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 게토화를 극복하라. 강영안교수 (* 청년사역자에게 필독을 권합니다.)
교수님이 기독교인으로서, 또 기독교 철학자로서 일반 대학에서 가르치면서 믿지 않는 학생들에게 하나님께서 존재하시고 또 하나님께서 세상을 만드셔서 우리에게 이 세상을 관리하도록 하신 것이 세상을 보는 가장 합리적이고 현실 부합성이 있다고 가르치신 적이 있는지요? 아니면, 불신자 대상의 일반 강연에서 청중들이 진지하게 고민을 하게 되는 일들이 있었는지요?
강: 수업 시간에 직접 전도를 하거나 하지는 않지요. 처음부터 저는 그리스도인 학자로 가르치려고 애써 왔으나 좀 더 의식적으로 기독교적인 관점으로 가르치고 과목 개설을 그런 방향으로 시도했던 것은 아마 2000년대 들어서가 아닐까 해요. 좀 더 구체적으로 얘기하면 2003년에 미국 칼빈 칼리지 철학과에서 가르치고 돌아온 뒤니까, 15년 전부터라고 하는 것이 좋겠네요. 칼빈 칼리지에서 철학을 가르칠 때 처음부터 기독교 관점을 드러내 놓고 가르쳤습니다. 이것이 학교의 기대이기도 했구요. 그 이전에는 예를 들어 데카르트를 가르치든지, 칸트를 가르치든지, 하이데거를 가르치든지 서양 철학의 틀 속에서 가르쳤죠. 서강대학교가 가톨릭 대학이지만 철학 훈련 방식은 세속 대학이나 크게 차이 없이 공부해야 할 내용을 가지고 익혀나가는 것이었지요.
기독교적인 관점을 좀 더 분명하게 드러내 놓기 시작한 것은 칼빈 칼리지에서 돌아온 뒤부터가 아니었던가 생각해요. 철학 전공은 상황이 조금 다르지만, 교양과목의 경우 제 과목을 듣던 학생들 가운데 절반이 기독교인들이고 나머지 절반이 비기독교인들이었죠. 교양과목으로 서강대에서 오래 가르친 과목이 ‘동서고전세미나’와 ‘철학과 현실’이라는 과목이 있었어요. ‘철학과 현실’은 우리의 삶의 문제들, 예를 들어서 밥 먹는 것, 잠자는 것, 일하는 것 등을 다루었어요. 마지막에는 삶의 가치라든지, 고통의 문제 등을 다루었지요. 다른 과목보다 아마 이 과목에 제 신앙이나 세계관이 좀 강하게 깔려 있지 않았나 생각해요.
수강생 중에 선교단체 대표가 있었어요. 그 학생이 마지막 페이퍼를 내면서 편지를 하나 썼어요. 그중에 이런 구절이 있었어요. “제가 교회에서 이런 문제들을 다룰 때 성경책을 펴놓고 자신 있게 이야기를 할 수 있었는데 철학 수업 시간에는 성경을 펴놓고 할 수 없다 보니 제 어휘의 부족을 절실하게 깨달았습니다.” ‘어휘의 부족’이라는 말이 중요하죠. 고통의 문제든 죽음의 문제든 비기독교인들과 토론하려고 하니까 어려운 거죠. 제 수업의 첫 주, 둘째 주, 셋째 주를 지나가면 전선이 형성되어요. 기독교 신앙이 있는 학생들과 신앙이 없는 학생들, 다른 신앙을 가진 학생들 사이에 세계관의 충돌이 일어나지요. 저는 충돌을 조장하죠. 계속 싸우게 만들죠. 어떤 게 정말 논리적으로 일관성 있고, 현실에 부합하고, 우리에게 삶의 희망을 주고, 미래를 보여주는가를 토론하게 만들죠. 신앙의 관점에서 이야기하더라도 그 관점은 뒤에 깔려 있지 드러내놓고 해서는 안 돼요. 철학 언어로 이야기를 해야 하죠. 보편 언어로 이야기하게 만듭니다. 세상 공통의 언어로 말하는 것이죠. 교회 언어나 신학 언어가 아닌 세상 사람들이 하는 말로 토론을 진행하지요. 앞에서 말한 학생은 신앙의 언어를 철학 용어로 번역해서 사용해야 하는데, 어휘가 부족하다고 느낀 것이지요.
저는 그 경험을 하고 나서 “아, 우리 기독교인 학생들이 이중 언어를 쓸 수 있도록 가르쳐야 되겠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성경을 덮어 두더라도 얼마든지 이 세상의 언어로, 곧 학문의 언어로 또는 철학의 언어로 자기의 믿음, 신념, 세계관을 남들에게 충분히 이야기하고, 설명하고, 토론할 수 있는 이중 언어가 필요한 것이죠. 사실, 이것은 신학교에서는 훈련 받기 힘든 부분이거든요. 교회에서도 훈련 받기 힘들지요. 왜냐하면 교회 언어와 성경 언어는 기독교인들에게는 워낙 익숙한 방식이지만 그 언어로 세상 사람들한테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신 의미,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었다는 것, 그리고 죄의 의미와 삶의 희망과 절망에 관한 것들을 설명하면 못 알아듣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그런 노력들을 계속했죠.
지금은 다시 미국 칼빈 세미너리에서 가르치게 되니까 오히려 성경과 신학 언어를 더 많이 쓰게 되었지요. 성경 책 펼쳐놓고 철학 강의하고 철학 토론하는 재미는 경험해 본 사람만이 알아요. 그렇지만 세상의 공통언어로 신앙을 이야기하려는 노력을 우리 그리스도인이 끊임없이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제가 서강대에서 마지막 한 강의 가운데 하나가 학생들 175명을 앉혀두고 한 학기 동안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론> 전체를 다루는 강의였어요. 이 책은 물론 처음부터 기도에서 시작하여 기도로 진행되고 기도로 끝나는 책이에요. 그러나 읽는 이의 심금을 울리잖아요. 비록 성경을 인용하더라도 우리 인생의 보편 경험을 말씀으로 풀어내고 있어요. 이 책을 읽고 책에 관한 강의를 듣고 토론에 참여한 학생들 가운데는 신앙에 다시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는 학생들이 있었어요.
안: 교수님의 접근이 목사에게도 필요하다고 생각되거든요. 교인들이 성경을 잘 모르기 때문에 일반 언어로 설명해야 하는 측면도 있고요. 요즘에는 믿지 않는 사람들도 다 듣고 보고 하는 상황이기 때문에 방송 설교를 듣게 되면 참 민망할 때가 많거든요. 전혀 엉뚱한 세계에서 사는 것 같고, 도무지 이해하지 못할 말들을 하니까요. 그런 의미에서 설교자의 언어도 세상의 언어로, 공통의 언어로 많이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요.
강: 공감해요. 사실 CTS나 CBS TV를 볼 틈이 별로 없어요. 언제 좀 봤냐 하면요, 2007년, 2008년에 건강을 회복하느라 주말마다 시골에 내려가 머물 때였어요. 설교를 들으면 정말 민망할 때가 많아요. ‘믿지 않는 사람들이 보면 교회를 뭐라고 볼까?’ 생각하면 얼굴이 화끈거리지요. 거기서 하는 말, 사용하는 단어, 사고방식, 이런 것들이 설득력이 없는 경우가 너무 많아요. 최근 금요 기도회 장면을 어느 TV를 통해 본 적이 있어요. 꽤 알려진 목사인데, 저는 설교를 들으면서 그 목사님 얼굴에 여러 얼굴이 겹쳐 지나가는 것을 보았어요. 무당의 모습이 보이는가 하면 일종의 조폭의 모습도 드러나고, 연예인의 모습이 스쳐 지나가기도 해요. 더 놀라운 것은 교인들의 얼굴을 보니까 굉장히 행복해 보이더라고요. 몰입해 있고요. 그러면서 이렇게 생각했어요. “아, 70년대, 80년대 초의 저런 설교가 아직도 통하는구나.” 그러나 지금은 문화와 사고가 엄청나게 바뀌고 있어요. 이 변화 속에서 말씀을 들고 제대로 가르치고 제대로 살아보려는 목회자와 성도들이 있는 것이 감사하지요.
제가 이번에 잠시 귀국해서 지인들과 이야기하면서 자주 언급한 문제는 한국교회의 게토화예요. 교회가 자기만의 언어를 사용하고 자기만의 삶을 추구하면서 주위의 문화와 사회로부터 격리되는 현상이지요. 보편언어나 공통언어에 대해서 너무나 무지해요. 교회 안에 갇히게 된 것이죠.
저는 두 가지 면이 여기에 하나로 겹쳐있다고 봐요. 하나는, 교회가 세상보다 훨씬 더 세상 가치를 추구하는 면이 있어요. 물질이라든지, 건강이라든지, 자녀들의 잘됨이라든지 등등 말이에요. 그것이 어디서 분명하게 드러나느냐 하면 기도 제목이에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하나님의 왕권이 회복되기를 위해서 기도하자는 제안은 거의 없어요. 자녀 문제, 가정 문제, 아이들의 입시, 회사 승진이 대부분이죠. 가정과 직장과 이 세상에서 더 나은 삶을 사는 것, 남과의 경쟁에서 지지 않고 이기는 삶을 살기를 원하는 기도 제목들이 대부분이거든요. 그게 세상보다 더 세상이 되었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거라 생각해요. 권력과 부, 쾌락, 이런 것들을 물론 말하지는 않지요. 말로 내세우지는 않지만, 은연중에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가치를 추구하죠.
그런데 다른 하나는 세상의 가치를 추구하면서도 교회 안에서는 그와 관련해서 ‘축복’이니 ‘은혜’니 하는 방식으로 ‘거룩한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거룩한 언어를 사용하기 때문에 사실은 교회 안에서 보면 모두 안정되어 있고 아무 문제가 없는 듯해요. 그러면서 문화와 사회의 변화에 대해서는 둔감하지요. 오히려 변화의 요구에 반항하지요. 교회 지도자들은 대체로 보수적이었지만 지금은 더욱더 보수화되어가는 듯해요.
이 시대 변화에 대해서 교회가 뭘 해야 하고,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살아야 할지 생각하는 분들이 많이 계신다고 믿어요. 그런데도 고신 안에서도 촛불시위에 나간 학생들을 징계해야 한다고 이야기하는 교수들이 있었다는 말을 들어요. 이번 선거를 통해서 변화에 대한 열망이 드러났잖아요. 사실, 그것은 세월호 사건 이후부터거든요. 세월호 사건이 한국 사회의 전과 그 이후를 가르는 상당히 중요한 분기점이 되는 듯해요. ‘타인의 고통에 대해서 공감할 수 있는 능력이 교회에 있느냐 없느냐’라는 것이 지금 큰 숙제이고, 도전이죠. 세월호 사건을 교통사고라고 설교하는 교회도 있고, 태극기 집회에 열렬히 참여하고, 가짜뉴스 카톡 문자를 전파하는 매개체 역할을 하는 기독교인들이 많이 있지요.
안: 교회가 세상의 변화를 선도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강: 달라야 하지요. 달라야 합니다. 교회가 세상과 다르지 않으면 아무런 힘이 없어요. 우리가 추구하는 삶은 하나님 나라의 삶, 하나님 백성의 삶인데 이런 삶이 드러나지 않으면 세상을 선도할 수가 없습니다. 세상에서 게토화 되지 않는 방식은 무엇보다도 세상과 다른 삶의 방식을 가져야 하죠.
두 번째는 세상 속으로 뛰어 들어가야 합니다. 세상은 하나님이 지은 세상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대적하는 삶의 방식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이 세상에 하나님 백성들은 뛰어들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세상도 결국은 하나님 것이니까요. 제가 늘 말하지만, 성도들의 삶의 자리는 교회가 아니라 세상이에요. 교회는, 그럼 뭔가요? 세상에 사는 성도들이 교회에 모여 예배를 통하여 함께 주님의 이름을 고백하고, 주님을 알아가고, 그러면서 주님의 사랑으로 치유 받고, 교육받고, 양육 받고, 훈련받는 곳이죠. 그런데 교회가 이런 기능을 제대로 못 하니 세상에 나가서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제대로 살지 못하거든요. 판판히 쓰러지잖아요. 교회에서는 장로가 되고, 권사가 되고 신앙이 있는 것 같지만 세상에 나가면 불신자와 차이가 없잖아요. 군대용어로 말하면 교회에서는 모두 장군들 같지만, 세상에 나가면 거저 세상 명령 따라 사는 졸병 같아요. 그러면서 세상에서도 마치 장군인 것처럼 착각하거든요.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세상에서 살려고 할 때 쓰려지고 다치고 상처 날 수밖에 없어요. 세상에서 쓰러지지만 그럼에도 다시 교회로 와서 상처를 싸맴 받고 치유 받고 세상에 다시 나가 성도로,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당당하게 살 수 있어야지요. 저는 목회자와 교회 장로와 지도자의 역할이 여기 있다고 봐요.
안: 목회의 성공을 보는 잣대도 너무나 세속화되었는데요.
강: 목회의 성공은 교인들이 얼마나 모이느냐, 헌금이 얼마나 들어오느냐, 교회 건물이 몇 평이냐 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지요. 세상에서 참 성도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 수가 얼마나 되는가가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 교회에 모이는 교인들이 세상에서 자기의 일을 통해 성도라는 것을,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제대로 드러내며 사는가가 중요해요. 세상에서 정말 정직하고 공의로우며 진실하고 인애로운 마음으로 살아가는 성도,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삶을 사는 성도를 키워내는가, 키워내지 못하는가가 목회 성공의 잣대라고 봐요. 저는 이런 목회가 게토화된 교회, 게토화된 신앙을 극복하는 길이라고 봐요.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과는 다른 가치, 다른 삶을 실천하지 않고서는 안돼요. 신자가 다르게 살면, 기독교인답게 살면 세상은 놀랄 수밖에 없어요.
아리스티데스라는 고대 철학자가 있어요. 짐 월리스가 쓴 <회심>이라는 책에 나오지요. 오바마 대통령의 조언자 역할을 한 월리스가 아리스티데스라는 철학자를 언급해요. 아리스티데스가 하드리아누스 황제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이렇게 말해요. “그들은 서로 사랑합니다. 과부들을 반드시 돕습니다. 고아들을 해치려는 사람들로부터 건져냅니다. 가진 것이 뭐라도 있으면 없는 사람들에게 거저 나누어줍니다. 외국인을 보면 집으로 데려갑니다. 마치 친형제처럼 행복해합니다. 그들은 통상적인 형제자매가 아니라 성령을 통하여 하나님 안에서 형제자매가 된 사람들로 생각합니다.” 이방 사람들에게 이런 방식으로는 사는 삶이 너무나 이상했어요. 나그네를 돌보고 임자 없는 시체를 대신 장사지내주는 일을 예수 믿는 사람들이 했어요. 마태복음 25장에서 양과 염소의 비유를 통해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기도 하죠. “내가 헐벗을 때, 목마를 때, 옥에 갇혔을 때 네가 돌아보았다”고 하는 말씀을 기독교인들이 문자 그대로 실천했거든요. 말로 복음을 전했지만, 그 당시에 이방인들의 눈에 보인 것은 자신들과는 전혀 다르게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삶이었거든요. 그게 복음이 확산되는 터전과 통로 역할을 하는 것이거든요.
우리는 지금 시끄럽게 떠드는데 세상에서 드러나는 실제 삶은 없고 세상 기준과 상식으로 보아도 도무지 말도 되지 않는 일들을 교회 지도자란 사람들이 옹호하는 것 때문에 불신의 대상이 되었지요. 불신에 그치지 않아요. 이제는 멸시당하고 조롱당하는 상황에 와 있어요. 선을 행하다가 멸시당하면 얼마나 좋겠어요. 저는 복음의 진리를 살아내는 삶의 회복이 절실하다고 봐요. 다른 방법이 없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