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저의 시조 휘(諱)를 후손인 제가 “류차달”하는 것은 불효이고 김선궁(金宣弓)도 大丞公이지만 선산김씨들은 諡號인 順忠公이라 하고 있으나 그래도 일부에서는 김선궁을 대승공이라 하기에 대승공 보다는 감히 휘(諱)를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2. “류차달 대승공 탐구 시리즈”는 1/4∼4/4까지 인데 “뿌리깊은버드나무”카페에 초안을 공개하여 댓글을 받고 문헌을 확인하여 수정보완하였으나 1/4의 내용이 2/4에서 증복되는 부분이 있지만 1/4은 문화류씨족보에서 태조를 지원한 내용과 배경을 위주로 했고 2/4는 1/4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이며 3/4은 서남해안 전투에서 군량미를 제공한 내용이며 4/4는 대승공 사우입니다. 3. 제가 발표한 글에서 처음에는 참고문헌이나 그 단어 설명의 각주를 그 페이지 끝이나 논문 끝에 달았는데 제글을 읽는 대부분 종원들꺼서 각주자체를 이해를 못하고 있어(페이지 아래 써놓은 글이 무슨 말이냐 등) 각주를 문장 중간에 넣게 되었으니 양해 바랍니다. 4. 제가 어렸을 때 영암 모산 어른들(그 어른들도 윗대어른들에게서 들었던)로 부터 들은 구전 내용을 관심을 가지고 있다가 1990년대는 이곳 시립이나 대학 도서관과 관련 신간서적을 구입(한줄의 대승공, 흥률사 글 때문에 책을 사기도 했음)하여 관련 자료를 찾아보면서 한자 한 글자를 옥편에서 찾다 못 찾아(한자를 정자가 아닌 약자를 자기필체로 흘려 쓴 한자) 한자를 잘하신 분을 찾아간 경험이 있고 타문족보를 복사해 와서 대조하다가 2010년대는 인터넷으로 모르는 한자도 찾고 조선왕조실록도 볼 수 있어 과거 조선조에 선조들이 고위관리가 아니면 접근하기 어려운 자료를 검색할 수 있어 조사한 자료를 정리 하였습니다. 5. 지금은 다 돌아가신 어르신들의 구전이 대부분 사실이지만 하정공후손과 관련 내용이 많아 이번 대승공 자료에는 하정공 자료는 올리지 않았습니다. 6. 대승공에 관련 자료를 그동안 “뿌리깊은 버드나무”카페에 올리면서 완성된 글이 아니기에 의견을 주고 다음에 완성되면 글을 올리겠다고 했는데 미완성 대승공 관련 글을 퍼 나르기하여 자기 성씨 홍보 자료로 문화류씨에서 이런 글이 있다라고 인용하신 분은 이번 대승공 시리즈를 참고 하십시오. 그러나 전에 올린 대승공 자료는 미흡한 점이 있으나 나름대로 참고할 만한 글인데 이번 씨리즈에는 전에 글에서 많은 부분을 줄였기에 소소한 글에는 전번 대승공 글이 참고 될 것입니다. 7. “류차달 대승공 탐구 시리즈 1/4”은 2019년 문화류씨 유주춘추에 투고한 글이며 2/4 3/4 4/4는 추후 유주춘추에 투고할 예정이지만 유주춘추를 매년 1,500부를 발행하는데 문화류씨가 2008년 무자보 수단에 317,846명이였고 2010년 인구통계에서 문화류씨는 류씨 90,313명+문화유씨 237,314명=문화 柳씨 합계 327,627명으로 대부분 柳씨가 유주춘추를 볼 수 없고 여자분들도 친정에 관심 있으신분은 각종 柳 씨 카페나 밴드에 활동하시기에 이번에 1/4, 2/4, 3/4, 4/4를 “뿌리깊은 버드나무”카페에 올리고 대종회홈페이지에도 올리겠습니다. |
先蹟探究
왕건의 서남해 전투 군량미
하정공파광주종친회장
대승공 33세 류재균
1. 서론
왕건 관련된 부분에서 당시 문화류씨 시조 류차달 대승공(이하 선조 존칭생략함)께서 군량미를 제공한 史蹟을 찾아 가면서 류차달 공적을 확인해 봅니다.
류차달 류천궁이 왕건을 지원한 배경은 족보의 흥률사 중수기와 한국콘텐트진흥원 류천궁 자료를 바탕으로 과거에는 조선대학교 이종범교수(전한국학 호남진흥원 초대원장)님께서 활발한 논문을 발표하였고 현재는 전남대 목포대 교수님들의 논문과 호남 사학계 학자들의 글에 의한 지역신문기사에서 왕건의 서남해전투를 참고하여 호남지방 사학자의 논문과 자료를 근거로 류차달 발자취 퍼즐을 맞추어 가는 과정에서 서남해 전투에서 군량미를 제공한 역사를 알아 봅니다.
영남지방 학자들 학술대회나 지역사학자들 글을 보는 기회가 없지만 전남지방 학술대회에 참여한 영남지역 교수들 발표 내용을 접할 수 있고 현재 빈약한 류차달 자료에서 고창전투나 대야성 조물성 홍성 일리천전투에 류차달이 군량미와 수레를 제공한 큰 전투이지만 모두 고려 건국이후이고 수많은 호족들이 앞다투어 군수물자를 제공 했기에 왕건이 궁예 장수로 있던 서남해안 전투가 류차달의 고려개국 2등공신 추대에 더 영향력이 있는 왕건에 대한 지원이기에 전남지방 학자들 서남해안 전투 논문이 류차달 연구에 비중이 더 있습니다.
2. 문화류씨 무자보
총목112쪽 “태조가 남방을 정벌할 때 公이 수레를 많이 내어 군량을 공급하였다”와 총목123쪽 南秉哲撰 신도비에 “태조가 남쪽으로 신라와 백제를 정벌할 때 수레를 많이 내어”의 문구를 글자 그대로 보면 의문점인 언제 어디서 왜 견훤과 전쟁할 때인가? 신라 어느왕때 신라와 싸웠는가? 를 해결하기 위해 남도지방 사학계 글을 대승공과 관련하여 살펴 보았습니다.
문화류씨 무자보에서 총목 문화현현황(동국여지승람,55쪽) 원파록 삭제변(57쪽) 문화류씨구보 서발(83쪽), 시조대승공차달 사적(112쪽), 흥률사중수상량상소기서(113쪽), 묵방사완복문(115쪽) 대승공묘갈개수문(120쪽) 등은 군량미와 수례에 대하여는 신도비와 같은 내용입니다.
(무자보 총목112쪽 대승공 사적)
(무자보 총목123쪽 대승공신도비)
3. 전라도역사이야기-62. 왕건과 서남해 패권을 다툰 압해도 능창(수달)
남도일보 : 기획특집 전라도 역사이야기, 정유진 기자, 2018.11.04(내용발췌)
① 압해도 인물 능창
먼 옛날 전남 신안 압해도에 능창(能昌)은 수전(水戰)에 능하다 하여 수달(水獺)이라고 불렸습니다. 능창은 한반도 서남해안 일대를 기반으로 해상왕국을 건설했던 장보고 장군이 암살된 후 그 공백기에 세력을 일으켜 세운 서남해 호족이었으나 왕건의 기습작전에 잡혀 궁예가 있는 철원으로 보내져 참수 당합니다. 장보고 이후 서남해안을 장악하고 호령했던 장수치고는 너무나 허망한 최후였습니다.
한반도 서남해안 사람들은 중국과 일본을 다녔고 군사력을 키워 약탈을 일삼는 왜구와 맞서 싸웠는데 지략과 용맹한 바다사나이들의 표상이 신라말기는 서해안 작제건 류천궁 등이며 후삼국초에는 남해안 능창입니다.
서해안 남쪽은 능창이라는 인물이 황해도 지역은 패서 호족들이 동맹을 맺어 해적으로부터 해상세력을 보호하는 활동을 했습니다.
② 남해안 바다사나이 능창
“전라도 1000년, 고려건국 1100년” 기념학술회의와 강봉룡 목포대 도서문화원(島嶼文化硏究院) 원장을 비롯한 한국중세사학회 소속 교수들, 연구소, 박물관, 해군사관학교 교수 등 50여명의 학계 전문가들은 2018년 10월 12일 목포대학교에서 “왕건과 압해도 해상세력 수달 능창”을 비롯 “장보고의 해양유산” 등 주제발표에서 김명진 경북대학교 사학과 교수가 발표했던 “왕건과 압해도 해상세력 수달 능창”에 대한 주제논문을 발표했습니다.
(압해송공산성 수달장군능창 기념비)
(능창의 해양세력권)
왜구들의 침략에 맞서 섬(지금의 신안지역 일대)에 주민들의 목숨과 재산을 지키고 강성했던 왕건 군사에 맞설 정도로 힘을 키웠던 주인공에 대한 신안군민 존경의 표시가 능창기념비이며 김명진교수의 “능창의 해양세력권” 자료입니다.
③ 압해도 및 고이도와 해양사 : 강봉룡교수의 수달장군 능창의 섬 압해도와 고이도 <신안문화 14, 2004 중 발췌>
“완도에 장보고가 있었다면 압해도에는 능창이 있었다.”는 강교수 글은 광주 서남계(西南界) 반남현 포구에 이르러 왕건 첩자가 적의 경계에 살폈고 압해현(壓海縣) 갈초도(葛草島)에서 적수(賊帥)를 생포했다는 “<高麗史> 卷1 太祖世家1 즉위전 기사”는 912년에 능창이 압해도를 근거로 왕건과 대립하다가 결국 왕건에게 생포되어 제거되는 과정을 전하는 내용입니다.
능창은 서남해의 해양패권을 장악했던 장보고가 841년에 암살당한 후 반세기만에 장보고를 대신하여 서남해의 해양패권을 장악하기 위해 왕건 및 견훤 등과 쟁패를 벌인 유력한 독자적 해상세력입니다.
<고려사>에 의거하여 왕건의 서남해지방 패권 장악 과정은 912년에 서남해 원정에 나선 왕건은 서남해지방의 중심 도서 중의 하나인 진도군을 점령하고 이어서 영산강하구의 압해도 인근에 있는 작은 섬인 고이도(皐夷島)를 위복(威服)하여 영산강으로 진입할 수 있는 거점을 확보한 셈이 되었습니다.
※주1 : 현재 영암군 시종면 내동리 만수리는 1895(고종32)년까지 진도군였으니 왕건이 진도를 점령한 것은 후에 덕진포전투와 관련이 있습니다.
견훤은 직접 진두지휘하여 전함을 목포에서 덕진포에 이르는 영산강 하구에 배치함으로써 왕건이 영산강을 거슬러 올라가 나주세력과 연결하는 것을 차단하고자 했습니다.
난관에 봉착한 왕건은 바람을 이용한 화공책을 써서 견훤의 전함을 거의 전소시키고 완승을 거두었습니다. <고려사>에서는 이 해전에 대해 “삼한 땅의 태반을 궁예가 차지하게 되었다”고 평하였습니다.
고려 태조 왕건은 즉위 이전부터 도서지역 공략을 중시하였는데 그 대표적 상대가 압해도와 그 해상세력인 능창(能昌)이었습니다.
서남해에서 고려 통일전쟁 기에 지역 세력이자 해상세력으로 꼽을 수 있는 인물 및 가문은 여수현의 승주 박영규(朴英規) 영암 최지몽(崔知夢)가문 나주(錦城郡) 나총례와 장화왕후 오씨 가문 그리고 압해도 능창과 여러 섬에는 알려지지 않은 해상세력 및 작은 우두머리(소적小賊) 등도 있었습니다.
왕건의 선대 강호경과 강충은 원래 내륙에서 생활하며 어느 정도 부를 갖춘 집안이었다가 강보육(왕건의 증조)의 대에 와서 해상으로 활동 반경을 넓혀갑니다.
강보육의 부인인 진의(辰義)의 자궁에서 부터 용(龍)을 가문에 연결하는 것은 원래 평민 출신 집안이 점차 부를 갖추며 후대로 내려가면서 송악(개성)의 지역 세력이자 해상세력으로 뿌리 내렸던 시작 과정이 설명된 것입니다.
왕건선대가 해상세력으로 자리 잡아가기 시작했던 때는 작제건代부터였고 가문의 제대로 된 용손 논리는 용건(왕륭)代부터 시작되어 왕건대에 완성되었습니다.
왕건이 궁예 휘하에서 장수로 활약하며 류천궁 류차달 오다련 등의 도움을 받아 나주 서남해를 바다 건너 공략한 것은 이러한 가문의 친 해상적인 분위기가 작용되었고 바다에 대한 거부반응이 없었고 그 가치를 잘 알고 있었고 서해안지역은 정주호족들 동맹이 자리 잡고 있었으나 서남해안지역은 능창이 가장 큰 세력 이었다는 것입니다.
영산강 하구에 있는 압해도는 서남해 뱃길과 영산강을 거슬러 올라가 내륙으로도 통하는 교통 요충지이며 군사적 거점 역할을 한 섬입니다. 이 같은 압해도에 능창이 있어 왕건과 능창은 맞부딪칠 수 밖에 없었습니다.
903년에 왕건은 금성(나주)을 공략하여 금성은 궁예의 영역이 되었으며 909년에 왕건은 염해현(전남 영광군 염산면)에서 후백제 견훤이 오월국으로 들여보내는 배를 노획하고 같은 해에 진도(전남 진도)와 고이도(전남 완도군 고금도)를 점령하여 태봉의 영역으로 만들었습니다.
다음해인 910년에 견훤은 금성(나주 금성산성)을 포위 집중 공격을 가하였으나 실패하고 911년에 태봉 궁예는 왕건을 금성으로 보내어 다시 주변 일부 군현들을 되찾은 후에 금성을 나주라 하고 912년에 덕진포전투(전남 영암)가 벌어졌습니다.
912년에 능창은 갈초도(葛草島, 葛草渡, 전남 영광군 군남면 육창마을)에 있는 소적(小賊)과도 서로 연결하며 왕건을 해치려는 것을 왕건의 첩보망인 종첩(縱諜)에 능창의 이동로를 들키어 잡혔습니다.(도움말/김정호, 강봉룡, 박선홍, 노성태, 조광철)
※주2 : ○ 김정호(향토문화진흥원 이사장, 전무등일보편집국장)
○ 박선홍(무등산공유화재단 이사장, 전조대이사장)
○ 노성태(국제고 교사, 남도문화트래킹강사)
○ 조광철(광주시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사)
○ 백창석(무안문화원장)
4. 전라도역사이야기-93. 나주읍성과 나주의 전통
남도일보 2019년 6월 30일 전라도역사이야기-93.나주읍성과 나주의 전통,최혁(내용 발췌)
후삼국 시대 나주 일대 백성들은 진훤을 지지했습니다. 왕건과 견훤이 영산강 유역의 패권을 놓고 다툴 때 나주의 토호 오다련이 왕건의 편에 섰지만 영산강 유역 세력 대부분은 견훤을 지지하는 입장이었습니다.
910년 오다련의 딸은 왕건 부인(장화왕후)이 됩니다. 장화왕후는 2년 뒤인 912년 봄 아들을 낳아 이름을 ‘무’라 했는데 무는 고려 2대 왕인 혜종이 됩니다.
고려 제8대 임금 현종은 요나라를 세운 거란족의 제2차 침입(1010년)으로 개경이 함락되자 공주를 거쳐 나주까지 피신해왔습니다. 현종이 나주를 최종 피신처로 삼은 것은 나주가 고려왕실의 보루였기 때문입니다. 나주시 대호동 금성산에 있는 심향사(尋香寺)는 현종이 나주에 머물 때 나라의 평안을 빌었던 곳으로 알려져 있습니다.(도움말/김정호, 강봉룡, 박선홍, 노성태, 조광철)
5. 서남해방수군(西南海防戍軍) 세력
견훤은 서남해방수군 비장에 지위에서 독립하여 후백제를 건국하게 되었는데 이때에 형성된 것이 서남해방수군세력입니다.
견훤이 신라로부터 독립하여 한달만에 5000명의 세력을 모은 것에 비해 궁예는 600명으로 시작하여 강릉을 점령한 후에야 그세력이 3500명으로 늘어납니다. 이러한 점에서 견훤세력은 다른세력과는 다른 전문적인 군사세력이 군사적인 성향을 띄게 된데에는 서남해방수군의 영향이 크게 작용했습니다.
서남해방수군세력 출신은 순천 김총(金摠)과 호족 박영규(朴英規)이며 능창(能昌)입니다. 능창은 삼국유사 거타지설화에서 후백제 해적 능창이 진도를 막고있다고 하여 후백제 해군이 해적활동을 하는 세력으로 봅니다.
이러한 사실을 볼때 능창과 그의 해적세력은 후백제정권과 오래동안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였고 왕건은 나주정벌과정에서 나주에 완전정벌을 위해 후백제정권과 관련있는 능창세력을 토벌한 것입니다.
무진주(武珍州)는 후백제 첫 번째수도로 892년에서 900년까지 8년간 후백제의 중심지로 있었던 곳으로 무진주를 기반으로 하는 무진주세력은 초기 후백제정권에 강한 영향력을 미쳤던 세력이었으나 903년 왕건이 이끄는 태봉군이 나주 군현을 공략하고 909년에 이르러 태봉이 나주를 완전히 점령함으로 태봉과 접경지역으로 그 중요성이 커지게 됩니다.
910년에 왕건의 태봉군이 무진주를 공격했을 때 견훤의 사위인 지훤이 이를 격퇴함으로 무진주세력이 회복하게 됩니다.
견훤은 900년 완산주로 천도하고 903년 나주에 지배권을 상실합니다.
901년 견훤이 대야성 공격 후 회군하면서 나주남쪽부락을 공략한 것은 완산주 천도에 불만을 품은 나주세력을 벌하기 위한 공격입니다.
완산주는 후백제의 수도로써 후백제가 멸망할 때 까지 공격을 받지 않은 지역으로 이곳은 고려와는 인연이 없는 지역이었습니다.
완산주세력은 류법반으로<류방헌 묘지>에 전주승화현출신으로 벼슬이 우장군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법반이외에 신검세력과 적대적인 금강세력은 완산주출신입니다.
전주 류법반 외조부 겸악은 신검정변이 발생하자 은거해버렸다는데 그 영향력은 금강을 왕위계승자로 만들 정도로 컸습니다.
(출처 : 역사길라잡이카페/역사고급강의후백제정치세력연구, 최승우)
6. 전라도역사이야기-56. 무안 몽탄강(夢灘江)과 왕건(王建)
최혁 주필의 전라도역사이야기, 남도일보 2018.09.02
① 몽탄에서 겨우 목숨을 건진 왕건
910년 견훤은 왕건이 지키고 있는 나주 성을 되찾기 위해 기병 3천명을 이끌고 나주를 쳐들어왔습니다.
왕건은 나주 동강의 몽송까지 밀려와 결국은 견훤 군사들에게 포위당했는데 앞에는 깊은 강물이었고 사방은 견훤 군사들이었습니다.
이때 왕건이 밤중에 깜빡 잠이 들었는데 꿈속에 백발노인이 말한 대로 넘실대던 영산강의 물이 줄어있었기에 급히 군사들을 강을 건너 무안 청용리 두대산을 향해 철수했습니다.
날이 밝자 왕건은 밀가루를 영산강으로 흘러가는 천(川)에 풀어 군사가 밥을 해먹기 위해 씻은 쌀 뜨물이 흘러간 것처럼 보이기 위해서였습니다.
한편 견훤은 날이 밝자 왕건을 공격할 생각으로 왕건의 진영을 살펴보니 아무도 없었습니다.
견훤은 급히 군사를 이끌고 왕건의 뒤를 쫓았는데 영산강 상류 쪽에서 쌀뜨물 같은 것이 흘러오는 것을 보고 왕건의 군사들이 많을거라 견훤 군사들이 겁을 먹은 그때 두대산 양쪽에 숨어있던 왕건의 군사들이 기습공격을 가해와 왕건의 매복에 걸리고 만 것입니다.
이 전투에서 견훤은 참패당하고 왕건은 꿈속에 나타난 도인 덕분에 목숨을 건지고 전투에서 승리해서 그 이후로 현재의 몽탄교가 있는 영산강 유역을 꿈 夢 여울 灘을 써서 몽탄강(夢灘江)이라 했습니다.(도움말/김정호, 강봉룡, 박선홍, 노성태, 조광철)
※주3 : 류차달이 왕건에게 군량미를 점령지에서 조달하면 천심을 얻지 못한다면서 패서호족들이 군량미를 지원했는데 몽탄진 전투에서 점령지 백성들에게 밀가루를 징발합니다. 밀가루 외 군수품은 류차달의 지원입니다.
② 광주에서 벌어진 왕건과 견훤의 전투
나주공략에 성공한 왕건은 차츰차츰 군사를 내륙으로 진격시켜서 영산강과 서창들녁 광주천 하류의 너른 들에서는 왕건과 견훤 군사들이 수많은 전투를 치렀습니다.
왕건은 지금의 서창 들녘 쪽 산(사월산 혹은 백마산)에 진을 치고 견훤은 운암동 일대 산(대마산)에 군사를 배치했는데 왕건이 진을 친 곳을 왕조대(王祖臺,王建臺), 견훤의 군사들이 진을 쳤던 곳을 견훤대(甄萱臺)라 부릅니다.
광주전투는 사월산(獅月山)과 대마산의 중간 지점인 지금의 치평동(상무대)일대에서 벌어집니다.
◎ 출처 : 한국역사연구회(남도사람들) : 서남해지역에서 벌인 왕건과 견훤의 쟁패
7. 덕진포 해전(德津浦 海戰)
덕진포 해전(德津浦 海戰)영암의 숨결을 찾아(2)<영암문화원 제공>
영암신문 2017.06.25(내용발췌)
① 황포돛대가 넘쳐났던 덕진포
1930년대 덕진포에는 황포돛대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드나들었습니다.
바람을 이용하여 앞으로 나아갔고 바람이 없을 때는 노를 저어갔습니다.
황포돛대가 닿은 곳은 덕진포 외에도 후삼국시대 국제항 상대포(군서면), 매월리 석포(학산면), 성재포구(서호면), 해창포구(도포면), 영암 배날리 포구(영암읍) 등이 있었습니다.
② 천혜 요새 덕진포를 장악
바다와 이어지는 이곳은 소금이 나오고 연안에 가득 널려있는 갯벌에서는 각종 수산물이 풍부했으며 평야에서는 질 좋은 미곡이 생산되었습니다.
이러한 풍요로운 자연조건을 바탕으로 철기시대 마한 세력은 이곳에서 수백년 동안 번영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이곳 사람들은 뱃사람 못지않게 배를 능숙하게 다루면서 바다 건너 먼 곳까지 진출했습니다.
장보고의 오른팔 장수 정년 장군이 덕진포 선암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래서 선암마을은 무장골이라고도 합니다.
※주4 : 영암 덕진면 운암리 선암(船岩)마을에 장보고 출생 설화가 전승되고 있으며 선암마을은 지금은 내륙이지만 조선시대까지 마을 앞 바위에 배를 매었다는 선암이 있는 포구입니다. 완도 장좌리 장도의 당제(堂祭)를 모시는 당집의 주신은 송징 장군, 우측은 정년 장군, 좌측은 혜일대사가 배향되어 있습니다. 장보고는 1982년에 이르러서야 배향의 대상으로 추가되었습니다.
846년 장보고가 사망하고 그를 추종하던 장수들이 대부분 송악(개성) 인근 정주해안으로 옮겨 활동하게 됩니다.
③ 왕건은 903년 수군을 이끌고 서남해안으로 진출.
송악출신 왕건은 청해진에서 활동했던 장수의 후손들 중에 정주로 옮겨운 세력과 친분을 쌓아 영암 해상세력과 연줄을 잡았습니다.
왕건은 집안에 내려온 도선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 영암 상대포에 대한 호기심도 있었으나 후백제의 견훤은 이지역을 명목상 지배하고 있었으나 토착 성주를 확실하게 포용하지 못했고 강력한 연대의식을 가진 해상인의 능력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왕건은 서남해 해상인의 지원에 힘입어 이 지역 10개 군현과 금성을 점령하여 병력을 상주시키고 지명을 나주로 개칭하고 909년 2차 출병하여 무안군 해제면에서 견훤의 배를 빼앗고 신안군과 진도군을 차지합니다.
④ 서남해 섬지역을 차지한 왕건은 내륙으로 눈을 돌리다.
왕건은 3천여 수군병력을 동원하여 견훤이 막고 있던 군사적 요충지 덕진포로 향합니다. 하지만 견훤이 목포에서 덕진포에 이르는 수로 곳곳에 중요한 길목마다 군사를 숨겨놓고 수륙 협공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⑤ 왕건 덕진포 해전 승리
912년 여름 밀물이 들기 시작하고 바람 방향이 바다에서 육지로 부는 된 갯바람을 타고 왕건의 수군은 덕진포를 향해 출발합니다.
덕진포구를 향해 은밀히 항해하던 왕건의 수군은 영암천에 이르러 진을 짜고 기다리던 견훤의 공격을 받습니다.
왕건은 공포에 질린 부하들을 독려하며 뒤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이용하여 불화살을 날리니 견훤의 군대는 불길에 싸여 혼비백산합니다.
덕진포 해전의 승리로 왕건은 과거 장보고가 차지했던 서남해 연안의 제해권을 확실하게 장악하게 되었습니다.
⑥ 신북 마산과 월평리 여석산
왕건은 해전 승리의 기세를 몰아 병선을 덕진에서 서호 목포 몽탄에 이르는 요충지에 배치하고 자신은 신북면 마산에 진지를 구축합니다.
마산은 덕진포에서 8km 거리이며 견훤이 흩어진 병사를 모아 은거하고 있던 반남현 자미산성으로부터 또한 8km 거리에 있다.
왕건과 견훤 군사는 마산과 자미산성 사이에 치열한 전투를 벌입니다.
덕진포에서 신북으로 향하다 보면 우측으로 마산이 보이고 그 아래 작은 방죽이 나옵니다. 방죽은 군사들이 말에게 물을 먹이는 곳으로 말물통이며 마산 아래 박굴은 옛날 군사들이 훈련했던 곳입니다.
※주5 : 왕건 주둔지 마산(왕건의 馬이 있었던 곳)은 모산앞 이목동에 있는 해발 150m산이며 말물통은 이목동저수지(냉천지 만들기 전에 저수지 가운데 물통이 있었음)자리이고 박골은 이목동저수지위 떨국재와 마산아래 떡고개 부근이며 명동리 행군봉(왕건 군대가 행군했던 산)을 지나서 신북면 이천리4구 부선장터(영암석재부근)에서 반남 자미산성에서 온 견훤과 전투를 하였고 왕건군대 군수품은 칼과 창을 갈았던 숫돌은 여석산에서 공급했습니다. 덕진포 전투가 912년 이므로 후삼국 통일한 936년까지 24년 시간차가 있기에 마산에 20년 이상 왕건 군대가 주둔했습니다.
왕건이 주둔했던 마산으로부터 북쪽으로 1㎞ 정도 가다보면 신북면 소재지가 나오고 소재지 약간 지나 좌측에 나지막한 산이 있는데 숫돌이 나온다하여 숫돌뫼 또는 여석산(礪石山)이라 부릅니다.
※ 몽탄진에 전승지 파천군 진지(나주시
동강면 옥정리 하몽탄) 가 있음
※호산아래 북일면(신북면 월평리)
북이면(세지면 탑동)이 보임
왕건의 군대가 이곳에서 생산된 숫돌로 칼을 갈아 견훤과의 전투에서 승리했다는 전설로 인해 이곳의 숫돌은 유명세를 탔고 어찌나 많은 숫돌을 파냈던지 커다란 웅덩이가 생겼고 그 깊이가 명주실 한 소쿠리가 다 들어갈 정도로 깊었다고 합니다.
여석산 중심으로 왕건과 견훤은 밀고 당기는 싸움을 10년간 계속했으며 여석산 쌍패놀이는 당시 치열한 전투의 모습을 농악으로 재현한 것입니다.
여석산 쌍패놀이는 탐색 진군 접전 화해로 통하는 구성을 통해 전쟁의 긴장감을 불어넣는 군사적 전술을 농악에 이용한 호남 우도농악입니다.
여석산 쌍패 농악은 고려와 후백제의 전투에서 왕건이 군사들을 위한 위령제를 올린 역사적 정황을 바탕으로 당시 전투 모습을 농악으로 승화시켜 놀이로 전승된 쌍패 농악은 1996년 고향을 생각하는 주부들 모임 회원들이 신북농협 창고에서 농악을 배우고 익히면서 시작되었습다.
8. 결론
① 장보고가 841년 피살된후 반세기(910년) 동안 장보고를 대신한 서남해안 세력은 서해안은 패서호족 동맹세력이고 남해안은 능창입니다.
841년부터 910년까지 패서호족들이 4해황제동맹을 결성하고 서해안호족을 포섭해 나가서 능창 세력권과 4해황제 세력이 충돌하게 됩니다.
작제건의 친해안적인 분위기가 작용(4해형제동맹)하여 서해안 호족들이 견훤에 우호적이지 않아 견훤이 900년 수도를 완산주로 옮긴후 901년 대야성(합천)을 공격하고 회군하면서 나주남쪽을 공략합니다.
909년 염해현(영광 염산면)에 견훤의 배가 오월국으로 간다고 항로를 알려준 세력과 912년 영광 군남면 육창마을 해적과 연락하여 왕건을 처치하려는 능창 이동 경로를 왕건에게 알려준 남해안 해상호족 세력은 작제건에 우호적인 4해황제동맹 호족 일부입니다.
② 왕건이 서남해상세력호족과 소적(小賊) 견훤 능창 등과 나주전투 염해현에서 견훤의 배를 노획하고 진도 완도를 점령, 덕진포전투 등에서 왕건 장수를 적극지원한 세력은 류차달家와 작제건이 해상무역을 하면서 맺어진 해안호족인연입니다.
③ 족보 大丞公車達事蹟에서 “고려 태조가 남방을 정벌할 때 공이 수레를 많이 내어 군량을 공급하였다”는 내용에 대한 의문점을 확인하기 위해 모산어른신들의 구전을 문헌에서 찾아보고 왕건 주변 인물의 종중 비문과 사학자들 학술대회 자료를 정리한 결과 류차달이 왕건에게 군량미를 제공한 시기와 대승공이 태조에게 군량미를 제공한 시기로 나누어 집니다.
④ 896년 왕건 가문이 궁예에게 귀부하였고 901년에 궁예가 후고구려를 건국하며 903년 왕건의 나주 공략부터 916년 대야성 전투까지 궁예 휘하에서 수많은 전투에 1등공신 5명이 왕건과 함께 참여하고 2등공신중에 류차달만 군량미(양천허씨 시조 허선문도 군량미를 제공함)를 지원했지만 류차달과 작제건의 동맹으로 연결된 금성태수 나종례 영광호족 전종회와 서남해안 해상무역상들의 왕건 지원이 개국공신에 영향을 주었고 왕건 장인 인 류천궁 오다련 등이 가병을 지원 했지만 나머지 2등 공신들은 918년 고려 건국후 전투에 참여하기 시작합니다.
첫댓글 ※주5에 영암군 신북면 왕건 군대 주둔지 내용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