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달 바둑이야기게시판도 제가 살포기 개시해드립니다.
유명한 사진이죠. 바로 저 조치훈9단의 '목숨을 걸고 둔다'라는 말이 나오게끔 한 휠체어대국입니다.
휠체어대국하면 보통 조치훈9단의 입장에서만 말들을 많이 합니다.
그가 주인공인셈이니 어찌보면 당연한것이겠지요.
저 역시 조치훈9단의 대단함을 더 느끼고 이후 90년대 제2의 전성기가 왔을때도 경이를 느꼈습니다.
다만 이번엔 고바야시 고이치9단의 입장에서도 생각을 해보고자 합니다.
지금으로부터 27년전에 열렸던 기성전 대국을 되돌아보지요.
기성전 대국전의 조치훈과 고바야시의 관계
1. 알다시피 조치훈은 어린시절 도일하여 기타니문하에 들어가게 됩니다.
당시 기타니문하엔 큰형격인 오다께9단을 필두로 가또, 이시다, 다께미야 그리고 고바야시 같은 유망주들이 있을때였죠.
조치훈이 56년생, 고바야시가 52년생. 어릴때 4살차이는 큰 차이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조치훈과 고바야시를 같이 묶어서 얘기하고 다녔죠.
2. 사실확인은 안되지만 둘은 어려서부터 라이벌 의식도 강하고 서로 싫어하는 마음이 컸을거라 보여집니다.
그러던중 고바야시가 입단을 하게 됩니다. 그러자 조치훈이 기다렸다는듯이 다음해에 입단을 하죠.
조치훈은 11세의 나이로 입단, 역대 최연소 입단 기록을 세웁니다.(얼마전에 어떤 여류기사가 기록을 깼죠. 갑자기 이름이 기억이 안나네요.)
3. 둘은 입단하고 한동안 성적을 내지 못했죠. 그때는 다른 기타니문하 선배들이 힘을 내던 시절이었죠.
소위 3대기전이라 불리는 기성, 명인, 본인방전에서 이렇다할 성적을 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중 1980년, 조치훈의 나이 24세에 명인전에 도전하게 됩니다. 당시 명인은 '명인전의 사나이'라 불리던 오다께9단이었죠.
4승1무1패의 기록으로 명인을 획득합니다.(희귀한 기록인 1무에 대해서는 나중에 또 다른 얘기로 하기로 하구요.)
그리고 바로 그 다음해.. 본인방전에 도전하여 다께미야9단을 꺾고 본인방마저 쟁취하게 됩니다.
그리고 1983년 마지막 남은 기성전에 도전하게 되는데 당시 기성은 6연패를 기록중인 후지사와9단이었죠.
여기서 3연패뒤 4연승으로 기성마저 쟁취하면 첫번째 대삼관을 기록하게 됩니다.
재미있는건 83년 초에 기성전을 따내며 대삼관을 기록하자마자 5월에 본인방전에서 임해봉9단에게 3연승뒤 4연패로 본인방전을 내주게 되죠. ㅎㅎ
조치훈이 이렇게 기세등등하게 전성기를 구가하던 시점에 라이벌이라 불리던 고바야시 고이치는 이렇다할 성적을 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82년에 본인방전 도전자가 됐지만 조치훈에게 2-4로 패퇴하면서 조치훈과의 첫 7번기 대결에서 패배를 기록하게 되었습니다.
그시절 고바야시가 7대기전중에서 우승한거라곤 76년에 천원타이틀을 딴게 고작입니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조치훈과의 상대전적은 거의 5대5였다는 점입니다.
기성전 직전 명인전
1. 85년 10기 명인전. 당시 명인 5연패를 기록하며 명예명인을 기록한 조치훈9단을 상대로 고바야시가 도전을 하게 됩니다.
당시 최전성기를 구가하던 조치훈을 상대로 고바야시가 얼마나 버틸까 했습니다만, 왠걸 4국까지 3-1로 고바야시가 압도합니다. 드디어 라이벌의 위치로 올려서려나 했습니다만 끈기의 조치훈.. 5,6국을 연속으로 이기며 3-3을 만들고 7국으로 승부를 끌고 갑니다.
보통 7번기에서는 6국의 승자가 7국을 이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건 다른 스포츠에서도 마찬가지지만 기세의 문제이기 때문이죠.
기세상 조치훈9단의 명인전 방어를 예상했지만, 예상을 깨고 고바야시가 7국을 잡아내며 첫 명인 타이틀을 획득합니다.
2. 말이 라이벌이지 사실 한수 아래라고 생각했을 조치훈에겐 커다란 충격이었을겁니다.
관전기같은걸봐도 6국을 이기고선 자신이 이겼다고 생각을 했다는 얘기가 있더라구요.
명인전을 내줬지만 여전히 랭킹1위인 기성전을 가지고 있는 조치훈. 절치부심을 하고 있었고..
한껏 기세가 오른 고바야시는 기성전 도전자결정전에서도 승리하며 86년 1월부터 열릴 기성전 타이틀전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제야말로 가장 절정의 기량에 오른 두 기사의 진검승부가 펼쳐질 예정이었죠.
사고
1. 기성전 1국이 벌어지기 10여일전.
차고에서 차를 후진시키던 조치훈이 오토바이를 치게 됩니다.
차에서 내려서 오토바이 운전자를 돌보던중, 뒤에서 오던 승합차가 오토바이와 함께 조치훈을 밀어버립니다.
승합차에 오토바이와 함께 10여미터를 끌려간 조치훈은 두다리와 왼손 골절, 머리에 찰과상을 입습니다.
처음엔 전치4개월이 나왔지만 수술후 전치6개월의 중상을 발표합니다.
2. 조치훈은 '바둑을 둘 수 있는 오른손과 머리만 멀쩡한건 하늘이 나에게 바둑을 두라는 뜻'이라면서
대국 강행을 외칩니다.
담당의사는 당연히 만류를 하구요.
최고의 흥행카드에서 우울한 기분이었을 일본기원에겐 어떤면에선 또다른 최고의 광고가 되는 순간이었을겁니다.
대국
1. 주최사인 요미우리신문사의 특별비행기편으로 대국장으로 날아온 조치훈은 휠체어를 타고 대국에 임합니다.
알다시피 일본 도전기는 방에서 진행이 되서 대국직전 포토타임땐 무릎을 꿇고 두게 되죠. 포토타임이 끝나고 난 후엔
좀더 편하게 앉아도 되지만 어찌됐든 의자에 앉아서 두진 않습니다.
그러나 조치훈을 위해 특별 대국실이 마련되고 고바야시도 거기에 응해서 의자에 앉아 대국을 하게 됩니다.
조치훈에겐 말그대로 '목숨을 걸고 둔다'인 셈이죠.
2. 위에 사진을 보면 고바야시의 머리가 빡빡 깎은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조치훈과의 대국때문에 그런게 아니라 그전에 열렸던 중일 슈퍼대항전에서 섭위평에게 일본의 1,2,3장인 후지사와, 가또 ,고바야시가 나가떨어지면서 거기에 대한 반성의 의미로 후지사와가 삭발을 하자고 제안한것에 따른 것이죠.
3. 1국은 역시 조치훈이 버티지 못하고 패합니다. 그러나 회복속도가 굉장히 빠른 조치훈이 2,3국을 연승하면서 분위기가 달라집니다. 사람들도 혹시나..하는 생각을 하게 되고 기대를 갖게 됩니다.
그러나 냉정을 되찾은 고바야시가 내리 3연승을 기록하며 첫 기성 타이틀을 쟁취하게 됩니다.
고바야시는 이후 전성기를 구가하며 기성전을 8연패.. 명예기성을 기록하게 됩니다.
물론 이후 조치훈에게 다시 1인자의 자리를 내놓게 되는데 이것은 다시 나중에 다른 글로 얘기하고자 합니다.
고바야시의 입장
1. 개인적으로 이 대국성사는 고바야시에겐 굉장히 잔인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대국이 성사됐을때 고바야시의 친인을 제외하고 고바야시를 응원할 바둑팬이 있을까 싶네요.
뭐 한국인 싫어하는 그런 넘들은 또 모르겠습니다만...
고바야시에겐 사실 이겨도 본전인 대국인셈이었죠.
2. 아마 그덕에 본인도 집중도나 그런게 많이 떨어져있던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물론 방심한면도 있었겠죠. 몸이 안좋은 상대에게 설마 지겠냐..하는..
그러다 2,3국 지고나서 정신차리고 다시 두게 됐겠습니만.
문제는 그 두번의 패배로 인해 고바야시가 더더욱 제대로 평가를 받지 못하게 됐다는 점이죠.
2,3국의 패배로 인해 조치훈은 집념의 화신이 되었고(사실이기도 합니다만), 고바야시는 몸아픈 상대에게 두번이 진 상처뿐인 승리자가 됐습니다.
3. 저 개인적인 생각은 저정도의 중상이라면 본인이 아무리 원하더라도 대국을 시키지 말았어야한다고 봅니다.
삼대기전의 도전기는 이틀걸이 바둑인데 저런 중상자가 이틀걸이 그것도 엄청나게 집중해야되는 바둑을 두는건 사실 정말 위험한 일이라고 봐야죠.
어쩌면 일본기원에선 조치훈이 대국하다 쓰러지는것도 상상했을지도 모릅니다. 좋은 스캔들이 될테니 말이죠.
좀 비약이긴 합니다만 그렇게 생각하지 말란 법은 없죠.
문제는 이런 일본기원의 진행에 고바야시가 희생양이 되었다는 점이죠.
당시 기세로 보면 똑같은 컨디션으로 붙었어도 고바야시가 해볼만한 시점이었으니 고바야시로선 억울할 일입니다.
기풍
1. 사실 고바야시의 바둑이 과소평가 받는 이유중 하나는 그의 기풍과 연관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다께의 '미학', 다께미야의 '우주류', 조치훈의 '치열함', 가또의 '대마사냥', 이시다의 '컴퓨터'등 당대의 기사들에겐 그에게 부합하는 이미지들이 있었죠.
그에 반해 고바야시에겐 그런 딱 정의되는 단어가 없습니다. 조치훈이 그의 바둑을 이상주의라고 평한걸 본 기억이 있는데..그게 딱 맞는다고 생각합니다.
고바야시의 바둑은 다께미야가 폄하하는 의미로 '지하철바둑'이라고 했다지만 그렇게 폄하될 바둑은 아니라고 봅니다.
기본적으로 바둑은 집많은 사람이 이긴다..라는 의미를 정확히 깨치고 있다고 봐야죠.
적절히 실리를 챙긴후(실제적으로 초반에 실리 땡기는건 그당시의 조치훈이 더 심했죠) 상대의 세력을 견제하면서 집으로 계속 우위를 가져가는 스타일입니다.
승패만을 놓고 생각하는 바둑이라면 가장 이상적인 형태죠.
전 다께미야가 고바야시를 그리 싫어했던게 그의 말처럼 바둑에 철학이 없네..이런게 아니라 자기 스타일대로 바둑을 두지 못하게 하는 고바야시가 얄미웠던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다께미야의 바둑은 알다시피 3연성을 위주로 한 우주류입니다. 조치훈은 그런 다께미야에게 초반부터 삼삼을 파면서 세력을 형성하게 만들어놓고 폭탄투하로 모아니면 도의 바둑을 둡니다. 다께미야도 그런 바둑에 강점이 있으니 즐겁겠죠.
그에 반해 고바야시는 다께미야와 둘때 소위 말하는 고바야시류로 나옵니다. 3연성한 다께미야의 돌에 날일자로 걸치고 받아주면 변에 있는 화점까지 벌리는 포석입니다.
다께미야가 실리를 챙기지 않는걸 알기에 실행하는 포석이라고 봐야죠. 집은 챙겨놓고 변의 화점을 차지해서 다께미야의 세력을 견제하는 바둑입니다. 다께미야입장에선 짜증이 나겠죠.
낭만주의 이런게 아닌 실리적인 바둑을 생각하면 고바야시의 바둑이야말로 가장 이상에 가깝다고 봅니다.
다만 아마추어들에겐 인기가 없을 수 밖에 없죠.
휠체어 대국후의 고바야시와 조치훈
1. 휠체어 대국이후 고바야시와 조치훈의 관계가 좀 좋아졌다고 하더군요.
그전까지 조치훈은 고바야시를 인정하지 않았고 고바야시도 조치훈을 좋아하지 않았기에 서로 말도 안했던걸로 압니다.
조치훈의 생각이 바뀐게 휠체어 대국에서 몸이 안좋은 자신을 상대로 최선을 다해서 열심히 두는 고바야시를 보고
그에 대해 새롭게 생각하게 됐다고 하더군요.
2. 휠체어대국이후 고바야시가 전성기를 누렸고, 90년대 들어오면서 조치훈에게 다시 1인자를 내주게 됩니다.
이 일단의 얘기들은 또 다음에 할 기회가 있을테구요.
바둑사에 길이 남을 휠체어대국. 한명에겐 집념의 승부사라는 명예를 주었지만 한동안 슬럼프에 빠지게 만들었고,
또다른 한명에겐 1인자의 자리를 주었지만 진정한 승리가 아니다라는 오명만을 남겨주었던 대국이라고 생각합니다.
첫댓글 철저히 기억에 의존해서 쓴 글이라..혹시 내용이 다르다거나 하는게 있으면 댓글주세요. 그리고 제 글과 다른 관점으로 생각하시는 분들이 계시다면 역시 댓글이나 답글을 써주세요. ^^
제가 아주 어릴때의 일들이라 잘 모르는 내용이 많다보니 흥미롭네요 ㅎㅎ 자주 써주세요^^
기억.. 대단합니다. 조치훈의 최연소 입단 기록을 깬 이는.. 후지사와 리나,,, 본문에 등장하는 기성 후지사와의 손녀입니다. 일본에서 바둑도장을 운영하는 홍맑은샘의 제자입니다.
매너리의 바둑사랑 및 관심도도 대단하다`~ ㅎㅎ
자료는 좀 뒤적이긴 했죠. 일본기원홈피가서..ㅎㅎ
훌륭햐~~~ 연애질만 빼고 뭐든지 박식한 늘보~~~
저와 같은 생각을 하셧내요 여튼 재미있게 보고 이습니다^^
와~~감사합니다.
좋은글 감사...일본 10세 여류 입단자..그아이...여자아이 고 후지사와 슈꼬 손녀 후지사와죠...
잘보고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