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 4월21일 아침, 필자는 전라남도 남단의 섬 소록도에 가기 위해 9시35분에 출발하는 서울발 여수행 특급열차에 몸을 실었다. 오후 2시25분에 순천역에 도착했으나 때마침 비.
역 앞에서 순천 버스 터미널까지는 택시를 이용한다. 지난 번(3월21일) 소록도를 찾았을 때는 부산에서 여수까지 고속버스를 이용하여 순천을 경유했으나(20분 간격으로 순천 경유 녹동행 버스가 운행되고 있다), 이번에는 서울에서 기차로 순천까지 내려와 시외버스로 녹동을 향했다.
전라남도의 아름다운 풍경을 버스 차창을 통해 바라보면서 2시간 반, 종점인 녹동에서 하차한다. 버스정류장 앞에서 손님을 기다리던 택시를 타고, 소록도와 마주보고 있는 녹동 선비치 호텔로 향한다. 호텔을 경영하고 있는 장복조(張福祚)씨는 [소록회]라고 하는 소록도병원 직원들의 OB·OG회의 회장님. 사전에 서울의 유준(柳駿) 의과학(醫科學)연구소 이사장이며, 연세대학교 명예교수인 유준 박사에게 받은 소개장을 장씨에게 건네준다.
최근에 세워진 멋진 호텔의 이층 온돌방으로 안내되었다. 500미터 건너편에 떠있는 고도(孤島)가 여행의 목적지인 소록도이다.
녹동(鹿洞)은 인구 2만을 넘는 항구도시로 올 봄부터는 제주도행 여객선도 정기적으로 취항하게 되었다 한다. 마을 어귀의 언덕에는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침략(壬辰倭亂)에 저항하여 싸운 두 사람의 조상을 모신 사당이 있다. 그 언덕 바로 앞에 떠있는 소록도는 그 이름처럼 소록(작은 사슴)을 생각케 하는 섬으로, 왜 하필이면 여기가 나병의 섬, 한센병환자들의 강제격리의 섬으로 두려움의 대상이 되어왔던가, 일순 불가사의한 마음조차 들었다.
부산, 광주, 대구 3개소의 기독교 나(癩)요양소가, 1909년부터 1913년에 걸쳐 각기 개설되면서 적은 인원수이긴 하나 조선의 한센병환자들이 수용되기 시작했다(광주요양소는 1927년에 여수로 이전). 한편 조선총독부는 [부령 제7호](1916년 2월2일)로, 조선총독 테라우치(寺內正毅)의 이름으로 [명치45년 조선총독부령 제106호]의 조문을 개정하여 [전라남도 소록도]에 도립 자혜의원(慈惠病院)을 설치할 것을 공포({조선총독부 관보}제1065호)하고, 같은 해 7월10일 육군군의였던 아리카와(蟻川享)를 원장으로 취임시킨다. 그 이후, 29년간 5대에 걸쳐 일본인 의사가 원장으로 임명되면서, 소록도는 한센병환자 격리시설의 섬으로서 일본의 식민지 지배가 끝날 때(한국인에게는 해방)까지 계속된다. 일제시대의 조선총독부에 의한 [구라(救癩)사업]의 실체가 무엇이며 [의료]라는 명목 하에 조선인 한센병환자들이 어떠한 지배와 박해를 받아왔는지를 내 눈으로 확인하고 싶다고 일념으로, 3월과 4월, 나는 2번에 걸쳐 한국 전라남도 남단의 고도인 소록도병원을 방문한 것이다.
4월21일 밤은 일제시대부터 소록도 요양소에서 약제사로 근무하고 있었던 장복조(張福祚)씨(79세)와 간호사로 근무했던 박덕엽(朴德葉)씨(70세)가 호텔을 방문해 주어, 두 사람으로부터 당시의 소록도 요양소의 모습을 자세히 들을 수가 있었다. 다음날의 통역도 장복조씨에게 부탁하기로 했다.
녹동에서 소록도로
다음날인 22일에는 전날 밤부터의 비도 그쳐, 사진촬영에는 절호의 날씨였다. 소록도에 아직도 남아있는 일제시대의 건물과 유적들을 촬영하는 것이 이번 방문의 주요 목적이다. 일본을 출발할 때부터 36장짜리 필름을 30여통 준비하여 조선에 남겨진 일제시대의 상흔을 촬영함으로서 일본이 행한 식민지 지배의 일단(一端)을 명확히 하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필자가 숙박한 호텔로부터 걸어서 5분쯤 걸리는 곳에, 소록도행 페리승선장이 있다. 요금은 편도 300원, 승선시간 10분 정도의 거리에 소록도가 있다. 장씨와 함께 승선했다. 배 안에서 섬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누군가 등을 두들긴다. 뒤돌아보니 전번 소록도를 방문했을 때 [소록도에는 왜 왔는가? 한국에는 언제 입국했으며, 언제 출국하는가? 이름은? 나이는?] 등등, 자세히도 조사하던 소록도 주재 경찰서장님이 웃으면서 서 있다. [한 달쯤 뒤에 다시 올 겁니다]라고 악수까지 하고 헤어진 탓인지, 이번에는 무척이나 정을 낸다.
페리로 섬의 선착장에 도착하니, 국립 소록도병원의 김양빈(金良彬) 의사(醫事)계장이 승용차로 마중을 나와 있었다. 둘째 날의 통역을 부탁한 김춘식(金春植)씨의 얼굴도 보인다. 전전날 서울의 유준(柳駿)박사가 필자의 방문을 소록도의 오대규(吳大奎)병원장에게 전화로 알려둔 탓인지, 이번에는 섬으로 들어가기 위한 일체의 수속도 없이(미리 수속을 해 두었기 때문에) 김양빈 의사계장이 운전하는 승용차로 곧 바로 치료본관까지 갈 수가 있었다.
소록도는 면적이 약 491만㎡로 섬의 동쪽 부분(1/3)은 직원지대가, 서쪽 부분(2/3)은 환자지대가 차지하고 있으며, 원래는 두 지역 사이에 [경계선]이 있었고, 직원지대로부터 환자지대로 가는 길은 하나밖에 없었으며 경계선에는 검문소가 있었다. 경계선에는 철조망이 처져 있었고 무장한 경비원들이 순찰을 돌았다고 한다. 지금은 [검문소] 대신에 [제1안내소]가 있으나 필자를 태운 자동차는 그냥 통과했다. 녹동에서 섬으로의 선착장은 직원지대에 있으며 거기에는 [한센병은 낫는 병입니다. 안심하고 이 섬에서 치료합시다]라고 크게 검은 글자로 쓴 하얀 사각의 탑이 세워진 것이 인상적이었다. 길을 따라 교회당과 우체국의 건물도 보인다.
5층 건물인 백악(白堊)의 치료본관은 토요일인 탓인지 환자들의 모습은 거의 눈에 띄지 않았다. 지난번에 방문했을 때는 20여명에 가까운 환자들이 1층 진찰실 앞의 대합실에서 진찰순서를 기다리고 있었고, 실명한 환자와 휠체어를 탄 노인들이 부첨인들과 함께 진찰실을 방문하고 있었지만, 이번에는 그러한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한국의 한센병환자
1994년 3월에 발행된 국립소록도병원 {1993년 연보}를 참고하여, 한국의 한센병환자 현황을 잠시 살펴보기로 하자. 숫자는 1993년 12월말 현재의 것이다.
{연보}에 의하면 전국의 한센병환자수는 추정 5만명, 등록관리환자는 22,310명이며, 그 중에 [재가(在家)환자]가 11,672명으로 52.3%를 차지한다. 그 내역은 보건소 치료가 전체의 29.2%, 한센병기관 외래치료가 23.1%로 되어 있다.
정착농원이 전국에 97개소 있으며 등록관리환자의 37.7%(7,963명)가 정착농원에서 생활하고 있다. [보호치료자]는 12.0%로 6개소의 민간수용시설에 1,453명(6.5%)이 수용되어 있으며, 소록도병원의 입소자는 1,322명으로 전체 환자의 5.5%에 불과하다.
경기도 수원시 교외에 [대한 나관리협회 나병연구원]이 있으며, 고영훈(高英勳)원장을 올해 들어 2번째로 방문했을 때, 많은 재가환자들이 외래치료환자로서의 진찰을 받고 있었다.
한편, 일본의 한센병 입소자의 경우는 1994년 12월말 현재 13개소의 국립요양소와 2개소의 사립요양원에 입소해 있으며, [보호치료]를 받고 있는 사람의 수가 5,826명으로 한국보다 훨씬 많아 현저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일본의 경우는 환자의 격리를 전제로 한 [나예방법](법률 제214호, 1953년 8월15일 시행)이 거의 사문화되었다고는 하지만, 필자가 소록도를 방문한 당시에도 여전히 존속하고 있었다(1996년 4월1일에 비로소 폐지되었다). 이에 비해 한국의 경우는, 식민지 통치하의 1935년 4월20일, 제령 제4호로 [조선나예방령]이 공포되고, 동년 6월1일에 [조선나예방령]과 [조선총독부령 제62호 조선나예방령 시행규칙]이 동시에 시행되었다. 그 후, 이 [나예방령]은 해방 후에도 한동안 존치되었으나 1954년 2월국회에서 폐기되고, 그 대신에 [전염병예방법]이 제정됨으로서 한센병은 일반법의 규제를 받는 위치를 부여받게 되었다.
더구나 일찍이 1961년부터 [정착농원]사업이 시작되면서 한센병환자, 회복자에 대한 격리주의가 재가(在家)치료로 전환된 것은 한센병환자에 대한 양국 간의 치료와 대응자세의 차이를 단적으로 나타내는 것이다.
이 통계에 의하면 1993년 12월말 현재, 한국의 양성 한센병환자수는 1,103명으로, 양성율은 4.9%, 즉 100명 중 95명 이상은 나균을 가지고 있지 않은 셈이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치료본관 2층의 응접실에서 안(安)의료부장과 김(金)의사계장을 만났다.
필자는 당시 병원에서 편찬 중이던 {소록도병원 80년사}에 도움이 될만한 자료들을 일본에서 수집하여 병원 측에 제공하였고, 그 대신에 소록도에서의 자유로운 사진촬영허가와 편의를 부탁했다. 안 의료부장은 부탁을 기분 좋게 승낙해주었고, 덕택에 사흘 간이나 섬에 체재하면서 700장이나 되는 사진을 자유롭게 찍을 수가 있었다.
[어디부터 돌아보겠습니까?]라는 김 의사계장의 말에, 우선 1916년에 설립된 당시의 [구자혜의원(舊慈惠病院)]의 요양소와 검문소, 그리고 가까운 [남지구 병동]을 방문하기로 했다.
우방협회가 펴낸 {조선의 구라사업과 소록도갱생원}(1967년)에 게재된 [소록도갱생원 전도]라는 1940년대의 소록도를 나타낸 그림지도를 활용하여 조사키로 했다.
구(舊)자혜의원의 시설로는 섬 서쪽 고지에 진료소 건물이 남아 있을 뿐, 요양시설들은 수풀 속의 폐허로 변해버려 붉은 벽돌만이 산재한다. 창설당시인 초대 아리카와(蟻川享)원장, 제2대 하나이(花井善吉)원장 시대의 진료소는 목조 단층건물로, 실내는 대합실과 진료실로 나누어져 있으며, 검은 기와와 검은 판자벽으로 이루어진 단정한 건물이다. 건물정면의 지붕도 옛날의 기와가 그대로 남아 있으며, 병원 정문 앞의 부속건물도 지붕이 풀에 뒤덮힌 채 폐허로 남아 있다.
[보리피리]와 파랑새
필자가 문둥이 시인 한하운(韓何雲, 1919-75)을 처음 알게된 것은 1995년 3월, 처음 소록도를 방문했을 때였다. 일제 식민통치하의 조선의 [구라사업(救癩事業)] 실태를 알아보려고 소록도를 찾았을 때, 섬 중앙에 있는 공원 남측의 나즈막한 언덕에 서 있는 [개원40주년 기념비] 앞에서 다다미 석 장 정도의 평평한 돌에 글씨를 새긴 시비(詩碑)를 발견했다.
돌비석에는 [시인 한하운]이라는 음각과 함께 [보리피리]라는 시가 새겨져 있다. 1973년 4월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리피리]란 시는 한국의 국정 교과서에도 실려있어, 많은 사람들에게 널리 애창되고 있다고 안내직원이 설명해 준다.
국립소록도병원의 치료본관은 당당한 백악의 5층 건물이다. 그 건물 앞뜰에는 [개원 50주년기념, 1966년 5월17일 건립]이라고 쓰여진 석비(石碑)가 세워져 있는데, 뒷면에는 [아으 50년(噫五十年)]이라는 제목의 한하운의 시가 새겨져 있다.
천형 섬에는
납골당이 확답
끝내 [나병이 낫는다]는 신화가
우악한 산하에도 불어오는가.
모질게 살아온 목숨들이
이제 뭍으로 신천지를 찾는
찬란한 슬픔의 소록도.
아으, 50년.
해방.
자유가 있는
아. 새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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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록도에서 서울로 돌아온 뒤에도 한하운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한하운의 시를 노래한 CD나 테이프를 구해 보려고 서울거리의 레코드점을 몇 집 방문하여 점원에게 물어보았다.
[한하운의 테이프 없습니까?][보리피리라는 노래의 CD는 없습니까?] 종이에다 [한하운, 보리피리]라고 한글로 써서 그것을 점원들에게 보여주면서 찾아다니던 중, 한 가게에서 여자점원이 필자가 가지고 있던 종이를 보고 CD코너를 찾아보더니 한 장의 CD를 가져 왔다.
[한국서정가요 베스트]라고 한글과 영어로 쓰여진 CD판의 19곡 중에 한글로 보리피리라고 쓰고 영역(英譯)을 첨가한 곡이 하나 들어 있었다.
서울의 대규모 서점들은 종로 1가에서 2가에 걸쳐 모여있다. 서쪽에서 동쪽으로 교보문고, 영풍문고, 종로서적이 있고, 각기 대량의 다종다양한 서적들이 점두(店頭)를 메우고 있다. 영풍문고 지하에도 CD와 비디오를 파는 넓은 판매코너가 있다. 필자는 거기서도 [한하운의 CD가 있습니까]라고 물어보았다.
점원이 찾아준 것은 정복주(丁福周)라는 소프라노 가수가 부른 [한국예술가곡집]이라는 제목의 CD판으로, 수록된 열여덟 곡 중에 한하운이 작시한 [파랑새]가 끼어 있었다.
[파랑새]
나는 나는
죽어서
파랑새 되어
푸른 하늘
푸른 들
날아다니며
푸른 노래
푸른 울음
울어 예으리
나는 나는
죽어서
파랑새 되리
불과 2분26초의 짧은 가곡이지만 아름다운 시어와 운율과 함께, 짜내는 듯한 문둥이의 애달프고도 슬픈 감정이 전해져 와 가슴을 찌른다.
한하운에 관한 서적들을 있는 데로 구입하려고, 세 군데 서점의 판매카운터에 그 재고를 물어보았다. 컴퓨터로 검색한 한하운에 관한 서적은 다음과 같다.
귀국하고 나서도 한하운이란 이름이 필자의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한하운에 관한 연구물이나 출판물이 없을까 하고 찾아보던 중) 최석의(崔碩義) [문둥이 시인 한하운]({종성통신(鐘聲通信)}제188호, 1995년)이 있다.
, 와코(若生) 미스즈씨가 번역한 [보리피리]가 {무궁화 통신}83호(1984년3월)에 실려 있다는 것을 알았다. 와코(若生)씨의 논문은 다음과 같이 시작된다.
[어린 시절, 풀잎을 입술에 대고 소리내 불었던 추억을 가지고 있는가. 인공의 피리와는 전혀 다른 불가사의한 음색을 가진다. 이 [보리피리]라는 노래를 처음 들었을 때, 왠지 그런 생각이 들어 아무런 의심 없이 망향, 추억의 노래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필-릴리리]라고 되풀이되는 애절한 가락 속에, 보다 처절한 바램이 존재한다는 것을 느끼게 된 것은 작사자 한하운이 한센병 환자라는 사실을 알게 된 이후였다]
그리고 오선지에다 작곡가 조념(趙念)의 곡과 함께 [보리피리]의 시를 적고 있다.
보리피리 불며
봄 언덕
고향 그리워
필-릴리리
보리피리 불며
꽃 청산
어릴 때 그리워
필-릴리리
보리피리 불며
인환(人??)의 거리
인간사 그리워
필-릴리리
보리피리 불며
방랑의 기산하(幾山河)
눈물의 언덕을
필-릴리리
두 번째의 소록도 방문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은 6월 하순, 한센병 역사연구에 관해 사숙하고 있던 최석의(崔碩義)) 최석의(崔碩義) [기행·소록도로의 여행]이 잡지 {타마(多磨)} 1994년 5월호, 7-14쪽에 게재되어 있다.
선생으로부터, 직접 쓰신 시론인 [문둥이시인 한하운({종성통신}1995년 6월)]을 받았다. 한하운이 쓴 4편의 시에 대한 훌륭한 시역(詩譯)와 해설이었다.
그 해설의 한 부분에 […유감스러운 일이나 일본에는 한하운의 시가 그다지 알려지지 않고 있다. 본인이 알고 있는 한 {한국현대시집}(토요미술사 간행)과 강정중(姜晶中)이 번역한 [보리피리] 한 편이 소개되어 있을 뿐이다. 본인은 무릇 사람에게 감동을 주는 빼어난 시에는 국경이 없으며 공유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라고 쓰고 있다.
한글을 거의 읽지 못하는 필자로서는, 누군가 [한하운시 전집]을 번역해 주지나 않을까라는 생각만 깊어갈 따름이었다.
1995년 10월20일 저녁, [나시인집단(癩詩人集團)]을 주재하고 있던 시마다 히토시(島田等)씨가 나가시마(長島) 애생원(愛生園)에서 69세의 생애를 마쳤다. 췌장암을 앓고 있던 시마다씨는 병실에 문안을 간 필자에게 [내가 모아둔 자료를 이용해서 식민지하의 조선 한센병환자의 실태를 규명해 주기를 바란다]는 유언을 남기신 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돌아가셨다.
그로부터 한 달쯤 지난 어느 초겨울, 시마다씨의 후견인이자 절친한 친구이기도 한 우사미 오사무(宇佐美治)) 우사미 오사무(宇佐美治)(1926년생) [나예방법] 국가배상 세도나이(瀨戶內)소송의 나가시마 원고단장. 시마다 등의 후견인이었다. 1949년4월에 나가시마 애생원 입소
씨와 함께, 돌아가신 시마다씨의 서고를 방문했다. 병동 뒷마당에 있는 간소한 조립식 건물의 서고에는, 서적과 테이프, 본인의 육필기록, 봉투에 정리된 수많은 각종 자료들이 책꽂이에 수납되어 있었다. 봉투의 내용을 하나하나 조사하다 보니, 큰 봉투 속에 30여권의 [나시인집단] 발행의 {나(癩)}지가 있었다. 같은 호수가 중복된 경우도 있었고 누락된 호수도 많았다.
{나(癩)}지가 들어 있는 봉투에는 원고도 들어 있었다. 그 원고를 보는 순간, 놀라움으로 가슴이 두근거렸다. 바로 한하운의 시집 {보리피리}를 번역한 원고가 아닌가.
맨 첫 장에 [한하운·보리피리]라고 쓴 다음, 원고지의 칸을 한자 한자 정성스럽게 메워간 펜글씨. 그리고 여기저기 약간 날려 쓴 글씨로 고쳐놓은 붉은 펜글씨들. 김창직의 [해설]도 일본어로 번역되어 있었다. {나(癩)}지 제24호(1979년 4월)와 제25호(1980년 2월)에는 한하운의 시집인 {보리피리}의 번역문이 [강순(姜舜) 감수, 나카하라 마코토(中原誠)] 번역으로, 2호에 걸쳐 분할되어 게재되어 있었다. 우사미씨에게 물으니, 나카하라씨는 오래 된 입원환자로, 불어에 정통하며 한국어도 읽을 수가 있는 분이라고 했다.
{보리피리}의 역시(譯詩)는 총 54편으로, 한하운의 유고시가 누락되어 있다는 점에서 보면 1955년 5월에 출판된 제2시집 {보리피리}의 초판본에 가까운 형태의 시집이며, 한하운이 사거(死去)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볼 때 1975년 2월에 한하운이 사망한 뒤, 얼마 되지 않아 출판된 {보리피리}를 텍스트로 번역된 것으로 생각되었다.
어쨌든 {나(癩)}지 제24호는 1979년 4월 발행으로, 지금부터 벌써 20여년 전에 한하운의 시집 {보리피리}가, 같은 한센병 환자인 이웃나라의 시마다씨, 나카하라씨에 의해 세상에 소개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감동적이었고 필자에게는 충격적이기도 하였다.
번역자인 나카하라씨를 만나 {보리피리}의 번역 경위와 [나시인집단]의 주재자인 시마다씨의 역할에 관한 이야기들을 듣고 싶었다.
해가 바뀐 뒤 필자는 나가시마 애생원을 방문하여, 1월 9일 오후에 나카하라씨와 만날 수가 있었다. 나카하라씨는 {보리피리} 번역의 경위뿐만 아니라 텍스트로 쓰인 {보리피리}의 원본도 보여 주셨다. 이하 {나(癩)}지 제24호에 게재되어 있는 시마다 히토시(島田等)의 [{보리피리}의 번역과 한하운의 시에 관해서]라는 글, 그리고 나카하라씨에게 들은 이야기를 바탕으로하여, 어떠한 경위를 거쳐 문둥이 시인·한하운의 시집 {보리피리}가 시마다씨가 편집, 발행하는 {나(癩)}에 게재되게 된 것인지를 정리해 보기로 하자.
한하운의 시집 {보리피리}는 나라(奈良)에 있는 나환자시설인 [매듭의 집(むすびの家)]의 이이카와(飯河梨貴)씨로부터, 한국여행 기념으로 고(故) 시마다씨가 선물 받은 것이었다.
텍스트로 사용된 {보리피리}는 1975년 10월12일 초판의 삼중사(三中社, 서울특별시 용산구 동자동)발행의 것으로, 지질이 좋지 못한 문고판의 소책자이다. 75년 2월28일에 한하운이 사거한 다음, 같은 해 가을에 출판된 것으로, 시마다씨가 이이카와씨로부터 건네 받은 것은, 그 2년 뒤인 1977년이다.
시마다씨는 이 시집으로 인하여 같은 병을 가진 시인의 존재를 처음으로 알게 되었고, 작품내용에 관해서도 흥미를 느꼈다. 그러나 한글을 읽을 수가 없어 고민하던 중, 마침 애생원 에서 조선어 학습회가 있었고, 거기에 참가하고 있던 나카하라씨에게 그 시집을 건네 주게 되었다고 한다. [번역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등의 말은 일체 없었고, 시마다씨는 그냥 시집 {보리피리}를 놓고 갔을 뿐]이라고 나카하라씨는 말한다. 설사 그런 생각이 있더라도, [번역해 보는 게 어떠냐]라고는 결코 말하지 않는 시마다씨다운 행동이다. 시마다씨는 {나(癩)}지 제24호에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일본 나요양소에는 수 백명의 한국, 조선 출신자들이 있으며, 그 중에는 시를 쓰는 이들도 몇 사람 있으나, 고국에서 같은 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의 문필활동이나 그 작품에 관해서는 거의 모르고 있었으며, 적극적인 관심을 가질 여유도 없었다]([{보리피리}의 번역과 한하운의 시에 관해서]에서)
나카하라씨는 시집 {보리피리}에 수록된 모든 시를 번역했으나, 번역한 내용에 자신이 없어 누군가 신뢰할 만한 사람의 감수가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시마다씨에게 그런 생각을 전하자, 미리 그런 점을 예견하고 있었던 모양으로 쿠류우(栗生) 낙천원(樂泉園)(군마현 쿠사츠(群馬縣草津))에서 시(詩)를 지도하게 계시던 무라마츠(村松武司)씨를 통해서 즉각 강순(姜舜)씨의 감수를 받을 수 있도록 주선해 주었다(무라마츠, 강순씨는 이미 고인).
강 순씨는 {현대한국시선}(이화서방)의 역자이며, 한하운의 시도 일부이기는 하지만 번역한 바 있다. 시집 {보리피리}는 이러한 경위를 거쳐 [강순 감수, 나카하라 마코토 번역]의 형태로 나 시인집단 {나(癩)}지에 게재된 것이다.
나카하라씨의 기억에 의하면 번역한 원고용지는 그 후 어떻게 된 것인지 잘 알 수가 없으나, 주필(朱筆)을 넣은 것은 강순 선생이 분명하며, 김창직의 [해설]도 번역되었으나 활자화되지는 않았다고 한다.
[잊혀진 한하운의 시집]이 일본에서 다시 한번 빛을 보도록 하는 것이 필자의 바램이다.
한하운의 생애와 시
문둥이 시인 한하운은 1919년 2월24일, 조선 북부의 함경남도 함주군 동천면 쌍봉리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한태영(韓泰永)으로 아버지 한종규(韓鐘奎)와 관서(寬恕)라는 이름의 모친 사이의 2남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 쪽의 가계는 3대에 걸쳐 과거에 급제한 학자의 집안이었고, 어머니는 함남 부호의 외동딸로 관서가 17살 때 12살인 종규와 결혼했다.
당시의 조선 풍습으로는 어린 남자와 손윗 여자의 이러한 결혼은 극히 일상적인 일이었다.
한하운이 태어난 1919년은, 동년 3월1일을 기점으로 조선근대사상 최대의 반일 독립운동인 [3.1독립운동]이 일어난 해이다. 토착 부호이던 아버지 한종규도 3.1독립운동에 가담한 혐의로 퇴학을 당했다. 함주(咸州)라면 함경남도의 각 군 중에서 가장 인구밀도가 높은 지역이다.
한하운이 태어난 동천면(東川面)은 조선총독부가 실시한 1930년의 국세조사의 [직업(대분류)별 본업인구]통계표에 의하면, 직업을 가진 4,194명 중 농업종업자가 3,472명(남자 3,378, 여자 94)으로 전체의 82·8%를 차지하고 있어, 함경남도의 농업종업자 평균비율인 69.9%보다 무려 13%나 높다. 한하운의 집은 그러한 지역의 토착부호였다.
하운이 7살 나던 해, 가족은 하운의 학업을 위해 함남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도시인 함흥으로 이사를 하게 되며 거기서 하운은 함경제일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다.
하운이 14살 나던 1933년 봄, 원인불명으로 몸이 무겁게 붓기 시작한다. 1936년, 전라북도의 공립 이리농림학교 축산과를 졸업하게 되는데 재학 중에는 육상 장거리선수로 활동했다.
한편, 번역소설에 몰두하여 3학년 때는 소설습작을 쓰기도 했고, 여동생의 친구인 R이라는 여학생과 교제하여 사랑에 빠지기도 했다. 단편인 [어머니]와 [두견새]를 {조광(朝光)}과 {삼천리}에 투고한 적도 있었지만 연락은 없었다.
1936년 중학 5학년 때, 당시의 경성(京城)제국대학 부속병원(현 서울대의대 부속병원)에서 처음으로 [나병]이라는 확정진단을 받는다. 1939년, 일본으로 건너간 한하운은 20살 나던 해 토오쿄(東京) 세이케이(成蹊) 고등학교를 수료했으며, 2학년 재학 중에 연인이 토오쿄로 찾아와 그의 인생 중에 가장 행복한 시절을 보내기도 한다. 한하운의 시가 키타하라 하쿠슈(北原白秋)나 이시카와 타쿠보쿠(石川啄木)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은, 이 시기에 두 사람의 시에 접한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1942년 1월, 중국 국립북경대학 농학원 축산학계를 졸업하고 [조선축산사]라는 논문을 쓴다. 당시 북경 협화의과대학에 재학 중이던 S라는 2세 여성과 교류하여, 두 사람의 여성, 이리농림학교 시절부터의 R과 북경에서 새롭게 교류를 시작한 S사이에서 갈등하던 시절도 있었다. S는 결국 한하운의 [나병]을 비관하여 자살하고 만다.
1943년에 고향으로 돌아간 뒤 부친의 뜻에 따라 함남도청 축산과에 취직, 며칠 후에 장진군(長津郡)으로 전근된 이후에는 주로 면양(綿羊)연구와 개마고원의 개간에 몰두한다. 1944년에는 경기도청 축산과에 근무, 하이칼라 두발령에 저항, 거부하기도 했다. 이때부터 발병이 외부로 나타나기 시작하여 치료를 개시했으며, 본명인 한태영을 한하운(韓何雲)으로 개명한다.
1945년 8월, 조선은 일본제국주의의 식민지 지배로부터 해방된다. 조선 북부에 소련군정이 시작되면서 소유가산을 공산당에 몰수당하고, 남동생과 함께 노점 책방을 시작한다. 다음해인 1946년 3월, [함흥학생의거사건]으로 소련군에 의해 체포, 함흥형무소에 수감된다.
한하운은 후에 이 사건에 바치는 시를 시집 {보리피리}에 발표하고 있다.
[데모]
- 함흥학생사건에 바치는 노래(1946. 3.13)
뛰어들고 싶어라
뛰어들고 싶어라.
풍덩실 저 강물 속으로
물구비 파도 소리와 함께
만세소리와 함께 흐르고 싶어라.
모두들 성한 사람들 저이끼리만
아우성 소리 바닷소리.
아 바다소리와 함께 부서지고 싶어라
죽고 싶어라 죽고 싶어라
문둥이는 서서 울고 데모는 가고
아 문둥이는 죽고 싶어라.
1947년 5월, 하운의 남동생이 주도한 [북괴전복의거]에 연좌되어 다시 체포, 원산형무소로 이감된다. 그 해 여름, 모친인 관서(寬恕) 사망하며, 한하운은 원산형무소를 탈옥, 삼팔선을 넘어 남하한 뒤 전국각지를 유랑한다. 유랑 끝에 다시 귀향하지만, 남동생도 연인 R도 모두 체포된 뒤로 행방불명. 1948년에 다시 월남한다.
1949년 4월, 서른 살 때에 {신천지} 4월호에 [전라도 길] 등 13편의 시를 모은 [한하운 시초(詩抄)]로 문단에 데뷔, 5월에는 정음사에서 {한하운 시초}를 발행한다.
서점 앞에는 길이 한자 반, 폭 여섯 치의 새빨간 바탕의 종이에 {한하운 시초}라고 희게 인쇄한 광고가 5월의 바람에 나부끼는데, 봄바람 부는 거리에 깡통을 쥐고 다니는 나의 모습이란 처량하기 한이 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중략) 이 부끄러운 거지생활 말고는 어쩔 수가 없는 운명이지 않은가……그리고 나 자신 시인이라 자칭하고 싶지 않다. 그보다 이 거리에서 거지로서, 인간으로서의 자부심도 없이 짐승보다도 천한 저주와 학대를 받으며, 목숨만을 부지하려 했다.
시가 나의 현실생활에서 밥도 죽도 되지 않는, 냉수보다도 도움이 못되지만, 정신면에서는 시는, 버릴 수 없는 제2의 생명이다. 이 시로 사는 길이 전 생명을 지배하고 소망을 잃어버린 어두운 나에게 백광(白光)같은 빛을 마련해 주고, 용기와 의지의 청조(晴條)길로 인도하는 것이다.
(한하운 {나의 인생편력})
1949년 8월, 한하운은 경기도 수원시 세유동의 한센병환자 정착마을인 하천(河川)부락에 들어간다. 같은 해 12월말, 70명의 환자를 인솔하여 경기도 부평으로 가서 새로운 한센병환자 수용마을을 설립, 600명의 환자들에 의한 선거에서 자치회장에 취임한 뒤, 원명을 [성혜원(成蹊園]이라고 명명한다. 1954년 8월에는 [대한 한센총연맹]을 결성하여 위원장에 선출되었다.
발간된 {한하운시초}가 불온하다고 하는 이유로 4개월간 국회와 신문·방송에서 논란이 된 적도 있었으나, 1955년 5월, 두 번째 시집인 {보리피리}를 인간사(人間社)에서 출판한다.
그 중에 수록되어 있는 시 한편을 소개한다.
[전라도 길]
-소록도로 가는 길에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
숨막히는 더위뿐이더라.
낯선 친구 만나면
우리들 문둥이끼리 반갑다.
천안 삼거리를 지나도
쑤세미 같은 해는 서산에 남는데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
숨막히는 더위 속으로 쩔름거리며
가는 길…….
신을 벗으면
버드나무 밑에서 지까다비를 벗으면
발가락이 또 한 개 없다.
앞으로 남은 두 개의 발가락이 잘릴 때까지
가도 가도 천리 먼 전라도 길.
한하운의 관심은 문학에 머무르지 않고 정치, 경제, 사회 전반에 걸쳤으며, 활동도 한센병 환자운동, 교육, 사회사업에까지 미쳤다. 한센병 환자의 어린이들을 수용, 양육, 교육하는 보육원으로 1951년 5월에 [신명보육원]을 설립하여 원장에 취임했고, 1960년에는 [청운보육원]을 이양 받아 원장으로 취임하여, 2개의 보육원을 오가며 어린이들을 보살폈다. 1962년 9월에는 나이가 든 고아들을 위한 정착사업소인 [안평농장]을 경기도 안성에 창설하여 농장장으로 일하는 한편, 1963년 2월에는 가축개량사업으로 부평에 [경인종축장]을 창설하여 장장(場長)으로 취임하고 있다. 또 신안농업기술학장, 1971년 11월에는 한국카톨릭 사회복귀협회장을 역임하는 등, 그의 일생은 실로 다사다망했다. 한하운은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고 한다.
[몸만 건강했더라면 정치나 경제방면에 투신했을 것이다]라고.
1967년 5월, 간경화증 발병. 1974년 8월 월간 [새빛]사가 주최한 고(故) 육영수 여사 추도회에서 [곡(哭) 육여사 영전에]라는 추모사를 낭독했으나, 공식석상에의 참석은 이것이 마지막이었다. 육영수는 고 박정희 대통령의 부인으로 [구라사업]에 열심이었다.
1975년 2월28일 오전 10시45분, 인천시 북구 십정동 자택에서 사망. 사망한 뒤에 천주교에 귀의(歸依)했다. 묘소는 경기도 김포군 김포면 장릉묘원에 있다. 한하운의 시집 {보리피리}에서 2편의 시를 골라 소개한다.
[생명의 노래]
지나간 것도 아름답다
이제 문둥이 삶도 아름답다
또 오려는 문드러짐도 아름답다
모두가
꽃같이 아름답고
……꽃같이 서러워라
한 세상
한 세월
살고 살면서
난 보람
아라리
꿈이라 하오리
[나는 문둥이가 아니올시다]
아버지가 문둥이올시다
어머니가 문둥이올시다
나는 문둥이 새끼올시다
그러나 정말은 문둥이가 아니올시다.
하늘과 땅 사이에
꽃과 나비가
해와 별을 속인 사랑이
목숨이 된 것이올시다.
세상은 이 목숨을 서러워서
사람인 나를 문둥이라 부릅니다.
호적도 없이
되씹고 되씹어도 알 수는 없어
성한 사람이 되려고 애써도 될 수는 없어
어처구니없는 사람이올시다.
나는 문둥이가 아니올시다
나는 정말 문둥이가 아닌
성한 사람이올시다.
시마다 히토시(島田等)씨는 한하운의 시에 대해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한하운의 시에서 우리들이 우선 느낄 수 있는 것은, 그 차이점보다 공통되는 것들의 크기이다. 생물학적으로 억제할 수 없는 자기질병관, 인간관계에 있어―특히 비나병환자에 대한 자기설정, 자기혐오라기보다 자기말살적인 충동의 격렬함 등, 이러한 것들은 해석이 필요없이 공명(共鳴)되는 것이다. 아마도 환자로서 처해진 사회적, 역사적 상황의 공통성이 그처럼 근원적이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작가의 연보(年譜)를 보면 나병 회복자로서 사회에 복귀하여 다양한 사업에 손을 대고 있으나 {보리피리}의 작품에서 보는 한, 그러한 모멘트는 작품상의 어디에도 나타나지 않는다. 그는 진정한 회복자의 마음으로 죽음을 맞이할 수 있었을까? 나는 그런 점에서 나병을 둘러싼 역사의 중압감의 공유를 뼈저리게 느끼지 않을 수가 없다.
치유할 수 없는 병―그것은 우리들이 인류의 과제를 근심하는 한 여전히 현실이다. 아직은 우리들 역시 한하운과 마찬가지로 진정한 회복자로서의 죽음을 맞을 수 있을 것 같지가 않다. 격렬한 자기부정이라는 형태로 밖에 자기실현의 노래를 부를 수 있을 것 같지가 않다. 인간의 존엄이, 그 인간의 생존이라는 사실에 근거할 수밖에 없다면, 우리들은 아직도 가혹한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나시인집단 {나(癩)}제24호, 1979년 4월, p.22).
I 격리정책의 전개
1.조선총독부 [나(癩)]정책 규명의 시점(視点)
1994년 초가을, 필자는 [재단법인 우방협회]의 자료를 열람하기 위해 토오쿄(東京) 메지로(目白)에 있는 학습원대학 동양문화연구소를 방문했다. 재단법인 우방협회(友邦協會)는 1950년 가을, 전(前) 조선총독부 식산과장 호즈미(穗積眞六郞)의 제창에 의해, 일본에 의한 조선통치의 자료보존을 위해, 그 관계문헌자료의 조사, 수집 및 보존을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수집된 자료 약 5,700점은 현재, 동 연구소에 위탁, 보관되어 있다. 재조(在朝) 일본인의 조선통치 역사를 조사하기 위해 학습원대학 동양문화연구소에서 {[우방협회·중앙일한협회]문고자료목록}(1985년 발행)을 뒤적이고 있던 필자는 우방시리즈 제9호로 발간된 하기와라(萩原彦三)편 {조선의 구라사업과 소록도갱생원}(1967년 10월 발행)이라는 책자를 발견했다.
50쪽 정도의 책자이다. 동양문화연구소 직원에게 부탁하여, 책자를 서고에서 가지고 나와서 열람할 수가 있었다. 그 책자의 첫머리는 다음과 같이 시작된다.
본제(本題) [조선의 구라사업과 소록도갱생원]은 그 인간애와 규모의 웅대함에 있어 세계의 이목을 끈, 조선 통치의 본질을 표징하는 선정(善政)으로 찬사를 받은 총독정치의 자랑스러운 유업이다.
그리고 이 책자는 소록도갱생원의 설립 및 운영에 직접 관여한 요시오카(吉岡貞藏)(당시 전라남도 위생과장), 사이토(齋藤岩藏)(당시 전라남도 재무부장), 요시자키(吉崎達美)(당시 갱생원 서무과장)의 세 사람이 집필하고, [조선의 구라사업에 대하여]를 하기와라(萩原彦三)(함경남도지사 등을 역임)가 기술하고 있다.
이 책자를 보고, 소록도갱생원을 방문하여 나 자신의 눈을 통해 조선총독부 하의 조선인 한센병환자의 생활과 의료실태를 알아보리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다음해인 1995년 3월과 4월, 두 차례에 거쳐 전라남도 남단의 국립소록도병원을 방문했다. 소록도를 견문한 내용은 오오사카(大阪) 인권역사자료관(현 오오사카 인권박물관)의 기관지인 {계간 리버티} 제11호(1995년 9월 간행)에 [한국의 한센병의 섬·소록도를 방문하여―또 하나의 식민지 지배]라는 제목으로 발표했다.
소록도에서 필자가 본 것은 조선인 한센병환자에 대한 일본 통치자들의 잔학성과 비인간적인 시책과 행위들이었으며, 치유하기 어려운 식민지지배의 손톱자국이었다. 소록도로 강제격리 수용된 6,000명이 넘는 한센병환자에 있어, 박살(撲殺)과 굶주림, 그리고 처벌로서의 단종(정관절제)수술은 일상화되어 있었다. 필자는 일제통치하의 소록도 [나]요양소에 격리수용된 희생자들에 대한, 일본정부의 공식적인 사죄와 배상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게 되었고, 필자가 지금까지 가지고 있었던 자민족·자국민 중심의식에 대한 부끄러움을 느꼈다.
1998년 7월31일, 쿠마모토(熊本) 지방재판소를 상대로, 13명이 [나예방법] 인권침해에 대한 국가배상 청구소송을 제소한 이래, 약 2년 사이에 쿠마모토 지방재판소에 434명, 토오쿄(東京) 지방재판소에 93명, 오카야마(岡山) 지방재판소에 22명 등, 원고수가 전국 합쳐서 549명으로 불어나고 있다(2000년 6월20일 현재). 필자도 작년 가을부터 미력하나마 이들 원고들을 지원하기 위해, 국가의 한센병 정책의 잘못을 시사하는 자료 및 소논문 등을 출판하고 있으며, 쿠마모토 지방재판소와 오카야마 지방재판소의 재판 방청을 계속하고 있다. 이에 즈음하여 상기되는 것은 1997년 12월9일 오전10시, 소록도병원 장애자병동의 일실에서 본, 한 노인의 사타구니에 남아있던 참혹한 단종의 상처자국이다.
필자가 바젝토미(vasectomy)의 상흔을 처음 본 것은, 한국 전라남도의 남단에 있는 국립 소록도병원을 방문했을 때이다. TBS(토오쿄 방송)의 츠쿠시 테츠야(筑紫哲也)가 진행하는 [뉴스23]의 특별프로그램 [또 하나의 강제불임―한국·식민지에서의 강제단종]의 취재협력을 위해, 국립소록도병원을 방문하여 일제시대에 [단종]수술을 받은 사람들을 찾았을 때였다.
TBS의 카메라맨과 디렉터들을 방 밖에서 기다리게 하고, 통역을 담당한 이씨와 단둘이서 장애자병동의 당시 70세의 노인의 방을 방문하여, 취재를 위해 예정된 방으로 데리고 갔을 때의 일이다. 노인은 완전히 실명(失明)한 상태였으나, 방에 들어가자마자 바지와 팬티를 벗어 던지고 사타구니 사이의 단종 흔적을 일본인인 필자에게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피부가 놀랄만큼 새하얀 것이 인상적이었다. 음낭 뒤쪽에 옆으로 2,3센티 정도의 추한 상처자국이 남아 있었다. 그것은 의사가 수술대에서 정식으로 메스를 사용하여 집도(執刀)한 상처자국이 아니었다. 한 순간의 일이었기 때문에 필자는 망연자실한 가운데 그것을 보았다. 통역의 이씨를 통하여 노인에게 바지를 입도록 부탁했다.
그 뒤, TBS의 카메라맨과 디렉터를 방으로 들어오게 하여 인터뷰와 촬영이 진행되었지만, 필자는 단지 그 노인의 손을 꼭 쥐고 있을 뿐이었다. 그 장면의 일부는 TBS계통의 TV국을 통해, 1997년 12월22일 밤, 일본 전국에 방영되었다.
노인은 열 세살 나던 때에 무단으로 나무의 잔가지를 꺾었다는 이유만으로, 그 처벌로써 단종수술을 받았다. 이하는 동년 12월9일 오전10시2분부터 10시20분까지 소록도에서 행해진 인터뷰의 일부이다(본서의 [보고(補考)1]에 그 전문을 게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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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단종수술을 1941년에 받았습니다만, 단종은 41년부터 시작된 것이 아니라 그 이전부터입니다. 그리고 사토(佐藤)원장(수석간호장-필자) 때에는 참기 어려운 굶주림과 중노동, 그리고 가혹한 취급이 심했기 때문에 탈주하는 사람들이 생겼습니다. 탈주하다 붙잡히면 무조건 단종수술입니다. 또, 그 외에도 원내에서 반일(反日)적이거나 반항적이라고 찍히게 되면 단종입니다. 그리고 원내에서 물건이 없어지는 등의 사건이 일어나도 단종입니다. 단종이라는 것이 시작되면서 소록도에서는 남녀관계가 있었다거나 할 경우에는 무조건 단종수술이 가해지게 되었습니다. 왜 단종수술을 하게 되었느냐 하면, 독일에서 나환자 등에게 그것을 행하는 법률이 있었잖아요. 따라서 일본정부도 [나환자들은 전혀 치유될 가망성이 없다. 아기를 낳더라도 까마귀 새끼는 까마귀이고 승냥이 새끼는 승냥이일 뿐이다]라는 생각에서, 환자들은 아기를 가질 수 없도록 해 버린 겁니다. 단종이란 정말로 잔혹한 방법입니다. 정말 뭐라고 입으로 말할 수가 없어요. 시대의 잘못이라고 하지만. 생각할수록 분통이 터지고 억울해서…. 내 나라, 한국이라는 모국 땅에서 도대체 왜 그런 지독한 꼴을 당해야 했는지.
한센병환자도 세계 곳곳에서 다들 잘 살고 있으며, 환자들의 아들딸들도 [한센병]에 걸리지 않은 채 건강하게 자라고 있지 않습니다. 나는 아이를 만들 수 있는 몸으로 되돌아갈 수가 없어요. 아이를 낳을 수 없는데 대마도를 내게 준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 나이가 되어 이런 두려움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다만, 만일에 내가 하나님을 믿지 않았다면 벌써 자살하고 말았을지도 모릅니다.
병에 걸려, 그런 수술까지 당한 환자들은 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벌써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저는 어릴 적에 입소하여 환자들 중에서는 젊은 편이었기에 지금까지 살아 있지만 단종의 경위는 대개 이러한 것이었습니다.
일제통치하의 소록도 갱생원에서는 1936년 4월, 종래의 부부환자 별거규칙을 고쳐 [일본본토와 마찬가지로] 부부동거를 허가했지만, 그 조건으로서 남성환자의 정관절제수술(단종)을 행하게 된다. 소록도갱생원 {1941년 연보}에 의하면 1940년 말 현재의 부부동거자가 840쌍에 달하고 있다(이 사실은 1997년 3월7일부 {마이니찌(每日)신문}에 보도되었다).
환자의 [단종]은 직원에게 반항하는 자나 도망자 등에 대한 처벌로서도 행해졌다. 소록도에는 일제시대에 붉은 벽돌로 지어진 감금실와 형무소 건물들이 남아 있고, 감금실 건물에 인접하여 [해부실과 유체안치실]이 아직도 남아 있으며 유체안치실에는 [단종대]가 놓여 있다. 노인은 열 세살 나이의 소년시절, 간호수의 집도(執刀)에 의한 처벌로서의 [단종]을 당한 것이다.
지금부터 6년 전인 1994년, 필자는 두툼한 {조선총독부 관보} 전142권(서울, 아세아문화사)을 들치면서 10만명에 달하는 일제식민지 지배하의 조선에서의 [행려사망자]라고 쓰여진 기재란을, 귀적(鬼籍)이라도 들여다보는 기분으로 조사하고 있었다. 조사한 1916년, 28년, 33년, 38년, 40년, 44년의 단 6년 사이에만 240명이 [나, 나환자]로 행정에 의해 {관보}에 기재되어 있었다. 240명의 [나, 나환자] 사망자의 기재개소를 복사하여 한 장, 한 장 오려내 종이에 붙이면서, 마치 [위패]를 세우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일본각지의 한센병요양소에는 납골당이 세워져 있다. 소록도갱생원에도 거대한 납골당이 세워져 섬에서는 만령당(속칭 한록당(恨鹿堂))으로 불리고 있으며, 그 속에는 나환자들의 유골이 모셔진 자그마한 유골항아리와 나무상자(한국의 경우)가 안치되어, 이름과 사망년월 등이 씌어져 있다. 그러나 {조선총독부 관보}에 실려있는, 각지에서 가매장된 행려사망자 중의 나환자들은 여전히 가매장 상태로 잠들어 있는 것이 아닌가.
여기서 말하는 [행려사망자]란, [길 가다가 쓰러져 죽은 사망자로 인수자가 없는 사람]에 국한된 것으로, 물론 총독부의 헌병, 경찰 등의 행정이 파악한 범위내의 것을 말한다. 일제식민지 지배하의 조선에서 부랑, 걸식하거나 혹은 인신매매되어 창기와 작부 등으로 몰락할 수밖에 없었던 조선인이 다수 출현하게 되는 사회적인 배경은 바로 여기에 있었다. 강만길(姜万吉)이 쓴 {일제시대 빈민생활사 연구}(창작사 1987년) 등에는, 그러한 빈민으로 몰락한 사람들의 생활이 자세히 서술되어 있다. 그러한 생활의 궁핍이 일제식민지하의 조선인 한센병 발병자를 격증시켰다. 나환자의 [행려사망자]의 기재숫자는, 조사한 6년 간에 240명이었으며, 그 중에 [아사(餓死), 영양불량, 동사(凍死), 자살]이 84명(34.6%)에 미치고 있다. 필자는 역사연구의 논문을 쓴다는 목적으로 연구를 시작하여, 행려사망자의 사인(死因)을 유형화하여 수치화한 사실에 대해 뒤가 켕기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사실은 한사람 한사람의 죽음의 의미를 {관보}의 기록을 통하여 재해석, 재음미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필자는 [일제식민지 지배하의 조선인 나환자]와 소록도에 관해서 상당히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으나, 그것을 역사나 사회과학의 연구, 또는 교육의 장에서의 과제로 삼으려 하지 않았으며, [일본군 성노예(위안부)]문제의 경우처럼 그것을 일제의 식민지지배와 침략전쟁의 책임으로서 심각하게 취급하지도 못했다. 그 점, 한 사람의 연구자, 한 사람의 교육자로서 필자의 [전쟁책임]은 면하지 어려우며, 피해를 입은 조선인들에게 사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윤건차(尹建次)씨가 지적하고 있는 바와 같이, 이것은 필자의 [자민족 중심주의]와 [아시아(조선)에 대한 인식의 빈약함] 등으로부터 오는 결과이다. [정치주의적], [사회운동적]인 시점에 지나치게 치우쳐, 가혹한 삶을 강요당하고 비인간적으로 취급받아온 조선인 한센병환자 그 자체를 무시(無視) 혹은 경시(輕視)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라고 반성하고 있다.
1999년 가을부터 한센병 국가배상 청구공판의 일개 지원자로서 관계해 왔지만, 이러한 생각은 점점 더 강해지고 있다.
본서에서는 [나][나환자]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으며, 자료인용에도 [나][나환자]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한센병]으로 고쳐 쓰지 않은 경우도 있다. 처음에는 [나(癩)]라는 말에 포함된 의미의 가혹함, [불치의 병][무서운 전염병] 등의 마이너스 이미지를 가지는 [나(癩)]라는 말을 [한센병]으로 바꾸려고 생각한 적도 있었지만, 역사적인 용어로서 쓰는 경우에는 [나(癩)]로 통일했다. 오히려, [나(癩)]라고 하는 무게를 생각하면, 말을 바꿈으로서 자신의 기분을 [가볍게]하려는 것은 잘못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제현(諸賢)들의 비판을 바란다.
옛날 쿠마소(熊蘇)) 고대일본의 큐슈(九州)남부에 살던 성질이 난폭한 종족. 또는 그 지방의 이름
와 삼한(三韓)은 서로 연락을 주고받았다고 하며, 조선의 전라남북도와 경상남북도는 그 삼한과 가장 깊은 관계를 가지는 곳입니다만, 일본으로부터 수출한 것인지 삼한으로부터 수입한 것인가를 생각해 본 것입니다. 옛날부터 일본과 조선과의 교통은 상당히 빈번하여, 도자기나 개간(開墾)에는 상당수의 조선인들이 들어왔으며, 쿠마모토(熊本)와 카고시마(鹿兒島)지방도 그러합니다.
카토오 키요마사(加藤淸正)가 삼한정벌에서 조선의 왕자를 포로로 잡아온 적도 있습니다만, 현재에도 전라남북도로부터 일본에 와 있는 환자들이 상당수 있습니다. 목하 10명의 수용환자가 있으면 그 중의 한사람은 조선인의 비율로, 실로 큰 문제입니다.
현재 일본에서 환자가 100명을 넘는 현(縣)은 아이치(愛知), 쿠마모토(熊本), 효고(兵庫), 미야자키(宮崎), 카고시마(鹿兒島) 등 몇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음에 불과하지만, 선인(鮮人)들이 자꾸 들어오고 있는 점에 대해서는 후생성(厚生省)에서도 고려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옛날부터의 일들을 생각하면 일본은 수입국 일지언정 결코 수출국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조선인 나환자들에 대한 대책을 강구해 주시기를 후생성에 건의하는 바입니다(p.102).
이것은 1949년 3월6일 나가시마(長島) 애생원에서 [나병리강습회]가 개최되었을 당시의 미츠다 타케스케(光田健輔)의 강연내용이다({나(癩)에 관한 논문, 제3집} 長濤會, 1950년).
미츠다는 [카토오 키요마사(加藤淸正)의 삼한정벌이라던가 센징(鮮人) 등의 [차별어]만 늘어놓고 있는 것이 아니다. [조선인 나환자에 대한 대책을 강구해 주시기를 후생성에 건의하는 바입니다]라는 식으로, 조선인 한센병환자에 대한 특별한 대책의 강화를 후생성에 건의하고 있다. 이러한 비과학적 강연이 있은 2년 8개월 후인 1951년 11월8일, 제12회 국회참의원 후생위원회에서 미츠다(光田)는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다. 소위 [3원장의 국회증언]이다.
○참고인(光田健輔군)……그 외에 나예방에 참고가 되는 것은, 저는 미리부터 조선인의 내지(內地)로의 이동문제 (중략) 조선의 전라남북도와 경상남북도, 이 4도에 나병의 소굴이 있습니다. 거기에는 윌슨의 이야기에 의하면 25,000명의 나환자가 있다는 겁니다. 그들이 빈번히 아이를 낳고, 그리고 그 아이들이 나병에 걸리는 식으로, 내지(內地)에는 2,000∼3,000명의 나환자가 있다고 하나, 조선에는 2만여명의 나환자들이 내지(內地)에 가까운 장소에 소굴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이 문제를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하여 본인은 일찍부터 매우 우려하고 있던 사람으로, 작년에 가서 봤을 때는 전국 10개소의 요양소에 450명 정도가 입소에 있었으며 (중략)
전라남도 고흥군의 소록도라는 곳에 원래 6,000명의 수용소가 건립되어 있었는데, 그게 역시 일본의 관리 하에 있었을 때는 6,000명을 충실히 수용했으나……소록도의 상황 등을 잘 관찰하여, 거기에 일본의 힘을 가해 준다거나, 혹은 국제연합의 힘을 가함으로서, 원래처럼 부흥시켜줄 필요가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중략) 조선이건 인도이건 가서보면, 나환자가 어린이를 안고 있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콜로니라고 해서, 거기에 순례자들이 가게되면 바로 아이들이……남녀들이 모여 어린이가 생기게 된다. (중략) 우생(優生)수술을 실시하는 것이 어떠냐는 충고를 하고 있습니다만, 이것도 정명(貞明)황후님의 나병을 예방하라는, 치료보다도 예방이라는 그 취지를 받들어 그런 사실을 세계 각 국에 선전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조선인과 나환자]에 관한 이 미츠다의 국회증언에는 크게 나누어 두 가지의 문제가 있다.
첫 번째 문제는 전술한 우방시리즈·제9호 {조선의 구라사업과 소록도 갱생원}을 쓴 조선총독부의 관료였던 하기와라(萩原彦三) 그룹들의 주장과 동일선상에 있는 것으로, 즉 일본통치하의 소록도갱생원을 [조선통치의 본질을 표징하는 선정(善政)]으로 보고 [총독통치의 자랑할만한 유업]이라 하여 그 부흥의 필요성을 제언하고 있다는 점이다. 미츠다(光田)는 전전(戰前)과 전쟁 중에 소록도갱생원을 방문하여 [조선의 나(癩)와 소록도갱생원]에 관해 몇 편의 글을 남기도 있으나 [미츠다의 국회증언]은 그러한 주장의 되풀이였다.
[잘못된 일본의 나(癩) 행정시책이 강행되었던 조선]이라는 반성과 사죄를 미츠다는 죽을 때(1964년 5월)까지 하지 않았다. 미츠다가 관심을 가져야 했던 것은 소록도의 적벽돌 건물이나 수용환자의 숫자가 아니라 격리수용된 조선인 한센병환자가 어떠한 [보호와 치료]를 받아왔는가를 의사의 눈으로 확인하는 것이 아니었을까?
미츠다가 [구라(救癩)의 기치아래 격리를 최선책으로 믿고, 그에 생애를 바친 사람](1995년 4월13일의 [나예방법]에 관한 일본나학회의 견해)이라 하더라도, 소록도를 비롯한 조선 전토에서 벌어졌던 무참함을 묵시하는 것은, 오랜 동안 식민지지배와 통치를 행한 일본인으로서 결코 용서받을 수 없는 행위일 것이다.
그러한 미츠다에게 일본정부는 1951년 11월3일 문화의 날에, [구라의 아버지]로서 문화훈장을 수여했다. 미츠다의 국회증언을 게재한 [참의원 후생위원회 회의록]은 누구나 볼 수 있었으며, 무엇보다도 당시 [나예방법]의 개정을 심의하고 있던 참의원 후생위원회의 위원이나 이사들은, 참고인으로 불려온 미츠다 증언의 영향을 받았음에 분명하다.
미츠다의 국회증언이 있었던 해로부터 50년이 되는 지금까지, 일본 식민지하의 소록도갱생원에서 행해진 격리정책과 조선인 한센병환자에 대한 미츠다의 [망언]에 대해, 그 책임을 묻는 논의가 일본에서는 거의 행해지지 않고 있다. 이 책자가 이러한 문제를 규명하는 실마리가 되기를 기대한다.
[이에 대해, 만일 우리들 일본의 민중이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용서한다면, 우리들은 {비작위적 작위}에 의해 또 다시 공범자가 될 것이다. 돌이켜 보면 전후의 일본인은 [피해자]의식에 깊숙이 파묻혀 [가해]의 사실을 직시하지 않았다. 피해를 입은 국가들과 지역의 민중들에 대해, 배상책임이 있다는 사실조차 오랫동안 잊은 채 지내온 것이다]라는 스즈키(鈴木裕子)씨의 말({전쟁책임과 젠더(性)}, 미래사, 1997년, 114쪽)을 무겁게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조선인과 한센병환자]에 대한 국회에서의 미츠다 증언의 두 번째 문제점은 [우리들이 가장 곤혹스러워 하는 것은 조선의 나환자들이 일본의 부랑자들을 대신하여 빈번히(한센병을-필자) 내지로 전파하는 것]이라는, 사실에 근거하지 않는, 근거없는 내용의 증언을 함으로서, 조선인 한센병환자들에 대한 혐오감과 공포의 감정을 일본인들 사이에 퍼뜨린 일이다.
{버림받은 환자―사상으로서의 격리}의 저자로 알려진 시마다 히토시(島田等)(1926-95년)는 [하지 않으면 안될 작업의 시작―후지노 유타카(藤野豊)저 {일본 파시즘과 의료}를 읽고]라는 서평 속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島田等유고집 {꽃} 수첩사, 1996년).
저자는 본서의 [총괄과 전망] 속에서, 금후의 연구과제의 하나로 당시의 식민지, 점령지의 실태규명을 들고 있다. 조선의 소록도갱생원에서는 내지(內地)의 소장(所長)회의가 몇 번이나 요망하면서도 실현하지 못했던 형무소를 일찍부터 설치하고 있었다. 이 한가지 사실만으로도 현지의 환자들이 어떠한 처우를 받고 있었던가를 추측할 수 있다. 과제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곤란이 예상되나 그 규명이 기다려진다(p.133).
시마다(島田)씨는 21세 때인 1947년 9월9일, 미에현(三重縣)에서 나가시마 애생원으로 한센병환자로 입소하여, 1995년 10월20일 애생원의 병실에서 췌장암으로 사망했다. 말기 암으로 수척한 그의 몸에는 본인의 강한 의향에 따라 일체의 생명연장기구는 물론 산소호흡기조차 부착되어 있지 않았다. 베개 옆에는 사회운동관계 신문과 팜프렛이 펼쳐진 채로 놓여있었다.
의료의 현장에서는 옛날부터 의료자(醫療者)가 강자(强者)였다. 특히 의사가 그랬다.
의료 현장에서 강자가 관심을 가지는 것은 병이지 환자가 아니다. …한센(나)병은 의료자의 관심이 환자가 아닌 병이었던 아주 극단적인 케이스였다. 하나의 질병에 대한 한 나라의 정책이 확립되고 강화되어 가는 과정에서, 의료자의 의지 그것도 개인으로서의 의료자의 의사(意思)가 일방적으로 관철된 보기 드문 케이스였다. …일본의 한센병대책의 기본은 격리였다(시마다 히토시(島田等) [격리의 방법], {해방교육} 제174호, p.9, 1983년 12월)
시마다씨는 9월9일, 나가시마 애생원의 치료센터 2층의 병실에서 병문안을 간 필자의 손을 잡고 [조선의 나(癩) 연구를 계속하여 주십시오. 자료의 스크랩 등은 후타미(雙見)씨를 통해, 애생원의 카미야(神谷)서고에 보관해 놓았으니, 그것을 활용하여 연구를 계속해 주십시오]라고 말씀하셨다. 말기 암 병상에서의 필자에 대한 시마다씨의 최후의 말씀이었다. 그 40일 뒤인 1995년 10월20일 저녁, 시마다씨는 젊은이들의 손을 쥔 채 영면(永眠)했다. 시마다씨와의 약속을 필자는 아직 이행하지 못하고 있다.
2. 초창기의 소록도자혜의원
-초대원장 아리카와 토오루(蟻川享)의 시대-
1930년 12월30일부터 6일간, 미츠다 타케스케(光田健輔) 전생(全生)병원장으로부터 조선의 한센병 사정의 시찰을 명 받은 동(同) 병원 의원(醫員) 하야시 후미오(林文雄, 1900-47년)는, 섣달 그믐날 아침을 조선 남해의 한려수도를 달리는 복창환(昌福丸) 선상에서 맞았다.
하야시(林)는 토오쿄부(東京府) 히가시무라야마(東村山) 산골짝의 전생병원의 동료인 후지타(藤田工三), 미야카와(宮川豊), 시오누마(鹽沼英之助), 타지리(田尻敢)의 네 사람 앞으로 다음과 같은 엽서를 보낸다.
1930년 12월31일, 오전8시
눈을 뜨자마자 급히 갑판에 오른다. 지난밤의 어둠은 사라지고 초록바다가 물결을 일으키고 있다.
가파른 조선해안의 바위와 섬들이 붉은 살결을 아침햇살에 들어내고 있다. 동쪽을 바라보니 수평선 위에 새빨간 태양이 솟아오르는 참이다.
2등실은 나 혼자다. 갓 항해를 시작한 만함(滿艦)식의 장식이다. 9시 반에는 여수에 도착한다고 한다.
윌슨에게는 전보를 쳐 두었다.
하야시 후미오(林文雄)는 섣달 그믐날 밤을 윌슨 원장이 있는 순천에서 보내고, 설날 아침, 윌슨의 환송을 받으며 자동차로 벌교, 고흥을 거쳐 녹동에 도착, 소록도에 입도한다.
하야시는 {일본MTL}제20집(1931년 10월)의 [잊기 어려운 형제, 소록도를 방문하여]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야자와(谷澤俊一郞)원장 댁의 신년연회가 한창일 때 룩색을 짊어진 채 불쑥 뛰어들게 되어 몹시 미안했다. 이곳은 지세(地勢) 관계상 병사가 남북 둘로 나뉘어져 있다. 관사는 그 사이의 고지(高地)에 있다. 북쪽은 전부터 큰 쪽으로 550명의 환자가 있으며, 남쪽은 새롭게 확장된 쪽으로 200명 정도밖에 없다. 이 750명의 환자 속에 두 사람의 내지인이 있었다. 한 사람은 북쪽 요양지에, 한사람은 남쪽에 있으며, 북쪽사람은 N이고 남쪽사람은 M(三井輝一)이라 한다.
수용환자가 6,000명으로 불어난 4대 원장인 스호오 마사스에(周防正季)의 소록도갱생원, 한센병요양소 때와는 달리, 이 시기의 소록도 자혜의원은 초창기의 모습이 상당부분 남아 있었다. 그럼 소록도 자혜의원은 언제, 어떤 의도로 조선 전라남도 남단의 섬에 창설된 것일까?
조선총독부의 위생고문(촉탁)으로 한센병 대책에 큰 역할을 한 것은 야마네 마사지(山根正次)이다. {애생(愛生)}지 1940년 10월호에 미츠다(光田健輔)원장의 [토노야마(殿山) 야마네 마사지 선생을 그리며]라는 기사가 게재되어 있다({光田健輔와 일본의 나예방사업} 1958년, 藤楓協會간행, 436쪽). 그 가운데서 미츠다 원장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야마네(山根) 선생은 아오야마(靑山), 요시후루(賀古), 모리(森) 선생과 마찬가지로 동경대를 명치(明治)5년에 졸업했다. 쵸오슈(長州)의 하기(萩)출신으로 유신 이래로 선배들 중에 지기(知己)들이 많았다. …선생은 이토(伊藤)와 소네이(曾??) 양 총감은 물론, 테라우치(寺內) 총독과도 극친한 사이였다. 조선 초기의 위생고문으로서, 명치 말부터 대정(大正)5년까지 조선의 위생행정에 공헌했다. 소록도 선택 당시인 대정(大正) 4년경, 선생의 섬이냐 육지냐는 물음에, 요시가(芳賀) 군의감과 사토(佐藤)) 사토오 고오조(佐藤剛藏1880-?) 조선총독부 의원(醫院) 교관, 동 의원 의무과장, 1916년 4월에는 경성의학전문 학교 교수 등을 역임
씨 등이 실지검분(實地檢分)에 임했다는 이야기도 들었으나, 현재는 내지(內地)는 물론 조선에서도 선생의 관심사였던 나예방사업이 일대 약진을 이루었다.
…선생은 69세로 대정14년 8월29일 동경의 오치아이(落合)에서 돌아가셨으니 올해로 꼭 15주년이 되는 셈이다.
야마네 마사지(山根正次)는 5년간, 유럽 그 중에서도 특히 프랑스, 이탈리아, 영국의 법의학을 연구한 뒤 귀국하여 경시청 제3부장, 경찰의장(警察醫長)으로서 동경의 위생행정을 맡았으며, 관직을 떠난 뒤에는 전후 6회에 걸쳐 국회의원을 역임했다. 그 간에 [나예방법안]을 제국의회 중의원에 제출(1906년)하는 등, 일본의 한센병 대책과 한센병환자의 격리의 필요성을 강조, 결국 1907년의 법률제11호 [나예방에 관한 건]으로서 4월1일부터 동법이 시행되어 일본은 [국책]으로서 한센병 대책을 시작하게 된다.
야마네는 미츠다 원장의 말대로 [조선초기의 위생고문으로서 명치(明治)말부터 대정(大正) 5년까지] 조선총독부 촉탁이라는 직함으로 식민지 조선의 위생행정에 관여하여, 조선인 한센병환자의 격리를 목적으로 하는 시책추진과 시설실현에 진력했다.
1915년 당시의 조선총독부 의원장(醫院長)은 요시가 에이지로(芳賀榮次郞, 1864-1953)이다.
요시가는 육군군의 출신으로 1887년 동경제국대학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바로 육군에 입대하여 1888년에 2등육군군의에 임명된 뒤 1910년에 군의총감으로 진급, 1914년 이후에는 조선총독부 의원장과 경성의학 전문학교장을 겸하게 된다. 총독부 의원장의 전임자는 후지타 츠구아키(藤田嗣章)(역시 군의총감)이며, 후임자는 적리균(赤痢菌)의 최초발견자로 유명한 시가 키요시(志賀潔1870-1957)이다.
일본의 근대의학은 육군군의총감이던 모리 린타로(森林太郞, 鷗外)가 그러했듯이 독일에서 유학한 군의(軍醫)들의 영향이 강하다. 초기의 식민지(대만·조선) 의료에서의 군의들의 역할에 관해서는 사쿠마 온코(佐久間溫己)의 [초기 식민지 의료에서의 현역군의의 역할]({일본의사학잡지},제30권 제2호, 1984년 4월)이라는 논문에 언급되어 있다. 일본의 식민지통치가 [생명의 안전과 건강증진을 위한 의료위생의 충실에 있으며][이 원칙이 지켜져, 특히 의료가 뒤떨어진 대만과 한국에서 이 방면에 노력이 경주(傾注)되었고, 그 큰 역할을 현역 군의들이 다했다]라는 사쿠마씨의 논지에 대해서는, 군의들이 식민지의료에 관계했다고 하는 사실은 인정하나, 그 역할의 평가에 관해서는 필자는 동의할 수가 없다.
총독부 의원장 요시가 에이지로(芳賀榮次郞)는 [자서전]에서 다음과 같은 문장을 남기고 있다. 이 {요시가 에이지로 자서전}(1950년)은 전후에 출판된 것이지만, 이 원고는 1934년에 기고하여 1935년에 탈고한 것이다.
[조선 시정(施政) 25주년에 즈음한 감회 ― 본인의 기억에 새로운 것은 소록도 나요양소의 개설이다. 원래 조선의 나환자 수용시설은 외국인들의 손에 의해 국내 23개소에 설치되어 있었으나……대단히 유감스러운 점이 많았기 때문에, 총독부로서는 어딘가에 소규모이더라도 완전한 요양소를 설치하고 싶었던 것이다. 이상적으로는 이를 기후온난한 남조선지방, 즉 경상남도 부근의 연안 도서(島嶼) 중에서 적지를 찾고 싶다는 뜻에서……당시 총독부 위생사무 촉탁이었던 현 사토(佐藤) 의전교장(醫專校長)에 위촉하여…](p.253) 사전 점검토록 하여 대략의 목표를 정했다. 마지막 결정을 하기 위해 1915년 4월경 경무총감부의 경비선을 빌려 전라남도 목포부에서 경상남도 부산부 사이의 섬을 돌아본 뒤, 소록도를 한센병환자 수용소 개설을 위한 최선의 후보지로 총독부에 보고함으로서 최후의 결정을 했다는 것이다.
요시가(芳賀)가 한센병 수용소의 설립지를 사전 점검케 했다는 사토 고오조(佐藤剛藏)의 저서인 {조선의육사(朝鮮醫育史)}(1956년)의 [소록도 나요양소의 개설]의 항에는, 요시가의 글과는 약간 다른 내용이 쓰여 있다.
나환자 수용시설은 1916년 봄에 개설되었으나, 그 때는 소록도 자혜의원이라 불렀다. 원장은 아리카와 토오루(蟻川享)라는 군의로, 내가 평양 자혜의원에 있을 때 의관(醫官)으로 평양에 부임해 왔다.
(총독부)내무부 제2과장이었던 오오즈카(大塚常三郞)는 나에게 나환자들의 수용소는 형태만 있으면 된다, 세계에 대해 조선총독부가 나환자들의 수용시설을 준비한다는 것을 알리는 정도로 충분하므로 그렇게 알라고 하였으나, 우가키(宇垣)총독 시절에 본격화됨으로서 훌륭하게 확충되어, 결국은 소록도 전도를 매수하는 대규모 사업이 되었다.
어쨌거나 1916년 2월24일 조선총독부령 제7호로 전라남도 소록도자혜의원은 창설되었고, 같은 해 3월 전라남도 고흥군 금산면 소록도의 서쪽 끝 299,700평(섬의 약 1/6)과 민가 10동(건평 87평)이 매수되었다. 동년 7월10일 초대원장에 아리카와(蟻川享)가 임명되었다. 아리카와는 정6위훈5등(正六位勳五等)으로 육군 일등군의(대위에 해당)였다.
같은 해 7월부터 공사에 착수하여 다음해 1월에는 본관 외 47동 388평(1,280㎡)이 준공되었고, 한센병환자 100명을 정원으로 하여 각 도(道)로부터의 환자수용이 시작되어 연말에는 99명이 수용되었다. 이후, 아리카와는 의원면직되는 1921년 6월6일까지의 4년 11개월간 환자들에 대한 식민지 의료를 강행하게 된다.
당시의 개설된 소록도 자혜의원의 모습과 그 특징을 정리해 보기로 하자.
(1)식민지 의료와 환자에 대한 일본식 생활양식의 강제(强制)
{아으, 70년―찬란한 슬픔의 소록도}(1993년)에서 심전황(沈田■)씨는 아리카와 원장시절의 일들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치료소, 직원관사, 사무본관, 예배당, 목욕탕, 취사장, 병사 등을 준공하고 1917년 5월17일을 기해 개청식을 거행했다. 지방에서 강제 모집되어 온 약 40명의 환자를 남녀병사에 각각 수용했는데 일본식 생활양식으로 훈련시켰다. 남녀를 막론하고 입원 즉시 입고 온 한복 등을 벗겨버리고, [하오리]와 [하카마], [오비][훈도시][게다] 등으로 바꿔 입히고 식사도 [오왕]에 [하시]를 놀려 [다꾸앙]을 먹게 했으며, [카미다나(神棚)] 앞에서 짝짝 손뼉을 치도록 했다.
잠자리도 물론 [다다미]방이었다. 한국식 생활습관에 젖은 환자들로서는 이 일본식 생활이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중략) 저녁8시가 되면 통행금지로 이웃집에도 못 가게 하고, 취침 전에 매양 인원 점호가 있고, 전문 26조로 된 요양생활의 [심득서(心得書)]란 걸 월말에 한 번씩 낭독 또는 암송해야 하는 등, 통제가 너무 심해서 도대체 제대로 즐겨 볼 여가가 적다.
본가(本家)와의 통신이나 가족과의 면회도 제한되어 귀성(歸省) 같은 것은 아예 바라지도 못하는…
너무도 엄격한 통제에 견디다 못한 환자들이 좀 완화해 줄 것을 아리카와 원장에게 누차 건의했건만 원장은 일축해 버리고 여전히 빈틈없는 규칙생활을 강요했다.
예배당에 대해서는 요시가 에이지로(芳賀榮次郞) 담(談) {매일신보}의 1917년 5월31일의 기사 [소록도의 별천지, 문둥병 환자를 수용하는 곳―90명 환자들은 이 부락생활을 즐긴다―] 속에서 다음과 같이 인정하고 있다.
병실 외에는 예배당도 설치되어 있으나, 여기에는 천조대신(天照大神)과 석가여래불이 봉안되어, 직원들을 비롯한 환자들의 예배소가 되어 있었다.) 타키오 에이지(瀧尾英二) 편저 {일제하 조선의 나(癩)정책과 소록도를 산 사람들} 히로시마(廣島) 청구문고,
(1995년) p.91
병원의 직원은 아리카와 원장의 밑으로 의원 1명, 서기 1명, 약제사 1명, 간호사 4명이 있어(1917년 5월 현재) 치료를 담당했다. 아리카와 원장시대에 수용환자의 사망자수 및 사망률이 극히 높았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아리카와 원장시대인 1917-21년 사이의 수용환자의 사망률이 2대원장인 하나이 젠키치(花井善吉) 시대(1922-29년)의 1.1%-3.1%에 비해 월등하게 높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진보된 진료를 받을 수 있다는 사실에 환자들은 그 은혜에 감읍하여…]라는 {매일신보}의 요시가 총독부 의원장의 거짓말(1917년 5월31일)과 다음의 (표-1)을 비교해 보면 식민지 의료의 본질을 잘 알 수가 있다.
년 차 별(년)
1917
1918
1919
1920
1921
1922
1923
1924
1925
1926
1927
(2)[문명국] 일본을 표방하기 위해 구미(歐美)에 보여주기 위한 한센병요양소의 개설, 국가적 체면에 대한 속셈.
총독부 내무부지방국 제2과장 오오츠카(大塚常三郞)가 사토(佐藤剛藏)에게 말했다는 [나환자들의 수용소는 형태만 있으면 된다, 세계에 대해 조선총독부가 나환자들의 수용시설을 준비한다는 것을 알리는 정도로 충분하므로 그렇게 알라]라는 말은, 당시 총독부 의무관료의 의향의 단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이러한 국가적 체면에 대한 속셈은 [1937년 도경찰부장 희망사항]에 언급되고 있는 [경기도]로부터 [나환자 수용의 건]에서도 나타나는 바와 같이, 총독부의 한센병정책이 개별적인 환자를 병이나 비참한 생활로부터 구제하거나, 의료보호하는 것이 아니었다는 것이 명확하다.
(소록도요양소로의) 본도(本道)로부터의 수용은 전무(全無)하며, 국제도시인 경성(京城), 인천과 같은 도시를 가지는 본도로서는 지극히 고통스러운 것이다. 그 중에서도 경성부와 같은 경우에는 조선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로서 내지(內地) 및 여러 외국으로부터의 내왕자가 많다는 점에서 조선과 내지의 여러 도시와는 사정이 전혀 달라서, 동 부내(府內)에서의 나환자들의 배회는 단순한 보건위생상의 문제가 아니라 조선통치의 면목에 관계되므로…) {일제하 지배정책 자료집} 제7권, 고려서림(1993년), p.480
당시 일본 통치하의 조선의 한센병 환자수는 5,000명에서 15,000명 안팎으로 추정되고 있었다. 그러나 앞의 표에서도 알 수 있듯이 1917-1921년의 소록도 자혜의원의 수용 환자수는 93명에서 134명에 지나지 않는다. 즉 조선 전체의 한센병 환자수에서 본다면 1-2%에 불과한 것으로 [나환자의 수용소는 형태만 있으면 된다]는 조선총독부의 간부관료인 오오츠카의 의향은 훌륭하게 구현되었던 셈이다.
(3)일제 식민지 지배의 유지·강화를 위해 구미(歐美) 의존적 기독교 [나]요양소를 배척
이 문제를 생각하기 위해 {일본과 일본인}제821호(1921년 11월호)에 게재된 무라타 마사타카(村田正太, 1884-1974)의 [조선의 구라(救癩)문제]의 내용을 검토해 보자.
무라타의 조선한센병 정책에의 제언과 식민지 인식은, 일제의 식민지 지배의 유지·강화를 위해 기독교 의료선교사들이 운영하는 한센병요양소를 배척, 배제하는 것이었다. 무라타는 동경제국대학 의학부를 졸업한 뒤 미츠타(光田健輔)의 의견에 따라 동경전염병연구소 혈청부에 들어가 한센병환자의 혈청연구에 몰두한다. 무라타의 [조선의 구라문제]라는 논문은 동경 전염병연구소 시대, 조선 남부의 한센병 사정을 시찰한 뒤, 1921년 11월호의 {일본과 일본인}에 발표한 것이다. 시기적으로는 소록도 자혜의원이 개설된 5년 뒤로, 조선 근대사상 최대의 반일독립운동(1919년)인 3.1운동의 직후이자, 조선총독으로 사이토 미노루(齋藤實)를 맞이한 총독부가 민족운동의 분단·약체화를 목적으로 식민지 지배의 유지, 강화를 꾀한 [문화정치]가 시작되는 시기에 해당한다.
무라타는 조선 남부(그는 남선(南鮮), 센징(鮮人) 등의 차별적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를 시찰하고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위생, 사회구제의 방법으로서는 보통의 자혜의원을 중요한 지역에 신설하는 것도 좋은 기획으로서, 현재의 민심상태, 특히 대(對) 선교사정책으로서는 가장 필요한 시설의 하나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욱 시급한 것은 조선에서의 철저한 구라사업의 실시이다. 이는 단순히 나병이 다른 질병에 비해 훨씬 동정해야 할 만한 질병이라는 이유에서만이 아니다. 여기에는 대(對) 외국선교사 정책으로서의 중대한 정치적 이유가 동시에 존재한다]
[이러한 선인(鮮人)들을 국민으로 하는 일본제국―조선총독부―로서 당연히 수행해야 할 일이 아닌가. (중략) 외국인이 하려한다면 하도록 내버려두자고 한다. 배알도 없는 국가란 말인가? 국가로서의 체면도 없다는 말인가.
[외국선교사들의 인심수습이 선인(鮮人) 동화정책에 얼마나 악역향을 미치는 가에 대해서는 최근 수많은 씁쓸한 경험을 가지면서도, 약간의 돈이 아까워 인심수습에는 가장 효과적인 이 사업을, 그것도 항상 요주의 인물시되는 이러한 외국인 선교사들에게 제공하여…]
[본인은 이번이야말로 조선의 대라(對癩)정책을 분명히 정하여 외국인에 대한 위임은 절대로 인정하지 말 것을 사이토(齋藤) 총독에게 희망하는 바이다]
무라다(村田正太)가 이 논문을 발표한 1921년 3월, 6척이 넘는 장신의 소유자로, 거무스레한 얼굴에 큰 코를 가진 한 남자가 아이치현(愛知縣) 기사로부터 조선총독부 기사 겸 경기도 위생과장으로서 부임했다. 바로 이 인물이 스호오 마사스에(周防正秀)로 그에 의해 19년 뒤 식민지 조선의 [전라남도의 소록도]에 무라타의 선생인 미츠다(光田健輔)가 말하듯이 [다년간 외국인으로부터 우롱 당해왔던 일본의 구라시설이 조선에) 미츠다(光田健輔) [소록도갱생원 참관] 1940년 10월 {애생(愛生)} (등풍협회편 {미츠다(光田健輔)와 일본의 나 예방사업}, p.430).
] 세계 1,2위를 다투는 규모의 한센병시설로 실현된다. 수용환자수 6,000명, 건평 62,390㎡, 형무소까지 겸비한 조선총독부 직할의 [구라]시설이 그것이다. 그리고 무라타가 주장한 바와 같이 외국인 선교사에 의해 운영되던 조선의 한센병요양소 3개소(여수, 대구, 부산)는 총독부에 의해서 패원, 폐쇄되게 된다.
이는 무라타(村田正太)에 있어서는 실로 경사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4)개설 당초 소록도자혜의원은 한센병환자와 함께 한센병 이외의 진료도 행했다는 사실.
요시가(芳賀榮次郞) 총독부 병원장이 {매일신보}(1917년 5월31일)에서 말한 바와 같이 [진료소는 유독(有毒)지대와 무독(無毒)지대의 중간에 두어 무독지대로부터의 일반환자도 진찰을 받을 수 있도록 했기 때문에, 최근에는 이 섬만이 아니라 육지로부터도 많은 환자들이 치료를 받으러 오기 때문에 병원은 항상 매우 바빴다) 전게 {일제하 조선의 나(癩)정책과 소록도를 산 사람들} 히로시마(廣島) 청구문고, (1995년) p.91
]고 한다. 환자지대를 [유독지대]라고 차별적으로 부르면서 환자지대와 직원지대의 사이에 경계선을 마련하여, 출입구에는 탈의실을 설치했다(권말의 소록도 자혜의원 배치도). 앞의 요시가 총독부병원장의 담화가 어디까지 사실인지는 모르지만, 어느 정도는 한센병 이외의 지역진료도 하고 있었던 것은 {관보(官報)}등의 기록에 비추어 보아 분명하다. 3.1독립운동(1919년) 뒤에 전개된 [문화정치]의 파도는 이 곳 전라남도 소록도 자혜의원에도 밀려온다. [무단정치] 하의 아리카와 토오루(蟻川享)원장에게 대신하여 소록도 자혜의원에 하나이 젠키치(花井善吉, 육군2등군의정)가 제2대 원장으로 부임되어 온 것은 1921년 6월23일의 일이었다.
3 [문화정치]기의 소록도 자혜의원
―제2대 원장 하나이 젠키치(花井善吉)의 시대―
[배계(拜啓). 며칠전인가 소록도를 찾았더니 어느 틈엔가 나뭇가지마다 봄들이 매달려 있었습니다. 이미 겨울은 지나간 듯 합니다.
괴로운 생활의 무게를 감당하면서 긴 겨울을 보내온 이 곳 사람들에게 언제나 해방의 아침이 올까를 생각하면, 곧 만개할 봄꽃들의 화려함도 쓸쓸하게만 생각됩니다.
그러나 올 겨울, 우리들이 소록에서 만나 긴긴밤을 함께 보내면서 생명과 생명이 부딪쳐 발산되는 따뜻한 열기를 느낀 것처럼, 이 땅의 고통을 함께 나누면서 견디어 나간다면, 결코 슬픈 나날들도 영원하지는 않으리라는 점을 [참길]을 통해 배우려 생각합니다…]
이 문장은 1997년 3월, 한국 대구에 본부를 둔 [참길복지사회연구회]의 이사장 정학(鄭鶴)씨로부터 받은 편지의 첫머리 부분이다.
[참길회]는 1989년부터 매년 여름과 겨울의 2회, 각각 3박4일간, 한국의 젊은이들을 모아 소록도에서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국립소록도병원(한센병요양소)에 입원해 있는 1,000여명(1997년 현재)의 할아버지, 할머니를 대상으로, 젊은이들은 다양한 봉사활동―고장난 전기기구의 수리, 벽지 바르기, 붕어빵 구워주기, 뻥튀기, 온돌에 사용하는 연탄 나르기 등이지만, 이러한 활동을 통해서 오히려 노인들로부터 많은 것을 배우고 있다. 필자도 작년 여름과 겨울, 연속해서 히로시마의 친구 네 사람과 함께 1월29일부터 2월1일까지의 소록도병원 봉사활동에 참가했다. 히로시마(廣島)로부터 소록도를 방문한 우리 일행 5명은 활동의 짬을 내어, 참길회에서 제공해 준 승용차로 섬을 돌아보았다. 소록도는 애생원(愛生園)이 있는 오카야마현(岡山縣)의 나가시마(長島)의 2배정도의 크기로 차를 빌릴 수 있어 큰 다행이었다.
일제통치시대에 만들어진 시설들이 섬의 여기저기에 산재(散在)하고 있다. 감금실, 단종대(斷種台), 화장터, 만령당(납골당), 중앙공회당, 초창기의 진료소, 선착장, 백악(白堊)의 등대, 큰 우물, 폐허화한 소록도신사 본전과 참배당, 일본 황태후의 어가비(御歌碑), 형무소, 병동, 창고…등 전전(戰前)의 한센병요양소를 방불케 한다.
이번의 테마로 잡은 소록도 자혜의원의 2대원장인 하나이 젠키치(花井善吉)의 [창덕비(彰德碑)]도 개축된 초창기 진료소의 동측 도로변에 세워져 있었다. [하나이원장 창덕비(花井院長彰德碑)]라고 표면을 음각한 흑색의 석비(石碑)는 높이가 3미터 정도로, 뒷면에는 하나이 원장의 생전의 업적이 새겨져 있다. 하나이 원장이 죽은 다음해의 1930년 9월에 세워진 것으로 발문(跋文)은 제3대 원장인 야자와 슌이치로(矢澤俊一郞)가 쓰고 있다. 전문은 214자의 한자로 씌어져 있지만, 참고로 현대문 번역문을 다음에 소개한다.
전라남도 소록도 자혜의원은 대정(大正)5년(1916) 2월, 명치천황의 하사금을 기금으로 설립된 조선내의 유일한 나병 전문병원이다. 처음에 아리카와 토오루(蟻川享)가 원장으로 부임했고, 같은 해 6월에 하나이 젠키치(花井善吉)가 제2대 원장이 부임하여 예의(銳意) 원무(園務)를 혁신했으니 모든 언행은 자애(慈愛)에 가득 차 있었다. 그를 열거하면 의복과 식량의 개선이 그 하나이며, 통신·면회의 자유가 그 둘이며, 중증환자실의 신설이 그 셋이며, 두 번에 걸친 병원의 확장이 그 넷이다. 위안회(慰安會)의 창설이 그 다섯이며, 정신교육을 베풀어 오락기관을 마련한 것이 그 여섯이며, 상조회(相助會)의 조직이 그 일곱이다. 이로 인하여 700여명의 환자들이 별세계에서의 생활을 즐길 수 있었다. 그러나 하나이씨는 소화4년(1929) 10월16일 갑자기 서거함으로서 환자들은 곡읍(哭泣), 비분(悲憤)했으며, 서로 상의하여 이 비를 세웠다.
소화(昭和) 5년(1930) 제3대 원장 야자와 슌이치로(矢澤俊一郞) 찬(撰)
제2대 원장 하나이 젠키치(花井善吉)는 일본인 원장으로서는 조선인 한센병환자들의 추앙을 받은 유일한 인물로 육군2등군의정(軍醫正)(중령)에 정5위 훈3등으로 고등관 3등이었다.
1921년 6월23일에 전라남도 소록도자혜의원장에 임명되었으며 전임의 초대원장 아리카와 토오루가 1등군의(대위) 정6위 훈5등이었음에 비해 육군의 계급·위계가 높았다. 소록도에 원장으로 부임했을 때 58세였다고 하니, 당시로서는 상당한 고령의 부임이었다고 할 수있다.
1929년 10월16일 66세로 이 섬에서 사거(死去)하기까지의 8년 4개월간, 창덕비의 비문에서 볼 수 있듯이 조선인 한센병환자의 의료와 생활개선에 힘썼다.
필자가 최초로 소록도를 방문한 것은 2년 반전인 1995년 3월이지만, 그 때 섬에서 들은 것은 다음과 같은 하나이 원장의 에피소드였다.
하나이 원장은 자신이 나병에 걸리지 않으면 환자의 기분이나 괴로움도 알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같은 이부자리에서 환자와 자기도 하고, 환자의 고름을 자기의 상처에 바르기도 했지만 나병에는 걸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중, 하나이 원장은 아름다운 환자, 어떤 젊은 아가씨를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그 아가씨의 피를 뽑아 자기 혈관에 주입하여 자기도 나병환자가 되려 했습니다. 하나이 원장은 나병에 걸려 사거한 것입니다.
후일 서울에서 한국한센병 요양소의 전(前)후원회장이었던 노인으로부터도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었다.
하나이 원장은 어떤 여성환자를 깊게 사랑하여, 그녀와의 사이에 두 명의 아이를 두었습니다. 하나이 원장은 소록도에서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모두 끝내고 자살한 것입니다. 하나이 원장의 사후, 두 아이는 일본으로 돌아갔습니다.
이 하나이 원장의 죽음에 관련하는 이야기는 둘 다 사실이 아니라 [하나이원장 전설]의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대한나관리협회의 {한국나병사}(1988년)에 기록된 바와 같이 [다음해(1929년)의 수용능력은 300여명이 다시 증가되었고, 이에 비례하여 늘어나는 환자들의 진료는 의사의 직무로서는 너무 무리하게 불어났을 뿐 아니라 의식주까지도 돌보아주어야 하는 격무]에 의한, [과로에 의한 순직]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왜 전술한 바와 같은 하나이 원장의 사거(死去)전설이나 풍문들이 한국인들 사이에 존재하는 것일까? 그것은 민족이라든가 국경을 초월한 하나이 젠키치의 한센병환자에 대한 시선을, 환자들을 한사람의 인간으로서 보고, 접하고 사랑한다는 사실을 한국인들이 느꼈기 때문이지 않을까? 전(前) 한국한센병요양소 후원회장이었던 노인은 필자에게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해방 후, 이승만대통령 치하에 일본인에 관한 현창비(顯彰碑), 기념비는 모두 파괴하라는 명령이 내려졌을 때, 당시의 한국인들의 손에 의해 땅 속에 숨겨졌다가 20여년 뒤의 박대통령 시절에 다시 세워진 일본인의 비(碑)가 두 개 있습니다. 하나는 경기도 수원시 교동에 있는 노리마츠 마사야스(乘松雅休)10) 노리마츠 마사야스(乘松雅休, 1863∼1921)는 일본최초의 기독교 해외전도자이다. 1896년부터 조선인에 대하여 조선어로 오로지 복음만을 전했다. 한석희(韓■羲) {일본제국주의의 조선전도} 일본기독교단 출판국(1985년) p.15-84, 한석희저 {일본의 조선지배와 종교정책} 미래사(1988년), p.133-155 참조.
의 비입니다. 노리마츠는 기독 동신회(同信會) 전도자입니다. 또 하나는 소록도 자혜의원장인 하나이 젠키치의 창덕비입니다. 원장은 한국의 한센병환자를 마음속으로부터 사랑했고, 한국의 한센병환자도 하나이 원장을 추앙했습니다].
하나이 젠키치가 소록도에 부임한 2년 뒤인 1923년에 하나이는 [소록도 자혜의원의 나환자통계]라는 제목의 논문을 {조선의학회잡지, 제42호}(4월호)와 {만주의 의계(醫界), 제28호}(7월호)에 발표하고 있다. 그것은 [전라남도 소록도자혜의원에 수용된 한센병환자 145명에 대한 통계적 관찰]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자기 병원의 환자를 관찰하여 그것을 의학회에 발표한다는 것은, 당시 한센병 진료의로서는 극히 드문 일이었다.
하나이 젠키치를 평가할 경우, 또 하나 지적해 두고 싶은 것은 [2번에 걸치는 병원의 확장(1923년 및 1927-28년의 신축공사)]에서 볼 수 있는 원장의 처해진 [입장], 즉 자신의 바탕이 되는 [존재]라던가 혹은 계급성(階級性)과 같은 것을 뛰어넘는 어려움이다. 하나이는 조선총독부의 유일한 [나]요양소의 장(長)이었다. 일제하 조선에서 조선인의 한센병 발병이 급증하고, 부랑·걸식, 아사·동사하는 한센병자가 증가하던 현실을 보더라도 가능한 한 많은 환자를 자기 가까이에 인수하고 싶어했음에 분명하다.
초대 아리카와 원장시대(1917-1920년)에는 정원 100명을 밑도는 73-95명이었던 수용인원도, 하나이 원장시대 전반에는 수용인원이 정원을 크게 상회하기 시작하여, 1923년 이후에는 2배쯤으로 불어난다. 그리고 신축·증축되어 정원이 증원된 1929년에는 소록도에 부임된 당시의 6배가 넘도록 수용인원이 증가되었다. 조선총독부가 발행한 1929년도의 {소록도자혜의원 개황}에 의하면 [건물]의 신축·증축의 평수는 다음의 (표-3)와 같다.
한편, 섬의 원주민들은 한센병환자에 대한 기피감정과 함께 무엇보다도 소록도 자혜의원 확장에 의해 선조전래의 토지, 가옥, 묘지 등을 강권에 의해서 빼앗김으로서 생활의 기반을 잃어버리게 된다는 불안과 현실이 있었다.
년 월
1917년 1월
1918년 3월
1922년 3월
1923년 3월
1924년 3월
1925년 3월
1927년 12월
1928년 12월
합 계
1926년 9월에 조선총독부·전라남도에 의해 [소록도 자혜의원 확장에 따른 토지취득]을 통보 받은 섬의 농어민들은 반대투쟁을 전개했으나 권력의 탄압에 지고 만다.
섬 주민들이 항의하기 위해 원장관사로 몰려든 9월18일로부터 6일 뒤인 9월24일, 하나이(花井善吉)원장이 조선총독부 경무부 위생과장에게 보낸 편지가 남아 있다. [전라남도 소록도 자혜의원]의 전용 편지지에 펜으로 쓴 편지로 그 내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배계(拜啓) 진정인들에 의한 당 병원확장지 매입에 대한 반대는 이미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으나, 소관의 부덕의 소치로 18일의 충돌이 야기되고, 경찰관 가운데서 수명의 부상자까지 나오게 된 점 매우 유감으로 생각합니다. 특히 말씀드릴 점은 당일 오이카와(及川) 서장 이하, 출장 나온 코바타케(小??) 형사가 자신의 몸을 희생하면서까지 병원 보호를 위해 분투함으로서, 소관(小官) 이하 직원일동 및 환자 모두가 안전할 수 있었던 바, 병원 측으로서 진심으로 심심한 사의를 표하는 바입니다. 경찰관 중에 부상자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마을 사람들에게는 한사람의 부상자도 없었기 때문에, 한편으로는 매입상의 사무에 좋은 영향을 미쳐, 일의 진척이 빨라진 감도 없지 않습니다. 이 점 안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부상 경찰관들도 경과가 좋아 5명 모두가 치유되었다 해도 지장이 없을 정도이므로, 이에 대해서도 안심하시기 바랍니다. 본문에 누락된 부분은 각 도(道)로부터의 보고를 참조하시기 바라며, 국장, 정무총감각하에게는 귀관께서 보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바쁜 관계상 이만 줄입니다.
9월24일 하나이(花井)원장
이시카와(石川) 위생과장님
사진 보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하나이(花井)원장의 한센병환자를 생각하는 [선의]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덧붙여 말하자면 일본나학계의 [나예방법 폐지요구]의 통일견해(1995년 4월13일)에서 말하는 [구라(救癩)의 기치 아래 격리를 최선책으로 믿고, 그에 생애를 바친 사람] 중의 한사람으로 조선의 [나(癩)]정책과 의료에 관여했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선의]만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이 역사의 현실이다. 그는 조선총독부 경무부의 이시카와(石川) 위생과장에게 보낸 앞의 편지 속에서 [경찰관 중에 부상자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마을 사람들에게는 한사람의 부상자도 없었기 때문에, 한편으로는 매입상의 사무에 좋은 영향을 미쳐 일의 진척이 빨라진 감도 없지 않습니다]라고 말하고 있다. 하나이 원장 때인 1926년 9월의 토지매입과 병원확장공사에 의해, 소록도 전체의 1/3이 자혜의원 부지가 되고, 500평 정도에 불과했던 병원건물이 일거에 1,300여평으로 신, 증축, 확장되었다.
수용환자를 생각하는 하나이(花井)의 [선의]는, 그 후 조선총독부의 의향에 의해 만들어진 조선나예방협회에 의해 소록도 전체가 매수되어, 세계 최대규모의 한센병환자의 격리의 섬을 만드는 길을 열게된다. 1933년 6월, 소록도의 150여호, 900여명의 주민 전원이 섬 밖으로 이전되고, 조선 전국으로부터 6,000명이나 되는 한센병 환자가 이 섬에 강제수용 되는 것이다.
[격리를 최선책으로 믿고, 거기에 생애를 바친 사람들의 마음까지를, 우리들이 유린할 권리는 없다]라고 일본나학회(현·일본한센병학회)는 말한다. [우리들이 유린할 권리는 없다]라는 것은 어떤 행위를 가르키는 것일까?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필자는 생각한다. 조선총독부가 발행한 1929년도 {소록도 자혜의원 개황}에 게재되어 있는 [북병사 예배당에서의 목사와 신자]라는 제목의 한 장의 사진) [소록도 북병사 예배당에서의 목사와 신자](1929년도 {소록도자혜의원 개황}
을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두 사람의 목사, 전도사와 함께, 86명의 [기품 있어] 보이는 환자들의 모습. 남녀 환자들은 모두 민족의상인 바지저고리와 치마저고리를 입고 조선식 신발을 신고 있으며, 여성환자들은 머리칼을 예쁘게 좌우로 가르고 3열로 늘어서 있다.
소록도 자혜의원이 창설되었을 당시, 초대원장인 아리카와는 수용환자들에게 일본식 생활양식을 강요했다. 입원과 동시에 환자들이 입고 있었던 한복을 벗게 하고, 하오리, 하카마, 오비, 훈도시, 게다 등으로 갈아입게 하였다. 식사도 일본식 그릇에 젓가락만을 사용토록 하고, 다꾸앙을 먹도록 했으며, 천조대신(天照大神)을 모시는 카미타나(神棚) 앞에서 기도하도록 했다. 이것이 [무단정치]하의 조선인 나환자들에게 강요된 초대원장 아리카와의 요양생활의 방침이었다.
부임 3개월 후인 1921년 가을, 하나이(花井) 원장은 광주, 부산, 대구, 세 곳의 기독교 의료선교사들이 경영하는 한센병요양소를 시찰했다. 그리고, 아리카와 원장의 병원운영방식의 시정과 개선에 임했다. 옷을 종래의 한복으로 되돌리고, 중앙배급식이었던 식사도 각 병동별로, 각자 환자의 입에 맞은 것을 먹도록 했다. 자혜의원 직원들에게는, 환자들을 멸시한다던가 학대하는 사람이 있을 경우 엄벌할 것을 경고하여, 병원내의 환자와 직원 사이의 상호융화에 노력했다.
기독교가 소록도에 전파되고 교회가 세워진 것은 하나이 원장의 시대이다. 1913년 10월8일, 당시 전라남도 광주에서 전도하고 있던 타나카(田中眞三郞) 목사(성결교회·홀리네스)가 조선총독부의 포교허가를 얻어 소록도로 들어가, 이틀 간의 집회를 가진 것이 교회설립의 효시가 되었다. 나가시마 애생원의 아케보노(曙)교회의 목사인 오구라(小倉兼治)가 쓴 {세토(瀨戶)의 여명}(1959년)에 의하면, 시오자키(鹽崎逸野)는 조선으로 건너가, 이상적인 크리스찬의 [나환자촌]을 건설하려 했으며, 한센병환자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타나카목사와 알게된 두 사람은 결혼하기에 이르렀다고 한다.
하나이 원장은 야외에서 기도하고 있는 기독교 환자를 불쌍히 여겨, 천조대신(天照大神)을 모셔 놓았던 곳을 교회 예배당으로 사용할 것을 허용했다. 하나이는 {소록도자혜의원 개황} 속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당원의 시설로서 오직 종교에 귀의하기 위한 예배당을 설치하여 매월 1회, 이틀 간 목사를 초빙하여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고 있으나, 그 때마다 다액의 경비를 요하여, 내지와 같은 봉사적인 고문(顧問)이나 강화(講話)를 들을 기회가 지극히 한정되어 있다는 점은 매우 유감스러운 일로써(p.22-23).
그리고 1926년 4월부터 설립된 [환자위안회]의 회비 가운데서, 1929년도에는 [일반위안비]라는 명목으로 부활제 비용(61원 80전), 감사제 비용(30원), 크리스마스 비용(110원), 그리스도 성화(聖畵) 대금(4원)을 지출하여, 기독교 환자들을 원조하고 있다. 이렇게 하여 섬에 뿌리를 내린 복음의 씨앗은 열 배, 백 배의 열매를 맺게 되었고, 신자가 증가함에 따라서 천조대신을 모신 카미다나(神棚)가 철거되고, 기독교 예배당으로 상시(常時) 사용되게 된 것이다.
하나이 원장은 교육에도 힘을 쏟았다. 전술한 {소록도 자혜의원 개황}에는, 다음과 같은 기술이 보인다.
대부분의 환자들이 교육을 받지 않은 자들이었으므로, 이들에 대한 지덕함양을 목적으로, 환자들 가운데서 학식 있는 자들을 선발하여, 남북 양사(兩捨) 공히 보통학교 교과서를 제공한 즉, 점차로 문자를 해독할 수 있는 자들이 늘어남은 진정 기뻐할 현상으로서, 목하 생도수가 187명을 헤아리게 되었다(p.28쪽).
4 소록도 자혜의원 확장공사와 도민(島民)들의 반대투쟁
―1926년의 경우―
소록도갱생원 {소화16년 연보}(1942년 4월 발행)의 [개원이래 수용정원 및 실제수용인원 비교표(p.26-27)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이 [수용정원]비교표에서 알 수 있는 것은 1927년에 250명이던 수용정원이 2년 후인 1929년에는 750명으로 3배나 증가했다는 사실과, 1933년에 1,170명이었던 수용정원이 2년 후인 1935년에는 3,770명으로 3배 이상 증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전자는 2대원장인 하나이 젠키치(花井善吉)의 시대에, 후자는 4대원장인 스호오 마사키(周防正季)의 시기에 해당된다.
이 장에서는 전자, 즉 하나이 원장 시기에 소록도 자혜의원의 확장계획이 실행됨에 따라, 섬 주민들로부터의 토지매입이 어떻게 강행되었으며, 그에 대한 주민들은 저항이 어떠했던가를, 경위를 따라서 살펴보기로 한다.
대한나관리협회의 {한국나병사(韓國癩病史)}(1988년 발행)에는, 이 사실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자혜의원은 1백명의 수용능력을 가지고 출범했기 때문에 확장의 불가피성은 당초부터 지니고 있었고, 또 그것은 시급을 요하였다. 이리하여 확장사업을 착수한 하나이 원장은 원주민들의 눈을 피하기 위해 달 밝은 밤을 이용, 기사와 더불어 토지측량을 시행하였다. 그러나 비밀은 유지되지 못하고 확장사업계획이 노출되자 이에 반발한 주민들은 원장사택으로 몰려와 강력히 항의하며 계획의 즉각 폐기를 요구하고 나섰다. 사태가 이에 이르자 모든 사실을 숨길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원장은, 이는 국가의 방침이며 국가사업이니 방해할 수가 없다고 주민들의 요구를 일축, 짐짓 위압으로 대하였다. 그렇지 않아도 나병환자들과 이웃해 살아야 한다는데 대한 공포와 강제로 생활터전을 내어주고 떠나야 했던 주민들의 전례가 있어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있던 주민들은 분기하였다.
1926년 9월19일, 일단 퇴각하여 숙의(熟議) 끝에 전열을 가다듬은 주민 2백여명은 제각기 손에 손에 흉기를 들고, 병원 철조망 가까이 육박하여 결사적인 생존권 보호투쟁에 돌입하였다. …70여 경찰증원군이 출동, 불상사는 간신히 면할 수 있었으나 소요(騷擾) 주모자 60명이 검거되어, 그 중 4명은 최고 3년6개월, 최하 1년의 실형판결을 받는 등의 수난을 겪었다(p.76-77).
심전황(沈田■)저 {아으 70년-찬란한 슬픔의 소록도}(1993년 발행)에도, 이 확장공사에 관련된 사건에 대해 거의 동일한 내용이 기술되어 있다(p.28-29). 과연 소록도 자혜의원 확장사업을 하나이 원장의 독단전행(獨斷專行)으로 볼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면, 조선총독부의 중추수뇌부가 지방관에게 지시·명령하여 확장사업을 강행토록 하였고, 그에 반대하는 소록도 농어민의 투쟁을 탄압한 사건이었을까. 이러한 의문은 대한나관리협회의 책자에서도, 심전황씨의 저서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가 없었다.
1996년 10월21일부터 2주간, 필자는 조선근대 한센병의 역사를 조사하기 위해, 서울, 대구, 부산 등지를 여행했다. 그 해 4번째의 방한이었다. 서울에서는 국회도서관, 국립중앙도서관, 총무처 정부기록보존소를 방문했다. 특히 총무처 정부기록보존소(일본의 국립공문서관에 해당)는 일참(日參)하여 일제식민지 지배하의 [나(癩)]정책에 관한 자료열람과 마이크로 필름을 복사했다.
정부기록보존소는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에서 북서쪽으로 도보로 8분, 효자로 서쪽에 위치하는 백악의 5층 건물(출장소는 부산에 있음)이다. 필자가 찾아간 1996년 10월은, 때마침 북한 잠수함 승무원에 의한 [침입사건]이 있은 직후로, 정부의 주요기관이 모여있는 부근 일대는 엄중한 경비태세하에 있었다. 노랗게 물든 은행나무 가로수가 늘어선 가을풍경 속을 순찰하고 있는, 검은 제복, 검은 모자의 경찰관들의 모습은 왠지 어울리지 않는 느낌이었다.
어쨌거나 정부기록보존소 직원의 호의로 사흘 간에 걸쳐 한센병에 관한 많은 귀중한 자료를 열람하고 복사할 수가 있어서 매우 만족스러웠다.
정부기록 보존문서는 일제시대에 한정하여 말한다면 [총괄목록]으로서 제1집부터 제3집까지의 3책자와, [색인목록]으로 제1집의 I에서 Ⅶ까지의 7책자, 합계 10책자로 이루어져 있으며(1974-84년 간행), 1권의 목록이 1,000쪽 전후에 달하는 방대한 책자이다. [일제]시대에 관한 자료의 방대함과 그것들이 모두 [마이크로 필름]화되어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나(癩)정책에 관한 자료를 살펴보려고 [보건·위생]을 수록내용으로 하는 [색인목록] 제1집 제7권의 [일정(日政)시대] 문서편(1984년 발간)을 뒤적여 보았다. 제2편 제9장이 [보건사회]로, 보건 항에는 [1935년 나병요양시설 관계서류], 위생 항에는 [대정(大正)14년-소화(昭和)9년 소록도자혜의원 관계철 위생과]가 수록되어 있었다. 생산기관명은 [총독부]이다.
후자의 마이크로 필름을 빌려 [마이크로 리더]로 열람해 보니, 당시에 쓰여진 그대로의 행정문서를 확인할 수가 있었다.
[정부총감 수신·전라남도지사 발송의 {소록도자혜의원 수용인원증가 및 그 경비에 관한 건}], [내무국장 수신·경무국장 발송의 {건명, 소록도자혜의원 부지매수에 관한 건}], …등의 총39건으로 이루어진 총독부 행정문서이다. 각 건은 더욱 상세하게 기안서·보고서 등으로 이루어진 것도 있었다. 제8장 건축 항에는 [1929년 소록도자혜의원 나병사 기타 신축공사관계철]이 수록되어 있었다. 이하, 이들 자료를 소개하면서, 이 장의 소제목인 [소록도자혜의원 확장공사와 도민(島民)들의 반대투쟁 ―1926년의 경우―]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자.
1916년 2월, 관립 소록도자혜의원(나요양소)은 전라남도 남단의 소록도에 설립되었다. 당초는 정원 100명의 소규모 시설로서, 초대원장은 육군군의였던 아리카와(蟻川享)였다. 1921년 6월에 부임한 2대원장 하나이(花井善吉)도 역시 육군군의이다. 아리카와는 [무단정치기]의 식민지 의료를 실시하여, 조선의 생활습관이 몸에 익은 환자들에게 일본식 생활양식을 강제함으로서 환자들의 자유를 빼앗아, 병원은 마치 야전병원과 같은 양상을 보였다.
이에 비해, 아리카와의 뒤를 이은 하나이 원장은 3.1운동(1919) 이후, 조선총독 사이토 미노루(齋藤實)에 의한 [문화정책]시대(1920년대)를 반영하여, 총독부의 조선지배에 저촉되지 않는 범위에서 환자들의 자유를 보장하면서 [나(癩)]의료를 행했다. 최정기(崔晶基)는 {일제하의 나환자 통제에 관한 연구―나환자 관리조직을 중심으로}(전남대학교대학원 사회학과, 석사학위논문, 1994년) 가운데서, [2대원장 하나이는……나환자의 치료와 복지에 힘을 쏟았다고 한다. 물론, 조선총독부의 나관리 정책이 분명치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이러한 재량권 행사가 가능했던 것이다](p.43)라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는 하나이 원장 만년인 1926년에 강행된 관립소록도 자혜의원(나요양소)의 확장, 토지매입의 문제를 통해 [문화정책]기의 위생행정의 실태를 명확히 밝힘으로서, 총독부의 조선지배의 일단을 살펴보기로 한다.
일본이 조선을 합병하여 식민지화한 1910년 이후, 조선 남부에서는 경상, 전라의 각도를 중심으로 한센병환자가 급증한다. 일본 본위의 식민지 수탈정책이 조선민중의 생활을 파괴함으로서 {조선총독부 관보}에 게재되는 아사·영양실조·동사·액사(縊死) 등에 의한 행려(行旅)사망자는 엄청난 숫자에 이르게 된다. [나(癩)]발병자의 급증은 일본 식민지 통치하의 열악한 생활환경과 그에 따라 나균에 대한 저항력을 잃은 체력에 기인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총독부 경무국 조사(1923년)에 의하면, 나병 증상이 외부로 나타난 자의 숫자만 보더라도, 전체 조선에 남성 3,035명, 여성 1,207명으로, [4천여 나환자 중 영남이 과반수, 수용소는 관사(官私)합쳐 4개처]이다. 그 외에도 증상이 외부에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에 확인되지 않은 사람들…까지를 더한다면 실로 1만명은 될 것이라고 1926년 1월25일부의 {동아일보}가 보도하고 있다.
조선총독부 경무국 {도경찰부장회의 자문사항 답신서}(1923년 5월)의 [극비]자료에 의하면, 4항목의 [답신사항]이 게재되어 있다. 그 중의 한 항목으로 [나예방에 관한 명령제정의 가부(可否)]가 들어있다. 그 내용을 살펴보자.
4. 나예방에 관한 하기(下記) 요령의 명령제정에 관한 가부(可否)
나예방에 관한 명령안 요항
(가) 의사는 환자를 진단할 때와 사체를 검안할 때는 환자 또는 가족에게 소독 기타의 예방방법을 지시하고, 그 취지를 경찰관서에 신고할 의무를 가진다.
(나) 나환자가 있는 집이나 나병독에 오염된 집에 대해서는, 의사 또는 해당 관리의 지시에 따라 소독 기타의 예방방법을 행하도록 할 것.
(다) 경찰서장이 필요하다고 인정할 경우에는 나환자를 요양소에 입소시키거나 또는 일정 지역 이외로의 출입을 금지시킬 수 있다.
(라) 경찰서장은 나환자에 대해 업무상 병독을 전파할 우려가 있는 직업에 종사하는 것을 금지할 수가 있다.
조선총독부 경무국의 [나예방에 관한 명령안 요항]에 대해 경기, 충북, 충남, 전북, 전남, 경북, 경남, 황해 등의 각 도의 경찰부장들이 각기 [답신]을 행하고 있다. 그 중에서 경기와 충북 2개소의 [답신]을 살펴보기로 하자.
경기
나예방에 관해 명치(明治)40년 3월 법률 제11호로 나예방에 관한 건과 거의 동일한 법령을 정한 것은 조선에서도 이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지(內地)에 있어서는 예방에 관한 제반시설 및 비용은 주로 지방단체의 의무에 속해 있으나 조선은 민도(民度)의 관계상 국가시설로 하고 그 비용도 역시 국비로 지불하며 일부분에 대해서는 대정(大正)8년 4월의 부령 제61호) [대정(大正)8년 4월 부령(府令)제61호]란 [전염병예방령(1915년 6월), 제령제2호]로 공포된 [동령]의 제22에 정한 [지방공공단체의 의무에 관한 건]을 말한다.({관보}1919년 4월6일부)
에 준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된다. 이를 나누어 설명하자면
(가) 의사가 나환자를 진단할 때와 그 사체를 검안할 때는 환자 또는 그 가족에게 소독 기타의 예방방법을 지시하고 그 취지를 검찰관서에 신고할 의무를 가진다.
의사에게 신고의 의무를 부과하는 것은 예방 및 박멸상 필요하다고 인정되며, 때때로 이에 의생(醫生)을 가담시킬 필요가 있을 것임.
환자 및 그 가족에게 소독 기타 예방법을 지시해야 할 의무를 의사 의생에게 부여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나)의 규정을 성실히 행함으로서 실효를 얻는 것 이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고 생각된다.
(나) 나환자가 있는 집 또는 나병독에 오염된 집에 대해서는 의사 또는 해당 관리의 지시에 따라 소독 기타 예방법을 행하도록 할 것.
나환자가 있는 집 또는 나병독에 오염된 집에 대해 개인으로 하여금 소독 기타의 예방방법을 행하도록 하는 것은 그 시행이 곤란) [부령 제61호]의 제2조는 [비용은 부(府), 면의 부담으로 한다]라고 되어 있다. 또 제4조에는 [제2조2에 의한 부, 면의 지출에 대해서는 도(道)장관이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한도 내에서 지방비로 보조할 것]이라고 기술되 어 있다.
하므로 대정8년 4월 제61호를 참작하여 적당한 규정을 정하여 그 비용의 일부는 지방비에서 보조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됨.
(다) 경찰관서장은 필요하다고 인정될 때는 나환자를 요양소에 입소시키거나 또는 일정한 지역 밖으로의 출입을 금지할 수 있다.
나환자를 요양소에 입소시키거나 또는 일정한 지역 밖으로의 출입을 금지시키는 것은 필요하나, 요양소의 설립 및 경영에 필요한 비용을 내지(內地)의 예에 따라 도(道)에 부담케 하는 것은 현하(現下)의 사정이 허락지 않으므로 국비로 하고, 환자들이 변상할 수 없는 구호비도 국비로 지출함이 당연하다고 생각됨.
(라) 경찰관서장은 나환자에 대해 업무상 병독전파의 우려가 있는 직업에 종사하는 것을 금지시킬 수 있다.
직업의 제한은 예방상 반드시 필요한 일이나 이로 인하여 자활(自活)이 불가능한 자의 구호비는 지방비로서 지출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함.
충북
본 명령은 이를 제정함이 바람직하다고 믿는다. 그러나 조선 나환자 중에는 적당한 구호자(救護者)가 없거나 혹은 발병과 동시에 가족이나 친지들로부터 버림받거나 또는 스스로 이를 부끄러이 여겨 가향(家鄕)을 탈출하여 부랑배회하는 자가 많다. 따라서 의료를 받을 수 있는 자가 적어 점점 더 병독이 전파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양기관으로는 정부가 경영하는 곳은 소록도 자혜의원 뿐으로 그 외에 광주나병원, 동래군 감만리 나병격리원 및 달성군 서면 나병원과 같은 사설 나병원이 있으나 그 설비가 불완전하므로, 우(右)명령과 동시에 강제수용격리를 만족시킬 수 있는 설비를 완성할 필요가 있다고 믿는다.
앞에서 소개한 최정기의 {전남대학교 대학원 석사논문}은 이에 언급하여, 1930년대까지의 총독부의 [나(癩)]정책에는 [격리, 수용이 보건위생상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대책이라기보다는 그 과정을 통해서 정치적, 사회적인 효과를 얻을 수 있다는 생각이 깔려 있었다. 즉 일제는 나환자들을 격리, 수용하면서 나병에 걸리지 않은 사람들의 사회적인 통합을 성취하고, 부랑나환자의 배제(排除)를 통해서 사회질서를 유지하고 있었으며, 그 과정에서 사회적 통제의 근거가 되는 국가권력의 정당성을 확보하고 있었다(미셸 푸코의 {광기의 역사}{감사(感謝)의 처벌}등에는, 이러한 감금체계가 가지는 사회적 의미가 잘 지적되어 있다). 이것은 실제로 나환자들 중의 극히 소수만이 격리, 수용의 대상이었고, 이러한 시설을 보완할 정도의 다른 대책들이 없었다는 사실에서도 잘 알 수가 있다. 이렇게 볼 경우, 지금까지의 통제가 형식적인 수준에서 진행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p.20-21)라고 지적하고 있다.
이러한 총독부의 [나]정책과 한센병환자의 사회적 통제에 대하여, 동 환자들의 의료와 보호를 총독부에 요구하는 의견들이 많이 보인다. 이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자.
{동아일보}(1923년 12월31일부)는 [경북 달성에 나병환자 상조회/병 치료와 전염예방이 목적/전 조선에 환자가 2만여명]이라는 표제 하에, 다음과 같이 보도하고 있다.
사람에게는 비애와 고통이 많이 있지만 질병보다 더한 비애와 고통이 없으며 질병 중에도 [문둥병]보다 더한 비애와 고통이 없을 것이다. 그들은 부모처자에게도 버림을 받고 친척고구(故舊)에게도 배척을 받아 많은 원한과 많은 저주를 가지고 혹은 산비탈에서 혹은 길거리에서 덧없는 생명을 유지하다가 그만 무참히 세상을 버리나니 실로 가련하고 동정할만한 자는 문둥병자이다.
조선에는 2만여명의 문둥병 환자가 있어서 이와 같은 비참한 운명아래 덧없는 목숨을 보존하고 있으되 그들을 구제하는 기관으로서는 외국사람이 경영하는 광주, 대구, 부산에 있는 [나병환자 수용소] 세 곳과 총독부에서 경영하는 소록도의 [수용소]가 한 개가 있어서 1천여명의 환자를 수용하고 그 외 1만9천여명의 환자는 어찌할 길이 없어서 죽을 지경에 이르렀으되 그들을 구제코저 하는 사람은 별로히 없다. 이에 그 문둥병 환자들은 자기들이 자기들 끼리로 단결하야 가지고 무삼 살길을 찾고저 요사히 대구 나병환자 상조회라는 것을 설립하였다 한다. 그들은 서로 돈을 모아 가지고 치료를 통일하며 또는 서로 돕고 서로 붙들며 무삼 광명한 길을 찾고저 애쓰는 동시에 행동을 삼가서 남에게 전염되지 아니하게 하고저 하는 중인데 그 사무소는 경북 달성군 달서면 내당리에 두고 분투노력하는 동시에 다시 일반 눈물있고 피있는 유지들의 동정을 받아 그 회를 영원히 유지코져 한다 하며 현재 직원으로는 회장·총무·회계 등 5, 6인이 있는데 회무(會務)가 발전됨에 따라 장래에는 조선 각지에 지부를 설립하고 병 치료와 전염예방에 힘쓸터이라더라.({동아일보} 1923년 12월31일).
{동아일보}(1926년 5월25일)는 [나병자 수용에 대하여]라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은 사설을 쓰고 있다.
나병자 수용에 대하여는 오인(吾人)이 본란(本欄)에서 이미 누차 당국자에게 경고한 바 있거니와 최근 다시 이 문제로 인하야 부산부(釜山府)를 중심으로 경상도 당국자간에 재연(再燃)되여 구체적 구제책을 연구중이라고 하니 이 기회에 다시 오인(吾人)의 진술하여 두는 것도 결코 무용(無用)한 일이 아닌 줄 믿는다……그 병이 전염병인 고(故)로 독일에서는 근절(根絶)을 시켰다고 한다. 그러므로 나병은 야만병이라는 별명이 있다. 즉 야만국에나 있을 병이오 문명국에는 없앨 수가 있다는 말이다(중략).
소록도에 자혜의원을 설치하여……일년예산 약6만원, 수용환자수가 241명(작년 12월말 현재)에 불과하며……나병환자 2만명 중, 정부의 손에 의해 보호되고 있는 사람이 불과 241명이라니 얼마나 조선인의 생명이 등한시되고 있는 가를 알 수 있으며……우리들은 인도문제(人道問題)로 이 문제를 크게 취급함으로서 당국자의 반성을 촉구하지 않을 수 없다.
1927년 5월의 [도지사회의]에 제출된 의견 중에서도, 경상북도지사로부터 다음과 같은 의견이 제출되었다. 동 지사의 의견은 [나(癩)는 성질상 국가가 구제해야 하는 것으로 오해하여, 현 제도를 운위(云爲)하는 자들이 있어]라는 식의, 극심한 인식결여를 보여주는 것이다. 소록도자혜의원 확장공사에 대한 [소요]사건으로부터 8개월 뒤의 도지사회의이기는 하지만, 참고로 다음에 소개한다.
본 도에 현존하는 나환자는 실로 2,000여명에 달하며, 그 대부분이 하층 영세민으로 스스로 치료할 방도를 강구할 자력(資力)이 없음은 물론, 자활(自活)할 길조차 궁한 것이 현실이다. 실제 외국인이 경영하는 대구 제중회(濟衆會)가 구라사업을 확장하고 이를 군부(郡部)까지 연장한다는 계획은 이들 환자들을 현저히 자극하여 통유적(通有的)인 의뢰심을 조장하고 있다. 그리고 나(癩)는 성질상 국가가 구제해야 하는 것으로 오해하여, 현 제도를 운위(云爲)하는 자들이 있어, 특히 대구 나(癩)상조회는 때때로 도(道)에 대해 원조를 요구하기도 하고 또는 도평의회에 대해서도 동일한 탄원을 하여……({사이토 미노루(齋藤實) 문서} 제3권, 고려서림 1990년, p.774).
1926년 10월17일자 {동아일보}는 [요양비를 좀 달라고 나병환자 탄원/130여명의 나환자가]라는 표제로 다음과 같은 기사를 싣고 있다.
경상남도 동래군 서면 호곡리 나병환자 상조회 130여명의 나병환자를 대표한 김돈화(金敦化)가 총독부당국에 탄원서를 제출하였다는데 그들 130여명은 전남(全南)과 기타 나병환자 치료소에 들어가 보려고 여러 곳으로 다니었으나 소록도병원이나 혹은 외국사람이 경영하는 병원은 모두 만원이 되어 거절함으로 할 수 없이 촌촌(村村)으로 구걸을 하는 중 날은 차차 추워지고 겨울살이 망연하므로 이 앞으로 일년동안 살아갈 요양비 6,400여원만 달라는 의미의 탄원이라더라.
현재, 서울에 있는 정부기록보존소 소장의 [소록도자혜의원 관계철]의 의원확장문제 일건 문서는 이상과 같은 1922년대 후반의 세태(世態) 가운데서 입안, 작성된 것이다.
소록도자혜의원이 당시 [도립(道立)]이었기 때문에, 대부분은 총독부와 전라남도 당국과의 왕복문서, 명령, 보고문서 등이다. 당시의 전라남도 지사는 장헌식(張憲植)으로 1926년 당시, 조선 13개도 중에 충북, 충남, 함북, 강원 및 전남의 각 도지사가 조선인이었다.
[소록도자혜의원확장 일건문서]의 모두(冒頭)는 [대정(大正)14년(1925) 6월18일, 전라남도 지사]가 조선총독부 정무총감에게 보낸 [소록도자혜의원 수용인원 증가 및 그 경비(經費)에 관한 건]이다. 이 문서에는, 조선총독 사이토(齋藤實)의 사인(sign)과 함께 정무총감과 경무국장 등의 날인(捺印)이 보인다. 동 자료를 다음에 게재해 둔다.
관하(菅下) 소록도자혜의원 확장의 건에 관해서는 상신(上申)한 바와 같으며, 동원에는 작년에 환자수용을 목적으로 건축한 가옥 6동(조선식 초가, 각 동 8평8합8작, 2동에는 5합의 변소부속, 5동에 각 10명을 수용, 1동은 중증환자실에 충당할 예정)이 있어, 이를 사용할 경우 새로운 환자 50명의 수용이 가능하며, 그 경비는 환자에 직접 필요한 별지 내역과 같습니다.
직원은 현재 인원으로 운영 가능하며, 수용인원 50인 증가의 건이 승인되면 금년 7월부터의 실시하려 하니 예비금으로부터 별지 금액의 지출을 상신하는 바입니다.
라 하여, [소록도자혜의원 수용정원 증가에 따른 경비조사서]로 [일금 6,151원 30전]을 계상하고, 그 내역으로 다음과 같은 표를 제시하고 있다.
인원
1인당 하루 경비
7월∼3월의 연일수
연인원
비 고
50명
44.9전
274일
13,700명
1인당 하루
약품 및 주사재료비 5.4전
식비 23.9전
피복비 2.4전
고용인 급료 등 13.2전
계 44.9전
(과거 3년 간의 평균조사)
9평이 안되는(약 29㎡) 목조 초가지붕의 숙사에 10명의 한센병환자를 수용하고, 하루에 1인당 44전9리(그 중에 식비 약 24전)으로 생활하는 셈이다. 2개 동에 다다미 반장 넓이의 변소가 하나. 이것이 당시의 소록도자혜의원에 수용된 환자들의 생활이었다.
다음 표와 같이 하나이(花井)원장은 수용정원을 넘어선 환자들을 수용하고 있었다. [나가시마(長島) 사건]을 일으킨 미츠다(光田)원장 하에서의 나가시마 애생원의 1936년 8월 당시의 상황과 비슷하다. 1925년과 26년에는 실로 수용정원의 2배나 되는 환자를 수용하고 있다.
년도별
수용인원
실수용인원
과감률(%)
1920
100
95
95
1921
100
121
121
1922
100
171
171
1923
100
196
196
1924
125
195
156
1925
125
241
193
1926
125
249
199
다음해인 1926년 2월25일, 총독부 경무국장은 동 내무국장 앞으로 [건명·소록도자혜의원 부설매수에 관한 건]을 발송하고 있다. 당시의 경무국장은 미츠야 (三矢身宮松), 내무국장은 이쿠타(生田淸三郞)이다.
총독부의 [나(癩)]정책을 주관한 것은 경무부 위생과로, 과장은 세키미즈(關水武)였지만 같은 과의 기사인 [니시키(西龜)]도 도장을 찍고 있다. 이 니시키가 바로 니시키 산케이(西龜三圭)로 [소록도자혜의원 부설확장에 관한 건]의 문서에는 일관되게 도장을 찍고 있다. 그 후, 니시키(西龜)은 1930년 4월에 총독부 경무부 위생과장이 임명되고, 재단법인 조선나예방협회를 설립(1932년 12월27일)하여 동(同) 협회의 상무이사를 겸임한다.
[소록도]요양소 대확장계획(1933∼39년)을 세우는데 중심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다.
1926년 2월25일자로 내무국장 앞으로 보내진 경무국장 문서에는 [대정(大正) 15년도의 소록도자혜의원 부설매수비로서 일금 8,194원을 계상하며, 이는 별지 내역과 같으므로 예산이 확정된 이상 신속히 매수토록 할 것]이라는 내용과 함께, 별지에 다음과 같은 내역을 첨부하고 있다.
소록도자혜의원 부설(敷設) 매수(買收) 8,194원
확장지역
1. 확장예정지
원내 소재의 동서(東西)지역으로 삼면 바다에 접하고 한 면만이 원(院) 부지와 경계함.
2. 면적 28정(町) 5무(畝) 2보(步)
임야 64,928평
답(논) 6,092평
밭 12,340평
대지 792평
비고 현재 민가 5채
3. 매수가격
답(논) 3,655.20
밭 1,851.00
산림 및 원야(原野) 850.00
대지 87.60
계 6,443.80
4. 부속 제비용
묘지 및 분묘 30개소 이전료 1개소 이전료 30원
45기 900.00 (미발견 예상 10여개소)
가옥 5채 1채 매수 70원 난외(欄外)
350.00
동 이전료 1채 100원 (이전료를 제외하고 매수비 170원으로 할 것)
500.00
계 1,750.00
이틀 뒤인 2월27일, 총독부 경무국 위생과장은 전라남도 경찰부장 앞으로 [의원확장 예정부지에 관한 건]이라는 조회서를 보내, 전기(前記)의 임야, 답, 대지, 민가 5채의 소재위치를 도면에 표시하여 급히 2통을 송부하도록 요구하고 있다. 이에 대해 동년 3월19일, 전라남도 경찰부장은 경무국 위생과장에게 소록도자혜의원에 관한 확장예정 부지도면 2통을 첨부하여 회신한다. 그리고 계속하여 3월22일, 경무국 위생과장은 건설과장에게 [소록도자혜의원 확장에 필요한 예정부지 도면]을 지급으로 송부하고 있다.
그 후, 몇 통의 통첩 등이 총독부 관계부서간 혹은 총독부와 전라남도 당국 사이를 오가고 있다. 이들 문서는 모두 행정당국만이 알도록 [비밀]로 취급되어, 일체의 내용은 지역주민들에게는 알려지지 않았다.
전라남도 지사는 1926년 6월24일부(전남경위(警衛)제10호)로 경무국장 앞으로 다음과 같은 문서를 발송한다.
대정(大正)15년 영선(營繕) 공사비에 관한 건
3월30일부 경(警)제196호로 좌기(左記) 금년도 영선공사비 예산배포의 통첩이 있어, 그 실시에 관해 목하 준비중에 있으나, 부지시가에 관해 예산부족이 발생할 가능성이 있어 예정평수 가운데서 장래 의무(醫務)수행상 비교적 필요치 않은 지구를 적당히 감소시켜 매입하려하니 승인해 주시기 바랍니다.
좌기(左記)
1. 소록도 자혜의원 부지매수비 8천9백9십4원(圓)정
이 전라남도 지사의 [조회문]에 대해, 총독부 경무국장은 6월26일부로 [지급(至急)·비(秘)]로 날인하고, [소록도자혜의원 부지에 관한 건]이라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은 문서를 전라남도지사 앞으로 발송하고 있다.
6월24일 전남경위(警衛) 제10호 소록도자혜의원 확장부지에 관한 건에 관해 조회한 바, 하기 사항을 지급 승인코져 통보합니다.
기(記)
1. 현재시가 예상(각 지목별)
2. 본년도 예산으로 매수할 계획의 상세(매수할 가능성이 있는 토지면적과 매수할 가능성이 없는 토지면적을 약도로서 명시할 것)
1926년 6월 시점(時点)의 전라남도 경찰부장은 [카미오(神尾)]라는 일본인이다. 동 도(道)의 경찰부 위생과장은 조선총독부 도경시(道警視)인 구자환(具慈環)이었으나, 구(具)경시는 동년 7월2일의 사령(辭令)으로 [전임(專任) 보안과장]에 임명되고, 그 대신 전라남도 경찰부위생과장으로는 조선총독부 기사(技師)인 타카하마(高浜愿)가 부임한다. 그리고 6월29일부로 도경부(道警部)였던 코가(古賀國太郞)가 조선총독부 경시(警視)로 승진하여, 7월2일부로 전라남도의 경찰부 경무과장으로 부임한다(조선총독부 관보에 의함). [위생경찰]이라는 말처럼, 사회활동에 관계되는 경찰활동은 식민지 조선의 [나]정책이나 대응에도 깊게 관여되어 있었다.
총독부 위생과는 총독부 경무국에 속하여, 과원들의 대다수를 경시(警視), 경부(警部)와 같은 경찰관들이 점하고 있었다.
한편, 전라남도 지사 장헌식(張憲植)은 1926년 8월14일부로 [의원면직(依願免職)]된 뒤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가 되어, 년봉 2천원의 수당을 하사받게 되며, 대신해서 [충청남도 지사 정5위(正五位) 석진형(石鎭衡)]이 전라남도 지사로 임명된다. 석(石)지사는 서울의 법학전문학교 교수에서 관계(官界)에 입문한 인물로, 도평의회 의원 중에는 법전(法專)시절의 학생들이 있었다. 사이토(齋藤實)는 [문화정치]라는 미명아래 장헌식·석진형의 양(兩)지사, 구자환 전임(專任) 보안과장, 후술하는 고흥군수 중추원참의 김정태(金禎泰) 등, 상당수의 조선인들을 임용하여 겉치레만의 [지방자치]를 운영했다. 즉 [문화정치]란 민족운동을 의도적으로 분단시켜 대립의 쐐기를 박기 위한, 조선인 상층부와 지방유지(명망가)들을 통치기구에 끌어들이는 정책이었다.
소록도자혜의원확장, 부지매수 문제에 관해 전라남도 지사는 8월16일부 [전남경위비(警衛秘) 제2506호]로 경무국장 앞으로 매우 구체적인 시행내용계획을 보내 승인을 요구한다.
8월16일이라면 석진형이 전라남도 지사에 임명된 이틀 뒤의 일이다. 긴 문장이므로 요점만을 소개한다.
[소록도자혜의원 부지에 관한 건]은 전술한 경무국장 발 [6월26일부 관계번호문 제2397호]의 회답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아래 표가 제시된 [현시가 예상(각 지목별)]이다.
지목별
평당단가(원)
예 산
임야
논
밭
대지
131
6,000
1,500
111
예상시가
임야
논
밭
대지
353 6,150
2,303
1,119
이는 총독부가 1926년도 의원확장 매수비로 전라남도 지사에게 제시한 땅값에 비해 고가(高價)로 [매수예산]이 8,193원 80전이므로 매수하는 토지는 축소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8월16일부의 [전남경위비(警衛秘) 제2506호] 신보(申報)는 [2.금년도 예산으로 매수할 계획의 상세]의 [(1)매수예상 면적별]의 항에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금년도에 매수할 대상]의 조표(調標)를 제시하고 있다.
본 의원 확장예정지 선정에 관해서는, 제1보로서 대정(大正)12년(1923) 1월10일부로 전남경위비(警衛秘) 제59호로 신보(申報)한 이후, 산림을 밭으로 개간하는 등, 제1지목의 변경으로 인한 지가의 변동 및 그 이후의 토지 점등(漸騰)과 같은 자연적인 사정으로 인하여 매수예산액이 현재의 시가에 비해 현저히 부족하므로, 좌기(左記)와 같이 매수지역을 축소할 수밖에 없는 실정임
지 목
기 타
매수예산
금년도에 매수할 대상
예정면적, 기타
금 액
매수면적
금 액
임 야
답(■)
전(田)
대 지
묘 지
분 묘
가 옥
평(坪)
64,928
6,092
12,340
792
30개소
45개소
5동
원(圓)
850.000
3,655.00.
1,851.00.
87.600
900.000
850.000
평(坪)
29,441
4,049
15,139
158
7개소
11개소
4동
원(圓)
1,041.710
2,490.540
3,542.530
17.480
360.000
741.540
합 계
8,193.800
8,193
8,193.800
토지매입시 일반매수에 잉여분이 생길 경우는 별지도면 내에
표시한 답(■)을 매수할 것
[전남경위비(警衛秘)제2506호]신보는, 이와 함께 매수계획으로서 [매수착수준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본 의원의 부지매수문제에 관해서는 동원 창설당시 및 대정(大正)12년 2월24일부의 전남경위비 제14호 보고와 같이, 금번 확장준비 조사시에는 상당한 분의(紛議)가 야기될 상황에 있음을 감안하여 아래와 같은 방법에 의해 최대한 신중하게 처리할 것.
1. 매수담당자 및 그 운동방법
매수에 있어서는 소록도병원장의 직접교섭을 피하고, 관할 군장(郡長) 및 경찰서장으로 하여금 다음과 같은 방법에 의해 각 관계자의 양해를 구하도록 한다.
그리고 다음의 4항목을 들고 있다.
(1) 매수에는 제일 먼저 관계면장, 구장(區長) 기타 유력자의 양해를 얻어 토지 기타의 소 유자를 설득하고, 그 승낙서를 받아둘 것.
(2) 위의 승인을 얻으면 즉시 측량을 실시하여, 지목, 면적, 수량과 소유자의 주소, 성명 등 을 정확히 조사할 것.
(3) 실측(實測)과 동시에, 한편에 있어서는 면장, 구장 기타 관계자 중에서 신망이 두터운 자를 골라, 매수토지를 평가케 할 것.
(4) 매수평가에 근거하여 즉시 매매계약을 체결할 것.
그리고, [매수상의 구제책]으로서 다음의 두 가지 점을 제시하고 있다.
[토지매수가 원인으로 특히 손해를 입은 자에 대해서는 정상(情狀)에 따라 그에 상당하는 구제방법을 강구해야 하며, 우선 다음 사항을 실행한다.
(1) 분묘를 이전하는 자에 대해서는 필요에 따라 사설묘지를 허가한다.
(2) 토지매수로 인하여 경작지를 잃는 등, 생활상의 손해를 입는 자에 대해서는 소작지 또 는 부업을 제공하는 등, 관할군수로 하여금 상당부분 알선토록 할 것.
그리고 마지막으로 [경계방법]이라 하여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만일의 경우를 고려하여 본 건 매수 착수시부터 사건의 수행완료까지 다음의 방법에 의해 경계한다.
(1) 임시경찰관 출장소를 설치하여 일본인 순사1명, 조선인 순사 1명, 계2명을 배치할 것.
(2) 전항을 위해서 필요에 따라서 경계요원을 증파(增派)할 것.
이상의 전라남도 지사신보 [8월16일부 전남경위비 제2506호]에 대해 총독부는 8월20일자로 [소록도자혜의원 부지매수의 건]을 경무국장(미츠야)과 내무국장(이시구로)의 이름으로 전라남도 지사에게 통지하고 있다.
금년 6월24일부 전남경위 제10호로 위 제목에 관해 조회한 바 있으나 우(右)는 불가피한 사항으로 인정되므로 금년 8월16일부, 전남경위비 제2506호 신보에 근거하여 매수할 것을 통첩함.
덧붙여 매매계약이 확정되는 대로 그 상황을 즉시 보고하기 바람.
이유
금년도 영선비, 신축 및 설비비, 지방청 신축 중 소록도자혜의원 부지매수(확장)비로서 일금8,994원을 계상한 바, 본 매수비의 예산편성 후 해당 지목 중 산림을 개간하여 밭으로 변환된 것이 약 4,000여평 있으며, 일반지가(地價)도 다소 앙등한 결과 당초의 예정지 전부를 매수하기 위해서는 다시 3,000여원이 부족할 것 같으므로 별지 도면과 같이 총면적 84,152평 가운데 의원으로서 반드시 필요한 부분인 48,787평을 매수하고, 실제 매매계약의 결과 매수비 예산에 잉여분이 생길 경우에 논과 밭 약 1,200평을 매수토록 하며, 금번에 매수하려는 부분은 의원으로서 반드시 필요할 뿐만 아니라, 장래에 지가가 앙등할 우려가 있는 논, 밭 등의 대부분을 매수하기 위해서도 적당한 조치라고 인정되므로 본안(本案)과 같이 승인함.
이 [승인]통지가 전라남도 지사 앞으로 발송된 동년 8월25일부터 약 한달 뒤인 9월19일, 전라남도 경무과장은 동도(同道) 경찰부장 앞으로 다음과 같은 전보를 발신하고, 다음날인 20일 오전 1시 반에 동(同) 부장이 그 전문을 접수하고 있다. [소록도 소요사건]을 알리는 최초의 [일보(一報)]이다. 전보 송달지에 쓰여진 것은 카타카나(假名)로 된 문장이나, 통상문자로 바꾼 문장의 [복사본]이 총독부에 남아있다. 복사본에는 [극비]도장과 함께, 경무국장 미츠야(三矢), 위생과장 이시카와(石川), 기사 니시키(西龜)의 도장이 날인되어 있다. 통상문자로 고쳐진 [복사본]을 아래에 소개한다.
수신·전남 경찰부장, 발신인·전남 경무과장 ―
지난 8일 오후8시 소록도의원 확장문제에 대해, 병원장은 대정(大正)11년 확장계획 당시에는 절대로 확장계획이 없다고 부인해 놓고 지금에 와서 이를 실시하게 된 것은 원장이 도민(島民)들을 기만하는 것이라 칭하여, 도민 약 230명이 병원을 내습했으나, 내도(來島) 중의 경찰관의 제지로 원장은 무사히 피난할 수가 있었으며, 관할서장은 경상(輕傷), 순사 한사람은 중상(목하 생명에는 지장이 없음)을 입었으나, 도민들의 진의(眞意)는 배상조건을 유리하게 끌고 가기 위한 수단으로 판단되며, 오늘 아침 부터50명의 경찰관을 파견하여 경계 중에 있으나 오늘은 무사히 지나갔음.
본 건에 대해 절대 반대를 외치는 도내(島內) 120호 중, 약 40호 이외에는 부화뇌동하는 자들임. 그들과 당국의 조건에는 상당한 거리가 있는 것 같으나 아직 도민들에게는 내시(內示)하지 않았으므로, 이번을 계기로 신속히 군수 면장 등을 통하여 내시(內示)하는 것이 득책(得策)이라고 인정되므로 곧 실행할 예정임.
이번의 소요범인(약 10명)은 이번 기회에 검거하고 싶으나, 당면 문제로서 계획의 실행, 병원 및 부속삼림 등에 대한 위해(危害)를 야기하여 장래 병원운영에 지장을 초래하는 경우도 없지 않을 것이므로 즉각 검거(주모자 약10명) 여부에 대한 지시를 바람.
본 건은 아직 경무국에 보고되지 않은 상태이므로 귀관이 보고해 주기 바람. 경무과장
이 전문을 9월19일 전남 경무과장이 발신한 이후의, [의원확장문제, 소록도 소요사건]에 대한 전라남도 당국자와 총독부와의 교신, 보고문, 조사의뢰문 등이 [소록도자혜의원 관계철]에 수십통 수록되어 있다. 또한 동 사건은 9월22일, 10월5일자 {동아일보}에도 보도되었다.
각기 내용이 부정확하여 예측과 편견에 근거한 기술도 엿보이나 그러한 점을 감안하면서 기록된 [자료]에 따라 [사건]의 추이를 살펴보기로 하자.
9월20일부 [전남보(全南保) 제3729호]는 전라남도 지사가 총독부 경무국장 앞으로 보낸 보고서이다. 건명은 [소록도자혜의원 확장문제에 대한 소요사건]으로 되어 있으며, 조선총독 사이토(齋藤實)의 미노루(實)라는 모필(毛筆) 사인(sign)과 함께 정무총감 아사쿠라(淺倉), 경무국장 미츠야(三矢), 보안과장 타나카(田中) 등이 날인하고 있다.
전라남도 지사가 조선총독에게 보낸 [소록도자혜의원 확장문제와 소요사건에 관한 건]의 보고는 전라남도 용전(用箋)으로 8장, 15쪽에 달하는 분량이다. 동 문서에는 총독을 비롯하여 경무, 내무, 재무의 각 국장, 경무, 보안, 위생, 사회, 사계(司計) 등의 각 과장의 공람인이 날인된 [극비]문서로, 조선총독부 위생과 [위문(衛文)3832호, 15.9.27]의 접수 스탬프가 찍혀있으며 [전보(電報)보고에 대한 상보]라고 첨서(添書)되어 있다.
내용항목은 [A 소요전의 상황][B 소요사건의 상황][C 소요후의 상황]의 3항으로 나누어져 있으나 보고의 대부분은 [A 소요전의 상황]이 점하고 있다.
보고는 우선 관계면장 및 관계 주민대표 초치간담의 상황으로부터 시작된다. (1)일시는 9월16일 오후3시 (2)장소는 소록도를 관할하고 있는 고흥경찰서내 (3)[관민(官民)회견]으로 고흥경찰서장, 전남도경찰부 위생과 근무의 코바타케(小??)경부, 고흥군수 중추원참의 김정태(金禎泰), 도양면장, 금산면장, 소록리 구장, 소록리 유지 박맹학(朴孟學), 주순기(朱舜基), 김병길(金炳吉), 고흥읍내 유지 이치빈(李致彬), 도양면 유지 이치범(李致範)의 11명이다.
[회견상황]은 먼저 경찰서장, 경찰부원 코바타케 경부 및 고흥군수의 설명이 있은 뒤, 병원확장을 위해 매수할 토지의 매수방법, 보상구제 방법 등에 관해 아래의 요항이 제시되었다.
(1) 매수토지의 매매가격은 시가를 기준으로, 토지매매 평가위원이 정하는 바에 의한다.
(2) 매수지역 내의 묘지개장(改葬)에 대해서는 상당액의 이전료를 교부하고 사설묘지를 허가한다.
(3) 매수지역 내의 독립가옥에 대해서는 평가의원이 정하는 상당(相當) 대가 및 이전료를 교부한다.
등의 7항목이다. 이에 대하여 소록리의 주민 측에서는,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소록리 구장 김술이(金述伊)……본 확장문제는 국가의 방침이므로 적절한 것이라고 믿으나 소록리민들이 감당해야 할 희생도 적지 않다고 생각한다. 대정(大正)6년 당시의 병원을 설립할 때에 장래의 확장은 절대로 없을 뿐만 아니라 관계 부락민들로 하여금 불안을 느끼게 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성명(聲名)한 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번에 확장한다는 것은 실로 의외의 일이며, 따라서 찬동할 수가 없다고 주장.
소록리 유력자……동포(同胞) 중에서 많은 나환자들이 입원하려고 본도(本島)에 들어오고 있으나 병원으로부터 환자가 만원이라는 이유로 입원을 거부당하고 있으며, 따라서 그들은 실망하여 본 도내를 방황하면서 음식물을 구걸하는 자가 끊이질 않는다. 이를 목격할 때 본인은 실로 동정하지 않을 수 없으며 사재(私財)가 있다면 이를 구원하고 싶은 마음도 있으나 가난한 우리들로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또한 도민 전체를 생각할 경우, 본도의 농산물은 연액(年額)으로 12,000원, 해산물이 약 40,000원 정도로, 현재 확장하려는 지역의 생산이 그 1/3에 상당하므로 본 도민 800명의 사활이 걸린 문제이다.
당국은 이점을 충분히 동정하여 경솔한 확장 등을 하지 말기를 바라며 이상의 이유로 찬동할 수 없다고 주장.
소록리 구장과 소록리 유력자가 [소록도자혜의원 확장, 토지매수]에 관해 찬동하기 어렵다고 주장한 내용은 다음의 세 가지로 정리할 수가 있다.
① 1917년 병원이 설립되었을 때, 장래 확장 등은 절대로 하지 않을 것이며, 도민에 대하여 불안을 조성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천명하지 않았는가.
② 다수의 나환자들이 입원을 위해 섬으로 들어온 뒤, 병원으로부터 만원을 이유로 거절당함으로서 소록도내를 방황하면서 걸식을 하는 일이 끊이지 않는다는 점.
③ 섬의 생산고는 농산물이 연액(年額)으로 12,000원, 해산물이 약 40,000원(원)으로, 이번에 확장하려는 지역의 생산이 그 1/3에 상당하므로, 도민의 사활문제가 달려있다는 점.
이러한 소록리 구장과 소록리 유력자들의 주장에 서장, 군수, 코바타케 경부, 면장 등은 [교대로 도민들의 의사를 존중하나, 매수하려는 지역이 협소하다는 것을 지도를 제시하면서 설명하고, 따라서 생산에 크게 관계되지 않는다는 점을 역설했으나] 섬의 대표자들은 본 건은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중대한 일로 자신들의 독단으로 해결할 수가 없으므로, 일단 섬으로 돌아가 도민들에게 이 내용을 잘 전달하고 도민의 이해를 구하여, 평온한 가운데 일이 진행되도록 노력할 것을 언명했다. 여기서 일단 간담회를 끝낸 뒤 해산하고, 오후의 도민들의 동정을 조사하기 위해 6명의 경찰관을 소록도에 배치했다.
9월17일 [도민들에게 간유(懇諭)한 상황]에 관해서는, 소록도 소록리 [개량서당]에 도민 150여명을 모아 고흥경찰서장 오이카와(及川正人)와 고흥군수, 기타의 사람들이 병원확장과 그에 따른 토지매수 등의 취지를 간곡히 설득했다. 그러나 [일부의 사람들은 대정(大正)6년(1917)에 본원을 설치할 당시에는 장래 확장치 않겠다는 취지를 천명해 놓고 금번에 돌연 확장하려 하는 것은 원장의 간책(奸策)에 의한 것이므로, 원장이 본도에 근무하는 동안에는 극력 반대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격앙하는 자들이 있으므로] 서장, 군수 및 코바타케(小??) 경부는 [본 확장문제는 본부(本府) 및 도(道)에서 계획한 것으로 병원장은 절대 관여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설득했다. 그러나 도민들은 다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한다.
그렇지만 금번의 확장지역은 본도민의 생활상 가장 중요한 토지 및 해안에 속하는 곳으로 이를 매수할 경우, 본도민의 대부분은 금후 생활에 지장을 초래할 수밖에 없으므로 확장문제에 대해서는 절대로 반대한다.
이에 장내가 소연(騷然)해져 아무런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가 없었으므로, 서장들은 오후 5시30분, 좀 더 숙고할 것을 권유하고 해산시켰다. 다음에 [B 소요사건의 상황]에 관해, 전라남도 지사가 조선총독에게 보낸 [보고서]를 살펴보기로 하자.
9월18일, 도민들은 각 부락에서 대책을 협의하고 있었으나, 오후 8시쯤 소록리의 박성모(朴聖毛30세)가 조선식 나팔을 불어 도민 250여명을 모은 뒤 스스로 [수괴]가 되어 도민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금번의 확장문제는 원장의 간책에 의한 것으로, 지금부터 원장에게 그 책임을 물어 화형에 처해야 한다.
그러자 모여있던 도민들이 부화뇌동하여 각자 몽둥이, 대나무 막대 또는 돌을 휴대하고 병원장 관사에 몰려가려 했다. 고흥경찰서장 오이카와는 부하직원 4명과 함께 이를 저지하고, 경찰부에서 파견된 코바타케 경부 외 2명은 원장관사의 경계에 임했다. 도민들이 내습했을 때는 하나이 원장 등이 관사로부터 안전지대에 피난한 뒤였다.
군중들은 이들 경찰관들에 10수회에 걸쳐 육박, 폭거의 잘못됨을 논하고 해산을 명하는 경찰관들의 무저항적이고 평온한 가운데 해산시키려는 태도를 보고, 해산하기는커녕 몽둥이 등으로 경찰관을 타박하거나 투석하는 등의 폭행을 감행하여, 좌(左)와 같이 경찰관에게 상해를 입히고도 계속 폭거를 계속했으나, 경찰관들이 극력 온화한 수단으로 해산에 임한 결과, 군중의 감정이 점차 진정되어 결국 오후 11시에 해산했다.
경찰관 부상자로는 고흥경찰서장이자 도(道)경부인 오이카와(及川正人), 고흥경찰서 형사인 순사 야스다(保田竹一郞), 동도(同道) 순사 한양근(韓痒根), 동 순사부장 야와타(矢羽田儀市), 동 순사부장 이와나가(岩永眞一)의 5명이, 5일에서 2주간의 상해(傷害)를 입었다고 전라남도 지사가 조선총독에게 보낸 9월25일자의 보고서에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사태 하에서 도민들의 재거(再擧)를 염려한 오이카와 서장은, 부하직원 17명을 소록도에 비상소집하여 경계토록 응원을 구하고, 9월19일 20명의 직원의 내도(來島)를 기다리며 도민검거를 준비했다. 또한 총독부 및 검찰당국과 협의한 결과, 도민 검거를 위해 관할 순천지청의 테라다(寺田)검사 및 장흥지청의 무라이(村井)검사를 현지에 출장 보냈다. 그리고 [수사의 만전을 기하기 위해] 20일에는 다시 21명의 응원직원을 증파함과 동시에, 수사에 관한 직원들의 지휘를 위해 전남경찰부 보안과장 구자환(具滋環)이 소록도로 파견되었다.
테라다, 무라이의 두 검사는 9월3일 현지에 도착하자 즉시 검거에 착수하여 아래의 10명에 대해 구속영장을 발급하고, 그 날로 신병을 순천으로 호송, 순천경찰서에 유치했다.
유치된 [죄명]과 [성명·연령]은 다음과 같다.
[소요상해 박성모(朴聖毛, 당30세), 소요상해 박월반(朴月半, 당37세)
소요 황순(黃順) 즉 한만서(韓万西, 당36세), 소요 강태선(姜泰先)
소요 양생(梁生) 즉 장판옥(張判玉, 당26세), 소요 박복한(朴福汗, 당65세)
소요 주요기(朱料基, 당30세) 소요 임풍암(林豊岩, 당29세)
소요 장필기(張必基, 당27세)
장판옥(張判玉)은 고흥군 도양면 봉암리이나, 그 이외는 동군 금산면 소록리 거주로, 직업은 모두 농업이었다.
9월13일부 {동아일보}(석간으로 발행은 하루 전인 21일)는 [소록도민 천여명 경관대와 충돌 난투/총독부영(府營) 나병원확장을 반대하려고 천여도민이 경관대와 충돌하여 난투/양편 중경상자 30명]라는 표제로 이 사건의 첫 소식을 보도하고 있다. 기사는 상당히 과장된 내용이다. 동 신문은 9월29일에 사건의 속보(續報)를 다음과 같이 보도하고 있다.
소록도사건 상보(詳報)/근린경찰과 도경찰부 활약(1926년 9월29일)
전라남도 고흥군 금산면 소록도에 있는 총독부 부립 나병원은, 대정(大正)5(1916)에 창립되어 매년 8만원의 경비로 나병환자 250명 가량을 수용 치료하였었는데 금번에 전라남도 도청관리로 변경됨을 따라 확장하는 동시에 500명 가량의 환자를 수용하게 됨으로 이전의 병원은 협착할 뿐 아니라 부지도 부족하므로 그 곳 주민의 소유인 전답과 산야(해안은 포함치 아니함) 15정보를 매수하려고 군수 왕종성(王宗性)씨와 경찰서원 7,8명이 출장하여 매수하려고 누차 교섭하였으나 도민들은 경지와 임야를 팔아 넘기는 것은 생활을 위협하는 것은 무론 설상가상으로 위생상으로도 매우 위험하다고 반대하다가 결국 경찰대와 지난 19일에 충돌하여 경찰 측에 6,7명의 중·경상자를 내고 주민 측에서도 한 명의 경상자를 내는 일대 난투가 있었다. 이 급보에 접한 순천, 보성, 여수, 벌교 각지의 경찰서에서 응원 순경 7,80명이 와서 진압하고 만일을 고려하여 엄중한 경계를 하고 있으며, 경찰부로는 구(具)경시, 검사국으로는 테라다(寺田)검사가 출동하여 내용을 조사하는 동시에 조정하기에 노력하여, 근근(近近)히 해결될 서광이 있다더라.
조선총독 앞으로 발송한 10월2일부의 전라남도 지사의 [보고]는 부지매수 진행상황을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기(旣) 보고 후 9월27일까지 매수지역의 측량을 마쳤으므로 다음날인 29일 하기(下記)의 자들을 토지평가위원으로 선정하여 각각 개별적으로 평가했으나 면장 이하 도민대표 등은 모두 자기의 입장상 매우 고가(高價)로 평가하여 예산에 다액의 차질을 빚게 될 상태임으로 거의 일주야(一晝夜)에 걸쳐 간담협의를 한 결과 한참만에 도민들의 양해 하에 의견의 일치를 보아 예산범위 내에서……실행 가능하게 되어 즉일로 토지매매수속에 착수하여 자(玆)에 대체로 문제가 해결되어 부재자 10명으로 제외한 기타 토지소유자 전부의 토지매매 승낙서를 제출 받았으며 부재자들도 금명일(今明日) 중에 종료될 것임(본 매매의 상보는 별도 제출함).
고흥군속(郡屬) 우에다 켄지(上田憲志) 도속(道屬) 야마네 코오사쿠(山根口作)
금산면장 장남장(張南將) 도양면장 신내우(申乃雨)
소록도 유력자 주순기(朱舜基) 동(同) 장두천(張斗千)
이상과 같은 상태로 소록도자혜의원에는 경찰관 4명을 남겨 당분간 도민들을 관찰하기로 하고 나머지 자들은 9월 20일까지 전부 철수했다.
{동아일보}(1926년 10월5일부)는 [민토(民土)는 전부 매수, 주동자 11명은 송국(送局)/도민들의 전답은 병원에서 사고 주동자 11명은 검찰국으로 보내/소록도사건은 여차(如此) 낙착]이라는 표제 하에 다음과 같이 보도하고 있다.
르뽀〓전라남도 고흥군 금산면 나병원 확장문제로 경관과 도민 사이에 충돌까지 있었다 함을 보도하였거니와 그 후에 당국자와 도민 사이에 교섭이 있은 수 겨우 동 병원에서 소용될 부지 중 논은 매 두락(斗落)에 200원 밭은 매 두락 평균 20원 가옥은 매호에 이전비 100원씩에 사게 되고, 그 당시 충돌사건의 주동자와 인정되어 고흥경찰서에 검거되어 취조를 받고 있던 박성모 외 10명은 몇 일전에 순천검사국에 송검되었다고 한다(고흥).
테라다(寺田) 검사는 순천지청에 귀청 후 구속자 11명을 다시 취조한 결과, 그 중 2명을 석방, 9명은 구속한 채 10월2일 광주지방법원으로 송검, 예심청구 없이 10월4일자로 [소요][소요상해]의 죄명으로 기소하고 다른 피의자 20명을 기소유예(18명), 불기소(2명) 처분했다.
전남보 제372호(1926년 11월13일)로 조선총독 앞으로 전라남도 지사가 보낸 [소록도사건 공판에 관한 건)에 의하면, 11월12일 광주지방법원에서 각 피고에 대한 판결언도가 있어, 박월반(37세)에게 징역6개월, 박복한(65세)에게 징역8개월(2년간 집행유예)이 언도되고, 기타 6명에게는 각각 징역6개월(2년간 집행유예), 김술이는 증거불충분으로 무죄판결을 받았다.
지사의 [신보]에 의하면 [해당 피고들은 박월반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불평을 주장하는 자가 없이 언도를 시인하고 있는 모양]이라고 기술되어 있다. 박월반은 [불평을 주장]했기 때문에 집행유예 처리되지 않았는지, 자기 자신만이 집행유예 처분을 받지 못하고 실형에 처해졌기 때문에 불평을 주장한 것인지는, 이 전라남도 지사의 [신보]만으로는 알 수가 없다.
1928년 3월20일, 총독부 경무국장은 각 도지사 앞으로 [소록도자혜의원 수용환자증가에 관한 건]을 통지했다. 거기에는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다.
[전라남도 소록도자혜의원은 소화(昭和)2년(1927)에 새롭게 환자 200명을 수용하기 위한 병사 신축을 완료함으로서, 소화3년에는 부랑 나환자중 병독전파의 우려가 가장 많은 200명을 수용할 예정으로…] 소록도 자혜의원 확장공사에 따른 토지구입 등에 대한 도민들의 반대투쟁은 총독부와 전라남도의 권력에 의해 완전히 진압되었으며, 이는 5년 후인 1933년 3월의 조선나예방협회에 의한 전도(全島)매수로 이어지게 되는 것이다.
5 미츠이 테루이치(三井輝一)의 생애와 한센병 환자들
필자가 미츠이 테루이치(三井輝一)를 처음 알게 된 것은 심전황씨의 {아으 70년-찬란한 슬픔의 소록도}(1993년)를 읽고 나서이다. 미츠이가 제2대 원장인 하나이(花井)의 권유로 조선의 소록도자혜의원에 입소한 사실, 성경과 문학 등을 지도하여 환자들에게 매우 존경받고 있었다는 사실 등이 씌어 있었다. 조선을 식민지 지배하고 있었던 일본통치기에 그와 같은 일본인이 있었다는 사실은, 필자에게는 놀라움이었다.
미츠이에 관한 것들을 좀 더 알고 싶다고 생각한 필자가, 나가시마(長島) 애생원의 기관지인 {애생(愛生)} 편집부의 후타미 미치코(雙見美智子)씨에게 [미츠이(三井輝一)에 관해 아는 게 있으면 아무리 세세한 것이라도 알려 달라]로 부탁한 것이 1996년 봄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 후, 몇 차례에 걸쳐 후타미씨로부터 미츠이에 관한 귀중한 자료들을 제공받았으며, 한국 전남대학교 사회과학과의 정근식(鄭根埴)교수로부터도 관계자료를 제공받은 바 있다.
그런 자료에 따라, 불충분하나마 필자 나름대로의 [미츠이 테루이치의 생애]를 정리해 보기로 한다.
김교신(金敎信) 주필·발행의 {성서조선(聖書朝鮮)} 82호(1935년 3월1일)에는, 소록도 남생리에 수용되어 있던 환자 김계화(金桂花)의 [무라이(村井) 선생의 귀국에 즈음하여]라는 제목의 서신이 게재되어 있다.
김교신(1901-45년)은 동경사범학교 재학 중에 우치무라 칸조(內村鑑三)의 문하생이 되어, 조선으로 귀국한 뒤인 1927년 7월, 6명의 우치무라 문하생들과 함께 동인지인 {성서조선}을 창간했으며, 1930년 5월의 17호로부터는 김교신이 모든 책임을 가지는 월간 개인지로 바뀌게 된다. [무교회주의][조선적인 기독교]를 추진한 김교신은, 오늘날 한일 양국으로부터 주목받는,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 인물이다. 그 {성서조선} 82호(1935년 11월1일)에 게재된 김계화의 서신에 다음과 같은 대목이 있다.
주필(主筆) 선생님에게. 저의 나환자 친구로서, 우리 환자들을 위해 젊은 청춘까지 희생한 무라이 준이치(村井順一)씨라고 하는, [나환자의 리빙스톤]이라는 별명까지 있는 인물을 소개합니다. (중략) 유일무이한 수재였던 씨는 불행하게도 근대의학으로서는 불치의 병이라는 나병에 걸려 본국의 모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었지만, 애정이 풍부한 무라이(村井)씨는 자기만의 안일과 행복 등 모든 것을 도외시하고 처우가 같고 환경과 운명이 같은 조선의 나환자를 깊이 동정하여……현재의 갱생원이라는 이 언덕을 개척하셨습니다.
무라이(村井)라는 농부는 머리에는 수건을 쓰고 구두끈을 졸라매고 팔을 걷어붙이고 이 섬의 문맹퇴치와, 한편으로는 시대사상을 설파하여 신사상(新思想)을 고무했다고 합니다. 교우들의 신앙을 북돋우고 소록도를 위해 동분서주하면서 하루도 쉬는 날이 없이 9년 간을 하루같이 꾸준히 활동하셨다고 합니다. 어떤 때는 학원의 일본어 교사로, 교회의 전도사로, 때로는 상조회의 서기로서, 동병(同病) 환자들을 위해 다방면으로 피와 땀을 흘리신 무라이 형. …아아 창세기 이후 무라이 형과 같은 분이 몇 분이나 계셨을까?(신정식 편 {김교신과 나자(癩者)들}, 1989년)
이 글 중에서는 [무라이 준이치(村井順一]로 기술되어 있으나 이는 미츠이 테루이치(三井輝一)의 가명이다. 미츠이(三井)는 1901년 11월25일 야마나시현(山梨縣) 키타코마군(北巨摩郡)의 모 마을에서 태어나, 1945년 8월의 패전 직후에 한센병 요양소인 대만(台灣)의 낙생원(樂生院)에서 사거했다. 향년 44세의 젊은 나이었다.
김계화는 미츠이의 성장과정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이 분은 지금부터 35년 전…출생하여, 양친의 깊은 사랑을 받으며 고향의 학교를 거쳐 고등사범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뒤, 그 곳의 모 학교에서 교편을 잡는 한편, 문예방면에도 다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답니다. 뿐만 아니라 무라이(村井) 형은 화가였습니다. 들은 바에 의하면, 형은 일찍부터 일본 전국회화작품 전람회에서도 여러 번 우수당선작에 뽑혔으며, 같은 해 킹 지상(紙上)에서 장래를 촉망받는 화가라는 격려의 평을 받기도 했답니다]
그러나 미츠이는 한센병을 발병함으로서 군마현(群馬縣) 쿠사츠(草津)의 요양소에 입원하게 되고, 거기에서 홀리네스 교회에 입회, 기독교의 복음을 듣고 세례를 받는다. 한편 소록도에서는 1922년 10월2일 성결교(홀리네스)의 타나카 신자부로(田中眞三郞)목사가 조선총독부로부터 포고허가를 얻어 방문하여, 이틀 간의 집회를 한 것이 이 섬에서의 교회설립의 첫걸음이 되었다.
1921년 6월부터 1929년 10월까지 소록도자혜의원의 원장은 하나이 젠키치(花井善吉)였다.
하나이 원장은 초대 아리카와(蟻川享) 시대에 천조대신(天照大神)을 숭배토록 환자들을 강요하던 것을 철폐하고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였다. 천조대신을 모셔놓았던 장소를 기독교 예배당으로 사용할 것을 허가하고, 더욱이 하나이 원장은 환자들의 종교지도를 위해 일본에서 미츠이를 데려왔다. 목사였던 타나카의 시사(示唆)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미츠이는 1927년에 소록도자혜의원에서의 생활을 시작하지만, 병원당국의 운영방침에 불만을 느끼고 1928년에 퇴원하여 귀국한다. 그러나 타나카(田中)목사의 권유로 1929년에 다시 소록도자혜의원에 입원하여, 배전(倍前)의 열의로서 환자들을 위해 진력하게 된다. 앞서 언급한 김계화의 {성서조선} 82호의 서신에 의하면, [미츠이(三井) 형은 나환자의 기관지인 {나자로}라는 잡지의 편집 겸 발행인으로, 한때는 색다른 필봉을 휘둘러 나계(癩系)에 상당한 충동과 자극을 주었던 때도 있었습니다. 레벨이 그렇게 높지는 않았지만, 씨의 피눈물의 결정이었음에는 분명했습니다]라고 한다. 월간으로 발행된 등사판의 소책자 {나자로}는, 멀리는 일본, 필리핀의 나요양소까지 보내져서 국경을 넘어 환자들을 교화했다고 심전황씨는 말하고 있다.
미츠이의 소록도에서의 행동을 기록해 둔 한 사람의 기독교인이 있다. 동경부하(府下)의 전생(全生)병원 의사인 하야시 후미오(林文雄, 1900-47)이다. 1931년 정월, 하야시(林)는 조선의 [나(癩)사정 시찰]을 위해 소록도자혜의원을 방문하여 미츠이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같은 해 3월, 은사로서 존경하던 전생(全生)병원장 미츠다 타케스케(光田健輔)와 함께 나가시마 애생원에 의무과장으로 옮겨간 하야시(林)는 {일본MTL}제20호(1932년 10월)에 [잊지 못할 형제―소록도를 방문하여]라는 제목의 방문기를 싣고 있다. 그 가운데 미츠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약간 긴 문장이나 소개한다.
남쪽 병사에 있는 유일한 방인(邦人)은 아까 말한 M군(미츠이 테루이치)이다. 그는 쿠사츠(草津)의 A선생으로부터 기독교의 복음에 접하여 새로운 생활을 시작한 자로서, 조선의 나환자들을 구해야 한다는 사명감을 느끼고 단신으로 소록도에 뛰어들었다. 그의 불타는 성애(聖愛)는 약 반년만에 조선어를 터득케 했고 많은 나자(癩者)들은 그를 통해 기독의 복음을 들었다. 그가 발행하고 있는 {나자로}라는 잡지의 창간호에 그는 [이 물을 마시는 모든 자는 목마르지 않다]라는 제목으로 [드링크 한잔]이라는 단어를 쓰고 있다. 그는 그림에 대해 훌륭한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자신의 생애를 바쳐 정진(精進)해야 할 것은 이 예술 이외에는 없다고, 젊은 장발의 미술학도는 전심으로 그 길만을 나아갔다.
그러나 그 도중에 나(癩)가 모든 것을 암흑으로 만들었다. ……그가 발행하고 있는 {나자로}는 12페이지에 불과한 등사판의 소잡지이지만 매우 독특한 것이다.
페이지의 위쪽 절반은 일본어, 아래쪽 절반은 조선어이다. 앞표지에는 반드시 그가 찍은 소록도내의 생활의 단편이 사진으로 들어있다. 조선여인이 물항아리를 머리에 지고 걸어가는 장면, 빨래하는 장면, 장독, 섬의 나뭇가지 위의 해오라기.
별로 좋은 사진기도 아닐 것 같지만 실로 예술미 넘치는, 그의 머리의 비상함을 느끼게 하는 무언가가 있다. ……M씨에 의해 조선어 찬송가를 하나 배울 수 있었던 것을 감사한다.
요양소에 조선인이 입소하면 나는 이 노래를 불러서 그들을 놀라게 한다.
진실로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신다] 주님은 모든 이를 사랑하신다. 남조선 다도해의 고도(孤島)에서 살아가는 세상에서 잊여진 사람들도 주님은 사랑하신다. 의심스러운 사람은 소록도를 찾아가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거기에선 조용한 파도소리에 맞추어 수백의 나자(癩者) 자신들이 절규한다.
[예수 사랑하심은……]이라는 노랫소리가 드높이 들려올 것이다.
나가시마 애생원의 서기(書記)인 미야카와(宮川量)는 미츠다(光田健輔)원장의 조선행 동반을 명(命)받아 1933년 7월16일부터 26일까지의 11일간, 조선 한센병시설 시찰여행을 하고 있다.
그 때의 조선여행의 모습이 미야카와(宮川)의 손에 의해 나가시마 애생원의 용전(用箋)에 기록되어 현재 카미야(神谷) 서고에 보존되어 있으며, 미야카와의 유고집인 {히다(飛彈)에 태어나서}(1977년, 신교출판사)에도 [조선의 나(癩)견문기]라는 제목의 7쪽 정도의 기행문이 수록되어 있다.
미츠다(光田)와 미야카와(宮川) 두 사람은, 7월19일 저녁에 소록도자혜의원에 도착하여 7월21일 아침에 소록도를 떠나고 있다. 당시의 소록도자혜의원 원장은 야자와(矢澤俊一郞)였다.
경건한 기독교인이던 미야카와의 기록을 보면, 소록도의 미츠이(三井輝一)에 관한 이야기가 기술되어 있다. 용전(用箋)의 메모는 다음과 같이 시작된다.
[소록도의 인상 1. 관사(官捨) 사람들의 부자유(교통, 물자, 물, 전기) 2. 환자주택의 불통일(중략), 4. 미츠이(三井輝一), 코지마(小島) 두 사람의 활동 5.직원 및 병자의 대립사상…].
{히다(飛彈)에 태어나서}에 수록된 [조선의 나(癩)견문기]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있다.
이리하여 19일 소록도를 방문했으나 거기서 유쾌한 사실을 발견했다. 입원자 800명중에 두 사람의 내지인이 섞여 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둘 중의 한사람은 미술학교를 나온 사람으로, 독실한 두 형제는 조선인 환우들 가운데서 바울이나 베드로와 같은 복음의 사자(使者)로써 조선에 건너와 조선동포들의 구원을 위해 열심히 일하고 있는 것이다. 언어가 다르고 풍속습관이 달라, 처음에는 이단자로 취급받아 내지(內地)로 돌아가려고 마음먹은 적이 한 두번이 아니었다 한다. 그것을 참고 견딘, 융화를 위한 고심이 열매를 맺어, 오늘날에는 직원들이 하는 말보다 이 두 사람의 환우가 하는 말을 훨씬 더 신용하게 되었으며, 직원들도 이 두 사람에 대해서는 존경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소록도 800환우들의 신망을 등에 업고, 이 두 사람의 내지(內地) 출신 환우는 더욱 겸허한 자세로, 복장도 한복을 입고 어린이들의 선생으로서, 보모(保姆)로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요양소 밖의 내지인들의 평판이 좋지 않고, 오히려 요양소내의 내지인이 호평을 듣고 있다는 사실이, 나로서는 정말 재미있게 느껴졌다(p.276).
미츠다(光田)와 미야카와(宮川) 두 사람의 나가시마 애생원 직원이 소록도를 방문하여 1개월이 지난 8월23일, 소록도로부터 미츠이(三井)와 코지마(小島) 두 사람이 나가시마 애생원을 방문하게 된다. 후일, 나가시마(長島) 사건의 지도자 중 한사람이 된 아키야마(秋山信義1901-93)가 남긴 일기에는, 1933년 8월의 미츠이와 코지마 두 사람의 내도(來島)가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아오야마(靑山滋), 흙담의 꽃(16))
8월23일
저녁때 스기다(杉田星??)씨 병실에 가니, 소록도의 미츠이(三井)씨와 코지마(小島)씨가 와 있다고 한다. 병실을 나서려 하는데 키모토(木元)군이 와서, 내일 카나리아사(捨)를 빌려 달라 한다.
미츠이, 코지마 양군(兩君)과 간담할 장소가 필요하다면서, 사실은 조금 전에 두 사람을 데리고 카나리아까지 갔다 오는 길이라고 했다(필자주 : [키모토군(木元君]이란 애생원 배급대장에는 키모도 이와키지(1931년 3월27일) 입원번호 33호로 되어있다. 1904년 10월23일생. 1931년 3월27일이라면 최초에 나가시마에 온 [개척환자]를 말한다. 그 뒤, 키모토(木元巖)로 개명. 1935년 제5대 환자대표가 된다.
토야마현(富山縣) 출신)
8월25일
미츠이, 코지마의 두 형이 키모토군와 함께 카나리아사로 소생(小生)을 방문했었다고 하나 마침 부재중이었던 관계를 만나지 못함. 소록도의 사진 몇 장과 어린이들의 편지3통이 책상의 위에 놓여있었다(이 25일의 일기는 일기원본에는 실려있으나 {애생}에는 실려있지 않다.―필자).
8월26일
미리 연락을 해서 저녁식사 때 조선의 두 형과 만날 약속이었다. 5시가 되어도 오지 않아 식사준비를 끝내고 바로 전화를 했더니 즉시 두 형이 와 주었다. 오노(小野)선생과 오카모토(岡本) 보모, 마츠다(松田)군이 식사에 동참…… 두 형을 예배당에 안내.
8월28일
두 형(미츠이, 코지마)은 식사를 카나리아사에서 하고, 나는 식후에 두 형들과 함께 산책. 돌아오니까 아케보노(曙)교회(프로테스탄트)의 위원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카나리아 1호실에서 환영회.
8월30일
……5시경이었을까? 야스(安)씨라는 분이 두 형이 갑자기 오늘밤에 떠난다고 한다. 나가 보니 두 형은 소독장(消毒場) 부근에서 짐을 찾는 중이었다. 여섯시 반쯤 두 형은 수용장소를 떠나셨다. 몹시 갑작스러운 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해안에는 많은 환송객들이 나와 있었다.
미츠이(三井輝一)가 나가시마에 와 있었을 때 소록도에는 큰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소록도자혜의원의 3대 원장인 야자와 슌이치로(矢澤俊一郞)가 8월26일부로 [의원면직(依願免職)]된 것이다. 야자와(矢澤)는 기독교에 대해 호의적인 인물이었다. 대신하여 경기도 경무위생과장 스호오(周防正季)가 소록도자혜의원의 4대 원장에 임명되었다. 미츠이, 코지마 두 사람이 8월30일날 갑자기 나가시마를 출발하여 소록도로 돌아간 것은 야자와 원장의 의원면직 통지를 받았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1934년 6월7일, 소록도성결교회는 소록도기독교회와 개칭, 조직도 정비되었다. 스호오(周防)가 부임하고부터 시작된 기독교 탄압에 대해, 미츠이는 환자들의 대변자로서 나섰지만, 결국은 병원당국으로부터 노골적인 기피를 당함으로서 1935년 8월16일부로 귀국해 버린다. 김계화는 {성서조선} 82호의 서신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8월16일 오후, 형의 일생을 통하여 가장 인상깊고, 추억이 서린 한 많은 9년 간의 직장이자 삶터이며, 아니 청춘까지 다 바친 이 섬을 등뒤로 수평선상으로 사라진 형의 그림자를 바라 본 저는, 쓸쓸한 해안, 파도치는 해안을 힘없이 걸으며 애달픈 눈물을 흘린 그 날이 제 일생을 통해 가장 잊을 수 없는 날이라고 생각합니다. (중략) 무라이 형, 당신이 떠나신 그 날 저녁, 우리들 재원자(存園者) 일동의 눈물은 물론, 남생리 앞 바다의 파도소리 마저도 형과의 헤어짐을 애도하듯 슬프게 들리기만 했습니다.
돌아가지 않으면 안될 어쩔 수 없는 사정으로 귀국하셨지만, 형의 정신과 심금(心琴)만은 지금도 소록도를 방황하고 있음을 압니다.
소록도를 떠난 3일 후인 8월19일, 미츠이(三井)는 나가시마 애생원에 입원했다. 소록도에서 나가시마로 직행한 것이리라. 나가시마 애생원이 작성한 [사망자·퇴원자 카드철)]제2호에는 [입원번호 11407번, 소화10년(1935) 8월19일 입원, 미츠이 테루이치(三井輝一)(동경부), 명치34년11월25일생]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머리를 짧게 깎고, 흰색 화복(和服)에 검은테 안경을 쓴 작은 몸집의 미츠이(三井)의 사진이 붙어 있다. 마찬가지로 나가시마 애생원의 배급대장의 {가나다 인명부(1931년-40년)}에는, [입원번호 1494, 미츠이 테루이치, 사적(捨籍) 세키세이4호, (바뀌어), 청산료(靑山寮), 입원 10. 8. 20, 34세, 퇴원 12. 4.22]로 되어있다.
미츠이는 1935년 8월부터 37년 4월까지의 1년8개월 동안 나가시마 애생원에 입원하고 있었으며 입원했을 때의 연령은 35세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가 애생원에 입원하고 있을 때에 인권옹호투쟁인 [나가시마 사건]이 발생하나, 그에 대해서는 후술하기로 한다.
미츠이가 입원한 날로부터 10수일이 지난 1935년 9월6일 밤, 미야카와(宮川量)가 [미츠이 테루히코 일담(三井輝一談)]이라는 제목으로 소록도의 실정을 기록해 둔 메모가 현재 애생원의 카미야(神谷) 서고에 남아 있다. 400자 원고지 2장에, 미츠이(三井)의 이야기를 듣고 속기(速記)한 미야카와의 펜글씨 메모이다. 그 중에서 흥미있는 부분을 골라 소개한다.
환자수 구본관 400명, 북병사 400명(700명 수용가능), 동병사 1,000명
남병사 400명, 동서병사 200명, 동서병사 200명,
중병사 1,500명(2,000명 수용가능), 계 4,100명.
형무소 200명 현재 건설중
음식 쌀3합·보리3합 6합 8일만에 배급
예배당 200평. 2,000명. 벽돌조. 3년 견디기 어려울 것이라는 인부들의 이야기
벽돌공장 2인 환자 1일 800, 1인 8전(錢), 건강자 1일 1,000개
3대문제 1. 직원과 환자의 알력. 이전 원장과 지금은 전혀 틀림. 전에는 심복(心腹)
[환자 있은 다음에 병원]이라고. 좌담회에의 출석도 중단되기 일수.
심경변화. 미츠이(三井) 중상(中傷), 간호장의 압제(壓制), 채찍,
최근에는 야다(矢田)선생(목사)도 사의(辭意)할 뜻을 비침
2. 치료문제. 최근 치료를 받지 못해 죽은 자가 수명. 인후협착(咽喉狹窄)으 로 죽은 자 있음. 4개월이나 있으며 한번도 진찰을 받지 못해. 야간진료에는 단 한번도 온 적이 없음. 의원(醫員)들은 와서 도장만 찍을 뿐, 그 뒤는 간호부, 간호 사가 대진(代診).
3. 남녀문제. 이전에는 엄중했으나 대수용(大收容)과 함께 2백쌍 이상의 내연자(內 緣者)들이 온 관계로 최근 급격한 반동이 왔다. 40명의 어린이.
빈대. 독가스로 죽지 않음
[미츠이 테루히코 일담(三井輝一談)]의 미야카와 메모는 마지막에 당시 건설 중이던 소록도갱생원의 시설배치 약도가 그려져 있다. 중앙진료소와 중증자 병동의 서쪽에 [세탁장, 목욕탕, 취사장]이 각 1동씩 서 있고, 다시 그 서쪽으로 [감금실]과 [정신병실]이 각 1동 늘어서 있다. 1935년 10월에 완료한 제1기 확장공사에서 이미 소록도에는 형무소와 함께 [감금실]과 [정신병실]의 별동(別棟)이 건설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심전황씨의 {아으 70년}에 의하면 [목욕탕 앞에 붉은 벽돌로 높은 담을 두른 감금실도 만들었다. 쌍방(雙方)에 철조망을 부착하여 15칸의 감방을 설치했으며……일제의 형무소의 감방과 같은 구조였다]
미츠이(三井)가 나가시마 애생원에 입원해 1년이 지난 1936년 8월에 나가시마 사건이 일어났다. 원(園) 당국이 작성한 {나가시마(長島)애생원 환자소요사건 전말서}를 보면, 키모토(木元巖), 아키야마(秋山信義), 김원석(金元石〓藤枝靜夫) 등 29명과 함께, 미츠이도 자치회 집행위원으로 선출되어 있다. 미츠이는 입원환자로서 환자의 입장에 서서 입원자의 [생명]과 생활을 지키기 위해 항의집회에 참가하고, 단식투쟁에도 참가했다고 한다.
사건이 끝난 뒤 원(園) 당국은 [사상적, 폭력적 주모자]로서 100명 정도의 블랙리스트를 작성하여 경계했다. 그 가운데 미츠이의 이름도 있었다고 한다. 다음해인 1937년 4월22일, 미츠이는 나가시마 애생원을 떠나는데, 그 후의 미츠이의 발자취는 분명치 않아서 알 수가 없다.
8년여의 세월이 흘렀다. 오구라 켄지(小倉兼治(뒤에 나가시마 애생원의 목사)가 쓴 {세토(瀨戶)의 여명(黎明)}(1959)에 의하면, 미츠이는 대만(台灣) 낙생원(樂生園)에 입원해 환자대표를 역임하는 등 신앙으로부터 떨어져 있었다. 패전 말기인 1945년, 미츠이는 영양실조에서 온 신장염에 걸려, 온몸이 고무공처럼 부푼 채 병상에 누어, 구우(舊友)인 오구라(小倉兼治)가 지켜보는 가운데 사거(死去)했다. 44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