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당 8백 원을 받는 경비원의 아들’, ‘고리 사채로 머리채 잡혀 끌려 다니던 어머니의 아들’이었고, 네 번이나 국회의원을 지낸 중진의원이면서도 ‘비주류’라 불렸다. 때문인지 ‘계파타파’와 ‘친 서민정책’을 당의 새로운 슬로건으로 내건 한나라당의 새로운 수장 홍준표 대표.
그와 장충단 공원에서 차를 한잔 나눴다. 그 자리에 호남 출신 아내 이순삼 여사도 함께했다.
홍준표 대표는 지난 7월 4일 제12차 한나라당 전당대회에서 선거인단 투표와 여론조사 결과를 합산한 결과, 4만 1천6백66표로 1위를 기록하면서 당대표로 선출됐다. 2위와의 표차는 무려 1만 표에 육박할 정도로 압도적인 승리였다.
그러나 이처럼 대쪽 같은 그의 성품이 검찰 수뇌부에게는 부담이었다. 결국 그는 ‘통제가 안 되는 별종’으로 낙인찍혀 울산·광주지검 및 안기부·고검 등으로 보내졌다. 그리고 그는 자의 반 타의 반 검사복을 벗게 됐다. 15년 정치인생도 녹록치 않았다. 1996년 정계에 입문해 민주당 성향이 짙던 서울 송파구에서 국회의원 배지를 달았고, 탄핵정국이 휘몰아치던 17대 총선에서도 서울 17개 선거구 중 유일하게 한나라당 의석을 지키기도 했지만, 아픔도 있었다. 2006년 서울시장 후보 경선, 2007년 대선 후보 경선에서 연달아 고배를 마셨다. 정치활동 내내 ‘비주류’의 길만 걸어왔기에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을지도 모른다. 계파가 없는 정치인이기에 그에게 표를 던져주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이처럼 그는 검사시절이나, 정치인의 길을 걸으면서도 ‘요동치는 변방’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러나 정작 본인은 비주류의 삶이 자신을 성장시켰다고 믿는다. ‘가난’과 ‘외압’에 내성을 가진 정치인은 그리 많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대표 수락 연설에서도 “치열했던 변방의 정신을 잊지 않겠다”고 말했다.
강인한 내성을 가진 정치인
내년 총선과 대선을 앞둔 중요한 시점에서 한나라당 대표가 되었습니다. 여당 수장이 된 부담감이 클 것 같습니다. 부담감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제가 당을 어떻게 운영하느냐에 따라 보수정권이 지속될 것인가 아니면 진보정권에게 정국을 빼앗길 것인가가 달려 있습니다. 모두의 시선을 받아야하니 부담감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총선에서 승리해야 대선까지 수월할 것이고, 총선에서 참패하면 대선도 실패할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정책을 총선 승리에 맞추고 있습니다. 지금까지는 무난히 해오고 있습니다.
총선의 승리 비책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지금 하고 있는 모든 것들이 총선 승리 비책입니다. 제가 대표가 된 후 한나라당이 민주당보다 지지를 10% 더 받고 있습니다. 그것도 최근 진보진영 매체에서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입니다. 제가 당대표가 되고 난 뒤에, 이제야 국민들이 당의 진정성을 알아봐주신 것 같아요.
대표 취임 이후 서민정책을 강화하겠다고 밝혔습니다. 반드시 우선 추진해야 하는 서민정책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서민정책은 지난해 9월부터 시작했습니다. 우선적으로 서민들이 가장 힘들어하는 게 대출문제입니다. 지금 서민들은 돈을 빌릴 곳이 없습니다. 그래서 대부업계 이자율을 66%에서 39%까지 낮췄습니다. 은행 대출도 어렵긴 마찬가지입니다. 지난해 9월 은행업계와 합의를 하고 서민층에 저리로 대출하는 ‘새희망홀씨대출’ 상품을 출시하도록 했고, 얼마 전 은행업계에서 2천억을 더 출연하겠다고 밝혔습니다. 또 자영민들을 위한 카드수수료 인하, 대기업의 횡포에 시달리는 중소기업을 위해 ‘납품 단가 조정 신청제’를 도입했습니다. 비싼 등록금으로 마음고생을 하는 서민 자녀들을 위해서도 소득 차등별로 국가에서 등록금을 지원하는 제도를 마련하고 있습니다.
‘당당하게 할 말을 하는 정치인’이라는 시각과 ‘예측하기 힘든 독불장군’이라는 시각이 공존하고 있습니다. 네, 저는 독불장군 기질이 있어요. 비주류였고, 치열하게 살았기 때문이죠. 학창시절에도 도시락을 먹은 적이 없어요. 거의 수돗물로 배를 채웠어요. 대학도 힘들게 다녔어요. 아버지의 마지막 직업이 현대중공업에서 일당을 받는 비정규직 경비원이었어요. 그렇게 살았기 때문에 세상이 뭔가 공평하지 않다는 걸 일찍 깨달았죠. 착하고 열심히 살려고 해도 기회가 안 주어졌습니다. 그런 점에서 다른 정치인들과 다른 부분이 많으니 그렇게들 보시는 것 같습니다.
당대표가 된 이후 일과에 변화가 많았을 것 같아요. 많이 바뀌었어요. 예전에는 저녁 8시면 집에 들어가서 집사람과 식사를 하고 이야기하다가 자는 게 일과였는데, 요즘에는 만날 사람이 많이 생겼어요. 각계 전문가들도 만나고, 언론에 종사하는 사람들도 자주 만납니다. 애주가였던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셨거든요, 그걸 보고 자란 탓인지 제가 술을 잘 안 합니다. 그런데 요즘은 술을 자주 마셔요. 조금씩 횟수를 줄이려고요.
(옆에서 조용히 인터뷰를 듣고 있던 이순삼 여사가 마침 거들었다.) 가장 달라진 건 집에서 거의 저녁을 못 드신다는 겁니다.
서운하시겠어요. 저도 같이 바빠요.(웃음)
혹시 어릴 때 다른 꿈이 있었나요? 군인이 되려고 했어요. 이유는 단순했어요. 졸업을 하면 안정적인 직장(?)이 생길 거라는 막연한 기대 때문이었죠. 기왕 군인이 될 바엔 조국이 위기에 빠졌을 때 이 한 몸을 던져 명장의 반열에 오르자는 생각도 있었어요.
그런데 1971년 육사에 합격한 뒤 신체검사 날짜를 기다리고 있던 어느 날 아버지에게 사고가 생겼어요. 아버지가 훔친 비료를 샀다는 장물 취득 혐의를 받고 이틀 동안 파출소에서 곤욕을 치르셨죠. 그해 바로 육사를 포기하고 법과대학에 갔어요. 그런데 공직생활 30년 가까이 하면서 고생도 많이 했지만 그 이후로는 나라로부터 큰 혜택을 받았어요. 내가 정치를 얼마나 더 할지 모르겠지만 이제는 내가 받은 혜택을 돌려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세상을 좀 더 공평하게 만들고 사회적 약자나 소외계층을 도와 그들이 일어서게 하는 것이 지금의 저를 있게 한 대한민국에 보답하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보답은 하고 정계 은퇴하려고 합니다.
벌써 ‘정계 은퇴’라는 말을 꺼내는 것은 너무 이른 거 아닌가요? 아닙니다. 남자는 3~4년의 최정상을 위해 평생을 삽니다. 그러나 정상의 자리는 오래가지 않습니다. 정상에 올라간 뒤 아름답게 내려와야 합니다. 언제나 내려갈 것을 생각하고 올라가야 해요. 정치인은 아름다운 정계 은퇴를 항상 염두에 둬야 합니다.
그렇다면 대표님은 정상의 위치에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올라가고 있는 중입니다. 하하.
두 아들과 아내는 든든한 지원군
홍 대표는 고시공부에만 열중하던 1976년 4월, 자신의 모교인 고려대학교 안암동 캠퍼스에 돈을 찾으러 갔다가 창구에서 아내 이순삼 여사(58)를 보고 첫눈에 반했다. 그날 이후 매일 점심을 먹고 학교에 올라가는 길에 은행에 들러 2~3천 원씩을 찾았다. 그러다 어느 날부터 이 여사가 보이지 않았고 홍 대표는 서운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그러나 그해 10월쯤 돈을 찾으러 은행에 갔던 홍 대표는 창구에서 미소를 짓고 있던 이씨를 다시 보게 되었다. 이 여사를 잘 안다는 지인에게 만남을 갖게 해달라고 도움을 청했다. 홍 대표는 첫 데이트에서 “나는 돈도 없고 군대도 다녀오지 않았지만, 당신이 좋다. 혹시 당신도 내가 좋거든 수요일까지 중앙도서관 4층 법대 도서관으로 나와라”고 프러포즈를 했다.
그러나 홍 대표의 예상은 빗나갔다. 이 여사는 수요일이 아닌 월요일에 빨간 코트를 입고 중앙도서관 앞 벤치에 앉아 있었던 것. 이 여사는 예상보다 빨리 나왔다는 홍 대표의 말에 “오늘 오면 안 됩니까?”라고 되물었다고 한다. 이후 두 사람은 1982년 12월 23일 결혼했다.
(이 여사의 말이 끝나자마자 홍 대표가 재빨리 말을 이어받았다.)
저는 정말 신정일 후보를 찍었습니다. 당시 울산에서 세 표가 나왔는데, 그중 한 표가 접니다. 솔직히 아내도 신정일 후보를 찍었다고 믿었는데, 1995년에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됐어요. 당시 아내와 제가 전라도 출신 기자와 영호남 부부의 애환에 대해 인터뷰를 한 적이 있었는데, 그 자리에서 기자가 “아마도 부인은 김대중 씨를 찍었을 것”이라고 말하더라고요. 그 말에 아내가 “그 말이 사실”이라고 인정했고요.
저는 남편이 알고 있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투표소에 들어가서 한참을 못 나오고 있었어요. 김대중 후보를 찍으려고 하니까 손이 벌벌 떨리더라고요.
가훈이 재미있습니다. 사법시험에 합격할 때까지는 ‘산 입에 거미줄 치랴’, 좀 먹고 살만해지면서 ‘바르게 살자’, 정치를 하고 난 다음에는 ‘화이부동(和而不同, 남과 사이좋게 지내기는 하나 무턱대고 어울리지는 않는다)’이라고 들었는데, 아직도 ‘화이부동’입니까? 어릴 때하고 청년시절에는 하도 못 살아서 ‘산 입에 거미줄 치랴’, 검사시절에는 ‘바르게 살자’, 정치할 때는 ‘화이부동’, 이런 식으로 변천이 됐어요. 저희 집 가훈은 제가 만들었어요. 지금까지도 화이부동입니다. 하하.
홍 대표는 집에서 어떤 가장인가요? 굉장히 다정다감하신 편이에요. 아이들은 늦게 들어오면 꼭 아버지에게 전화를 합니다. 저한테는 안 하고요.
(홍 대표) 저희 집 큰아들이 서른한 살, 둘째아들이 스물아홉 살입니다. 큰아들은 전투경찰을, 둘째는 해병대를 다녀왔지요. 저녁에 퇴근할 때가 되면 제가 전화를 하든지 아이들에게 전화가 오든지 합니다. 대표가 되기 전까지는 제가 전화를 안 걸면 아이들에게 반드시 전화가 왔어요. 두 녀석이 저를 닮아 술을 잘 안 마시니까 일찍 귀가하는 편입니다. 엄마가 바쁜 일이 생기면 집에서 제 밥을 챙겨주기도 합니다. 심지어 둘째는 회식을 하다가도 “아버지 밥 차려드리러 가야 한다”며 나옵니다.
항간에는 굉장히 엄격하게 키웠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엄하게 키운 건 맞습니다. 바르게 키우려고요. 그런데 군에 갔다온 후 아버지를 많이 이해하게 됐다고 하더라고요. 두 아들 모두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홍준표를 뽑습니다. 그래서 저는 인생을 성공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큰놈은 제 모든 것을 챙깁니다. 퇴근할 때 뉴스를 검색해서 오늘 아버지 기분이 별로겠다 싶으면 집에 와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풀어놓습니다. 두 아들이 많이 의지가 됩니다.
정치인의 아내로 살아오면서 힘든 순간이 많았을 것 같아요. 선거운동 하러 다닐 때가 가장 힘들어요. 남편이 해놓은 많은 일들을 제대로 홍보하는 게 어렵죠. 특히 반대편에서 남편이 힘들게 처리한 민생 현안들을 자기가 다 한 것처럼 말하고 다니는 걸 볼 때면 속이 상해요. 근데 이상한 건 그런 거짓말들을 믿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이에요.
(홍 대표) 내가 한 일을 이야기하는 게 쑥스러워요.
차라리 가만히 있으면 좋은데, “그만해라”라고 말한다니까요. 그럴 때면 정말 속이 탑니다. 최근에도 그런 일이 있었어요. 남편이 힘들게 추진했던 정책이 힘겹게 통과됐어요. 그랬더니 처음에 그 정책에 반대했던 상대측이 자기가 한 일처럼 현수막을 걸어놓았더라고요. 저나 당직자나 그런 걸 잘 따지질 못해서 애만 태우고 있어요.
다시 태어나도 정치인의 아내로 살고 싶나요? 평범하게 살고 싶어요. 정치인의 아내로 살아간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닌 것 같아요.
가난했지만, 꿈이 있어 행복했던 지난날
홍준표 의원은 1954년 경남 창녕에서 태어났다. 달비(가발을 만드는 데 쓰는 부녀자나 처녀들의 머리카락) 장사를 하던 어머니와 일당 8백 원을 받고 조선소 앞 철근 조각을 지키던 아버지 밑에서 지독한 가난을 운명처럼 생각하며 자랐다. 가난 때문에 초등학교 시절 매년 이사를 다녀야 했고, 도시락을 쌀 형편이 되지 않아 점심시간에는 주린 배를 물로 채우며 학교 뒷산에 올랐다. 밥과 반찬냄새를 맡으면 허기가 심해졌기 때문이다. 그렇게 가난은 그의 운명이었다. 식구들이 아무리 발버둥쳐도 절대 벗어날 수 없는 올가미였다. 심지어 식구들이 가난에서 벗어나고자 간신히 터를 잡은 곳도 극심한 가뭄과 장마가 이어지면서 집과 밭이 순식간에 사라지기도 했다.
그때부터 홍 대표는 공부밖에 할 수 없었다. 그가 미친 듯이 학업에 매달린 건 가난에 허덕이는 식구들에게 따뜻한 밥 한 끼를 마음껏 먹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그는 학창시절 1등을 한 번도 놓친 적이 없다. 고향의 중학교가 아닌 대구에 있는 중학교로 입학한 것도 본인의 의지였다. 억수 같은 장대비가 쏟아지던 날, 된장, 고추장을 지게에 진 아버지와 함께 8킬로를 걸어 버스를 탔다고 한다. 그날 무거운 지게를 진 아버지를 따르며 공부를 열심히 해서 가난을 대물림하지 않겠다는 각오를 다졌다. 그러면서도 그는 입학식을 마치고 돌아가는 어머니의 손에 그가 받은 용돈을 되돌려 쥐어드린 효자였다. 홍 대표의 어머니는 가족이 모두 대구로 이사 온 후 비가 오면 물이 새는 셋방에서 사과 행상을 하며 자식들을 키웠다.
가난했기에 오히려 검사나 정치인이 될 수 있었다고 생각해본 적이 있나요?
가난 때문에 성공을 지향하지는 않았어요. 저는 사법고시에 합격했을 때도 신분상승이나 국가와 민족을 위해 뭘 하겠다기보다는 내 가족에게 따뜻한 밥을 먹일 수 있겠다는 생각에 기뻤습니다. 어린 시절에 이미 소박한 삶도 얼마든지 행복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어요. 인생의 목표는 반드시 클 필요가 없다. 온 가족이 발을 묻고 추위를 녹일 수 있는 방 한 칸, 허기진 배를 채울 수 있는 약간의 음식이면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거든요.
그렇게 가난했던 시절 무능력한 아버지를 원망하지 않았나요? 저는 한 번도 아버지를 원망한 적이 없어요. 오히려 아버지를 보면 애잔한 마음이 들었죠. 어릴 적 가족 모두 어딘가로 가고 있었어요. 그런데 짧은 겨울 해가 지고, 주막의 허름한 방을 빌린 적이 있었어요. 얼어붙은 몸을 서로의 체온으로 데웠죠. 돈이 없어 한 상에 30원 하는 밥을 사먹을 수 있었는데, 아버지가 저희를 위해 60원을 주고 두 상을 시키셨어요. 두 사람 먹을 밥상에 오른 밥과 반찬이 얼마나 됐겠어요. 바닥까지 박박 긁어 먹어도 허기를 달래지 못했어요. 그래서 방 벽에 매달린 메주를 뜯어 먹었던 기억이 나요. 아직도 그때의 아버지를 생각하면 마음이 시큰해집니다. 그런데 어머니의 마음은 저희와 달랐던 것 같아요.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시기 전 “병명이나 알고 죽자”고 하셨지만 저의 등록금을 걱정한 어머니의 반대 때문에 병원에 가보지도 못하고 숨을 거두셨거든요.
어머니께 효도를 많이 했나요?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평생 흘릴 눈물을 다 흘렸어요. 1996년 4월 25일, 제가 국회의원이 된 지 2주 만이었어요. 어머니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안 해본 장사라고는 없던 어머니가 달비 장사를 해보겠다고 이웃집 아주머니를 따라 떠나신 뒤 열흘 동안 여동생의 손을 잡고 해 저문 강가에서 어머니를 기다리며 어두워질 때까지 건너편 강의 백사장을 바라보던 기억도 되살아났고, 1972년 대학에 입학하기 위해 1만 4천 원만 달랑 들고 동대구 고속터미널에서 서울행 고속버스를 탈 때 애써 울음을 참으시던 어머니의 모습도 생각났어요. 효도를 제대로 못 했는데 세상을 떠나셨다는 사실이 너무도 죄송스러웠어요.
홍 대표는 가족들의 미래를 걸머지고 공부를 했다. 누나와 여동생은 그를 위해 방직공장에 다녔고, 어머니도 온갖 장사를 했다. 그리고 결국 그는 가족들의 고생에 보답하듯 사법고시에 합격해 검사가 되었고, 지금 정치인의 길을 성공적으로 걷고 있다. 이제 그는 자신을 국회의원과 여당의 수장으로 만들어준 사람들에게 보답할 차례라고 생각한다. 그는 사람이 살아가는 데 가장 중요한 덕목은 보은(報恩)이라고 믿는다. 그가 배고픔을 참아가며 가족의 가난을 떨치기 위해 공부했듯 이제는 국민들을 위해 온갖 역경에 굴하지 않고 몸도 사리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어느 방향으로 놓아도 항상 처음으로 돌아가는 모래시계처럼 가난과 변방에서 머물렀던 때의 초심을 잃지 않을 것이다.
/ 여성조선
취재 백은영 기자 | 사진 유진행 | 장소협찬 다담에뜰
첫댓글 아름다운 부부사랑 우리사회에 시급히 극복해야할 문제다.
홍준표대표 부부이야기.아름다운 부부사랑 우리사회에 시급히 극복해야할 문제다.그들 또 남 다르지 아났다.대통령선거시 갈등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