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3회에서 <천무영웅전>을 소개하겠다고 예고했으나 모종의 사정이 생겨 한 회 미
룬다는 점을 먼저 밝히고, 양해를 구해야겠다.
그 사정이란 즉, <천무영웅전>의 원본으로 짐작되는 중국무협을 구했다는 것인
데, 제목을 <검풍곡>이라 하는 이 작품을 지금 읽고있는 중이기 때문에 다 읽고
<천무영웅전>과 비교 분석해 번역인지, 번안인지, 혹은 모티브만 딴 것인지 결론
내리기 전에는 무어라 말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이런 일이 생기는 것 자체가 초기 한국무협의 한 실태를 말해주고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여러모로 재미있다. 중국무협에서 한국무협으로의 전이의 한 과정을 생
생히 보여주고 있는 것 같아 진지하게 고찰해 볼 생각이다.
마침 아는 분으로부터 구하기 어려운 책을 빌린 것도 있어서 이번 회에 대신 소
개할까 한다. 제목에 말한 바, 조풍연의 <유성검>이다.
2.
조풍연(1914-1991)은 연희전문 문과를 졸업하고 매일신보 기자로 출발해서 한국
일보 논설위원과 편집부장을 거친 언론인이다. 그러는 한편 색동회 회원으로 아
동문학에 많은 공헌을 해서 출판학회상을 수상한 경력도 있다.
60년대에서 80년대까지 조풍연이라는 이름을 아동 문학선집이나 동화책 등의 책
귀퉁이에서 찾아보기란 어렵지 않았다. 이 사람의 저서 중에 <유성검>이라는 무
협지같은 제목의 책이 한 권 있는데, 이걸 이야기하려는 것이다.
출판사는 어문각. 출간연도는 1978년 4월. 70년대에 아동기를 보냈던 사람이라면
모두 기억할 어린이 잡지 새소년에 연재되었던 것으로, 책도 새소년 클로버문고
152번으로 출간된 것이다.
아래는 권두에 있는 조풍연의 서문과 목차다.
3.
책 머리에
역사상에 실제로 있던 이야기에 살을 붙이고 상상력으로 내용을 더 파고 들아가
꾸며내는 것이 역사소설입니다.
이 책에 나오는 사 철령이라는 청년과 좌 준 소년은 임진왜란 때에 살던 사람이
요 왜군과 맞서서 활약하던 사람인데 그들에 관한 이야기는 우리나라 기록에 남
아있지 않습니다. 그 대신 일본 역사 기록에는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한국
과 일본의 임진왜란의 기록을 파고 들어서 조사한 끝에 이 소설을 구상하게 된
것입니다.
새소년 잡지에 모두 14회에 걸쳐서 연재했었습니다. 연재하는 중간에 많은 독자
로부터 격려의 통신을 받았는데 일일이 답장을 못한 것을 참 안 됐다고 생각합니
다.
내가 1973년에 일본에 여행했을 때에는 ‘사 철령’에 관한 연극을 하고 있었지
만 불행하게도 볼 기회를 놓쳤습니다. 그것은 불 속으로 뛰어 들어 도꾸가와 이
에야스의 딸 센히메를 구출했는데도 오히려 모함에 걸려 죽고 마는 한국인 청년
의 비극을 내용으로 한 것이니까 내 소설에서는 극히 일부분에서 다룬 것에 지나
지 않습니다.
이것의 뒷이야기는 독자들의 성화 같은 요청을 못 이겨 새소년 잡지에 <남해의
왕자>라는 제목으로 연재중입니다. 이것도 계속 읽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1978. 4. 30
조풍연
차례
울산성
소년 지병
차마 못할 짓
청년과 소년과
창과 칼과 피와
무술담
이중 간첩 요차랑
패퇴하는 왜군과 함께
왜군의 통역 안토니오 김
망해버린 풍신 세력
어전 결투
총번 무사
유구국의 공주
볼모잡기의 설움
천하 뺏기 싸움
무사시노의 달
날랜 제비
태껸 태극형
마지막 공세
전쟁과 평화
불길 속의 결전
동족의 참상을 보고
장군의 손자
사랑과 미움과 기쁨과 슬픔과
탱자나무 아래의 이별
4.
서문과 목차를 보면 짐작이 가듯이 이 소설의 시간적 배경은 임진왜란과 그 후
몇 년이고, 공간적 배경은 조선과 일본이다. 주인공은 사 철령이라는 청년과 좌
준이라는 소년, 그들이 임진왜란 동안 의병으로 게릴라 전을 펼치다가 죄 없는
양민을 잡아 항복할 때까지 학살하겠다는 위협에 소서행장에게 투항하고 이후 일
본으로 포로로 끌려간 뒤 벌이는 이야기이다.
사 철령은 창술, 좌 준은 검술을 쓰는데 일본에 그들을 당할 무사가 없다. 그래
서 사 철령은 도꾸가와 이에야스의 휘하 장수가 되어 활약하고, 좌 준은 유생신
음류(柳生新陰流)를 연 야규우 세키슈사이 무네노리(柳生石州齋宗嚴)의 식객이
되어 그 손녀에게 검술과 태껸을 가르친다.
사 철령은 유구국의 공주와 결혼도 하고 도꾸가와의 총애를 받다가 거기 불만을
갖는 장수들의 무고에 의해 할복해 죽게 되고, 그걸 계기로 좌 준은 일본을 떠나
조선으로 돌아온다는 게 간단한 스토리다.
5.
이걸 소개하는 이유는 초기 한국무협의 한 시도로 보았기 때문이다. 이미 1회에
서 이야기 했듯이 무협소설이 번역 소개되던 그 초창기에는 한국적인 무협도 몇
몇 시도되었었다. 이 유성검도 그 중 하나로 보고싶은 것이다.
‘한국을 배경으로 한 한국인의 무협이야기’의 시초는 고향하와 성걸이 1969년
에 발표한 <뇌검>이라는 데에는 별로 이견이 없는 것 같다.
삼국시대를 배경으로 일본의 닌자를 연상케 하는 음자(陰者)와 검객들의 이야기
를 흥미진진하게 펼치고 있다는 점에서 점수를 후하게 주고 싶지만 아쉽게도 이
소설에는 당시 유행하던 일본 사무라이 소설의 냄새가 너무 짙게 배어있다. 내용
중 상당 부분은 그런 사무라이 소설의 에피소드를 빌어 온 것임이 분명한 것들도
있어서 신춘문예로 등단했다는 저자 소개도 약간 의심스럽게 보는 이유가 된다.
한국적 무협소설을 이야기 할 때 더욱 중요하게 다뤄야 할 작가는 김병총인 것
같다. 그는 <빨간 우산>이라는 소설로 문학사상 제 1회 당선자가 되어 등단했고,
다수의 소설을 발표한 중견 작가로서 <칼과 이슬>, <달빛 자르기>, <대검자(大劍
子)>, <무예도보통지> 등의 무협 냄새 물씬한 소설들이 그의 작품 목록에 담겨있
는 것이다. <무예도보통지>의 서문에서는 이러한 일련의 작품들을 통해 “스케일
이 큰 무협의 일대 로망을 그려볼 참”이었음을 술회하고 있다. 이런 의도가 얼
마만큼이나 성취되었는지는 작품에 대한 분석에서 차후 이야기 하기로 하더라도
그의 소설 <대검자>가 TV 드라마로 만들어질 정도의 성공은 거두었다는 점에 의
미를 둘 수 있겠다.
그리고 여기 조풍연의 <유성검>이 있었다.
6.
한국적 무협에 대한 내 일관된 생각은 대단히 회의적인 것이다.
무협이라는 것은 한국적인 개념이 아니다. 한국과 어울리는 이름도 아니다. 그러
므로 우선은 쓰기도 어렵고, 만약 써서 잘된 작품이 나온다고 해도 그걸 무협이
라고 이름 붙여 팔 이유도 없다. 위에 예를 든 작품들이 모두 그렇다.
<뇌검>은 한국무예소설, 김병총의 작품들은 그냥 무예소설, 조풍연의 <유성검>은
역사소설이라고 장르표기가 되어 있다. 또 실제로 이러한 작품들이 이후의 무협
소설이나 한국문단에 영향을 주었냐 하면 그렇지도 않다. 별 주목을 받지 못하고
조용히 스러졌거나 주목을 받았다고 해도 어디까지나 한 작가의 특이한 시도로
간주되었을 뿐 사마달, 금강, 혹은 용대운의 작품들처럼 어떤 흐름에 분수령이
된다거나, 거기 영향을 받은 작품들이 뒤를 이은 일도 없었다. 이 작품들은 본질
적으로 무협이 아니었고, 장르화 되지도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무협이라는 좁은 틀을 벗어나서 대중문학의 하나로서 이 소설들을 보고,
그 가치를 생각하자면 이야기는 많이 달라진다. 이 소설들은 무협이 아닐지는 몰
라도 훌륭한 한국적인 읽을거리라는 것이다. 특히 우리나라 사회와 문단에서 극
히 경시되었던 ‘흥미본위의 서사물’(MARS에서 벌어진 같은 주제에 대한 토론에
서 진산이 한 표현이다)로서 의미가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피가 되고 살이되는 교양서적만 책으로 취급하는 우리나라 출판 독서시장에서 이
런 흥미본위의 책들은 문단에서는 사생아 취급을 받고 지식인들에게는 뒷발에 채
여가며 참으로 지난한 세월을 음지로 떠돌아야 했다.
사람은 공부만 하면서, 일만 하면서 살 수는 없다. 때로는 쉬어야 한다. 어느 책
이든 인간과 사회, 그 속에서의 삶에 대한 진지한 고민과 성찰을 담고있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책은 지친 심령에 위안이 되어주는 것으로 가치를 인정
받을 수 있다.
사회와 문화의 그런 부분을 감추고 억눌러 놓고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책만을 인
정한다는 것은 조금 더 밀고 나가면 교과서만 책으로 인정하고 문학전집에 포함
된 소설만 문학으로 인정하자는 태도와 다르지 않다.
사회와 인간의 다양한 욕구와 필요를 인정하고 즐기는 여유를 갖지 않는다면 무
협은 물론 대중문화 전반의 생산물들은 언제까지나 하수구로만 떠다니게 될 것이
다. 다행히 근래에 들어와서는 이러한 지적 엄숙주의가 어느정도 파괴되고, ‘재
미’라는 것에도 일정정도의 가치를 부여하는 문화적 풍토가 이룩되고 있는 듯하
다.
억압된 것이 오래되었던 만큼 그 역작용이라는 것도 커서 그리 보기좋지 않은 모
습들이 우선 노정되고 있기는 하지만 나는 문화와 사회의 자정작용이라는 것을
믿는다. 더 나가고 덜 나가고 삐걱거리다가도 어느 선에서 균형이 맞으면 그땐
좀 더 자유롭게 대중문학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 중국이니 한국이니, 무협이니
환타지니 혹은 환협지니 따지지 않고 말이다.
세상은 될 대로 되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