고 효율적인 구조로 재편되고 있다. 호주는 일본과 함
께 대량살상무기 확산방지구상(Proliferation Security Initiative)에 적극 참여
하고 있으며 장차 미군의 군사력 투사를 위한 기지를 제공하게 될 것이다.
이와 함께 미국은 동남아시아 지역의 전략적 가치를 재평가하여 필리핀과
태국에 비나토 동맹국 지위를 부여하고 군사원조를 제공하는 한편, 필리핀
에는 테러조직인 아부사야프(Abu Sayyaf)에 대한 군사작전을 지원하기 위해
650명의 병력을 지원하였다(Park, 2004, 43-45).
테러와의 전쟁은 미국으로 하여금 기존의 동맹국들 뿐 아니라 유라시아
전 지역에 군사적 영향력을 강화하는 기회를 제공하였다. 동남아시아에서
미국은 2002년 가장 큰 이슬람 국가인 인도네시아에 대해 군사장비 금수조
치를 철회하고 군사원조를 제공하기 시작하였으며, 말레이시아와는 테러와
관련된 정보를 공유하는 등 반테러 협력을 강화해 나가고 있다. 서남아시아
에서는 파키스탄과 관계를 개선함으로써 아프간 전쟁 기간 파키스탄 영공을
통해 군사작전을 실시하였고 아프가니스탄과의 접경지역에 1,300명의 병력
22 『국가전략』2006년 제12권 3호
9) 미국이 PAC-Ⅲ와 같은 종말단계 요격기 100기를 배치할 경우 중국이 보유하고 있는
ICBM 20기에 해당하는 억제력을 무력화시킬 수 있다(Godwin, 2003, 37).
을 주둔시켰다. 또한 미국은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 조지아 등을 비롯한
중앙아시아 8개국과 관계를 강화하여, 아프간 작전시 우즈베키스탄의 하나
바드 공군기지에 1,000명, 키르기즈스탄의 마나스 기지에 1,200명의 미군을
주둔시킬 수 있었다(Chung, 2003, 62). 이 지역은 석유자원이 풍부한 지경학
적 요충지이면서 러시아 및 중국의 안보를 위협할 수 있는 지전략적 요충지
이다. 중국과 러시아는 테러와의 전쟁을 지원하기 위해 서구의 군사력이 파
키스탄 및 중앙아시아 여러 국가에 주둔하는 것을 용인하였으나, 결과적으
로 미국은 유라시아 전역에서 군사적 영향력을 강화함으로써 상대적으로 중
국과 러시아의 전통적 영향권을 침식하게 되었다.
NATO는 1999년 폴란드, 헝가리, 체코공화국에 이어 2004년에는 발트해
연안 3개국—라트비아, 리투아니아, 에스토니아—을 포함하여 루마니아, 불가
리아, 슬로바키아, 슬로베니아 총 7개국의 회원가입을 승인함으로써 두 번째
확장을 마쳤다. 미국은 1990년대 후반까지 발트해 3국이 준비가 덜되었다는
이유로 NATO 가입을 반대하였으나 2001년 6월 부시의 바르샤바대학 연설
을 통해 발트해 국가들을 포함한 유럽의 모든 민주국가들이 NATO에 참여
할 수 있다고 함으로써 기존 입장을 번복하였다(Kramer, 2002, 740-741;
Hillen and Noonan, 1998, 32). 이에 대해 러시아는 이들의 NATO 가입이 기
정사실화 되어 더 이상 막을 수 없으며, 굳이 서구와의 관계를 악화시키면서
까지 무리하게 반대할 필요는 없다고 보았다. 러시아 외무장관 이바노프는
2002년 7월 NATO 확장에 대해 유감을 표명하면서도 그것은 동맹의“내부
문제”라고 하였으며, 이후 리투아니아 방문시에는 각국의 주권에 관계된 문
제라고 언급하여 달라진 입장을 확인해 주었다. NATO는 이제 크로아티아,
알바니아, 마케도니아 등 희망 국가에 대해 세 번째 확장을 고려하고 있으며
러시아의 영향권은 계속해서 침식당할 것으로 예상된다.
2. 선린우호협력 조약과 중러관계의 심화
21세기에 접어들면서 중국과 러시아의 대외정책은 적어도 외형상으로는
‘협력적’으로 바뀌었다. 러시아는 코소보 전쟁을 지켜보면서 1990년대 프리
마코프의 다극화 정책이 한계에 부딪혔으며 적어도 당장 미국과의 대립은
무모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중국도 다극적 국제체제의 출현은 단기간내
세계화 시대의 국가 변환 23
불가능하며 미국을 적대화하는 정책은 아무런 이득이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
였다(Roy, 2003, 61). 세력균형을 이루기 위해서는 강력한 파트너가 필요한
데 양국 모두 이를 충족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의 탄도탄요격미사
일제한조약 탈퇴 용인, 서남아시아 및 중앙아시아 지역에 미군 주둔 허용,
NATO 확장에 대한 유연한 입장, 그리고 지속적인 대미관계 개선 노력 등은
양국이‘냉전적 균형’에서‘협력적 균형’으로 대외정책 방향을 전환하고 있
음을 보여주고 있다(Lo, 2003, 76-84; Sutter, 2003-04, 77, 88).
그러나 한편으로 중국과 러시아의 전략적 동반자관계는 2001년 7월 체결
한“선린우호협력조약”을 통해 그 어느 때보다도 심화되어 가고 있다. 1950
년 중소조약과 비견되는 신조약은 비록 동맹을 표방한다거나 상호 방위공약
을 포함하고 있지는 않지만 다음 두 개의 조항에서 전형적인 동맹의 성격을
엿볼 수 있다. 제4조는“하나의 중국 및 대만독립 반대 입장”을 명기함으로
써 중국의 대만정책에 대한 확고한 지지를 표명하고 있으며, 제9조에는“양
측은 두 나라중 어느 일방의 평화 또는 안보이익이 위협이나 침해를 받고
있다고 인지할 경우 이들 위협을 제거하기 위해 즉각 접촉하여 협의한다”고
명기함으로써 군사동맹 수준의 결속은 아니더라도 유사시 안보위협에 대한
공동대응 방침을 명확히 제시하고 있다(Wishnick, 2001, 803; 서동주, 2002,
64-66).
중국과 러시아는 미국과 일본이 공동으로 추진하는 미사일 방어에 대처하
기 위해 군사적 협력을 강화해 나가고 있다. 러시아는 미국의 미사일 방어체
계를 무력화하기 위해 START-Ⅱ에 의해 단탄두만를 장착하도록 합의된
Topol-M(SS-27)에 다탄두를 장착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미사일 성능을 개량
하고 있다. 중국 역시 러시아의 기술지원 하에 DF-21/31에 다탄두를 장착하
여 발사실험을 갖고 북아메리카 전역을 타격할 수 있는 DF-41을 개발하는
등 핵전력의 현대화에 주력하고 있다(Pillsbury, 2001, 20-24; Kile and
Kristensen, 2005, 592-593).
또한 양국은 미사일 방어체계의 취약점을 공격할 수 있는 반위성(Anti-
Satellite) 무기를 개발하기 위해 기술협력을 도모하고 있다. 미사일 방어와
같이 우주에 배치하는 무기체계는 기술 및 비용면에서 부담이 커 극히 일부
국가들만이 구비할 수 있는 반면, 이를 파괴할 수 있는 반위성 무기체계는
개발이 훨씬 용이하다(Pike, 2003, 435). 필스베리에 의하면 중국은 적 위성
24 『국가전략』2006년 제12권 3호
의 약점을 집중적으로 공략하는‘살수검’(殺手劍, killer weapon) 개발에 박차
를 가하여 적 위성 가까이에서 자폭하여 공격하는‘기생위성’또는 우주에
서 레이저 빔을 발사하여 위성에 부착된 광학장비를 파괴하는‘고출력 레이
저무기’등 새로운 무기체계를 고안하고 있다(Pillsbury, 2001, 8-9; Johnson-
Freese, 2003, 66).
21세기 유라시아의 지전략적 균형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해 볼 때 중국과
러시아의 군사협력은 단순한 경제적 이해관계를 초월하여 전략적으로 매우
큰 의미를 갖는다. 러시아는 중국에 무기를 판매하면서 단순히 완제품을 제
공하거나 라이센스 생산을 허용하는데 그치지 않고 새로운 무기체계의 설계
에서부터 시작하여 공정과정에 이르기까지 포괄적으로 첨단기술을 전수해
주고 있다(Shlyndov, 2005, 3). 양국은 공중조기경보기(Airborne Warning and
Control System) 합작생산 프로그램 및 공중 무기체계 개발 등의 분야에서
협력하고 있으며, 러시아는 중국이 참여하고 있는 유럽의 갈릴레오
(GALILEO) 위성항법체계 구축과 관계없이 러시아가 보유하게 될 보다 정
확한 글로나스(GLONASS) 체계를 제공할 수도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러시
아의 무기판매 및 군사기술 이전 덕분에 중국은 첨단기술이 요구되는 항공
분야에서 괄목할만한 비약을 이루어 기존의 제2세대 무기체계에서 제4세대
또는 4세대 이후의 무기체계로 도약하고 있다. 중국인민해방군은 단기간내
에 미국과 견줄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동아시아에서는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최상의 군사력으로 등장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10)
상하이협력기구(Shanghai Cooperation Organization)는 2001년 6월‘상하이
5개국’에 우즈베키스탄이 합류하여 창설된 기구로 이전과 마찬가지로 테러
리즘, 종교적 근본주의, 인종적 분리주의 등의 문제에 대처하면서 동시에 이
지역에서 강화되고 있는 미국의 군사적 영향력을 견제하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2001년 7월 타지키스탄 수도 두산베에서 각국 정상들은 탄도탄요격미
사일제한조약에 대한 중국과 러시아의 입장을 두둔하면서 미국의 미사일방
어 추진계획에 반대하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2002년 1월 베이징 외무장관
세계화 시대의 국가 변환 25
10) 2000-2004년 5년 동안 러시아의 무기판매액은 270억 달러로 미국의 260억 달러를 제
치고 최대의 무기수출국으로 등장하였다. 러시아가 중국에 판매한 규모는 약 111억 달
러로 총 수출액의 41%를 차지하며, 중국은 총 117억 달러의 무기를 수입하였고 이 가
운데 약 95%를 러시아로부터 들여왔다(Wezeman and Bromley, 2005, 417, 420-421).
회담에서는 테러와의 전쟁을 수행하는데 미국이 아닌 유엔의 지도적 역할을
강조하였고, 2005년 7월 카자흐스탄의 수도 아스타나에서 개최된 정상회담
에서는 미군의 우즈베키스탄 주둔의 필요성에 의문을 제기하고 철수시한을
요구하는 등 중러의 지정학적 이익을 대변해 오고 있다(Bakshi, 2002, 266-
273). 현재 상하이협력기구의 지정학적 범위는 유라시아 대륙 영토의 60%,
인구의 25%를 차지하며, 여기에 인도 및 파키스탄 등의 국가들이 회원국으
로 가입할 경우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기구로 등장하여 미국과 경쟁할 수도
있을 것이다(Baryshnikov, 2005, 162).
요약하면 21세기 중국과 러시아는 2001년 신조약 체결, 미사일 방어체계
무력화를 위한 군사협력, 군사력 증강 및 군사적 영향력 확대, 그리고 상하
이협력기구 강화 등을 통해 불리한 지전략적 균형을 만회하고 영향권을 강
화하기 위해 긴밀히 협력하고 있다.
V. 결론 : 전망과 동북아 지역에 미치는 영향
이상의 논의에서 유라시아 지정학 변화는 중러관계를 지배하는 결정적인
요인임을 알 수 있다. 표 1은 중러관계의 지정학적 이익이 시기별로 어떻게
변화해 왔는지 보여준다. 1980년대초 소련은 미국의 신냉전 정책에 대응하
여 불리한 지전략적 균형을 회복하기 위해 중국과 관계개선을 모색하였으
며, 반면에 중국은 지전략적 균형보다는 소련의 군사적 위협을 제거하여 인
도차이나 및 주변에 대한 영향력을 회복하는데 관심이 있었다. 1990년대 중
국과 러시아는 전략적 동반자관계를 체결하여 국제질서를 다극화하고‘지전
략적 균형’을 유리하게 조성하려 하였으며, 제한적이나마 주변 국가들에 대
한 영향력을 강화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21세기 중러관계는 테러와의 전쟁
으로 미국의 동맹이 강화되고 영향력이 증대되는 상황에서‘지전략적 균형’
뿐 아니라‘영향권’을 확보하기 위해 정치, 외교, 군사, 경제 등 모든 면에서
그 어느 때보다 협력을 강화해 나가고 있다.
26 『국가전략』2006년 제12권 3호
표 1 : 1980년대 이후 중국과 러시아의 지정학적 이익 변화
구 분
1980년대 1990년대 2000년대
지전략 균형 영향권 확보 지전략 균형 영향권 확보 지전략 균형 영향권 확보
중국 × △ ○ △ ○ ○
러시아(소련) ○ × ○ △ ○ ○
중-러관계 △ × ○ △ ○ ○
이렇게 볼 때 중러관계는 1980년대부터 지정학적 상황이 불리하게 전개
됨에 따라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 더욱 밀착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 이 사실
로부터 향후 중러관계를 다음과 같이 전망해 볼 수 있다. 첫째, 미래의 중러
관계도 이처럼 유라시아의 지정학 변화에 의해 결정적인 영향을 받게 될 것
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다룬‘지전략적 균형’과‘영향권’의 문제는 앞으로도
유라시아 지정학의 구획과 색깔을 결정하는 중요한 변수로 작용할 것이다.
둘째, 현재의 지정학적 구도가 미국-NATO-일본의 한 축과 중국-러시아의 다
른 축으로 분리되고 있는 상황에서 미국의 동맹이 강화되는 한 중러관계 역
시 더욱 심화될 것이다. 중단기적으로 유라시아 지정학을 구성하는 행위자
들이 제한되어 있는 만큼 현 구도하에서 획기적인 변화가 일어나기는 어려
우며, 따라서 중러관계는 급격한 진로의 변화가 없는 가운데 지속적으로 발
전해 나갈 것이다.
물론 중국과 러시아 사이에는 그들의 관계 발전을 저해하는 몇 가지 제한
요소가 존재한다. 첫째, 러시아내 일부 극단적 민족주의자들은 중국을‘잠재
적 위협’으로 보고 있으며, 친서구주의자들은‘독재 국가’로 간주하여 의심
의 눈초리로 지켜보고 있다. 둘째, 중러관계가 정상회담 등을 통해‘위로부
터 아래로’(top down) 발전하다 보니 양국 국민간에는 정서, 가치, 문화의 차
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있으며, 특히 러시아 국민들 사이에는 아직도‘황색공
포’(yellow peril)와 같은 편견이 존재한다. 셋째, 중국과 러시아의 협력에는
엄연한 한계가 있어 서로 전략적 동반자관계를 수립하고서도 러시아는 정치
및 경제적으로 유럽 및 EU와, 중국은 경제적으로 미국 및 일본과 긴밀한 관
계를 유지하고 있다(Garnett, 2001, 52). 넷째, 가장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는
군사분야에서의 협력에도 제한요소는 있다. 시간이 갈수록 러시아 기술수준
이 점차 서구에 뒤떨어지고 있으며 따라서 금수조치가 해제될 경우 중국은
세계화 시대의 국가 변환 27
러시아보다 서구의 무기를 더 선호할 수 있다(Wezeman and Bromley, 2005,
440-441).
그러나 이러한 제한사항들은 현재 중러관계의 기반을 흔들 만한 근본적인
요인이라기보다는 양국이 이미 조율을 해 나가고 있거나 앞으로 충분히 극
복 가능한 부차적인 문제들로 보여진다. 예를 들어 EU가 중국에 대한 무기
금수조치를 철회하더라도 중러 군사협력 및 전략적 동반자관계에 미치는 영
향은 미미할 것이다. 서구 국가들은 당연히 중국에 대한 무기판매에 열을 올
리겠지만 민감한 기술을 이전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오히려 러시아보다 더욱
자제할 가능성이 크다. 설사 서구 국가들이 서로 경쟁하는 과정에서 민감한
기술을 중국에 제공하려 한다 하더라도 미국이 나서서 이를 제지하게 될 것
이다. 이미 소브레메니급 구축함과 킬로급 잠수함을 비롯하여 러시아의 주
요 무기체계를 도입한 중국으로서는—더구나 이미 미국의 견제의도를 명확
히 인식하고 있는 상태에서—기존의 플랫폼을 급격하게 변경하기 어려울 것
이며, 러시아의 군사기술에 지속적으로 의존해야 할 것이다.
중러관계가 그 어느 때보다 견고하고 앞으로 더욱 강화될 것이라는 전망
은 동북아 지역의 안보에 어떠한 영향을 미칠 것인가?
첫째, 중국과 러시아는 동북아 지역 문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영향력
및 발언권을 강화하고 독자성을 강화해 나갈 것이다. 예를 들어, 2005년 8월
산동반도 인근에서 실시된 중러간 최초의 연합훈련인 ‘평화의 사명
2005(Peace Mission 2005)’는 일본에 대해 중국의 해상영토 방어능력을 과
시하는 한편, 11월 푸틴의 일본 방문을 앞둔 상황에서 일본의 석유 파이프
라인 투자에 연연해하지 않으며 북방도서 문제에 양보할 수 없다는 메시지
로 해석할 수 있다.11) 특히 이 훈련은 불특정 국가의“평화유지”요청에 의
해 군사적으로 개입하는 상황을 상정한 가운데 한반도와 인접한 블라디보스
톡 및 산동반도 지역에서 실시함으로써—비록 주요 훈련동기는 대만 유사
및 테러분쟁에 대비하는 것이라 하더라도—유사시 한반도에서 북한의 내부
붕괴나 미국의 군사적 행동이 이루어질 경우 좌시하지 않고 군사적으로 개
입할 수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Jane’s, 2005). 한편, 2006년 5월 미국 체니
28 『국가전략』2006년 제12권 3호
11) 실제로 러일 정상회담에서 푸틴은 북방도서에 대해서는 논의 자체를 회피하였으며, 송
유관 문제 역시 중러 접경까지 1차로 건설한 후 태평양노선은 추후 건설하는 2단계방
안을 고수하였고 이는 실제로 2005년말 그대로 결정되었다(Wishnick, 2006, 76).
부통령이 러시아에 대해 자원을 무기화하여 우크라이나 등 주변국을 위협하
고 비민주적 행동을 일삼는다고 비난하자, 푸틴은 대국민 연설을 통해 미국
을“듣지는 않고 먹기만 하는 탐욕에 가득찬 늑대”로 비유하고“군비경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며 강하게 대응함으로써 일부 서구언론은 이를“냉전”
의 선언으로 보도하기도 하였다(Timoshik, 2006). 이처럼 전에 없이 확고하
고 강경한 태도는 비록 일시적이고 지엽적인 현상일 수 있으나 궁극적으로
중러관계의 심화에 따라 형성된 나름대로의 자신감을 기저에 깔고 있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둘째, 양국간 군현대화 및 군사기술 분야에서의 협력은 역내 국가들간의
전략무기 개발 경쟁을 가속화 할 것이다. 중국은 최근 군사력을 급속히 현대
화하고 있으며 여기에는 해군과 공군의 최첨단 무기체계 뿐 아니라 제2포
병이 보유한 전략무기도 포함되어 있다. 러시아는 탈냉전기 처음으로 태평
양함대에 보레이급 신형 전략핵잠수함(SSBN)—미사일방어체계를 뚫을 수
있는 불라바 SLBM을 탑재할 것으로 전망됨—1척을 2006년까지 배치하기
로 하였다(국방일보, 2006년 5월 29일). 중국과 러시아의 군사 및 기술분야
협력은 반드시 미국과 일본이 공동으로 추진하고 있는 미사일 방어체계를
무력화하는데 중점을 둘 것이며, 아직 표면화되지는 않고 있지만 미사일 방
어체계가 배치될 것으로 예상되는 2010년대 초반에 이르러 본격적인 경쟁
이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셋째, 중국-러시아 영향권과 미국-일본 영향권의 충돌은 동북아 지역안정
을 저해하는 요인으로 작용할 것이다. 중국은 러시아와의 연대를 통해 북쪽
의 국경과 중앙아시아 지역의 안정을 도모함으로써 동남쪽, 특히 대만, 한반
도, 남사군도 등의 문제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으며, 최근 중국 해군의 군사
력 현대화 동향은 이러한 동남쪽을 중시하는 전략개념에 따른 것으로 보인
다(예쯔청, 2005, 510-511). 러시아는‘평화의 사명 2005’훈련에서 모스크
바 공정사단 일부를 극동지역으로 기동시켜 훈련에 참가토록 하는 등 동북
아 지역에서의 군사적 영향력을 다시 강화하고 있다. 이러한 중국과 러시아
의 영향권 강화 노력은 미일동맹의 활동영역 확대와 함께 두 영향권이 충돌
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됨으로써 한반도 문제, 역내 영유권 분쟁, 일본의 유
엔안보리 진출, 미사일 방어 등의 현안을 둘러싸고 긴장이 고조될 수 있다.
넷째, 중국의 영향력 및 독자성 강화—앞의‘첫째’요소에서 언급한대로—
세계화 시대의 국가 변환 29
는 한반도 문제와 관련하여 부정적 영향을 미칠 것이다. 중국의 우선순위는
북한 핵문제를 해결하는 것보다 북한 정권의 생존에 있다. 그리고 보다 장기
적인 관점에서는 북한의 체제를‘유리하게’변화시키는데 있다(Shambaugh,
2003, 44-45). 중국의 6자회담 목표는 첫째로 국제적 권위, 신용, 그리고 영
향력을 확보하는 것이며, 둘째로 북한의 생존 및 변화를 위해 보다 나은 조
건—가령 리비아보다—에서 협상을 타결 짓는데 있다. 만일 두 번째 목표가
충족될 수 없다면 회담은 얼마든지 지연되어도 무방할 것이다. 식량 및 유류
지원을 통해 북한은 버틸 수 있으며, 시간이 갈수록 더 많은 것을 얻는 쪽은
중국일 것이기 때문이다. 중러관계를 토대로 입지가 강화될수록 중국은 북
한과 함께 요구조건을 보다 까다롭게 할 것이며, 이는 6자회담을 통한 핵문
제 해결을 더욱 어렵게 할 것이다.
많은 학자들이 현재의 중러관계를 국제정치에서 변화하는 세력균형에 대
한 반작용으로 규정하고, 이러한 관계는 군사 및 정치적으로 긴밀한 동맹이
라기보다는 자결, 독자적 영향력, 협상력 등을 제고하기 위한 것으로 본다. 그
러나 이 연구에 의하면 중러관계는 공동의 지정학적 이익을 추구하기 위한
것으로‘편의상의 연대’를 넘어서‘준동맹’의 성격을 갖는다고 볼 수 있다.
오히려 중러관계는 서구와 정치적, 경제적 협력의 필요성으로 인해 제한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으며, 향후 정치 및 경제적 측면에서 중국과 러시아의
독자성이 더욱 강화된다면 동맹관계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30 『국가전략』2006년 제12권 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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