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생애] 제10부 혁명아의 24시 (30) - (301)언론통폐합 .5월27일 혁명정부는 약 3천명의 병역기피 공무원을 적발하여 전원 해임하기로 결정했다. 이런 감원으로 남는 예산 7억환은 국민복리사업 에 쓰기로했다. 5월28일 국가재건최고회의는 부정축재자 처리 기본요강 을 발표했다. 사진설명 : 깡패 소탕, 공무원 숙정을 주도한 한신 내무장관(육군소장) 최고회의는 부패공무원, 기업인, 재산 해외도피자들을 대상으로 한 이 요강에 따라 25명을 이미 체포했다고 발표했다. 발표된 명단에 들어 간 사람들 가운데는 그 뒤 혐의가 증명되지 않은 사람들도 많고 아예 기소되지 않은 사람들도 있어 신빙성엔 문제가 있다. 백두진(전 국무총 리), 김영선(전 재무장관), 유태하(전 주일대사) 같은 공무원들 이외에 다섯 명의 장성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양국진 전 3군단장, 백인엽전 6군단장, 엄홍섭 전 육군공병감, 백남권 전 논산훈련소장, 이용운전 해 군참모총장. 기업인들 가운데는 대한양회 이정림, 삼호방직 정재호, 대 한산업 설경동, 극동해운 남궁련, 극동연료 이용범, 화신산업 박흥식등 우리나라 대표 기업들의 사주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일본에 있던 제일 제당의 이병철은 '미체포자' 명단으로 발표되었다. 수사 대상자는 '금융기관으로부터 융자를 받아 1억환 이상의 정치자 금을 제공한 행위' '외자구매 외환, 또는 그 구매 외자의 배정을 독점 함으로써 2억환 이상의 이득을 취한 자' '2만불 이상의 재산을 해외에 도피시킨 자' 등으로 규정되었다. 5·16 당시의 사회상황을 이해하는 데는 이때가 '텔레비전 전사시대' 란점이 중요하다. 생활이 요란하지도 번잡하지도 않고 간편하던 시대였 다. 당시 서울 시민들의 3대 매체는 신문, 라디오, 영화였다. 시민가구 의 55%가 신문을 보고 있었다. 51%가 라디오를 갖고 있었다. 시민의 45% 가 한 달에 한번 이상 영화를 보고 있었다. 5월28일 공보부는 '계속 발행할 수 있는 신문, 잡지, 통신사'의 명 단을 발표했다. 이 강제정비 조치에 따라 64개 중앙지 가운데 15개가 살아남았다. 지방에서는 51개 가운데 24개, 중앙통신사는 2백52개 중에서 11개가 살았다. 지방통신사 64개는 전부 폐쇄되고 3백55개의 주간지 가운데선 31개가 남고 1백30개 지방 주간지 가운데선 한 개가 살았다. 공보부는 '이명단에 포함되지 않은 언론사는 등록증을 반납하는 동시에 기자증을 회수하고 금후 일체의 취재활동을 금지한다'고 발표했다. 3백16개의 통신사가 활동한 민주당 정권 시절, 대부분의 통신사들은 기자증을 팔았고 많은 기자들은 공갈배가 되어 먹고 살았다. 혁명주체 박종규 소령도 혁명모의를 하고 다닐 때 한 통신사로부터 가짜 사진기 자증을 받아 활용했다. 장면 정부의 실패 원인을 논할 때 언론도 면책 될 수 없는 것이다. 혁명정부는 28일 장영순 육군대령을 검찰총장에 임 명했다. 한신 내무장관은 이날 공무원들의 집무태도에 대한 지침을 전 국에 내려보냈는데 이는 전형적인 군사문화의 확산을 예고한 것이었다. <모든 공무원은 출근시간 30분 전에 출근하여 실내청소와 환경정리 를 마치고 깨끗한 기분으로 집무에 임할 것. 근무시간을 엄수하되 지각, 무단결근, 집무중의 무단 이석, 외래객 접견 잡담을 엄금할 것. 직무상 의 명령에는 절대 복종하고 하명받은 사항은 지정된 시간내에 완수할 것. 지시 또는 명령한 사항은 반드시 그 결과를 확인하고 검토할 것. 매 일의 사무처리 계획을 작성하고 매일의 실적을 확인하여 근무시간을 단 일분이라도 낭비하는 일이 없도록 할 것. 민원서류 처리에 있어서는 무 료대서 및 시간제 처리를 엄수하고 친절과 봉사를 베풀고 민폐를 끼치 는 일이 없도록 할 것. 허례의 악습을 바로잡고 간소한 복장과 검소한 생활을 솔선하여 여행할 것. 유흥장 출입을 엄금하고 외제담배를 피우 지 말 것.>. 한신 장관은 이런 지시를 내려놓은 뒤 기자들에게 부탁을 하나 했다. "요사이 내 이름으로 나가는 발표문 안에 엄단이니 엄중처벌이란 말 이 너무 많이 들어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런 말은 국민들 앞에 쓰기엔 좋지 않으니 앞으로 삼가겠습니다. 기자 여러분들은 혹시 담화문 속에 그런 말들이 나오더라도 부드러운 말로 바꾸어 주십시오.". 5월28일자 조선일보 사회면에는 이런 요지의 가십 기사가 실렸다. <서울에서는 군사혁명 이래 계엄고등군법회의가 두 번 있었다. 하나 는 춤바람, 다른 하나는 주먹 재판이었다. 두 재판마다 기자가 끼여 있 어 취재갔던 기자들이 얼굴을 붉혔다. 자칭 사회일보 기자라는 오모는 "이달말께 취재차 미국 가서 사교하기 위하여 춤을 배우려고 했다"고 말하는가하면 군경통신 기자라는 김모는 경찰서 지서에 들어가서 "너희 들 비행을 조사하러 왔다. 너희들 모가지를 모조리 자르겠다"는 공갈협 박을하고 기물을 파괴했다는 것. 이 친구는 "6천환을 내고 입사했으며 견습적으로 다니다가 그만 잘못을 저질렀다"고 진술했다.>. 5월28일자 조선일보 1면 하단의 '만물상'은 '국가재건최고회의가 기 획위원들 명단을 발표했는데 성명이 모두 한글로 되어 있다'고 지적했 다. '만물상'은 '군에서는 공문서를 순 한글로만 써온 지가 오래이고 이것으로 타자기의 이용도 많이 되어 있는지라 이제 이것이 일반 행정 기관에도 파급될 성싶다'면서 '동명이인이 많은데 이런 식의 표기로는 혼동이 많아지지 않을까'하고 걱정했다. 혁명정부가 취한 혁명적 조치 중에는 '농어촌 고리채 정리'도 포함 되어 있다. 5월25일 낮12시 현재로 농어민이 진 연리 2할 이상의 일체 의 고리채에 대해서는 채권행사를 일시 정지시키기로 한 것이다. 채권, 채무자들은 당국에 신고하고 확정된 채무는 정부가 나서서 '정부보증융 자'로써 빚을 대신 갚도록 한다는 아주 과격한 조치였다. 이 고리채 정 리는 여러 가지문제를 일으키게 된다. 5월29일 서울시교육감은 과외수업과 교내외의 특별학습을 금한다고 발표했다. 군정경찰은 5월30일부터 3일간 전국에 걸쳐 보행자 지도훈련 을 실시했다. '좌측통행, 차도보행금지, 횡단보도 이용, 신호를 지킬 것.'계엄사령부는 이렇게 국가기강을 잡아가는 가운데서도 장면 정부가 추진하고 있던 '국토건설사업만은 종전대로 추진하니 국민들의 협조를 당부한다'고 발표했다. |
[박정희 생애] 제10부 혁명아의 24시 (31) -- (302)중앙정보부 .김종필은 약 한 달 전인 4월 초순에 최영택 중령과 통신참모 김태 진(중앙정보부 초대 통신실장) 중령을 찾아왔다. 김종필은 심각한 얼 굴로 김태진에게 "혁명이 나면 전화라인 좀 차단시켜 줘"라고 부탁했 고, 김태진 중령은 "알았다"고 대답한 적이 있었다. 출근해보니 부대에는 이미 비상소집령이 내려져 부대장, 부부대장, 공작처장, 과장, 통신참모 등 간부들이 다 나와 있었다. 그들은 사태 가 어떻게 진행되는지 아무것도 알 수 없어 몹시 불안해 했다. 최영택 중령은 간부들 앞에서 "이건 틀림없이 박정희 소장과 김종 필이 주동이 되어 한 것이니 내가 육본에 찾아가 봐야겠소"라고 했 다. 이 말에 모두가 반색을 했다. 사복 차림의 최 중령이 아침 6시반 쯤 육군본부 정보국에 도착하니 비상소집되어 출근한 장교들이 일은 하지 않고 창가로 모여들어 연병장에 주둔한 혁명군들의 동태를 살피 는 데 관심 쓰고 있었다. 육본 상황실(기밀실)로 올라가니 혁명파 길재호 중령이 보였다. "종필이 어딨나?" "어, 지금 방송국에 가 있을 거다.". 지프로 남산 KBS에 가보니 경비가 삼엄했다. 사복 차림의 최 중령 이 길 건너편에 서서 방송국 마당을 살펴보는데 점퍼차림의 김종필이 심각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긴 채 마당을 왔다갔다 하고 있었다. 그가 몸을 돌려 고개를 드는 순간 최 중령이 손을 들어 흔들었다. 김종필 은 최 중령을 단번에 알아보더니 "오! 너 왔구나. 이리 와"라며 손짓 을 했다. 웃으며 다가선 최 중령에게 김종필은 "봤지? 드디어 해냈다"면서 살짝 박치기를 했다.그러면서 첫 마디가 "야, 이제부터 우리 할 일이 있다. 너는 이 시간부터 일 좀 해라"였다. 김종필은 즉시 점퍼 지퍼를 열고 오른 손을 품안으로 넣더니 잠시 후 수십 장의 문건이 가지런히 접힌 뭉치를 꺼냈다. 그걸 최 중령 앞 에서 부지런히 넘겨가더니 한 페이지를 찾아 쭉 펼쳐보였다. 거기에는 혁명정부 기구표가 그려져 있었다. 대통령 직속으로는 '중앙정보부'가 실선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김종필은 최영택 중령에 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정보국에 있을 때 평소 생각했던 미국의 CIA 같은 기구를 창설해야겠어. 넌 이제부터 이 작업 좀 해야겠다. 지금부터 착수하 자. 일단 육본으로 가자. 그런데 차 가져왔니." "그래.". 두 사람이 육본 상황실에 도착했을 때가 오전 7시경. 동기생인 육 사 8기생들이 많이 보였다. 최영택 중령은 김종필에게 "일단 자동차 도 좋은 걸로 바꿔야겠고, 권총도 네것까지 두 정을 갖고 와야 되니 부대로 잠깐 다녀올게"라고 말하고 남산의 첩보부대로 돌아왔다. 첩보부대 간부들은 최영택 중령이 돌아오자 마른 침을 삼키며 이 야기를 듣기 위해 다 모여들었다. "이제부터 종필이와 일을 해야겠는데, 여러분들이 협조 좀 해줘야 겠소." "뭘 도와주면 되지?" "우선 차부터….". 첩보부대에서 가장 좋은 차는 공작처장이 타고 다닐 때였다. 김 영민 공작처장은 즉시 자기 차를 쓰도록 했다. 권총도 두 정을 구했 다. 게다가 첩보부대장에게서 "운전병, 휘발유 등 첩보부대가 보유하 고 있는 것은 마음대로 써도 좋다"는 허락까지 받았다. 모의과정에서 제외되었던 첩보부대가 자진해서 혁명에 참여한 데는 김종필이 이 부 대에 오래 근무하여 능력이나 인품에서 신뢰를 얻었기 때문이다. 최영택 중령이 다시 육본 상황실로 돌아와보니 넓은 방이 장교들 로 꽉 차 있었다. 모든 장교들이 군복을 입고 있었지만 김종필과 최영택 중령만 사 복이었다. 회의에 불만이 있는 혁명파 장교들중 중-대령급들은 틈만 나면 상황실 뒤편으로 걸어와 김종필에게 귓속말을 하고 있었다. "…이렇게 하면 안되는 거란 말이다." 김종필은 그럴 때마다 고개를 끄덕이며 "알았다"고 답한 뒤 돌려보 내곤 했다. 장도영 총장이 출동부대의 철수론을 펴 실내가 소란스러워졌을 때 한 대령이 "함부로 철수 못합니다"라고 끼여들자 길재호 중령이 말했 다. "저 새끼 저거 배신할 때는 언제고 혁명군 들어오니 저런 말을 해? 며칠 뒤에 저 놈도 다 잡아넣어야 해.". 군사혁명위원회 명단을 발표할 때 김종필은 최 중령을 데리고 갔 다. 해병대 헌병 지프가 선두에서 사이렌을 울리며 에스코트를 했 다. 강창선 아나운서가 이들을 맞았다. "계엄 사령부 인적 사항을 발표할 테니 읽으시오." "알겠습니다.". 강창선 아나운서는 스튜디오로 들어갔다. 김종필은 "나는 여기 있 을 테니 네가 들어가봐"라고 했다. 최영택은 강창선 아나운서 뒤로 들어가 명단을 제대로 읽는지 꼼꼼하게 살펴보기 시작했다. "중앙계엄사령관 장도영, 중앙계엄부사령관 박정기…." 그는 박정희를 '박정기'로 읽고 있었다. 최영택은 강창선 아나운서 의 어깨를 소리나지 않게 치면서 "기가 아니라 희"라고 말했다. 아나 운서는 다시 읽기 시작했다. "아, 실례했습니다. 박정기가 아니라 박정희입니다.". 이날 방송을 마친 뒤 김종필은 종로 한일은행 본점으로 최영택을 데리고 갔다. 친형 김종락씨가 근무하다 두 사람을 보고 밖으로 나왔 다. "형님 돈이 좀 필요해요." "알았다.". 잠시 뒤 김종락씨는 한 다발의 돈을 가지고 나왔다. 그런데 은행 문 앞에서 작가라면서 자신을 소개한 사람이 김종필씨에게 말했다. "아, 수고하십니다. 군사혁명 참 잘하셨습니다. 국민들이 절대 지 지하고있으니 꼭 성공하시기 바랍니다.그런데 제 소견이 있습니다.과 도기에는 반드시 쌀값이 뜁니다. 혼란기가 닥치면 장사꾼들이 매점매 석을 하기 때문이지요. 이것을 우선 막아야 합니다." "알겠습니다.". 김종필은 좋은 훈수 하나 들은 듯 기분 좋아했다고 한다. |
[박정희 생애] 제10부 혁명아의 24시 (32) -- (303)
`8기' 주축 중정창설 .사진설명 : 장면총리 직속의 중앙정보위원회 실장이던 이후락은 혁명정부에게 업무일체를 선선히 넘겨 주었다. 김종필이 상부에 이야기해서 좌표를 지우고 판매하도록 해주는 바람 에 많은 돈을 벌었던 사람이었다. 이 주인은 그날 밤을 새워 수천 장의 완장을 만들어주었다. 17일부터 하얀 천에 혁명군이라 쓴 완장을 나누어 주니 군인들의 사기가 충천하는 것이었다. 혁명군이 아닌 군인들은 완장 을 찬 동료들을 보고 부러워했다. 최영택은 완장의 심리적 효과에 놀랐 고 이를 적절하게 이용한 김종필의 두뇌에 다시 한번 감탄했다. 17일 오후 김종필은 최영택에게 "우리 동기들을 불러오자. 우선 서정 순, 이영근, 그리고 제대한 뒤 대구에 내려가 있는 고제훈을 불러와"라 고 했다. 이들이 정동 구러시아 공사관 근처의 하남호텔에 모인 것은 5 월 18일이었다. 김종필이 대강 정해준 지침에 따라 이들은 중앙정보부의 조직안을 만들기 시작했다. 이들은 6·25 전부터 육본정보국에서 근무한 장교들로서 당시 전투정보과 비공식 문관이던 박정희와 친면이 있었다. 이들은 작업을 하다가 석정선을 생각했다. 동기생 석정선은 4·19 직 후 김종필과 함께 군내 정화운동을 주동했던 인물이었다. 김, 석 두중령 은 둘도 없는 친구로서 5·16 석달 전에 헌병대에 같이 구속되었다가 강 제 예편당할 때까지는 행동을 함께 했다. 그 뒤 석정선은 "나는 처자식 도 있고 하니 혁명은 그만두겠다"고 하여 손을 뗐었다. 김종필은 "좋다. 네 갈 길을 가라. 그러나 혁명이 누설되면 네가 한 걸로 알겠다"고 엄포 를 놓았다. 동기생들은 뛰어난 정보장교인 석정선의 머리가 필요하니 그 를 불러야겠다고 김종필에게 건의했고 김종필도 양해했다. 석정선이 참 여하자 하남호텔의 모임은 활기를 더해갔다. 이들은 중앙정보부뿐 아니 라 군사혁명위원회를 이을 국가재건최고회의의 조직안도 만들었다. 이들 은 혁명정부 권력구조의 산파이기도 했다. 19일 김종필은 최영택 중령에게 장면 총리 직속으로 되어 있던 중앙 정보위원회의 이후락 실장으로부터 업무 일체를 인수하라는 지시를 했다. 이후락은 자유당 시절에 김정렬 국방장관으로부터 발탁되어 장관 직속의 중앙정보부를 창설하고 이 부대의 이름을 자신의 군번을 따서 79부대로 붙였다. 79부대의 주임무는 미국 CIA와 정보교류를 하는 것이었다. 육군 소장 이후락은 장면 정부시절에도 같은 일을 보고 있었다. 정보위원회는 그러나 경찰, 군의 여러 정보기관을 통합조정하는 국가 정보기관으로서는 기능하지 못하고 있었다. 최영택 중령은 이후락 실장 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부인이 전화를 받 는데 "안 계신다"는 것이었다. 최영택은 이후락과 함께 연합참모본부에 서 근무한 적이 있었다. 최영택은 "사실 저는 최영택입니다"라고 하니 부인은 "어머나 그러세요. 잠깐 기다리세요"라고 하더니 이후락을 바꾸 어 주더란 것이다. "최영택 중령입니다. 이젠 군사혁명이 성공단계로 들어가고 있습니 다. 저희들이 중앙정보부를 창립하려고 하는데 도와주십시오." "아, 협조하지요.". "인수인계를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언제든지 좋습니다.". "일단 내일 한번 뵈면 어떨까요." "좋지요. 내일 오후 1시에 명동 사보이 호텔 지하 다방에서 만납시다.". 5월20일 최영택은 김종필을 따라가서 군사혁명위원회 위원들에게 '국 가 재건최고회의'의 조직과 기능 등 혁명정부의 통치기구 조직에 대해서 보고했다. 최영택은 차트를 넘기고 김종필이 설명했다. 장도영 총장은 '최고'란 말이 거슬린다고 지적했다. 최연장자인 김홍일 외무장관이 말 했다. "지금 우리는 군사혁명을 한 것입니다. 이런 시기엔 권위 있는 이름 이 필요합니다. 비록 공산국가에서 쓰고 있다고 해도 '최고'란 단어를 못쓸 이유가 없습니다.". 김동하 해병 소장도 찬동하는 바람에 원안대로 통과되었다. 최고위원 중 한 명인 김포 해병여단장 김윤근 준장은 이날 김종필의 구상이 스케 일이 크고 원대한 비전을 담고 있어 큰 감명을 받았다. 그의 능란한 화 술 때문에 브리핑 내용뿐만 아니라 이 조직안을 만든 사람들을 돋보이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김종필은 이 자리에서 국가재건최고회의 직속으로 중앙정보부와 재건국민운동본부를 둔다는 것도 보고했다. 김윤근은 5월 17일 저녁 육본 상황실에서 있었던 일이 생각났다. 군사혁명위원회 위원 30명 가운데 육사8기생들에게 다섯 명이 배정되었다. 8기생들은 한 구석 에 모여 승강이를 벌이는데 김종필이 나타나 무슨 말을 하니 조용해지는 것이었다. '아 이 사람이 8기생들 중 리더구나'하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최영택은 보고회를 마치고 이후락과의 약속장소인 사보이 호텔로 갔 다. 30분이 늦었는데도 이후락은 기다리고 있었다. 이후락은 선선히 말 했다. "우리는 사실 그동안 본격적으로 활동하지 못했어요. 현재까지는 미 국 CIA와 정보를 교환하는 일만 했습니다. 다 인계해드리겠습니다. 내일 오후 3시에 우리 사무실에서 만납시다.". 최 중령은 다음날 (5월21일) 남산에 있는 중앙정보위원회 사무실로 갔다. 이후락은 보이지 않고 육군 소장인 차장과 해군 대령인 국장이 업 무인계를 해주려고 했다. 이때 미국 대사관에서 왔다는 두 미국인이 나 타났다. CIA 요원이라고 자신들을 소개했다. 자신들과 정보교류를 하는 한국 측 창구가 바뀌고 있는 상황에서 궁금해서 나와본 것 같았다. 두 미국인 이 지켜보는 가운데 인수인계 서류에 도장을 찍은 최영택은 현황에 대한 보고를 받았다. 중앙정보부 창설 준비작업반은 5월22일엔 하남호텔에서 화신백화점 뒷편에 있는 여관으로 옮겼다. 다음날 김종필이 오더니 돈뭉치를 주고는 말했다. "그런데 오늘 다른 데로 옮겨야겠어. 민주당 계통 사람들이 이 여관 에 많이 들락거려. 도저히 보안유지가 안되겠어.". 작업반은 서울 퇴계로 입구에 있던 중앙여관으로 다시 이동했다. 국 회의사당으로 최고회의가 입주한 뒤에는 서울신문 옆 국회별관이 중앙정 보부 창설준비 사무실로 쓰였다. [박정희 생애] 제10부 혁명아의 24시 (33) -- (304)갈등 ."정보전문가들이 만든 안인데 아무래도 법률 전문가의 검토가 필요 할 것같아.". 사진설명 : 창설시 정보부 법률담당고문이 된 신직수 김종필은 "하극상 사건 때 나를 도와준 분이 계셔. 최 동지가 모셔 와.". 최영택은 서대문 근처에 있던 신직수 변호사 사무실로 가서 중앙여 관으로 모시고 왔다. 신직수는 군 법무관 시절에는 박정희 사단장 아 래서 법무 참모로 일한 적이 있었다. 신직수는 김종필이 중앙정보부법 의 법률적인 검토를 해달라고 하자, 그 자리에서 일별하더니 말했다. "잘 하셨는데 이대로는 부족합니다. 손을 많이 대야겠습니다.". 신직수 변호사는 김종필로부터 중앙정보부법 초안을 넘겨받아 집으 로 가져갔다. 다음날 그는 말끔하게 고친 법률안을 들고 왔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신직수는 중정 법률고문으로 임명되고 1970년대 엔정보부 장이된다. 정보부 요원들은 방첩대, 정보국, 첩보부대, 헌병대, 경찰등 수사기관에서 뽑아왔다. 최영택 중령은 육본정보국 차장 최택원 준장과 첩보부대장을 찾아가 정보요원들을 뽑아왔다. 방첩대에서 오래 근무했 던 이영근, 서정순은 방첩부대에서 수사요원들을 많이 데려왔다. 김종 필은 5월28일쯤 중앙정보부 창설안을 정리하여 국가재건최고회의 박정 희 부의장에게 가져갔다. 박정희는 내용을 일별한 뒤 만족해 하면서 "두고가면 의장 결재를 받아주겠다"고 했다. 그날 오후 김종필이 다시 찾아갔더니 박정희는 "장도영 장군이 결재를 보류시켰다"고 말하더란 것이다. 최영택 중령은 이때 육사8기 동기생인 김종필이 골똘히 생각에 잠기더니 이런 말을 하고 나가더란 것이다. "아무래도 안되겠어. 장도영이가 정보부에 자기 사람들을 심으려는 것 같아 우리끼리 해치워야겠어.". 그때 김종필은, 장도영 의장이 동향인 인천지구 첩보대장 출신인 김 일환 예비역 대령을 정보부장으로 밀려는 생각을 하고 있다는 판단을 했다고 한다. 며칠 뒤, 즉 5월말 김종필은 박정희 부의장에게 장도영의 의도를 설명하면서 "빨리 결재를 받아야 한다"고 재촉했고, 자신이 직 접 장 의장을 찾아가 설명하기도 했다. 박정희가 받아온 결재 서류를 들고온 김종필은 최영택 등 창설요원들과 앉아 주요 인사를 결정했다. 부장 자리엔 자신의 이름을 써넣었고 행정관리 차장에 이영근, 기획운 영 차장에 서정순, 총무 국장에 강창진, 해외담당 제2국장에 석정선,수 사담당 제3국장에 고제훈, 교육 담당 제5국장에 최영택, 통신실장에 김 태진, 비서실장에 김봉성, 고문에 신직수(법률담당)-장태화(정치담당)- 김용태(경제담당). 완전히 김종필 인맥으로 구성된 중앙정보부는 군정 기간에 박정희 의장의 전폭적인 지원과 신뢰를 받으면서 권력의 핵심을 장악하여 정권을 안정시키고 군정 이후를 내다본 새로운 정부와 정당을 연구하고 조직하는 산파가 된다. 6월10일에 공포된 중앙정보부법은 전문이 9조로 된 아주 짧은 법안 이었으나 엄청난 권한을 담고 있었다. 정보부의 기능은 '국가 안전보장과 관계되는 국내외 정보사항 및 범 죄수사와 군을 포함한 정부 각부의 정보 수사활동을 조정 감독한다.' 부장과 차장은 최고회의의 동의를 얻어 의장이 임명한다. 전국에 지부 를 두며 직원은부장이 임명한다. 정보부는 소관 업무에 관한 수사를 할 때는 '검사의 지휘를 받지 않는다'고 했다. 더구나 '중앙정보부의 직원 은 그 업무수행에 있어서 필요한 협조와 지원을 전국가기관으로부터 받 을 수 있다'고 규정했다. 이 법안이 공포되기 전에 중앙정보부는 이미 기능을 시작한 상태였다. 최영택의 기억으로는 정보부에 최초로 보고해온 곳은 치안국이었다 고 한다. 치안국장은 육군헌병감으로서 정군운동을 주동한 김종필, 석 정선을 강제예편시킨 조흥만 준장이었다. 최영택이 김종필에게 말했다고 한다. "조흥만이는 자네 옷을 벗긴 사람이잖아. 왜 그런 사람을 그 자리에 앉혔어?" "이봐, 과도기에는 일 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충성이 더 중요해.이 런 사람이 충성은 더 잘하지.". 치안국이 올린 보고의 요지는 이러했다. <일본에서 온 여객기에 불법으로 입국한 재일동포 전세호란 자가 경 찰에 검거됨. 이 자는 박정희 장군이 문경보통학교 교사로 있을 때 제 자였다고 주장하고 있음. 거류민단에서 학생동맹위원장으로 활동해 왔 는데 박 장군이 혁명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듣고 혁명 대열에 동참하기 위해서 귀국을 강행했다고 함.>. 해외담당 국장이 된 최영택은 사보이 호텔에 붙들려 있는 전세호를 만나러 갔다. 전세호는 민단과 조총련에 대해서 깊은 정보를 말하는 과 정에서 이런 이야기를 털어놓았다고 한다. "유태하 전 주일대사를 꼭 데리고 오십시오. 일본에서도 귀국을 거 부하고 있는 그분의 존재를 골칫덩어리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분은 많은 자금을 써가면서 그 동안 정계, 재계, 야쿠자 조직에까지 아주 넓 은 인맥을 구축해 놓았습니다. 그분을 데리고 와서 이 인맥을 활용할수 있다면 한일회담에도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이날 밤 김종필은 박정희에게 물어 전세호가 제자임을 확인했다. 유 태하전 대사는 이승만 정부가 무너진 뒤에 귀국을 거부하고 있었고 혁 명정부도 그를 부정축재자로 지목하여 수배해놓고 있었다. 다음 날 정 보부에선 '유태하 대사 귀국공작' 회의가 열렸다. 박정희와 김종필은 혁명구상단계 때부터 혁명 이후엔 미국과의 관계가 나빠질 것을 예상하 고 이때 일본으로부터 돈을 꾸어오는 방법을 생각하고 있었다. 김종필 부장은 최영택에게 "전세호를 데리고 일본에 가서 유태하를 데리고 오라"고 지시했다. 그때 한일 두 나라 사이엔 국교가 없어 일본 에 입국하는 데 편법을 써야 했다. 최영택은 주한 영국대사관에서 홍콩 비자를 얻었다. 홍콩으로 가는 길에 일본에서 이틀간 체류할 수 있었다. 일본에서 홍콩에 들어간 뒤 홍콩의 일본총영사관에서 일본 입국 비자를 얻었다. 전세호의 협조를 얻어 최영택은 한 20일 뒤 유태하 대사를 데 리고 귀국할 수 있었다. [박정희 생애] 제10부 혁명아의 24시 (34) -- (305)이남 대 이북 .사진설명 : 왼쪽부터 김종필 중앙정보부장, 한웅진 소장, 박정희 최고회의부의장. 장도영을 거세하지 않으면 혁명정부가 분열할지도 모른다고 판 단한 김종필의 생각이 잘 나타나 있는 자료로는 그가 6월 2일 매그 루더 미 8군사령관과 만나 나눈 대화록이 있다. 김종필은 서두에서 부터 "오늘은 우리 혁명군의 당면한 문제점들을 아주 솔직하게 말 씀드리겠다"고 한 뒤 이렇게 설명해가기 시작한다. "우리나라 전역사를 통해서 두 차례 대혁명이 있었습니다. 600 년 전에 일어난 첫번째 혁명도 부정부패가 원인이었다는 점에서 지 금과 비슷합니다. 저는 4·19에 대해서는 혁명으로 생각하지 않습 니다. 두번째 대혁명이 5·16입니다. 조선조 500년 동안 많은 차별 정책으로 나라가 이리저리 분열되어 있었습니다. 이번 혁명의 주목 적은 이런 분열상태를 종식시키는 일입니다. 장도영 장군은 이북 출신이고 박정희 장군은 이남 출신입니다. 지금의 분열과 갈등은 이 점이 주원인입니다. 장도영 장군의 태도는 혁명 전, 혁명 중,혁 명 후에 모두 달랐습니다. 장 장군이 혁명을 비호했음을 증명하는 사례들이 있습니다. 모의 정보가 새나갔을 때도 그는 뜬 소문에 불 과하다면서 그런 사실을 부인해주었습니다. 박 장군은 거사 전에 최고회의의 조직구성과 의장 문제까지 그와 상의했습니다. 장군은 최고회의를 이끌어갈 만한 적격자가 없다고 걱정까지 했다고 합니 다. 혁명당일 장 장군은 밤 9시 40분에 30사단의 반란을 보고받고 도 장면 총리에게는 다음날 새벽 2시에 보고했습니다. 왜 그토록 늦게 보고를 했는지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습니다.". 김종필은 이런 식으로 장도영 장군의 기회주의적 행동 사례를 20 여분간 자세히 설명해갔다. "박 장군은 18일 이후 장 장군에게 복종했습니다. 박 장군은,장 장군이 최고위원들과 내각을 임명했을 때 어떤 반대도 표명하지 않 았습니다. 주로 이북 출신들이 많이 기용되었는데 이에 반발하는 소장파들을 박 장군이 무마시켜야 했습니다. 24, 25일 경까지 장 장군은 박 장군과 의논해서 일을처리하는 듯했습니다. 그 후부터는 걸핏하면 충돌했고 박 장군과 상의하는 걸 기피하기 시작했습니 다. 은행장들을 임명했을 때도 박 장군은 신문을 보고 나서야 알 정도였습니다. 신문에서 보셨겠지만 장 장군은 오는 8월 15일까지 정권을 민간정부에 이양하겠다고 했습니다. 이는 그 누구와도 상의 없이 독단적으로 이뤄진 것입니다. 현재 모 신문은 신민당(야당)을 지지하고 있습니다. 장 장군이 간접적으로 이 움직임을 지원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들리는 바에 의하면 모 신문의 편집국 장도 장장군을 지지하도록 돈을 받았다고 합니다. 한미군 사이에 연락이 원활하게 되지 않는 이유 중의 하나는 장 장군의 직책이 네 개나 되기 때문입니다. 그는 현재 육군 참모총장, 국방부 장관, 최 고회의의장, 내각수반을 겸임하고 있습니다. 한 사람이 그런 중대 한 직책을 네개나 갖고 있는 탓에 우리 양군 사이에 연락이 제대로 되지 않는다면 부하들이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본인은 오늘 최고회의에 법안을 상정시켰습니다. 최고회의 의장, 부의장, 위원들은 겸직을 금한다는 조항이 들어 있습니다. 이 안건 은 투표결과 19대12로 가결되었습니다. 우리는 신임 육군 참모총장 을 뽑아야 하는 문제에 봉착해 있습니다. 귀하와도 관계가 있기 때 문에 잘 생각해두시기 바랍니다. 뉴스위크지에 지금 한국의 권력이 누구에게 있나라는 기사가 실렸다고 합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장도 영 장군을 중심으로 단합할 것입니다.". 장도영에 대한 많은 비판을 쏟아놓은 뒤에 김종필이 말한 '장도 영 중심의 단합'을 매그루더는 하나의 수사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매그루더는 "그러면 장 장군의 직책은 앞으로 어떻게 됩니까.최 고회의 의장만 맡습니까"라고 물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장도영 장군과 맺은 신사협정을 지켜야 한 다고 생각합니다. (한강을 건널 때) 헌병대로부터 발포를 당한 박 정희 장군은 '장도영이가 나를 죽이려 하는군'이라고 말했고 젊은 장교들은 장 장군을 쏴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박 장군은 '아니 야, 우리는 장 장군을 지도자로 모시기로 했으니 약속을 지켜야 돼' 라고 말했습니다. 이남에서라도 남북은 단결하지 않으면 안되는데 지금 이순간에도 장 장군의 이북출신 추종자들은 세력을 확대하는 데 여념이 없습니다. 우리 5,000년 역사에 있어서 이런 일들은 비 일비재했습니다. 장 장군이 지난번에 방미 의사를 표명했을 때도 그것은 동료들과 합의한 사항이 아니었습니다. 나라꼴이 정비되지 도 않았는데 귀국 대통령과 만나서 무슨 할 말이 있겠습니까. 현지 사령관인 귀하와도 만나지 못하는데 그의 방미가 도대체 무슨 소용 이 있겠습니까. 그가 방미한다면 이곳 정세가 불투명하다는 이야기 를 할 수 있을 뿐일 것입니다.". 매그루더는 김종필에게 "각군 참모총장과 합참의장은 최고위원 으로 계속해서 남는가" "박정희 장군은 상임최고위원이 되는가"라 고 꼬치꼬치 물었다. 김종필은 백지에다가 혁명정부의 조직체계도를 대충 그려나가면 서 각 부서의 기능과 상하관계를 설명했다. 옆에서 듣고 있던 멜로 이 8군 부사령관이 "사본을 한 장 갖고 싶은데 가질 수 있겠습니까" 라고 했다. "물론입니다. 이 정부조직 초안은 혁명 두 달 전에 작성한 것입 니다.". 매그루더가 "(조직안을 만드는데) 고심을 많이 했겠군요"라고 하니까 김종필은 이렇게 받았다. "귀측으로부터 배운 것이 많습니다.". 미국측이 한국군 장교들에게 가르쳐준 조직운영의 기술을 혁명 에 써먹었다는 뜻이다. |
[박정희 생애] 제10부 혁명아의 24시 (35)-- <306>장도영의 울분 ."본인의 추천을 받겠다는 것입니까, 아니면 귀측에서 지명한 사람에 대해 본인의 동의를 받겠다는 것입니까." "우리가 하는 일은 최고회의에 두세 명의 적임자를 추천하는 것입니 다. 이 문제는 후에 박정희 장군이나 장도영 장군께서 귀하와 상의할 것입니다.본인의 생각도 최고회의에 반영될 수 있으니까 귀하가 누구를 추천한다면 그를 지지하도록 하겠습니다.". 사진설명 : 나중에 중앙정보부장이 된 김형욱 중령은 장도영을 달래기 위해 그를 찾아갔다. "배려해주어서 고맙습니다. 이 문제는 귀측 사람들을 잘 알고 있는 하우즈 고문단장과 상의한 뒤 추천하도록 하겠습니다. 구금중인 장성들 에 대해서는 귀하가 좀더 애쓸 수는 없습니까." "그들에 대해서 귀하보다도 더 걱정하시는 분이 바로 박정희 장군입 니다. 이한림 장군과는 동기생이기 때문입니다. 귀하가 이렇게까지 우 리 장성들을 배려해주시니 감사합니다.". 국가재건최고회의의 실세인 14명의 분과위원에는 육사8기 출신이 다 섯 명이었다. 행정 분과위원에 오치성 대령, 내무에 박원빈 중령, 법무 에 이석제 중령(8특기), 보건사회 길재호 중령,체신 옥창호 중령. 이석 제 중령은 기능이 정지된 헌법을 대체할 국가재건비상조치법을 만들고 있었다. 여기서 문제의 핵심은 최고회의 의장, 내각 수반, 국방장관, 육군참모총장을 겸직하고 있는 장도영의 처리였다. 성격이 깔끔하면서 도 단호한 면이 있는 이석제 중령은 장도영을 찾아가서 '계급을 초월한 담판'을 벌였다고 한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저의 고향도 신의주입니다. 각하도 고향을 버리고 월남했듯이 저도 부모를 고향에 놔둔 채 혼자만 빠져나왔습니다. 목숨 걸고 월남해 군인 의 길로 들어섰다가 공산화를 막고 부강한 국가를 만들어보자고 혁명을 일으켰습니다. 혁명은 어차피 힘으로 하는 것입니다. 박정희 장군이 총 칼을 들고나와 정권을 빼앗은 것이 아닙니까. 이 혁명은 각하가 주인공 이 아니라 박정희 장군이 계획하고 실행한 겁니다. 저희들에게 협조하 시면 각하의 위상에 어울리는 대접이 꼭 있을 것입니다. 각하 혼자서 네 가지 직책을 다 수행할 수는 없습니다.". 장도영은 "일개 육군 중령이 참모총장을 협박하는 건가"하고 화를 냈다고 한다. 이석제는 이렇게 말하고 나왔다고 한다. "혁명이 아이들 장난입니까. 우리가 계급 가지고 혁명한 줄 아십니 까. 한강 다리를 넘어올 때 우리는 이미 계급의 위계질서를 벗어났습니 다.". 이석제는 비상조치법안에다가 최고회의 의장은 겸직할 수 없다고 못 을 박은 뒤 국가재건최고회의 법안에는 상임위원회의 의장은 부의장,즉 박정희가 맡는다고 써넣었다. 분과위원장으로 구성된 이 상임위원회가 사실상 최고회의의 실권을 장악하도록 되어 있으므로 이 법안이 통과되 면 장도영은 실권을 놓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 당시 박정희와 김종필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는 두 사람의 법정 증언이 참고가 될 것이다. 장도영 일파에 대한 반혁명사건 재판에 서 증인으로 나선 박정희는 이런 진술을 했다. "장 총장의 태도가 애매하다고 하여 젊은 장교들이 처치하자고 하는 것을 무마한다고 생땀을 뺐다. 젊은 장교들이 과격한 이야기를 하길래 '혁명에도 의리가 있다. 처음부터 장 장군을 내세우자고 한 이상 그대 로 해야 한다. 우리들이 장 장군을 잡아넣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하였더니 일부장교들은 시종 반대했다.". 김종필도 이런 요지의 증언을 했다. "문재준 대령이 장도영 장군을 가까운 시일내에 제거하는 것이 좋겠 다고하기에 본인은 박 장군의 뜻이 그것이 아니란 것을 누누이 설명했 다.본인은 문 대령에게 그런 소리를 함부로 하면 혁명주체세력이 분열 될 우려가 있다고 지적했다. 똑같은 이야기를 채명신 장군한테도 했다. 박 장군은 자신의 권한을 장 장군에게 다 드리고 장 장군 중심으로 혁 명과 업을 수행하자고 주장해왔다. 어느 때인가 최고회의를 열고 있을 때 최고위원들이 장 장군이 너무 많은 직책과 권한을 갖고 있으므로 좀 덜어야 한다는 제의를 하자 박 장군은 노발대발했다. 내가 그분에게 그 런 권한을 드리겠다고 했는데 반대하는 놈이 누구냐 해가지고 혼을 낸 적이있다.". 1961년 6월3일 아침 국가재건최고회의는 비상조치법을 통과시켰는데 '최고회의 의장은 타직을 겸할 수 없다'는 조항이 들어 있었다. 장도영 은 흥분했다. 오전 10시쯤 최고회의 의장실을 찾아온 이주일 소장,김윤 근 준장, 김진위 준장, 유원식 대령 앞에서 신경질을 냈다. "당신들은 나를 로봇으로 만들 생각인가. 최고위원들 총회를 소집하 여 박 장군과 나를 놓고 신임투표를 해볼까. 만약 박 장군이 지지를 받 으면 내가 물러나면 될 것 아닌가.". 장도영은 이날 밤에는 육군 참모총장 공관으로 유원식, 송찬호 준장, 문재준 육군헌병감, 박치옥 공수단장을 불렀다. 장도영은 이들에게 하 소연 비슷한 불평을 털어놓았다. "당신들은 혁명을 무엇 때문에 한 것인가. 정말 우리 1대1로 해볼 까. 나도 대비책이 있어. 서울 시내가 피바다가 된다. 불바다가 된단 말이야.". 유원식의 증언에 따르면 이날 장도영은 책상을 치고 유리잔을 던지 기도하는 등 극도의 흥분상태였다는 것이다. 박정희는 장도영 의장의 격렬한 반대에 부딪히자 일단 통과된 의장의 겸직금지 조항을 완화하자 고 최고위원들을 설득했다고 한다. 많은 위원들은 반대했으나 박정희는 최고회의 의장이 내각수반만은 겸직할 수 있도록 비상조치법안을 수정 하도록 했다. 6월8일 밤 김형욱 중령과 홍종철 대령은 겸직금지 완화내용을 설명 하고 달래기 위해서 장도영 총장의 공관을 찾았다. 장도영은 눈이 퉁퉁 부어 있었고 괴로운 표정이었다고 한다. 장도영은 이런 말을 하더란 것 이다. "이번 혁명에서 중대한 일은 모두 이북 사람들이 다 하고 가담자도 많은데 당신들은 속고 있는 것 같아." "속고 있다니 무슨 말씀입니까.". "혁명 주체세력 안에는 불순분자들이 들어 있다는 뜻이야.". |
[박정희 생애] 제10부 혁명아의 24시 (36) -- <307>최초의 인터뷰 ."장도영 의장은 자신이 참모총장을 꼭 겸직해야겠다고 주장하면서 이주일 장군을 불러놓고 울기도 하여 과거의 장 장군 모습은 찾아볼 수 가 없었다. 나는 장 장군을 만나서 '내각 수반이 참모총장까지 겸해 가 지고서는 군을 바로잡기가 곤란하니 군의 안정을 위해서라도 적당한 사 람에게 시키자고 했더니 장 장군은 '박 장군 당신이 내각수반을 하시오. 나는 참모총장으로 돌아가겠소'라고 말했다. 심지어 장 장군은 최고 위원들을 관사로 한 사람씩 불러 별별 소리를 다하고 발악하면서 나와 1대1로 해보자고 선전포고를 했다고 들었다.". 장도영은 설사 최고회의 의장 자리를 내놓더라도 육군참모총장 자 리는 고수하고 싶어했다. 혁명주체의 핵심인 문재준(혁명 후 육군헌병 감 취임) 대령이 보기엔 '군사정권의 민정이양 시기를 금년 11월로 구 상하고 있는 모양으로 그렇게 되면 민정이양 후에도 자기가 계속해서 참모총장을 할 생각이었던 모양이었다.'. 김종필은 이미 활동을 시작한 중앙정보부를 동원하여 6월1일에 장도 영의 측근인 김일환 전 대령 등 3명을 구속했다. 김씨는 육사 5기출신 으로서 신의주 동중학교를 졸업한 장도영의 후배였다. 육사 5기인 그는 인천지구 첩보부대장으로 있을 때인 1960년 4월 모종의 사건으로 해서 파면되었다. 그는 민간인 신분으로 있으면서 민주당쪽과 접촉, 장도영 이 육군참모총장으로 임명되도록 하는 데 힘을 썼다고 한다. 학교 선배 인 장도영이 최고회의 의장이 되자 김일환은 타임지에 실린 박정희의 좌익전력에 대해 발설하고 다니면서 장도영을 밀어줄 인맥을 구축하다 가 6월초 김종필의 지시로 구속되었다. 혐의는 반혁명 음모. 김종필은 중앙정보부 조직안에 대해서 장도영이 결재를 미룰 때 장도영이 김일환 같은 사람들을 정보부에 심으려고 한다는 판단을 하여 일종의 선제 공 격을 한 것이다. 장도영은 박정희를 불러 "그 사람들을 구속하는 것은 나를 구속하는 것과 같으니 내 얼굴을 봐서도 풀어달라"고 하여 김일환 등은 3일 뒤 석방되었다. 김종필은 김일환과 정보국에서 함께 근무하여서 그를 잘 알고 있었 다. 그에 대해서 '대단한 추진력을 가진 인물'이라고 평했다. 그만큼 큰 위협을 느끼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김일환 구속 사건은 박정희와 장 도영을 더욱 멀리 갈라놓는 단초가 된다. 김일환 등은 석방된 뒤에도 박정희 세력이 장도영 장군을 거세하려고 한다는 불평을 하고 다닌 혐 의로 또 구속되어 재판에 넘겨졌다. 박정희의 법정증언. "(그들은) 장도영이 참모총장직을 놓으면 허수아비가 될 염려가 있 다, 다른 것은 다 제쳐놓고라도 군의 실권만은 자기들이 쥐겠다 등등 별별말을 다하고 돌아다니면서 육군의 실권만 쥐고 있으면 자기들 마음 대로 된다는 생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만일 장도영측이 군을 장악하 였더라면 멀지 않은 장래에 유혈사태가 생길 뻔하였다.". 군상층부에서 권력투쟁의 양상이 보이기 시작할 때인 6월3일 오후 4시부터 1시간30분 동안 박정희 부의장은 대구 매일신문 서울분실 정경 원 기자와 단독 회견을 가졌다. 5월23일에 외신기자들과 회견한 이후 처음이었다. 최초의 단독 인터뷰를 대구에서 발행되는 신문과 한 것은 고향에 대한 배려인 것처럼 느껴진다. 박정희의 인간성이 솔직하게 드 러나는 인터뷰 기사의 전문은 이러했다. <기자=오늘은 동향의 선배를 대하는 마음에서 좀 터놓고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대구 청수원아주머니의 안부도 전해드리고요. 박정희=좋습니다. 청수원 아주머니한테는 신세도 많이 졌는데 편지 라도 한 장 해주어야겠는데…. 또 취재하러 왔소?. 나는 고향 친구라기 에 이야기나 좀 하고싶었는데. 기자=박 장군이 군사혁명을 결심한 동기는?. 박정희=과거 25년간에 걸친 군인생활을 통해서 나는 누구보담도 군이 정치에 관여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해왔습니다. 그런데 기성 정치인들에 게 정치를 맡겨놓으니까 꼭 망할 것만 같았어요. 아, 그래 국가 민족이 망해가는 판에 군이라고 정치에 불관여한다는 원칙만을 고집할 수 있겠 소? 그래서 최후 수단을 쓴 것뿐입니다. 기자=이 정권하에서도 군사혁명의 기운이 있었다는데 이번 5·16혁 명의 직접적 동기를 좀…. 박정희=하기야 이승만 정권 때도 3·15부정선거를 계기로 흥분한 일 부 영관급 장교단이 들고나서려고 했는데 아시다시피 4·19혁명이 일어 나 학생들에게 맡긴 셈이지요. 그건 그렇다 하고 이번 군사혁명의 직접 적인 동기야 여러분이 다 아시다시피 장 정권이 국민의 뜨거운 염원을 팽개치고 무능과 부패로 일관해서 도저히 그들로서는 긴박한 위기를 타 개할 힘이 없다고 단정했기 때문입니다. 첫째 국민을 기아로 몰아넣은 그들의 무능도 무능이려니와 장면씨의 리더십이란 게 말이 아니었거든 요. 사실 혁명구호에도 있지만 이북 공산당의 간접 침략은 눈에 보일 정도였고 부패와 무능으로인한 경제파탄은 결국 국민을 극도의 불안과 부황증으로까지 몰아넣지 않았소. 이래 가지고야 군대인들 안심하고 국 토방위에만 전념할 수 있었겠소? 아닌 게 아니라 이러다간 1년 후에는 공산주의가 시골 농촌까지 침투할 것이라고 나는 분명히 판단했소. 기자=간접침략을 분쇄하자는 혁명구호를 내걸 만큼 장 정권은 반공 에 무력했던가요. 박정희=무력 정도가 아닙니다. 놀라지 마시오, 망할 놈들. 허, 이번 에 조사해보았더니 붉은 마수는 이미 장 정권의 장관급까지 뻗치지 않 았겠소(흥분한 박 소장의 두 눈에는 순간 불꽃이 인다). 기자=아니 그게 정말입니까?(어안이 막힌 기자는 숨을 죽이고 박 장 군의 입만 지켜본다). 박정희=그 선우종원(전 조폐공사사장)이란 놈하고 김영선(전 재무장 관)김선태(전 무임소 장관) 같은 자가 일본의 조총련을 통해서 공산당 의 지령과 공작금을 받은 사실이 드러났으니 더 말해서 뭘 하겠소. 더 구나 선우란 놈은 간첩임을 자백하고 '목숨만 살려달라'고 애원했어.이 따위 놈들이 정권을 맡았으니 백성이 살 게 뭐요? 2,3일 후에는 사건 전모를 공표하겠지만 그밖에도 나는 감투와 돈과 이권에눈알이 뒤집힌 그들의 흑막을 낱낱이 천하에 공개할 방침이오.>. 박정희가 말한 반공검사 출신 선우종원씨 관련 간첩 사건은 조작된 것으로 판명된다. |
[박정희 생애] 제10부 혁명아의 24시 (37) -- <308>고향으로 띄운 편지 .<기자=그런 어마어마한 간첩 사건을 장 정권이 몰랐단 말입니까. 박정희=천만에, 경찰은 이미 사건을 인지했지만 압력에 눌려 흐 지부지 해버렸다니 기가 막힌 일이 아니오? 여북하면 미국에 가 있 는 최경록 장군 같은 분은 재미 유학생들이 그곳에서 영주하려 한 다고 전해왔겠소?. 기자=박 장군의 가정환경을 좀…. 박정희=신당동에 집 한 칸 있는데 처하고 열 살, 일곱 살 나는 기집애 둘, 네 살짜리 머슴애 하나뿐입니다. 재혼해서 모다 어리지 요, 허(박 장군은 처음으로 웃었다). 기자=군사혁명 전후의 사정을 이야기해줄 수 없습니까?. 박정희=다 지나간 얘기인데 참가부대는 다 알 거요. 알려달라고? 30사단, 33사단, 공수전투대, 해병제1여단, 6군단 포병…. 서울서 행동한 주류부대는 이 정도고 이밖에 대구 부산 광주 논산훈련소 청주(37사단) 등 후방부대와 1부 야전군 사단에서도 호응을 약속했 습니다. 최초의 계획은 작년 12월부터지요. 그땐 영관급 장교들이 열렬했고 2군 참모장이던 이주일 장군의 협력도 많이 받았지요. 기자=도중에 정보가 새었다는 말도 있었는데…. 박정희=일부 정보가 새어서 초조할 때도 있었지만 나 자신은 군 사혁명을 결심했을 때 이미 죽을 각오가 되어 있었소. 물론 우리 동지들은 이번 거사에서 만일 배신한 자가 있으면 극형에 처하도록 서약했었소. 사실 까놓고 말하자면 내가 실패했더라도 후회는 안했 을 거요. 내 뒤를 이어 제 2, 제3의 혁명은 당연히 예기할 수 있었 으니까요. 기자=정보는 왜 새었습니까?. 박정희=글쎄 한 놈이 배신했기 때문에 약간 당황했지만 미군계 통은 장도영 중장이 잘 커버했지요. 기자=아슬아슬한 에피소드가 있으면?. 박정희=12일의 거사계획이 정보누설로 실패하고 13일 전혁명군 에 16일 오전 3시에 행동하도록 지시를 완료했소. 사실은 정보가 새었기 때문에 예정보다 1시간 늦었고 한강에서는 헌병들과 본의 아닌 교전까지 있었지요. 예정대로 됐다면 장면이도 장관들도 모조 리 내 손으로 잡아넣는 건데…그때 지휘위치가 어디냐고요? 6관구 사령부였소. 기자=박 장군이 가진 신조는?. 박정희=나는 군인이니까 국가에 충실하게 봉사하겠다는 일념뿐이 지요. 아무리 썩고 혼탁한 세상이지만 올바르게 살아보겠다는 신념 은 굽히지 않았지요. 기자=실례가 되면 양해해주십시오. 항간에선 박 장군을 아주 냉 혹한 군인으로 알고 있는데…. 박정희=허, 그건 너무한데요. 사귀어 보이소, 그렇게 냉정한 사 람은 아닐 겁니다. 하기야 나는 5·16전에 많은 사회단체와 사회인 들과 접촉해보았지만 다 그렇다는 건 아니지만 그들은 거의 도둑질, 협박같은 얘기에만 열심이었어요. 그래서 나는 되도록 그들과 절연 하게 되었지요. 청탁, 부탁 같은 것을 이 사회에서 없애자는 게 내 신념이고, 인간혁명이란 말도 있는데 요새도 나한테 부탁오는 사람 도 있으니 곤란합니다. 아직도 정신이 덜 난 모양이지요?. 기자=박 장군의 취미는?. 박정희=영화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습니다. 사색하거나 사서 읽는 걸 좋아합니다. 어떤 책을 좋아하냐고요? 각국의 혁명사를 좀 읽었 는데 그것도 역사서적에 들어가나요? 요즘은 경제공부도 좀 합니다. '나의 투쟁'이란 영화(히틀러의 일대기를 다룬 기록영화)를 봤냐고 요? 대구서 영화도 보고 책도 읽었지요. 기자=양담배를 피워본 적은?. 박정희=5·16전에는 나도 양담배를 피웠지요. 혁명 후에는 딱끊 었소(이렇게 말하고는 피우다 남은 아리랑 담배 꽁초에 불을 붙이면 서 "담배는 하루에 이 놈을 두 갑 피운다"고 픽 웃는다). 기자=구정권때의 국회의원에 대해서 옥석을 구분할 용의는?. 박정희=부패 부정한 정권과 이에 동조한 자는 다시는 출마를 못 하도록 법령으로 만들어놓고 군도 물러나야겠소. 이 문제는 더 연구 해봐야겠지만 옥석은 가려야겠지요. 기자=참신하고 양심적인 정치인은 어디다 기준을 두고 있나요?. 박정희=어쨌든 앞으로 보다 깨끗하고 애국하는 젊은 세대가 나와 야 할 것입니다. 기자=항간에는 국가재건최고회의 인사가 어쩌면 너무 이북계에 치 우친다는 오해도 있는 모양인데. 박정희=우리에겐 그런 편협한 지역관념은 없소. 사실 이번 혁명에 는 이북출신 동지들이 보다 많이 참가했으니까요. 기자=박 부의장이 부정의 온상이란 국회의사당에 들어온 첫 느낌 은?. 박정희=이 방이 누구 방인지는 몰라도 처음 왔을 땐 확 불을 지르 고싶은 분노가 앞섰지만 국가재산이 아까워서 참았소. 어쨌든 언론인 여러분 잘 부탁합니다.>. 이 인터뷰 이틀 뒤 박정희 부의장이 구미면장 장월상 앞으로 보낸 친필 사신이 전한다. 장월상은 박정희와 함께 구미보통학교를 다닌 동기생이기도 했다. <조국과 민족의 이 절박한 현실을 눈으로만 보고 있을 수 없어서 일사봉공 애 지성에 불타는 젊은 청년 장교들과 국군장병들의 구 정 신이 발화점에 도달하여 궐기한 것이 5·16군사혁명이었습니다. 5월 12일 최후의 결심을하고 상경하는 도중 금오산 상공을 통과하면서 그 리운 고향산하와도 작별하고 지나갔으나 천우와 신조가 우리를 버리 지 않았고 삼천만 동포들의 염원이 무심치 않아서 금번 혁명대업이 성공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4천년 역사를 통해서 누적된 적폐와 악들을 완전히 발본하고 자손만대 행복과 복지를 누릴 수 있는 조국 대한민국의 굳건한 토대를 닦아야 되겠다는 것이 우리들 혁명군 장병 들의 일념입니다. 이 민족적인 대과업은 한두 사람의 노력으로는 안 될 것이며 군인들의 힘만으로써도 성취할 수 없을 것입니다. 전국민 이 일치단결하여 이 거대한 민족적인 사명완수에 총진군하는 길만이 성공의 유일한 첩경일 것입니다. 우리들은 생사를 초월하고 목숨을 걸고서 기어코 이 과업을 완수하고자 합니다. 고향에 계신 여러분,우 리들도 남과 같이 잘 살 수 있고 행복할 수 있습니다. 우리들의 정신 과 노력으로써 이것은 가능한 것입니다. 앞날의 영광스럽고 찬란한 조국건설을 위해서 우리들은 분발합시다. 우리들 후손들이 행복하게 살 수있게 하기 위해서 우리들 대는 희생을 하고 노력을 해야 하겠습 니다.>. [박정희 생애] 제10부 혁명아의 24시 (38) -- <309>선우종원 .사진설명 : 일본 망명생활을 끝내고 귀국할 때의 선우종원. 선우종원은 1952년 장면이 이승만 대통령 밑에서 국무총리로 있을 때 그의 비서실장이었다. 이승만이 이 해 여름 부산 정치파동을 일으켜 직선제로의 개헌을 감행하자 일본으로 밀항하여 8년간 망명생활을 하다 가 4·19혁명 뒤 돌아왔었다. 그는 조폐공사 사장으로 있으면서 장면 총리의 가까운 정치 참모 역할을 했다. 박정희 일파가 쿠데타를 모의하 고 있다는 정확한 정보를 입수하여 총리에게 보고한 적도 있었다. 장 총리는 이 정보를 장도영 육군 참모총장에게 넘겨 조사를 지시했다. 장 도영은 선우씨에게 전화를 걸어 "그런 정보가 있으면 나한테 먼저 알려 주어야지"라고 항의한 뒤 "도대체 누가 제보자입니까. 나도 모르는 그 런 정보를 알다니"라고 불평했다. 장도영은 5·16쿠데타가 터지기 며칠 전에도 선우종원과 만나 식사를 같이 했다. 5월16일 아침 혁명방송을 들었을 때 선우종원은 장도영이란 이름이 혁명지도자로 발표되는 것에 기가 막혔다. "난 장도영 총장을 믿소. 그는 내게 생명을 바쳐 충성하겠다고 다짐 까지했소." "도대체 그럴 수가 있습니까. 제가 쿠데타 음모를 꾸미다니요? 선우 형, 섭섭합니다.". 선우종원의 귀에는 장 총리의 확신에 찬 목소리와 장 총장의 항의하 는 목소리가 겹쳐서 들려왔다는 것이다. 5월17일 오후 선우종원은 장도 영총장의 공관을 찾아갔다. 부관의 연락을 받고 달려온 장도영은 선우 종원을 보자마자 지휘봉과 모자를 집어던지고는 돌아앉아 큰 소리로 울 더란 것이다(회고록 '격랑 80년'에서 인용). 울고난 장도영은 이런 말을 하더란 것이다. "이건 민주당 정권이 정치를 잘못하여 나라를 걱정하는 젊은 장교들 이 박정희 장군을 내세워 구국일념으로 일어선 것입니다.". 선우종원은 끓어오르는 분노를 꾹 참으면서 가장 궁금한 점에 대해 서 물어보았다. "그런데 박정희 장군은 빨갱이라고 하는데 그게 사실입니까?. 그렇 다면 우린 그의 손에 죽어야 합니까?" "그건 잘못 알려진 사실입니다. 그는 나이도 젊고 청렴해 부하들의 신망이 두터운 양심적인 군인입니다. 물론 사상도 건실하지요.". 선우종원은 장도영의 견장을 툭 치면서 "장 장군은 세 가지를 잘못 한 것같소"라고 한 뒤 욕을 퍼붓고는 "조심하시오"라고 충고한 뒤 나왔 다. 그 며칠 뒤 동향선배인 이용운 전 해군참모총장이 선우종원에게 전 화를 걸었다. "지금 장면 총리 측근들을 반혁명으로 몰아 잡아들이려는 모의가 진 행중이오. 빨리 피하시오.". 5월24일 선우씨는 헌병들에 의해서 연행되었다. "누구 명령인가"하 고 물으니 헌병들은 "장도영 장군의 명령입니다"라고 하더란 것이다.선 우종원은 반혁명 사건으로 사형 구형에 징역 5년형을 선고받은 뒤 서대 문 교도소에 수감되었다. 여기서 그는 또 다른 반혁명사건에 연루되어 구속된 장도영을 만났다. 2년3개월간의 옥살이를 하고 나온 그는 박정 희와 친해졌고 국회사무총장이 되어 여의도 의사당의 신축을 지휘했 다. 반전과 역전이 일상화한 한국 현대사의 정치무대, 그곳의 한 증언 자인 선우종원의 사례가 이젠 흘러간 옛 이야기가 된 것인지도 확실하 지 않다. 5·16혁명이 성공한 뒤에도 좌익혐의로 시달리고 있었던 박정 희는 반공 검사의 대표격인 선우종원을 간첩으로 몰아 좌익수사에 대한 국민들의 인식을 혼란시킴으로써 자신에게 씌워진 의심을 벗어던지고 싶어했던 것이 아닐까. 권력이 인간적 의리와 이념적 소신, 법치의 원 칙을 파괴해가는 현상은 민주화 시대에도 해결해야 할 문제로 남아 있 기 때문이다. 선우종원에게 피신할 것을 권했던 이용운은 박정희가 존경해마지 않 았던 이용문 장군의 친형이었다. 이용운도 며칠 뒤 혁명정부에 의해서 군부 숙청의 일환으로 구속되었다. 이용문 장군의 미망인 김 여사는 큰 아들 이건개(당시 서울법대 재학중)를 데리고 박정희 부의장을 찾아갔 다. 두 사람이 부의장 방에 들어섰을 때 박정희는 전투복을 입은 채 창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박정희는 몸을 돌렸다. 이 때 이건개는 깜짝 놀 랐다. 지금 자민련 국회의원인 그는 이렇게 묘사한다. "그분의 얼굴에서부터 무릎까지 장풍과 같은 살기가 일종의 막처럼 덮여있었어요. 나는 그때 중국 무협소설을 읽고 있었어요. 문득 사람이 독한 마음을 먹고 정신을 집중하면 장풍이 생기는 모양이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머니와 저에게 의자에 앉도록 권한 박 장군은 아주 심각 한 표정이었습니다. 말씀하시는 도중에도 살기의 막이 없어지지 않고 들락날락하더군요.". 김 여사는 구속된 이용운 장군의 선처를 부탁했고 박정희는 혁명에 대한 여론과 학생들에 대한 반응을 물어보았다. 박정희는 이렇게 이야 기했다. "우리 군인들이 정치를 뭐 깊이 압니까. 단지 애국충정에서 나라의 기강을 바로잡아야겠다는 일념으로 이용문 장군과 논의하던 대로 목숨 을 걸고 혁명한 것입니다.". 김 여사가 "건개 아버지 생존시에 누차 강조하시던 말씀을 잘 알고 있습니다"라고 받았다. 박정희는 갑자기 옛날 생각이 났는지 무서운 표 정을 풀면서 웃었다. 그 순간 얼굴을 아지랑이처럼 가리고 있던 살기가 사라지더란 것이다. 박정희는 "이번에 혁명을 주도한 장교들은 모두 이 용문장군을 존경하고 있습니다. 이 장군 생존시에는 여러 번 구국의 방 법에 대해서 의논한 적이 있습니다"라고 말하면서 잠시 추억에 젖었다. 박정희가 이 때 살기를 느끼게 할 만큼 독한 결심을 하고 있었던 것은, 자신이 여러 번 신세를 졌고 은혜를 입었으나 지금은 경쟁자가 되고 있 는 장도영의 처리 문제였을 것이다. [박정희 생애] 제10부 혁명아의 24시 (39) -- <310>조기 민정이양론의 대두 .<정권이양은 사회 각 분야의 개혁이 성공적으로 단행되어 북괴의 경 제력을 압도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된 후가 될 것이다.>. 심흥선 공보부장도 기자들에게 "현 내각이 바로 과도정부"라면서 "민 간인으로 구성되는 또다른 과도정부를 구성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이날 오후 윤보선 대통령은 월례기자회견에서 정권이양이란 상당히 민감한 분야에 대해서 언급했다. 그는 우선 "조속한 기간내에 정권을 민간정부에 이양할 것을 희망한다"고 했다. "정부형태는 대통령중심제 가 적절하지 않을까 생각한다"면서 "프랑스 드골 헌법을 참고로 해볼 만하며 양당제로 나가는 것이 좋겠다"는 견해를 피력했다. 윤대통령은 또 "질서를 회복하고 사회악을 전광석화(전광석화)와도 같이 제거하는 것을 국민들이 쌍수를 들어 지지하는 줄 믿는다"면서 "군정기간에 공산 당을 깨끗이 청소해 주어야겠다"고 주문했다. 윤 대통령은 군사혁명에 대해서 "올 것이 온 것이다"라고 말하고 이 렇게 덧붙였다. "다른 사람들이면 10년 걸릴 일들을 10일 동안에 해놓으니 찬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혁명정부는 윤 대통령의 기자 회견에 대한 불만을 이를 보도한 기자 들을 잡아넣는 식으로 표현했다. 회견 다음날 수사당국은 '조속한 정권 이양 필요'란 제목으로 보도한 동아일보의 김영상 편집국장, 정경부 이 만섭(뒤에 공화당 의원 역임) 기자가 연행되어 갔다. 6일엔 직접취재를 했던 이진희(문공부 장관 역임) 기자가, 7일엔 조용중(연합통신 사장 역임) 차장이 연행되었다. 이는 정권을 장기간 장악하여국가개조를 하 겠다고 나선 혁명파 장교들이 조기 정부 이양을 요구하는 윤 대통령과 이에 동조하는 장도영 최고회의 의장에 경고하려는 뜻을 내비친 것이다. 서른 일곱 살의 김종필 중령(그는 혁명 성공 직후 현역으로 복귀했 다)이 중앙정보부장으로서 언론 앞에 공식적으로 등장한 것은 6월5일 오후였다. 최고회의 본회의실에서 그는 내외신 기자들을 모아놓고 5·16 혁명 비화를 털어놓고 혁명 정책의 기조를 밝히는 등 실력자로서의 면 모를 과시했다. 그는 혁명비화를 설명하면서 4·19혁명 직후의 8기생 중심 정군 운동을 뿌리로 하여 이야기를 전개해나갔다. 그는 "박정희, 장도영 장군은 올해 3월에 가담했다"고 하는가 하면 "특히 장도영 총장 은 정보가 누설될 때마다 잘 커버해주었다"고 했다. 듣기에 따라서는 자신이 혁명의 총기획자이고 박정희는 추대되었을 뿐이란 느낌을 줄 정 도였다. 김 부장은 또 "혁명공약, 초기의 포고령, 국가재건최고회의란 명칭은 내가 기초하여 박정희 장군의 수정을 받은 것이다"고 말하고 "혁명을 구상함에 있어서는 (장준하가 발행하던 월간잡지) '사상계'를 많이 참고했다"고 했다. 그는 이어서 "원래는 내각을 구성할 때 45세 이하로 하려고 했었다"고 말하고 경제정책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궁극적인 목표는 자유시장경제 체제이지만 거기에 이르기까지, 또 혁명직후의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서 일정 기간은 계획경제의 단계를 거 쳐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국정의 전반에 대한 30대 젊은 장교의 소신 피력은 많은 기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김 부장은 "이번 혁명을 성공시키는 데 든 자금의 총액은 860만 환에 불과하다"고 털어놓아 기자들을 웃겼다. 그는 박정 희 장군이 자신의 처삼촌임을 공개하기도 했다. 임시헌법인 국가재건비상조치법이 공포되고 장도영 의장이 국방장관 과 육군참모총장직을 내놓고 박정희 부의장이 최고회의 상임위원장을 겸직한 것이 6월초, 이는 장도영의 무력화를 의미했다. 새로 육군총장 에 임명된 김종오 장군과 송요찬 국방장관은 박정희-김종필 세력에게 도전할 사람들이 아니었다. 두 사람 모두 혁명주체 젊은 장교들에게는 한때 정군 대상으로 여겨졌던 인물이었다. 혁명주체 세력안에는 장도영 의 처지를 동정하는 장교들은 몇 있었으나 그를 지지하거나 충성을 맹 세할 장교는 한 사람도 없었다. 장도영 자신도 박정희와 김종필의 독주 에 불평을 할 정도였지 지지세력을 규합할 권력의지가 없었다. 실권없는 최고회의 의장 장도영은 조기계엄해제, 조기민정이양, 과 격한 농어촌 고리채 정리의 완화, 무리한 부정축재처리의 완화 등을 주 장하는 등 온건한 조치를 강조했으나 그때마다 청년장교들에 의하여 무 시당했다. 6월8일 그는 박정희 부의장을 불러 "나는 의장직을 물러나겠 다"고 선언했다. "최고회의 의장은 계엄사령관인 육군참모총장이 맡아야 합니다.". 장도영은 그러고는 중앙청 총리실에서 기거하면서 내각수반직만 수 행하기 시작했다. 총구로써 정권을 탈취한 군인들은 차츰 사회가 안정을 되찾으면서 새 로운 논리가 적용되는 시대가 전개되고 있음을 느끼기 시작한다. 대강 그기점은 5월18일이었다. 이석제 중령은 정권 탈취가 일단락된 날의 감 회를 이렇게 적었다. <5월18일 아침, 나는 참으로 오랜만에 여유 있는 마음으로 육군본부 뜨락을 산책했다. 나뭇가지에서 파란 새싹이 돋아나는 모습, 풀 한 포 기의 생명력에 가슴벅찬 희열을 느꼈다. 산천초목이 그토록 아름답고 신비로울 수가 없었다.>. 새로운 정권도 새로운 생명체처럼 새로운 생리와 조건을 가진다. 18 일까지가 정권을 물리력으로 뒤엎는 혁명의 시간대였다면 그 뒤로는 국 가관리의 시간대였다. 혁명의 시간대엔 돌파력과 결단력을 가진 사람들 이 필요했지만 관리의 시간대에선 관리-경영능력이 필요했다. 김종필, 이석제,오치성, 장경순 같은 장교들이 그런 관리능력의 소유자로서 달 라진 무대에서도 계속해서 영향력을 유지해간 사람들에 속한다. 머리는 없고 용기만 있었던 장교들은 새로운 시대에 적용하지 못하고 밀려나고 도태되었다. 대한민국을 접수하여 장관직에서 경찰서장 자리까지 주요 직책을 거의 몽땅 차지한 군인들에겐 또다른 경쟁시대가 열린 것이었다. |
[박정희 생애] 제10부 혁명아의 24시 (40)......(311)# 무식한 사람과 무능한 사람 #."각하, 제가 농림부장관이지요?" "그럼 당신이 농림부장관이 아니면 누가 장관이오." "그러면 하루라도 소신껏 하겠습니다." "그렇게 하시오.". 장 장관은 전 직원들을 집합시킨 뒤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나는 이 시각 이전의 문제는 일체 불문에 붙이기로 하였습니 다. 내 전임자는 여러분들을 지금 그 자리가 최적의 자리라고 생각하 고 임명했을 것입니다. 처음 부임한 내가 아무것도 모르고 인사 이동 을 시키지는 않을 것입니다. 아무쪼록 소신대로 일해주십시오 . 나하 고 근무할 수 없는 사람은 딱 두 종류 뿐입니다. 첫째는 무식한 사람 입니다. 자기 할 일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면서 남의 일에 간섭하는 사람이 바로 무식한 사람입니다. 앞으로 자기가 맡은 일 이외에 대해 서는 나에게 이야기하지 마시오. 남의 이야기를 나에게 하는 사람은 내가 즉각 해임시키겠습니다. 둘째는 무능한 사람입니다. 자기 맡은 일도 못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무식하고 무능한 사람은 나와 함께 일 할 수가 없습니다. 농림부는 너무나 할 일이 많습니다.오늘부터는 토 요일도, 일요일도 없습니다.". 과거를 불문에 붙이겠다고 하니 약점이 많은 공무원들은 안심하 고 '죽자 살자 일을 했다'는 것이다. 장경순은 박정희 부의장에게 이 런 보고를 올렸다. "우선 농어촌 고리채를 정리해 주어야겠습니다. 또 하나는 묘지 문제입니다. 논이고 밭이고간에 묘지 천지입니다. 이래 갖고는 농사 가 안됩니다. 묘지도 이 기회에 정리해야겠습니다." "고리채 정리는 옳은 일이지만 묘지 이야기는 잘못 꺼냈다가는 혁명정부가 견딜 수 없을 거요. 나도 생각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 문제는 차후에 의논합시다.". 장경순은 8기 특별기 출신이자 한때 전북중학교에서 함께 교편을 잡았던 적이 있는 김기봉 중령을 장관 특별보좌관으로 임명했다.김기 봉(현재 77세)은 군인의 눈으로 본 당시 공무원 사회의 실상을 이렇 게 회고했다. "당시 공직사회에는 대학졸업자도 많았지만 그들이 배운 지식은 잘 실천되지 않고 있었습니다. 저는 귀납법과 연역법을 군대에서 배 웠습니다. 정보 수집을 하여 적정 판단을 내리는 과정은 귀납적입니 다. 몇 가지 상황을 상정하고 그 중 하나를 고르는 과정입니다. 이것 이 행정 실무에도 그대로 적용되고 있었습니다. 그와 반대로 하나의 정책을 세워 놓고 그 목표를 달성해가는 과정은 연역적입니다. 군의 작전계획 등 모든 계획이 연역법의 논리에서 파생된 행정 기법입니 다. 민간분야의 낙후성은 놀랄 일도 아니었습니다. 장교들은 미국 유 학을 다녀와서 선진화되어 있었던 반면에 민간분야는 그런 행정-경영 교육을 받을 기회가 없었습니다. 한국군은 미국의 우수한 행정학자들 이 모여 만든 군사행정기법을 전수받아 이를토대로 전쟁을 치르고 양 병을 해가던 시절입니다. 보고서를 작성해도 일목요연하게 강조할 부 분을 제목으로 뽑곤 했지만 농림부에 와 보니 온통 미사여구로 장식 된 문장 속에서 무엇이 강조되고 있는지 알기 힘들었습니다. 타자기 를 활용하지 못하고 먹지를 밑에 받치고 쓴 복사문건들은 바래져 무 슨 글자인지도 모를 지경이었습니다. 우선 타자기를 보급하고 배우도 록 권장하기 시작했습니다.". 장관들은 내각회의를 하기 전후에는 박정희 부의장에게 들려 보고 를 하곤 했다. 박정희는 꼼꼼한 것까지도 따져묻는 바람에 업무가 폭 주했다. 이석제 최고회의 법사위원장이 건의했다. "각하, 사소한 것들은 내각에 일임하시죠. 그 시간에 다른 큰 일 을 하시거나 좀 쉬십시오." "알아. 내가 지금 업무를 파악하느라고 그래.". 박정희는 착실한 학생처럼 국정을 공부해가기 시작한 것이다. 박 정희의 이런 자세는 다음해를 넘기면서 풀어지는데 그때 쯤이면 국정 의 흐름을 대강 파악한 단계로 접어드는 것이다. 박정희는 장기 집권 때문에 죽기 전에는 국토개발등 국정 전반을 한 손에 잡은 것처럼 환 하게 파악하여 장관들의 기를 죽이곤 했었다. 실정법의 질서를 무너뜨린 군사정권이 건국 뒤 가장 큰 법률정비 를 단행하여 우리나라의 법치에 실질적으로 기여하게 된 경위는 이러 하다. 최고회의 법사위원장 이석제는 군정을 뒷받침할 입법활동을 하 다가 깜짝 놀랐다. 대부분의 법령이 우리말로 번역되어 있지 않고 조 선총독부 시절에 쓰던 일제의 법령과 미 군정법을 그대로 쓰고 있었 다. 광복된 지가 16년, 한글전용법이 만들어진 것이 1948년인데 자기 나라말로 된 법령집이 없다니 이게 무슨 주권 국가인가 하는 한탄이 나왔다는 것이다. '대한민국을 일본어와 영어로 된 법률로 다스리다 니…'하는 울분이 솟은 이석제는 즉시 개혁에 들어갔다. 박정희 부의장에게 실정을 보고하니 깜짝 놀라는 것이었다. "지금까지 대한민국을 조선총독부의 법률로 운영해왔단 말인가. 나 라가 어찌 되려고 이 모양이었던가. 통탄할 노릇이군. 도대체 국회의 원과 정치가와 공무원들은 뭘 했기에…. 법사위원장은 이 일을 어떻 게 해결했으면 하오?" "때늦은 감이 있습니다만, 지금부터라도 모든 역량을 집중해서 명 실상부한 대한민국의 법령체계를 세워야 한다고 봅니다.". "작업이 방대할 텐데 무슨 수로 짧은 기간에 그 많은 법률을 고치 고 제정할 수 있겠소." "각하, 지금은 혁명상황입니다. 대한민국 통치의 근간이 되는 법 률체계를 제가 한번 만들어보겠습니다.". 법령 번역작업과 병행하여 우리 실정에 맞지 않는 일본법령을 폐 기시키고 필요한 법령을 새로 만들었다. 이를 위해 각 부처에 법무실 제도를 신설했다. 이석제는 장교시절 제대한 뒤 고시를 치려고 법률 공부를 해두었는데 그것이 이런 일대 개혁조치로 연결된 것이다. |
[박정희 생애] 제11부 국가개조 (1) -- <312>법령정비 작업과 전기 3사 통합 .사진설명 : 정래혁 상공부장관 혁명정부는 1961년 7월15일 법률 제659호로 구법령정리에 관한 특별 조치법을 제정하여 1962년 1월20일까지 정리되지 않은 구법령은 모두 실 효시킨다고 선언했다. 정부는 기존의 법령정리위원회를 개편하여 내각수 반소속으로 두고 내각사무처장을 위원장으로 했다. 정부는 6개월의 시한 을 정해두고 각 부처에서 만들어 올린 법령안을, 국회기능을 대신하고 있던 최고회의에 올려 신속하게 통과시켰다. 5·16전까지의 13년간 정리 된법률이 1백15건이었는데 혁명정부가 6개월간에 정비한 법률은 3백52건 이나 되었다. '법제처 50년사'는 이 작업의 의미를 이렇게 정리하고 있 다. <구법령정리사업이 1962년1월20일에 완료됨에 따라 우리나라는 독립 된 법치국가로서의 면모를 일신하였고 모든 법령이 헌법을 기본으로 하 여 그 하위법령으로서 법률, 대통령령 및 총리령, 부령이라는 법체계가 확립되었다.>. 혁명정부가 실시한 개혁 가운데 요사이 말로 하면 구조조정에 해당하 는 것이 전기 3사통합과 한전의 탄생이다. 혁명정부의 상공부 장관은 정 래혁 소장. 육본 군수참모부장을 거쳐 국방대학원에서 학생으로 공부하 던 중 장관으로 발탁되었다. 일본 육사에서 박정희보다 한 기 후배로 공 부한 그는 군내에선 명석한 두뇌의 소유자로 이름 나 있었다. 정장관이 맡은 상공부는 공업입국을 표방하게 되는 혁명정부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부서였다. 당시 많은 군인들은 공업화의 가능성에 대해서 회의적이었 다. 정 장관은 국장회의를 소집해 보고 반가운 얼굴을 만났다. 국방대학원에 다닐 때 강사로 나왔던 함인영 국장이 공업국장으로 일 하고 있었던 것이다. 함씨는 일반적인 비관론과는 다른 아주 낙관적인 강연을 하여 정 장관은 깊은 인상을 받았었다. "우리나라를 공업화의 불 모지라고 생각하면 오산입니다. 물론, 일본과 대만에는 뒤지지만 공업화 를 할 수 있는 싹이 있습니다. 운크라 원조자금으로 지은 한국유리, 동 양시멘트가 있고 미국 원조자금으로 지은 충주 비료공장도 있습니다. 이 런 시설들을 운영한 경험을 잘 살려서 우리도 한번 해볼 수 있습니다". 정래혁 장관은 간부들에게 말했다고 한다. "여러분들이 많은 계획을 세워서 책상 서랍속에 넣어둔 줄 압니다.지 금부터 그것들을 다 꺼내 햇빛을 보도록 합시다. 내가 밀어드리겠습니다". 당시 상공부의 4대 현안은 전기 3사통합문제, 중소기업 금고 설치안, 석탄증산, 그리고 공기업의 활성화였다. 혁명정부는 대부분의 공기업 사 장들을 장교들로 교체한 뒤 구조조정을 밀어붙이기 시작했다. 전력의 생산, 공급을 맡은 전기회사는 조선전기, 경성전기, 남선전기 로 분리되어 인력과 시설의 중복과 낭비적 운영이 심했다. 정부도 이런 폐단을 일찍 인정하고 1951년5월23일의 국무회의에서 3사 통합을 의결했 지만 민간주주들과 노조의 반대로 그 뒤 10년간 이루어지지 않았다.발전 설비 용량에 대한 발전율은 광복 전엔 55% 이상이었으나 광복 후엔 한때 11.7%까지 떨어졌다. 송배전 단계에서 발생하는 전력손실률은 41.7%나 되어 선진국의 세 배였다. 1959년말 현재 전기 3사의 누적 적자는 49억 환이나 되었다. 민주당 정권도 비능률의 화신처럼 된 전기 3사의 통합을 다시 추진하다가 군사혁명을 만났다. 정래혁 장관에 의한 통합작업도 군 사작전처럼 진행되었다. 먼저 전기 3사의 사장들을 군인들로 교체했다. 조선전기 사장엔 황인 성, 경성전기 사장엔 조인복, 남선전기 사장엔 김덕준을 임명했다. 이들 은 6월8일까지 노조를 해산하고 종업원 1천6백54명을 감축했으며 민간주 주들의 반발을 침묵시켰다. 6월21일까지 열번의 회의를 통해서 통합에 따른 사무처리를 마무리짓고 23일엔 최고회의가 한국전력주식회사 법안 을 의결, 공포함으로써 전기 3사는 해산되었다. 한전사장엔 9사단장 박 영준 소장이 임명되었다. 민간 정부가 10년이 걸려도 해결하지 못한 일 을 한 달만에 치러냈다. 통합에 의해 능률적인 조직으로 재탄생한 한전 은 그 뒤 공업화의 동력원을 공급하는 역할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게 된다. 6월18일자 조선일보엔 '5·16 이후의 농촌'이란 제목의 기사가 실렸 다. 사회부 목사균 기자의 경기도 용인지역 르포기사이다. 이 기사는<초 근목피로 연명해가던 보릿고개에서 군사혁명을 맞은 농군들은 '어려운 사람은 언제나 어렵게만 살아야 한다'는 지난날 자포자기했던 버릇을 버 리려고 꾸준히 일하고 있다>고 전했다. 또, <군복무경험을 가진 농민들 은 군인정신으로 무장되어 있어 지도만 잘 하면 물불 안가리고 일할 준 비가되어 있다>라고도 했다. <농민들은 혁명정부의 강력한 추진력에 감탄하고 있다. 게다가 40대 까지의 농군들은 거개가 '한번 한다는 것은 끝내 실천하고야 만다'는 군 부본연의 생리를 알고 있으며 철석 같이 믿고 있다. 이들은 군에서 명령 에 복종해야 강군이 된다는 것도 알았고 어떻게 해야 농민이 잘 살 수 있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러면서도 여간해서 말하지 않는 것이 농군의 생리이기 때문에 언제나 묵묵히 일하는 것만이 그들의 대표적인 생활태 도이다.>. |
[박정희 생애] 제11부 국가개조 (2) -- <313>![]() 부정축재 기업인 조사 .사진설명 : 훈시하는 부정축재처리위원장 이주일 소장 부정축재조사반은 일본에 머물고 있던 삼성물산의 이병철을 제외한 우 리나라 10대 기업인들을 포함한 11명을 모조리 구속하고 수사를 시작했 다. 국세청의 전신인 사세청 공무원으로서 이 조사단에 파견되었던 문병 항(현재 71세)은 이렇게 회고했다. "부정축재처리법에는 6개 항목이 있었는데 제2항은 '부정한 방법으로 30만불 이상의 정부 또는 은행 보유외환의 대부 또는 매수를 받은 행위' 로 되어 있었습니다. 이것은 원조 자금으로 들어온 외화를 둘러싼 부정 을 말합니다. 은행을 움직이는 정치인들이 압력을 행사하여 기업인들이 외화 대부를 받도록 해주었습니다. 이자율은 저리였고 상환기간도 장기 였기 때문에 물가상승률이 연 30%이던 당시엔 이 돈만 빌면 가만히 있어 도 돈을 벌 수 있었습니다. 이 돈은 떼먹어도 환수시킬 방법이 없었습니 다. 그만큼 추적조사기법도 정착되어 있지 않았고 외환관리라는 개념이 서있지 않을 때였습니다. 기업을 조사해도 현금 출납이 장부에 제대로 적혀 있지 않으니 책임을 물을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때 기업이란 것이 꼭 구멍가게처럼 운영되고 있었으니까요.". 김종필총리의 증언에 따르면 기업인들을 잡아가두는 계획은 그의 구 상엔 없었고 최고회의에서 추진한 것이라고 한다. "오히려 나는 실업인들을 활용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도둑질도 해본 사람이 하는 것 아닙니까. 한국일보 사장 장기영씨를 만났는데 '지금 최 고회의에서 실업인들을 잡아 가두려는 모양인데 이거 안됩니다. 극동해 운 남궁연씨를 만나보세요'라고 해요. 그래서 내가 밤에 남궁연씨 집을 찾아갔습니다". 남궁연은 이렇게 말하더란 것이다. "혁명은 잘했습니다. 혁명이 잘 되려면 실업인들이 참여해야 합니다. 경제활동은 경제인들 스스로 하도록 해야지 정부가 너무 관여하면 안됩 니다. 정치인들도 비록 부정부패한 사람들이 많지만 그들의 지혜와 경험 을 활용할수 있어야 합니다". 김종필은 최고회의가 실업인들을 구속한 다음날 박정희 부의장을 찾 아가 남궁연의 이야기를 전하면서 구속을 철회해달라고 밤을 새워가면서 설득했다는 것이다. "실업인들 말고 경제를 일으킬 사람들이 누가 있습니까. 경제에 대해 아는 사람을 모아보았자 학자들뿐이지 않습니까". 박정희는 처음엔 "최고회의에서 그렇게 결정한 건데 어쩌나"라고 하 다가 "나도 사실은 구속하는 데 동의하지 않았다"면서 "내일 처리하자" 고 하더란 것이다. 김종필은 일본에 가 있던 이병철에게도 "안심하고 들 어오라"는 연락을 취했다고 한다. 일본 동경에서 쿠데타 소식에 접한 이 병철은 이런 심경이었다고 한다. <사회변혁이 있더라도 미군이 주둔하고 있는 한 적화의 우려는 없을 것이다. 혁명이 일어남으로써 도리어 정국이 안정될지 모른다. 한편으로 는 착잡한 심경을 가눌 길이 없었다. 경제인 11명이 부정축재혐의로 구 속되었다고 한다. 그 중 한 사람이 "부정축재의 제1호는 동경에 있는데 우리들 조무라기만 체포하라는 것은 불공평하다"고 옥중에서 불평했다는 말이 전해졌다. 빈곤 때문에 사회혼란이 야기되고 있다. 그 빈곤 추방의 앞장을 서야할 경제인들을 차제에 잘 활용해야 할텐데 근본적인 해결책 은 등한시하고 무슨 목적으로 구속한 것일까>('호암자전'에서 인용). 일본 경시청은 이병철 사장의 신변을 보호하기 위해 형사들을 붙여두 고 있었다. 6월4일 재일거류민단의 권일단장이 이 사장을 찾아와서 최고 회의의 말이라면서 귀국을 권하고 갔다. 며칠 뒤엔 혁명정부가 파견했다 는 청년 두 사람이 '즉시 귀국하는 것이 신상에 이로울 것이다'는 말을 남기고 갔다. 삼성 동경지사에 연락하니 '본국에서는 사장님이 귀국하지 않아 모든 일이 수습되지 않고 구속된 경제인들도 귀국을 바라고 있습니 다'라는 말이 들렸다. 그는 최고회의 부정축재처리위원장 이주일소장 앞 으로 편지를 썼다. '호암자전'에 실려 있는 편지의 요지는 이러하다. <부정축재자를 처벌한다는 혁명정부의 방침 그 자체에는 이의가 없다. 그러나 백하무익한 악덕 기업인들과, 변칙적이고 불합리한 세제아래서도 국가경제재건에 기여하면서 국민들에게 일자리를 주어 생활을 안정시키 고 세금을 납부하여 국가운영을 뒷받침해온 기업인들과는 엄격히 구별되 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경제인을 처벌하여 경제활동이 위축되면 빈곤추 방에 역행하는 결과가 빚어진다. 나는 전재산을 헌납하는 한이 있더라도 그것이 국민의 빈곤을 해결하는 방법이 된다면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6월26일 밤에 항공편으로 동경에서 서울로 귀국한 이병철은 마중나온 중앙정보부 차량을 타고 명동 메트로 호텔로 갔다. 다음날 그는 중앙정 보부 서울분실장 이병희의 안내를 받고 박정희 부의장을 만나러 갔다.박 태준비서실장의 안내를 받아 넓은 방으로 들어가니 저쪽에서 검은 안경 을 낀 박정희가 걸어왔다. <박 부의장의 첫 인상은 아주 강직해보였다. 지도자로서의 덕망은 어 떨까 하고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는데, 검은 안경의 박 부의장은 "언 제 돌아오셨습니까. 고생은 되지 않았습니까"라고 안부 인사부터 했다. 의외로 너무나 부드러운 음성에 안도감을 느꼈다.>. [박정희 생애] 제11부 국가개조 (3) -- <314>박정희와 이병철의 대화 .<그는 부정축재자 11명의 처벌문제에 대한 나의 의견을 물었 다. 나는 부정축재 제1호로 지목되고 있는데 어디서부터 말문을 열 것인가,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박 부의장은 "어떤 이야기를 해도 좋으니 기탄없이 말해주십시오"라고 재촉했다. 어느 정도 마 음이 가라 앉았다. 소신을 솔직하게 말하기로 했다. "부정축재자로 지칭되는 기업인에게는 사실 아무 죄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박 부의장은 뜻밖인 듯 일순 표정이 굳어지는 것 같았다. 그러 나 계속했다. "나의 경우만 하더라도 탈세를 했다고 부정축재자로 지목되었 습니다. 그러나 현행 세법은 수익을 훨씬 넘는 세금을 징수할 수 있도록 규정되어 있는 전시 비상사태하의 세제 그대로입니다.이런 세법하에서 세율 그대로 세금을 납부한 기업은 아마 도산을 면치 못했을 겁니다. 만일 도산을 모면한 기업이 있다면 그것은 기적입 니다". 박 부의장은 가끔씩 고개를 끄덕이며 납득하는 태도를 보여주 었다. "액수로 보아 1위에서 11위 안에 드는 사람만이 지금 부정축재 자로 구속되어 있지만 12위 이하의 기업인도 수천, 수만명이 있습 니다. 사실은 그 사람들도 똑 같은 조건하에서 기업을 운영해왔습 니다. 그들도 모두 11위 이내로 들려고 했으나 역량이나 노력이 부족했거나 혹은 기회가 없어서 11위 이내로 들지 못했을 뿐이고 결코 사양한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어떤 선을 그어서 죄의 유무 를 가려서는 안될 줄 압니다. 사업가라면 누구나 이윤을 올려 기 업을 확장해나가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말하자면 기업을 잘 운영 하여 그것을 키워온 사람은 부정축재자로 처벌대상이 되고 원조금 이나 은행 융자를 배정받아서 그것을 낭비한 사람에게는 죄가 없 다고 한다면 기업의 자유경쟁이라는 원칙에도 어긋납니다. 부정축 재자 처벌에 어떠한 정치적 의미가 있는지 알 길이 없지만 어디까 지나 기업을 경영하는 사람의 처지에서 말씀드렸을 뿐입니다". 박 부의장은 그렇다면 어떻게 했으면 좋겠느냐고 물었다. 이렇 게 대답했다. "기업하는 사람의 본분은 많은 사업을 일으켜 많은 사람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면서 그 생계를 보장해주는 한편, 세금을 납부하 여 그 예산으로 국토방위는 물론이고 정부운용, 국민교육, 도로 항만시설등 국가운영을 뒷받침하는 데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른바 부정축재자를 처벌한다면 그 결과는 경제위축으로 나타날 것입니 다. 이렇게 되면 당장 세수가 줄어 국가운영이 타격을 받을 것입 니다. 오히려 경제인들에게 경제건설의 일익을 담당하게 하는 것 이 국가에 이익이 될 줄 압니다". 박 부의장은 한동안 내 말을 감동깊게 듣는 것 같았으나 그렇 게 되면 국민들이 납득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국가의 대본에 필요하다면 국민을 납득시키는 것이 정치가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한동안 실내는 침묵에 빠졌다. 잠시 후 미소를 띤 박 부의장은 다시 한번 만날 기회를 줄 수 없겠느냐고 하면서 거처를 물었다. 메트로 호텔에서 연금상태에 있다고 했더니 자못 놀라는 기색 이었다. 이튿날 아침 이병희 서울분실장이 찾아오더니 이제 집으 로 돌아가도 좋다고 했다. 다른 경제인들도 전원 석방되었느냐고 물었더니 아직 그대로라는 것이다. "그들은 모두 나와 친한 사람들일 뿐 아니라 부정축재자 1호인 나만 호텔에 있다가 먼저 나가면 후일에 그 동지들을 무슨 면목으 로 대하겠는가. 나도 그들과 함께 나가겠다"고 거절했다>('호암자 부'). 박정희는 최고회의 법사위원장 이석제를 불렀다. "경제인들은 이제 그만했으면 정신차렸을텐데 풀어주지" "안됩니다. 아직 정신 못차렸습니다". "이 사람아, 이제부터 우리가 권력을 잡았으면 국민을 배불리 먹여살려야 될 것 아닌가. 우리가 이북만도 못한 경제력을 가지고 어떻게 할 작정인가. 그래도 도라무통 두드려서 다른 거라도 만들 어 본 사람들이 그 사람들 아닌가. 그만치 정신차리게 했으면 되 었으니 이제부터는 국가의 경제부흥에 그 사람들이 일 좀 하도록 써먹자". 이석제는 박 부의장의 이 말에 반론을 펼 수가 없었다. 다음날 이석제는 최고회의 회의실에 석방된 기업인들을 모아놓고 엄포를 놓았다고 한다. 차고 있던 큼지막한 리벌버 권총을 뽑아들더니 책 상 위에 꽝 소리가 날 정도로 내려놓고는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나는 여러분들을 석방시키는 일에 반대했습니다. 그런데도 박 부의장께서 내놓으라고 하니 내놓습니다. 그러나 앞으로 원조물자, 국가예산으로 또다시 장난치면 내 다음 세대, 내 후배 군인들중에 서 나 같은 놈들이 나와서 다 쏴죽일 겁니다". 6월29일 아침 이병철 사장이 묵고 있던 메트로 호텔을 찾아온 이병희 정보부 분실장은 기업인들이 전원 석방되었다고 알려주었 다. 이병철도 홀가분한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갔다. 이병철은 중앙 공보관에서 기자회견을 자청한후 "국민을 빈곤으로부터 구하고 나 라를 공산침략으로부터 구하기 위해서모든 재산을 바치겠다"고 다 짐한 것으로 보도되었다. 4일 전에 일본에서 귀국했던 그는 "이런 의사를 작년 11월경에도 많은 친지들에게 전했으나 정부 당국에는 공식적으로 전달하지 않았으며 그 까닭은 부정 부패가 이승만 정 권 때보다 더 심해서 돈이 효과적으로 쓰여질 것 같지 않았기 때 문"이라고 했다. 그는 이어서 "군사혁명 이후 정부가 이 나라를 구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 자진해서 전재산을 혁명정부에 바치 겠다고 통고했다"고 밝혔다. 그는 여러 기업체에 불입한 재산의 총액은 약 1백50억환이고 그 가운데 37-38%가 개인재산이라고 했 다. 이 돈을 "전부 국가에 바쳐 재건에 쓰도록 하겠다"고 한 그는 "해외에 재산을 도피시킨 것은 없다"고 말했다. 박정희와 이병철의 만남은 조국근대화를 꿈꾸던 한 혁명가가 기업인들의 중요성에 대해 눈을 뜨는 계기를 만들어주었다. 가난 한 농민 출신이고 질박한 생활이 몸에 밴 박정희는 부자들에 대해 서는 생래적인 거부감을 가졌으나 그의 실용적이고 유연한 사고는 그런 기업인들을 부려서 국가를 부강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쪽으로 선회하게 만들었다. 박정희는 그러나 대기업이 대자본을 바탕으로 하여 권력에 도 전한다든지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려드는 것은 허용하지 않았다. 박정희 시대의 정경유착은 국가가 철저히 대기업을 통제하여 국가의 방향대로 몰고가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되었다는 점에서 후 대의 정경유착과 성격이 다르다. [박정희 생애] 제11부 국가개조 (4) -- <315>스코필드 박사 .사진설명 : 1963년경 서울 용산 육군교회의 예배에 참석한 박정희. 그의 왼쪽으로 전택부, 스코필드 박사. 박정희의 뒤에서 찬송가를 부르는 사람은 이후락, 그 뒤로 차지철의 얼굴이 보인다. 6월10일 현재 내무부 산하에서만 축첩, 즉 첩을 둔 공무원 5백10명 이 쫑겨났다. 이날 최고회의는 최고회의법, 중앙정보부법, 농어촌고리 채법을 공포하고 국가재건범국민운동본부장에 유진오 고려대 총장을 임명했다. 농어촌 고리채는 연 2할 이상을 의미하는데 채무자가 신고 하면 채권자에게 7년간 분할 상환하도록 규정했다. 인간관계가 고착된 농촌사회에서는 이 법의 취지대로 신고, 정리되기에 어려움이 있었다. 6월12일 오후 국가재건최고회의는 일곱명의 상임위원장을 임명했 다. 법제사법위원장에 이석제 중령, 내무위원장에 오치성 대령, 외무 국방위원장에 유양수 소장, 재정경제위원장에 이주일 소장,문교사회위 원장에 송찬호 준장, 교통체신위원장에 김윤근 해병준장, 운영기획위 원장에 김동하 해병소장. 최고 권력기구인 최고회의를 실질적으로 이끌어갈 상임위원장으로 해병대 장성이 두 사람 발탁된 것은 5·16의 성공에 결정적으로 기여 한 공이 인정된 때문으로 생각된다. 정부는 이날 미국 조지 워싱턴 대 학에서 공부하고있던 송요찬 전 육군참모총장을 국방장관으로 임명했 다. 송 장군은 4·19혁명 직후 박정희-김종필이 주동한 정군운동의 소 용돌이에 휘말려 육군총장에서 물러나 도미했었다. 그는 5·16거사 소 식을 듣자마자 혁명을 지지한다는 성명을 발표하여 외신을 통해 국내 에 알려졌었다. 혁명의 성공 여부가 확실하지 않을 때 태도를 분명히 한 그에 대해서 혁명주체들은 상당한 평가를 했던 것이다. 14일 발표된 통계에 따르면 미국의 1960년도 대외 원조액은 45억달 러인데 인도가 가장 많은 원조 수혜국이고 한국은 2억4,000여만달러로 서 2위였다. 이날 렘니처 미 합참의장과 맥나마라 국방장관은 미 상원 외교분과위원회에서 증언하는 가운데 "60만 한국군과 함께 근무하는 6 만5,000명의 주한미군은 1인당 7,000달러를 쓰고 있다"면서 한국에 대 한 군원의 계속을 옹호했다. 이날자 영자신문 '코리언 리퍼블릭'에 프랭크 W. 스코필드 박사(서 울대학교 수의학과 교수)의 기고문이 실려 화제가 되었다. 캐나다 사 람인 스코필드는 일제시대에 한국에 살면서 3·1운동 때 우리 편을 들 어 '34인중 한 사람'이란 별명을 얻었다. 특히 일제에 의한 수원 제암 리교회 학살사건을 조사하여 이를 해외에 알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분이다. 그는 4·19 혁명도 지지했었다. 박사는 코리언 리퍼블릭에 실린 기고문을 통해서 한국인에게 따끔한 충고를 해주었다. <한 나라가 건강해지려면 그 국민들이 정직해야 한다. 한국에서 민 주주의가 실패한 것이 아니다. 민주주의를 실천하려는 노력이 한번도 없었다. 오늘날 피동적으로 가해지고 있는 군대의 기강이 국민의 마음 속에 침투되어 그들의 마음속에 자발적인 도의정신으로 확립되는 날 한국에서 비로소 민주주의는 기회를 갖게 될 것이다. 오늘날 한국이 당면한 가장 어려운 문제는 정실인사, 휘발유 빼먹기, 깡패, 탈세, 병 역기피, 졸업장 위조 같은 부패를 숙청하는 일이다. 지금 한국을 통치 하고 있는 군인들이 계속하여 국민에게 정직과 검소와 기강의 모범을 보여주고 공정하고 올바른 행정을 하고 정실을 배격하고 만민을 균등 하게 대우한다면 이 비극의 땅은 명랑하고 즐거운 땅이 될 것이다.>. 당시 72세이던 스코필드 박사는 군사혁명이 무자비한 독재로 변질 되지 않을까 걱정하던 전택부(현재 84세·YMCA명예총재)에게 이런말을 하더라고 한다. "박장군은 농민의 아들이고 정직합니다. 그는 부정부패 몰라요. 그 리고 아주 강합니다. 한국의 마지막 희망이 여기에 있어요." 전택부는 일제의 탄압과 이승만 독재에 반대한 이 노인이 왜 박정희를 좋아하게 되었는지 몰랐지만 일단 그의 박정희관을 받아들여보기로 했다고 한다. 당시 전택부는 YMCA재건 작업을 주도하고 있었다. 어느날 스코필드 박사가 그를 부르더니 5달러를 쥐어주었다. 전택부가 "이러시지 않아 도 됩니다"라고 하자 스코필드는 "윤보선 대통령은 그동안 얼마나 지 원해주었습니까"라고 물었다. "돈을 주신 적은 없지요." "그럼 이승만 박사는?". "그 분도 돈을 주신 적은 없습니다." "오, 안되요. 돈 없는 사랑, 사랑이 아니오.". 박정희는 전택부에게 1백50만환을 보태주었다고 한다. 반골노인 스 코필드 박사는 그 뒤에도 박정희를 지지하면서 충고하는 한편 구 정치 인들을 비판하는 입장을 취한다. 6월15일 정부는 농업은행과 농협을 통합하라고 농림부에 지시했 다. 신용과 사업을 유기적으로 연결시켜야 농촌경제에 실질적인 도움 을 줄수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16일 정부는 주미대사에 정일권 전 육 군참모총장, 외무차관에 육군대령 출신의 외교관 이수영을 임명했다. 17일 오후 혁명정부는 영장없이 연행했던 3,000명 이상의 용공혐의 자 가운데 우선 혐의가 벗겨진 664명을 석방한다고 발표했다. 정부는 수사의 공정성을 기하기 위해서 육군방첩부대장 김재춘대령을 수사본 부장으로 하고 검찰과 경찰, 그리고 육본 법무감실을 참여시킨 중앙합 동수사본부를 설치했다고 발표했다. 6월17일 현재 지난 한달 사이 혁 명정부에 의하여 정리된 공무원들은 약 2만명에 달했다. 이날 내무부 는 공무원 정리요강 13개항을 발표했는데 정실채용, 불성실이란 사유 이외에도 '50세 이상의 고령자'가 정리대상에 포함되어 있었다. 5·16 만큼 광범위한 세대교체는 일찍이 없었다. 19일 혁명정부는 병역미필 자를 공직에서 추방하는 내용의 특별조치법을 의결했다. 이날 정부가 발표한 1960년12월1일 현재의 국세조사 결과 실업자는 전체노동인구의 약 16%인 23만명으로 나타났다. 혁명정부는 실업자직 업능력신고를 받도록 했는데 8만6,000명밖에 신고하지 않았다. 이런 낮은 신고율은 당시에 '실업자들을 모아 농번기의 농촌에 노력봉사인 원으로 투입한다'는 뜬 소문이 퍼졌기 때문이다. 6월21일 혁명정부는 법원과 검찰에 대한 숙정을 확대하여 지방법원장급 이상 전판사와 검 사장급 전검찰간부들로 하여금 사표를 제출하도록 명령했다. |
[박정희 생애] 제11부 국가개조(5) -- <316>김종필과 이후락 .<(5·16뒤) 중앙정보부는 이후락 소장이 만든 중앙정보위원회를 흡수했다. 김종필 전 중앙정보부장의 보좌관을 지낸 바 있는 모씨는 조사관과의 인터뷰에서 중앙정보위원회가 미CIA와 밀접한 관계를 유 지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5·16이 나자 이후락은 부패혐의로 체포되 었다.체포의 진짜 이유는 그가 미국측과 너무 가깝다는 것이었다.몇 달 뒤 군사정권은 미국과의 우호관계를 돈독히 하기 위한 노력의 일 환으로서 미국의 요청을 받아들여 이후락을 석방했다. 이 보좌관에 따르면 미 CIA가 이씨의 석방에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고 한다>. 사진설명 : 박 대통령 비서실장 시절의 이후락(왼쪽) 김봉기(대한공론사 이사장, 유정회 의원 역임)는 김정렬 국방장 관 아래서 준장급 문관으로서 특별보좌관으로 일했기 때문에 이후락 및 혁명주체들과 친했다. 6월 초 그는 미도파 건너편에 있던 희다방 에서 우연히 김종필부장을 만났다. 김봉기는 이후락을 석방시켜달라 고 부탁했다. 김종필은 "며칠 안으로 석방될 거요"라고 하더니 "지금 대한공론 사 이사장 자리가 비어 있는데 기자경력이 있는 당신이 좀 맡아줘야 겠으니 이력서를 갖다 주시오"라고 하는 것이었다. 그때 대한공론사 는 정부 투자기업체로서 코리언 리퍼블릭이란 영자신문을 내고 있었 다. 김봉기는 며칠 뒤 이력서를 들고 김종필을 만나러 갔다. "국제호텔 자리에 있던 정글 바(Bar)로 갔더니 김종필은 안보이 고 한 구석에 이후락씨가 고개를 숙이고 앉아 있었습니다.반갑게 인 사를 나누고있는데 정보부 서울분실장 이병희씨가 들어왔고 조금 있 다가 김종필 부장이 합류했지요. 저는 김부장과 따로 만나서 '대한 공론사 이사장은 미국인들과 친면이 있는 이후락씨가 적임자인 것같 다'고 했습니다. 김 부장은 이후락씨에게는 '월간 다이제스트'란 잡 지를 하나 만들어 맡길 계획이라고 하더군요. 저는 이런 시대에는 월간지가 될 일이 아니라면서 내 생각은 하지 말고 대한공론사를 이 후락씨에게 맡기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습니다. 지금 미국과의 관계 개선이 중요한데 이후락씨가 신문사 사장이 란 직함을 가지면 미국측과 접촉하는 데도 편리할 것이라고 했습니 다. 이렇게 해서 며칠 뒤 이후락씨는 대한공론사 사장, 저는 주필 겸 부사장이 되었습니다.". 언론사 사장이 된 이후락은 코리언 리퍼블릭을 신문답게 만들었 다고 한다. 정부 홍보 일변도에서 벗어나 객관 보도에도 힘써 한국 거주 외국인들과 외교관들로부터 호평을 받고 군사정부를 비판하기 도 했다는 것이다. 코리언리퍼블릭의 신뢰도가 높아지자 혁명정부에 선 이 신문을 이용하여 외국인들에게 군사정부의 입장을 설명하는 데도 더 효과가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고 한다. 대한공론사의 운영에 있어서는 김종필부장이 차량, 예산 등 여러 면에서 적극적으로 도와 주었다. 사장과 부사장 월급은 정보부로부터 지급받아 예산 부족을 메우기도 했다. 이후락씨가 몇 달뒤 최고회의 공보실장으로 발탁된 데는 이러한 실적이 상당히 기여했다고 한다. 김종필 총리의 증언에 따르면 박정희에게 "이후락씨를 제가 잘 아는데 불러다 쓰시겠습니 까"하고 천거한 것도 자신이라고 한다. "사실은 이후락씨가 갇힐 만한 이유가 없었다고 봐요. 단지 민주 당 시절에 총리 직속의 중앙정보위원회 연구실장으로 있었던 때문에 혁명에 방해가 되는 일을 했다는 오해를 받았던 것입니다. 나는 이 후락씨가 잡혀 있다는 것도 모르고 정신없이 다닐 때인데 이병희 서 울분실장이 와서 그 사람을 잡아둘 이유가 없다고 하더군요. 이후락 씨는 박정희장군도 잘 알고 그분이 정보국 차장일 때 제가 과장으로 모신 적도 있고요, 그래서 내가 만났지요. '격동기가 되다 보니까 일이 잘못돼서 고통을 드린 것 같다'고 하고는 대한공론사를 맡겼던 겁니다.". 박정희 시절의 2대 조역인 이후락과 김종필은 그 뒤 18년간 애증 이 엇갈리는 관계를 유지하면서 국정에 깊숙이 관여한다. 군정의 조기 종식과 정권의 조기이양 문제로 윤보선 대통령과 박 정희 세력이 갈등을 빚고 있던 6월4일 조선일보는 '군사혁명과 정권 이양 네 나라의 경우'란 제목으로 터키, 이집트, 프랑스, 버마의 예 를 들었다. 이집트 혁명의 지도자 낫세르는 만 5년만에 형식적인 의 회정치로 돌아가면서 헌법을 제정하여 사실상의 일당독재 체제로 갔 다. 버마의 네윈은 쿠데타 3년후 정권을 민간에 넘겨주었지만 군부 의 실력자로 남아 있으면서 정치를 조종하고 있었다. 1년 전인 1960 년에 쿠데타를 일으켰던 터키군부는 가을에 정권을 민간정부에 이양 하겠다고 약속한 가운데 군내의 갈등,폭동 등 불안정한 모습을 보이 고 있었다. 3년전 프랑스 식민지 알제리 주둔군의 반란을 계기로 과 도 정권 담당자로 추대된 드골은 항구적인 정치불안을 해소하기 위 하여 내각제를 대통령중심제로 개헌하고 대통령에 취임했다.그는 군 부의 불만을 효과적으로 통제하면서 알제리에 독립을 허용하는 정책 을 추진하고 있었다. 박정희는 쿠데타 전에는 버마식 군부통치를 선호했으나 정권을 잡은 다음엔 군이 병영으로 돌아가서는 민간정부를 조종할 수가 없 다는 판단을 내린다. 혁명주체들은 드골헌법을 만들어 새로운 보수 정당을 중심으로 정치세력을 규합한 드골과 프랑스의 안정된 권력구 조에 많은 관심을 기울이게된다. 국가재건최고회의 기획위원회의 최 고고문으로 발탁되었던 유진오 고려대 총장은 6월1일 AP통신과의 회 견에서 '드골헌법과 유사한 권력구조로서 정권이양을 할지도 모른다' 는 요지의 발언을 했었다. 6월27, 28일자 조선일보에 실린 박정희 부의장의 특별 기고 '지도 자도'에서 그는 우리 국민의 전반적인 수준은 자유민주주의를 실천 할 수 없는 수준이라고 단정했다. <우리 나라 국민의 대부분은 강력한 타율에 지배받던 습성이 제 2의 천성으로 변하여 자각, 자율, 책임감은 극도로 위축되어 버렸 다. 책임감 없는 자유가 방종과 혼란과 무질서와 파괴를 조장시켰 다. 인권존중사상이 토대가 되어야 할 민주주의는 모략, 중상, 무고 로 타락해 버렸다. 의무감이 박약한 권력층은 국민과 유리되어 권력 을 남용하고 부패분자들과 결탁하여 거부를 축적했다. 경제인들은 정치인과 결탁하여 부정융자, 탈세, 밀수, 재산의 해외도피 등 악랄 한 수단을 동원하였고… 지도자는 대중과 유리되어 그 위에 군림하 는 권위주의자나 특권계층이 아니라 그들과 운명을 같이하고 그들의 편에 서서 동고동락하는 동지로서의 의식을 가진 자라야 한다. 지도 자는 모름지기 대중속에 뿌리박아야 한다. 그러하지 않으면 이 정권 과 장 정권의 전철을 밟게 될 뿐만 아니라 조국을 소생시킬 방도를 잃게 될 것이다. 지도자는 대중과 항상 호흡을 같이 하며 그들이 가 장 절실하게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신속 정확하게 파악하여 가장 가능한 방법이 무엇인지를 찾을 수 있고 자기가 확신하는 방향과 가 장 가능한 방법에 대하여 납득시킬수 있는 능력을 가지며 협력을 자 극하고 이끌고 나갈 용기를 가진 자이다.> |
[박정희 생애] 제11부 국가개조 (6) -- <317>미국의 새로운 한전략 .사진설명 : 1961년 6월24일 주한 미 대사로 부임한 사무엘 버거가 부인과 함께 한국에 도착했다. '좌절하여 불만이 쌓여가던 민족주의 의식, 젊은 세대의 불만, 국가적 목표의 상실, 국민들의 좌절감'. 이 보고서는 또 '5·16 쿠데타는 소수의 군인들이 잘 짜여진 계획을 세 운데다가 장면 정부가 국가적인 문제를 해결할 능력에 대한 신뢰감을 국민 들로부터 얻지 못했기 때문에 성공할 수 있었다'고 분석했다. 이 보고서는 이승만과 장면 정부를 무너뜨린 이 젊은 에너지를 건설적인 방향으로 활용 해야 한다고 건의한다. <이 힘을 통합하여 경제개발과 사회개혁으로 돌리도록 미국 정부가 지 원과 지도를 아끼지 않아야 한다. 만약 그렇게 하지 못하면 한국인들은 계 속해서 혁명적인 코스를 밟게 될 것이다. 그런 불안정한 정세가 지속되면 북한공산당과 합작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 이 보고서는 미국이 군사정권을 지원하여 한국에 민주주의를 실험하는 승부를 계속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세가지로 설명했다. 북한 공산주의와의 대결에서 민주주의의 우월성을 증명하는 일, 미국의 국가적 위신, 그리고 남한의 전략적 가치, 즉 서태평양과 일본의 방어에 사활적 중요성을 갖고 있다는 점. 이 보고서에는 미국에 고분고분하던 장면 세력과는 달리 박정 희 세력이 민족주의적인 열정으로 무장하고 있어 다루기 어렵다는 우려가 깊게 깔려 있다. 그러면서도 이 장교단이 정부기관에 효율성을 불어넣고 부정부패를 청소할 것이란 기대도 하고 있다. 이 보고서는 예언적인 전망 도 했다. <진취적인 지도력, 동기부여, 사회적 통합, 그리고 확실한 국가목표와 이를 성취하기 위한 열정이 조직된다면 한국인들은 현재의 좌절감과 자학 의식을 청산하고 경제를 향상시켜 안정된 민주사회를 이룰 수 있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구시대적 낡은 전통의식을 대체할 만한 새로운 문화적 가 치 체계를 만들어가야 한다.>. 이 보고서가 대한 정책의 새로운 기본틀로 제시한 것은 장기 경제 개발 계획의 수립과 실천이었다. 야심만만하고 주체성이 강한 정치장교단을 다 루는 데는 과거처럼 군사원조 중심의 틀로써는 어렵고 경제협력이란 새로 운 틀을 도입해야 한다는 것이다. '미국의 영향력을 행사하는 방식에 대하 여'란 항목에서 이 보고서는 이런 요지로 지적했다. <미국의 힘과 권위, 그리고 미국의 경제적, 군사적 지원이란 수단을 동 원하여 한국인들로 하여금 국가적 문제와 정면으로 대결하도록 유도해야 한다. 우리는 한국인에 대하여 보호자적인 자세를 버리고 동등하게 상대해 야 한다. 우리는 경제개발 계획의 수립 실천에 한국인을 대신하여 적극적 인 역할을 해서는 안되며 어디까지나 한국인들이 독립주권국가의 시민으로 서 스스로 책임을 지고 경제개발을 실천할 수 있도록 유도하는 데 그쳐야 한다.> 이 보고서는 이어서 앞으로 한국 정부에 영향을 미치는 데 있어서 경제적수단을 주로 동원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경제개발계획은 미국의 대한 영향력이 행사되는 중심점의 역할을 해야 한다. 미국 대표들은 계획과 예산의 수립과정에 상담을 해줌으로써 이계획 의 실적과 원조를 조건부 관계로 연결시킨다. 원조액수를 줄이거나 지급을 일시 보류하는 방법으로써 한국의 경제개발계획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 효과적일 것이다.>이 대한 정책건의서는 한국의 교육제도를 개혁해야 한 다고 주장했다. 학교교육이 너무 유교적인 전통에 빠져 있어 문학, 철학, 예술 등 인문분야를 중시하고 자연과학, 공학, 행정, 사회과학을 소홀히 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기술, 직업교육을 강화하여 현대 사회에 적응할 수 있는 젊은 세대를 길러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보고서를 읽고 있으면 이것이 박정희의 근대화 계획서가 아닌가 하 는 착각이 든다. 한국인의 좌절감과 목표상실감을 자신감과 희망으로 바꾸 어놓기 위해서는 장기경제개발계획을 추진해야 하고 그래야 공산화를 막을 수 있다는 이 보고서의 기본 인식은 박정희의 그것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이 보고서가 제시한 효율적인 행정의 필요성, 부패추방, 새로운 가치관의 정립, 실용주의적인 방향으로의 교육개혁은 박정희가 추진하려던 방향과 같았다. 쿠데타가 일어난지 불과 20일만에 워싱턴과 서울에서는 우연히도 똑 같은 '한국의 비전'을 다듬고 있었다. 쿠데타에 의한 불편한 시작에도 불구하고, 또 박정희의 오기서린 자주노선에도 불구하고 그 뒤의 한-미 관 계가 기본적으로 같은 궤도를 달릴 수 있었던 것은 국가목표와 그 발전전 략에 대한 공감대가 양국 수뇌부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되었기 때문이었음을, 이 보고서는 확인시켜주고 있다. 이 보고서를 읽어보면 미국 정부는 박정희-김종필 세력의 도전을 계기 로 한국을 대하는 태도를 우월적인 후견인의 시각에서 대등한 동반자의 시 각으로 바꾸어야 한다는 자각에 도달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는다. 한국군의 청년 장교단이 미군에 도전하여 쿠데타를 성공시킨 것이 미국 으로 하여금 한국을 보는 눈을 바꾸어놓은 것이다. 이는 미국이 태평양전 쟁으로 해서 일본과 아시아를 보는 눈이 달라진 것과 맥락을 같이 하는 것 이다. 힘의 대결을 중시하는 미국인들은 당돌한 도전자에 대해서는 일정한 평가를 해주는 것이다. |
[박정희 생애] 제11부 국가개조 (7) -- <318>국무부의 소동 .바로 이날 미 국무부에서는 작은 소동이 벌어졌다. 대통령 직속 한국 문제 긴급조치반의 책임자인 매카나기 차관보는 주한미국대사관과 주한 미군사령부로부터 올라온 보고서를 접수하곤 긴급회의를 소집했다. 서울 로부터 올라온 보고는 그린 대리대사가 최경록 장군과 나눈 대화에 관한 것이었다. 최근에 비밀분류에서 해제된 이날 회의 문서에 따르면 최경록 장군은 그린에게 '이번 쿠데타의 배후에는 공산주의자들이 있다'고 말했 다는 것이다. 최 장군은 자신의 그런 확신이, 주체세력내 장교들에 대한 개인적인 정보, 주체세력안에 있는 친구들로부터 얻은 정보, 그리고 주 체세력 장교들의 과거기록을 조사한 결과에 근거한 것이라고 했다. 즉, 1945∼1949년 사이공산당과 관련을 맺은 사람들이 있다는 주장이었다.최 경록은 박정희 장군이 공산주의자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이름을 대지 않고 네 명의 장성들이 공산주의자라고 말했으며 3∼4명의 대령들도 공 산주의자라고 주장했다. 매카나기 차관보는 서울로부터 올라온 보고서를 읽고는 단서를 달았 다. 즉, 최 장군이 한때 그의 직속부하였던 박정희와는 사이가 좋지 않 았음을 유의해야 한다고 했다. 미 CIA를 대표해서 이 회의에 참석한 피 처럴드는 "쿠데타 멤버들의 신상정보를 조사하고 정보원과 상담해본 결 과 혁명주체들은 장면정부에 불만을 품은 사람들이었지만 결코 공산주의 자는 아니다"고 말했다. 그는 "하나 걱정되는 것은 이들이 너무 순진하 여 북한과의 통일이 가능하다고 오판할까 하는 것이다"고 했다. 이에 대 해 국무부 정보책임자 힐즈먼은 며칠 전 USIB(United States Intelligence Board)사람들과 논의했는데 한국의 쿠데타세력은 공산주의자들이 아니란 결론을 내렸다고 말했다. 낫셀식의 방법, 즉 미국으로부터 벗어나 독자 노선을 추구하는 방식에 대해서 생각하는 장교들이 있을지 모르지만 그 런쪽으로 나갈 것 같지는 않다고 힐즈먼은 말했다. 물론 북한이 정보수집 차원에서 주체세력안으로 간첩을 침투시킬 수 는 있을 것이다. 하인츠 해군 제독은 김종필 중령의 권력이 너무 커지고 있다고 우려했다. 그는 김종필 중령이 1인 독재체제의 무대장치를 할 가 능성이 있는데 그렇게 되면 공산주의자들이 쉽게 권력을 장악할 수 있다 는 견해를 피력했다. 매카나기는 최경록 장군이 그런 생각을 한 것은 군 사정권이 취한 조치, 예컨대 깡패들을 붙들어 시가행진을 시킨 것과 같 은 행동들을 보고 나서인 것 같다고 했다. 국제협력처(ICA)에서 나온 세 퍼드는 "우리가 갖고 있는 관련정보로는 군사정부의 경제관료들과 회의 를 해보니 사회주의적 경제관을 드러내보이더라는 정도이다"고 했다. 이 긴급회의는 "박정희의 쿠데타가 영리하기 짝이 없는 공산당 쿠데타는 아 니다"는 결론을 내렸다. 2군사령관이던 최경록 장군은 부사령관이던 박정희로부터 다소 쌀쌀 한 대우를 받았다. 박정희는 최경록 장군이 육군참모총장일 때 그 아래 서 작전참모부장으로 있었다. 미군이 박정희를 전역시키라는 압력을 넣 자 최경록은 난처한 입장에 있었다. 이때 2군사령관이던 장도영이 나서 서 박정희를 2군 부사령관으로 받아주었다. 장도영이 그 뒤 육군참모총 장으로 발탁되자 최경록은 2군 사령관으로 전보되어 대구로 내려가 박정 희와 또 만났다. 5·16거사 당일 최경록은 미군을 지지하고 혁명에 반대 하는 입장을 취했다. 이런 곡절을 거치면서 박정희는 최 장군을 별로 좋 아하지 않게 되었다. 쿠데타가 성공한 며칠 뒤 박정희는 최경록을 최고 회의부의장실로 호출했다. 이석제 중령과 오치성 대령도 합석시켰다. 박 정희는 "최 장군 오랜만입니다"라고 인사를 나누고는 입을 닫아버렸다.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이석제는 박정희가 왜 이런 자리에 자신을 불렀 을까 하고 의아해하다가 곧 감을 잡았다. 최 장군을 군에서 물러나게 하 는데 악역을 맡으라는 뜻으로 이해했다. 이석제는 최 장군을 향해서 입 을 뗐다고 한다. "각하, 그 동안 국방을 위해서 애 많이 쓰셨습니다. 이제 군사혁명도 성공했으니 후진을 위해서 길을 열어주시길 간청드립니다.". 최경록 장군이 "물러나겠다"는 확답을 하지 않고 설명을 좀 길게 하 자 박정희는 자리에서 벌떡 이러나더니 말을 잘랐다고 한다. "최 장군, 그래 언제 그만두시겠다는 말입니까.". 박정희로부터 이런 대접을 받고 예편당한 최경록 장군이 그린 대사를 만나 공산당 관련 대화를 나눈 것 같다. 당시 6만 병력을 한국에 주둔시 키고 있던 미국으로서는 끊임없이 떠도는 박정희의 사상에 대한 첩보를 심각하게 다루지 않을 수 없었다. 최근 공개된 비밀자료를 훑어보면 미 국 정부에서는 그런 첩보를 매우 이성적으로 다루었음을 알 수 있다.'박 정희는 한때 공산주의자였으나 확실히 전향했다'는 초기의 판단을 유지 해갔지만 정보수집은 왕성하게 했다. 이석제의 증언에 의하면 미국측 정보기관은 주체세력 영관급 장교들 에 대한 신상 정보가 거의 없었다고 한다. 미국 CIA는 평소 협조가 잘 되고 있던 영국 첩보기관에 부탁했다. 영국 첩보기관은 중공의 정보기관 에 부탁했고 중공은 평양에 있는 정보망을 동원하여 북한이 갖고 있는 남한장교들에 대한 정보를 얻어주었다고 한다. 혁명정부의 각종 법률제 정작업에 핵심적으로 관여하고 있던 이석제는 자신을 따라다니는 CIA요 원으로부터 감시를 당하는 기분이었다. 6월 초엔 미 버클리 대학의 스칼 라피노 교수가 방한하여 이석제를 만났다. 스칼라피노 교수는 그 1년 전 콜론협회에서 발표한 '콜론 보고서'를 통해서 '한국엔 군사 쿠데타를 일 으킬 만한 세력이 없다'고 예측하여 많은 청년 장교들을 흥분시켰었다. 스칼라피노 교수는 이석제와 만난 자리에서 다섯 시간 동안 신문하듯이 혁명정부의 정책과 이념에 대해서 꼬치꼬치 따져물었다. 이석제는 미국 측이 혁명정부의 사상문제에 대해서 깊은 의혹을 떨치지 못하고 학자까 지 동원하여 탐색하러 나선 것으로 이해했다. 스칼리피노는 면담을 끝내 면서 "지도층의 단결, 청렴성, 그리고 국가 근대화를 위한 획기적 프로 그램이 성공의 조건이다"고 충고했다. [박정희 생애] 제11부 국가개조 (8) - <319>문재준의 울분 .사진설명 : 장도영의 후임으로 육군참모총장이 된 김종오장군은 헌병감 문재준과 불화의 관계에 들어갔다. "제3 CID대장 김영우중령과 제15 CID대장 방자명중령은 너무 까불고 정치적으로 노는 인물이니 교체하시오." "저는 헌병은 처음이고 아직 실정을 잘 모르니 시간을 좀 주십시오.". 문재준은 그 길로 인사참모부장을 찾아가서 부탁했다. "지금 CID대장들이 전국의 밀수사범 수사를 지휘하고 있으니 그 일 이 끝날 때까지 기다려주십시오.". 문재준은 그 뒤로는 김종오 총장이 이 문제를 다시 거론하지 않은 것을 보고는 납득한 것으로 생각했다. 6월22일인지, 23일인지 김종오 총장이 문재준을 다시 부르더니 "인사참모를 만나면 알 것이다"고만 하 는 것이었다. 인사참모는 문헌병감에게 "총장님 지시사항인데, 헌병차 감 김시진대령, 김영우-방자명 중령, 그리고 황모 중령을 예편시켜라" 고 했다. 문재준은 강력하게 반발했다. "헌병 인사는 헌병감에게 맡겨야 합니다. 더구나 김시진 대령은 박 정희 부의장이 직접 부탁한 사람인데 이럴 수가 있나요.". 인사참모는 "내가 총장에게 다시 말씀드려볼테니 너무 흥분하지말라" 고 달랬다. 며칠 후 박정희는 문재준을 부르더니 "총장을 잘 모시고 일 하라"고 타일렀다. 문재준은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았다. 육사5기 동기 생인 공수단장 박치옥, 최고회의 의장 비서실장 안용학, 내각수반 비서 실장 이회영대령이 자신의 사무실을 찾아왔을 때 문재준은 이런 말을 했다. "김종오 총장이 나를 믿지 않고 내 수족을 자르려 하니 그러면 나도 손을 써야겠어. 김종오 장군은 원래 예편대상자인데 살아난 것 아닌가. 나는 예편심사위원인데 장군심사가 있을 때 그를 예편대상자로 넣어야 겠어.". 문재준은 헌병감으로 부임한 후 장군들의 비행조사를 한 일이 있었 다. 3CID대장 김영우 중령이 과거 자유당, 민주당 시절에 조사한 자료 를 근거로 하여 보고서를 만들었다. 그 명단엔 김종오 총장도 포함되었 다. 문재준은 혁명정부가 부정부패, 무능 등의 이유로 일반 공무원들을 무더기로 내보내고 있는데 군도 자정작업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 모범으로서먼저 헌병대의 숙정작업을 통해 45명을 퇴직시켰다는 것이다. 6월27일 최고회의 장성예편 심사위원회가 열렸다. 문재준은 김종오 총 장의 비행을 열거하고 그를 예편대상자로 올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심 사위원회의 부위원장인 이주일소장은 난색을 보였다. "박정희 장군이 추천하여 총장이 된 분을 한 달도 안돼 내보낼 수 있나.". 그래도 문재준은 완강하게 예편을 주장하면서 심사위원들을 대상으로 표결에 붙이자고 버티었다. 표결 결과 김종오 총장은 예편대상자로 결 정되었다. 다음날 박정희 부의장의 결재를 받으러 가는데 입장이 난처 해진 이주일은 문재준더러 "같이 가자"고 했다. 박정희는 김종오 총장 의 예편건의에 반대했다. 이 자리에서도 문재준은 고집을 굽히지 않았 다. 박정희는 문헌병감을 설득하다말고 화를 냈다. "자네는 성미가 과격해서 큰 일이야. 재심해 주어야겠어. 혁명은 너 혼자서 다 한 거야?". 문재준이 물러서지 않자 박정희는 재떨이를 집어 던졌다. 문재준은 울분을 억누를 길이 없었다. 그는 김종오 장군을 총장으로 민 사람은 김종필 정보부장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박부의장이 그 김종필의 말만 믿고 저런다고 확신했다. 격정적인 그는 존경하는 박정희가 자신을 믿 어주지 않는 것이 답답하여 사무실로 돌아와선 엉엉 울었다. 이때 김영 우,방자명 중령이 들어왔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문재준은 "김종필이 모략을 써서 박 장군이 나를 믿지 않게끔 하고 있다"고 하소연했다. 방자명 중령은 "그건 김종필보다는 그 아래에 있 는 권영수중령이 장난을 친 것이다"고 했다. 문재준은 이런 기분속에서 동기생 박치옥 대령을 전화로 불렀다. "야, 할 이야기가 있으니 12시에 최고회의로 와.". 문재준, 박치옥 두 사람은 최고회의 건물 옥상으로 올라갔다. 여기 서 두 사람은 엄청난 이야기를 주고 받는다. 먼저 문재준이 대충 이런 취지의 말을 꺼냈다. "김종필이가 모략하는 바람에 내가 오늘 박정희 장군으로부터 억울 한 책망을 들었다. 종필이가 권력을 남용하고 장난을 심하게 치는데 붙 들어다가 혼을 내고 보링을 좀 해주어야겠어.". 박치옥도 일단 문재준의 반김종필 발언에 동조했다. 그도 김종필 부 장에 대한 감정을 갖고 있었다. 두 사람은 옥상에서 대충 이런 합의에 도달했다는 것이다. <7월3일 새벽2시에 헌병대 병력으로 잠든 김종필을 체포한다. 그를 헌병감실로 연행한다. 이 연락을 받으면 박치옥은 공수부대를 동원하여 중앙정보부 건물을 포위한다. 그런 뒤에 출근하는 박정희 장군에게 사 태를 보고한다.>. 문재준은 또 박정희에게 후임 정보부장으로 김윤근 해병준장을 추천 하고 정보부의 수사권을 박탈하자는 건의를 할 생각이었다. 두 사람이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공수단 김제민중령이 올라와 대화에 합류했 다고 한다(문재준의 군검찰 앞 진술). 문재준은 박치옥과 헤어진 뒤 헌 병감실로 돌아와 김영우, 방자명 중령을 불렀다. "제15CID에서 20명, 제3CID에서 30명을 차출하라. 김종필을 혼내야 겠다.". [박정희 생애] 제11부 국가개조 (9) - <320>박치옥의 울분 .사진설명 : 일명 '평양 박치기'로 알려진 이화룡. 주먹세계의 대부로 군림하다 1984년 2월 사망했다. 최고회의 옥상에서 문재준 대령으로부터 "김종필을 붙들어다가 혼내주자"는 이야기를 들은 박치옥 공수단장은 장도영 내각수반 비 서실장인 이회영 대령을 찾아가서 조금 전에 있었던 이야기를 해주 었다. 이대령은 "문재준은 성격이 왈칵 하는 사람이니 말려야 한다. 나도 말려보겠다"고 했다. 박치옥이 부대로 돌아와 있으니 이회 영이 전화를 걸어왔다. "문재준에게 그 일을 중단하라고 통보했다" 는 내용이었다. 다음날인 6월29일 박치옥은 부대로 출근하는 길에 문재준에게 들렸다. 문재준은 여전히 어제의 결심을 재확인하는 것이었다. 박 치옥은 부대로 출근한 뒤 부단장 김제민 중령을 불러 "어제 지시한 1개중대의 병력동원준비 관계는 어떻게 되었나"하고 물었다. 김제 민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김종필 부장을 혼내준다는 것이 개인 대 개인의 일이라면 몰라 도 병력을 동원한다는 것은 곤란합니다. 김병현, 김경식 대위한테 이야기는 해두었습니다.". 김제민은 말은 그렇게 했지만 두 대위에게 아무런 지시도 하지 않은 상태였다. 이날 오전 헌병대 제3CID 대장 김영우 중령과 제15 CID대장 방자명 중령은 어제 있었던 문재준의 돌연한 지시가 걱정 이 되어 "말리자"는 데 합의했다. 방자명이 문재준 방으로 들어가 나온 얼마 뒤 문재준은 김영우를 불러들였다. "어제는 내가 너무 흥분해서 그랬는데 김종필이 하고는 화해할 것이니 어제 한 말은 취소한다.". 전날 저녁 부산에서 밀수사건을 수사중 철수 명령을 받은 제15 CID대원 20여명은 29일 오후에 서울로 올라왔다. 방자명 제15CID 대장은 파견대장 오대위에게만 "우리가 김종필 중령 이하 정보부 간부들을 연행해야 할지 모른다"고 귀띰해두었다. 방중령은 자신의 병력을 교대로 대기시키고 두 명을 뽑아 헌병감을 경호하게 하였다. 7월1일 문재준은 방자명 중령을 부르더니 "병력대기는 어떻게 하고 있는가"하고 물었다. 방자명은 '헌병감이 아직도 중앙정보부 를 치는 생각을 버리지 않고 있구나'하고 짐작했다. 박치옥 공수단장도 이즈음 김종필 부장에 대하여 유감을 품고 있었다. 그 단서가 된 것은 깡패소탕 작전이었다. 공수단은 혁명직 후 깡패들을 붙잡아들이는 일을 하고 있었는데 명단엔 이화룡도 포 함되어 있었다. 어느날 최고위원인 송찬호 준장이 육사5기 동기생 인 박치옥을 찾아와서 "이화룡은 내가 잘 아는데 3∼4년 전에 이미 깡패 생활을 청산하고 지금은 영화제작에 전념하고 있다"고 말했다. 박치옥 단장은 송찬호의 주선으로 이화룡 밑에서 일하는 강전무 란 사람을 만났다. 그의 이야기를 들으니 이화룡은 체포할 필요가 없겠다는 판단이 섰다. 그는 부하들에게 지시하여 이화룡에 대한 체포지시를 해제했다. 며칠 뒤 강전무가 남녀 배우 몇명과 함께 위 문품을 갖고 부대를 찾아왔다. 박치옥은 이들을 대접하려고 했는데 강 전무가 접대를 하겠다고 하여 부하장교들을 데리고 나가서 옥루 정이란 음식점에서 저녁을 먹었다. 여기서 이화룡을 만났다. 식사를 한참 하고 있는데 이화룡이 밖 으로 나가더니 감감 무소식이었다. 동석중인 김제민 부단장을 불러 서 알아보라고 했다. 김중령이 보고하기를 공수부대원들이 이화룡 을 깜쪽같이 불러내 연행해갔다는 것이었다. 박치옥은 부하들이 자 신에게 반발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때 공수단에서는 혁명에 가담 한 장병들이 기고만장하여 혁명에 가담하지 않은 상관의 말을 잘듣 지 않았다. 박치옥은 이런 점을 지적하여 부하들을 혼내곤 했는데 여기에 불만을 품은 사람들이 장난을 친 것이라고 이해했다. 박치 옥은 이화룡을 석방하라고 지시했으나 부하들이 말을 듣지 않았다. 화가 난 박치옥은 장교들을 불러놓고는 "이런 식으로 하면 부대 를 지휘할 수가 없다. 너희들 11명이 집단지도체제로 부대를 운영 하라"고 말하고는 귀가했다. 그 후 장교들이 박치옥을 집으로 찾아 가서 사과하여 일이 일단락되었다. 박치옥은 그 자리에서 "오늘은 내 위신도 있고 하니 이화룡을 돌려보내고 다시 조사하여 깡패로 인정된다면 수사기관에 넘기고 그렇지 않으면 석방하라"고 시켰 다. 얼마 후 이화룡은 석방되었다. 그 며칠 뒤 송찬호 준장을 통해서 박정희 장군이 이화룡 건을 들먹이면서 박치옥을 질책하더라는 말이 들려왔다. 박치옥은 이것 은 김종필부장이 자신에 대해서 나쁜 보고를 올린 때문이라고 추측 했다. 김제민 부단장에 따르면 당시 공수부대원 5명이 자진해서 정 보부에 들어갔는데 이들이 이화룡 건에 대하여 박치옥에 관한 나쁜 정보를 제공했을 것이라 한다. 그즈음 박치옥은 아내로부터 밤에 누군가가 유리창을 프래시로 비춘다는 이야기를 자주 듣게 되는가 하면 자신의 전화가 도청당하는 느낌을 갖기도 했다. 박치옥은 김 종필 부장에게 항의하려고 전화를 세 번이나 걸었으나 이상사라는 당번병은 "안계신다"는 말만 하고 끊어버리는 것이었다. 박치옥이 직접 김부장을 찾아간 적도 있는데 역시 만나지 못하고 돌아왔다. 이런 일로 김종필 부장에 유감이 많이 쌓여 있던 박치옥은 썩 내키지 않았지만 문재준에 동조하는 식으로 사건에 휘말려든다. 7 월1일 박치옥은 6관구 신임 참모장 나희필 대령에게 인사차 방문하 여 장도영 내각수반의 비서실장 이회영 대령을 만났다. 박, 이 두 동기생은 돌아오는 길에 차중밀담을 나누었다. 이회영은 자신의 운 전사를 박치옥 차에 태우고 자신이 직접 운전하는 차에 박치옥을 태웠다. 이회영은 "너희들은 괄괄한 성격을 이기지 못하여 큰 일을 저지르려고 하는데 그만두는 것이 좋을 것이다"고 했다. 그러면서 이회영은 장도영 의장이 주는 것이라면서 10만원짜리 수표 다섯 장 을 박치옥에게 주었다. 이 돈은 나중에 법정에서 장도영이 마치 박 치옥의 김종필 제거작전을 지원한 것처럼 꾸미는 데 증거로 이용되 었다. 김종필의 입장에서는 육사 5기생들인 문재준, 박치옥 대령이 장 도영 내각수반 비서실장인 이회영 대령, 최고회의 의장(장도영) 비 서실장 안용학 대령과 작당하여 장도영 중심으로 뭉치고 있다는 판 단을 했을 것이다. 김종필이 선수를 쳤다. |
[박정희 생애] 제11부 국가개조 (10) -- <321>박정희-장도영의 마지막의 대좌 .사진설명 : 1961년 5월 23일 장도영 최고회의의장과 박정희 부의장이 국립묘지를 참배한 뒤 사병 묘역을 둘러보고 있다. 이 무렵 장도영은 '주체세력내의 갈등이 위험한 단계로 치닫고 있다' 는 느낌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박정희 부의장과 이야기를 나눌 필요가 있겠다고 생각하여 부관을 보내 중앙청의 총리실로 와 달라고 했다. 저 녁 8시경 두 사람은 장도영의 집무실과 붙은 부속실에서 대좌했다. 장 도영이 먼저 입을 뗐다. "공수단 병력이 서울시내에서 철수하고 중앙청 주변도 이제는 평온 을 되찾아 좋습니다." "잘 하셨습니다. 이제는 병력을 서울에 둘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 다.". "지금 혁명세력 안에 틈이 생겨 알력이 점점 심해진다고 하는데 박 장군이 잘 장악해야 할 것이고 박 장군을 중심으로 잘 단결해야 혁명과 업을 성취할 수 있을 거요.". "그 문제는 저도 많이 듣고 있는데 그 내용을 알고보면 그리 심각한 것이 아닙니다. 일부 사람들이 과장해서 유포시키고 있는 것이니 너무 염려하지 마십시오.". "나는 지금 혁명과업이 너무 광범위하고 과격하게 진행되는 것으로 생각해요. 우리가 최초에 결정하기로는 이 비상기간을 가급적 단축시키 고 그럼으로써 개혁업무도 축소하여 명확한 성과를 거두자는 것이 아니 었소?". "지금 우리들이 하고 있는 것은 소위 혁명인데 손을 안댈 수 없는 꼭 필요한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럼 박 장군은 이 혁명기간이 얼마나 필요하다고 생각하오.". "지금 그런 것을 정해놓고 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혁명과업의 진척 에 따라서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이 군사혁명을 애국적이고 명예롭게 성취하려면 기간도 짧아야 할 것이고 또 단시일내에 할 수 있는 과업들을 잘 선택하여 명확한 성과를 거두는 것이 중요해요.". "그럼 혁명기간이 어느 정도여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내 생각으로는 6개월 정도가 어떨까 하나 만일 질서를 바로 잡기에 너무 짧다면 1년 정도에 종결지어야 한다고 생각하오. 현재 혁명주체라 는 사람들은 일선에 나가서 사단장이나 연대장을 잘 해주어야 할 사람 들인데 그들이 이 나라의 최고 권좌에서 1년 이상이나 막강한 권력을 행사한다면 나중에 비록 그들이 돌아가려고 해도 돌아갈 수가 없게 될 것이오. 그리고 그들의 식견으로 봐서도 장기간 집권하여 정치를 잘 할 수는 없다고 생각하오.". 이 대목에서 박정희는 정색을 하고 말했다고 한다.(장도영 '회고록'). "1년간에 무슨 혁명을 합니까. 우리가 목숨을 걸고 혁명을 한 것은 이 나라를 바로잡고 청신한 사회를 이룩하자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의 사회상으로는 그렇게 빨리 개혁이 이루어지리라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장도영도 정색을 하고 따졌다고 한다. "그럼 여지껏 우리가 결정하고 추진해온 기본방침인, 조기민정복귀는 어떻게 되는 것이고 박 장군 자신이 언명한 행동부대의 조속한 복귀와 조기선거는 허언이었단 말이오.". 박정희는 말문을 닫았다. 한참 동안 두 사람은 어색한 침묵 속에서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장도영이 이 침묵을 깼다. "한 2년 정도로 생각하고 있소?" "5년이고 10년이고 일을 시작했으니 끝을 내야지 도중에 중단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한참 있다가 장도영이 말했다. "나는 5·16 후 육군참모총장으로서 비상사태 수습에 전력을 다했고 6월6일로서 나의 임무도 사실상 끝났으니 나는 이제 뒤로 물러나겠소.". "이제부터는 행정이 더욱 중요해진다고 생각합니다. 일을 더 많이 해 주셔야 할 단계에서 자꾸만 물러나신다는 말씀을 하시니 이해할 수가 없 습니다.". "나는 그렇게 오랫동안 자리를 지킬 수가 없어요.". 두 사람의 대화는 이로써 끝났다. 장도영의 기억에 따르면 대화의 시 작은 부드러웠는데 나중엔 의견이 상충된 가운데 냉랭하게 헤어졌다고 한다. 밤10시가 가까워진 시각이었다. <작은 방에서 얼굴을 맞댄 채 주고받은 대화였지만 이 군사혁명의 역 사적 의의와 기본방침, 그리고 과업수행에 있어서 나와 박 장군의 상이 점은 너무도 많았고 또 컸다.>마지막이 된 박정희-장도영 두 사람의 대 화가 있었던 날은 6월30일이었다. 7월2일 저녁 무렵 내각수반실이 있는 중앙청 주변은 심상치 않은 분 위기가 감돌고 있었다. 내각수반 비서실장 이회영대령은 김종필 부장을 붙들어가서 혼내 주려던 헌병감 문재준과 공수단장 박치옥의 계획이 탄 로난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중앙청 주변에 수상한 사람들이 오가는 것 이 목격되었기 때문이다. 이회영은 계산을 해보았다. '나는 신분이 내각수반 비서실장이고 문, 박 대령을 말렸으니 붙들려 가도 별 문제가 없을 것인데 이희영은 곤란할 걸.'. 이회영과는 육사5기 동기생인 전 육군방첩대 서울지구대장 이희영은 5월15일 밤 박정희를 감시, 미행하도록 지시했던 인물이다. 이회영은 신 문지를 찢어 '오늘밤은 집에서 자지 말게'라고 쓴 다음 그것을 또르르 말아 운전병을 시켜 이희영의 집으로 보냈다. 이 쪽지를 받은 이희영은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했다. 무슨 사건인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이 피해야 할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이희영은 내각수반실로 나가보았다. 아직 장 도영은 퇴근하지 않고 있었다. 장도영, 이회영, 이희영 세 사람은 수반 실에서 두 시간가량 얘기를 나누었다. |
[박정희 생애] 제11부 국가개조 (11) -- <322>박정희 의장 취임 .사진설명 : 박정희는 의장 취임사에서 "우리는 배수의 진을 쳤다"고 했다. "사태가 이렇게 되었으니 각하께서도 사표를 내셔야 하지 않겠습니 까." "나는 이미 사의를 표한 지 오래요. 잘 됐소.". 회의를 1분만에 끝낸 장도영 장군은 육성으로 사임 성명을 발표했다. "본인은 혁명초부터 혁명정권의 책임자로서 그 중책을 감당하지 못 할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국가초 비상시에 질서를 유지하기 위 하여 잠시 그 직책을 맡았던 것이다. 이제는 신망있는 지도자가 그 직 책을 맡아야 할 것이므로 나는 사임하는 바이다.". 장도영은 중앙청 내각수반실로 돌아가 업무정리를 마쳤다. 7월1일자 로 서독대사로 임명된 신응균 장군이 인사차 찾아왔다. "축하합니다. 일 많이 해주십시오.". 장도영은 총리실에서 현관으로 나와 신응균과 헤어진 뒤 원효로의 자택으로 돌아갔다. 그는 안방으로 들어가 두 다리를 쭉 펴고 앉아 피 로하고 긴장된 심신을 풀었다. '차츰 심신의 피로가 풀리면서 자연히 참모총장 재직시에 일어났던 헤아릴 수 없이 복잡하고 곤란했던 일들이 머리에 떠올랐다. 특히 5·16 이후 오늘까지 49일간 내가 겪은 모든 간 난과 신고를 하나씩 회상해보았다'는 것이다. 장도영은 그 뒤 가택 연 금상태에서 지내다가 가을에 반혁명혐의로 구속된다. 1986년에 한 기자 가 김종필에게 이런 질문을 했다. "장도영 장군을 명예롭게 퇴진시킬 수는 없었습니까. 그래도 혁명에 앞장을 서 준 분이 아닙니까." "4반세기가 지난 지금 와서 생각할 때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되지 않 았느냐하는 데엔 동감입니다. 그런데 그건 나의 회고일 뿐이지 한 시대 를 전환시키고 새로운 질서를 만드는 게 혁명인데 그땐 그런 여유가 없 어지요. 당시엔 이기고 누르고 바꾸고 나가야 할 긴박한 상황이었으니 까요.". 김포 주둔 해병여단장으로서 혁명성공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김윤근 최고위원의 증언에 따르면 박정희도 장도영과 그 측근들을 거세한 직후 상임위원들을 불러 전후 사정을 설명해주면서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고 한다. 김윤근은 박정희가 과거에 장도영에게 많은 신세를 진 사실을 모 르고 있었다. 그래서 오히려 박 장군이 지나치게 괴로와하는 것을 보고 이상하게 생각했을 정도였다. 3일 오후 최고회의는 장도영 의장의 실각을 발표했다. 장도영의 사 표는 수리되었고 박정희 부의장이 의장에 취임했고, 내각수반엔 송요찬 국방장관이 임명되었으며 최고위원 송찬호, 박치옥, 김제민은 그직을 사임했다는 발표였다. 박정희는 취임사를, '배수의 진을 친 우리들에게 는 이제 후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들 앞에는 전진이 있을 따름입 니다'로 끝맺었다. 박정희는 7월7일 전국 수사기관장 회의에 참석하여 훈시를 했다. 그 는 정부에서 일하고 있는 군인들에 대해서 주로 경고했다. "자가정화와 자가단속을 철저히 하라. 점차 정부에 참여한 군인들 수를 줄이겠다. 난맥상을 보이고 있는 현재의 수사기관을 정비하겠 다. 한 명의 수사대상자에게 두 개 이상의 수사기관이 중복수사를 벌여 국민들을 불편하게 해선 안되겠다. 혁명초에는 어느 나라에서나 옥석을 가리지 못하고 처리하는 것이 항례이다. 우리는 어디까지나 옥석을 가 려야한다. 우리의 혁명목적은 어디까지나 국민에게 봉사하려는 정신에 서 나온 것이다. 그러므로 이 혁명정신을 살려서 일반 국민에게 친절하 고 겸손해야 한다.". 최고회의는 7월9일 비로소 '장도영을 비롯한 44명의 반혁명 세력을 지난 3일에 체포했다'고 발표했다. 장도영만을 가택연금시키고 나머지 인사들은 엄중 문초중인데 혐의는 '반혁명 세력 구성' '박정희 암살 기 도'란 것이었다. 발표문은 새삼스럽게 5·16거사를 전후한 장도영의 기 회주의적 행동이란 걸 공개했다. 7월16일 사뮤엘 버거 주한미국 대사는 박정희 의장을 방문, 요담했다. 버거는 박의장에게 군정을 끝내고 민정 으로 복귀하는 문제를 논의할 군민합동기구를 구성하여 그 과제를 연구 하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제의했다. 버거 대사는 또 "미국 당국 이 공개적으로 박정희 정권을 지지하고 싶어도 체포, 숙청 등이 되풀이 되고 있어 그렇게 하기가 어렵다"고 말했다. 최고회의가 긍정적인 조치 를 취해주면 자신도 한국 정부를 지지하는 성명을 내겠다고 약속했다. 다음날 혁명정부는 예비검속한 용공혐의자 3,098명 가운데 이미 두 차 례에 걸쳐 석방한 1,267명 외에 1,293명을 추가로 풀어준다고 발표했 다. 이발표문을 통해서 박정희는 이렇게 당부했다. <국민 여러분께서는 이러한 사람들이 방면되더라도 지난 날의 잘못 을 깊이 반성토록 촉구하심과 아울러 따뜻한 아량으로 대하여 주시어 지난날에 포지하였던 용공적이고 불순한 생각을 버리고 애국심에 불타 는 선량한 국민이 되도록 선도하여 주시기 바라며 앞으로 이러한 반 국 가적인 행동을 하지 못하도록 항상 엄중한 경계를 하여 주시기 바랍니 다.>. 19일 오전 박정희 의장은 내외신 기자회견을 갖고 "앞으로 출범할 민정의 형태와 시기에 대해서는 8월15일 전에 구체적으로 밝힐 것이다" 고 했다. "한국 신문이 정부를 제대로 비판하지 못하고 있다는 견해가 있는 데 어떻게 생각하는가"란 질문에 대해서는 이렇게 대답했다. "혁명 후 1주일만에 보도통제를 해제했다. 정부가 두려워 논평을 하 지 않는다는 말은 처음 듣는데 사실이라면 언론인들의 기개가 부족한 탓이다. 언론인들이 혁명과업에 직접 참여해주기를 바란다. |
[박정희 생애] 제11부 국가개조 (12) -- <323>인간 소묘 .한밤중에 호텔 문앞에서 경비를 서고 있는데 화장실을 겸한 세면실에 서 인기척이 들렸다. 이대위가 가 보니 박정희가 양말을 빨아 줄에 널고 있었다. 양말을 한 켤레밖에 신고 오지 않아 밤에 몰래 나와서 그런 일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대위에게 들킨 박정희는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박정희의 양말과 관계된 이야기가 하나 더 있다. 5·16당시 국무원 사 무처 보도과장은 국방부 보도과장 출신 이용상이었다. 혁명정부하에서는 공보부의 보도처 보도과장으로 일하게 되었다. 박정희가 9사단 참모장일 때 그 밑에서 정훈부장으로 근무했던 이용상 시인은 계급을 떠나서 박정 희 집안과 인간적으로 친밀했다. 기자들은 이런 사실을 알고 이용상에게 박정희 의장과의 기자회견을 주선해달라고 졸랐다. 이용상은 장충동의 의 장 공관으로 전화를 걸었다. 육영수가 받았다. 박 의장이 언제 돌아온다 는 것만 확인했다. 이용상은 중앙청 출입기자들을 데리고 무턱대고 장충 동으로 갔다. 박정희는 외출에서 돌아오더니 발을 씻고는 양말도 신지 않은 채 회견 장소에 나와 의자에 걸터 앉았다. 이낙선 소령이 호주머니 속에 양말을 넣고 와서 박의장에게 귀엣말로 "사진기자들도 왔으니 양말을 신으시지요" 라고 했다. 박정희는 큰 소리로 "발은 찍지 말라고 해!"라고 하면서 끝까 지 맨발로 기자회견을 했다. 한국일보 윤종현기자가 "박의장님은 주량이 어느 정도입니까"하고 물었다. "내 주량은 여기 있는 이용상 동지에게 물어보시오.". 윤기자는 말을 잘못 알아듣고 다시 물었다. "아닙니다. 이용상 과장의 주량은 우리들도 잘 알고 있습니다. 내가 묻는 것은 의장님의 주량입니다." "아마, 이용상 동지 주량은 여러분들도 잘 모르실 겁니다. 이 분은 종로에서 동대문까지 가는데 일주일이 걸리는 사람이에요. 중간, 중간에 있는 술집을 다 들러야 하거든요.". 5·16혁명 직후 박정희를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본 사람들 가운데는 홍득만 중사가 있다. 현재 69세인 그는 5·16이 났을 때는 육군참모차장 실 선임하사관이었다. 그는 1952년 박정희가 대구에서 육본 작전국 차장 으로 근무하고 있을 때 그 밑에서 하사관으로 근무했다. 어느 날 일직사 령 박정희 대령이 사병들을 집합시켰다. 홍중사가 "집합 완료"를 보고하 자 박정희는 "전원 모자 벗어!"라고 명령했다. 사병들의 두발상태가 불 량함을 확인한 박대령은 "가서 가위 가져와"라고 했다. 박정희는 두발 상태가 가장 단정한 홍중사의 머리칼을 싹둑 자른 뒤 "해산시켜"라고 하고는 아무 말도 없이 들어가버렸다. 홍중사는 박대령 에게 찾아가서 "명색이 제가 하사관인데 이렇게 하시면 부하들이 저를 어떻게 보겠습니까"하고 하소연을 했다. 박정희는 웃으면서 "그럴 거 야. 지금 사병들이 뭘 하고 있는지 한번 보고와"라고 했다. 홍중사가 막 사로 내려가보니 텅 비어 있었다. 사병들이 모두 이발하러 갔다는 것이 었다. 하사관이 억울하게 혼이 나는 것을 본 사병들이 알아서 한 것이었다. 홍 중사가 "이것도 지휘통솔법입니까"라고 하니 박정희는 "바로 그거 야"라면서 씩 웃었다. 5·16이 터지자 홍 중사는 바로 곁에서 박정희를 시중드는 역할을 하게 되었다. 박정희는 최고회의 사무실에서 살다시피 했다. 잠을 언제 자는가 싶을 정도로 항상 깨어 있고 일하고 있었다. 박 정희는 야전침대에서 자고 일어나면 아침 신문부터 꼼꼼히 읽었다. 그 다음엔 중앙정보부, 육해공군 정보부대에서 올라온 각종 보고서들을 뜯 어 밑줄을 쳐가면서 읽기 시작했다. 그 다음엔 진정서와 건의서들을 읽 었다. 보고서를 읽느라고 아침을 생략할 때도 있었다. 어느 날 육영수가 신당동 근무 박환영 중사를 시켜 꿀 한 병과 잣 한 봉지, 그리고 양주 한병을 보냈다. 박정희는 홍중사가 있을 때만 잣 몇 알을 입에 털어넣은 뒤 양주 한 잔을 얼른 마시곤 했다. 꿀은 가끔 한 숟갈씩 퍼먹었다. 혁명의 성공으로 박정희의 신당동 생활은 곧 끝나게 되고 육영수의 생활도 많이 바뀐다. 육영수의 사촌동생인 송재관(전 어린이회관관장· 64세)은 그때 평화일보 기자로 근무하고 있었다. 군부 쿠데타 소식을 듣 고 사촌매형이 앞장을 섰다는 것을 알게 되자 한 반년 전에 있었던 일이 생각났다. 육영수가 송재관에게 전화를 걸어 "동생, 회사 끝나고 우리 집에 들려줄테야?"라고 했다. "무슨 일이죠?" "나, 지난 번에 돈 탄 것 가지고 집 수리했어.". 그날 퇴근길에 신당동에 들렀더니 육영수는 처마 끝에 플라스틱 차양 을 덧대어 놓고 자랑하고 있었다. 곗돈을 타서 마음먹고 만든 것이었다. 그런 평범한 주부이던 육영수에게 송재관은 5월17일 전화를 걸었다. "아니, 매형은 왜 앞장 서서 그런 일을 했어요?". 송재관은 사촌누님으로부터 "그러게 말이다…"란 말을 기대하면서 위 로의 말을 준비했다. 그런데 수화기를 통해 들려오는 육영수는 정치나 시국같은 데에는 무관심하던 예전의 그 사람이 아니었다. 육영수는 정색 을 하고 말하는 것이었다. "아니, 동생 무슨 소리야?" "아니, 매형이 위험한 일에 가담하셨기에…". 송재관은 순간적으로 '내가 말을 잘못 했나'라고 생각했다. 육영수의 또박또박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세상이 온통 부정부패로 물들고 혼란에 빠진 채로 국민들이 어떻게 살겠어? 그냥 그대로 간다면 나라는 어떻게 될 것 같아?". 송재관은 대충 대답하고 전화를 끊으면서 "이상하다. 저 누님이 언제 저렇게 변했나"라고 중얼거렸다. [박정희 생애] 제11부 국가개조 (13) -- <324>'혁명한 사람의 아내'로서 .사진설명 : 장충동 의장 공관 시절의 박정희 일가. 왼쪽부터 지만, 육영수, 박정희, 근혜 , 근영. "첫째, 한일 국교정상화 문제를 빨리 해결해야 합니다. 북쪽으로도 막혀 있고 바다로도 막혀 있는 이 나라의 활로를 트는 데는 그 길밖에 없습니다. 둘째, 중공업을 일으켜야 합니다. 중공업은 계열사를 많이 만들게 되므로 일자리가 많이 생깁니다. 셋째, 정치적으로 사람을 거세 는 하더라도 죽여선 안됩니다. 넷째, 구정치인들에 염증을 느낀 국민들 은 지금 군인들만 쳐다보고만 있는데 학자들을 많이 등용하십시오.". 당시 고려대학교 영문학과 3학년이던 홍소자가 이모를 찾아간 것은 5월 하순이었다. 이모 육영수는 혁명 후 스무 명 가량으로 늘어난 식구 들(경비병, 운전병, 연락병 등)에게 식사 등 뒷바라지를 하느라고 정신 이 없었다. 홍씨는 이런 증언을 남겼다. "이모님은 혁명 후 전혀 달라진 것이 없었어요. 혁명 전과 똑 같은 모습이요 생활이었습니다. 어떤 환경속에서도 당황하거나 변하는 일이 없이 이모님은 주부로서의 본분만 한결같이 지켜나가시고 계셨어요. 그 래서 우리가'이모, 이제 좀 처신이나 몸가짐이 달라지셔야지요. 부엌에 드나드시는 일도 삼가시고 아랫사람들에게 시킬 건 시키시고 이모님이 손수 하시지 않아도 되잖아요'라고 말했어요. 이모님은 '이리리(육영수 가 즐겨 쓰던 감탄사)? 왜 내가 달라져야 하니? 달라지기를 바라는 마 음이 비뚤어진 게 아냐?'라고 말씀하셨어요". 육영수는 이날 홍소자의 마음속에 오래 남는 말을 한 마디 덧붙였다. "나는 우리 생활에 언젠가는 기적처럼 큰 변화가 오리라는 기대 속 에서 살아왔단다.". 이 대목에 대해 시인 박목월은 자신의 저서 '육영수 여사'에서 이렇 게 해석했다. <이 의미심장한 여사의 말은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할 수 있겠으나 평소의 순수한 아내로서 여사의 신념이나 생활을 배경으로 풀이한다면 아무리 어려운 살림이나 환경속에서도 우리 사회나 남편의 장래에 어떤 기적 같은 변화가 오게 되리라는 가능성에 대한 영감속에서 살아왔다는 뜻이며 또한 그것은 남편의 무한한 가능성에 대한 아내로서의 신뢰이며 그러므로 여사는 혁명조차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되었다는 의미일 수도 있다.>. 7월에 접어들자 육영수가 졸업한 배화여고 동기동창인 이종문이 동 문들을 이끌고 신당동 댁을 찾았다. "혁명 나던 새벽엔 얼마나 불안했어요?". 동문들이 이렇게 묻자 육영수는 담담하게 말했다고 한다. "거사에 실패하면 저도 남편따라 죽을 각오를 했었지요.". 동문들이 돌아갈 때 육영수는 한 사람 한 사람 손을 잡고 당부하는 것이었다. "저 자신 부족한 점이 많아요. 남들이 잘못한다고 비판하는 점이 있 으면 동창들이 꼭 알려주어야 해요. 열심히 배우고 노력하면서 부족한 점이나 그릇된 점을 고쳐가도록 해보겠어요.". 육영수가 처음으로 공식석상에 등장한 것은 혁명주체 장교들끼리 경 회루에서 자축파티를 열 때였다. 박정희나 육영수나 파티 같은 행사를 싫어하여 거의 나가본 적이 없었다. 육영수는 장롱에서 몇 가지 되지 않은 옷가지를 꺼내 하나 하나 몸에 걸쳐보이며 유일한 의논 상대자인 어머니 이경령에게 물어보곤 했다. <여사는 흰 수치마를 몸에 둘러보며 어머니를 돌아보는 것이었다.이 경령여사는 웃고만 있었다. 수치마저고리 차림은 수수하고 청초해 보였 다. 파티에 나가려고 여사는 뜰로 내려서다 말고 누구를 향해서가 아니 라 가족 전체를 돌아보면서 혼자말처럼 중얼거렸다. "혁명한 사람의 아내다운···". 비록 끝이 희미했지만 여사가 말하려는 뜻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 던 것이다. '혁명한 사람의 아내다운 옷'-이런 뜻이었다. 군인이나 장 성의 아내에서 여사는 '혁명한 사람의 아내'로서 새로운 자각과 사명을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육영수 여사'에서 인용). 박정희가 최고회의 의장이 된 뒤로는 외국 대사 부인들이 신당동을 찾는 일이 잦아졌다. 어느 날 대사부인들이 단체로 신당동을 찾아오겠 다는 기별을 받고 육영수는 당황했다. 서른 평도 안되는 방에 이들을 앉힐 의자가 모자랐다. 소파도 없는 집이었다. '이 일을 어쩌지?'하면 서 고민하던 육영수는 이웃집을 돌아다니면서 의자를 모아왔다. "사모님, 이제 되셨습니까?". 경호병이 묻자, 육영수는 마루에 놓인 의자들을 둘러보면서 말했다 고 한다. "각양각색이네요. 의자 전시장인가 보네.". 손님들이 오면 육영수는 박정희와 동석하지 않고 소매를 걷어붙이고 부엌일만 했다. 과자를 굽고 차를 끓이고 술안주를 마련했다. "사모님, 심부름하는 사람 더 들입시다". 주위에서 건의를 하면 육영수는 "우리가 편하려고 혁명했나요"라고 쌀쌀하게 끊어버리곤 했다. 일손이 부족할 때는 조카들을 불렀다. 육영 수는 몸이 큰 외국인들이 마루를 밟으면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릴 정도 의 초라한 집에서 접대를 끝내고 손님들을 보낸 뒤엔 꼭 이런 자문을 하곤 했다. "접대를 제대로 했는지 모르겠네?" "이모님, 제가 보기엔 썩 잘된 것 같아요." "그래···그럴까?". 육영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녀는 항상 되살피며 다시 생각해보 곤 만족하게 생각하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우리가 '어떤 인상을 주었 을까?'하고 궁금해 하기도 했다. 육영수는 완벽을 추구하는 성격의 소 유자였는데 이것이 자신을 괴롭히기도 했다. [박정희 생애] 제11부 국가개조 (14) -- <325>군인과 문인 .사진설명 : 하버드 경영대학원 시절의 이한빈. <나는 5·16아침을 어느 무희집에서 맞았다. 그녀는 아침 화 장을 하면서 방송을 들으며 "이러면 세상이 어떻게 되는가요?선 생심 신상에 행여나 해나 없을까요?"하고 연거푸 물었다. 나는 그녀의 말을 귓등으로 흘리며 '말 째찍소리도 고요히 밤을 타서 강을 건느니 새벽에 대장기를 에워싼 병사떼들을 보네'-그 친구 의 일본시음을 흉내내어 새벽의 한강을 떠올리고 있었다.>. 이용상은 박정희를 '지만 아버지', 구상은 박정희를 '박첨치' 라고 부르고 있었다. 이용상은 5월16일 밤에 구상의 집을 찾아 갔다. 구상은 첫 마디가 "박첨치 그 친구 빨갱이 아닐까? 이북 과 무슨 선을 대지 않고서야 어떻게 쿠데타를 일으킬 수 있겠는 가?"였다. 신라통일 이후 우리나라는 문민통치의 전통을 이어 왔다. 약100년에 걸친 고려 무신통치기가 유일한 예외였다. 이 런 역사적 풍토에서 대부부의 우리 민간인들은 군인이란 종류의 인간들이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을 수 있다고는 꿈에도 생 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한국의 쿠데타는 무인통치가 정상인 터 키나 일본의 쿠데타와는 그런 면에서 차원이 달랐다. 박정희의 쿠데타는 우리 민족사의 생리에 비추어 극히 예외적인 사건이었 고 그만큼 문민(또는 문인)의 저항은 극렬해진다. '쿠데타가 엉 뚱하다'는 구상의 첫 반응은 우리 정치사에 이물질처럼 들어온 군인들에 대한 역사의 거부감, 그 조건반사적 표현이었을 것이 다. 그 사흘 뒤 구상은 박정희와 만나는데 '모과(목과)옹두리에 도 사연이'란 자전시집에서 이렇게 썼다. <그와 마주앉은 것은 5월19일 저녁, 기 총을 실은 장갑차가 마당에 놓인 어느 빈 호텔의 한 방, 그도 나도 잠자코 술잔만을 그듭 비웠다. 마침내 그가 뚱단지같은 소리를 꺼냈다. "미국엘 좀 안가 주시렵니까?" "내가 영어를 알아야죠?". "영어야 통역을 시키면 되죠." "하다못해 양식탁의 매너도 모르는 걸요!". "그럼 어떤 분야라도 한몫 져주셔야지!" "나는 그냥 남산골 샌님으로 놔두세요!". 얼핏 들으면 만담 같은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우리는 술잔을 거듭 비웠다.>. 박정희는 구상을 최고회의 의장 상임고문으로 내정하고는 친 지들을 통해서 설득했으나 구상은 경향신문 도쿄 특파원을 자청 했다. 떠나기 직전 만난 두 사람은-. <궁리 끝에 신문지국 간판을 메고 유 의 길에 오르듯 '도오 꼬오'로 향했다. -바로 내 앞방에다 사무실을 마련해 놓았는데 끝내 가시기요, 이 판국에 일본낭자들과 재미나 볼 작정인가요? -시인이란 현실에서 보면 망종이지요. 그래서 '플라톤'도 그 의 이상 가에서 시인을 추방하는 게 아닙니까! 비행창으로 구 름밭을 내다보며 그 현실로부터의 격리를 확인하면서도 그와의 작별 때 대화가 내 뇌리를 후벼팠다.>. 구상은 그 뒤 신문사와 천주교회와 관련된 어떤 사건에 휘말 려 마음 고생을 엄청 한다. 자전시에 이렇게 쓸 정도이다. <내가 희망치도 않은 이해에 얽혀 교회의 암흑면을 체험하 게 된 것은 내 영혼의 치명상이었다. 견월망지! 라는 불도문자 를 되 외우고 되씹고 되새겨도 그 더러운 사제의 손에서 성례 의 비의를 용납할 수가 없었고 도처에 높이 솟아 있는 교회당 들이 회칠한 신의 무덤으로 보여졌다.>. 박정희는 구상을 만난 자리에서 이 사건을 화제로 삼는다. <"그 신문사 일 어떻게 되었어요?"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시 줄을 쓰는 것밖엔 없나 봅 니다". "보고를 받아 다 알고 있어요. 교회라는 거룩한 탈을 쓰고 그 짓들인데 그 사람들 법으로 혼들을 내주시죠. 그렇듯 당하고 만 가만히 계실 거예요?" "그럼 어쩝니까? 예수가 왼 뺨을 치면 오른 쪽 뺨을 내 대 라고 가르치셨는데야!". "그래서야 어디 세상을 바로잡을 수가 있습니까?" "그게 바로 천주학의 어려운 점이지요!" "천주학이라!". 그는 그 말을 되뇌까리면서 더이상 나를 힐난하려 들지는 않았으나 자못내가 한심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마 이때 그 는 나를 현실에 이끌어들이려는 생각을 단념했을 것이다.>. 엘리트 관료의 눈에 비친 군인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당시 재무차관은 이한빈(경제부총리 역임)이었다. 하버드 경영대학원 을 졸업한 첫 한국인이다. 그는 재무부 예산국장 시절 미국에 출장을 갔다가 5·16을 만났다. 귀국하여 승진, 군인장관들 아 래서 일하는데 많은 장교들과 강연을 통해서 친면을 익혔다. 송 요찬 내각수반도 자유당 시절 이한빈으로부터 기획예산제도에 관하여 강의를 들은 적이 있었다. 어느 날 송수반이 급히 이차 관을 찾았다. 송요찬은 이한빈이 들어오자 회의탁자 위에 넒은 브리핑 용지를 펴놓고 붉은 연필 한 자루를 그의 손에 쥐어주면 서 이렇게 말했다. "이 차관, 이제 정부 각부에 기획조정실을 창설해야 하겠는 데 그 기회조정관은 장관 차관 다음으로 중요한 직책이 될 것이 오. 각 부의 국장급에서든지 전직자라도 좋으니 가장 유능한 사 람의 이름을 적어보시오.". 이한빈은 어이가 없었다. 그는 망연히 앉아서 망설였다. 송 수반은 "지금 바로 정해서 오늘 근무시간내에 발표하려고 하니 빨리 적어보라"고 재촉했다. 이한빈은 적어내려갔다. 김태동,김 영주, 이철승, 이창석, 강봉···. 다음날 이한빈은 인사 발표 를 보고는 두번째로 놀랐다. 자신이 써준 그대로 방이 붙은 것 이다. 이한빈은 '참으로 혁명정부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을 하 는구나'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
첫댓글 참으로 오랜마에 듣는 좋은말씀이네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