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료코 후쿠치란 한 일본인의 저서를 통해서 새로이 밝혀진 근현대사의 중심에 있었던 고종황제에 대해 역사적으로 재조명할수 밖에 없는 사건을 소개 하고자 한다.
조선침략을 합리화하기 위한 일본인에 의해 상당히 많이 왜곡된 한반도의 역사 중에서 왜곡정도가 제일 심한곳이 근대현사일 것이다.
그나마 삼국시대와 고려시대의 왜곡역사는 제법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지만, 조선시대 즉 조선후기는 아직도 상당한 부분에서 역사적 왜곡이 남아있는 것이 사실이다.
여러분은 고종황제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가?
철종의 뒤를 이어 어린나이에 왕이 되었고, 집권 초기에는 흥선대원군의 섭정으로 허수아비왕으로서의 생활을 해야 했고, 집권 중기에는 명성황후와 대원군 사이에서 별다른 업적도 드러내지 못하고, 집권말기에는 덕혜옹주를 일본으로 보내는 것을 비롯하여, 나머지 자녀들의 불운을 모두 지켜보아야만 했던 조선의 마지막 임금 정도?
강직한 성품과 많은 업적을 이룬 아버지인 흥선대원군, 역시나 러시아, 일본 그리고 다른 유럽의 열강들 사이에서 아주 뛰어난 외교적 능력을 발휘한 명성황후(이러한 능력 때문에 일본자객에게 죽임을 당했지만)에, 비해 별다른 역사적 기록이 없었던 고종황제에 대한 역사적 기록들을 여러분들은 한번도 의심해 보지 않았는가?
일본자객에게 아내를 잃고도 속으로만 분노를 해야 했던 슬픈 황제.
러시아 공사 베베르의 계략에 의해 발생한 아관파천.
한일 협정인 을사조약의 체결로 인한 외교권의 소멸을 껵은 황제.
등등 조선의 근현대사에서 일어난 수많은 사건의 중심에 그가 있을 수 밖에 없었다.
우리가 역사책에서 읽은 고종황제는 조선의 마지막 임금이라는 것과 함께, 다소 무기력한 임금으로 평가되어 지고 있다.
아버지인 흥선대원군과 명성황후에 비하여 별다른 업적도 없고, 왕으로서의 위상도 세우지 못한 임금으로 평가되어 지고 있다.
고종황제는 정말 비운의 황제이지만, 일본의 공작으로 우리가 알지 못하는 많은 사건들이 숨겨져 있다. 이제부터 그 내용을 간략히 소개하고자 한다.
아마도 아래의 내용은 여러분들이 지금껏 배워왔던 내용과 다소 다를수도 있다. 그럴수 밖에 없는 것이 고구려, 백제, 신라의 역사부터 일본인의 손에 의해 상당히 많이 축소가 된 역사이며,
조선 후기의 역사는 조선 초기때에 비하여 일본의 본격적인 침략이 있었던 을사조약 전후로 해서는 일본의 이익에 따라서 아예 허구와 진신이 분간이 되지 않는다.
이야기는 대원군이 명성황후의 공작에 의해서 물러나고, 고종이 실제 정치를 시작한 시기부터 하는게 맞을듯 하다.
대원군이 물러나자 민승호, 민겸호, 민태호와 같은 민씨일가의 세도정치가 시작되었고,
고종은 외교적으로도 어려운 시기인데 외척세력과도 치열하게 싸우지 않을수가 없었다.
역사에서는 고종을 무능력한 왕으로 만들기 위하여 고종이 민씨일가의 외척세력에 일방적으로 휘둘려 졌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사실은 고종은 권좌에서 물러난 대원군을 이용하여 민씨세력을 상당히 많이 견제를 하였다.
그 대표적인 것이 완권강화를 위한 신식군대로 무장한 중앙군 5만명 양성이었다. 그당시 외척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양성한 5만명의 신식군대 창설은 대단한 성과였다.
하지만 이러한 능력에도 불구하고, 거대해진 민씨세력은 1875년 아버지의 영향을 받은 고종의 의견과는 반대로 운요호사건과 병자수호조약 체결을 하기에 이른다.
이 사건을 계기로 민씨세력은 급부상하고, 권력의 힘을 완전히 잃은 대원군은 나라의 안위를 걱정하면서 고종에게 왕실의 보존과 국력을 되찾기 위해 필요한 2가지 선물을 주고 국정에서 완전히 물러난다.
이 두가지 중 첫번째는 태조 이성계 시절부터 보관해왔던 엄청난 량의 금괴가 묻힌 장소의 지도이고, 다른 하나는 조선 제일의 무술단체인 태무문을 호령할 수 있는 패 였다.
조선을 건국하기 전 이성계는 고려의 무술단체인 태무문이 고려왕실과 연관이 되어 있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나중에 큰 골칫거리가 될 것을 염려하여 아들 큰 아들 이방원에게 은밀히 지시을 하였다.
태무문이 새로운 나라를 위해서 충성을 하게 만들거나, 그렇지 않다면 태무문의 완벽한 말살을 지시하였다.
그당시 태무문의 거주지는 남여모두 1,000여명 정도로 이루어진 설악산에 있는 작은 촌락이었다. 겉으로는 일반 촌락과 조금도 다른 점이 없었지만, 이곳의 모든 사람들이 무예의 고수라는 점이 달랐다.
어느날 태무문에 들이친 이방원의 20,000명의 군대. 숫자상으론 20대 1 이지만, 어린이와 노약자를 제외한 실지 싸울수 있는 사람의 수는 600명 정도 밖에는 되지 않았다.
그마저도 그들을 보호하면서 싸우자니 점점 밀릴수 밖에 없었다. 아마도 보호해야 할 대상없이 싸운다면 비록 600명 뿐이라도 20,000의 군사들과 싸워도 지리적인 이점을 이용하여 충분히 이길수 있는 능력이 그들에겐 있었다.
태무문도들은 군대의 전술 같은 것은 읽히지 못했지만, 그들 개인의 능력은 과히 1당 100이었다.
태무문의 능력을 다소 과소평가한 이방원의 군대는 비록 거주지는 말살을 하였지만, 수많은 태무문도들의 태로를 차단하지 못했다. 결국 말살계획은 실패로 끝나고, 그 다음날 저녁 이성계와 이방원은 궁궐로 침입한 태무문의 고수들과 직면하게 되었고, 다음과 같은 조약으로 이성계와 태무문은 화친을 하게 된다.
조약의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으며, 이성계와 태무문 모두에게 불리한 조약은 아니었다.
1. 조선은 태무문의 영지를 영원히 인증하며, 조선내 태무문의 독립 또한 인증한다.
2. 태무문은 고려든, 조선이든 왕실의 문제에는 앞으로 전혀 개입을 하지 않는다.
3. 태무문은 영지의 변경은 자유지만 수장의 변경시 황제에게 알릴 의무가 있다.
4. 태무문은 조선의 왕실이 위험에 처했을 경우 조건없이 황제의 명에 따라야 한다.
5. 이 조약은 조선과 태무문이 존재하는 한 유효하며, 태무문은 조약 수행의 상징으로 수장의 패와 황금 천만근이 묻힌 장소의 지도를 조선왕실에 보관토록 한다.
단 이황금은 태무문주와 조선왕의 동의하에만 처분이 가능하다.
이 조약 외에 태무문이 이성계와 몰래 약조한 것에는 이방원의 권력승계반대 였다. 이방원의 권력에 대한 욕심과 포악한 성격을 이유로 들어 태무문은 그에게 작으나마 복수를 한것 이었고, 이성계로서도 이를 받아 들일수 밖에 없었다.
태조 이성계는 황금 천만근을 숨긴 지도와 태무문 수장의 패를 다음 임금에게 넘겨주어 영원한 황실의 보존과 국력을 높히고자 하였다.
하지만 이방원의 왕위 찬탈를 비롯하여 2가지의 보물은 이방원이 차지했지만, 왕실과 태무문의 조약은 더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고종황제도 태무문과 관련한 이러한 일들은 단지 왕실의 권한을 높히기 위한 전설에 불과하다고만 생각했었다.
하지만 흥선대원군은 과거 이하응시절에 태무문의 존재를 경험했었고, 그들의 조언 덕택에 황제의 아버지가 될수가 있었던 것이었다.
그로부터 몇일 후 밤 은밀히 고종을 찾아온 한명의 사내가 있었다. 자기를 태무문의 차기 수장이라고 소개한 후. 일본, 러시아 등을 비롯하여 현재 조선이 너무 위험한것 같아서 태무문주의 명에 의해 조선과의 약조를 지키기 위해서 왔다고 했다.
고종황제로 부터 현재 정세에 대해 설명을 들은 그 사내는 국력을 키우기 위한 군자금으로 황금 천만근을 군자금으로 사용하는 것을 허락했고, 이 황금의 일부가 중앙군 신식부대 5만명 창설이었고, 이로 인해 다소나마 떨어진 왕권을 강화할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그 이후 발생한 1894년 동학농민운동, 1895년의 명성황후 살해등으로 인해 조선내 고종의 입지는 많이 떨어졌다.
조선내 일본인의 세력과 러시아의 세력간 균형을 맞추기 위하여 태무문의 차기 문주인 태을친은 요직에 있는 일본인의 살해한다.
이때 살해된 일본인이 총선총독부의 초대총감인 데라우치 마사타케, 헌병사령관 마사토 요요치, 일본 공사관 미우라 고로 였다.
이를 기회로 러시아의 공사 베베로는 암살자로부터 황제와 세자를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공사관으로 피신하게 만드면서 조선내 국정을 휘어 잡았다.
3명의 일본인 살해의 범인으로 러시아를 지목한 일본은 1904년 러일전쟁을 일으켰다.
초기 러시아에 유리하였던 전쟁이 태무문의 러시아 사령관 암살로 일본의 승리로 끝나자, 일본은 본격적인 침략야욕을 드러냈다.
첫째가 경찰치안권의 일본헌병대 장악이었으며, 두번째가 고종황제를 협박하여 사인하게 만든 을사조약.
그 후 헌병대사령관과 고종황제를 협박한 일본인 공사 미야모토 데우스케를 비롯한 수명이 태무문도에 의해 암살이 되었지만, 이미 조선의 외교권은 일본에 넘어가 버린 후였다.
점차 태무문의 존재를 눈치챈 일본은 자국내 사무라이를 대거 투입하여 요인의 암살을 방어하고자 한다.
하지만 사무라이들의 감시망에도 불구하고, 조선내 일본인의 요인들이 계속해서 암살되고 있고, 일본내에서도 요인의 암살은 계속 이어지고 있다.
고종황제는 태무문을 이용하여 군자금의 일부를 만주의 독립군에게 보내주었고, 네덜란드와 영국을 통하여 신식무기를 대거 도입하여 태무문을 주축으로 한 조선내 민병대를 몰래 만들었다.
민병대의 조직을 눈치챈 일본은 태무문 소탕작전과 함께 을사2조약 체결을 고종황제에게 요구를 한다.
이미 실권을 읽은 고종황제는 이 조약을 체결하지 않을수 없었고, 더이상 민병대 조직도 계속하기가 어려웠다.
을사2조약으로 고종황제의 발과 손을 묶은 후 일본은 본격적으로 태무문을 주축으로 한 민병대 해체 작업을 펼쳤다.
뿔뿔이 흩어진 태무문은 태백산에 모여 독립을 위한 결의를 다지고 있었다. 일부는 만주로 가서 독립전쟁을 하고, 일부는 일본에서 요인 암살을 수행하고.
태무문의 존재를 알고는 있지만 인정할수 없었던 일본인은 그당시 민가를 습격하는 호랑이를 잡는다는 명분으로 민간인과 군인이 힘을 합쳐 호랑이 소탕작전을 펼친다.
이 작전은 사실 태무문 소탕작전이었다.
태백산의 험준한 지역에 위치한 태무문의 본거지에 신식무기로 무장하여 들이닥친 일본군인들과 수백의 사무라이들.
태무문주를 비롯하여 100여명의 문도들은 수천의 군대와 수백의 사무라이들에 대항하여 싸웠지만, 중과부적으로 모두 죽음을 면치 못했다.
태무문의 무서움에 자존심이 상한 일본인들은 조선내에서 태무문의 존재자체를 완전히 지우고자 했다. 이 때문에 조선후기 즉 태무문과 연관이 깊은 고종황제때의 역사왜곡은 어쩔수 없는 역사적 배경이 있었던 것이다.
신식무기를 앞세운 일본 군대에 비록 태무문은 쓰러졌지만, 몇몇 태무문도들은 살아남아 일부는 만주로 가서 독립운동을 하고, 일부는 남아있는 황금을 보호하고 있다고 한다.
그 후 고종황제의 후손들이 그 금괴를 찾을려고 많은 노력을 하였지만, 아직도 찾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조선호랑이 섬멸작전의 민간인 대장이었던 마야토 후쿠치의 손자인 료코 후쿠치의 최근 저서인 "조선호랑이 섬멸작전"에 비교적 자세히 나와있다.
첫댓글 와이리 기노~~
음 좀 길긴 기네.. 그래도 10분만 투자해서 읽어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