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렌 식수와 여성적 글쓰기
프랑스의 작가이자 페미니즘 이론가인 엘렌 식수에 의해 주창된 여성적 글쓰기의 이론은 페미니즘 이론, 특히 80년대 중반 이후 영미 페미니즘 문학비평에 큰 영향을 끼쳤다. 식수의 저작 중 대중에게 가장 잘 알려진 것은 '메두사의 웃음'이다. '메두사의 웃음'은 짧은 텍스트인 데다 과격하고 공격적인 표현을 쓰고 있는 까닭에 여성적 글쓰기의 선언문으로 간주되었다. 1975년 프랑스의 <라르크> 지에 게재된 이 논문은 곧 영어로 번역되었으며 이후 페미니즘 이론서에서 뺴놓을 수 없는 중요한 텍스트로 자리잡았다. 실제로 이 논문은 식수의 텍스트 중 한국어로 번역된 유일한 것이기도 하다.
'메두사의 웃음'의 이와 같은 인기는 식수의 여성적 글쓰기 이론의 확산에 공헌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식수의 이론의 단순화라는 부작용을 낳았다. 실제로 여성적 글쓰기는 자주 <몸으로 글쓰기>, <여성의 성적 특질에 맞는 글쓰기> 등으로 이해되었으며 그 떄문에 생물학적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이러한 비판은 어느 정도 식수의 이론자체에 기인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보다 더 큰 이유는 그것이 주로 '메두사의 웃음'이라는 짧은 논문을 통하여 이해됨으로써 필연적으로 단순화, 도식화될 수밖에 없었다는 데 있다. '메두사의 웃음'은 발표된 지 이미 20여 년이 지났다. 이제 그것은 더 이상 80년대와 같은 선도적 영할을 담당하지 못한다. 그러나 이러한 시간적 거리는 우리로 하여금 그것이 발표되던 당시의 논쟁적 분위기에서 탈피하도록 해준다. 이제 식수의 여성적 글쓰기의 이론을 전체적으로 조망할 수 있는 때가 되었다. 여성적 글쓰기란 과연 무엇이며 그것은 여성 그리고 일반적 글쓰기와 어떤 관련을 가지고 있는가? 우리는 '메두사의 웃음' 을 중심으로 이 물음에 답하고자 한다. 그러나 그전에 우리는 여성적 글쓰기의 이론이 어떤 과정을 통해 도출된 것인지 살펴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식수의 여성적 글쓰기의 이론은 여성의 조건에 관한 근본적인 성찰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역사적 존재로서의 여성의 조건과 서구의 재현 체계 내에서의 여성의 위치, 그리고 여성 주체성의 문제등에 관한 식수의 입장을 이해하는 것은 여성적 글쓰기의 이해에 필수적이다.
1.말중심주의와 남근중심주의
식수의 여성적 글쓰기의 이론은 모든 상징 체계가 정치적이라는 명제를 바탕에 깔고 있다. 식수는 이러한 정치성을 드러내는 첫 단계로 서양 철학 및 정치 행태, 그리고 더 나아가 일상의 언어를 포함한 모든 개념체계가 항상 이항대립적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지적한다. 그녀는 '메두사의 웃음' 제2장의 서두에서 이러한 이항대립적 짝짓기의 예들을 열가하며 상징 체계 내에서의 여성의 위치를 탐색한다. <여성은 어디에 있는가? 능동/수동, 해/달, 문화/자연, 낮/밤......> 그녀에 의하면 이러한 짝들은 한결같이 두 항 사이의 관계가 계급적이라는 공통점을 지닌다. 즉 이들 중 한 항은 1차적인 것, 즉 우월한 것으로 간주되는 반면, 나머지 항은 2차적인 것, 즉 열등한 것으로 간주된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이러한 이항대립은 자크 데리다가 주장한 개념인 말중심주의의 핵심적인 요소이다. 데리다에 의하면 서구의 사상 체계내에서 <제1차적> 항은 <현존> 하기 때문에 우월하며 <제2차적>항은 <현존이 없는 것>, 즉 결여이기 때문에 열등한 것으로 간주되어 왔다. 그러나 데리다는 이러한 계급적 관점이 잘못된 것이라고 본다. 왜냐하면 이들 두항은 상호의존적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이러한 계급적 질서의 기준의 되는 <현존>이란 개념을 살펴보자. 이 개념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먼저<결여>라는 개념이 존재하여야만 한다. 그리고 이것은 <결여>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결코 이들 두 항중 어느 한쪽을<1차적>이라거나 <2차적>이라고 할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양 철학은 <현존>및 <현존성>을 가지고 있다고 여겨지는 항들을 <1차적>인것으로 간주해 왔다
. 그런데 식수는 이러한 계급화가 정치적이라고 본다. 그것은 스스로가 현존의 항에 속한다고 평가하는 주체가 다른 주체를 억압하기 위하여 만들어낸 사상 체계에 불화하다. 식수에 의하면 이러한 억압적 의도가 가장 가시적으로 명백하게 드러나는 예가 바로 식민주의이다.
'메두사의 웃음' 에서 그녀는 자신이 어린 시절에 체험한 식민지와 본국의 관계, 즉 프랑스와 그 식민지 알제리와의 관계를 이러한 이항대립의 체계 속에서 분석한다. 그녀에 의하면 알제리는 행정적으로 프랑스의 일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결코 프랑스와 같을 수 없었다. 즉, 그것은 완전한 프랑스도 아니면서, 그렇다고 해서 프랑스와 완전히 분리된 독립국도 아닌 하나의 열등한 프랑스에 불과하였다. 식수에 의하면 이처럼 다른개체, 즉 타자를 억압하여 열등한 종속물로 격하시키는 태도는 서구인의 타자관의 요체이다. 이러한 타자관에 의하면 주체는 결코 그 대상인 타자에게 독립적인 주체성을 인정하지 않은다. 그
리고 식수가 고발한 프랑스/알제리 관계의 경우는 이렇한 타자관의 정치적인 결과물이다. 여기까지 식수는 대체적으로 데리다의 말중심주의 비판을 따르고 있다. 그러나 식수는 일반적인 주체와 타자의 문제를 남/녀의 문제와 연결시킴으로써 말중심주의를 남근중심주의와 등치시킨다. 식수에 의하면 말중심주의의 이항대립은 대부분 여성/남성의 항으로 환원될 수 있다. 즉, 앞에서 인용한 <능동/수동, 해/달, 문화/자연, 낮/밤>등의 경우에서 보듯이 이항대립의 짝은 남성과여성에 대한 은유의 구실을 할 수있다. 그리고 이러한 은유에서 여성을 은유하는 항들은 항상 남성을 은유하는 항들에 비해 열등한 것으로 간주 된다. 이와함께, 남성 및 남성에 대한 은유는 항상 주체의 위치를, 그리고 여성 및 여성에 대한 은유는 대상, 즉 타자의 위치를 차지한다.
우리는 앞에서 이마 이항대립적 위계의 허구성을 지적하였다. 이항대립의 짝들은 상호의존적인 까닭에 결코 어느 한 항이 다른 항보다 선행하거나 우월할 수없다. 이것은 남/녀의 짝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현실은 어떠한가? 남성은 우월한 권력을 이용하여 여성을 물리적으로 억압해 왔다. 뿐만아니라 상징 체계를 조작하여 여성의 정체성 자체를 열등한 것으로 규정함으로써 여성들 스스로가 억압을 내면화하도록 유도하였다. 식수에 의하면 이것은 여성을 남성과 전혀 다른 자질을 가진 독립적인 개체로 보지 않고 하나의 남성, 그러나 자질이 부족한 <열등한 남성> 으로 본 데 기인한다. 알제리/프랑스에서 보여준 서구인의 타자관이 남/녀 관계에서 드러나는 순간이다.
그러므로 식수는 여성이 하나의 주체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주장하려면 무엇보다도 여성이 남성과는 다른 완전한 타자라는 점을 부각시켜야한다고 본다. 즉 여성은 식민지인 알제리가 아니라 프랑스와 동등한, 그러나 전혀 다른 영국이나 미국과 같은 나라라는 점을 인식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남녀가 유별하다는 이러한 식수의 주장은 남녀의 동등권에 대한 근거를 남녀의 동일성에서 찾던 당시 페미니스트들에게 있어 충격적인 것이었다. 19세기 이래, 여성들은 남녀가 동일하다는 전제 아래, 남녀 평등을 요구해 왔다. 그러므로 만일 남녀가 같지 않다며 남녀 평등도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식수는 이에 정면으로 반대하여 여성이 남성과 완전히 다르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므로 식수는 이들로부터 많은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식수에 의하면 남녀 평등에 있어 남녀의 동일성은 필요조건이 아니다,. 즉,문제의 핵심은 남녀가 다르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다름을 인정하지 않고 모든 차이를 차별로 환원시키는 헤겔식의 소유의 철학에 있다. 그러므로 그녀는 진정한 남녀평등이란 여성의 남성과 동일해짐으로써가 아니라 남녀의 차이를 차별로 환원시키지 않음으로써 달성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만일 여성이 남성이라는 기준에 맞추어 그와 동일해지려고 애쓴다면 여성은 영원히 <결핍된 남성>으로 머무를 수밖에 없으며 차별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여성은 오히려 자신의 특수성을 인식하고 그것을 부각시켜야 한다.
'2.남근중신주의와 여성성
이러한 상이성을 주장하는데 있어 식수가 가장 중요시 하는 요소는 성적 특질이다 그녀는 기존의 상징 체계가 남근을 중심으로 형성되는 남성의 특질을 반영하고 있다고 본다 이 체계는 여성의 고유한 성적 특질을 철저 히 억압하고 반대로 남성의 입장에서 해석된 여성성의 이미지를 강요한다 식수에 의하면 이러한 기제는 너무도 다양하다 예를 들어 유명한 동화 잠자는 숲속의 미녀의 경우를 보자 이 동화에서 미녀는 왕자의 입맞춤을 받을 때까지 즉 남성의 욕망에 접할 때까지 잠자는 상태 즉 욕망이 전혀 없는 상태로 그려져 있다 식수에 의하면 이 동화는 여성들을 거세된 남성 즉 열등한 남성으로 간주하여여성에게 고유한 성적 욕망을 인정 하지않는 남성들의 태도를 단적으로 드러낸다 즉 그들은 남근을 중심으로 생성되는 남성적 욕망의 특질을 여성에게 투여시키는 것이다
이 경우 여성은 남근이 없기 때문에 욕망이 없다 따라서 여성의 욕망이란 결국 욕망이 없는 상태 즉 욕망의 결핍을 의미한다 그러나 남성들 역시 이것이 사실이 아님을 알고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이 알수없는 여성의 욕망 즉 여성의 발현을 두려워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여성성을 억압하기 위하여 여러가지 상징적 사회적 권력을 행사한다 따라서 여성들은 남성들 이 정의한 여성성 즉 욕망의 부재를 내면화 하거나 아니면 엄청난 사회적 폭력에 직면하여야 했다 식수는 이러한 내면화를 <거세>, 그리고 이러한 사회적 폭력을 <참수>라고 표현하였다
위에서 예로든 잠자는 숲속의 미녀와 같은 동화는 여성의 거세를 위해 남근중심주의가 사용하는 상징적 도구들 중의 하나이다 이와 같은 담론은 도처에 존재한다 예를 들어 식수의 소설 <라>와 이론서<글쓰기에 도 달하기> 에 동시에 인용된 키에르케고르의 다은과 같은 텍스트 역시 같은 내용을 반복한다
그녀는 사랑의 접촉에 의해서야 비로소 깨어난다 그 이전의 그녀는 단지 꿈일 뿐이다 그러나 이 꿈속의 존재에도 두 가지 단계가 있다 첫 단계는 사랑이 그녀의 꿈을 꾸는 단계이며 다음은 그녀가 사랑의 꿈을 꾸는 단계이다
여성에게는 이처럼 꿈의 소유권조차 완전히 허용되어 있지 않다 이처럼 남근중심주의적 문학 철학 신화적 담론은 모두<남성 주체성을 만나기 전까지 여성은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생각을 근저에 깔고있다 물론 이때의 여성은 결코 실제 역사에 존재하는 구체적인 여성이 아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담론이 전파하는 여성상은 하나의 표준으로서 실제 여성의 주체성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왜냐하면 개개의 여성은 이러한 역할 모델에 비추어 스스로의 정체성을 만들어나가며 또한 주위 사람들의 기대 또한 이러한 모델에 의해 좌우되기 때문이다
식수에 의하면 여성의<상징적 거세> 의 회복을 위해서는 이러한 남근중심적 상징 체계의 변화가 필수적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차별적 철학 문화 정치적 구조는 어떤 경로를 통해 변화될 수 있을까? 이에 대한 식수의 전략은 파괴와 건설의 두 가지로 요약된다 제 1단계인 파괴의 단계는 바로 데리다식의 해체적 읽기의 단계이다 즉 가부장적 가치를 옹호하는 텍스트의 숨은 전제들을 드러냄으로써 이들 테스트의 남근중심주의를 고발하고 그 정당성을 파괴하는 것이다
식수에게 있어 프로이드는 이러한 파괴 작업의 주 대상이다 실제로 프로이트는 식수뿐만이 아니라 뤼스 이리가레, 사라 코프만 등 여러 프랑스 페미니스트들에 의해 반박되었다 이것은 프로이트가 여성성을 남성성의 견지에서 설명하고 있다는 점에서 여성을 <결핍된 남성> 으로 보는 전통적 입장을 대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식수는 이론서들뿐만 아니라
,도라의 초상> <라> <태양의 초상> 과 같은 희곡 및 소설 작품에서까지 이러한 해체 작업을 연장하고 있다 이러한 파괴의 다음 단계는 제2단계인 건설의 단계가 온다 이 2단계가 유명한 <여성적 글쓰기>의 단계이다 즉 해체적 읽기가 소극적 부정적 전략 이라면 < 여성적 글쓰기>는 새로운 방식의 글쓰기를 통해 지금까지 계속되어 온 남근중심적 상징 체계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전략이다 그러나 그것은 선례가 없는 작업이다 지금까지 글쓰기의 역사는 남성에 의한 남성적 글쓰기의 역사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식수는 이러한 여성적 글쓰기를 모색해 나가는 과정을< 예상할 수 없는 것을 예상하고 계획 하는> 작업이라고 말한다 다음에서 우리는 이러한 식수의 작업을 추적해 보겠다.
3. 여성적 글쓰기
1)글쓰기
식수에게 있어 글쓰기에 대한 관심은 여성에 대한 관심에 선행한다. 식수와 글쓰기와의 관계는 특히1977년에 발표된 <글쓰기에 도달하기>에 자세히 드러나 있다. 여기에 의하면 그것은 그녀의 어린 시절에 이미 시작되었따. 아버지의 죽음이라는 충격적인 사건에 직면한 식수에게 있어 글쓰기는 죽음과 망각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으로 여겨진다. 그녀는 서양의 고전 등과 같은 전통적인 권위를 가진 여러 텍스트들을 섭렵한다. 그러나 이러한 책읽기를 통하여 그녀는 자신이 글쓰기로부터 배제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글을 쓸 권리가 나에게 없다고 여겨지게 하는 모든이유를, 타당한 이유와 별로 타당하지 않은 이유들, 그리고 완전히 틀린 여러 이유 들 때문에 나에게는 글쓰기가 금지되어 있다. 나는 어떤 정당성도 가지고 있지 않다. 내게는 땅도, 조국도,역사도없다.
이것은 상당 부분 식수가 유태인 아버지와 독일계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프랑스의 식민지인 알제리에서 살았다는 개인적 이유에 기인한다. 실제로 식수에게 있어 자전적인 경험은 그녀의 이론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러나 이것은 다른 이론가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작가들의 경우, 자전적 요소가 작품에 끼치는 영향에 대해서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마찬가지로 이론가들의 이론 또한 상당 부분개인적 경험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 그러나 대부분의 이론가들은 이러한 개인적 경험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식수는 자신의 이론이 어떠한 개인적 경험을 통해 형성되었는지를 거듭 설명하였고 이런 점에서 그녀는 다른 이론가들과 구별된다.
식수에 있어 개인적 경험은 보다 일반적인 문제들에 눈을 뜨는 촉매가 된다. 실제로 글쓰기에서의 개인적 배제의 경험은 그녀가 글쓰기에 내재하는 근본적 정치성을 인식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리하여 그녀는 <글쓰기는 선택된 사람들만의 것이다. 그것은 작고 하찮은 사람들과 여자들이 접근할 수 없는 공간에서 이루어진다> 라고 결론짓는다. 그녀가 구원의 빛으로 여겼던 글쓰기는 결국 선택된 일부 계급만을 위한 제도적 장치에 불과했던 것이다.
식수는 이러한 선택된 집단에 속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대부분의 여성들의 운명이기도 하다. 식수에 의하면 이것은 그 동안 역사가 배출한 여성 작가의 수만 보아도 명백하다. 이처럼 여성들은 제도적으로 글쓰기에서 배제되었기 때문에 그들의 목소리를 낼 수 없었다. 물론예외적으로 제도권 진입에 성공한 여성들도 있다. 그러나 식수에 의하면 그들 역시 진정한 여성 목소리의 대변자는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여성이 아니라 억압된 남성처럼 글을 써왔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여성들로 하여금 침묵하게 하고 그들의 목소리를 내지 못하게 하는 것일까? 그 첫째 이유는 물론 제도적인 것이다. 식수는 <글쓰기에 도달하기>의 중반부에서 작가로서 겪는 출판의 어려움에 대해 암시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제도적인 것보다 더욱 근본적인 것은 전통적인 글쓰기 자체가 남근중심주의와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기 떄문이다. 실제로 식수는 지금까지의 글쓰기의 역사를 남근중심주의의 역사라고 규정한다.
(글쓰기는) 이성의 역사와 혼동된다. 즉, 글쓰기 이성의 결과이자 그것을 떠받치는 기둥이며 또한 그것의 특권적인 알리바이이다. 그 것은 남근중심주의의 전통과 일치한다. 그것은 남근중심주의가 스 스로를 응시하고, 향유하며 또한 자축하는 장소이다.
우리가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모든 상징 체계는 남근중심주의에 입각해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상징체계 중에서 가장 기본적인 요소인 언어 또한 이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이것은 언어를 매체로 하는 글쓰기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식수에 의하면 글쓰기의 반동성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그것은 적극적인 의미에서 남근중심주의를 전파함으로써 이를 강화하는 첨병노릇을 해왔다.
글쓰기는 지금까지 (......) 남성의 리비도와 문화와 정치적 경제에 의해 지배되었다. 거기서 여성은 의식적으로,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억 압당해왔다. 이러한 억압은 감춰지거나 픽션의 매력으로 사탕발림되었 기때문에 더욱 가공스럽다.
이처럼 글쓰기는 제도적으로 여성을 배제할 뿐 아니라, 내용적으로도 여성을 억압하다.그렇다면 글쓰기의 길은 여성에게 완전히 막혀있는 것일까? 이에 대한 식수의 대답은<아니다>이다. 그녀는 <메두사의 웃음>,<새로운 여성의 탄생>,<글쓰기에 도달하기> 등에서 반복하여 이러한 상황을 돌파할 것을 촉구한다. 상징체계를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이 체계의 핵심이 되는 언어의 공간에 참여하는 것이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글쓰기는 <변화의 가능성 그자체이고 전복적인 사상의 디딤돌 역할을 할 수 있는 공간이며 또한 사회적, 문화적 구조의 변모를 가져오는 선구적 힘이기도 하기>때문이다.
그러므로 식수는 여성들에게 글쓰기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것을 촉구한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전통적인 글쓰기, 즉 남근중심주의적인 글쓰기를 통한 방식이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진정한 여성의 목소리는 <여성적> 자질에 기반한 글쓰기에 의해서만 표출될 수 있기 떄문이다.
2)여성적
<무엇이 여성적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식수의 대답은 시기에 따라 약간의 차이를 보인다. 초기 저작인 '새로운 여성의 탄생' 의 경우, 그녀는 남성적/여성적의 구분을 섹스, 즉 남녀의 성적 특질과 젠더, 즉 남녀의 삶의 방식에 다 같이 연관시킨다. 먼저 성적 특질의 경우, 우리가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식수는 여성 억압의 근저에서 여성성의 억압이 있다고 보아 여성성의 회복을 주장한다. 물론 그녀는 결코 여성적이라는 것이 생물학적인 성과 일치한다고는 하지 않는다.
그러나 여성의 몸과 육체를 중시하는 그녀의 태도는 이러한 해석을 낳을 수 있는 여지를 제공하였다. 실제로 그녀는 여성성을 억압하고 그것을 정당화하는 담론들을 비판하는 한편, 과격한 어조로 여성들에게 자신의 성을 탐색하고 그것을 표현할 것을 촉구하였다. 특히 '메두사의 웃음'에 나오는 <사제들이여 두려워 떨지어다> 우리는 우리의 성기를 내보일 테니까>와 같은 구절은 여성성의 해방을 알리는 일종의 도전장과도 같이 받아들여졌다. 이 때문에 식수가 말하는 <여성적>은 <여성성>과 일치하는 것으로 간주되기도 하였다.
인간의 성이 결코 생물학적 조건에만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프로이트 이래 정설로 굳어져 왔다. 그러므로 여성의 정체성을 생물학에 연결시키는 듯한 식수의 태도는 여러 페미니스트들로부터 비판을 받았다. 최근 들어 수잔 셀러스를 비롯한 식수 연구자들은 이러한 식수의 태도를 '새로운 여성의 탄생'이 출판되던 당시의 사회분위기와 연관이 있는 것으로 본다. 즉 당시는 여성해방 운동과 낙태 합법화 운동의 절정기였기 때문에 식수의 저작 또한 육체와 성에 관한 당시의 고조된 분위기를 반영하고 있다는 것이다.
80년대에 들어 식수는 여성적인 것을 정의하는 데 있어 여성성보다는 사회적 성, 즉 젠더에 더욱 의존하게 된다. 이와 함께 <여성적>이라는 용어와 여성과의 관계도 달라졌다. 그것은 더 이상 여성의 본질을 반영한다고 여겨지지 않는다. 식수는 1984년에 발표한 '극단적인 충실성'이 란 논문에서 여성적/남성적이란 용어가 하나의 임의적 표지에 불과할 뿐이라고 주장하였다.
내가 <여성적>, 그리고 <남성적>이라고 부르는 것은 쾌락과의 관계, 지출과의 관계 이다. 우리는 언어 속으로 태어나며 또한 항상 말과 대면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우 리는 무엇이든지 간에 이름을 지어야한다. 우리는 말을 없앨 수 없다. 그것들은 이미 거기에 있으므로, 물론 우리는 말을 고칠 수 있다. 그것을 어떤 다른 기호로 대치함으 써 말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더라도 그것들은 곧 <남성적>, <여성적>이라는 말과 마찬가지로 폐쇄적이고 고정되며 또한 화석화 되어버린다. 그렇게 되면 그것들은 또다 시 우리를 강제하기 시작한다. 그러므로 어쩔 도리가 없다. 계속적으로 뒤흔드는 수밖 에..
그러므로 식수는 새로운 기호를 도입하기보다는 이미 존재하는 말들을 채택하여 그 의미를 전복시키는 편을 택한다. 그러나 이처럼 <여성적>이라는 말의 정의를 사회적 성, 즉 젠더에서 찾는 것은 결코 뒤늦게 시작된 것은 아니다. 그것은 이미 '새로운 여성의 탄생'에도 나타나 있다. 다만 이 초기의 저작에서는 섹스의 문제와 명확하게 분리되지 않은 채, 서로 뒤섞여 있었던 것일 뿐이다. 실제로 '새로운 여성의 탄생'에서 식수가 사용하는 전략은 '극단적인 충실성'에서 그녀가 설명한 전략과 동일하다. 그것은 여성에 대한 전통적인 정의를 받아들여 그 의미를 전복시키는 것이다. 먼저 식수에 의해 대표적인 여성적 자질로 간주된 자질, 즉 타자에 대한 수용성의 경우를 예로 들어보자. 여기서 식수의 해체 작업은 여성의 무엇인가에 씌기 possede 쉽고 따라서 수동적이라는 기존 관념의 수용으로부터 시작한다. 물론 여성의 수동성이란 남근중심주의가 여성에게 부과한 자질 중의 하나이다. 또한 그것은 능동성을 우월시하는 남성적 관점에서 볼 때 결코 긍정적인 자질이 되지 못한다. 그러나 식수는 이러한 부정적인 용어의 의미를 천착하여 그것을 <타자에 대한 관용>이라는 긍정적인 의미로 전환시켰다. 그녀에 의하면 <무엇인가에 씌인다>는 것은 곧 자신 속에 타자를 용납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그것은 배타적인 <남성적> 태도에 비해 우월한 것이다.
이처럼 식수는 여성에 대해 부정적이 남근중심주의의 언어 및 상징체계 속에서 작업하면서 자크데리다식의 해체를 통해 그 의미를 전복시킨다. 그리고 이를 통하여 <여성적>인 것의 의미를 긍정적인 것으로 바꾸어 나간다. 식수에 의해 부정적인 것이 긍정적인 것으로 바뀐 또 하나의 대표적 사례는 법에 관한 여성의 태도이다. 식수는 여성이 법을 잘 지키지 않는다는 점을 타자에 대한 관용적 태도와 함께 가장 대표적인 여성적 특질로 꼽았다. 그렇다면 법을 지키지 않는 태도는 어째서 여성적이며, 또한 어째서 긍정적인 자질이 될 수 있는 것일까? 여기서 우리는 식수에게 있어 <여성적>이라는 용어는 실제적인 자질이라기보다는 단순히 전통적인 지칭 방식의 차용에 불과하다는 점을 다시 한번 상기해야 하겠다. 즉 그것은 특정한 어떤 태도에 대해 예로부터 <여성적>이라는 용어가 사용되어 왔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실제로 법과 여성간의 관계의 경우, 식수가 이것을 <여성적> 자질의 대표 적 요소 중의 하나로 든 것은 단순히 예로부터 여성은 법을 잘 지키지 않는 것으로 비난받아 왔다는 이유 때문이다. 아마도 성서의 이브는 이러한 여성적 태도의 대표적인 예일 것이다. 또한 프로이트는 여성에게 는 오이디푸스 단계가 결여되거나 약화되어 있다는 점, 즉 초자아의 미 발달을 들어 법을 잘 지키지 않는 여성의 태도를 설명함으로써 전통적인 믿음에 <과학적>인 해석을 제공하기도 하였다.
식수는 '극단적인 충실성'에서 이러한 선입견에 대한 해체 작업을 시행한다. 그녀는 먼저 이브에게 내려진 하느님의 법이 불합리하다는 점을 지적한다. 식수에 의하면 <만일 사과를 먹으면 죽으리라>는 말은 이브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 왜냐하면 이브는 죽음이 존재하지 않는 낙원에 살고 있었으므로 죽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몰랐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브의 선택은 한편으로는 즉각적으로 감지될 수 있는 쾌락,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검증할 수 없고 그 의미가 모호한 법률, 이 양자사이의 선택이다. 여기서 이브는 쾌락을 선택한다. 식수에 의하면 이것은 매우 긍정적인 선택이다. 왜냐하면 그녀는 맹목적인 금지를 두려워하지 않고 자신의 욕망에 충실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또한 사회를 위해서도 긍정적인 선택이었다. 이것은 법에 대하여 그녀와 정반대 되는 태도를 보여주는 또 다른 성서의 인물 아브라함과 비교하면 분명해진다.
하느님의 명령에 맹목적으로 복종하여 자신의 아들 이삭을 죽이는 아브라함으로 가득 찬 사회는 과연 어떤 사회일까? 실제 있어 인간 사회의 발전을 가져온 것은 바로 자신의 거부에 의하여 지식과 혁신과 금지되지 않은 선택의 길을 열어놓은 이브가 아닐까?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식수에 있어서 <여성적>자질 중 가장 중요한 것들은 첫째 여성의 신체적 자질, 그 중에서도 특히 성적 특질이며 둘째, <타자에 대한 수용성>, 그리고 셋째. <법에 대한 거부>등이다. 이러한 자질들이 진정 여성적인 것인지, 또한 그것들이 진정으로 긍정적인 자질인지의 문제는 페미니스트들 사이에서 계속해서 논란이 되어 왔다. 그러나 우리에게 있어 보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가치 판단이 아니라 식수가 이러한 자질들을 중요하게 생각하였다는 사실 그 자체에 있다. 왜냐하면 식수의 <여성적 글쓰기>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그녀의 논리를 그대로 따라가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3)여성적 글쓰기
<여성적 글쓰기>란 위에서 살펴본 <글쓰기>와 <여성적>을 연결시키는 작업이다. 이것은 다시 말하면 여성적, 혹은 전통적으로 여성의 자질이 라고 간주되어 오던 자질들을 글쓰기 속에 도입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것의 목적은 글쓰기의 정치성, 즉 기존의 글쓰기 속에 내재한 말중심주의와 남근중심주의를 타파하는 데 있다. 우리는 앞에서 세 가지의 대표적인 여성적 특질을 살펴보았다. 그러면 이들 자질들은 각각 글쓰기와 어떻게 관련되는가? 그리고 이러한 자질을 도입한 글쓰기란 과연 어떤 것인가? 여성적 글쓰기의 구체적인 형태를 살펴보기 전에 제일 먼저 지적해야 할 것은 그것의 정의불가능성이다. 식수는 여성적 글쓰기는 원래적으로 정의될 수 없는 성질의 것이라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정의란 곧 이론화를 의미하고 이론화란 결국 여성적 글쓰기를 남근중심주의적 언어에 의해 화석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현재로서 여성적 글쓰기를 정의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그것은 앞으로도 계속 그러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 행위는 결코 이론화되거나 ,어떠한 틀에 갇히거나, 약화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것은 언제나 남근중심주의적 체계를 지배하는 담론의 틀을 벗어나며 철학적, 이론적 체계의 지배를 받는 영역 이외의 곳에서만 나타나고 또한 나타날 수 있을 것이다
요컨대 여성적 글쓰기는 체계화를 거부하는 글쓰기이다 따라서 그것에 대한 설명 또한 명확하거나 체계적일 수 없다 그렇게 하는 것은 여성적 글쓰기의 정신을 배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성적 글쓰기에 대한 식수의 설명 또한 전면적인 조망이 아니라 부분적이고 중첩적인 묘사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러한 묘사에서 몇 가지의 특징을 지적할 수 있는데 그중에서도 무엇보다도 눈에 띄는 요소는 앞에서 살펴본 여성적 특질의 첫 번째 요소 즉 여성의 성적 특질이다 앞에서 우리는 남근중심주의란 남성의 성적 특질을 모든 사물, 즉 상징체계를 포함한 모든 사회적 체계에 강요하는 것이라는 점을 살펴보았다 그러므로 식수는 이러한 상황을 변화시키기 위하여 여성의 성적 특질을 바탕으로 한 글쓰기가 필요하다고 보았다 즉 <여성은 여성을 써야하고 남성은 남성을 써야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성의 성적 특질은 어떤 것이며 그것은 글쓰기에 어떻게 나타날 수 있을까? 식수에 의하면 여성성의 제1차적 특징은 산포이다 즉 여성의 성감대는 남성과 달리 온몸에 골고루 퍼져 있기 때문에 중심과 주변이 따로 없다
남성의 성욕이야 남근 주위로 몰리게 놔두자 그리하여 (정치해부학적으로 말하자면) 부 분이 전체를 독재로 다스리는 중앙집권적인 육체가 되도록 놔두자 그러나 여성은 이러한 지방화 , 즉 머리/생식기의 한쌍에 봉사하며 어떤 경계선 안에서만 이루어지는 지방화를 하지 않는다
식수에 의하면 이러한 여성의 성적 특질에 충실한 글쓰기는 또한 타자를 수용하는 글쓰기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자아에 있어서 가장 직접적인 타자는 자기 자신의 무의식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성적 글쓰기란 무엇보다도 먼저 여성의 무의식을 닮은 글쓰기이며 또한 이 무의식은 여성의 리비도를 반영한다 따라서 여성적 글쓰기란 결국 여성의 리비도를 닮은 글쓰기 이다. 물론 식수에 있어 타자란 자기 자신의 무의식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자기 밖에 있는 타자, 즉, <너>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자기 속에 있는 타자인 무의식의 심층에까지 도달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우리는 자아를 알아야한다. 도용하는 자아의 비밀스런 심층까지 내려가 그곳의 폭풍우 를 경험해야 한다. 우리는 굽이굽이 멀고 험한 길을 돌아 무의식에 도달해야 한다. 그런 다음, 그곳으로부터 솟아나 타자를 향해 가야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타자, 즉 무의식은 글쓰기에 어떤방식으로 나타날 수 있을까? 이 물음에 대해서 식수는 자세한 설명을 하지 않는다. 다만 무의식은 육체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는 전제 아래, 육체와 보다 직접적인 관련을 맺는 표현 방식, 즉 목소리, 노래 등이 여성적 글쓰기의 한 가능성을 제공해 줄 것이라고 시사할 뿐이다.
이 점에 있어서는 <여성적> 자질의 세번째 특징인 법에 대한 거부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식수는 '새로운 여성의 탄생'에서 전통적 규범을 위반하는 여성의 자질은 전복적인 텍스트를 낳을 수 있을 것으로 본다. 그러나 이러한 전복의 방법으로는 훔치고 날려보내는 것<불어의 동사voler는 이 두 가지를 한꺼번에 의미한다> 이외의 것은 제시하지 않고 있다. 그녀에 의하면 여성은 항상 남성적 질서로부터 무엇인가를 훔쳐서 사용해 왔다. 그러나 그녀는 단순히 훔치는데 그치지 않고 그 훔친 것을 사용하여 기존 질서에 구멍을 내고 그것을 전복시켜 왔다는 것이다.우리는 이러한 전복의 예를 <여성적>이라는 용어에서, 그리고 대표적인 여성의 자질들인 여성의 수동성 및 법을 거부한는 여성의 태도를 통해 살펴보았다. 여기서 식수는 기존의 개념들을 <훔쳐온> 다음, 그것들을 전혀 다른 방식으로 사용함으로써 <날려보내는> 여성적 글쓰기의 정신을 실제적으로 구현하고 있다. 그러나 식수는 그것이 이러한 용어적 차원을 넘어서는 차원, 즉 문학 장르와 문학 관습과 같은 상위적 글쓰기 차원에서 어떻게 나타날 수 있는지의 문제에 대해서는 명시적으로 밝히고 있지 않다.
그러므로 여성적 글쓰기의 구체적 형태를 살펴보기 위해서는 식수의실제 창작 작품들로 눈을 돌려야 한다. 그러나 여기서도 여성적 글쓰기의 실체는 여전히 모호한 채로 남아있다. 물론 식수의 초기 소설들에는 구어의 리듬을 닮은 글쓰기가 자주 도입되고 있으며 초현실주의자들의 자동기술법과도 유사한 비직선적이고 산포적인 문장 형태들이 특징적으로 나타난다. 또한 <법의 거부>의 측면에서는 언어 유희 등을 통한 전통적인 의미 체계와 문법의 파괴, 그리고 기존의서사 구조의 파괴가 일어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전통적 문화 관습의 파괴는 독자들의 책읽기를 방해하며 작품의 이해를 어렵게 한다. 이 때문에 식수의 소설들은 난해하다는 비판을 받았고 또한 대중들로부터 외면당하게 되었다.
물론 우리는 이러한 대중성의결여만으로 여성적 글쓰기의 장래를 속단할 수는 없다. 그러나 적어도 현단계에서 여성적 글쓰기란 현상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라기보다는 하나의 가능성에 불과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즉, 그것은 아직까지 그 잠재력이 현실화하지 않은 하나의 이론이며 <남성적> 글쓰기를 대체하기보다는 그것에 의문을 제기하는 대안적인 글쓰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성적 글쓰기의 이론적 중요성은 줄어들지 않는다. 그것은 기존의 글쓰기의 정치성에 대해 주의를 환기 시켰으며 또한 그것을 성차의 문제와 연결시킴으로써 여성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특유성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이러한 여성적 글쓰기의 장래는 분명치 않다. 그것은 일시적인 유행으로 끝날 수도 있고 아니면 어느 날 어떤 천재적인 작가에 의해 생명력 있는 글쓰기로 다시 태어날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대안적인 글쓰기의 가능성에 대해 계속해서 고찰하고 그 방법을 모색해 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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