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르헤스와 카발라 사이의 관련성을 가장 잘 말해 주는 것은 그의 강연집 <7일 밤>에 나오는 '카발라'일 것이다. <7일 밤>은 보르헤스의 문학과 사상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하나의 등대와 같은 역할을 한다.
여기서는 <7일 밤>에 실린 '카발라'를 통해 보르헤스가 카발라에서 가장 중시했던 주제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신성한 책
'카발라' 서두에서 보르헤스는 카발라에 대한 설명을 이런 말로 시작하고 있다.
“카발라는 ‘신성한 책’이라는 개념에서 출발합니다.”
그는 ‘신성한 책’이란 그 안에 있는 말씀들만 신성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적은 문자들도 신성한 그런 책이라고 말한다. 그는 카발리스트들이 이러한 ‘신성한 책’의 개념을 성경(토라) 연구에 적용시킨 사실을 무척이나 놀랍고 특별한 현상이라고 보았고, 자신의 카발라관을 피력하며 첫 번째 주제로 내세운다.
그는, 카발리스트들이 모세 5경(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즉, 토라를 무한한 지성(즉 성령)이 쓴 ‘신성한 책’으로 본다고 말한다. 이런 위상을 지닌 토라는, 따라서 그 안에 어떤 우연도 없고 각 절의 문자와 숫자를 포함하여 모든 것이 결정 되어 있게 된다. 이런 관념은 토라가 무오류의 절대적인 텍스트라는 사고에 바탕을 두고 있다.
보르헤스의 말대로 카발리스트들은 토라 속에 마법적 구조가 내재돼 있다고 믿는다. 카발리스트 나흐마니데스(모세 벤 나흐만 1194-1270)는 전체 토라가 신의 이름으로 구성되어 있고 그 안에 포함된 단어들을 세분하면 비의적 이름들이 나온다고 주장하였다. 또 유명한 카발리스트 모세 데 레온 같은 경우는 전체 토라가 하나의 성스러운 신의 이름이었다고 말한다.
보르헤스는 이렇게 말한다.
“카발라에서 가르치는 바처럼 모든 모세 5경은 하느님의 이름입니다. 글자들이 뒤섞여 있긴 하지만 말입니다.”
토라 전체가 정말로 신의 이름인지 우리가 확인할 수는 없지만 최소한 카발리스트들 사이에 많이 회자되는 신의 이름들의 원천이 토라인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예를 들어 72 신명(神名) 쉠하메포라쉬의 근원은 출애굽기 14장 19-21절이다. 이 3절은 각각 72개의 히브리 문자로 구성돼 있는데, 첫 절의 문자들은 정순(正順)으로, 둘째 절은 역순(逆順)으로, 셋째 절은 다시 정순(正順)으로 배열한 뒤, 세로로 읽으면 3문자로 구성된 72개의 신의 이름들을 얻을 수 있다.
쉠하메포라쉬는 널리 알려진 신명이다.
쉠하메포라쉬
이것들 외에도 카발리스트들이 많이 사용하는 것에는 14문자 신명, 42문자 신명 등이 있다. 14문자 신명은 신명기 6장 4절의 선언,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의 문장을 구성하는 14문자를 취하고, 그것에 문자 카발라의 일종인 테무라의 방법을 적용시켜 얻은 것이다.
<신의 글>에서 치나깐이, 신의 글이 14개로 된 단어들의 조합이라고 말하는 대목도 이 부분과 관련지어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14문자 신명
42문자 신명의 경우, 카발리스트들은 그것이 창세기의 첫 42문자로 이루어져 있다고 믿는다. 42문자 신명에 대해서는 앞서 자세히 살펴본 바 있다.
여기서 우리는 토라를 구성하는 문자들이 마치 매트릭스(행렬)와 같은 구조를 이루고 있고 신의 이름이 행과 열의 조합 속에 감추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카발리스트들은 토라를 신 자신의 비밀스러운 생명을 투영하고 있는 살아 있는 유기체로 여긴다. 즉, 토라는 신의 성스러운 에너지를 담고 있는 그릇이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카발리스트들은 토라 속에 나오는 이야기들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어리석음을 범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토라 속의 이야기들은 진리를 표현하기 위한 상징적 수단이기 때문이다.
그 이야기들은 말하자면 여신 이시스(진리)의 나신을 가리고 있는 베일들이다. 그것은 진리를 보존하는 방법이다. 우주의 비밀들을 친절하게 일일이 다 풀어서 설명하고, 보여주고, 기록으로 남기는 방식은 지극히 위험하다. 왜냐하면 그렇게 할 경우 파괴와 왜곡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언젠가 독재자가 나와서 그런 책들을 다 불태워버릴 수도 있고, 누군가의 자의적인 첨삭에 의해 왜곡될 수도 있다.
그러나 또 그렇게 진리를 겹겹의 베일로 둘러싸는 것은 준비되지 않은 인간들을 그 진리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배려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영적인 가르침 속에는 마법적인 힘을 발휘하는 진언 등이 포함된다. ‘신의 이름’이라고 표현되는 것들이 그 대표적인 경우이다. 영적으로 준비되지 않은 자가 이런 성어(聖語)들을 함부로 발성할 경우 그 발성자는 그 엄청난 진동의 힘에 의해 자칫 스스로 멸망을 초래하게 될 우려가 있다.
설령 그렇지 않다할 지라도 그 성어의 힘을 이기적으로 이용하여 타인을 파괴할 수도 있다. 그만큼 위험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진정한 ‘신의 이름’은 언제나 은밀하게 감추어져야만 하는 것이다. 비단 ‘신의 이름’뿐만 아니라 우주의 실상과 일루미네이션의 비밀을 계시해 주는 모든 내밀한 가르침들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그렇게 위험하다고 해서 진리에 이르는 길을 완전히 밀폐하고 차단시켜 버려서도 안 된다. 왜냐하면 세상에는 자격을 갖춘 진실한 구도자들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들을 위해 진리의 열쇠는 보존돼야만 한다.
이런 이중적 측면 때문에 고대로부터 영적인 스승들은 ‘감추면서 보여주고, 보여주면서 감추는’ 방식을 취해왔다.
일반 대중들은 토라에서 피상적인 이야기에만 관심을 둘 뿐, 더 깊이 들어가지 않는다. 그러나 영적으로 성숙된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 그들은 몇 가지 단서만으로도 베일 속에 감추어진 진리의 보석을 발견해 낸다. 고대의 영적인 스승들은 그런 준비된 영혼들을 위해 진리에 이르는 열쇠들을 토라의 스토리 속에 은밀히 비장하였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이 열쇠들을 발견하고 사용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토라의 외적인 스토리뿐만 아니라 토라를 구성하는 모든 단어와 그 배치에는 영적인 비밀들이 숨어 있다. 보르헤스는 카발리스트들이 토라를 마치 암호문처럼 다루었고 그 의미를 캐치해내는 여러 가지 법칙을 만들었다고 말한다.
카발리스트들은 신의 말씀은 신의 영감의 결과이며 말씀으로 이루어진 경전은 그의 존재의 에센스라고 믿고 있다. 같은 이유로 그들은 신이 감추어져 있기 때문에 경전의 신성한 말씀 이면에도 역시 탐색해야 할 비장된 의미, 에센스가 있다고 믿는다.
감추어진 의미를 발견하기 위해 그들은 세 가지 해석 방법을 이용하는데, 게마트리아, 노타리콘, 테무라가 그것이다. 문자에 할당된 숫자값을 이용하여 단어들 사이에 내재된 의미의 일치성을 찾거나 단어들의 생략, 교환 치환을 활용하는 방식이다. 이런 종류의 카발라를 문자 카발라라고 부른다.
토라가 무한한 지성(성령)에 의해 씌어졌다는 것은 틀린 말이 아닐지 모른다. 왜냐하면 작가가 누구든 그를 통해 역사한 것은 성령일 테니까. ‘신성한 책’으로서의 토라는, 그러므로 읽는 자들의 수준과 읽는 양식에 따라 그야말로 무한한 해석의 가능성을 품고 있다 할 것이다.
카발리스트들의 이런 주장을 수용하는 보르헤스는 성경 속에 무한한 의미가 내포돼 있다고 여긴다. 그는 다음과 같은 스코투스 에리게나의 말을 인용하고 있다.
“공작새의 반짝이는 깃털이 햇빛을 받을 때마다 변하는 것처럼 성경은 무한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