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곡의 역수책(易數策) 원전
2011. 5. 12. 16:16
http://blog.naver.com/bji1202/140129533947
問。儒者恥一物之不格。而況天地之大。象數之變乎。厥初混沌未分。睢盱渺茫。二儀肇闢。萬象繫焉。其所以闔闢者。孰主張是歟。伏羲首出。仰觀俯察。河圖出而始畫八卦。若非圖出。則八卦終不能畫歟。聖前後一揆。道古今一致。洛書見而大禹則之。列洪範九疇之序。二聖所見何據。而有煩簡之不同。抑有微意歟。圖書互位易置。生克奇耦之數。大相懸絶。抑天示人之意有前後之異歟。逮至文王周公孔子。推而策之。衍而翼之。易道大顯於世。如非三聖。則八卦五福之用。不能變轉。而六十四卦。終不可成歟。天地萬物之情無窮。六十四卦之變有限。而聖人以謂雖鬼神莫能遁其情狀。以有限之變。盡無窮之情者。何歟。蓍短龜長。明告吉凶。聖人之意。必欲使人人行止。一依龜蓍而然歟。秦漢以下。易道泯絶。揚雄, 郭璞, 淳風, 一行之徒。紛紜迭起。互爲爭長。其有補益於畫易之遺意歟。洛陽邵子。學究天人。發前聖之未發。作方圓之二圖。何所法而然歟。且於圓圖之中。必置姤於乾之後。置復於坤之後者。何意歟。天津鵑叫。知小人之用事。枯枝自落。識元夫之來伐。聖人作易之際。其能逆知千載之下。匠石之名。豎儒之禍而然歟。程朱兩賢。傳義于羲經。而或有註語之不同。何得而何失歟。方今選玉堂之士。俾之專業學易。輪遞講論。若使有研覈潔淨精微之義者。則其有益於國家之治。而雖無格致誠正之學。可乎。願聞其說。
對。一理渾成。二氣流行。天地之大。事物之變。莫非理氣之玅用也。知此說者。可與論易也。今執事先生特擧易學之微意。下詢承學。欲聞研覈之說。愚也糟粕淺見。韋編未絶。枕書未破。安足以仰塞明問。旣辱盛意。不敢囚舌。而爲之說曰。萬物。一五行也。五行。一陰陽也。陰陽。一太極也。太極。亦强名耳。其體則謂之易。其理則謂之道。其用則謂之神。是故。有天地自然之易。有伏羲之易。有文王周公之易。有孔子之易。自然之易。則不可以八卦求也。伏羲之易。則不可以文字求也。有文王周公然後。易道之用明於世。有孔子然後。易學之義昭於後。厥後。道統不傳。人懷異見。雖窺易學。不本其初。文辭象數。或肆或拘。有宋眞儒。克紹遺緖。發前聖之餘蘊。而斯道復明矣。愚請因是而白之。夫形而上者。自然之理也。形而下者。自然之氣也。有是理則不得不有是氣。有是氣則不得不生萬物。是氣動則爲陽。靜則爲陰。一動一靜者。氣也。動之靜之者。理也。陰陽旣分。二儀肇闢。二儀旣闢。萬化乃生。其然者。氣也。其所以然者。理也。愚未知孰主張是。不過曰自然而然耳。混沌之氣。雖爲天地之始。而又未知混沌之前。天地萬物。幾聚幾散耶。往復無際。終始無端。眇而視之。其惟無極乎。若稽古昔。伏羲首出。道統攸始。天不愛道。地不愛寶。於是。龍馬負圖。于以則之。乃畫八卦。蓋天地必待聖人。然後乃以是數示之人。聖人必待文瑞。然後乃以是理著於世。天不得不生聖人。亦不得不出文瑞也。此則自然之應。而天人交與之玅也。然而易有太極。是生兩儀。兩儀生四象。四象生八卦。聖人仰觀俯察。天地之閒。萬物之衆。無非一陰一陽之理。有是理則有是象。有是象則有是數。豈獨河圖爲然哉。一草一木。亦可因之畫卦。則河圖未出之前。八卦之形。已具於伏羲方寸中矣。愚於程子賣兔之說。深有感焉。及乎大禹治水。地平天成。神龜貢書。于以則之。以敍九疇。人君爲治之心法。於是乎在焉。河圖之數主全。故極于十而天地自然之象也。洛書之數主變。故極于九而人事當然之道也。伏羲獨得乎圖。大禹獨得乎書。雖若煩簡之不同。其實則河圖洛書。相爲經緯。八卦九疇。互爲表裏。前後一揆。古今一致。又何疑哉。蓋一六居北。二七居南。三八居東。四九居西。五十居中。耦贏而奇乏。左旋而相生者。河圖之數也。戴九履一。左三右七。二四爲肩。六八爲足。五數居中。奇贏而耦乏。右旋而相克者。洛書之數也。微伏羲。孰能揭其全。以示常數之體。微大禹孰能敍洪範。以示變數之用耶。然而洛書之數。亦可因之以畫八卦。河圖之數。亦可因之以敍九疇。圖未始不爲書。書未始不爲圖。奇耦生克。雖曰懸絶。而其理則一也。此理在天而爲八卦。在人而爲九疇。愚未見前後之有異也。噫。伏羲之易。只有卦爻。初無文字。天地之理。陰陽之變。畢具於此。降及中古。民僞日滋文王是憂。乃本卦義。以繫彖辭。爰及周公。因事設敎。鉤深闡微。昭示天下。周德旣衰。斯道復晦。惟我夫子乃作繫辭。發揮經義。三聖一心。以衍羲易。垂象千古。如日之中。箕子之陳洪範于武王者。亦述大禹之意也。夫聖人。德合天地。明竝日月。與四時合其序。與鬼神合其吉凶。求之於心術之動。得之於精神之運。非聖人。烏能知易之微意乎。大易之義。實理而已。眞實之理。不容休息。則上天安得不生三聖。三聖安得不衍大易哉。若六十四卦。則伏羲已畫其象。不待三聖然後乃成也。大哉。易也。以之順性命之理。以之通幽明之故。以之盡事物之情。其體至大而無不包。其用至神而無不存。人知六十四卦之變有限。而不知六十四卦之用無盡也。自一而二。則一者二之本也。其可謂二多而一少乎。自二而四。自四而八。自八而六十四卦。亦猶此也。自六十四而至於無窮。則六十四。亦無窮之本也。其可以無窮爲多。而六十四爲少乎。其卦則六十四。而其理無窮。其用亦無窮也。是故。時不一而卦無定象。事不一而爻無定位。先儒氏曰。以一時而索卦。則拘於無變。非易也。以一事而明爻。則窒而不通。非易也。必也窮其理而盡其變。然後可謂知易矣。聖人所謂鬼神莫能遁其情狀者。豈欺我哉。易者。所以定吉凶而生大業者也。吉凶之兆。必稽卜筮。蓋人謀。未免乎有心。有心。未免乎有私。是故。古之聖王。皇極雖建。而不敢自是。國有大事。參諸鬼謀。以決其疑。必擇建立卜筮人。乃命卜筮。所以洗心齋戒。以聽天命也。武王以至仁伐至不仁。尙曰。朕夢協朕卜。則聖人之謀及卜筮。斯可知矣。但後世不擇其人。其龜蓍又出於私心。則與不卜何異哉。嗚呼。秦漢以下。聖學不傳。易道遂泯。知易之全體者。固不可得。知易之一端者。亦不世出。蓋易者。萬事之本也。善惡由是而生。邪正由是而出。是故。學易而失其宗。則流於邪說者。亦有之矣。漢之揚雄。晉之郭璞。唐之李淳風, 一行之徒。或著太玄。或談性命。或推曆數。可謂知易之一端矣。然而惟求於易而不求於理。徒見其然。不見其所以然。卒失易學之宗。則安能有補於四聖之遺意歟。不知理而能知易者。愚未之聞也。若魏伯陽之參同契。亦學易而流於邪說者也。豈特揚雄輩爲然哉。若其生于千載之下。得契四聖之心。學究天人。通乎性理者。其惟邵子乎。邵子之學。出自陳希夷。而其獨知之玅。則靑出於藍而靑於藍者也。推伏羲之卦。作方圓之圖。圓於外者。爲陽動而爲天者也。方於中者。爲陰靜而爲地者也。天地之理。皆在是矣。圓圖之中。乾盡午中。坤盡子中。姤卦則陰之始生者也。復卦則陽之始生者也。乾陽極而生陰。故置姤新乾後。坤陰極而生陽。故置復於坤後。皆可以理推也。冬至爲復。一陽初動。夏至爲姤。一陰初萌。豈不與此圖相應歟。邵子旣明易理。又精易數。於伏羲先天之學。文王後天之數。剖析精微。遊刃無礙。盡天地之終始。盡物化之感應。能知未來。運智如神。夫豈易言哉。天氣自南而北。則便知小人之用事。此則以理觀時而逆見其未然也。枯枝無風而墜。則便知匠石之來伐。此則以數推物而預知其將然也。以理而推。則不待占而可見矣。何必天津鵑叫。然後乃知國步多艱耶。以數而推。則非占不可也。必待寓物成卦。然後乃知物數當盡也。聖人作易。寓無窮之用於一簡編耳。豈必爲某事而畫某卦哉。其理至微。其象至著。惟窮理者。可以盡其變耳。若元夫之名則偶然也。尤不可逆料也。易理無窮而必欲事事牽合。則無乃一曲乎。若夫程朱二賢。俱傳道統。洞明易學。悼斯道之湮晦。示學者以眞源。程子之傳。則發聖人之遺旨焉。朱子之本義。則明吉凶之定數焉。其所獨見者。不可求之言語文字閒也。雖或註語之不同。愚安敢輕議其得失哉。恭惟盛朝斯文大振。玉堂之士。專業學易。深明潔淨精微之義。闡揚開物成務之道。承我王文明之德。示我民當行之理。佇見治敎休明。鳳至圖出。豈曰小補之哉。然而易之爲道。體用一源。顯微無閒。苟非格物致知。則不得見其理。苟非誠意正心。則不得踐其實。格致誠正。易中之一事也。不格致而欲見聖人之道。則譬如航于斷港而求泛大洋也。不誠正而欲之聖人之道。則譬如不移寸步而求陟泰華也。欲學大易者。拾是何以哉。愚旣對執事之問。而又有復於執事焉。夫上天之載無聲無臭者。易之至微者也。鳶飛戾天。魚躍于淵者。易之至顯者也。天之高。地之厚。日月之明。人物之繁。山川之流峙者。易之用也。天之所以高。地之所以厚。日月之所以明。人物之所以繁。山川之所以流峙者。易之體也。大而天地之外。小而秋毫之末。安有出於大易之外者哉。伏羲畫卦。則此易寓於卦爻。文王作彖。則此易寓於彖象。孔子繫辭。則此易寓於繫辭。卦爻彖辭。則易之已形已見者也。須知伏羲未畫八卦。此易未形未見之前。不可謂無易也。執事以爲何如。謹對。
역수책(易數策)
이 글은 율곡이 29세(명종 19년) 때 대과(大科)에 장원 급제한 글로써, 변전(變轉)하는 역(易)의 수(數)에 대한 책문(策問)과 대책(對策)이다.
문(問)
선비가 한 물건의 이치를 끝까지 연구하지 못하는 것도 부끄러워해야 하는데 하물며 천지의 큼과 상수(象數)194)의 변화이겠는가? 태초에는 혼돈(混沌)195)이 분리되지 않아 원기가 묘망(渺茫)하였으나, 천지가 개벽됨에 만상이 거기에 매이게 되었다. 그 합벽(闔闢)196)은 누가 주장하는 것일까?
복희(伏羲)가 으뜸으로 뛰어나 천문을 우러러 보고 지리를 굽어살피며 하도(河圖)197)가 나오자 비로소 팔괘198)를 그었으니 만약 하도가 나오지 않았다면 팔괘는 끝내 그어질 수 없었겠는가?
전성(前聖)과 후성(後聖)은 길이 같고 고도(古道)와 금도(今道)는 일치가 된다. 낙서199)가 나타나자 대우(大禹)가 이를 법 받아 홍범구주(洪範九疇)의 차서를 나열하였다. 두 성인의 소견은 무엇에 의거하였기에 번다하고 간소한 차이가 있는가? 아니면 거기에 은미한 뜻이 있는 것인가?
하도와 낙서가 위치가 서로 바뀌고 생극(生克)이 바뀌어 기우(奇우 :음수, 양수)의 수가 크게 서로 다른 것은 하늘이 사람에게 보여주신 뜻이 전후에 다름이 있어서인가?
문왕(文王) · 주공(周公) · 공자(孔子)에 이르러 괘의 이치를 미루어 괘사(卦辭)와 효사(爻辭)를 지어서 책(策)으로 만들고 다시 연역(衍繹)하여 십익(十翼)을 붙이자 역(易)의 도가 크게 세상에 드러났다. 만일 세 성인이 아니었다면 팔괘와 오복의 용(用)이 변전(變轉)하지 못하고 64괘가 끝내 이뤄지지 않았겠는가?
천지 만물의 실정은 무궁하고 64괘의 변화는 한계가 있는데 성인은 이르기를, "비록 귀신이라 하더라도 그 정상을 숨길 수 없다."고 하였으니, 한계가 있는 변화로써 무궁한 실정을 다하려 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시서(蓍筮)는 잘못 맞추고 귀복(龜卜)은 잘 맞추는 장단점이 있으나 200) 모두가 밝게 길흉을 고해주는 것이니, 성인의 뜻은 반드시 사람마다 행동거지를 한결같이 귀복과 시서에 따르게 하고자 하여 그런 것인가?
진(秦) · 한(漢)이하로는 역도(易道)가 멸절(滅絶)하여 양웅(揚雄)201) · 곽박(郭璞)202) · 순풍(淳風)203) · 일행(一行)204)의 무리가 어지럽게 번갈아 일어나서 서로 잘한다고 다투었으니, 과연 그들이 역을 그은 유의(遺意)에 도움이 있었던가?
낙양(洛陽)의 소자(邵子: 이름은 옹(雍), 호는 강절(康節)임)는 학문이 하늘과 사람을 모두 구명하여 옛 성인이 발명하지 못한 것을 발명해 가지고 방도(方圖)와 원도(圓圖)를 만들었느데 그것은 무엇을 본받아 그렇게 하였는가? 그리고 원도 가운데서 반드시 구괘(구卦)를 건괘(乾卦)의 뒤에 놓고, 복괘(復卦)를 곤괘(坤卦)의 뒤에 놓은 것은 무슨 뜻인가?
천지교(天津橋) 위에서 두견새가 우는 소리를 듣고서 소인이 권세를 잡을 줄 알았고, 마른 나뭇가지가 까닭 없이 스스로 떨어지는 것을 보고서 원부(元夫)205)라는 목수가 와서 벌목할 줄을 알았으니, 이는 성인이「역」을 만들 때 천년 후에 있을 장석(匠石)의 이름과 수유(수儒)의 화란을 미리 알고서 그렇게 한 것인가?
정자와 주자 두 현인이 희경(羲經: 역을 이름. 복희가 지었기 때문에 이르는 말)에 전(傳: 정전을 이름)과 본의(本義: 주자가 낸 것)를 달았는데 혹 그 주석의 말이 서로 같지 않으니 어떤 것이 잘되고 어떤 것은 잘못된 것인가?
요즘 옥당(玉堂)의 선비를 뽑아 전업(專業)해서 역을 배우며 돌려가며 강론하게 하고 있으니, 만약 이들로 하여금 결정정미(潔淨精微)한 뜻을 연구하게 한다면 나라를 다스리는데 도움이 있고 격물치지 (格物致知), 성의정심(誠意正心)의 학문을 하지 않아도 괜찮겠는가?
설명을 해주기 바란다.
〈 주 〉
194) 상은 천지 만물이 모두 각자 가진 상을 이름이고, 수는 태극(太極)이 양의(兩儀)를 낳고 양의가 4상(象)을, 4상이 8괘를, 8괘가 64괘를 낳는 유로서 끝없이 생생(生生)하는 것을 이름이다.
195) 천지가 개벽되기 전에 원기(元氣)가 나뉘어지지 않고 한데 엉켜 있는 모양인데, 곧 개벽이전을 이르는 말이다.
196) 합은 폐(閉)·정(靜)의 뜻이고 벽은 개(開)·동(動)의 뜻인데, 천지의 폐합(閉闔) 개벽(開闢)과 만물의 생육(生育) 사멸(死滅)을 이르는 말이다.
197) 복희(伏羲) 때에 황하(黃河)에서 용마(龍馬)가 등에 지고 나왔다는 그림. 복희는 이를 보고 8괘를 그었다 한다.
198) 복희가 그린 것은 건·태·이·진·손·감·간·곤(乾兌離震巽坎艮坤)의 여덟 괘이니 이 팔괘가 소성괘(小成卦)이고 팔괘의 뒤에 다시 각각 팔괘를 가하면 64괘의 대성괘를 이룬다.
199) 우(禹)가 홍수를 다스릴 때 낙수(洛水)에서 나온 신귀(神龜)의 등에 있었다고 하는 45개의 점으로 된 무늬. 우는 이것을 보고 홍범구주(洪範九疇)를 만들었다 한다.
200) 서단귀장(筮短龜長)이라고도 한다. 귀복이 잘 맞고 시초점은 그보다 덜 맞는다는 말이다.
201) 한(漢)나라 성제(成帝) 때 사람. 「
202) 동진(東晋)사람으로 자는 경순(景純), 박학고재로 그의 사부는동진 제1이었다고 한다. 오행 천문 복서(五行天文卜筮)에 통달하였고, 이아(爾雅) 산해경(山海經) 초사(楚辭)등을 주석 하였으며, 또동림(洞林) 신림(新林)등 복서서를 저술하였다.
203) 당나라 사람으로 역산(曆算)에 밝았다 한다. 정관(貞觀)초에 태사령(太史令)이 되고 혼천의(渾天儀)를 제작하였다. 기사점(己巳占)등의 저서가 있다.
204) 당나라 중으로 밀교의 개조이다.
205) 강절은 마른 가지가 저절로 떨어지는 것을 보고 화택규괘(火澤<규0x58CD>卦)의 구사효(九四爻)를 후천의 우물성괘법(寓物成卦法)에 의하여 연득(演得)하였다. 그 효사에 원부를 만난다는 말이 있는데 효사의 의미는 규고(<<규0x58CD>0x58CD>孤)한 중에 동덕(同德)의 선인을 만나 무구(無咎)하게 된다는 것으로 어려운 속에서도 동지의 구원을 받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으나 여기서는 흉징(凶徵)에 대한 것이므로 벌목의 불길로 말한 것이다. 《규九四》
역수책(易數策)
대(對)
일리(一理)가 혼성(混成)하고 이기(二氣)가 유행(流行)하는 것과 천지의 큼과 사물의 변화가 모두 이기(理氣)의 묘용(妙用)이 아닌 것이 없으니, 이 말을 아는 자와 더불어 역을 논할 수 있습니다. 이제
집사(執事:일을 관장하는 사람이며 존칭도 된다.) 선생께서 특별히 역학의 은미한 뜻을 들어 승학(承學:아직 배우는 사람이라는 겸칭)에게 하문(下問)하여 연구한 말을 듣고자 하시나 어리석은 나는 천
박한 식견으로 위편(韋編)206)이 끊어지도록 읽지도 못하였고 침서(枕書)207)를 독파(讀破)하지 못하였으니, 어찌 우러러 고명하신 물음에 만족할 만한 답을 드릴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미 성의(聖意)를 받았으므로 감히 입을 다물 수 없어 아래와 같이 말씀드리겠습니다.
만물은 하나의 오행이요, 오행은 하나의 음양이요, 음양은 하나의 태극입니다. 태극은 억지로 그렇게 이름을 붙인 것일 뿐, 그 체(體)는 역(易)이고 그 이치는 도(道)이고 그 용(用)은 신(神)입니다.
그러므로 천지자연의 역이 있고 복희(伏羲)의 역이 있으며 문왕·주공의 역이 있고 공자의 역이 있습니다. 자연의 역은 팔괘로써 구할 수 없고 복희의 역은 문자로써 구할 수 없습니다. 문왕·주공이 있은 뒤에 역도의 쓰임이 세상에 밝아졌으며, 공자가 있은 뒤에 역학의 뜻이 후세에 밝아졌습니다. 그 후로는 도통이 전해지지 않아 사람마다 이견을 품어 비록 역학을 엿본다 하나 역의 본래의 뜻에 근본하지 않고 문사(文辭)와 상수(象數)를 멋대로 해석하기도 하고 혹은 문자에 구애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송나라의 진유(眞儒)가 능히 유서(遺緖)를 계승하여 전성(前聖)이 다 말씀하지 않으신 깊은 뜻을 발명하였으므로 사도(斯道)가 다시 밝아졌습니다. 저는 이것을 인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대저 형이상(形而上)은 자연의 이치(理)이고 형이하(形而下)는 자연의 기운(氣)입니다. 이치가 있으면 이 기운이 있지 않을 수 없고 이 기운이 있으면 만물을 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기운이 동(動)하면 양(陽)이 되고 정(精)하면 음(陰)이 되니, 한번 동하고 한번 정하는 것은 기운이고 동하게 하고 정하게 하는 것은 이치입니다. 음양이 나누임에 이의(二儀: 천지天地)가 비로소 개벽되고 이의가 개벽함에 만물의 변화가 생기는데, 그렇게 된 것은 기운이고 그렇게 되는 까닭은 이치입니다. 그러나 저는 누가 이것을 주장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자연히 그렇게 되는 것에 지나지 않을 뿐입니다.
혼돈한 기운이 비록 천지의 시초이지만 또 혼돈 이전에 천지만물이 몇 번이나 취합(聚合)하였다가 몇 번이나 분산되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왕복이 한계가 없고 종시가 단서가 없으니, 아득히 바라보면 오직 무극(無極)일 뿐인 듯합니다.
<복희>는 이것을 법받아 팔괘를 그었으니, 대개 천지는 반드시 성인을 기다린 뒤에 이 수(數)를 사람들에게 보여 주고 성인은 반드시 문서(文瑞)를 기다린 뒤에 이 이치를 세상에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늘은 성인을 내지 않을 수도, 문서를 내지 않을 수도 없는 것이니, 이것은 자연의 응(應)이며 하늘과 사람이 서로 통하는 미묘함입니다. 그러나 역 속에 태극이 있어 이것이 양의(兩儀: 음양)를 낳고 양의가 사상(四象: 태양太陽· 소음少陰· 소양小陽· 태음太陰)을 낳고 사상이 팔괘를 낳는 것인데, 성인이 우러러 천문을 보시고 굽어 지리를 살피셨으니 천지 사이의 온갖 만물이 일음(一陰)·일양(一陽)의 이치가 아님이 없었습니다. 이 이치가 있으면 이 상(象)이 있고 이 상이 있으면 이 수(數)가 있는 것이니, 어찌 다만 하도만이 그러할 뿐이겠습니까. 한 포기의 풀과 한 그루의 나무도 또한 이를 인하여 괘를 그을 수 있으니, 그렇다면 하도가 아직 나오기 이전에 팔괘의 형태가 이미 복희의 마음 가운데 갖추어져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정자의 매토(賣)의 설에 대하여 깊이 느낀 바가 있습니다.
대우(大禹:우임금)가 홍수를 다스려 지평천성(地平天成)함에 미쳐 신귀(神龜)가 낙서(洛書)를 바쳤습니다. 대우가 이를 법받아 구주(九疇)208)를 펼쳐 놓으니 임금이 정치하는 심법(心法)이 여기에 담
기게 되었습니다. 하도의 수는 온전한 것을 주로 하기 때문에 십이세 끝이 났으니, 천지자연의 상이고, 낙서의 수는 변화를 주로 하기 때문에 구에서 끝이 났으니 인사에 있어서 당연한 도입니다. 복희는 단지 하도에서만 얻었고 대우는 단지 낙서에서만 얻었으므로 번다하고 간소한 차이가 있지만 사실에 있어서는 하도와 낙서가 서로 경위(經緯:날과 씨)가 되고 팔괘와 구주가 서로 표리(表裏)가 되어 전후가 한 법도이며 고금이 한 이치인데, 또 무엇을 의심하겠습니까.
대개 일·륙(一·六)이 북에 거하고 이·칠(二·七)이 남에 거하며 삼·팔(三·八)이 동에 거하고 사·구(四·九)가 서에 거하며 오·십(五·十)은 중앙에 거하여 우수는 많고 기수는 모자라며 왼쪽에서 오른쪽으로돌면서 서로 생하는 것은 하도의 수이고, 구를 이고[戴九] 일을 밟으며[履一] 좌는 삼이오[左三] 우는 칠이며[右七] 이·사는 어깨가 되고[二四爲肩] 육·팔은 발이 되며[六八爲足] 오수가 중앙에 거하여[五數居中] 기수는 많고 우수는 모자라며 바른쪽에서 왼쪽으로 돌면서 서로 극(克)하는 것은 낙서의 수입니다. 복희가 아니면 그 누가 전체를 들어서 상수(常數)의 체를 보여주겠으며 대우가 아니면 그 누가 홍범(洪範)을 서차(서次)하여 변수(變數)의 용을 보여 주었겠습니까. 그러나 낙서의 수를 인하여 팔괘를 그을 수도 있고 하도의 수를 인하여 구주를 서차할 수도 있으니, 하도가 일찍이 낙서가 되지 않는 것이 아니고 낙서도 일찍이 하도가 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기수와 우수의 생하고 극하는 것이 크게 다르나 그 이치는 하나이므로, 이 이치가 하늘에 있어서는 팔괘가 되고 사람에 있어서는 구주가 되는 것이니 저는 전후가 다르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아! 복희의 역에는 다만 괘효만 있으니 초기에 전연 문자가 없어서 인데 천지의 이치와 음양의 변화는 모두 여기에 갖추어졌습니다. 그러던 것이 중고에 미쳐서는 백성의 거짓이 날로 심하여졌으므로 문왕이 이것을 근심하여 괘의(卦義: 괘가 지니고 있는 의미)에 근본하여 단사(彖辭: 한괘의 의미를 단정한 말.)를 부쳤고 주공에 미쳐서는 사물에 따라 가르침을 베풀어 심오한 것을 들추어내고 음미한 것을 드러내어 밝게 천하에 보여주었습니다. 주나라의 덕이 쇠퇴하여 이 도가 다시 어두워지자 우리 부자께서 계사(繫辭)를 지어 역경의 뜻을 발휘하였습니다. 세분 성인께서 한 마음으로 복희역을 연역(衍繹)하여 역상(易象)을 천고에 드리우심에 해가 중천에 오른 것 같이 밝았습니다. 기자(箕子)가 홍범을 무왕에게 베푼 것도 또한 대우의 뜻을 기술한 것입니다.
대저 성인은 덕이 천지와 같으며 밝음이 일월을 아울렀으며 사시와 더불어 그 차서가 같으며 귀신과 더불어 그 길흉이 같으시어 심술이 동하는데서 구하여 정신이 운행되는 데서 터득하시니, 성인이 아니고서야 어찌 능히 역의 은미한 의미를 알겠습니까. 대역(大易)의 본의는 실리(實理)일 따름이고 진실한 이치는 휴식을 용납하지 않는 것이니, 하늘인들 어찌 세분 성인을 내지 않을 수 있으며 세분 성인인들 어찌 대역을 연역하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64괘는 복희가 이미 그 상을 그은 것이니 세분 성인을 기다린 뒤에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크도다 역이여! 이로써 성명(性命)의 이치를 순하게 하고, 이로써 유명(幽明)의 까닭을 통달하고 이로써 사물의 실정을 극진히 하였으니, 그 체는 지극히 커서 포함하지 않은 것이 없고 그 용은 지극히 신묘하여 존재하지 않음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사람은 괘의 변화가 유한(有限)한 줄만 알고 64괘의 용이 무진(無盡)하다는 것은 알지 못합니다. 하나에서 둘이 되는 것이라면 하나가 둘의 근본인데 어찌 둘은 많고 하나는 적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둘에서 넷이 되고 넷에서 여덟이 되고 여덟에서 64가 되는 것도 이와 같습니다. 64로부터 무궁한데 이르는 것이고 보면 64는 또한 무궁의 근본이니, 어찌 무궁을 많다 하고 64를 적다 하겠습니까. 그 괘는 64이지만 그 이치와 용은 무궁합니다. 이러므로 띠는 하나만이 아니고 괘는 정해진 상이 없으며 일은 하나만이 아니고 효(爻)는 정해진 위(位)가 없습니다. 선유씨(先儒氏)가 말하기를, '한 때로만 괘를 탐색하면 변함이 없는데 구애되니 역이 아니오, 한 일로만 효를 구명하면 막히어 통하지 않으니 역이 아니다.'하였으니, 반드시 그 이치를 궁구하고 그 변화를 다한 뒤에야 역을 안다고 이를 수 있습니다. 성인이 이른 바 귀신도 그 정상을 숨길 수 없다고 하신 것이나, 길흉의 조짐(兆朕)은 반드시 복서에 상고하여야 합니다. 대개 사람의 도모(圖謀)는 마음을 쓰는 것을 면할 수 없고 마음을 쓰면 사(私)가 있음을 면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옛적의 성왕은 황극(皇極: 대중지정大中至正의 도道)을 세우시고도 감히 스스로 옳다고 여기지 않고 나라에 큰 일이 있으면 귀신의 지모(智謀)를 참고하여 그 의혹을 해결하려고 반드시 복서하는 사람을 선택하여 세워 복서를 명한 것은 마음을 말끔히 세척(洗滌)하고 재계하여 천명을 청종하려는 소이였읍니다. 무왕은 지극한 어진분으로서 지극히 어질지 못한 주(紂)를 치면서도 오히려, "짐의 꿈이 짐의 복(卜)과 합한다."고 하였으니 성인이 복서에 물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후세에서는 적합한 사람을 선택하지 않고 그 귀·시(龜蓍)도 사사로운 마음으로 나오고 있으니 복서하지 않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아! 진·한(秦漢) 이하로는 성학이 전해지지 않아 역도(易道)가 민멸(泯滅)되었으므로 역의 전체를 아는 자는 참으로 얻을 수 없었고 역의 일부분만을 아는 사람도 대대로 나오지 않았습니다. 대개 역은 만사의 근본으로 선악이 여기에서 생겨나고 사정(邪正)이 여기에서 나옵니다. 그러므로 역을 배우다가 잘못되어 종지(宗旨)를 잃어 사설(邪說)로 흘러 들어간 자도 있었습니다. 한나라의 양웅과 진(晋)
나라의 곽 박과 당나라의 이 순풍과 일행의 무리는 태현(太玄)209)을 저술하기도 하고 성명을 담론하기도 하고 역수(曆數)를 추산하기도 하였으니 역의 일단을 알았다고 이를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역에 대해서만 추구하고 이치에 대해서는 추구하지 않았으며, 한갓 그러한 사실만을 알았을 뿐, 그렇게 되는 까닭은 아지 못하여 마침내 역학의 종지를 잃었으니 어찌 네 분 성인의 유의(遺意)에 도움이 있겠습니까. 이치를 아지 못하고서도 역을 알 수 있다는 것을 저는 아직 듣지 못하였습니다. 위백양(魏伯陽)210)의 참동계(參同契) 따위도 역시 역을 배우다가 사설에 흘러 들어간 것이니, 어찌 다만 양 웅의 무리만이 그러할 뿐이겠습니까.
천년위에 태어나서 네분 성인의 마음을 묵계(默契)하고 학문이 천일(天人)의 도(道)를 궁구하여 성리에 통한 분은 오직 소자(昭子: 강절소옹康節 邵雍) 뿐인가 합니다. 소자의 학문은 진희이(陳希夷)211)로부터 나왔으나 자기혼자만이 아는 오묘함은 스승보다 낫습니다.
복희의 괘(선천 괘)를 추연하여 방도(方圖)와 원도(圓圖)를 만들었는데, 밖의 원은 양이 동하여 하늘이 된 것이고 중앙의 방(方)은 음이 정하여 땅이 된 것이니 천지의 이치가 모두 여기에 있습니다. 원도 가운데 건(乾)은 오중(午中: 원도의 위 중앙부는 남쪽이다)에서 다하여 끝나고 곤(坤)은 자중(子中: 원도의 아래 중앙부는 북쪽이다)에서 다하여 끝나며 구( )괘는 음이 비로소 생긴 것이오 복(復)괘는 양이 비로소 생긴 것이며, 건은 양이 극하여 음을 생하기 때문에 구괘를 건괘의 다음에 놓고 곤은 음이 극하여 양을 생하기 때문에 복괘를 곤괘의 다음에 놓은 것이니 모두 이치로 미루어 알 수 있습니다. 동지는 복괘가 되어 일양(一陽)이 처음 동하고 하지는 구괘가 되어 일음(一陰)이 처음 싹트니 어찌 이 도표와 더불어 서로 상응하지 않습니까. 소자는 이미 역리에 밝고 또 역수(易數)에도 정통하여 복희의 선천(先天: 복희팔괘에 따른 것)의 학과 문왕의 후천(後天:문왕팔괘에 따른 것)의 수에 대하여 조금도 막힘 없이 정미하게 분석하여 천지의 종시(終始)와 물화(物化)에 감응(感應)을 극진히 하여 능히 미래의 일을 알고 지혜 운용하기를 귀신같이 하였으니 어찌 쉽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천기가 남쪽으로부터 북쪽으로 흐르는 것을 보고서 문득 소인이 용사(用事)할 줄을 안 것은 이치로써 때를 관찰하여 미연에 미리 안 것이고, 마른 가지가 바람도 없는데 스스로 떨어지는 것을 보고서 문득 장석(匠石)이 와서 벨줄을 안 것은 경수로써 사물을 미루어 장차 그렇게 될 것을 미리 안 것입니다. 이치로써 미루면 점을 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인데 어찌 반드시 천진교(天津橋)에서 두견의 울음을 들은 뒤에야 국운이 어지러워질 것을 알겠읍니까. 수로써 미루는 것은 점이 아니면 안 되므로 반드시 사물에 부쳐 성괘(成卦: 중괘를 하나 만드는 것.)한 뒤에야 물건의 운수가 다할 것을 아는 것입니다. 성인께서 역을 만드시어 무궁한 용(用)을 하나의 간편(簡編:책)속에 부쳐 놓으신 것뿐이니 어찌 아무 일을 위하여 아무 괘를 그으셨겠습니까. 그 이치는 지극히 정미하고 그 상(象)은 지극히 현저하니, 오직 이치를 궁구한 사람이라야만 그 변화를 다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원부(元夫)의 이름 따위는 우연이니 더욱 미리 헤아릴 수는 없는 것 입니다. 역리가 무궁하다 하여 반드시 일마다에 끌어 붙이려 한다면 일곡(一曲:무궁한 전체가 아니고 그 중의 한가지 따위)이 아니겠습 니까.
저 정주(程朱) 이현(二賢)께서는 다함께 도통을 전수 받아 역학을 밝히시고 이 도가 없어지는 것을 슬퍼하시어 학자에게 진원(眞源)을 보여주었습니다. 정자의 전(傳:정 이의 역경주석)은 성인의 유지(遺旨)를 발명하였고 주자의 본의(本義:주자의 해석)는 길흉의 정수(定數)를 밝힌 것인데, 그들의 독득(獨得)한 견해는 언어와 문자 사이에 서 구할 수 없으니, 비록 주석한 말이 서로 같지 않을지라도 제가 어찌 감히 그 잘잘못을 경솔히 논하겠습니까.
삼가 생각하건대 성조(盛朝)에서는 사문(斯文:유학)이 크게 떨치어 옥당(玉堂)의 선비가 전업(專業)으로 역을 배워 깊이 결정정미(潔淨精微)212)한 뜻을 밝히고 개물성무(開物成務)213)의 도를 천명하여 우리 임금님의 문명(文明:학문과 덕행이며 선정에 따르는 문채.)
214)하신 덕을 이어 받들고 우리 백성의 마땅히 행하여야할 도리를 보여주어 치교(治敎:다스리고 가르침.)가 아름답게 밝고 저 상서로운 봉조(鳳鳥:성덕에 응하여 이른다는 새.)가 이르고 도서(圖書: 하도낙서)가 출현하는 것을 기다려 볼만 하니, 어찌 도움이 작다 하겠습니까. 그러나 역의 도는 체용일원(體用一源: 보이지 않는 체와 나타난 용이 한 근원이라는 말.) 현미무간(顯微無間: 현으로 인하여 미를 볼 수가 있으므로 사이가 없다는 말.)215) 한 것이니 진실로 격물치지가 아니고서는 그 이치를 볼 수 없고 진실로 성의 정심(誠意正心)이 아니고서는 그 진실을 실천할 수 없으니, 격치 성정(格致誠正)은 역 가운데 한가지 일입니다. 격물 치지를 하지 않고서 성인의 도를 보고자 하는 것은 비유하자면 단항(斷港: 물이 마른 항구)에 배를 띄워 큰 바다로 내려가기를 구한는 것과 같고, 성의 정심을 하지 않고서 성인의 도에 가고자하는 것은 비유하자면 촌보도 옮기지 않으면서 태화(泰華: 태산과 화산)에 오르기를 구하는 것과 같으니, 대역을 배우고자 하는 사람이면 이 격치 성정을 버리고서 무엇으로 하겠습니까.
제가 집사의 물으심에 이미 대답하였으나 또 집사께 사뢸 것이 있습니다. "상천의 일이 무성무취(無聲無臭:하늘의 하는 일은 소리도 없고 냄새도 없다는 말.)216) 한 것은 역의 지극히 은미한 것이오, 소리개는 날아 하늘에 이르고 물고기는 연못에서 뛴다217)는 것은 역의 지극히 현저한 것이며 하늘이 높은 것과 땅이 두터운 것과 일월이 밝은 것과 인물이 번성한 것과 산이 솟고 내가 흐르는 것은 역의 용(用)이고 하늘이 높은 까닭과 땅이 두터운 까닭과 일월이 밝은 까닭과 인물이 번성한 것과 산과 내가 솟고 흐르는 까닭은 역의 체(體)이니, 크게는 천지 밖과 작게는 추호(秋毫)의 끝까지 어찌 대역의 밖을 벗어나는 것이 있겠습니까. 복희가 획괘(획卦)하심에 역이 괘효에 붙여지고, 문왕이 단(彖)을 지으심에 역이 단상(彖象)에 붙여지고, 공자가 계사(繫辭)218)하심에 역이 계사에 붙여졌으니, 괘효(卦爻)와 단사(彖辭)는 역이 이미 형현(形見)한 것이지만, 모름지기 복희가 팔괘를 긋지 않아 역이 형현하기 전에는 역이 없었다고 이를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집사께서는 어떠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삼가 대합니다."
〈 주 〉
206) 옛적의 대쪽으로 엮은 책은 부드러운 가죽끈으로 편철되었으므로 공자는 만년에 역을 좋아하여 이 끈이 세 번이나 끊어지도록 읽었다는 말이 있다. 그래서 역학연구가 부족하다는 겸사로써 위편이 끊어지지 않았다고 한 것이다.
207) 관매역수에 보면 강절은 잠을 자다가 깨어 쥐가 지나가는 것을 보고 베고 있던 와침(瓦枕)을 던졌더니 와침이 뻐개졌는데 거기에는 아무 연월일에 현인 강절은 격서침파(擊鼠枕破)라고 써있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도공(陶工)에게 물어 은자를 찾아 비전을 받았다는 말이 있다. 강절만큼 역학에 얻음이 있어야 이런 일이 있는데 자신은 그만 못하다는 것.
208) 우(禹)가 홍수를 다스림에 하늘이 준 우언(禹言) 대법(大法)이 아홉 가지이니, 요·순·우 임금 이래의 정치사상을 집대성해 놓은 홍범구주(洪範九疇)를 말한다.
209) 양 웅(揚雄)의 찬이니 총10권이다. 역에 준의(準擬)해서 지은 것이다.
210) 한나라 사람이니 도술을 좋아하여 산중에 들어가 신단(神丹)을 만들었다고 한다. 참동계(參同契)는 백양의 저술로서 주역에 비의(比擬)하여 말하고 있으나 실은 연단(煉丹)을 이른 것이다. 이에 대하여 주자가 말한 것이 있다.
211) 진희이(陳希夷). 이름은 단()이니 희이는 사호(賜號)이다. 태극도설은 주렴계의 자작이 라고도 하나 청대 황종염(黃宗炎)의 고증에 의하면 위 백양에서 시작되어 종리(鐘離) 여동빈(呂洞賓)을 거쳐 진단에 전해졌고 다시 충방(<0x76E0>放) 목수백장(穆脩伯長)을 거쳐 염계에 전해졌다고 한다. 하여간 태극도설에 대하여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212) 결정정미라는 말은 주자의 말로서 역설강령(易說綱領)에 보인다. 역은 다른 경전과 같이 실사를 이른 것이 아니고 현공설(縣空說)일 뿐임을 이른 것이다. 그래서 주자는 이말은 불범수(不犯手)라고하였다.
213) 사람은 무지하면 의혹되고 주저한다. 그래서 복서를 하여 길흉이 판단되면 길한 일을 하는데 용기가 날 것이므로 사업을 하게 되고 성공을 가져오게 된다. 물은 인물이요 무는 사무를 이른다고 주자는 어류(語類)에서 일렀다. 《易 繫辭 上》
214) 학덕이 얼마만큼 있나 그에 정비례하여 나타나는 문학적인 광채를 이른다. 건괘 九二효상에 현룡재전·천하문명(見龍在田天下文明)이라 하였고 서경 순전에 준철문명(濬哲文明)이라고 있다. 원시사회에서 문명사회에로라는 문명속에 이 문명도 포함되나 기계문명과 대칠할 때는 의미가 다르다.
215) 정이천의 역전서(易傳序)에 나오는 말이다. 지미(至微)한 이(理)와 지저(至著)한 상(象)의 관계를 말한 것이다. 형이상의 이는 지극히 은미하여 나타나지 않고 형이하의 이는 항시 나타나고 있다.
이로부터 말하면 이의 용은 이의 체속에 이미 갖추어지고 있으니 일원이고 상으로부터 말하면 현저한 속에 은미한 것이 들어 있으니 무관하다.
216) 《詩 大雅 文王》에 보이는 말이다. 중용은 명덕의 극치는 성색을 가하지 않고 자연히 화하여 그 무엇이 그렇게 하는 것인지 모르는 것임을 시의 이말을 인용하여 비유하고 밝힌 것이다. 주자는시의 이 구절을 태극도설의 무극이태극을 해설하는데 인용하였다. 이의 형이상의 의미를 표현한 것이다.
217) 《詩 大雅 旱麓》에 보이는 구절이니 자사는 이를 인용하여 연비 어약 즉 천지상하에 화육이 유행하지 않음이 없는 것을 일러 도의 비(費)함을 밝힌 것이다. 이의 용을 말한 것이니 그래서 율곡은 역의 지현(至顯)자라고 하였다.
218) 계사: 이어 맨 말이라는 뜻이니 역의 괘효의 밑에 단 단상 십익(彖象十翼) 등을 말하는 것이 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상하전의 계사만을 이르는 말로 쓰고 있다.
- 한국고전번역원
[출처] 율곡의 역수책(易數策)|작성자 반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