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르디난트 쇠르너 (Ferdinand Schorner) 독일육군원수
1892년 6월 뮌헨출생으로 산악병과 최초의 육군원수인 쇠르너는 역시 같은 산악병과 출신의 디에틀 상급대장과 더불어 히틀러에게 상당한 호감을 받던 인물이었습니다.
만약에 디에틀상급대장이 죽지않았더라면 쇠르너 보다 디에틀이 산악병과 최초의 원수가 되었을지도 모르죠..
어쨌든 쇠르너 원수가 유명세를 타게 된건 그 동안 쭉 라플란드 지방에서 제6산악사단, 제19산악군단등 계속 산악군을 지휘하다가 43년말 제40기갑군단을 이끌고 니코폴 교두보에서 방어전에서 히틀러에게 점수를 따면서 부터입니다.
뭐 이런 장기간방어는 히틀러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고 결국엔 대전말기 중부집단군사령관에 임명되고 육군원수까지 진급되는 영광을 차지하게 되죠..
1944년 3월 클라이스트와 만슈타인이 각각 A집단군과 남부집단군사령관에서 경질되고 쇠르너는 모델과 함께 각각 북부와 남부우크라이나집단군으로 개칭된걸 잠시동안 지휘하다가 44년 7월말부터 쇠르너는 북부집단군을 맡습니다.
1944년 7월부터 소련군은 바그라티온 작전의 연장으로 독일북부집단군에게 공세를 가하여 중부집단군과 북부집단군사이를 찢어버리려 하고 있었고 급기야 7월말에 이르러서는 소련 제1발트군(제51군, 제43군, 제2친위군)이 라트비아의 수도 리가로 통하는 길목을 차단해버려 북부집단군은 중부집단군과의 연락과 보급마져 차단 당하게 됩니다.
이렇게 절박한 상황에서 7월25일 쇠르너가 북부집단군을 맡았고 리가근교에서 회심의 반격을 가하여 소련군 제3 기계화군단을 밀어내고 약 30킬로의 통로를 겨우 만들었고 중부집단군과의 전선을 다시 구축하기 위하여 쇠르너는 쉬트라우비츠 소장을 임시사령관으로 임명하여 약2개기갑사단 전력에 해당하는 군단을 편성하여 8월20일부터는 해군과 협공으로 트쿰스시를 공격하여 재탈환합니다.
독일해군은 프린츠 오이겐과 여러척의 구축함을 필두로 리가만에서 함포사격을 개시해 육군에게 강력한 지원을 해주었고 이 포격으로 트쿰스시의 T-34가 무려 50대가량 격파되었다는 자료도 있다고 합니다. (물론 정확한지는 모르겠지만...-_-;;)
어쨌든 쉬트라우비츠 소장의 임시군단은 트쿰스시를 점령하였고 역시 같은시기에 제81, 제93보병사단과 2개 돌격포여단이 쉬트라우비츠의 임시군단과 조우함으로써 북부집단군은 다시 중부집단군과의 전선연결을 구축하였습니다.
뭐 이 시기에 중부집단군은 이미 붕괴되어 별 의미는 없었습니다만...
아무튼 이후 남쪽의 드베레를 탈환하기위해 쇠르너는 공세를 계획했지만 하지만 이시기에 소련군이 에스토니아북방 베르트호수와 페이푸스호수 사이의 타르투시를 함락시키고 독일의 탄넨베르크 방어라인까지 위협하기 시작하자 나르바지역의 배후가 노출되어 버렸고
나르바지역의 독일군(제2군단, 제3SS 기갑군단)은 몇차례 소련군 대공세를 막아내긴 했지만 방어라인이 심각하게 무너져가는 상황에서 9월말에 이르러서는 쿠를란트반도 북방의 사레마섬과 히움마 섬으로 퇴각하고 결국 에스토니아 전체를 소련군에게 내주게 맙니다.
그리고 역시 9월말부터 소련 제2밭트군, 제3발트군이 발트해와 리가외곽에 대해 대공세를 재개하면서 북부집단군은 심각한 사태에 빠졌고 결국 퇴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후 계속된 퇴각을 거듭하다가 북부집단군은 쿠를란트 반도에 갇히게 되고 여기서 종전을 맞이하게 됩니다.
사실 2개야전군을 갖추어 상당한 전력의 북부집단군이 대전말기에 독일본토방어에 아무런 도움도주지 못한채 그냥 쿠를란트에 갖혀 종전을 맞이했다는건 독일로써는 너무나 뼈아프다고 봐야 됩니다. 게다가 소련은 쿠를란트에서 오도가도 못하는 북부집단군에대해 공세는커녕 아무런 작전도 취하지 않은채 그냥 내버려 두었으니...독일로써는 더욱더 뼈아픈거죠.
마지막으로 독일이 패망이 임박한 45년 4월에 독일육군의 마지막 원수로 진급하였고 그리고 히틀러 사후 약 10일간 육군최고사령관을 지내다가 미군에게 항복하지만 소련군에게 인도되어 55년까지 억류되었다가 석방되어 서독에 정착하여 73년에 사망합니다.
예전에 채승병님 사이트에서 쇠르너가 50년 한국전쟁에 참여했다는 소리도 있습니다만 확실한건 모르겠습니다.
하긴 쇠르너의 산악전투의 지휘능력의 노하우를 북한군에게 접목시켰을 가능성도 있겠군요.
만약 사실이라면 지금의 러시아나 북한에게 상당한 극비상황일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저 개인적인 사견을 하나 덧붙이자면 1944년 6월의 시점으로 노르망디에서 베를린까지의 거리와 바그라티온 공세직전의 소련군은 스몰렌스크,비텝스크등지 에서 베를린까지의 거리는 지도를 보시면 아시다시피 거의 똑같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전력을 서부로 집중했다는건 제가 생각하기엔 다소 아쉬운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듭니다....
어쨌든 지금까지 롬멜원수를 제외한 독일육군원수 17명에 대해 부족하지만 소개를 마칠까 합니다. 종종 저의 사견이 있어서 거북하셨을지도 모르지만..이해해주시리라 믿습니다.
그리고 그동안 덧글을 달아주신 수많은 고수분들게 도 감사드립니다.
첫댓글 악랄한 독일장교의 전형적인 인물이죠. 군사적인 재능은 꽤 높았지만, 안간성이 아주 지랄같았습니다. ^^;;;;
흠..이건 어떨까요..? 올바르지 못한 명령을 필요 이상으로 실행하였으며, 혹은 불필요한 행동을 자주 하였으며, 상당히 유능하였지만, 종종 감정의 기복이 매우 심한 인물이었다...죄송합니다...ㅠ.ㅠ
좋은 글 잘보았습니다^^..; 수고스럽지만 상급대장 급의 독일장성도 소개해주시면 좋을 듯 하군요~.. 호트나 회프너, 네링, 하우저 등의~~..
그런데 케셀링 원수가 빠진 듯..
케셀링원수는 ..엄밀히 말해 공군원수임으로 배제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