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동역사를 읽다가 흥미로운 점을 발견했다. 발해유민에 대한 거란과 여진의 입장차이다.
거란, 여진, 발해 이들은 모두 고구려의 후예들이다. 굳이 따진다면 발해는 직계이고, 거란과 여진은 방계라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거란은 요사에 자신들이 고조선의 옛땅에서 일어났고, 고조선의 관습과 법을 따르고 있다고 적고 있고, 여진은 말갈시기부터 고구려와 생사고락을 같이 한 존재이니 이들은 따지고 보면 한 집안 사람이다. 그래서 아골타가 발해유민들을 회유하며 '우린 한집안 사람이다' 라고 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동질성이 현실적인 이해관계를 초월하는 것은 아니다. 거란과 여진, 그리고 발해유민들은 북방의 패권을 두고 서로 으르렁 거렸고, 때로는 협력했다.
926년 거란은 발해를 멸망시켰다. 당연히 발해인들은 처절히 저항했고, 거란은 발해인들을 강제이주시키는 것으로 대응했다. 그러나 거란이 발해인들을 탄압만 한 것은 아니다. 다음은 해동역사의 기록이다.
야율아보기가 발해의 호구를 내지로 옮긴 뒤에는 발해군상온 과 발해군도지휘사사를 두어 요양로에 속하게 하여 이로써 고려를 제압하게 하면서 유사시에는 군사를 징발하였다.
발해인 셋이 모이면 호랑이도 잡는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발해인들은 용맹했다. 그 조상이 고구려인이니 그 피가 어디 가겠는가? 거란은 그러한 발해인의 용맹을 이용해 고려를 견제하고, 여진을 막아냈다. 거란말 여진이 급성장할 무렵에도 발해인들은 거란의 편에 서서 여진과 싸웠다. 이러한 발해인들을 거란은 특별대우 하였다.
여러 도의 군사를 징발할 경우에도 유독 발해의 병마에 대해서만은, 비록 조서를 받들더라도 반드시 위에 아뢴 다음, 위에서 대장을 파견하여 금어부를 가지고 와서 맞춰본 다음에야 군사를 발했다. 무릇 전투를 하면서 적과 대치했을 때에는 발해의 군사들이 항상 앞장서서 싸워 항상 강했다.
거란제국 안에는 발해인으로 구성된 부대가 있었고, 그 지휘권도 발해인이 가지고 있었다. 대연림은 발해사리군상온 이었고, 고영창은 발해무용마군의 지휘관이었다. 대연림과 고영창 같은 경우는 거란제국을 향해 칼을 들이댔지만, 발해상온 고청명은 거란의 편에서서 고려정벌군에 참전했고, 여진의 아골타가 영강주를 침공했을때 고선수는 발해군 3천명을 이끌고 이를 막기도 했다. 이외에도 발해 태보, 발해 달마, 발해근시상온사 등 발해인에게 내리는 벼슬도 있었다.
여진이 세운 금도 이런 발해인들을 우대했다. 아골타가 "여진과 발해는 본디 한집안이다." 라며 동질성을 강조한 것은 발해인의 용맹 때문이었다. 금나라는 고영창의 대발해국을 제압하면서 한편으로는 발해인들을 회유했고, 금 건국과정에서 발해인들은 많은 공을 세웠다.
발해인들은 한편으로는 거란제국을 돕고, 또 한편으로는 여진이 세운 금의 편에 서면서, 또 한편으로는 발해부흥운동을 전개했던 것이다.
처음에 금은 발해인들을 회유하면서, 맹안, 모극 등의 벼슬을 주었다. 그러나 금의 기반이 안정되면서 금의 정책은 바뀌었다.
황통(금 희종의 연호) 5년(1145년)에 요동의 발해인과 한인이 맹안과 모극을 승습하는 제도를 혁파하여 점차 병권을 내족에게로 옮겼다. 9년 8월에는 재신들의 의논에 따라 요양에 있는 발해의 백성들을 연지방 남쪽으로 옮기고, 그 뒤에는 또 자주 산동지방에서 숫자리를 살게 하였다. 신유년에 이르러서 모두 내몰았는데, 옛 땅에 살고 있던 자들은 혹 거란 지역으로 들어갔다. 이에 발해의 종족이 드디어 끊어져 전해지는 바가 없게 되었다.
금의 정책은 발해인들에게 벼슬을 주고 군지휘권을 맡겼던 거란과는 분명 달랐다. 금은 발해인들에게 주었던 병권을 여진족에게만 집중시켰고, 발해인들에 대한 강제 이주 정책을 강하게 실시했다. 발해인들이 이로 인해 거란땅으로 가거나, 그 대가 끊어졌다는 해동역사의 증언처럼, 금의 발해인 에 대한 대우는 강압적이었다. 그들은 거란제국을 향해 칼을 꺽지 않았던 발해인들의 투혼이 두려웠던 것일까? 해동역사는 금사의 기록을 인용 이때 산동지방으로 강제 이주당한 발해인의 슬픔을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거란에서 연 지방으로 옮긴 발해 사람들의 숫자가 더욱 불어나 5천여 호나 되었으며, 군사가 3만 명이나 되었다. 이에 금나라 사람들이 이를 제어하기가 어려운 것을 근심하여 자주 산동지방에서 수자리를 살게 하였는데, 매년 수백 가를 옮기는데 불과하여 신유년에 이르러서야 모두 옮겨 가게 하니, 발해 사람들이 크게 원망하였다. 이들은 부유한 생활을 하면서 편안하게 산 지가 2백 년이 넘어 와왕 집에 정원을 만들고는 모란을 심었는데, 많은 경우에는 2,3백 그루나 되었으며 어떤 모란은 수십 줄기가 빽빽하게 자라난 것도 있었는데, 이는 모두 연 지방에는 없는 것이었다. 이때에 이르러 이런 정원들을 겨우 몇만 냥이나 혹은 5천 냥에 헐값을 팔아버리고 떠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