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마동 유래에 대해서 전해듣고 자료에 의해서 정리하여 보겠습니다
두마는 옛날에는 이산(二山)이라고 했다
이산이라고 불렀던 연유는
옛날 옛날 두마의 모든 지역이 바다 속에 잠겨 있었다고 한다
다만 문봉산 지금의 면봉산은 문 크기만 만큼 남아 있었고
매봉은 매 부리 만큼 남아 있었다고 하여
문봉과 응봉(鷹메응 )이 있다 하여 이산이라고 불렀다
이 내용은 구전으로 전해 내려오고 있다
그 근거로 해발 934미터 베틀봉에 가면 베틀바위가 있다
얼마전 경북대학교 교수와 베틀 바위에서 점심을 먹으면서
옛날 이곳이(두마) 바다 속에 잠겨 있었다는 전설이 있다고 하니
즉석에서 베틀바위를 가르키면서 바다 속에 있었던 돌이 아니냐고
그래서 보니 쉽게 알 수 있었다
면봉산 중턱에서 조개 껍질을 본 친구들이 많다
200년 전 두마에 정착한 경주 최씨 재사 만귀정이 있으며
그 옆에 이산(二山)정사라는 현판이 있다
이 곳에서 시집간 사람들의 택호도 이산댁이라고 했다 (본인의 사촌 누님의 택호도 이산댁이다)
이산이란 오랫동안 불려 오다가
조선 말기
강대국의 침략으로 부터 나라를 구할려고 나섰던 사람 중
오지 중 오지인 이곳 이산으로 모여 들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 중에 어진 세 분을 삼 현이라고 했으며 일곱 분을 제갈공명에 비교 했다는 이야기를
경주 최씨 중 종손(22대 종손)이며 한학자이신 최천식 형님으로 부터 전해 들었다
그 분들이 이산에 오시여 한학과 한글 등 새로운 문화를 하는데 많은 공헌을 했다
그 대표적인 두 분은 독립운동을 하시다가 이산에 오시여 많은 일을 하신 남원 양한기 님이시다
두마에 독립사상 고취 목적으로 사립학교를 설립하시고 고종 황제로 부터 동양이 생긴 후 처음 난 천재라고 격찬을 받았다
지금도 무덤이 이곳에 있으며 자손들 왕래가 있다
또 한분은 인동 부사 서필도 어른이다
어른은 두마에 오래 머물다가 떠나면서
마을 발전을 위해서 논 400마지기에 해당하는 금액을 희고 가셨다
그 분의 고마움을 표하는 공덕비가 두들마을 앞 돈들걸 앞에 있다
이 분들이 떠나면서
이산이라는 대신에 두마(斗摩)라고 이름을 지어 주시고 떠났고 한다
두마(斗摩)라는 뜻은 두(斗)는 주역에서는 북두칠성 두라고 한다 마(摩)는 만질마
북두칠성을 만지는 마을
높은 지대로 때묻지 않은 오지 중 오지에서 마고선녀가 살며 북두칠성을 만지는 마을이라고 하는것이 정설이다
다른 전설에 의하면 삼(麻)를 많이 재배한다 하여 두마
두들마을의 발음이 변천하여 두마라고 했다는 설이 있다
첫댓글 그런데 우째 두마에는 양씨. 서씨는 희귀 성에 해당되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