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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시대 12연방은 신시시대에 9한(桓) 64민(民)이 되었고, 단군조선 시대에 다시 삼한(三韓)으로 나누었는데, 삼한(三韓)은 진한(辰韓), 마한(馬韓), 번한(番韓)을 말하며, 오가(五加) 64족을 모두 포함하였다. 이러한 내용이 [한단고기]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왕검 역시 하늘에서 내려와서 불함산에 사시니, 나라 안의 모든 사람들이 함께 받들어, 단군으로 모시어 이를 단군왕검이라 한다. 태어나면서부터 지극히 신묘하고 성스러워서 구한(九桓))의 삼한관경(三韓管境)을 모두 통합하였다.」 [한단고기 태백일사 삼신오제본] 「신시개천(神市開天)에서부터 18세를 전하여 1,565년이 흘러서 비로소 단군왕검이 나셨다. 웅씨의 비왕( 王)으로서 마침내 신시에 대신하여 구역(九域)을 통일하고 관경(管景)으로 삼한(三韓)을 나누었으니 이를 단군조선(檀君朝鮮)이라고 한다.」 [한단고기 신시본기] -------------------------------------------------------------------------------------------------- <국학원> 단군왕검의 실존논증 단군왕검에 대한 실존을 증명하는 문제라면 먼저 문헌적인 측면에서 증명하는 방법과 고고학적인 측면에서 증명하는 방법이 있겠습니다만 질문을 보니 B.C. 24C를 신석기 시대로 보시고 의문을 제기하신 것 같으니 이를 중심으로 설명드리겠습니다. 님께선 B.C. 2333년이 신석기 시대라고 하셨지만 현재 청동기연대는 남한과 북한, 중국의 고조선 영토에서 잡고 있는 연대가 크게 다릅니다. 질문하신 분은 고고학과로 알고 있습니다만 학교에 계신 고고학 교수님께서는 우리나라의 청동기 연대를 언제로 잡고 있는 입장이신진 모르지만 국사학계와 고고학계의 불편한 관계를 익히 아시겠군요. 일제의 식민사학때 漢史에 없다면 신용할 수 없다는 이유로 삼국의 역사를 중국문헌에 처음보이는 시점을 토대로 고구려는 태조왕(『위서』부터는 1대 주몽부터 자세히 나오지만 당대문헌이 아니란 이유로 불신함), 백제는 근초고왕, 신라는 진흥왕부터 역사를 인정하고 그 이전의 이용할 수 없다는 괴변을 내놓았습니다. 해방후에도 이런 아무런 근거도 없이『삼국사기』초기 기록을 믿을 수 없다는 사관을 그대로 답습하여 일제보다 조금 올려놓은 백제는 8대 고이왕, 신라는 내물왕때부터야 역사를 인정하는 경향으로 인하여 고고학적으로 삼국 초기의 수준높은 유물이 계속 출토가 되었지만 초기의 역사를 부정하는 국사학계 때문에 고고학계는 원삼국시대라는 학술용어까지 만들어 사용했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입니다. 삼국의 역사조차 낮춰보는 풍토속에 하물며 그 이전의 고조선의 역사는 당연히(?) 일단 낮춰놓고 보자는 국사학계의 태도와 신석기·청동기 시대의 발굴이 계속되었지만 이를 고조선의 실체와 연결하는 움직임이 부족함, 그리고 고조선 연구가가 부족하다는 것 역시 단군왕검의 B.C. 24C 고조선 건국을 불신하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한국사학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친 인물이지만 동시에 식민사학의 대표자로 알려진 이병도 교수도 '실존 인간 단군과 영구한 역사를 이어온 고조선에 관하여서는 더 연구할지 언정 신화로 단정할 수 없다'고 말하였고, 그의 말기의 저서 『한국상고사입문』을 통해 "단군조선은 군주의 뜻을 지니는 檀君이 88대에 걸쳐 2000여년 동안 통치했던 중국 요동을 중심으로 한 강대한 광역국가였다"고 한바 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20여년 전에 옛소련에서는 자국의 영토에서 출토되는 고조선 유물을 토대로 고조선에 관한 연구성과를 책으로 펴낸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당시만 해도 한국에서는 고조선에 대한 변변한 책 한권 내지 못할 정도로 고조선에 관한 연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었습니다. 사실 국내에서 윤내현등의 고조선 연구가가 등장하여 고조선에 대한 연구가 제대로 이루어지기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더욱이 고조선의 전체강역을 본다면 남한 지역은 변방에 불과할뿐이니 고조선을 제대로 연구하기 위해서는 한국의 고고학자들중 절반이상은 북한이나 중국에 가서 연구를 해야 할텐데 그곳으로 뛰어가기도 대단히 어려울 뿐아니라 가서 연구하려는 학자도 없다는 것이 한국의 현실입니다. 그러나 국내에서는 거의 유일하게 중국에서 고고학계 역사학 및 박물관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지난 7년간 중국의 고조선 옛 영토인 랴오시 지역의 유적 발굴에 참여하고 돌아온 단국대 복기태 박사는 이 지역의 유적이 고조선의 건국연대인 B.C. 24부터 시작하여 상당한 수준의 국가체제를 이룩한 것이 확인된다면서 중국학자중에서도 중국당국의 눈치때문에 공식적으로 밝히진 못하더라도 이를 고조선의 문화로 단정하는 학자들도 있다고 밝힌바 있습니다. 또 북한지역에서는 1993년 평양시 강동군에서 5000년전에 축조한 황대성 발굴을 시작으로 평안남도 온천군 성현리 토성, 평양시 대성구역 청암동 토성 등 국가 존재를 실증하는 중요한 물적 자료가 되는 고조선 초기 성곽의 유적이 계속해서 발굴되었습니다. 그리고 대동강 유역에서 발굴된 별자리가 새겨진 고인돌 무덤 200여기중 B.C. 3000∼ B.C.2900에 해당하는 때의 것이 적지 않게 발굴되었고 이러한 발굴들을 토대로 청동기연대를 B.C. 3000년까지 보고 있습니다. 현재 남한에서는 북한의 청동기 연대가 너무 올려잡은게 아니냐 비판을 하지만 설사 몇 세기 올려 잡았다고 해도 북한이외의 지역에서의 발굴만해도 고조선의 건국연대인 B.C. 24C에 이미 청동기시대에 이르렀다는 것은 과학적인 연대 측정으로 충분히 입증이 되는 사실입니다. 현재 남한에서 가장 오랜 파주 옥석리 유적의 방사성탄소에 의한 연대 측정은 1차 측정에서 2590±130B.P. 가 나왔고 2차측정에서 2980±130B.P가 나왔으며 연암군 장천리 유적의 청동기시대의 집자리와 경기도 양평군 양수리의 고인돌무덤의 연대는 B.C. 25C 경으로 방사성탄소 측정 결과가 나왔습니다. 그리고 고조선에 대해서 연구가 부족한 학계의 현실이지만 근래 나와있는 책중에서 혹시 읽지 않으셨다면 반드시 읽어보시라고 권해드릴 만한 책 몇권을 소개해드릴까 합니다. ⊙ 윤내현 교수의 『고조선 연구』(일지사) : 국내에서 고조선 연구에 관해서 독보적인 위치에 있는 윤내현 교수가 자신의 고조선에 관한 연구를 집대성한 책. ⊙ 복기태의 박사의 『요서지역의 청동기시대 문화연구』(백산자료원) : 국내에서 유일하게 요서지역에서 발굴에 참여해 왔던 복기태 박사가 현지에서의 7년간의 연구성과를 담은 귀중한 기록. ⊙ 이형규의 『단군과 고조선』(살림터): 고고학과나 사학과라면 국내뿐 아니라 해외의 발굴이나 새로운 학설에는 항상 촉각을 세워야 하지만 국내에서 해외의 논문이나 서적을 접하는 것은 힘든편입니다. 그나마 근래에는 북한학자들의 책이 출간되고 있어 다행입니다만 그중에서도 이 책은 북한학자들의 단군릉을 보수사업을 계기로 최근의 발굴적 성과와 학설을 수록하고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단군왕검 관련 유적으로 남한지역에서는 강화도 첨성대가 시조 단군이 세 아들인 부우, 부소, 부여에게 명하여 쌓게 한 것이라 전하죠. 단순한 설화가 아니라 대한제국시절 가리키던 역사교과서에도 나오는 사실입니다. 뿐만 아니라 당시의 역사교과서에서는 단군의 가족사항, 고조선의 구체적인 강역, 고조선의 동호정벌 기록과 반란기록등 현재의 국사교과서와는 비교가 안될만큼 고조선의 역사를 비교적 상세히 기록하였습니다. 여기에 온조에게 멸망하기 전까지 마한(馬韓) 역대 왕들의 이름이 모두 나오기도 합니다. 당시만해도 고조선의 역사를 상세히 기록한 문헌이 적지 않았겠습니다만 일제의 분서로 인해 대부분 사라지고 만 것이 안타깝습니다. 조선사편수회가 1923년부터 차입한 사료가 무려 5000종에 가까웠고 미공개되었던 자료도 많았다고 전합니다. 그리고 일제는 해방이 되자 돌려준 문헌은 일부에 지나지 않습니다. 바로 『삼국유사』, 『제왕운기』등 고조선의 역사를 건국사실만 간략히 기록하거나 신화적으로 서술하여 역사적 가치가 떨어지는 문헌들만 20여가지만 돌려주었습니다. 단군왕검과 고조선에 연구에 대해서는 이러한 일제시대 이후 문헌적인 부족함과 중심지가 있는 북한이나 중국에 가서 연구를 할 수 없어 학술적 발굴을 통한 역사적 복원이 어렵고, 식민사관의 영향으로 일단 건국연대를 낮추어 보자는 학계의 풍토, 고조선에 대한 연구가 절대적으로 부족함... 이런 것을 감안하지 않고 일부 단편적인 기록만으로 쉽게 판단한다면 일본제국주의자들이 한국인을 영원히 자신들의 식민지 노예로 만들기 위해 민족의 구심점이었던 단군을 아예 말살시키고 신화라고 날조한 식민사관에 그대로 빠져들기가 너무도 쉬운 것이 현실입니다. 단군왕검의 실존여부에 대해서는 앞서 제가 언급한 책들과 『삼국유사』, 『제왕운기』뿐만 아니라 서거정의 『삼국사절요』, 안정복의 『동사강목(東史綱目)』, 허목의 『동사(東史)』, 한치윤의 『해동역사』,『동사총목』(일반 도서관에는 흔하지 않지만 사학과나 고고학과가 있는 대학 도서관이라면 대부분 있을 겁니다), 조선왕조실록에 나오는 단군관련 기록만 모은 『조선왕조실록중의 단군기록』과 단군의 고조선 건국을 다룬 중국 문헌인 『조선세기』, 『사고전서속의 단군기록』(다만 이들 문헌은 번역되지 않고 원문 그대로 출간되었기 때문에 읽으시는데 조금 어려움은 있으실 겁니다)... 이러한 문헌들을 충분히 연구해보신 다음에 국조 단군왕검의 실존에 대해서 결론을 내려보시길 당부드리고 싶습니다. ------------------------------------------------------------------------------------------------ <국학원> 단군왕검 조선'이 동양의 '中心國'인 '中國' '단군왕검 조선'이 동양의 '中心國'인 '中國' 조옥구의 한민족과 漢字 비밀<3> 제1장 한자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정체불명의 국호 ‘中國’...中心國의 줄인말로 '祭政一致' 시대의 조선 조옥구 동양 상고사에는 아직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은 많은 사실들이 있는데 ‘중국’이라는 국호도 그 중의 하나다. 유사 이래로 중원에는 우임금이 세웠다는 하(夏)나라를 비롯해서 은(殷), 주(周),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 춘추5패 전국7웅), 진(秦), 한(漢), 위진남북조시대(魏晉南北朝時代), 수(隋), 당(唐), 송(宋), 요(遼), 금(金), 원(元), 명(明), 청(淸) 등 많은 나라가 있었지만 어디에도 ‘중국’이라는 나라는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현재의 ‘중화인민공화국’을 줄여서 ‘중국’이라고 쓰는 것으로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중국’이란 국호는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되기 훨씬 전부터 사서(史書)는 물론이고 훈민정음 반포문에도 등장하는 역사용어다. 그렇다면 ‘중국’이란 어느 나라를 말하는가? 특히 한자의 기원과 관련하여 ‘한자가 중국에서 만들어 졌다’고 할 때의 ‘중국’은 어느 나라를 말하는가? 백보 양보하여 위의 여러 나라 가운데 ‘중국’이라는 나라가 있다고 치자. 지나의 역사는 우임금이 세웠다(BC2070년)는 ‘하’나라로부터 시작한다는 것이 지나국의 공식입장이며 현재까지의 정설이다. 그런데 어떻게 ‘하’나라 이전에 이미 만들어져 쓰이고 있는 한자를 ‘중국’에서 만들었다고 말할 수 있는가? 이런 의문의 중심에는 지금의 정치체제와 다른 고대의 지도체제가 자리 잡고 있으므로 먼저 고대사회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종교와 정치가 분리된 지금의 체제와는 달리 고대 신인사회에서는 정치와 종교가 분리되지 않고 하나의 권위에 속해 있었다. 이 시기를 소위 ‘제정일치(祭政一致)시대’라고 부르거니와 정치적 정신적 지도력이 한사람의 지도자에게 집중된 것으로, 마치 유엔의 최고 지도자가 바티칸의 교황 직위까지 겸한 것과 같은 모습을 상상하면 그 모습이 고대 중심국의 위상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유엔과 바티칸의 특징은 국경이 없다는 점이다. 그 이념과 신앙에 동참하면 누구라도 기존의 질서에 합류할 수 있는 것이며 자신의 신념에 따라 자유로이 질서에서 벗어날 수도 있는 것이다. ‘덕이 쇠하여 천하가 등을 돌렸다’ 등의 고대의 기록을 통해서 제정일치 시대의 강력한 지도력은 곧 ‘도(道)’와 ‘덕(德)’에 근거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동양사에 등장하는 ‘중국’이란 곧 제정일치시대의 ‘중심국(中心國)’의 호칭이다. 명실 공히 ‘정치체제와 정신적 지도력을 동시에 갖춘 천하의 중심이 되는 나라’라는 뜻이다. ‘중국’은 이 ‘중심국’을 줄인 말로, 정치체제를 갖춘 ‘국가 조직’과 로마 교황청과 같은 ‘신앙 조직’의 성격을 동시에 갖춘 곧 '제정일치(祭政一致)'의 시대를 의미한다. 바티칸의 교황이 그러하듯이 ‘중심국’이 되려면 여러 나라의 백성들을 이끌만한 정신적 도덕적 지도력을 갖춘 인물이 있어야 하는데, 동양의 역대 인물 가운데 ‘성통공완(性通功完) 재세이화(在世理化) 홍익인간(弘益人間)’의 높은 철학과 이념으로 중원의 세계를 이끌었던 조선의 단군 왕검이야말로 중심국의 위상에 맞는 인물이 아닐 수 없다. 고대 동양의 인물 가운데 이런 차원높은 철학을 주창한 이가 단군 왕검을 제외하고 또 누가 있단 말인가? 상고 시기 동양의 중심국은 단연코 단군왕검이 세운 조선(朝鮮)이었다. 조선에 이어서 고구리가 중원의 중심국이었을 가능성을 말해주는 것이 ‘가우리’라는 고구리의 국호(國號)다. ‘가우리’는 고구리의 또 다른 명칭인데 '가우리'는 ‘가운데’와 음이 흡사하다. 중원의 역대 나라들에 대하여 우리 선조들이 거부감 없이 ‘중국’이라고 부를 수 있었던 것은 이처럼 과거 고대 조선이 중원의 중심국이었던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며 상고시기의 일에 대해서 너무나 관대하게 대하는 버릇도 역시 이런 기억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한자를 만든 나라는 중국’이라는 주장에 대하여도 ‘중국’이라는 말 한마디에 당연히 그러하리라 여겼으며, ‘중심국’이 있었던 지역이라는 경험 때문에 동양에 처음 등장하는 수많은 발명품들은 물론 그 땅에서 일어난 나라들은 모두 ‘중국’이라고 부르면서도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던 것이다. 이것이 ‘중국’이라는 국호의 정체이며 우리 고대사를 혼란스럽게 만든 요인 중의 하나다. 이중의 입체구조로 되어 있는 동양의 상고 역사를 하나의 평면상에 늘어놓고 퍼즐 맞추듯 하려니 도저히 해법을 찾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동양의 역사를 정립하려면 단군 왕검이 세운 조선(朝鮮)이라는 나라를 예사롭게 보아서는 안된다. [조옥구 한자연구소장/'한자의 기막힌 발견' 저자] |
https://www.historyworld.org:54100/sub03/sub4.html?act=view&target=20248&keyfield=&key=&page=1
'하늘에 새긴 우리 역사'
박창범 저
'옛 밤하늘을 보면 우리 고대사가 풀린다'(한국.11/23)
'천문과 역사의 만남'이란 주제도 흥미진진하거니와, 어려운 학술용어 사용을 줄이고 문장도 쉽고 깔끔하게 엮어 천문학과 역사에 어두운 이들도 부담없이 읽을 수 있다.
우주거대구조 연구가 본업인 박교수가 고대천문학에 발을 들여놓은 것은 1993년 초, "일본이 시비를 거는 백제초기 역사를 천문학으로 규명해보면 어떻겠느냐"는 동료 천문학자의 제안에 귀가 솔깃해진 그는 평소 관심을 뒀던 고조선 기록 검증작업에 나섰다.
우선 해와 달, 행성, 별들의 운동을 계산하고 시각화할 컴퓨터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정사서로 인정받지는 못하지만 고조선의 역사가 꼼꼼히 정리된 '단기고사'와 '한단고기'의 '단군세기'편을 뒤져 다양한 천문, 자연현상 기록을 찾아냈다. 그가 주목한 것은 금성 목성 토성 수성 화성 등 다섯행성이 하늘에 모이는 오행성 결집현상. 250년에 한번 꼴로 일어나는 휘귀 현상이어서 진위확인이 수월하기 때문이었다.
분석결과, 기록보다 1년 늦은 기원전 1773년에 실제 이 현상이 일어났음이 확인됐다. 기록을 꾸몄다해도 불과 1년차로 근접할 확율은 0.0007. 조작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뜻이다. 그는 이 결과를 발표, 정통사학계에 파문을 던졌다. 그는 "천문현상에 관한 한 사실을 담고 있는 만큼 이들 사서를 마냥 무시할 것이 아니라 내용의 옥석을 가려야 한다"고 충고 한다.
'삼국사기' 분석 결과는 훨씬 흥미롭다. 노골적으로 조작설을 제기하는 일본학자들은 물론, 국내 학자들 상당수도 '삼국사기'초기 기록의 신빙성에 의문을 품고 있다. 그는 중국사서에는 없는 천문 기록 가운데 서기 205년 "태백범월(太白犯月: 달이 금성에 접근함), 태백주현(太白晝見: 금성이 낮에 나타남) 현상도 7개중 4개가 사실임을 확인했다. 삼국이 7세기 후에야 천문 관측을 할 수 있었다는 일본 학자들의 주장이 억지임을 밝혀준다. 일식도 실현율(실제 확인된 기록의 비율)이 최고 89%에 달해 중국(63-78%)보다 오히려 높았다. 반면 일본의 기록 실현율이 35%에 그쳤다.
놀라운 것은 일식의 최초 관측지점이 백제는 발해만 유역, 신라 초기는 양쯔강 유역으로 나타났다는 점이다. 천체관측은 수도에서 이뤄지는 것이 상식. 그렇다면 백제와 신라의 강역이 중국까지 뻗쳐있었다는 것일까. 박교수는 "내 역할은 옛 천문기록을 활용 가능한 사료형태로 바꿔놓는 것"이라면서 이 수수께끼의 해결을 역사학계의 몫으로 남겨놓았다.
박교수는 1395년 돌을 새겨 제작한 천문도 '천상열차분야지도(天象列次分野之圖:국보 228호)'가 중국 것을 베꼈다는 외국학자들의 주장과는 달리 그림 설명에 기록된 것처럼 고구려때 실측 제작된 천문도를 일부 고쳐 새긴 것이라는 사실도 입증했다.
그에 따르면 갈릴레이가 1611년 처음 발견한 것으로 알려진 태양 흑점도 우리 기록에는 이보다 1,000년 가까이 앞선 640년에 등장하고, 오로라 기록도 세계에서 가장 많이 보유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세계 고인돌의 절반을 보유한 '고인돌 왕국'이다. 박교수는 96년 북한의 고인돌 별자리 확인 보도를 접한 뒤 고인돌 연구에 몰두, 78년 발굴된 충북 청원군 문의면 아득이 마을 고인돌의 부장품 갈돌판 새겨진 크고 작은 홈들이 천문도임을 밝혀냈다. 우리 천문학의 시원이 청동기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는 증거다.
고고학자 종교학자 등과 팀을 이뤄 고인돌 연구를 계속하고 있는 그는 북한 학자들과 공동연구 방안도 모색중이다. 책에는 이밖에 천문 관련 유적과 유물, 민속자료에 나타난 옛 사람들의 우주관 등에 대한 상세한 설명도 담겨있다. 말미에는 고천문학 관련 참고문헌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놓았다.
https://www.historyworld.org:54100/sub03/sub4.html?act=view&target=20243&keyfield=&key=&page=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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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이족(東夷族)
중국 역사에 서 동쪽에 사는 이민족를 일컬어 부르는 말이다. 동이는 특정 민족이 아니라 중국인 들이 중국의 동쪽에 존재한 여러 이민족들을 '동쪽 오랑캐'라고 얕잡아 부르는 말이 었다.
동이라는 말 은 시대에 따라 그 의미가 변화하였다. 한나라 이전의 동이는 하나라와 주나라를 건 국한 화하족이 상나라(은나라) 등을 멸시하여 부르는 말이었다. 한나라 이후 중국의 영토가 넓어지면서 동이라는 용어는 중국의 동쪽에 위치한 만주, 한반도, 일본 등지 에 거주하는 이민족을 부르는 말로 변화되었다.
오늘날 한민 족의 원류를 형성하는 부여, 고구려, 백제, 예맥, 삼한 등이 동이로 불리었으며, 말 갈, 선비, 오환, 왜 등도 동이로 불리었다. 한나라 이후 동이라고 불린 여러 민족 중 상당수는 오늘날 한민족으로 이어졌다.
한국의 일부 재야사학 인사들은 동이 전체를 한민족으로 간주하고 추앙하기도 하나, 동이 전체를 한민족과 동일시하는 시각은 타당하지 않으며 학계에서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 다.
역사
동이는 중국 을 중심으로 동쪽에 거주하는 이민족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다. '사이(四夷)'와 같이 이(夷)는 오랑캐 전체를 일컫는 대명사로도 사용되었으나, 일반적으로 동서남북 의 각 방위에 따라 오랑캐를 구분하여 동이·서융(西戎)·남만(南蠻)·북적(北狄)으 로 불렀다.
동이가 최초 로 등장하는 기록은 은(殷) 시대의 갑골문자로, 이(夷)에 해당하는 갑골문자는 尸(주 검 시)와 유사한 형태로 나타난다. 《설문해자》(說文解字)에는 이(夷)의 어원 을 '큰 활을 가진 사람'이라 해석하였으며, '이(夷)'라는 글자가 '대(大)'와 '궁 (弓)'이 합쳐서 만들어졌다는 추측이 전통적인 관점이었으나, 갑골문자의 발굴 결과 와 다르기 때문에 현재는 인정되지 않고 있다.
은 시기 및 그 이전 시대를 기록하고 있는 문헌에서 등장하는 동이는 주로 산둥 성, 허베이 성, 장시 성 일대에 거주하고 있는 종족으로, 중국 역 사의 한 축을 담당하였다. 삼황오제(三皇五帝)의 여러 제왕들을 비롯하여 은나라까 지 동이 출신으로 기록하기도 한다. 당시의 동이를 9개의 종족으로 구분하여 구이(九 夷)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후한서》〈동이전〉에서는 이들 구이를 견이(畎夷)·우이(于夷)·방이(方 夷)·황이(黃夷)·백이(白夷)·적이(赤夷)·현이(玄夷)·풍이(風夷)·양이(陽夷)로 구분하고 있으나 그 외에도 다양한 구분법이 기록으로 남아 있다. 그러나 九라는 글 자가 단순히 많다는 의미를 가져 구이는 동이의 수많은 종족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 는 것이 옳은 용법이다.
주나라 이후 동이는 중국에 정복되고 흡수되기 시작하여 춘추전국 시대에 이르면 산둥반도의 래이 (萊夷)나 장시 성의 회이(淮夷)등의 작은 세력으로 축소되었다. 한나라가 건국된 이 후 동이는 모두 중국에 흡수되어 소멸되었으며, 이후의 동이는 만주·한반도·일본 열도의 종족들을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한나라 이후 의 동이는 이전의 동이와 문화적·혈연적으로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보는 것이 일반 적이다.
한나라 이후 의 동이는 특별한 문화적·혈연적인 관계를 구분하지 않고 방위의 개념으로써 동쪽 에 거주하고 있는 모든 오랑캐들을 한꺼번에 서술하였다. 그로 인해 문화적·혈연적 인 계통상 차이가 큰 예맥족·한족(韓)·말갈족·왜족(倭) 등이 모두 동이로 서술되 었다. 또한 말갈을 당나라 이후 동이에서 북적으로 바꿔 부르는 등, 방위를 제외하 면 해당 종족들을 특별하게 구분하여 부르는 기준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한나 라 이후의 중국 역사서에서는 대체로 한민족의 기록은 〈동이전(東夷傳)〉에 기록되 었기 때문에 특히 대한민국에서는 일반적으로 동이가 한민족을 가리키는 말로 이해되 고 있다.
당나라 이후 중국의 역대 정사들은 주변 국가를 오랑캐로 취급하는 인식에서 발전하여 주변 국가 들을 외국(外國)으로서 열전에 편성하였다.
동이의 용례
동이는 동쪽 오랑캐를 가리키는 일반명사로도 사용되었으며, 한국의 옛 나라들은 자국의 동쪽에 위치한 국가나 부족을 동이라 불렀던 흔적이 남아 전해진다. 중원고구려비에는 신라 를 동이라 칭하고 있으며, 조선 시대에는 일본을 동이라 칭하기도 했다. 일본 역시 헤이안 시대부터 아이누 민족을 이(夷) 또는 에조(蝦夷)라 칭하며 오랑캐로 취급하였 다. 헤이안 시대에 아이누 족을 공격하는 직책을 맡은 대장은 세이이타이쇼군 (정이 대장군, 征夷大将軍)에 임명되기도 했다.
문헌
《후한서(後 漢書)》 이후 중국의 역대 정사들은 열전 부분에서 〈동이전〉이나 기타 이민족의 열 전을 편성하고 그 안에서 동이의 역사를 독자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동이전에 기록 된 종족들은 한민족에 해당하는 여러 종족을 비롯하여 왜·말갈·유구 등이며, 주로 한민족의 기록이 중심이 되었다.
《후한서》 (後漢書)제85권 〈동이전〉은 부여·읍루·고구려·동옥저·예·한 등 한민족의 원류 를 형성한다고 여겨지는 여러 종족들을 다루어 한국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 다.
《삼국지》 (三國志) 〈위서〉(魏書) 제30권 '오환선비동이전'(烏丸鮮卑東夷傳)은 동예, 부여, 고구려, 옥저, 왜를 동이에 해당하는 항목에서 서술하고 있다.
《진서》(晉 書)97권 〈사이전〉(四夷傳)에는 동이 항목에서 부여국, 마한, 진한, 숙신씨(肅慎 氏), 왜인(倭人) 등을 서술하고 있다.
《송서》(宋 書), 《남제서》(南齊書), 《양서》(梁書), 《위서》(魏書),
《주서》(周 書), 《수서》(隋書) 등 남북조 시대의 사서들에도 각기 〈동이전〉, 〈이만전>(夷蠻傳), 〈동남이전〉(東南夷傳) 등이 편성·기록되어 있다.
《구당서》 (舊唐書), 《신당서》(新唐書)의 〈동이전〉에는 고구려,
백제, 신라 등의 역사가 기록되어 있다.
특이사항으로 는 이전의 정사에서 일반적으로 동이로 취급되던 말갈이 북적으로 바뀌어 기록되어 있다는 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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