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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학과제 발표 내용을 요약한 것입니다.
인터넷에 감정정으로 엉터리 자료가 넘쳐나는 상황을 인식하고
약15일동안 준비하여 발표했던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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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과 같이 냉전시대 대표적 전쟁이다.소히 월남전이라 부르며
1954년 제네바협정에 따라 공산주의를 채택한
호치민중심의 북베트남과(베트남 민주 공화국)
고딘디엠중심의 남베트남(베트남 공화국)이 분단상황을 맞게된다.
이후 지속적인 분쟁을 계속하던 남북은 남베트남 내에서
고딘디엠정부의 무능과 부패로 열세에 몰리게되고 호치민을 지지하던 남베트남 내에
민족해방전선이 정권을 장악하기 시작합니다. 이에
동남화의 공산화를 우려하던 미국의 고딘디엠의 암살(?혹은 축출)과 함께 “통킹만사건” 조작을 통해
1963년 본격적으로 월남전에 개입하게 된다.
개전초기 미국은 25개의 동맹국에게 파병을 요청하게되고
이에 한국/필리핀/대만/호주/뉴질랜드/태국/크메루공화국/라오스왕국만이 파병을 결정한다
크레루,라오스,태국등 동남화의 공산화를 우려한 3개국과
당시 미국에 안보력을 의지하고 있던 5개국만이 파병을 결정하여
미국과함께 남베트남측을 지원하여 북베트남과 대결한다.
한국(한국전쟁 10년후 북한과의 무력경쟁)
대만(중국의 흡수통일 공산화)
필리핀(미국의 식민지)
호주,뉴질랜드(미국의 강력한 동맹) 등
당시 파병에 대해 국내정치권은 2가지 의견으로 나뉘게 되는데
윤보선,김대중을 중심으로한 파병반대측과
정부와여당을 중심으로한 파병찬성측 이 대립하였다
한국정치권은 미국의 파병불가시 “주한미군 착출을 통한 베트남전쟁 인력보충”
등의 압력과 전쟁시 합당한 보상등을 골자로한 “브라운 각서”를 통해
1964년부터 파병을 시작한다.
<파병 개요 일지>
1964년 5월 9일 존슨 미국 대통령 자유우방 25개국에 남베트남 지원 요청
1964년 7월 15일 응웬칸 남베트남 총리, 한국군 파병 요청
1964년 7월 31일 국회 제1차 파병동의안 가결
1964년 9월 12일 제1차 파병단 사이공 도착(제1이동외과병원 및 태권도교관단)
1965년 1월 26일 국회 제2차 파병동의안 가결
1965년 3월 16일 건설지원단(비둘기 부대) 사이공 도착
1965년 8월 13일 국회 제3차 파병(전투부대) 동의안 가결
1965년 10월 14일 제2해병대여단(청룡부대) 깜리인 상륙
1965년 10월 20일 주월 한국군 사령부 사이공 개소
1965년 11월 2일 수도사단(맹호부대) 본대 뀌년 상륙
1966년 3월 20일 국회 제4차 파병동의안 가결(전투부대 증파)
1966년 4월 19일 수도사단 제26연대 본대 뀌년 상륙
1966년 10월 3일 제9사단(백마부대) 닌호아 및 깜라인 상륙
1966년 10월 21일 박정희 대통령 남베트남 방문
1971년 12월 4일 주월 한국군 제1단계 철수 시작(제2해병 여단)
1972년 4월 13일 주월 한국군 제1차 철군 완료
1973년 1월 28일 베트남 전쟁 평화협정 발효
1973년 3월 13일 주월 한국군 제2차 철군 완료(본대)
1973년 3월 23일 주월 한국군 후발대 철수 완료
1975년 4월 30일 북베트남에 의한 사이공 점령
한국정부는 미국다음으로 가장많은 인력인 32만명을 8년5개월에 4차례에 걸쳐 파병한다
한국군은 베트남전쟁을 통해
사망자 :5044명
부상자:15000명
고엽제 후유증:15만명이라는 막대한 피해를 입고 73년 완전 철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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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한국은 베트남과 공동으로 “한국군에 의한 베트남 민간인학살 진실위원회”를
공동 설립하고 강정구,한홍구를 중심으로한 조사에 들어간다
그동안 미국정부에 전달된 100여종의 보고서와 20장의 사진을 통해
총3건의 진실을 찾아내게 된다.
[한국군의 치욕]
1.<퐁니*퐁넛 사건:68년2월12일 쿠앙남성 디엔반현>
해병 청룡사단 제2대대 6중대가 베트콩의 마을로 오인 81mm 박격포로 마을을 포격한 사건으로 총69명의 민간인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당시의 원인으로는 보고서를 중심으로 기술하면
마을주변의 베트콩의 잦은 출연과 위장으로 인해 전사자3명 부상자14명이 발생할정도로 피해가 심했던점
마을 입구에 부비트랩을 설치로 인해 부상자의 속출로 인한 이성의마비
마을에 숨어든 베트콩의 저격으로 인해 사상자가 발생 이로인해 베트콩마을임을 확신했던점
등이다. (국군측 사상자에는 미해병대원2명이 포함된다.)
2.<푹미사건: 쿠앙남성 디엔반현>
사상자 22명 베트콩오인으로 인한 사건
3.<홍차우사건:쿠앙남성 디엔반현>
매복중 베트콩 오인사상 한국 소환후 사형 선고 이후 감형되어 무기징역으로 15년 복역
그밖에 한국군에 의해 일어났다는
빈호이사(131)/타이빈(380) 사건은 소문으로만 존재할뿐 사실여부를 확인할수없었다.
이에대한 한국정부의 조치는
69년 중앙정보부의 민간인 학살 진상조사 이후
68~73년 사이 구속군인 561명가운데 전쟁수행과 관련된 자를 제외한
40여명을(상관살해,현지인강간,살인) 미복권 미사면하여
무기징역,종신형,사형등을 집행하였다(이후 대부분이 형집행정지와 감형등을 받았다)
이후
김대중대통령은 2000년 베트남 국빈방문중 국민에게 공식사과를 했다
노무현대통령은 2004년 호치민묘지를 참배하며 공식사과했다.
2004년 시민사회를 중심으로 모금활동을 벌여 베트남 퐁티에
사망자를 위로하는 “위령비”를 건립하였다
한화갑 민주당대표는 2006년당시 베트남인에게 사과하였다
2009년도 이병박대통령이 베트남 국빈방문당시 사과와함께 베트남유공자를 한국의 참전유공자와 함께 동등대우를 한다고 했지만
당시 이를 승전으로 생각했던 베트남인들의 강력반발과 외교부의 항으로 당시 유명환장관이
직접가 베트남정부에 사과했습니다.
진상조사와 사과후
한국에서는 참전동지회등에서 강하게 반발하였으며 이를 취재하던
한겨레,mbc토론등에 일부가 사무실 난입을 하기도 했다.
[ 한국군의 활동사항 ]
한국군은 남베트남의 지원자격의 파병이었던 만큼
전쟁적 지원뿐만 아니라 대민지원사업도 함꼐 펼쳐나갔다
남베트남의 민간인 보호뿐 아니라
대민진료 352만3364명
식량 1만9640톤지원
의류 46만1764점지원
농기구 6406대 제작
가옥및 교실3319동건설
교량 132개 건설
도로 394km건설
태권도보급 90만2060명
경로및어린이 잔치 6848회
연예공연 2304회. 의 활동을 하였다
많은 한국군에 희생을 통한 지원에도 불구하고
어떠한 이유에서라도 민간인이 희생당한 부분에서는 마음의 무거움을 지울수없다.....
전쟁기간중 확인된 민간인 사망자는
베트남-158만1천명
캄보디아-70만명
라오스-5만명 등이다 / 미군의 베트남전쟁중 사망자는 총6만명이다.
당시의 전쟁은 공산화를 표방한 북베트남을 중심으로한 지원세력과
비공산화를 표방한 남베트남을 중심으로한 지원세력간에
대리전 양상이었다.
<반공군>----------------------------<공산군>
베트남 공화국 베트남민주공화국
미국 베트콩
대한민국 크메르루즈
호준 파테트라오
필리핀 비공식지원국
뉴질랜드 중국
타이 북한
크메르 공화국 소련
라오스 왕국
비공식 지원국
대만
<지휘관>
남베트남측 북베트남측
응오딘지엠 호찌민
응우옌반티에우 레즈언
응우옌까오끼 쯔엉찐
응오꽝쯔엉 응우옌찌타인
럼꽝티 보응우옌잡
아이젠하워 모택동
닉슨 주은래
포드 니키타 흐르쵸프
맥나마라 레오니트 보네즈네프
케네디 폴포트(크메르 루즈)
박정희 수파느봉(파테트라오)
채명신 김일성
이세호
헤럴드홀트(호주)
키스 힐리호크(호주)
타놈 끼띠까쫀(태국)
마르코스(필리핀)
론 놀(크메르 공화국)
수바나 푸마(라오스 왕구)
<병력>
남베트남(1968년) 북베트남(1968년)
남베트남:65만명 북베트남:34만명
미국:55만3천명 중국:17만명
대만민국/타이/필리핀:6만1800명 소련:3천명
호주:49968명 북한:3백명
사망합계:28망5천831명 사망합계:117만7천명
부상자합계:149만명 부상자합계:60만4천명
미군의 철수후 평화협정을 어기고 남베트남을 침공하여
무력통일을 이룬 북베트남은 대대적 숙청을 시작한다
공산측 북베트남에 의해 남베트남에 협력하였던 베트남인 10만명이 학살당했다.
북베트남과 함께 미국과 대항했던 크메르루즈의 폴포트는 캄보디아의 공산화를
이루었으며 이 과정에서 자신에 대항했던 자국인 200만명을 학살하였다
“킬링필드”(개인적 조사에 의한거지만 매우 과장된 측면이 강한듯하다.
이 사건이 알려진게 미국측의 보도로 처음 공개된 것인데.그 의도가.........
실제 학살자는 10~20만명 정도로 추정된다)
이후 라오스또한 숙청을 단행했으며 그 수는 확인되지 않고있다.
이후 베트남은 대대적 숙청과 경제난이 겹쳐 1980년대 중반까지
보트피플을 이용한 해외망명자 106~150만명으로 대략 추정되며
이중 해적및전복..등의 이유로 사망한 숫자가11만명 / 망명에 성공한 숫자가95만명이라고 추산된다.
#당시 베트남전에는 "전두환"이 연대장 신분으로 참여하였다
#베트남인들의 마음은 한국전쟁때 북한을 인해전술로 지원한
중국군을 보는 우리의 시각에서 생각해볼 필요가있다.
#전쟁수행중 많은 민간인 학살사건이 존재 했는데
그중 대표적 사건은 "밀라이"학살 사건으로 자국병사의 손실로 분노한
상급지휘관인 윌리엄중사의 분노로 인종청소의 형식으로 민간인 500여명을 학살한 사건이다
#2003년 이라크전 한국군파병과 연관시켜 생각해볼 가치가 있다
당시 미국의 비이성적 행동앞에 한국의 선택은 어떠했어야 했을까........
#미국과영군 연합군의 이라크 민간인학살 인권유린.............
오히려 베트남전쟁 때보다 국제여론의 관심을 받지 않는듯 하다
#노근리 학살사건 도 연관되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6*25전쟁중 미군에 의해 노근리터널숨어있던 양민 300여명이 무차별 총격으로 학살된 사건으로
북한첩자의 활동을 의심한 미군측에 의 자행되었다)
#한국의 베트남파병은 미국에의한 침공 지원이었을까
아님 공산화를 반대화는 베트남민중에대한 지원이었을까
#공산화/비공산화 를 위해 수백만명의 국민이 죽어나간 베트남전쟁은
오늘날 사실상 자본주의를 표방하며 경제성장 을
제1의 목표로 삼는 통일베트남에게 무었이었을까.
#일본에의한 민족말살 과 살육-> 남북분단 ->한국전쟁-> 독재(이승만)-> 항거(4*19)-> 독재(박정희)
베트남파병 ->암살-> 독재(전두환)-> 광주항쟁 학살 ->항거(6*10) 민주화
20세기 한반도역사에 있어 이렇게 처참하고 힘들었던 시기가 존재했을까
#당시 베트콩들에 자행된 한국군 포로에 대한 비인간적 행위는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 ypa님의 글을 인용]
베트남전 을 이용하는 부류는 크게3가지가 있다.
1.북베트남인이다
/이는 당연한 행동으로서 전쟁수행중 남베트남인에게 공포심을 심어
미군이나 한구군을 지원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수행의 효율성을 극대화 시킬수 있기
때문이다 위에 적은것처엄 빈호이사 사건이나/타이빈 사건등 소문으로만 무성하지만
2000년 진상위원회에서 밝히지 못한것처럼 자료와 증거등에서도 진실여부를 정확히
가려내야 그에 합당한 반성이 생길수 있을것이다.(미군측의 100여종의 보고서에서
한국군에의한 사건은 총 3건으로 밝혀졌다)
2.한겨레등을 위시한 좌파지식인들이다.
그동안 쉬쉬하며 밝히지 못한 사건들을 수면위로 용기있게 올린것은 지당한 일이지만
정확한 자료와 진상조사 없이.무차별적으로 선정적 제목들을 뽑아내며
<아 그곳은 지옥> <한국군은 너무 잔인했다>라는 타이틀을 뽑아 무차별적으로
기사로 내보냈지만 그중 베트남정부와의 공동조사를 통해 밝혀진 진실은 단3건뿐이며
당시 베트남인들의 반응은 승전국에 대한 패전국의 호들갑 정도로 비쳐졌다.
이는 반미면 반독재면 모든지 가능하다는 사고에서 비롯된듯 하다
(노무현대통령 사건때의 보도행태를 보면 더욱더 분노하게끔 만드는
주체는 좌판언론들 이었다)
대표적인 것이 독가스 살포와 융단폭격 등으로 대변이 되는 조직적 학살
이 있었다는 기사들 이었다.........................
3.일본애들
베트남전에 “귀로만든 목걸이”등의 일본측에 의도적으로 왜곡된 자료를 기반으로
하고있다. 이는 당연히 2차대전시 자신들의 선조들이 저질른 만행을 의식하여
너희들도 똑같다라는 식으로의 논리로 귀결되며
우스운 점은 이러한 논리에 한국의좌파와 일본의우익이 같은논조의 주장을
하고있다는 점이다.(유투부 ~ 위키피디아를 위시한 일본인들의 “한국인날조”설은
광범위하게 퍼져있다.
http://blog.naver.com/seoul7910?Redirect=Log&logNo=40101081876 =>
위에 사이트 같은 것들이 대표적으로 확인되지 않은 한겨레의 선정적 기사들을
무차별로 게재하고 있는 일빠들이다.
남베트남과 미국의 요청으로 파병된 한국군이 당시
민간인을 100%보호 했다거나 모두가 목숨을 걸고 임했다고는 보지도 않을 뿐더러
불가능함을 안다
베트남전쟁의 특수성상 이전과는 다르게 민간인과 군인의 구분히 명확하지 않고
(이는 미군의 가장큰 패전요인이다.)
현재 미군의 아프가니스탄파병 상황처럼 팀킬 혹은 민간인속에 숨어든 적군에 대한
두려움으로 이성을 잃을수 있었던 상황은 부지기수 였을테니까..............
하지만 이를 통하여 자신의 신념이나 목적에 이용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기를 바란다
[노다지]님의 글 첨언
과연 베트남전쟁은 미국의 패배일까?
베트남전은 북베트남이 승리한 전쟁이기도 하지만, 미국 역시 승리한 전쟁이나 다름 없습니다.
이는 서로간 다른 전략적 목표를 가지고 전쟁에 임하였기 때문이죠.
애초 미국이 '베트남 전쟁'이란 동남아 내전에 개입한 이유는 공산세력이 동남아일대까지 남하하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습니다. 북베트남 입장에선 베트남을 '해방'시킴으로서 미국에 승전하였지만, 미국으로선 베트남이 공산화, 민주화되는건 소소한 전술적 잇점이었고, 실상은 북베트남 뒤에 도사린 공산진영에 승리하는 것이 최종적 목표였습니다.
미국입장에서 보자면 베트남이란 작은 전구가 아닌 아시아 대륙 전체의 전선을 생각한다면 공산진영의 전력을 큰 폭으로 깎아먹어버림으로서 전략적 승리를 거둔 셈입니다.
노다지2008/12/25 22:52답글신고
미국이 남베트남 정권을 만들고 존속시킨 큰 이유는 북베트남 정권을 이용해 공산진영이 인도차이나 반도 전역을 넘어 동남아 전체를 장악하는 것이었습니다. 만약, 이런 공산진영의 돌출부나 다름 없던 인도차이나 전역을 남베트남 하나를 희생에 막는다면 남는 장사였던 거죠.
실제로 미국은 베트남 전쟁 내내 400만톤의 폭탄을 퍼부었고, 덕분에 북베트남은 소련과 중국의 지원이 없으면 총알 하나, 탱크 하나, 군복 하나 만들 수 없는 석기시대로 돌아가 버렸습니다. 즉, 베트남 전쟁을 몇년이나 질질 끌며 미국은 자신의 역량 역시 소진했지만, 공산진영의 역량 역시 극심하게 소진시켰습니다.
실제 베트남전쟁 말기 펼쳐진 라인베커 작전은 소련, 중국이란 공산진영국과의 외교문제로 인해 폭격하지 않았던 북위 20도 이상 지역을 폭격한 작전으로...미국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북베트남 본국 수도권 일대를 맹폭한 작전입니다.
노다지2008/12/25 22:56답글신고
여태까지 모스크바와 워싱턴간의 암묵적인 룰로 인해 수도권을 폭격당하지 않아 국가의 핵심적 역량과 보급거점을 유지했던 북베트남 정권이었지만. 미국이 모스크바와의 알력조차 개의치 않고 진심으로 가한 최초이자 마지막 '11일간의 타격'으로 인해 국가발전 시설 80% 저장시설 25% 철도시설 '완전소거'당함으로서 10일차부턴 폭격기를 요격할 요격기는 물론 단 1발의 SAM도 발사할 수 없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만약 이 과정에서 미국이 북위 20도로 진공하는 정상적 전쟁을 수행했다면. 북베트남 정권은 지도에서 지워졌을 테죠. 애초 북베트남 정부는 전쟁 기간 내내 정규군을 동원한 작전에서 단 한번도 승리를 거두지 못했으니까요. 이건 전적으로 북베트남의 침공병력과 게릴라는 저지해도, 북베트남으론 쳐들어 가지 않는다는 워싱턴의 웃긴 지시때문이었습니다.
노다지2008/12/25 23:02답글신고
미국 스스로가 그 자신의 역량을 완전히 봉인해두고 한 싸움이 베트남 전쟁이었고. 여기서 미국이 얻고자 한 것은 공산세력을 저지하는 것이지. 남베트남 정권을 도와 북베트남 정권을 멸망시키고 통일시키겠다는 목적은 전혀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라인베커 작전을 펼치기 1년 전 72년 무렵. 미국은 자국내의 반전여론등도 있었지만 CIA의 공산진영은 더 이상의 확장을 시도할 만한 역량이 소진되었다는 보고로 인해 베트남에서 발을 떼기로 결심했습니디.
여기서 미국으로 인해 만신창이가 된 북베트남 정권은 미국을 곱게 보낼 생각이 없었습니다. 북베트남으로선 세계최강국 미국을 협상장으로 불러 전쟁의 승리자로서 외교적 배상 및 굴욕, 막대한 배상금을 요구할 셈으로서. 미국의 포로송환, 남베트남 정권 존속, 종전 제의를 무시했지요.
노다지2008/12/25 23:09답글신고
그 결과 미국이 벌인 것이 한 번도 정식으로 공중폭격을 가하지 않았던 북위 20도 이상의 전략폭격이었고. 북베트남은 여기서 허리가 꺾였습니다. 처음으로 미국이 진심으로 가한 타격에 북베트남은 1990년대 서구자본이 들어올 때까지 복구는 시도도 하지 못할 타격을 입었습니다.
프랑스가 남긴 산업시설 대부분과 발전시설 거의 전부, 철도조차시설 거의 전부. 항만의 주요 하역시설 거의 대부분을 소실당했습니다. 덕분에 북베트남 정권은 라인베커 11일만에 백기를 들고 굴욕적인 파리협상에 임할 수 밖에 없었고. 미국이 요구하는 건 모두 다 들어줘야 했습니다.
그 이후의 일이야 성공적으로 공산진영의 역량을 충실하게 깎아먹은 미국은 베트남에서 신경을 꺼버렸고. 남베트남 정권은 멸망했지만. 그 후 북베트남은 인도차이나 지역에서 더 이상 두각을 보일만한 공산주의 확장역량을 영영 소실했습니다.
노다지2008/12/25 23:14답글신고
중국은 베트남 전쟁으로 인해 대만을 합병하지 못했고, 소련은 유럽전역에 대한 압박이 느슨해졌습니다. 오히려 동유럽 위성국에 대한 지배권이 약해져 동유럽 국가 여기저기서 체제비판 운동과 시민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이후 아프간 확장시도까지 공산진영은 이렇다 할만한 활동을 보여주지 못했지요.
때문에 베트남 전쟁은 북베트남이 승리한 전쟁이기도 하지만, 미국 역시 남베트남을 버리는 말삼아 승리한 전쟁이기도 합니다. 베트남 전쟁을 미국의 패전으로 볼 수 없는 이유는 찾아보면 널리고 널렸죠;
만약 미국의 목적이 북베트남 정권을 멸망시켜 베트남 전역을 장악하는 것이었다면 미국의 패전이 맞지만. 실상 그렇진 않았고, 남베트남 정권을 필요한 동안만 살려두는 것이었으니...
[이글루 역사밸리:앨런비짱 님의 베트남학살 에 대한 고증토론]
http://hyukjunseo.egloos.com/3261883
68년도에 헬기를 타고 다니면서 한국군이 학살을 했다라는 주장이지만
정작 한국군에 헬기가 보급된 시기는 69년 후반기 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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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범국이라니요 위험한 말을 하네요
일부러 욕 얻어먹어가며 이런 자료를 만들 필요는 없지요
이런자료 조사할 시간에 우리나라 위안부 할머니들 조사나 하십시오
위한부에 대한 객관적 자료들은 이미 인터넷에 넘칩니다.
또한 사회적관심도 대단하구요.
더군다나 얼마전 mbc뉴스를 통해 누구도 부정하지 못할만한 증인-증거도 보도가 되었습니다.
저따위가 나선다고 별다른 보탬이 될것 같진 않아서요....
님의 논쟁을 통한 주장은 인정합니다만.. 이 카페 회원들과의 상호 교감을 먼저 얻으신 다음에 논쟁을 논해야 될 위치인것 같습니다..
이런식으로 가다간 님은 이 카페에서 도태됩니다... 암튼 좋은 자료는 잘 읽었습니다..
네........
말씀에 충분히 공감 하지만 달리는 댓글은
그렇게 까지 하기에는 제게 너무 버겁습니다.
글은 잘 보았으나 글을 올린자의 인성이 글을 따르지 못하는구나~! 글에 걸맞는 수준의 인간성이 필요함을 절절히 느낀다~~~!
일개 게시글을 가지고 인성,인간성 까지 이야기 하시면
제가 뭘 그렇게 잘못했나 생각이 들기도 하는군요.
논조가 딱 개신교 이단 같아요. 내가 조사한 자료는 100% 정의 진실이고 남이 이야기하는건 100% 거짓 아니면 흠짓내기고...
첫 댓글이 삐딱했던 이유도 지난번 글에 올라온 이분 반응 때문이었습니다. 글이 아무리 주옥같고 진실이면 뭐합니까.
이문열이 욕먹는 이유도 알고는 계시는데 주어가 빠진 관계로 제대로 알고 있는지 거꾸로 알고 있는지 알수 없네요.
음..그러시다면야.
근데요,
분명 말씀드리지만
논란의 개요는
1.글에 싸가지 가 없다
2,글이 허접하다
3.니 주장도 100%진실은 아니지 않느냐
였지 결코
"내가 조사한 자료는 100%정의-진실"이다가 아닙니다.
글 어디에서도 제가 "내글이 진실이고 니 글은 거짓이야"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본글이 아닌 댓글 성향을 말씀드린건데요?
내 첫댓글...(미군도 6.25전쟁때 우리민간인들 많이 죽였고 베트남 참전 한국군도 베트남 민간인 많이 죽인건 사실입니다...
언젠간 베트남의 국력이 지금보다 더 커지면 베트남에서 문제삼을 겁니다... ) 이게 뭐가 문제인지? 이 글을 어떻게 증명해야 할까요?
이게 내 생각인데 주관적인 내 생각~!!!!! 이걸 증명하기전에 어줍쟎게 줏어온 님의 글을 증명해야 맞는거 아닌가요? 증명해 보세요? 먼저~~~
사양해용.^_^
집에 가야해서요
영양가 없는 댓글싸움에 좀 지치는 하루였네요.
bye~bye
댓글이 엄청 많아서 들어와봤는데.............. 헐
글을 올릴때는 그 글의 객관적인 자료인용 링크나
인용한 출처를 밝혀야 인정받는겁니다. 님의글은 열공해서 올렸을지 모르나 모든사람이 다 공감하리라 판단하는건 오버입니다. 이글이 대학교 과제인지 논문인지 잘 모르겠으나 내가 해당과 교수라면
바로 F학점 줄겁니다. 언듯 보면 글을 잘쓴듯 보이나 논문써본 사람이라면 객관적 사실이나 인용한 자료를 반드시 첨부하게 되어있습니다. 그러므로 이글은 님의 개인적 사견에 불과한겁니다. 또한 이글에 댓글단 사람을 무시하고 저속한 표현은 님 스스로를 몰상식한 사람임을 증명하는 겁니다.
좀 이해가 안가네요. 글에 무슨문제있나요? 다들 너무 까칠하신듯
전후 사정을 알지못하면 본글과 댓글을 충분히
읽어본후 의견을 쓰세요! 댓글쓴 모든사람이 다
까칠하다는 님은 글씨만 보이고 내용은 안보이나 봅니다
애초에 댓글로 시비를 먼저 거신분들이 있는것 같은데요? 좋은말로 하면 될거 같다가 괜히 기분나쁘게 표현할 필요는 없을거 같은데. 가는말이 고와야 오는말이 곱다는데 좀 아닌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표현을 정확히 하세요!
그런님도 있지만 안그런님도 있지요?
다들이란 표현은 님이 잘못 판단한거에요
인터넷엔 우리가 상상도 못할 다양한 사고를 가진 네티즌들이 존재한다는걸 새삼 느낍니다. 본문보다 댓글들을 주욱 읽어보니 정말 가관입니다. 전문가 아니면 무서워서 글도 못 올리겠군요..
의도치 않게 너는두부공님의 사생활을 밝히게 된 점 사과드립니다.
단지 근거를 찾고자 함이었지 두분이 동일인물이란 점은 생각치 못했다는 점은 알아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