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국립공원 1호 ‘산파’역... 40년 지리산 사랑 생전 천왕봉 올라 '케이블카 설치 반대운동' 펼쳐
‘지리산 호랑이’, ‘지리산 털보’, ‘지리산 산증인’으로 40년을 올곧게 살아온 함태식 선생이 14일 새벽 향년 86세로 별세했다.
함 선생은 1928년 지리산 아래 전남 구례읍 봉남리에서 태어나 순천중학교와 연희전문학교 철학과(현 연세대)를 졸업하고 인천기계제작소 근무, 구례에서 연탄공장 등을 운영하다가 1971년 ‘자발적인 노고단 산장지기’로 ‘지리산 지킴이’ 생활을 시작한다.
앞서 함 선생은 9살 때(보통학교 2년) 소풍장소였던 노고단과 인연을 맺은 후 1957년 지리산 연하반 산악회(지리산악회)를 결성하여 여순항쟁과 1950년 6.25전쟁 등으로 황폐해진 등산로를 정비하거나 새등산로를 개척하는데 앞장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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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리산 호랑이' 함태식 선생. ⓒ윤주옥 국립공원을 지키는 시민의 모임 사무처장 제공 |
1967년 ‘지리산 국립공원 1호’ 지정도 함 선생의 땀과 노력의 결과다. 함 선생은 1960년대 중반 국립공원 지정의 필요성을 당시 이화여대 김헌규 교수(곤충학)로부터 전해 듣고 구례군민 서명운동과 중앙부처 협조, 국립공원 전문가 월리암 하트 등의 도움을 끌어내 지리산을 국내 첫 국립공원으로 지정토록 한다.
이후 지리산을 찾는 등산객의 안전과 노고단 산장 보전, 그리고 올바른 산장문화의 정착을 위해 44세였던 1972년 8월 2일 자발적으로 ‘노고단 산장지기’를 시작한다. 당시 방치상태였던 무인산장은 40여평 넓이. 함 선생은 ‘노고단 산장지기’로서 쾌적하고 조용한 산장문화 정착에 진력을 쏟았다.
당시 원칙적으로 엄하게 ‘상식적인 산장수칙’을 강조한 바람에 얻은 별명이 ‘노고단의 호랑이’였다. 이러한 별명과 달리 함 선생은 고전음악과 문학, 술, 커피, 사람을 누구보다도 좋아했던 낭만주의자이자 휴머니스트였다.
노고단 산장지기 생활은 벼락사고 등 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쾌적한 산장문화를 정착시키는 한 편 국내외의 많은 명사들과 인연도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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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태식 선생이 1970년대 중반 현 노고단 대피소가 들어서기 전 옛 대피소 앞에서 쓰레기를 줍고 있다. ⓒ지리산국립공원남부관리소 제공 |
‘거시기 산악회’로 대표되는 재야인사와 해직교수, 해직언론인 등과 인연은 남달랐다. 1973년 인권변호사 이돈명 전 조선대 총장을 중심으로 백낙청. 안재구 전 교수, 송건호 전 한겨레신문 사장, 김정남 전 청와대 수석, 박현채 전 조선대 교수, 최승호 전 광주일보 회장 등과 친분을 쌓아왔다. 특히 이 전 조선대 총장과는 각별안 우정으로 많은 에피소드를 낳기도 했다.
함 선생의 노고단 산장지기는 국립공원관리공단의 ‘산장 현대화’ 방침에 밀려 16년 생활을 ‘하산 선언문’으로 접고 1988년 피아골산장으로 내려온다. 이로부터 24년 동안 ‘지리산 지킴이’ 생활을 지속하다가 2009년 지리산을 마지막으로 하산했다.
국립공원 쪽은 당시 함 선생의 노고를 인정하여 환경부 장관상을 표창했다. 이후 함 선생은 피아골 탐방분소에 거처를 마련하고 가족들이 있는 인천을 오가며 지인과 산악인과 친분을 이어갔다.
고인은 하산 이후에도 지방자치단체가 지리산 케이블카 설치를 강행하려 하자 2009년에는 81세의 노구를 이끌고 천왕봉에서 ‘국립공원을 지키는 시민의 모임’ 등 환경단체들과 함께 반대운동을 펼치기도 했다.
아들 함천주씨는 가족들은 “예전에 심장 수술을 한 적이 있는데 나이가 드시면서 악화돼 새벽에 돌아가셨다”고 전했다. 한 지인도 “몇 달 전에 뵐 때만 해도 건강하게 보이셨다”며 “ 고인이 남기신 지리산 사랑의 큰 발자취는 이제 후배들과 후손들이 이어가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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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태식 선생이 1976년 8월 옛 노고단대피소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있다. ⓒ지리산국립공원남부관리소 제공 |
평소 고인과 친분을 나누었던 윤주옥 국립공원을 지키는 시민의 모임 사무처장은 “평생 지리산을 위해 사신 산증인이자 큰 어른이셨다”며 “구례분향소 설치를 두고 몇몇 지인들과 의견을 나누었으나 평소 소탈한 고인의 뜻을 받들어 분향소 대신 단체로 조문하기로 했다”고 고인의 죽음을 애도했다.
함 선생은 1995년 <단 한 번이라도 이곳을 거쳐간 사람이라면>과 2002년 개정판 <그곳에 가면 따뜻한 사람이 있다>는 저서를 남겼다.
고인은 2002년 개정판 머리말에서 ‘나는 무슨 특별한 철학 때문에 산을 오르지 않았으며, 무슨 유별한 사상을 갖고서 사람들을 만나지 않았다. 오로지 산이 좋아 산에 올랐으며, 산사람들이 좋아 그들을 만났던 것뿐이다. 산에 사람들이 붐비면 붐비는 대로 좋았고, 사람이 없으면 또 없는 대로 좋았다’ 고 고인의 지리산에 대한 철학을 남겼다.
빈소는 인천 주안 3동 성당. 화장장으로 치러진다. 발인은 16일 오전 9시. 유족으로는 아들 인주·천주씨와 딸 애리씨 등이 있다. 010 7599 4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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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7년 8월 현 노고단 대피소 건립 공사가 진행 중일 때 함태식 선생. ⓒ지리산국립공원남부관리소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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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2009년 4월 22일 함태식 선생이 '피아골 산장지기'를 끝으로 지리산 하산을 기념하기 위해 국립공원관리공단과 지인들이 송별잔치를 마련한 행사장에서 선생의 따님인 애리 씨와 기념사진을 찍는 모습. ⓒ지리산국립공원남부관리소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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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태식 선생이 지난 1995년에 펴낸 <단 한번이라도 이곳을 거쳐간 사람이라면>의 2002년도 개정판 <그곳에 가면 따뜻한 사람이 있다> 표지 그림. ⓒ광주인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