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 속에 감춰진 지존(至尊)
Valvo LK4112
연일 30도 이상을 오르내리는 살인적인 무더위 속에서 음악을 듣는다는 것은 어쩌면 사서 고생하는 일 내지는 스스로 자신을 고문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엄청나게 큰 공간에서 멀치감치 시스템을 놓고 에어컨 바람 속에서 아주 쾌적하게 음악을 감상하는 경우는 사실 극소수일 것이다. 대부분 고등학교 입시나 대학입시 준비하는 자녀들과 마나님에게 쫓겨서 조그만 방 하나 간신히 얻어 그 속에서 비지땀을 흘리며 음악과 함께 여름을 나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에어컨은커녕 문도 제대로 못 열고, 또 밖에서 들리는 소음이 싫어서 일부러 문 닫아 놓고는 사우나탕 같은 방에서 혼자 지지고 볶는다. 그래도 음악을 듣는 것은 즐겁다. 그 즐거움 때문에 식구들한테 온갖 수모를 다 겪으면서도 돈 없애가며 이 짓을 하는가 보다. 하기는 아무리 더워도 그 방에서만은 폼페이의 황제가 부럽지 않으니까...그리고 가족으로부터 합법적인 일탈이 보장되는 곳이기도 하며, 아무에게도 간섭받지 않는 자기만의 세계를 여는 작은 통로일 수도 있기 때문에...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정말 오디오가 협조를 안해준다. 관구식 앰프를 사용하는 경우는 한 채널에 많게는 열댓개씩 꼽힌 진공관이 아주 펄펄 끓고 파워트랜스가 그릴에 올린 프라이팬처럼 뜨끈뜨끈 해져서 "당신 오늘 한번 더워서 떠죽어 보시요"한다. TR앰프를 사용하는 경우에도 이 보다 나을 것은 하나도 없다. 대출력의 경우에는 더하면 더하지 못하지는 않을 것이다. 남태평양 바다 속의 산호 모양처럼 벌어진 방열판에서 열을 뿜어내기 시작하면 금새 방안은 고열 사우나를 방불케 한다. 그 속에서 LP판 찾아 조심스레 카트릿지를 올리는 정성에, 흐르는 땀방울이 턴테이블 위로 촛농처럼 떨어져 내려앉는다.
정말 이럴 때는 조그만 직열삼극관 싱글 앰프가 그리워진다. 열도 별로 안나고 더위를 식혀주는 산들바람처럼 살포시 다가오는 소리. 가슴을 저미듯 애절한 소리.
하지만 음압이 높은 스피커와 매칭만 잘되면 작은 출력의 삼극관 앰프지만 해상력이나 음악성, 밸런스, 다이나믹 등등은 단연 뛰어나서 역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할만큼 했다'는 애호가들이 왜 삼극관에 그렇게 미쳐있는지를 알만한 일이다.
20세기 후반을 풍미했던 자칭 타칭 당대 '고수'라는 제작자들도 삼극관이라면 사족을 못쓴다. 가까운 일본에서만도 이사무 아사노, 고이우치 시시도, 마사미츠 야마가와, 와다나베 등등이 그들이다. 뿐만 아니라 미국이나 유럽에서도 마찬가지이다. 1955년 300B 파워 앰프를 처음 자작하였던 Alvin Bryant도 40여년 동안 3극관에만 매달려왔고, Jean Hiraga도 기회있을 때마다 삼극관을 극찬해왔고, 지금도 송신관 845앰프를 주력기로 사용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아무튼 3극관의 매력은 말로는 다할 수 없는 맛이 있다. 필자는 때로 이렇게 이야기한다. '3극관은 직열이기 때문에 마치 고기를 숯불에 구워 먹는 맛이고, 다극관과 같은 방열관은 프라이팬에 고기를 구워 먹는 맛'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이것은 그냥 비유한 것이 아니라 실제 진공관의 원리를 따져보면 딱 맞는 비유가 아닌가 싶다. 즉 직열삼극관은 필라멘트에 바로 불이 들어와 전자가 튀어나가는 방식이고, 방열관은 필라멘트 위에 프라이팬이라고 할 수 있는 캐소드를 씌워 만들기 때문에 바로 프라이팬에서 전자가 튀어나가는 것이다. 따라서 그 맛도 명확히 다를 수밖에 없다.
삼극관 가운데 미국계 출력용 진공관으로는 252A, 300B 등을 지존으로 보는 사람들이 많다. 하기는 이 2가지는 약간은 다른 계보를 가지고 있다. 252A는 VT2 - 205D - 252A - VT25 - 211 -242A와 같은 송신관 계열로 발전한 경우이고, 300B는 VT1에서 101D - 104D - 275A - 300A - 300B와 같은 오디오용 계열로 발전한 경우이니 약간은 다른 면이 있기는 하다. 지금 205D와 252A는 정말로 구하기 어려운 지존의 위치를 점하고 있다. 300B도 나름대로 대중적인 것으로는 적당하게 구하게 쉬운 이른바 '적당한 지존'의 위치로 자리매김 되고 있다.
그러면 유럽에서는 어떠한가. 유럽에서는 속된 말로 날고 기는 진공관이 많아서 딱히 어떤 것이 지존이니 뭐니 하기가 어렵지만 대체로 Ed를 지존으로 꼽는데 그다지 인색하지 않은 것 같다. 그리고 '적당한 지존'으로는 AD1, RE604, DA30등을 꼽는다. 이러한 유럽관의 이른바 '지존'들은 나름대로 특성을 지니고 있는데 아주 쉽게 몰상식한 분류를 해본다면 이렇다. Ed는 빠르고 정교한 맛, AD1은 우수에 젖은 듯한 맛, RE604는 대단히 여유로운 맛, DA30은 두리뭉실한 맛 정도라고 하고 싶다. 하지만 AD1은 약간은 어두운 음색뿐 아니라 사이드 콘택이라는 독특한 소켓 때문에 조금 불편하고, RE604는 다른 것에 비해서 다소 적은 출력(2W) 때문에 스피커 구동력에 있어서 경우에 따라 불만이 있을 수 있고, 또 DA30은 영국관 특유의 다소 불분명한 소리의 윤곽 때문에 불만이 있을 수 있는 경우 이외에도, 아무런 이유없이 자고 나면 어느 날 갑자기 진공관이 동작을 안하는 불안정한 내구성 등이 문제가 된다.
그런데 사실 이런 '지존'의 대열에 들어가고 남음이 있는 진공관이 하나 있다. 바로 Valvo의 LK4112가 그것이다. 4W라는 적당한 출력과 안정성, 그리고 Ed의 빠르고 정교한 맛에 re604의 여유로움이 섞여있는 진공관이다. 보다 정확하게 말한다면 중간적 음색이기는 하지만 Ed에 보다 가깝다고 하겠다. 그래서 혹자는 이것을 'Ed의 동생'격에 해당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이는 그냥 기분학상 그렇다는 것이 아니고 LK4112가 발전되어온 역사나 만듬새, 그리고 구조적인 측면에서 아주 명확하게 나타나고 있다, 그런데 소리까지 그러한 추측과 일치한다.
앞서 본지 101호에서 Da라는 독일계 출력관의 아버지를 소개한 적이 있다. 발보에서 만든 Ed의 경우 바로 이 발보 Da에서 발전된 것이고, LK4112도 똑같이 발보 Da에서 발전된 것인데, 발보의 Ed나 LK4112는 공교롭게도 거의 같은 시기에 만들어졌다. 즉 1940년대 초반에 모두 만들어진 것이다. 가장 많이 만들어졌던 시기는 대체로 1943년경이라고 한다. 다만 이 두가지는 발전되어가는 양상이 조금 달랐을 뿐이다. LK4112가 개발되기까지는 별 차이가 없었지만, 이후 제작된 LK4200이나 LK4250, LK4330, LK7110, LK7115 등은 송신관의 길을 가게 된 것이다. 그래서 4200번 이후의 번호가 붙은 것들은 LK가 앞에 붙어있을지라도 소리는 전혀 다른 성격의 소리가 난다. 한편 LK시리즈는 4112를 만들기 전에 몇가지가 더 있다. LK430, LK460, LK4110등이 그것이다. 이것들은 RE604 동등관이거나 필립스의 E406N 동등관이다.
LK4112는 그 모양새도 발보 Ed와 약간 흡사하다. 유리관은 약간 작고 날렵하다. 그리고 팔라멘트, 그리드, 플레이트 간의 거리는 Ed와 RE604의 중간 정도이지만 Ed의 구조와 더 흡사하다. 때문에 그 소리의 특성도 마치 두가지 진공관을 섞어놓은 듯하게 나는데 소리의 경향은 역시 Ed에 더 가깝다. 내부의 재질이나 용접 특징도 Ed와 거의 같다. 필라멘트는 8가닥의 역V자 형태이며, 소켓은 유럽 4핀 소켓을 쓰기 때문에 불편하지 않다. 출력은 안정적 동작점을 잡을 경우 약 4W정도 되는데, 매우 특이한 점은 고전압 저전류로 동작시킬 때는 중고역이 유난히 아름답고, 저전압 고전류로 동작시킬 때는 대단히 우아한 소리를 내며 청감상 저역 특성도 오히려 좋아진다. 이것은 일반적인 3극관들의 동작 조건 변화에 따른 특징과는 다소 다른 별난 현상이다. 즉 보통 3극관들은 고전압 저전류로 동작시키면 저역 특성이 좋아지는 반면, 저전압 고전류로 동작시킬 경우 중고역 특성이 좋아지는데 LK4112만은 청감상 전혀 다르게 반응한다.
현재까지 LK4112는 몇몇 골수파를 제외하고, 일반 애호가들에게 친숙하게 알려지지 않은 진공관이다. 따라서 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와 같은 다른 직열삼극관에 비해서는 다소 용이하게 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말하자면 아직 진흙 속에 묻혀있는 지존의 진공관이라 하겠다. 일본에서는 Ed와 AD1이 거의 자취마저 감추었고 RE604등도 찾아보기가 힘들 정도이지만 LK4112는 한 두군데의 상점에 소량이라도 남아있으니 다행한 일이다.
Da, LK4112, AD1, Ed 등 이른바 명관을 만들어냈던 발보(Valvo-Marke)라는 회사는 1926년에 설립되었는데, 설립 당시부터 토륨 텅스텐 필라멘트를 채용한 RE064, RE144 등 수신관을 만들어냈고, 또 옥사이드 코팅이 된 RE152라는 수신관을 만들어내서 업계로부터 주목을 받았던 회사이다. 그래서 발보의 명성은 몇 십년이 지난 1950년대와 60년대까지도 자자했다. 당시 출판되었던 독일의 기술잡지 'Funkschau'나 'Funktechnik'에서는 이들에 대한 기사를 찾아볼 수 있다. 발보는 1926년에 설립이 되었지만, 이듬해인 1927년 독일에 세운 필립스 지사와 기업 합병을 하였다. 그렇지만 이름은 그대로 발보로 불리웠고, 2차대전 종전 이전까지는 제품도 대부분 발보 로고를 인쇄하여 내놓았다. 독일계 진공관 데이터 베이스를 구축하고 있는 베를린 거주 독일인 Franz Hamberger가 필자에게 알려준 바에 따르면, 발보라는 이름은 1990년 필립스 본사에서 사용을 금지시킴으로서 이제 완전히 없어지게 되었고, 지금은 'Philips German Division'이라는 이름만 남게 되었다고 한다. 아무튼 텔레풍켄, 지멘스 등과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하며 당대 최고의 독일 진공관의 지존들을 만들었던 발보는 이제 이름마저 20세기에 묻어버리고, 컴퓨터 부품과 반도체를 생산하는 전혀 다른 회사가 되고 말았다. 필자가 제작한 LK4112 앰프로 음악을 듣고 있노라면 마치 그 아쉬움의 잔영이 거기서나마 묻어 나고 있는 것 같다.
<사진 설명>
필자가 제작한 LK4112 푸쉬풀 파워 앰프 모노블록. 114밀리 대형 퍼멀로이 아웃 트랜스를 사용하였고, 회로는 차동증폭형. 출력은 약 15와트 정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