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안양 545번지, 고구마 밭이 전하는 것들
포복하듯 낮게 밀착하여 바람결에도 꿈쩍을 않는 보라색 줄기에 엉킨 이파리. 두둑 안에 든 녀석이 호박인지 아니면 물인지 밤인지는 몰라도 딱 보아 녀석의 영양상태는 바로 알 것 같다. 예전엔 김치에 곁들인 밤고구마라면 그만이었는데 요즘은 다들 찾는 것이 속이 샛노란 호박고구마다. 나는 한동안 고구마를 거들떠보지 않았다. 한마디로 질려서다. 어릴 적 고구마는 질려도 먹어야 했던 내 간식이었다.
요즘 다시 찾는 고구마, 나는 물고구마에 애정이 더 간다. 우리 집 밭은 물고구마 터전이었다. 당시 라면은 돈이 들어갔기 때문에 먹을 수 없었으며 그저 손에 잡히는 게 고구마였다. 그 시절 고구마만한 보충식이 있었을까. 고구마는 꽤 무던한 천성을 지녔다. 콩 같은 작물은 배수도 잘 되고 볕도 짱짱한 데 심어야 하지만 고구마는 공터로 놔두기는 아깝다 싶은 자갈 섞인 황토 땅에서도 잘 자랐다. 콩이나 마늘 깨 고추 같은 주 작물과는 아예 등급이 달랐다. 물이 흥건히 밴 질 떨어지는 토양에서도 꾸역꾸역 제 몫을 하는 고구마.
그 대신 두둑을 한 30센티 올려 공기가 잘 통하도록 해주어야 한다. 고구마라고 습분을 좋아할 텐가. 고구마는 같은 품종이라도 토양의 질에 따라 습기가 많은 땅에서 자라면 물고구마가 되고, 건조한 사질토(沙質土)에서 자라면 밤고구마가 된다. 고구마는 비교적 가뭄에 강(구황작물)하고 초기에만 잡초를 제거해 주면 고구마 줄기의 자람이 왕성해 잡초제거의 문제가 없다. 벌레도 별로 안 타고 칭얼거리지도 않고 쑥쑥 땅 속에서 알아서 스스로 크는 자생력. 거기에 녀석은 봄철의 바쁜 일손을 누구보다 잘 아는 녀석이다.
열대성 작물이기 때문에 바쁜 봄철에 일찍 심지 않는다. 다른 작물을 다 심고 나서 제일 나중에 심는 작물이 바로 고구마다. 우리는 늘 6월 초에 감자를 캐고 나서 심었다. 그리고 더도 말고 딱 100일 정도 지나 서리 내리기 전 쯤 고구마는 캔다. 손도 덜 가는데다 선선해질 무렵 일손까지 살피며 캐는 고구마, 캐는 즐거움은 해본 사람만이 안다. 마치 돼지 새끼 열댓 마리 낳듯 물컹물컹 쏟아질 것이면 저금통 깨는 기분도 든다. 금세 한 소쿠리, 고구마나 감자는 캘 때 소출의 기쁨에 허리가 아픈지 모른다. 흙속에 숨어 있기에 희열은 더할 것이다. 고구마는 감자와는 달리 즉석에서 바로 맛을 알아 볼 수 있다.
한 겨울 날 군고구마 맛은 또 어떠한가. 고구마는 영어로 하면 SWEET POTATO라 한다. 땅 속에 잠자는 달콤한 희망을 건져내는 그 느낌의 달착지근함에 포만감이라 이름도 그렇게 정한 것만 같다. 한 뼘의 땅이라도 있으면 무엇이라도 갈아엎어 작물을 심었던 그 누구도 가난했던 시절, 어느 날 부터서 우리 집에 고구마 밭이 생겨났다. 정확히 말하자면 1966년도, 우리 집 소유의 땅을 처음으로 갖게 된 것은 그 밭이 헐은 고구마나 심을 후미진 위치에 자갈밭이었기 때문 가능했을 것이다.
당시 그 땅은 신작로 건너편 민 순경집이라는 집 뒤에 있는 풍년원이라는 포도밭 바로 앞에 위치했다. 뒤로는 양어장이 있었는데 물고구마가 나온 것은 다 그 덕택이 아니겠는가 싶다. 아무튼 그 당시로는 용도가 마땅치 않은 자갈이 반쯤인 질은 황토 땅이었다. 그러기에 그곳에는 고구마를 심을 수밖에는 없었다. 틈만 나면 고구마 밭에 들러 자갈을 건져내고 잡초를 뽑았으며 비가 오면 우비를 쓰고 배수로를 만들었다. 그런 정성을 알았는지 다행히 썩지 않고 물고구마가 많이 나왔다. 이후에도 끊임없이 자갈을 걷어내고 흙 갈이를 하였지만 토질은 어쩔 수 없는 것인지 곳은 고구마나 들깨 외엔 잘 자라지를 못했다. 밭으로선 아쉬운 구석이 꽤 많은 땅이었다.
그래도 부모님은 주말이면 늘 그곳에 계셨고 고구마를 캘 무렵은 어린 동생도 모두 동원이 되어 호미질에 묻어나는 고구마의 생동을 기쁨으로 느꼈다. 텃밭에서의 기억은 여릿한 데 그곳 기억은 생생한 것이 어쩌면 소유의 소중함을 따로 느꼈는지 모른다. 그 소중한 땅을 당시 살 수 있었던 데는 몇몇 행운이 겹쳐 있었기 때문이다. 땅 주인은 아버지와 같이 수의학을 전공한 실험실 친구 분이셨는데 갑자기 이민을 떠나게 되어 돈이 급했다. 거기에 땅은 자갈밭이라 볼품이 없었지 않은가. 그러기에 땅값은 쌌다. 그렇지만 당시 우리 집은 돈이 수중에 한 푼도 없었다. 하지만 엄마는 며칠 새 돈을 마련하여 이를 거뜬히 해결했다. 지금도 나는 그 행운을 곱씹는다. 아버지 친구 분의 이민, 그리고 엄마의 급전. 이는 그 시대로써만이 가능했던 이야기다.
1. 한민족의 순애보
코메리칸 [Korean American], 이 말은 당당히 사전에도 등장하는 말이다. 한국계 미국인을 달리 이르는 말로 외래어라고 하기도 그렇고 순국산도 아닌데 버젓이 제 느낌을 풍미한다. 미국을 양키라고 부르던 시절 미제는 무엇이든 품질 좋은 최고급이었으며 미국은 지금도 그렇지만 초강대국으로 세계를 지배한 나라였다. 빨갱이를 몰아내기 위해 대한민국을 찾은 우리나라 최고의 우방 미국, 밀가루 포대에 그려진 악수 그림처럼 그들은 우리에게는 친구 이상의 고마움과 선망의 대상이었다.
1966년 10월 31일 린든 B. 존슨 미국 대통령은 시민들의 열광적인 환호를 받으며 방한했다. 동남아6개국 순방을 마치고 말레이시아에서 전용기편으로 김포공항에 도착한 존슨 대통령은 공항에서 박정희 대통령 내외의 영접을 받고 3군 및 해병대의장대를 사열했다. 그 당시는 우리가 동남아보다 못한 나라였으며 , 필리핀은 당시 선진국으로 우리에게 장충체육관을 지어주기도 하고 통일벼를 만드는데 협력도 한 나라였다.
부인 버드여사와 러스크 국무장관을 비롯한 81명의 공식 수행원을 대동하고 방한한 존슨 대통령은 시청앞 광장에서 벌어진 시민환영대회에 참석한 후 숙소인 워커힐로 향했다. 일정을 마치고 귀국하는 2일 박대통령과 존슨 대통령은 두 차례의 정상회담과 이 회담에서 합의된 내용을 담은 약3천자의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12개항으로 된 이 공동성명은 한국의 경제, 사회 및 과학 분야 발전을 위해 미국이 계속 지원할 것과 주한미군을 현재선 이하로 줄이지 않으며 한국에 대한 무력공격이 있을 때는 즉각적이고 효과적인 원조를 하겠다는 미국의 결의를 천명했다. 그 방한을 통해 한미관계의 전통적인 우호를 재확인했다.
얼마나 공들여 우리를 찾게 한 미국대통령이었던가. 원조라는 말이 박힌 성명서를 보고 다들 안도의 가슴을 쓸어내리기도 든든한 빽을 연상하기도 했었다. 74년 포드 대통령이 방한 할 때는 나도 환영의 물결 속에 껴 있었다. 그들이 오면 기념우표를 만들고 환영이라는 대형문구가 곳곳에 펼쳐지곤 했다. 그런 미국 땅은 당연 선망의 대상이고 지상의 낙원이었다. 기회의 땅, 미국을 가고 싶은 열망들이 그 어느 때보다 그득한 그 시절 우리나라 이민 역사는 보폭을 넓히고 그 이전과는 양상도 달랐다.
1965년 이후로 미국으로 이민 간 한인들의 계층은 중산층 출신이 압도적이었다. 1965년 전체 한인들 중 미국으로 입국할 때 세관에서 직업을 보고한 사람들 가운데 84%가 한국에서 전문직, 관리직, 판매직, 사무직 등과 같은 화이트칼라 직종에 종사한 사람들이었다. 당시 아버지 친구들도 이민을 많이 갔다. 수의학을 전공한 만큼 미국이나 호주나 캐나다로 가면 유리하다고 판단했다. 그 바람에 아버지 친구는 자신의 땅을 헐값으로 우리 집에 넘겨주었던 것이다.
이후 75년도를 넘어서 노동직, 기능직, 서비스직, 농업 등의 블루칼라 직종에 종사했던 사람들도 점차로 증가하여 한인 이민사회는 갈수록 더욱 이질적이고 복잡해졌고 한인 이민사회의 문제들도 더욱 다양해졌다. 실제 광복 이후 미국으로의 이민은 주한미군과의 관계 속에서 시작되었다. 미군정과 6.25전쟁을 겪으면서 우리나라에는 약 4만 명의 주한미군이 주둔하게 되었다. 주한미군은 많은 수의 우리나라 여성들과 결혼을 하였는데 당시 한국사회는 국제결혼에 대한 편견이 심했고 이에 따라 많은 한인 여성들이 남편과 함께 미국으로 이주하였다. 1950년부터 1964년까지 6,000명가량의 여성들이 미군의 배우자로서 미국으로 건너가게 되었다.
또한 1954년 전쟁고아 문제 해결을 위해 해외입양이 시작되었다. 해외입양은 2002년 말 현재 20여만 명으로 추산되고, 이 중 약 10만 명이 미국 가정에 입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입양인의 수는 전체 재미한인(200만 명)의 5%에 해당하는 수치이다. 이들에 앞선 초기 한인 이민자들이 일부 대도시에서 자신들만의 공동체를 구성하였던 것에 반해 전후의 국제결혼 여성들이나 입양인들은 미국 전역에 흩어져 미국인 공동체에서 생활하였다.
공전의 히트를 친 영화, 국제시장. 그 영화에서는 주인공이 돈 벌러 광부로 독일도 가고 월남에도 가는 장면이 나온다. 이는 단순한 그의 행적이 아닌 고귀한 우리 역사의 한 페이지다. 한국전쟁을 겪으며 자본이 턱없이 부족했던 우리나라는 베트남 전 파병의 국내 송금을 경제발전의 밑거름으로 삼았다. 실제로 베트남 전 참전했던 국군장병들은 해외근무 수당의 80% 이상에 달하는 1억9511만 달러를 국내에 송금했고, 그 자금은 경제개발의 원동력이 되었으며 독일에 파견된 간호사와 광부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1965년부터 1975년까지 파독 간호사들과 광부들을 통해 국내에 송금된 총 액수는 1억153만 달러에 달했다. 이는 70년대 우리나라 해외 진출자의 총 송금액의 11%에 해당되는 액수였다.당시 독일은 라인강의 기적을 통해 경제성장을 이루는 과정에서 노동력 부족을 겪고 있었다. 그런 상황 속에서 독일은 터키 등을 비롯한 여러 나라들의 인력을 받아들였는데, 일본도 독일에 인력을 파견한 나라 중 하나였다. 그런데 일본 역시 1960년대에 자국의 급속한 경제성장을 이루게 되자, 더 이상의 인력을 독일에 파견할 수 없게 되었고, 이러한 배경 속에 한국이 일본의 자리를 대신해서 독일에 광부-간호사를 파견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긴 것이다.
당시 한국은 높은 실업률로 인해 한국 정부는 고용에 대한 고민을 안고 있었고, 그 과정에서 독일에의 인력 파견은 고용 해소, 외화 획득, 기술 습득, 한국 알리기 등 일거다득의 효과가 있었다. 국민 소득이 100달러도 안 되던 시절 3년 계약으로 독일 탄광으로 일자리를 찾아 나선 광부들은 한 달에 1400-1600 마르크(당시 28만원-32만원)를 받아 방값, 식대를 빼고 1000마르크쯤 손에 쥐었다. 그리고 평균 800마르크를 고국의 가족에게 보냈던 것이다.
1964년 박통이 독일 뤼브케 대통령의 초청으로 국빈으로 방독을 했을 때의 모습을 TV에서 본 적이 있다. 그는 일부러 루르지역의 초라한 광산촌을 찾아갔었다. 함보른 탄광 광부들로 구성된 브라스밴드의 애국가 연주가 끝나자 300여명의 우리 광부들과 50여명의 우리 간호사들은 눈물을 연실 훔쳐댔으며 박통 또한 연설을 마무리 짓지 못하고 끝내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모두 다 울어버린 식장의 인상적인 그 장면이 왜 그렇게 애국적으로 기억되며 지금도 눈에 선한지 모르겠다.
이 시기 한인 이민의 또 다른 흐름은 유학생들이었다. 1945년부터 1965년까지 6,000명가량의 유학을 목적으로 미국으로 건너갔다. 하지만 적지 않은 수의 학생들이 학위를 취득한 후 미국에 눌러 앉거나 또는 끝내 학위를 취득하지 못하고 미국에 정착하였다. 그런 이민의 경향이 달라진 것은 1965년 미국 이민법이 크게 개정되면서 부터다. 개정된 이민법에 의해 유학생, 객원 간호사와 의사의 신분으로 미국에 건너 온 한인들이 영주권을 취득하게 되었고 이들이 1965년부터 1970년 사이의 한인 이민을 주도하였다.
이들은 후에 국제 결혼한 한인 여성들과 함께 한국에 남은 가족을 초청하면서 1970년대에 들어서 급격하게 증가하기 시작한 한인 이민의 토대를 마련하였다. 미국으로의 한인 이민은 1970년 초부터 본 궤도에 올라서 연 30,000 명가량의 한인들이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한인 이민의 정점을 이룬 1985년과 1987년 사이에는 연 35,000명의 한인들이 이민을 가서 멕시코와 필리핀 다음으로 미국으로 이민을 많이 간 3대 이민국이 되었다.
미국으로의 한인 이민은 1902년 12월 22일 인천을 출발해 1903년 1월 13일 호놀룰루에 도착하면서부터였다. 1830년대부터 하와이에서 대규모의 노동집약적인 사탕수수 농장을 시작하면서 세계 각국에서 이민자들이 노동자로서 모집되었다. 한인에 앞서 중국인들은 1852년부터 하와이에서 노동자로서 일을 하였는데 1882년 ‘중국인 배제법령(Chinese Exclusion Act)’에 의해 그들의 이민이 중지된 후에는 일본인들이 대용 노동자로서 1885년부터 대규모로 이민 오기 시작하였다.
이후 1905년 일본의 제지로 미국으로의 한인 이민이 중단되기까지 총 7,226명의 한인들이 하와이에 도착하였다. 이들 중 84%는 20대의 젊은 남자들이었고 9% 가량만이 여성들이었으며 7% 가량이 어린이들이었다. 이러한 인구 구성에서도 볼 수 있듯이 초기 한인 이민자들은 빠른 시기에 큰돈을 벌어서 자기 고향으로 금의환향하려는 임시체류자(sojourner)의 성격이 강했다.
나는 코메리칸의 낯과 밤이라는 연재 글을 젊을 적 신문에서 본 적이 있다. 나 역시도 가고 싶은 동경의 대상이었기 때문 열심히 읽었다. 억척으로 사는 그들의 삶을 보고 굴하지 않는 한국인이라는 생각을 하곤 했다. 한국서 대학을 나온 사람이 세탁소를 한다는 것을 기이하게 생각도 했지만 그만큼 직업에 귀천이 없으며 평등하다는 생각도 했다. 흔히 미국 속의 한국인은 아리안 족의 우수한 머리에 유태인의 악착같은 근면성이 혼합된 민족이라며 다른 나라 사람들로부터 많은 칭찬을 받고 있다. 실제 신학문을 터득하고 들어와 우리의 발전에 일조한 사람들이 당시 유학을 간 사람들이며 지금도 학계 정계 경제계를 주름잡고 있다.
상파울루를 비롯한 남미나 인도로 이민을 떠난 사람들도 개중에는 있었다. 중학시절 내 짝도 브라질로 이민을 갔는데 인터넷 도움으로 최근에 연락이 닿아 만나게도 되었다. 어느덧 한국인의 이민사는 100년이 넘는 긴 역사를 지니게 되었으며, 그동안 한국의 국력도 이전과는 달리 선진국의 대열에 다가가고 있어 한국인들의 우수성을 미국뿐 만아니라 전 세계에 날로 입증하고 있다. 현재는 미국이민이 점차 어려워지기 때문에 취업이민으로 가는 경우도 있으나, 한국 사람들은 그보다 손쉽게 영주권을 획득 할 수 있는 방편인 투자이민을 선호하는 추세이며, 그 수도 현격히 증가하고 있다.
예전과는 달리 자녀 교육문제로 이러한 방법을 선택하는 경우도 있고, 또 보다 풍요로운 나라에서 여유를 갖고 생활하고자 이민을 가기도 한다. 미국에서 제일 큰 코리아 타운이자 세계에서 제일 큰 코리아 타운은 서부 캘리포니아 주의 로스앤젤레스 시에 있는 코리아 타운이다. 캘리포니아주는 로스앤젤레스시 이외에도 샌프란시스코 시, 오렌지 카운티등의 여러 중소도시에는 다수의 한국계 미국인들이 정착하여 살고 있다.
동부의 뉴욕주에도 뉴욕시 맨해튼과 퀸즈 등에 대규모 한국인 공동체가 있고 그외에도 매사추세츠주의 보스턴시, 펜실베이니아주 필라델피아시, 뉴저지주 버겐 카운티, 버지니아주 애난데일과 센터빌, 조지아주 애틀랜타시 근교, 일리노이주 시카고시 근교, 텍사스주 댈러스시, 콜로라도주 덴버시등에도 상당한 규모의 코리아타운들이 있다.
모든 삶에 우여곡절은 있기 마련이지만 고국 땅을 떠난 사람들, 그 고통과 아픔은 떠나 본 자들만이 제대로 알리라. 알찬 터전과 복지를 누리는 데는 말로도 표현 못할 남다른 각고의 노력이 뒤따른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코메리칸은 행복한 이민사이다. 기회도 많은 잘 사는 나라에서 자유롭게 생활을 영위하며 값진 생의 가치와 보람을 얻었으니 말이다. 아버지 친구는 미국을 거쳐 캐나다에 정착해서 부유하게 사는 것으로 들었다. 그 시기 때 같이 나간 또 다른 친구 분은 호주로 가 수의학 공부를 마저 마치고 귀국해서 교편을 잡았다. 아버지도 한때 미국으로 가자는 말을 하곤 했었는데 그러했다면 우리는 어떻게 됐을까. 인생에는 누구나 큰 갈림길이 있다.
2. 계
도덕시간에 배운 향약 계 두레. 협동정신을 일깨우기 위해서일 것인데 나는 엄마의 곗돈 붙는 것만 떠올랐다. 계는 주로 여성들 사이에 목돈 마련과 상호 친목 도모 등의 수단으로 널리 성행된다. 문제는 계가 자주 깨진다는데 있다. 그러나 비교적 손쉽게 필요한 목돈을 만들어 쓴 후 푼돈으로 갚을 수 있다는 매력 때문에 계의 인기는 좀체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 근래에 와서는 손쉽게 장만하기 힘든 고가의 전자제품 마련서부터 그림·도자기 구입, 나아가 해외여행 비용 마련 등 특정목적을 위한 계가 여전히 도시 주부들 중심으로 크게 유행하고 있다.
한국에서의 계의 기원은 아득한 삼한시대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어 ·고려·조선 시대로 내려오면서 불교사찰 중심으로 이루어지던 보를 위시하여 화랑 사이에 행해지던 향도계, 그리고 혼계·백미계·장례계·산제계·대동계 등 그 종류는 수백에 이르고 인적 구성도 아주 다양하게 발전해 왔다. 물론 도덕시간에 배운 대로 목적은 협동과 친목도모였다.
그런 계는 6·25 사변 직후. 피난지에서 장사 밑천 마련 등의 목적으로 계가 성행하기 시작했다. 일반 주부들이 곗돈을 타서 계주 등에게 그 돈을 맡겨 높은 이자를 받아 손쉽게 돈 버는 맛을 알게 된 것도 이즈음부터였다. 특히 그 당시는 인플레이션이 대단한 경제 여건이었기 때문에 이자가 싼 은행 저축은 외면하게 되었고, 곗돈을 탄 후 고리로 시중에 둘려 돈올 모을 수 있는 계가 특히 일반에게 어필했었다.
그러나 대부분 구성원이 10여 명 이상으로 많고 경제 여건이 불안정 한 상태에서 고리의 이자놀이 등을 전제로 한 계는 항상 깨질 위험성이 컸다. 계가 깨져 계주가 얼마를 가지고 도망쳤다는 뉴스가 당시 심심치 않게 나왔다. 70년대에 저축 추진 중앙위원회가 실시한 계에 관한 실태조사에 따르면 조사대상 주부 중 59·4%가 계를 하고 있다고 했다. 조사 기록이 그렇지 우리 동네는 웬만하면 계 하나는 다 들고들 있었다. 이를테면 돈 나올 구멍이 미덥지 않다거나 신용 떨어지는 사람은 껴주지도 않았다. 달리 말해 계에 들었다는 것은 신용이 있다는 말로도 해석이 가능했다.
계의 종류는 가장 일반화 된 것이 번호 계. 그밖에 낙찰계·실물 계 등이 있다. 그 중에서 60년대 후반 한국 사회의 경제발전과 함께 크게 유행하기 시작한 것이 주부들이 값비싼 살림살이 장만을 위해, 미혼여성들이 혼수 감 마련을 위해 이용하는 실물 계. 급속한 경제발전과 함께 하루가 다르게 쏟아져 나오는 스테인리스 식기·철제 캐비니트로 시작하여 냉장고·세탁기 등 고가의 전기제품 등 내구성 생활용품은 물론, 그 뒤에는 사치성향이 짙은 수놓은 실크 이불·비단 수병풍·방석과 보료세트·옻칠의 목관 등에 이르기까지 그 종류는 무척 다양했었다.
70년 즈음해서 부 터는 미술품 수집 붐과 합께 그림·도자기, 나아가서는 골동품을 구입하기 위한 계도 생겨났다. 이는 화랑 주인이 그림을 갖고 싶지만 목돈 마련이 어려운 애호가를 12명 정도 모아 계를 조직한 후 번호대로 곗돈에 해당하는 가격의 그림을 주는 것이었다.
특정한 화가의 측근이 고 화가의 그림을 원하는 사람들을 모아 계를 조직한 후 차례대로 그림을 그려 주는 방식도 있었다. 백자의 반상기와 코피 세트 구입 계가 상당한 인기. 인플레에 대비하여 2냥 반 짜리 은수저 10벌, 1냥 짜리 금 팔지 등 특정 물품의 일정한 양을 정하고 계를 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밖에도 여행비용을 모으기 위한 계도 있었다. 특히 정부의 해외여행 자유화 조치가 실시된 이후에는 동창·학부형·친구끼리 해외여행 비용을 모으기 위한 계가 화제가 되었었다.
당시 엄마는 번호계의 명수였다. 계주가 1번을 타고 측근 중에 측근에게 2번을 주고 뒷자리를 엮어 모임을 꾸리는데 몇 번 번호를 배정 받는 게 유리한 지를 일일이 계산을 다한 엄마였다. 앞 번호를 주면 맨 뒤쪽으로 또 하나의 순번을 가져야 하는데 엄마는 4번 정도 번호를 받고 뒤 쪽으로는 너무 처지지도 않은 쯤 번호를 가져 앞에 탄 돈을 이자를 놓아 그 수익으로 뒷 번 불입을 하는 방식을 엄마는 자주 애용했었다.
그러려면 계주와는 친해야 하고 무엇보다 신용이 있어야 했는데 양희 엄마란 계주와 상옥이 엄마가 서로 끌어가려고 할 정도였으니 엄마는 신용으로서는 동네에서 알아주는 계원이었다. 그러니까 엄마는 당시 계주와 친한 친분으로 번호를 앞 번호로 당겨 고구마 밑천을 마련할 수 있었던 것이다. 당시 아버지는 엄마의 곗돈을 늘 못마땅해 했다. 아마도 엄마의 돈놀이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4부 이자라 하면 어디 누가 솔깃하지 않을까. 5부까지도 생기고 달라 이자란 말도 나왔던 시절이다.
당시 양희 엄마네 계가 깨져 안양이 난리가 났다. 그래도 엄마는 무사했다. 아니 오히려 우리 집으로서는 잘 된 노릇이었다. 뒷 번호 곗돈을 불입 안 해도 되니까. 그런데 상옥이네 집 계에선 엄마도 무사하지 못했다. 앞 번호는 탔기 때문 괜찮았는데 그 돈으로 이자를 논 것이 몽땅 떼이고 말았다. 계주가 도망을 가버렸기 때문 엄마는 몇날 며칠을 그 집으로 쳐들어가 기거하다시피 했는데 뾰족한 수는 없었다. 자식들 거두지도 못하고 못 입고 못 먹었는데 너무 억울하다고 엄마는 당시 크림빵을 엄청 많이 사왔었다.
여느 때 같으면 서로 먹겠다고 난리가 났을 형제들인데 우린 그 빵을 먹을 수가 없었다. 울면서 내놓는 엄마의 크림빵, 이후 3년인가 지나 상옥이 엄마가 동네에 나타났다. 다들 감방에 쳐 넣겠다 어쩐다 했지만 지금으로 치면 채권단이 모여 원금의 일정분만 받고 모두 해산을 할 수밖에는 없었다. 그나마도 조금이라도 받는 게 더 나았으니. 그런 나는 어른들의 그 돈놀이 계 때문 나와 친했던 상옥이하고 서먹해지다가 끝내 멀어지고 말았다.
3. 크림빵
아내가 큼지막한 빵 봉투를 들고 들어왔다. 우리 집 아이들은 나를 닮아서인지 무척이나 빵을 좋아라한다. 봉지에서 빵이 쏟아져 나왔다. 막내아들놈은 단팥빵을 쥘 것이고 큰 놈은 크로켓(고로께)을 잡을 것이다. 나는 당연 크림빵이다. 생김새만 보아도 나는 무슨 빵인지 알아차릴 수 있다. 곰보빵이나 도넛같이 표가 나지 않는다 하여도 식별이 가능하다.
어느 제과점이든 길쭉하게 만드는 것이 크림빵이고 둥글 펑퍼짐한 것이 단팥빵이다. 크림빵이 길쭉한 것은 한쪽을 베어 물을 때 미끌미끌한 크림이 불쑥 튀어 나오지 않도록 입안 크기에 딱 맞도록 만든 것이 아니겠는가 싶다. 숫하게 먹어온 경험에서 자연 알게 된 상식 같은 모양새다.
나는 어릴 적 한 때 크림이 들어가 있는 것만이 빵인 줄로만 알았었다. 빵이 원래 우리나라 말이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었기에 서양식엔 서양식 같은 내용물이 들어 있으리라 생각했었던 것이다. 당시에는 오히려 단팥이나 흑설탕이 흔하였었다. 흔한 만큼 어딘지 모르게 깔끔하지도 못하고 사뿐한 모양새도 아니었다.
크림 빵 하면 나는 어린 시절 까무잡잡하여 깜상이라 불렸던 동네 친구가 떠오른다. 그 빵에 맛을 들이게 된 것은 바로 그 친구 집에서였다. 그 아이 집은 올망졸망 모여 사는 가난한 마을 한가운데 사거리 길에서 구멍가게를 했었다. 구멍가게라지만 가게가 생기고 나서는 동네에선 제일 번잡한 마당이 되었다.
아이들은 그곳에 몰려들어 뭐든 사들고 나오면 침을 질질 흘려가면서 쫓아다니며 얻어먹곤 하였다. 초등학교 4학년 때 그 애와 나는 같은 반이었다. 그 애 집에서 숙제를 하던 어느 날 그 애는 가게로 들어가더니만 나무판자 속에 있는 달콤한 그 무언가를 꺼내왔다. 바로 크림빵이었다. 당시로서는 라면이랑 값이 비슷하였으니 꽤나 비쌌다.
그 빵은 둥글납작한 보름달 모양이 반으로 탁 포개져 있었다. 다 먹고 나서도 아쉬워 소가 하는 것처럼 혀를 내둘러 입가 하얀 향내를 한참이나 훑었다. 나는 이후 그 달콤함에 빠져 웬만하면 그 애 집에 가서 숙제를 하거나 그 애 마당을 떠나지 않았다. 우리 집도 다른 집처럼 그 애 집에다가 외상장부란 것을 만들어 놓았었다.
엄마는 콩밭이나 감자밭에서 일하는 때가 많았는데 동생들을 데리고 잘 논다거나 시험을 잘 봤다거나 심부름을 잘했을 때나 숙제를 일찍 끝내놓고 다른 공부를 하는 척하거나 하여 기분이 좋은 날엔 외상장부에 달아놓고 먹으라 하였었다. 그때마다 나의 단골은 크림빵 아니면‘라면땅’이었다. 그 아이 또한 누구도 모르게 나를 위해 아낌없이 내 주었던 것이 그 크림빵이었다.
나는 그 때 달콤함은 가치가 있으며 우정이나 양심이 돈보다 크다는 생각을 하였던 것 같다. 그 당시 일기장에다가 크림빵의 맛을 전하였고 우정이란 단어를 배열했었던 기억이 있으며 외상장부에 몰래 올려놓고 먹으려다가 그만 둔 가슴 두근거린 추억도 있다. 하지만 그 애와의 우정은 그리 오래가지 못하였다.
그 당시에는 ‘계’란 것이 무척이나 성행하였었다. 계모임에서 그 애 엄마는 일본말 ‘오야’라 하는 계주였다. 그런데 계란 것이 순탄하지가 않다. 계돈을 못내는 사람도 있게 되고 낙찰이 되고서는 도망치는 사람도 생겨난다. 그럴 때 계를 깨어서는 안 될 것 같으니 계주가 그것을 부담하고 이끌어 가는 경우가 많다. 아마도 그 애 엄마도 그러했던 것 같다. 어느 날 갑자기 그 애 엄마가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동네가 난리가 났다. 몇날 며칠 계원들이 그 집 안방을 차지하였었다. 엄마도 돈을 떼였다. 억울하다고 몇날 며칠을 집에 누워만 계셨다. 이자 돈 챙기려다가 큰돈을 떼인 것이니 당신으로서는 얼마나 애가 탔을까. 다시는 계는 안 하겠다고 말을 하는 엄마였다. 그때 오히려 나는 크림빵을 많이 먹었다. 자식들 먹고 싶은 것도 잘 안 해준 것이 마음에 걸렸는데 이젠 아무 소용이 없다 하면서 엄마가 덥석 사준 크림빵이었다.
정작 그때 나는 그 아이 생각은 하지 못 하였었다. 나에게 크림빵을 나누어 주던 그 아이가 떠오르지도 않았으며 어른들이 그 집을 대하듯 따돌리지는 않았다하여도 어색하게 대하였던 것만 같다. 그 후로 그 애와는 친하게 지내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쉬움이 봇물이다. 달콤한 크림은 정작 우정이 있었기에 그리 달콤하였던 것이 아니었을까.
그 당시 일기장에 써 둔 우정이란 의미는 필경 맞는 말이며 지켜지고 간직하면 좋았을 것인데 전혀 그러하지 못하였다. 지금 나는 달콤한 것이 크림빵이 아니라 정작 우정이었다 하는 말을 못하는 마음이 못내 서글프다. 그 아이가 내게 주었듯 내가 그에게 온정을 준 기억이 딱 한 번만이라도 뚜렷이 살아 있는 것이라 한다면 그 얼마나 마음 후련한 일일까.
지금에 와서 불현듯 그 애가 눈물 되어 떠오르는 것은 달콤하다 하는 그 느낌이 추억 속에 묻어난 하얀 포말 같은 그리움이기 때문이거나 그 시절 어리석었던 잔재마저도 놓치고 싶지 않은 충동이 무수히 일어 정녕 달콤한 미소를 이제라도 되찾고 싶기 때문 일거다. 이제 다시는 달콤함이라면 그 무엇이든 놓치지 않으려 한다. 달콤함은 무엇이든 비싼 가치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