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임란 후기, 종전 후 중국 배가 작아서 수전에서 비효율적이라는 기록이 몇 개 있습니다. 조선 대신은 명 수군 전선이 순천왜성에 바싹 접근해 소형 화포를 쏘는 돌격선에 적합하다 등으로 미화하지요. 물론 명 수군이 명나라 육군보다는 훨씬 열심히 싸웠고, 그래서 조선 조정에서는 종전 후 주둔군으로 명 수군을 선호합니다.
선조 109권, 32년(1599 기해 / 명 만력(萬曆) 27년) 2월 2일(임자) 3번째기사 이덕형 발언
수병이 연일 혈전을 벌였는데 당선(唐船)은 선체가 작아 큰 바다에서는 좋지 않으나 작은 포구에 드나들며 탄환을 쏘고 칼을 쓰는 데에는 매우 신통하였습니다.
<-- 당연히 비교 기준은 판옥선입니다. 중국 배는 작아서 해전용이 아니라 해안요새 공성용으로 좋다는 진술입니다.
선조 113권, 32년(1599 기해 / 명 만력(萬曆) 27년) 5월 23일
정원이 아뢰었다.
“사선(沙船)이 수전(水戰)에 불편하다고는 하지만 중국에서 이미 전쟁용으로 보내왔으니 이번 자문(咨文) 가운데 ‘전쟁에 임해 쓸모가 없다.’고 바로 지적하여 글을 짓는 것은 온당하지 않습니다.”
<-- 사선은 수전에 불편하다, 전쟁에 임해 쓸모가 없다는 것이 ///임란 직후/// 조선 의정부와 자문 작성기관(또는 자문 작성자에게 조언해준 조선 문무관들)의 공식 판단입니다.
백호전서 제장전
남해의 싸움에서 적들이 군사를 모조리 내어와서 싸울 적에 적들이 도독의 배를 여러 겹으로 포위하였는데, 도독은 먼저 우리 배로 바꾸어 탔기 때문에 적과 서로 버틸 수가 있었다.
<-- 진린이 판옥선에 탔기 때문에 그나마 버틸 수 있다고 해석해야 합니다. 진린이 계속 사선에 탔었다면 왜선들을 모조리 격침시킬 수 있었는데 판옥선으로 갈아타는 바람에 겨우 적과 버티는 정도에 그쳤다고 해석할 사람도 물론 있겠지요.
상촌선생집 56권
적선이 고기 비늘처럼 도독의 배 아래로 모여들자 도독이 닻을 내려 배를 멈추게 하였으며 왕원주(王元周)와 복일승(福日昇) 두 장수 역시 우리 나라 배로 갈아탄 뒤 도독의 배를 가운데에 두고 보호하였다.
<-- 사선이 더 좋은데 진린이 왜군에게 죽는 것을 방관하기 위해 중국 장수들이 판옥선으로 갈아탔군요... 네.
명나라 수군 장수가 판옥선으로 갈아탔다는 기록이
1. 판옥선이 사선보다 전투에 효율적이다.
2. 사선은 크고 아름다워 차마 전투에 쓸 수가 없어 판옥선으로 갈아타고 싸웠다.
어느 쪽이겠습니까?
연려실기술 17권 노량해전
적이 순신의 배를 여러 겹으로 포위하였으므로 진린이 우리 배에 바꿔 타고 포위망을 뚫고서 곧장 들어가 구원하려 하니
<-- 충무공과 사이가 안 좋았나봐요. 킹왕짱 사선을 계속 탔으면 금방 구했을텐데.
연려실기술 17권 왜교성전투에서
수군은 육군이 이미 적의 성에 들어간 줄로 알고 힘을 다하여 먼저 성에 올랐는데 조수가 갑자기 말려가서 배가 육지에 있게 되었다. 이에 적은 진창 가운데로 함부로 들어와서 포위하고 죽이니, 명병은 힘이 모자라서 드디어 이쪽 배 43척에 불을 질렀는데 밤새도록 불이 꺼지지 않았다. 명병 수백 명은 꼼짝 못하고, “상관! 우리를 살려 주시오.” 하고 부르짖으니 그 소리가 육군에까지 들렸다. 우리나라 배 3척도 그 가운데 있었는데 배가 몹시 높고 견고한데다가 화살을 비같이 쏘아댔으므로 적이 감히 침범하지 못하였다. 새벽에 조수를 타고 나오게 되어서 우리 군사만은 홀로 화를 면하였다.
<-- 판옥선은 몹시 높고 견고하지만 사선보다 작다? 선형이 판옥선은 오리보트, 사선은 바나나보트 쯤 되는 것 같습니다.
해동역사 64권
등자룡이 파도를 헤치고 곧장 남해로 진격하다가 바다를 건너가고 있는 무수히 많은 왜선을 만났다. 등자룡은 수공(首功)을 세우고자 하여 친히 가정(家丁) 200여 명을 거느리고 일제히 조선 수군의 배 위에 올라가 앞으로 전진하면서 용감하게 공격해 무수히 많은 왜적을 죽였다. <양조평양록 인용>
<-- 수공을 세우려고 판옥선에 탔다.
2. 명나라 군선은 여러 사이즈고, 사선 사이즈도 같은 시대에도 여러 가지입니다. 당대 명나라 서책에 기록된 대형 사선 사이즈로 임란에 참전한 사선 사이즈를 추정할 수 없습니다. 광동 이남에서 활동하는 대형 군선은 멀어서 조선에 갈 수 없었다고 합니다. 또한 임란 때는 명나라 군선이 강남에서 조선 서해안으로 직접 온 것이 아니라 내하 코스(장강에서 운하를 타고 산동-요동-압록강 하구-강화도)로 오느라고 1년 넘게 걸렸다는 명나라 지휘부 언급이 있습니다. 미 해군 군함에 파나마 사이즈가 적용되듯이 사선 포함 대형 군선은 운하를 이용하기 어려운(불가능하거나 가능하더라도 시간이 많이 걸리는) 것으로 봐야합니다. 진린과 등자룡이 판옥선을 인수해 운용한 것은 임란에 동원된 사선의 한계 때문이라고 봐야지 다른 이유를 들 수 없습니다.
재조번방지 6권에서 군문 형개의 전후 보고서 중에 대형 군선인 복선과 창선은 조선에 못 갔고 사선은 내하를 이용하느라 시간이 많이 걸렸다는 내용
왜적은 수병이 아니면 이길 수 없고 수병은 전선(戰船)이 아니면 그 공을 얻을 수 없는 까닭에 대함(大艦)으로써 충돌할 것에 대비케 하고 비정(飛艇)으로써 멀리까지 초탐할 것에 대비케 하여, 크고 작은 것을 겸용하는 것이 형편상 아니할 수 없사온데, 이번 동정(東征)에 모두 민(閔)ㆍ광(廣)ㆍ절(浙)ㆍ직(直)에서 조달해 가져 왔습니다. 그러하오나, 민ㆍ광에 복창(福滄) 등의 배 같은 것은 크고 견고하여 바다에서 부딪치는 것을 분쇄하는 것이 중국의 능한 점이나 멀어서 올 수 없사옵고, 오직 절ㆍ직이 조금 가까운 때문에 조달하는 데에 응한 것은 오직 사선(沙船 배 밑바닥이 평평한 배)ㆍ호선(虎船)ㆍ다선(茶船)ㆍ사잔(四剗)ㆍ이잔(二剗)의 배가 있을 뿐입니다. 또 신이 계산하옵건대, 두 달이 걸려야 전쟁터에 다다를 수 있고, 혹 조석지간에 공을 거둘 수 있다 하더라도 장령(將領)이 풍랑의 험한 것을 꺼려 그 해당 관청에 거짓으로 아뢰어 반드시 내하(內河)를 경유하려 합니다. 그러나 내하를 경유하게 되면 철두대선(鐵頭大船)이 거의 갑내(閘內)를 막아버리게 되고, 또 따로 상선(商船)을 찾아내어 와서 겸하여 운반하기를 기다리오면 식량이 이르기가 미루어지고 더디게 와서 1년이 지나도 도착되지 않아 때에 싸우는 사람은 만 명도 못 되옵고 그 나머지는 빈 이름만 있을 뿐 실지로 쓰는 데에 도움이 없었던 것입니다.
3. 사이즈와 상관없이 임란 때 조선에 온 사선은 단층입니다. 사선 정원이 1백 명이라는 논문은 몇 가지 있습니다. 위 원문에 승조원 14명에 전투원 50명이니 판옥선보다 적다 할 수 없다고 했는데, 판옥선(정원 122명에서 150명)은 물론 세키부네도 승조원 정원은 64명보다 많습니다.(전국시대의 소 세키부네는 50-60명 탑승) 전근대 군선은 풍력을 이용하든 인력을 이용하든 일반적으로 승조원 중 비전투원 비율이 높습니다. 사선과 호선은 전투원 비율이 극히 높은 예외적인 경우인데 전근대 군선에서 전투원 비율이 높다 해서 반드시 해전에 효율적인 것도 아니고(지중해 갈레아차는 다른 배에 예인), 군선 크기를 전투원 숫자만으로 비교해서도 안 됩니다.
판옥선은 이름에서 벌써 정의됐듯이 건조 초기부터 복층, 세키부네는 초기 단층에서 차차 복층으로 진행합니다. 판옥선과 세키부네에는 전투원이 상갑판에도 일부 배치됐으니 사선과 단순 길이만으로 비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각종 그림에 나왔듯이 사선에서는 전투원과 비전투원이 같은 갑판 공간(그것도 개방된 공간)에서 활동합니다. 사격전이든 단병접전이든 판옥선이나 세키부네에 비해 불리합니다.
4. 사선=400료선=크다는 주장에 대해
사선 크기를 화물 적재 단위로 몇 료선이라고 칭할 수는 있지만 당대 용어 사용례에서 사선은 전투선, 요선은 기본적으로 수송선입니다. 수송선 사이즈야 건조하기 나름입니다. 사선은 현대 중국 정크선 모두를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니 임란 당시 조선에 온 전투선인 사선(특히 절강 사선)은 정확히 정의돼야 합니다. 사선과 호선은 수송에 효율적인 배가 아니고 요선이 좋다는 광해군 대 기록이 있습니다.
계곡선생집(谿谷先生集) 제23권 손 군문에게 회답한 자문 내용 중 손 군문의 언급
지난해 9월 17일 귀국(조선)에 자문을 보내어 두호(頭號 제1호) 등급의 요선(遼船) 1백 척을 만들어서 3월을 기한으로 등주(登州)에 이르게 해 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중략)
우리가 가지고 있는 회수(淮水)와 절강(浙江)의 사호(沙號) 등급의 선박들은 물품을 적재(積載)하고 전운을 하기에는 편리하지 못한데, 이런 일에는 요선만큼 적당한 배가 있지를 않다.
5. 임란 당시 사선에 탑재한 화포는 호준포 외에는 기록을 못 봤습니다.
6. 판옥선에 비해 중국 군선이 나은 점
선조 89권, 30년(1597 정유 / 명 만력(萬曆) 25년) 6월 26일(을유) 5번째기사
비변사가 아뢰기를(중략)
중국의 전선(戰船)에는 모두 자호(字號)가 있으니 예를 들면 ‘천(天)’자의 제일선(第一船)·제이선·제삼선 하는 식과 같습니다. 우리 나라는 매사에 법이 없기 때문에 배에도 이름이 없습니다. 지금 이후부터는 경상(慶尙)·전라(全羅)·충청 등 도의 전선에 모두 자호를 나누어 정해 낙인(烙印)을 찍음으로써 조사하기 편리하게 하는 것이 온당할 듯하기에 감히 아룁니다.”
> 그동안 임란 당시 명나라 군선인 사선, 호선은 판옥선보다 작다고 생각했는데,
>이 링크(http://cafe.naver.com/booheong/25523)의 글을 보니 호기심이 듭니다.
>이렇게 적혀있었습니다.(회원만 볼 수 있어서 해당 부분만 발췌합니다.)
>
>"김경진의 임진왜란에서는 사선 ( 임란당시 원조온 명수군의 주력함)의 탑승원이 64명이니 판옥선이 훨 크고 명수군은 역할이 없었다고 하나 과연 그럴 까 ????? 이는 김경진 씨가 사선과 판옥선이 전혀 다른 배임을 간과한 거라 하겠소 400료선 (사선이오) 천공개물,용강선창지 등 명대의 책들에는 길이 89척,폭16척 으로 나오오 ( 당 이후 1척이 30센티 쯤 되니 한 27미터의 길이에 폭은 6미터요0 -아래 책 115면__ 원대의 배인 신안 해저유물선 -평저선인 한선이 아니라 첨저형인 중국제임은 다 아실거고 - 길이가 34미터니 과장된 기록이 아님을 알 수 있소 )
>
>기효신서에 나오는 사선의 탑승원기록은 -정화의 항해와 배 심산출판사111면 2005년-포도(선장)1명,타공 2명, 요수, 2명 ,판초 1명, 상두 1명 ,정수 2명 , 갑장(갑옷 갑 자에 우두머리 장 )5명, 매갑병(갑옷 갑 병사할 때 병)50인 이오 즉 갑장까지 해도 승조원은 14명 전투원 50이니 판옥선보다 적다 할 수 없소 배도 더 크고"
>
>사선, 호선의 크기나 화력에 대해 혹시 정확히 알 수 있을까요?
>
>
>화약의 경우, 17세기 초 "신전자취염초방언해"를 보면 중국 염초를 이 책 편찬 전까지 제조법을 모르다가 비로소
>알게됬고, 그 전에는 수입했다고 했는데, 조선 화약에 비해 어떤 장점이 있어 수입하고, 제조법을 알아내려고
>노력한 것일까요? 따로 노영구 선생의 "조선 후기 병서와 전법의 연구"의 화약 설명란을 읽어봤습니다만,
>잘 모르겠더군요.-_-;
>(물론, 그전에도 조선 고유의 염초는 주욱 생산했으므로 중국 염초 제조법을 알기 전에도
>수입에 의존하지 않고 자체 생산을 했겠지만, 수입량이 얼마나 됬는지는 잘 모르겠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