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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기심은 파멸의 시작)
지난 장에서 사울에 대해 잠깐 이야기 했습니다.
그는 자기보다 더 뛰어난 영웅 다윗을 보는 순간부터 그의 마음 속에는 시기심이 가득 찼습니다.
본문의 앞부분을 보면 사람들이 사울에게는 천천의 영광을 도리고 다윗에게는 만만의 영광을 도리는 모습을 보면서 심히 불쾌했다 말합니다. 그리고 굉장히 분노하며 말했습니다.
"다윗에게는 만만을 돌이고 내게는 천천을 돌리니 그가 더 얻은 것은 나라밖에 무엇이냐?"
그의 마음 속에 다윗이 차기의 왕이 될 것이라고 하는 시기심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시기와 질투는 파멸의 시작입니다.
사울의 최후는 우리가 성경을 통하여 잘 알고 있습니다. 그는 비참하게 죽었습니다.
그 비참한 그의 종국은 결국 시기에서부터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시기는 멸망의 시작이며 우리의 인간성을 잃게 하는 시작점이기도 합니다.
내가 하나님을 믿는 백성으로써 포악해지며 비인격화하는 시작이 질투에서부터 비롯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서 3장에서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요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음이니라. 오직 위로 부터 낭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벽과 거짓이 없나니 화평케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약 3 : 16 ~18)
시기하지 말고, 위로부터 주시는 지혜를 구해야 합니다.
지혜를 시기의 반대말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지혜롭지 못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자꾸 멸망해 가고 인간성이 왜곡되어 가며 오늘날 옛날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추악한 모습들이 드러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시기는 비교에서)
도대체 시기는 무엇입니까/ 8절을 보면 잘 알수 있습니다.
사울의 시기심은 다윗에게는 만만을 돌리고 내게는 천천을 돌렸구나라는 비교에소부터 시작합니다.
시기는 나와 상대방을 ㅂㅣ교하는데서 시작합니다.
내 자녀롸 남의 자녀, 내 남편과 남의 남편, 나의 아내와 남의 아내를 비교하면서 시기심이 싹틉니다.
나의 직장과 남의 직장, 누가 수입이 더 많은가를 비교하면서 시기심이 싹튼다는 것입니다.내게 없는 것을 다른 사람들이 갖고 있는 것을 즐거워하지 못할 때, 나에게 없는 것을 남이 가졌다고 판단되어 비교할 때 바로 시기심이 우리 마음에서 싹트기 시작합니다.
시기심 때문에 남이 울때 나는 기뻐합니다. 그리고 남ㅇ 기뻐할 때 나는 웁니다.
그러나 위오부터 온 지혜는 결단코 그런 것을 가르켜 주지 않습니다.
위로 부터 온 지혜가 우리에게 항상 가르쳐 주는 것이 무엇입니까?
사울왕이 누리고 있는 천천의 령광마저도 자신이 누릴 수 없는 은혜였다는 것을 깨달을 때 비로소 그 마음 속에 있는 시기심이 치료될 수 있습니다.
나는 실제로 만만, 아니 나는 억억이고 다윗은 천천인데 백성들은 알아보지 못하고 읶다는 이런 식의 불평 불만들이 우리 모두에게 가득합니다.
우리들 자신의 기준으로 판단하여 도대체 공평하지 못하다, 이 사회가 너무 불공평하며, 사람들이 또한 불공평하다고 생각합니다.
교회 안에서 문제가 생기면 교회가 불공평하다, 목사님이 불공평하다, 더 나아가서는 "하나님도 불공평하다. 어떻게 저렇게 하면서 나는 이렇게 할 수 있느냐?"라고 말합니다.
(자기를 불쌍하게 생각하는 마음)
또 사울을 파멸로 이끈 이 "시기심"이라는 것은 자기를 불쌍하게 생각하는 마음에서부터 싹이 트는 것이라고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내가 누려야 할 영광도 못 누리고, 내가 받아야 할 인정도 받지 못하고 이렇게 손해만 보고 살다니! 나는 왜 이 모양일까? 할 일 다 했지만 내게 돌아온 것은 아무것도 없구나. 나는 참 불쌍한 사람이다."
바로 자기 자신을 불쌍하게 생각하는 것에서부터 그 마음 속에 시기하는 마음이 생기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투기(妬忌)의 "투(妬)"자를 보면 변에 계집녀(女)가 있습니다.
그래서 흔히들 질투나 투기가 여성의 저유물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남자들도 얼마나 시기심이 많은지 모릅니다.
아니 여자보다 더 많은 것 같습니다.
모든 인간이 본성적으로 타락한 존재이기 때문에 여자나 남자나 할 것 없이 시기심이 마음 속에 커다란 덩어리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이 시기심 때문에 인류 역사가 망했으며 하나님이 지으신 아름다운 세상이 죄악의 벼랑으로 떨어졌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어떻게 해서 사탄이 생겼습니까.
하나님이 만드신 인간을 시기하고 하나님의 영광과 지헤를 시기했던 천사가 타락해서 결국은 이 세상에죄가 들어오고 죄악으로 물들어 가게 된 것 아닙니까?
그래서 세상에 슬픔이 생기게 되고, 서로 싸우고 물고 찢고 다투게 되지 않았습니까?
시기심이 바로 악의 출발점이었습니다.
시기심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됩니다.
시기심은 우리가 갖고 있는 큰 죄악의 문제입니다.
(시기의 반대말)
사도 바울은 고전 13장에서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투기하지 않는다고 이야기합니다.
이런 차원에서 시기의 반대말은 바로 사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으시고 이 세상에서 믿는자로 살게 하시는 이유는 우리가 누리고 있는 모든 것들을 우리 주위의 사람들과 함께 나누기 위함입니다.
조나단 에드워드의 "신앙의 열정"(Religious Affection)이란 책을 보면 이런 글귀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창조하실 때 참 이상하게 창조하셨다. 그것은 아담을 만드셨을 때, 아담 자신으로 만족하지 못하게 하고 그 아담을 아담답게 창조하신 하나님의 의도를 파악하고 살아가게 하기 위해서는 아담 마름 속에 "나는 누군가를 필요로 한다"는 생각을 하게 하셨다"
아담 마음 속에 누구를 향한 그런 그리움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하와를 만드셔서 그에게 짝으로 데려오는 모습을 봅니다.
희안하지 않습니까/
온전하고 완전하게 만드시는 하나님의 창조 작품 속에서 아담은 그 누군가를 필요로 해서 완전한 자가 되기를 원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누군가가 필요합니다. 독불장군이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혼자서는 살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누가 나에게 도움을 주어야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나누면서 살아야 합니다.
시기심의 마음은 무엇입니까?
내가 당연히 누려야 할 것을 저 사람이 누렸습니다.
내가 회사를 위해서 투자하고 헌신하고 땀 흘렸을 뿐 아니라 경력을 생각해 봐도 내가 먼저인데 오히려 자격없는 저 사람이 먼저 승진을 합니다.
이런 시기심의 마음을 사랑으로 바꾸어 보십시요.
그러면 내가 진실로 땀 흘려 이루어 놓은 업적을 남이 누리게 되어도 시기하지 않고 사랑으로 나눌 수 있을 것 입니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나누어야 참된 나의 모습,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부적격자)
예수님이 바로 그런 삶을 사셨던 분이 아닙니까?
우리도 서로를 비교하고 저울질하면서 저 사람은 자격이상으로 누리고 있으며 반대로 나는 자격미만으로 천대를 받고 있다며 다툽니다.
예수님도 우리를 저울질 하실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보십시요.
우리가 누리고 있는 것들을 바라보시면 예수님께서 "그래, 모두 다 네가 자격이 있으니까 누리느거다"라고 말씀하는 것이 한가지라도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찾아 오셔서 김아무개야, 박 아무개야, 이것은 네가 당연히 누릴만 해서 내가 네게 주는 것이니까 즐기도록 하라고 하실만한 것이 한 가지라도 있으면 이야기 해 보십시요.
우리가 가진 모든 것들이 내가 누릴 수 있는 자격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누리는 축복들이 아닙니까?
누릴 수 없는 가운데서 누리는 축복들은 누가 이루어 놓은 축복들입니까?
누가 땀 흘려 일하고 희생하면서 이루어 놓은 업적입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기까지 이루어 놓으신 구원의 축복 아닙니까?
예수님은 그분 자신이 노력하고 수고해서 이루신 업적을 우리가 누리도록 기쁜 마음으로 내어 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에게 주시는 구원의 선물입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우리와 똑같은 마음으로 질투하시고 시기하는 마음이 있으셨다면 누가 구원의 은혜를 누릴 자격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 주님은 당신이 이루어 놓은 것을 그의 백성인 우리들이 누리는 것을 보고 기뻐하시는 분입니다.
자격없는 우리들에게 당신이 이루어 놓은 선물들을 나누어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렇게 나누어주는 사랑 속에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인간성을 우리에게 회복시키려는 주님의 뜻이 있습니다.
여러분,우리가 당연히 받을 것이 무엇입니까?
내가 자격이 있어서 받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당연히 받아야 될 것이 있다면 단 한가지가 있지요. 형벌이지요.
그것이라면 우리에게 자격이 충분히 있습니다. 매를 맞아도 당연합니다.
이렇게 형벌과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 외에는 당연히 받을 것이 없는데 웬 은혜며 웬 사랑입니까?
주님께서 귀한 은혜를 베풀어 주셨고 사랑하느 마음으로 십자가를 지시고 고난받으셨습니다.
이 주님의 모습을 보면서사울이 겪었던 시기 신드롬을 넘어설 수 있지 않겠습니까?
남에게 만만의 영광을 돌리고 나에게 천천의 영광, 그것조차도 내가 자격을 가지고 누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은혜라는 것을 깨닫는다면 우리 마음 속에 싹트고 있는 시기심과 질투하는 마음을 극복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것이 바로 복음의 능력이 아닐까요?
(독수리 라이벌)
이런 우화가 있습니다. 서로 라이벌인 두 독수리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 독수리는 항상 다른 독수리보다 더 빨리 , 더 높이 날아갑니다.
그러니까 같이 따라가지 못하는 이 독수리 마음 속에 시기심이 가득 찹니다.
언제 저놈을 따라 잡을 수 있을까? 언제 저놈이 꼬꾸라지는 모습을 볼까?
그러면서 마음을 끙끙거리면서 있는데 마침 활을 잘 쏘는 명사수가 눈에 띄었습니다.
그래서 그에게 다각 저 독수리를 쏴서 떨어뜨려 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사수가 승락을 하며 "화살 뒤에 네 깃털을 꽂으면 더 빠르고 높이 날아 가니까 털 좀 뽑아 달라"고 합니다.
그래서 깃털을 뽑아 주었지요. 그런데 화살이 날아가다 그만 중간에 떨어지고 맙니다,
그걸 보던 독수리가 밑에서 팔팔 뛰면서 난리입니다.
잡을 수 있을 때까지 깃털을 마구 뽑아서 주었습니다.
너무 많이 뽑아 주어서 날지 못할 정도였습니다.결국 마지막 날개의 깃털을 뽑아 주었을 때 사수는 활의 방향을 돌려 자기 옆에 있는 그 독수리를 쏘아서 잡았습니다.
우스운 우화 같지만 굉장한 진리를 담고 있습니다.
시깃ㅁ의 출발이 결국 자기의 파멸과 멸망을 가져 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마음에 있는 시기심을 "인간이면 누구나 이 정도의 시기심은 있다"며 넘어가지 마십시요.
이 우주, 하나님의 세상을 죄로 물 들이는 것도 시기심에서 출발한 것입니다.
사울왕이 비참한 종말도 바로 이 시기심에서 출발헀다는 것을 깨달으시고 또한 구원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깨닫고 시기심을 극복하시기 바랍니다.
(음 모)
한 가지 더 생각합시다.
사울은 이러한 시기심 속에서 결국은 음모를 꾸미고 그 열매를 맺어가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사울은 백성들이 다윗을 너무 좋아하기 때문에 공개적으로 다윗을 처치했다가는 오히려 자기에게 해가 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은밀하게 음모를 꾸며서 다윗을 죽일 생각을 합니다.
그는 다윗을 죽이기 위해서 전쟁에 내보냅니다.천부장을 통해서 계속 전쟁터에 보내는데 죽어서 돌아와야할 다윗이 죽지는 않고 오히려 나가는 싸움마다 승리해서 돌아왔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괴롭겠습니까?
그래서 다른 작전을 씁니다.
첫 딸 메랍을 줄테니 용감하게 여호와의 이름으로 나가 블레셋군과 싸우라고 합니다.
말은 근사합니다. 그렇지만"내가 어떻게 임금의 사위가 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며 다윗이 거절합니다.
사울은 메랍을 다른 사람에게 아내로 줍니다. 그런데 둘째 딸 미갈이 다윗을 연모하고 있었습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사울이 기회를 놓칠리가 없었습니다.
미갈을 네게 줄테니 블레셋 사람의 양피 일백장만 가지고 오라고 합니다.
사울은 틀림없이 다윗이 죽을 거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다윗을 죽음의 현장에 몰아 넣기 위해서 별의별 궁리를 다 합니다.
사람의 마음이 시기심으로 가득 차면 이렇게 비인격적으로 타락해 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다윗이 승락을 하고 갔습니다.
어떻게 되었습니까? 사울의 기대대로 되었습니까? 압니다.
요구한 양피 100장의 두배, 200장을 가지고 왔습니다. 그래서 미갈과 결혼을 했습니다.
(죄의 노예)
이제 사울은 방법을 달리 합니다.
지금까지는 다윗을 공개적으로 대적하면 자기에게 손해 된다는 생각에서 우회적인 방법을 썼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다우ㅏㅅ을 무조건 죽이겠다는 것입니다.
시기심이 이렇게 까지 타올라서 아들 요나단과 모든 신하들에게 다윗을 죽일 것이라는 사실을 공개적으로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요나단이 다윗에게 이 사실을 이야기해 줍니다.
미쳐버린 사울 왕이 음악을 연주하는 다윗에게 창을 덤집니다.
다행히도 다윗은 그 창을 피했지만 사울 왕이 자기를 죽이려고 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얼마나 비참한 모습으로 끌려가는 죄인의 모습입니까?
시기심 때문에 죄의 노예가 되어서 자기의 참된 모습을 발견하지 못하고 와전히 타락한 모습으로 떨어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시기심은 결국은 죄의 노예로 만드는 자리까지 끌고 간다는 것을 여기서 보게 됩니다.
이 본문 이후를 보면 사울 왕은 심지어 사무엘이 있는 라마까지 다윗을 쫒아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보다 더 중요한 것)
사울 왕은 자기의 왕권, 자기의 지위가 하나님보다 중요했습니다.
내 자리는 내가 지켜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 자리는 하나님이 기름부어 주신 자리인데도 왕의 지위가 하나님보다 중요했습니다.
그후 그 마음이 더 완악해지고 아예 좌우를 분별하는 지혜도 없어져 버렸습니다.
시기심에 혈안이 되어 사람을 죽이려는 비참한 모습으로 전략해 버린 사울 왕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가 하나님보다 더 중요한 것을 갖게 되면 이러한 모습으로 전략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는 교훈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 보다 중요한 것, 그것이 돈이든지 나의 자녀이든지 명예이든지 간에 아무리 세상에서 중요한 것일자라도 여러분은 그것의 노예입니다.
그런 것은 여러분을 노예로 만드는 죄입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나의 생명보다 귀하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나의 일생에서 가장 으뜸 되는, 나의 왕좌에 앉혀 드리고 살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포기한 자가 누리는 복)
요나단이 자기의 왕권을 내려 놓았을 때 세상적인 의미에서는 왕이 되지 못했지만 그는 그 어느 누구보다 왕다운 모습을 지닌 자가 되었습니다.
왕권을 버리고 나서 참된 왕의 모습으로 부각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왕권을 지키려고 달려가면 왕권도 잃어 버릴 뿐더러 더 나아가 비참한 모습으로 전락해 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팔복(八福)에서도 복을 사모하는 자애게 복을 약속하는 것이 아닙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 애토하는 자, 온유한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긍휼이 여기는 자, 마음이 청결한 자, 화평케 하는 자,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의 자세로 나가는 사람만이 결국 복도 누리고 지혜도 회복되며 하나님이 주시는 사람다운 형상을 갖도록 회복시켜 주신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기독교의 진리가 있습니다.
복을 좆아가서 찾는 것이 아니라, 복을 포기하면서 복을 얻는 진리가 기독교의 지혜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좆아가며 무엇을 위해 달려가는 것입니까?
무엇이 여러분의 삶 속에 의미와 목적을 부여합니까?
무엇이 여러분의 삶을 붙잡고 있는 것입니까?
우리는 남과 비교해서는 안 됩니다.
내가 저 사람보다 낫다고 생각해서도 안 됩니다.
우린 다 자격이 없는 가운데 춛복을 누리는 죄인이라는 것을 알고 나아가야 우리가 이 시기심과 투기심, 결국 나아가서 죄의 노예가 되는 부자유함으로부터 승리할 수 있습니다.
(마이어 목사의 고백)
위렌 워어스비라고 아주 유명한 목사님의 설교집에서 읽은 글입니다.
영국의 유명한 3목사님에 대한 이야기인데요, F. B.마이어 목사님은 그리스도 교회 (Christ Church)의 목사님이셨고, 스펄젼 목사님은 메트로 폴리탄 테버네클(Tabernade)의 목사님이셨고, G. 캠벨 목사님은 웨스트민스터 채플(Westminstr Chapel)에서 목회를 하고 계셨어요.
세곳 교회모두 런던 인근 지역에 위치하고 있었습니다.
다들 너무나 거성들이고 훌륭한 목사님들이라고 생각되는 분들인데, 그 중에서 F.B.마이어 목사님이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스펄전 목사님과 캠벨 목사님이 옆에 있으니 정말 주눅이 들더랍니다.
쉽게 말하자면 바로 옆에 한 경직 목사님이, 그 옆에 김 창인 목사님이, 바로 그 옆에 조 용기 목사님이 목회를 하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다 그쪽 교회로 가는거예요.
"우리 교회로 몰려 오게 해 주십시요"기도해도 그 교회로 다 들어 갑니다.
그러니 마음 속에 어떤 마음이 생기겠습니까?
스펄전 목사님 교회는 만만인데 왜 우리 교회는 십십인가?
비교하기 시작하니까 시기심이 생기고 그 시기심 때문에 기도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하나님 앞에서 깨달은 바가 있었습니다.
그 다음부터 이렇게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스펄전 목사님 교회를 풍성하게 하셔서 차고 넘치게 해주옵소서. 캠벨 목사님의 교회가 정말로 참된 교회로 넘치는 신령한 복을 쏟아 부어 주옵소서"
그랬더니 두 교회가 복을 받고 부흥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또한 그교회들이 차고 넘쳐 마이어 목사님 교회에도 흘러 들어와 부흥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여러분, 시기하는 마음, 비교하는 마음들을 우리가 극복하고 넘어갈 때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의 감격을 새롭게 체험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남이 잘 되는 것을 보면서 우리가 함께 기뻐 할 수 있고, 남이 잘 안되는 모습 속에서 같이 아파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닮은 자가 될 수 읶다고 믿습니다.
혹시 식심 때문에 여러분의 마음 속에 평안이 사라지지는 않았습니까?
자꾸 남과 비교하는 가운데서 자기 자신을 자꾸 비참하게 만드는 모습이 있지는 않습니까?
여러분, 시기심이 혹은 그 마음에 있다면 경계하십시요.
하나님의 지으신 세상을 죄로 물들이고 사울 왕의 마지막을 비참하게 만든 것이 시기심이라면 그 시기심이 얼마든지 우리들도 그렇게 만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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