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4월 11일부터 4월 23일까지 중국의 청도, 개봉, 정주, 태행산, 낙양, 화산, 서안을 배낭여행하였다. 일행은 윤 선생(75), 박 선생과 필자(73), 임 선생과 김 선생(72), 이 선생(71), 윤 여사(70), 정 여사(69) 등 여덟인데 박 선생과 윤 여사, 임 선생과 정 여사는 내외지간이다. 다 같이 30대에 같은 직장을 다닌 인연으로 여태까지 한 달에 한 번씩 오찬회동을 갖는 40년 지기들이다. 처음에는 지원자가 20여명에 달했으나 배낭여행의 고단함을 뒤늦게 깨달은 탓인지 10명으로 팍 줄었다. 그나마 단체비자가 발급되고, 항공편과 철도편 예약이 끝난 뒤, 두 사람이 또 포기하는 바람에 여행 자체가 무산될 뻔하였다. 다행히 ‘투어 인 케이 씨’김광철 대표의 호의로 비행기를 타게 되었고, 김 대표가 직접 안내도 맡아주었다.
첫날
4월 11일 토요일, 낮 12시 쯤 인천을 떠난 비행기는 기내식을 마치자마자 청도(靑島 칭따오)에 내렸다. 불과 한 시간 남짓이었다. 김 대표는 우리를 세 팀으로 나누더니 “택시를 타고 청도 기차역 앞으로 집결하라”고 명령(?)하였다. 나는 임 선생 내외분과 한 팀이 되었다. 우리들의 중국어 실력은 겨우 “니 하오?”정도의 수준이었으므로 불안하였다. “택시 요금이 얼마나 되느냐?”고 김 대표에 물었다. “90위엔 정도인데 대중이 없다”는 대답이었다. 김 대표는 그 말을 남기고 매정하게 먼저 떠났다. 나는 갑자기 낯설고 혼잡한 시장 한 복판에서 어머니의 손을 놓친 어린 아이 꼴이 되었다. 그제야 이번 여행이 녹녹치 않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아마 깃발관광이었다면 현지안내원이 입국장에서부터 우리일행을 기다리다 리무진 버스에 태웠을 것이었지만.
청도역은 해안가에 있었다. 택시기사가 미터기의 요금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75위엔이 표시되었다. 100위엔을 낸 팀도 있었다. 일부러 바가지를 씌운 것이 아니라 길을 잘못 선택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일행이 모두 무사히 도착하자 배낭을 식당에 맡기고 바닷가를 둘러보았다. 주말이라서인지 사람들이 바글바글하였다. 차림은 청회색 일색으로 개성이 없었으나 표정은 밝고 당당하였다. 빌딩 숲 사이로 간신히 보이는 유럽풍 성당이 이곳이 옛날 독일의 조차지였다는 것을 떠 올리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들이 남기고 간 맥주 맛은 일품이었다. 시원하고 깨끗했다. 잡맛이 없었다.
저녁밥은 더 훌륭하였다. 뒷골목의 조촐한 식당이었지만 나오는 음식은 하나 같이 맛있었다. 음식을 고른 김 대표의 안목도 밝았겠지만 조리 솜씨도 뛰어났다. 목이버섯과 두부, 돼지고기, 만두 등 예닐곱까지 접시가 잇따라 나왔는데 모두 싹싹 비웠다. 칭따오 맥주도 식욕을 돋웠다.
오후 5시 반 개봉(開封 카이펑)행 열차가 역 구내로 서서히 접근했다. 객차 옆구리에 장춘(長春 창춘)에서 서안(西安 시안)까지라는 표시가 붙어있다. 장춘은 만주 길림성(吉林省 지린성)의 성도이고 서안은 서쪽 섬서성(陝西省 산시성)의 성도이니 만주에서 중원을 관통하여 실크로드의 기종점을 연결하는 장대한 노선이다. 이 열차는 우리나라의 무궁화 급이라는데 연결된 객차가 스물 쯤 되는 것 같고 길이는 200m가 넘을 듯하다. 객차마다 전담 승무원이 한 사람씩 배치되어 있었다. 우리들은 6인용 침대칸에 각각 자리 잡았다. 한 사람이 겨우 누울 수 있는 침대가 세 개씩 벽에 붙어 있었다. 의외로 깨끗하고 조용하였다. 내 아래 자리는 윤 선생이고 위와 맞은편은 모두 중국인들이었다. 중국인들과 한 방에서 자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말이 없었고 나에게 말도 걸지 않았다. 우리들이 떠드는 것을 보고 대충 짐작한 듯하였다. 차창 밖으로 지나가는 넓은 들판을 바라보며 맥주를 몇 잔 마시다 침대로 올라가 옷 입은 채 그대로 누워 내처 잤다. 전혀 불편이 없었다. 열차에서는 앉아 가는 사람, 서서 가는 사람, 누워가는 사람 등 차별이 있겠지만 차에서 내리면 그런 불평등은 즉시 사라질 것이다.
둘째 날
4월 12일은 일요일이었다. 아침 7시 쯤 개봉역에 도착했다. 날씨는 잔뜩 흐려 비가 내릴 듯하고 바람에 흙먼지가 날리며 제법 쌀쌀하였다. 서울보다 더 추운 것 같았다. 얇은 스웨터 위에 바람막이 겉옷을 걸쳤다. 역 광장은 텅 비어 있었다. 젊은 사내들이 일제히 달려들어 무엇인가를 열심히 설명해준다. 아마 자기 차를 이용해 달라거나, 자기 식당에서 조반을 들라는 권유인 것 같다. 김 대표는 그들을 아랑곳 하지 않고 성큼성큼 걸어서 큰길을 건넜다. 길가의 허름한 밥집에서 아침을 들었다. 주인아주머니의 앞치마에 땟국이 줄줄 흐르고 그릇들도 새카맸고 바닥도 지저분했다. 하지만 따뜻한 죽과 갓 쪄낸 만두는 새벽의 추위와 허기를 다스리기에 손색이 없었다.
호텔에 짐을 맡기고 ‘송나라 시대의 거리(宋都御街)’를 어슬렁거리며 오토바이에 어린이들을 싣고 달리는 젊은 주부들을 바라보며 책방과 약방, 노상 음식점 등을 구경하였다. 색다른 것은 없었으나 땅콩에 버무린 엿은 아주 달고 고소했다. 길 끝에 용정(龍亭)이 자리 잡고 있는 데 마침 봄 꽃 축제가 한창이었다. 용정은 송나라가 여진족에 밀려 양자강 남쪽 항주(抗州 항조우)로 쫓겨날 때까지 황제가 머물던 대궐 터였다. 수백 가지의 꽃으로 길가를 장식하고 커다란 아치를 만들어 세웠다. 사람구경, 꽃구경에 다리 아픈 줄을 몰랐다.
점심을 들고 나자 세찬 바람과 함께 찬비가 내렸다. 비옷을 꺼내 입고 개봉부를 보러 갔다. 마침 대청에서 인기 드라마 ‘포청천’의 한 대목을 실연해 보이는 연극판이 벌어지고 있었다. 포청천이 황족의 죄상을 밝혀내고 그를 처단하라는 호령이 떨어지자 마당을 가득 메운 관중들이 우레 같은 박수를 보냈다. 윤 여사와 정 여사는 황족으로 분장한 그 배우와 기념 촬영도 하였다. 호텔 근처 재래시장을 둘러보았다. 옷가지와 모자, 신발, 전자제품, 식료품 등이 무더기로 쌓여 있었으나 대부분 물건들이 조잡하고, 흥정하는 사람들도 별로 많지 않았다.
윤 여사는 오늘 칠순을 맞았다. 객지에서 맞는 이 뜻 깊은 날을 자녀들을 대신해 축하해 드려야겠는데 아이디어가 궁색하였다. 할 수 없이 커다란 수퍼마켓(超市 차오스)에 가서 케이크와 술과 과일, 과자 등을 쇼핑했다. 길거리 시장에서는 흥정이 통했지만 이런 곳에서는 엄격한 정찰제로 전혀 에누리가 없었다. 하지만 아주 근사한 케이크가 100위엔, 스페인 산 포도주는 15위엔, 사천(四川 쓰촨)산 백주(白酒 바이지우)가 10위엔, 무게로 달아 파는 팔뚝만한 망고도 거저나 다름없었다.
저녁은 신선로 비슷한 화과(火鍋 훠구어)로 정했다. 우리나라에는 사브사브로 더 잘 알려져 있는데 끓는 물에 양고기와 채소를 데쳐먹는 중국전통 요리이다. 윤 여사의 머리에 화관을 쓰여 드리고 케이크에 불을 붙인 뒤 축하 노래를 불렀다. 윤 여사는 포도주를 한 잔 마시더니 “오늘 저녁 파티로 기운을 얻어 태행산 트래킹을 기필코 완주하겠다.”고 씩씩하게 선언하였다. 자녀들이 마련하는 칠순 잔치를 마다하고 이번 여행에 따라나서기는 했지만 무릎이 아파서 일행에 폐가 될까봐 걱정이 큰 모양이었다.
셋째 날
4월 13일 아침, 대상국사를 들러 보고 정주(鄭州 정조우)로 떠났다. 대상국사는 송나라 황제들의 원찰이었다지만 스님들은 보이지 않고 관광객들만 들끓고 있었다. 저자거리나 다름없었다. 11시 반 쯤 역으로 나가 열차 편으로 정주로 떠났다. 정주(鄭州 정조우)는 하남성(河南省 허난성)의 성도로 인구 천만을 상회하는 중국 내륙교통의 요충지이다. 아직도 하(夏)나라, 상(商)나라, 주(周)나라 시대의 유적이 꾸준히 발굴되고 있을 만큼 유서 깊은 도시이다. 황하 남쪽에 펼쳐진 광활한 황토 곡창에서 생산되는 농산물의 집하장이기도 하다. 중국의 지리상 중심지는 황하 상류의 난주(蘭州 난조우)라지만 그 것은 티베트 고원, 타클라마칸 사막, 고비 사막 등 불모지를 다 포함 할 때의 이야기이고 사람들이 살 수 있는 곳을 기준으로하면 황하의 중하류인 바로 이곳이 중국의 배꼽이라 할 것이다.
도시 한복판에 ‘2.7기념탑’이 높이 솟아있다. 1923년 2월 7일 경한철도 노동자들이 자유와 인권을 쟁취하기 위해 봉기 했으나 군벌에 의해 무자비하게 유혈 진압되었다. 중국정부는 폭압에 저항한 노동자들의 혁명정신을 기리기 위해 2006년 6월, 이탑을 세웠다고 표석에 새겨 넣었다. 서울의 명동 같은 곳으로 아주 크고, 넓은 거대한 쇼핑 몰과 푸드 코트가 조성돼 있었다. 점포마다 확성기로 불러대는 호객소리에 귀가 멍멍하였다. 거리를 가득 메운 청춘들은 표정도 밝고 차림도 세련되었다.
넷째 날
4월 14일, 우리나라 여행객들이 ‘빵차’라고 부르는 7인승 밴을 타고 태행산으로 가는 도중 ‘황하유람구(黃河遊覽區)’에 잠깐 들렀다. 아침 8시쯤 호텔을 떠났는데 마침 출근시간이라서 자동차, 오토바이, 릭셔, 자전거 등으로 6차선도로가 가득 찼다. 바퀴 달린 것들은 모두 쏟아져 나온 것 같았다.
9시 조금 지나 황하유람구에 도착했다. 서울의 남산만한 작은 산의 꼭대기에서 염제(炎帝)와 황제(黃帝)의 거대한 석상이 황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염제는 다른 이름으로 신농씨(神農氏)라고 불리는 ‘불의 신’으로 농사짓는 법을 백성들에게 가르쳤다하고 황제는 다른 이름으로 헌원씨(軒轅氏)라고도 불리는데 최초로 부족을 통일하여 법과 제도를 정비한 제왕이라고 전한다. 하지만 이들이 실존인물이었다는 증거는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다. 이 두 석상이 자리한 곳에서 내려다 본 황하는 정말 황토 빛에 넓고 길어 유장하였다. 기다란 열차가 철교를 느릿느릿 지나가는 모습도 보였다.
산의 중턱, 한갓진 곳에 하얀 대리석으로 깎은 모자상이 보였다. 아기에게 젖을 물리는 어머니의 모습이었다. 황하를 어머니에 비유한 것 같다. 황하는 티베트고원 어디에선가 시작되어 도중에 크고 작은 강의 물을 받아 점점 불어나면서 중원 대평원에 물을 대 사람과 짐승들을 먹여 살리고 있으니 어머니와 다를 바 없겠다. 인도 사람들도 갠지스 강을 ‘어머니의 강(Mother Ganga)'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황하는 때때로 범람하여 수많은 생명을 앗아가므로 옛날이나 지금이나 황하의 물 관리는 역대 통치자들의 가장 크고 중요한 일이었다.
광장 한 귀퉁이에 작은 박물관이 있었다. 황하가 만든 황토지대를 자세히 설명해 놓았다. 중원 전체가 거대한 황토지대이고 사람들은 황토에서 태어나 황토 속에서 살다 황토로 되돌아간다고 쓰여 있었다. 황토층에서 발견된 고대 동물, 식물들의 표본도 많이 진열되어 있다. 거대한 코끼리를 닮은 짐승의 머리뼈와 상아, 구석기시대 인들이 쓰던 돌로 된 연장, 신석기 인들의 토기 등이 진열되어 있었다.
우리 ‘빵차’의 기사는 김 대표가 탄 차를 따라가지 않고 포장도 안 된 황톳길을 무작정 달렸다. 우북하게 자란 밀밭이 끝 간 데 없이 펼쳐져 있다. 먼지가 얼마나 심했던지 뒷자리의 정 여사가 수건으로 얼굴을 가리며 비명을 질렀다. 중국말을 할 줄 몰라 “어디로 가느냐?”고 물어 볼 수도 없었다. 은근히 불안해졌지만 속수무책이었다. 곳곳에 도로가 파헤쳐지고 고속도로 건설이 한창이었다. 신향(新乡 신시양)이란 곳을 지날 때는 널찍널찍한 도로에 고층아파트, 고층빌딩 건설현장이 여러 군데 보였다. 해안지방에 밀려 상대적으로 낙후되었던 이곳도 이제 개발의 급류를 탄 것 같다. 한 때 이곳은 베이징, 상하이, 광조우의 부족한 일손을 보충해주는 농민공(農民工)의 최대 공급지였다. 하지만 머지않아 옛날 역대 왕조들의 도읍지로서 누리던 영화를 되찾을 것 같다.
운태산(云台山 윈타이 산)이라는 간판이 보이면서 차는 산속으로 들어섰다. 길은 포장된 지 얼마 되지 않은 듯 아주 깨끗하고 넓었다. 지나가는 차도 행인도 눈에 뜨이지 않았다. 길가에 민박집 간판만 자주 보였다. 태행산에 들어선 것 같다.
태행산(太行山 타이항 산)은 남북 약 600km, 동서 약 250km에 달하는 거대한 산괴(山塊)로 넓이가 남한 땅 전체에 필적한다. 이 산괴는 운태산, 구련산, 만선산, 천제산, 왕망령 등 1,000m 또는 2,000m를 넘나드는 수많은 산들을 품고 있다. 이 산괴의 동쪽을 산동(山東)이라 부르고 서 쪽을 산서(山西)라고 부른다. 옛날부터 중원을 차지하려고 패권을 다투던 세력들이 세 불리하면 이곳으로 숨어들어 세력을 보충한 뒤 재기를 노렸다.
유방(劉邦)이 한(漢)을 세운지 200여년쯤 지나자 외척 왕망(王莽 BC45-AD23)이 어린 황제를 협박하여 제위를 선양 받은 다음 국호를 신(新 8-24)으로 바꿨다. 왕망은 토지개혁과 세제혁파로 민심을 얻으려 애를 썼으나 오히려 개혁에 실패해 여러 곳에서 백성들이 저항했다. 유방의 9세손, 유수(劉秀 BC6-AD57)도 봉기했으나 왕망의 군대에 쫓겨 바로 이곳 태행산으로 숨었다가 세를 불린 다음 왕망을 격파하였다. 유수는 장안(長安, 지금의 西安)을 버리고 낙양(洛陽 뤄양)을 새 도읍지로 정하여 한(漢)을 계승하였다. 그 가 후한(後漢)을 연 광무제(光武帝)이다. 현대에 들어서 모택동(毛澤東 1893-1976)도 장개석(蔣介石 1887-1975)의 국민당 군에 밀려 이곳으로 패퇴했다가 주덕(朱德 1886-1976)과 합세해 재기했다. 일제시대, 조선독립동맹의 김두봉(金枓奉 1889-1960)과 무정(武亭 1905-1952)도 이곳에서 항일전투를 벌였다하니 우리와도 인연이 없지 않다.
오후 2시, 팔리구(八里溝)와 구련산(九蓮山)이 갈라지는 곳에 도착하여 점심을 들었다. 젊은 남녀들이 술을 마시다 우리들을 보더니 함께 사진을 찍자고 말을 걸었다. 그들의 모델노릇하기에는 너무 늙어서 사양했더니 자꾸 조른다. 그들의 입에서 술 냄새가 짙게 풍겼다. 도시에서는 좀체 볼 수 없었던 일이었다.
시간이 부족하여 팔리구 탐방은 버리고 바로 구련산으로 들어갔다. 경상도 아주머니들의 사투리가 왁자지껄하였다. 그분들은 나오고 우리들은 들어갔다. 안내판 마다 중국어와 한글로 해설을 붙였다. 하지만 한글은 문법도, 어법도 틀려 이해하기 힘들었다. 좌우로 수백 미터가 넘을 깎아지른 절벽이 길고 좁은 골짜기를 만들고 있었다. 고개를 냅다 제켜야 손수건만한 하늘이 보였다. 엷은 홍색을 띤 바위가 시루떡처럼 켜켜이 쌓여 절벽을 이루고 있었다. 황하 유람구의 염황제 상을 쌓은 붉은 돌들은 모두 이곳에서 떼어내 간 모양이다. 한 줄기 커다란 폭포가 보이자 골짜기는 끝나고 기다란 엘리베이터가 기다리고 있었다. 장가계(張家界)에서 보았던 그런 것인데 길이는 좀 짧은 것 같다. 김 선생은 엘리베이터를 버리고 혼자서 계단을 걸어올라 갔다. 30분쯤 걸렸다고 한다.
위에는 서련사(西蓮寺)와 사하촌(寺下村)이 자리 잡고 있었다. 달구지나 지나다닐 수 있는 시멘트 길에 복사꽃이 화사하고 낮닭이 울었다. 하지만 서련사 입구에 다다르자 시장바닥처럼 북적거리고 소란하였다. 나이든 참배객들로 좁은 절 마당이 빽빽하였다. 향연과 그 냄새가 불당에 가득했다. 서련사는 광무제의 목숨을 구해준 서련노모(西蓮老母)를 기리기 위해 동한시대(東漢時代)에 처음 지었으나 도중에 소실과 재건을 거듭하였다. 현재의 당우는 70년 전에 지은 것이라고 안내판에 쓰여 있다. 부처님 이외에 서천노모(西天老母) 등 여러 속신을 함께 섬기고 있었다. 황하의 모자상에서 보듯 중국은 예나 지금이나 어머니에 대한 신앙이 강한 것 같다.
참배객들은 거의 전부 노인들인데 차림은 남루했으나 하나같이 간절한 얼굴로 정성을 다해 기도하고 있었다. 대부분 할머니들인 것으로 보아 자식들의 건강과 안녕을 비는 것이 틀림없다. 서련노모, 서천노모는 전각에 앉아 서 절을 받는 돌덩이들이 아니라 이렇게 살아서 땅바닥에 머리를 대는 할머니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절 집들은 다 같이 작고 아담했다. 땅이 좁아서 더 크게 지을 수도 없을 것 같다. 서련사 위쪽으로는 연못(池)과 못(潭)이라는 이름이 붙은 곳이 번갈아가며 계속 나타났다. 작은 골짜기가 꽤 깊은 듯하다. 이곳의 물이 모여 엘리베이터 옆 절벽으로 떨어지는 것이다.
날이 어둑어둑해지자 참배객들은 절에서 보시하는 만두와 죽을 노상에서 먹은 뒤 이불보따리를 안고 하루 밤을 샐 민박집을 찾아다니고 있었다. 큰 방에서 함께 모여 자는데 숙박비는 1인당 10위엔 정도라고 한다. 그에 비하면 우리가 묵을 산장은 호사였다. 비록 바람이 술술 들어오는 엉성한 방이었지만 뜨거운 물이 나오는 화장실에 보송보송한 침대가 있었다. 밤에는 제법 추었으나 옷을 잔뜩 끼워 입었으므로 아무 탈 없었다.
다섯째 날
4월 15일, 수요일 새벽. 따뜻한 죽과 만두로 요기를 한 다음 서련사를 나섰다. 오늘은 이번 여행의 하이라이트라 할 구련산 트래킹이 있는 날이다. 점심용으로 빵과 계란부침을 한 개씩 사서 각자 배낭에 넣었다. 천문(天門), 천문골(天門洶), 천제(天梯) 등의 입간판이 잇따라 보이더니 시멘트 포장길이 끝나면서 흙길이 나타났다.
아침 7시였다. 언뜻 보기에는 폭 1m 안팎의 평범한 산길이었다. 그러나 이곳은 수백 미터가 넘는 수직 절벽의 꼭대기다. 개나리는 이울고, 복사꽃 살구꽃이 한창이다. “제가 이곳을 여러 번 찾았지만 오늘처럼 파란 하늘은 처음 봅니다.” 김 대표는 이렇게 말하면서 서련사 방향의 스카이라인을 여러 컷 찍었다. 왼쪽으로는 백여 미터쯤 되는 산꼭대기에서 바위가 부서져 흘러내리고 키 작은 나무들이 이제 막 연두색 이파리를 내밀고 있었다. 오른 쪽은 아찔한 절벽이다. 엘리베이터 탑승구의 자동차가 콩알만 하게 보였다. 허리께 닿는 잡목에 가려 벼랑이 잘 보이지 않았다. 그것이 오히려 다행이었다. 어쩌다 절벽 바닥이 보이면 저절로 오금이 저리고 다리가 휘청거렸다. 하늘은 맑고 햇볕은 따스했다. 다들 바람막이를 벗어 배낭에 집어넣고 썬 글라스를 꺼내 썼다. 아마 절벽 저 쪽에서 이쪽을 바라본다면 그들은 우리들이 허공을 걷고 있다고 착각했을 것이다.
길은 계속 평탄하였다. 하지만 간혹 갑자기 좁아져 건너뛰어야 할 곳이 종종 나타났다. 흙이 무너져 내리면서 틈이 생긴 것이다. 이런 곳은 대개 시야가 탁 트여 아래 위가 다 잘 보였다. 등골이 서늘했다. 여염집도 가끔 나타났다. ‘누가 뭐 하러 이런 곳에 와서 사는가?’한심하지만 그런 의문을 지울 수 없었다. 아무도 지나가는 사람이 없었다. 길 위에 염소 똥만 소복 할 뿐이었다. 산신각도 두어 채 보였다. 벼랑 쪽 수직 절벽위에 아슬아슬하게 얹혀 놓았다. 가끔 서울에서 팔리는 인삼사탕과 초콜릿 껍질이 보였다. 공연이 부끄러워져 보이는 대로 주어 담았다. 이곳 사람들도 안 버리는 것을 하필 예까지 와서 버리다니!
다들 씩씩하게 잘 걸었다. 세간쯤 지나자 공포도 어느 정도 가시고 긴장도 풀어졌다. 서로 농담도 나누고 웃으며 노래도 불렀다. 걱정했던 윤 여사도 잘 따라 왔다. 윤 여사는 등산용 스틱을 가져가서 아주 요긴하게 쓰고 있었다. 오르막이나 내리막은 없었으나 절벽 길은 한도 없이 이어졌다. 드디어 염소 떼를 만났다. 그 녀석들은 느닷없이 자기들 영역을 침범한 우리를 못마땅한 듯 노려 보다 왼쪽 산위로 피했다. 염소치기도 한 사람 만났으나 그 역시 우리를 소 닭 보듯 하였다. 그는 천야만야한 낭떠러지를 염소들과 똑같이 누비고 다녔다.
오후 1시, 경구북대문(景區北大門)을 무사히 빠져나와 제법 큰 마을에 들어섰다. 민박집 간판이 군데군데 보이고 자동차가 서 있는 집도 많았다. 정확하게 6시간 걸렸다. 휴식시간과 점심시간을 감안 하더라도 시간당 2,5km는 걸은 것 같다. 그렇다면 우리가 걸은 절벽 길은 15km 정도가 될 것이다. 마을 카페에 들어가 시원한 맥주로 목을 축였다. 무사히 트래킹을 마쳤다는 안도감으로 하늘을 훨훨 날 것 같았다.
‘빵차’로 왕망령풍경구로 가서 셔틀버스 편으로 정상에 올랐다. 그곳이 태행산의 중심이고 해발 1,700m로 가장 높은 곳이라 한다. 늘 구름과 안개에 가려 시야가 흐리다는데 오늘은 푸른 하늘에 구름 한 점 없어 그야말로 산봉우리와 계곡이 일망무제로 펼쳐져 있었다. 산봉우리 둘레 길을 1km가량 걸었다. 천제산, 운대산, 만선산, 구련산이 파노라마처럼 눈앞에 떠 있었다. 관광객도 우리들뿐이어서 호젓하였다. 소나무가 많아 솔 향이 짙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소나무순이 모조리 부러져 하얗게 부러진 자리가 드러나 있었다. 바람과 눈 때문이라고 하니 눈보라가 칠 때의 이곳이 어떠한 모습일지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오후 4시쯤 왕망령을 내려와 만선산(萬仙山) 절벽장랑(絶壁長廊)을 통해 곽량촌(郭亮村)으로 향했다. 절벽장랑이란 바위를 뚫어 만든 1,250m에 달하는 좁은 터널이다. 까마득한 바위절벽에 ‘빵차’ 한 대가 겨우 지나갈 정도의 굴을 뚫고 군데군데 사각형의 창을 내 조명과 통풍의 문제를 동시에 해결하였다. 곽량촌의 청년 12명이 1972년부터 1977년까지 곡괭이와 정 등 오로지 사람의 힘만으로 뚫어서 만들었다는데 도무지 그 말이 믿어지지 않는다. 그 못지않은 놀라운 일도 목도하였다. ‘빵차’를 타고 위에서 아래로 내려가면서 바위창밖으로 간간이 보이는 아찔아찔한 풍경에 조마조마하고 있을 때 갑자기 맞은편에서 스포츠유틸리티(SUB)가 나타났다. 서로 피할 데가 없었다. 좁은 통로가 구불구불하여 우리 차가 입구까지 후진 할 수도 없고 앞 차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기사들이 내려 서로 다투더니 우리 차의 기사가 천천히 후진하면서 약간 넓은 틈새를 발견하자 두 차가 글자그대로 간발의 차이로 비켜갔다. 나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리고 엄지를 추켜올리면서 “쩐빵!”을 연발했다. 우리 차 기사는 쇳덩어리로 된 자동차를 미꾸라지처럼 유연하게 다루었던 것이다. 그것도 폐차 직전으로 보이는 고철덩어리를!
곽량촌 역시 서련사 사하촌 마냥 절벽 위 동네였다. 그러나 서련사처럼 고립된 곳이 아니라 관광버스가 줄지어 다닐 정도로 세상과 바로 연결된 곳이었다. 마을 어귀부터 마을이 끝나는 곳까지 1km도 넘을 길가에 조립식 가게를 약간의 틈새도 없이 이어 짓고 있었다. 불이라도 나면 한꺼번에 다 타버릴 것 같다. 바야흐로 수백 년 동안 속세를 떠나 있던 ‘도화촌(桃花村)’이 급속도로 세속화되고 있는 중이다. 마을 주변에 스케치하는 학생들이 많이 보였다. 원래 산수가 뛰어난 곳이라 화가 지망생들이 일 년 내내 단체로 찾아온다고 한다. 절벽장랑, 절벽 길, 스카이라인을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를 여러 곳 둘러보았지만 이제 그 풍경도 심드렁해졌다. 구련산 절벽 길을 걸으면서 그 보다 진한 경치를 눈이 시리도록 보았기 때문이었다. 오늘 밤은 이곳에서 보내고 내일 아침 정주로 내려간다. 산장의 객실은 천장이 높고 낡았으나 뜨거운 물은 잘 나왔다. 그러나 나는 샤워를 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여섯째 날
4월 16일 목요일 아침 9시, 다시 정주로 향하였다. 하늘은 맑았으나 약간 더웠다. 산에서 내려와 1차선 도로에 들어섰다. 오르막 내리막이 번갈아 나타나고 가끔 터널도 지났다. 온갖 종류의 자동차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달렸다. 버스, 택시, ‘빵차’, 대형 탱크로리, 컨테이너보다 더 큰 짐을 실은 화물 트럭 등. 매연과 먼지와 석유냄새가 진동했다. 길바닥은 파이고 갈라지고 성한 데가 없었다. 대형트럭들이 무거운 짐을 싣고 연락부절하기 때문일 것이다. 시골 읍내는 자동차정비소, 농기계 고치는 곳, 음식점, 잡화상, 버스터미널 등이 무질서하게 늘어서 있었다.
신향을 가리키는 표지판이 보이자 새로 닦은 고속도로가 나타났다. 그제야 답답한 흐름에서 벗어나 경쾌하게 달렸다. 차창을 열고 신선한 공기를 들이마실 수도 있었다. 긴장이 풀어져 졸음이 오려는 순간, 오른쪽에서 갑자기 삼륜트럭이 나타나 우리 앞을 가로질러 갔다. 고속도로를 무단 횡단한 것이다. 기사가 반사적으로 핸들을 왼쪽으로 꺾으면서 중앙선을 넘어 반대 방향의 차도로 넘어갔다. 만일 그 쪽에서 달리는 차가 있었더라면 우리들은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뒷자리의 정 여사가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기사는 아무 일도 없었던 듯 다시 중앙선을 넘어와 태연하게 달렸다. 나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신향 시내에서 또 한 번 아찔했다. 네거리에서 좌회전 신호를 받아 왼쪽으로 방향을 꺾는데 맞은편의 버스가 직진하면서 우리의‘빵차’로 달려들었다. 앞자리에 앉아 있던 나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이에 비하면 어제의 절벽트래킹은 아이들 장난이라 할 것이다. 위험은 산속이 아니라 도시 한복판에 있었다. 길바닥에 노란 색과 흰 색으로 차선이 선명하게 그어져 있건만 차도, 사람도 그 생명선을 지키지 않았다. 신호도 무시하고 아무 때나 길을 건너고 좌회전을 예사로 감행하였다. 교통경찰도 빤히 보고 있으면서 단속을 안 했다. 자동차들은 서로 달려들다가 부딪칠 듯 하는 순간에 아슬아슬하게 피해 갔다. 사람들도 빨간불 초록 불을 아랑곳하지 않고 태연하게 대로를 무단 횡단하였다. 그러나 절대로 뛰는 법은 없었다. 뛰면 사고가 날 것 같았다. 사람이나, 차나, 경찰이나, 칼 같이 신호를 지키는 것 보다 이렇게 기회를 봐서 요령껏 피해가는 것이 더 효과적이라고 치부하는 것 같았다.
신향 역에서 볶음밥과 우육탕면 등으로 각자 점심을 든 뒤 기차로 갈아타고 정주로 떠났다. 열차는 믿음직했다. 호텔로 들어가 우선 샤워를 한 다음 밀린 빨래를 했다. 젊어서 해외 출장을 많이 다닌 임 사장이 요령을 가르쳐주었다. 빨래를 짜서 그냥 걸어놓으면 방바닥에 물방울만 뚝뚝 떨어질 뿐 잘 마르지 않는다면서 빨래를 목욕 타월에 잘 펴서 돌돌 감아 발로 밟아주라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물기가 쫙 빠져 금방 마른다는 것이었다.
오늘은 또 제일 연장인 윤 선생의 생일이었다. 윤 선생은 따님들이 미국과 프랑스에서 축하 방문을 한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이 번 여행에 따라나섰다. 그래서 틈만 나면 문자서비스와 ‘카톡’으로 소식을 주고받았다. 문자서비스는 언제 어느 곳에서든 무료로 제공되었지만 ‘카톡’은 와이 파이 지역에서만 가능했다. 이곳 호텔은 어느 곳에서나 와이 파이에 잘 연결이 되었다. 윤 선생은 호텔 방에 들어서면 무엇보다 먼저‘카톡’으로 손자, 손녀들과 음성통화로 인사를 주고받은 뒤 이곳 사진을 보냈다. 그리고 서울 소식도 자세히 취재해서 우리들에게 알려주었다. 해질녘 차오스에 가서 생일파티에 쓸 물건들을 준비를 한 다음 ‘2,7기념탑’ 근처 식당에서 또 ‘훠구어’를 들었다. 윤 여사와 정 여사가 축하 노래를 불러드렸다. 윤 선생은 생일 파티 모습을 동영상으로 찍어 서울 따님들에게 보냈다. 참 놀라운 세상이다. 시간과 공간의 틈이 없어진 것이다.
일곱째 날
4월 17일 금요일 아침, 우리의 ‘KTX'에 해당하는‘까오티(高鐵)’편으로 낙양으로 떠났다. ‘까오티’는 날렵했다. 매끈한 유선형 몸매에 외관도, 색상도 세련되었다. 객차의 좌석은 ‘KTX' 보다 여유가 있고 등받이의 유연성도 훌륭했다. 무엇보다 깨끗하고 조용했다. 여승무원들도 늘씬하고 표정도 환하였다. 시내를 벗어나자 전광판에 속도가 표시되었다. 순식간에 시속 200km를 돌파하더니 300km를 유지하고 있다. 더 속도를 낼 수 있지만 자제하는 것 같다. 중국어와 영어로 안내 방송이 나왔다. 내용은 정중했지만 자부심이 짙게 배어있었다. 중국은 세계 최고, 최대의 철도대국이다. 철도의 총연장거리나, 철도차량의 제작, 설치는 물론 철도운행의 노하우도 최고 수준이라고 한다. 중국철도는 13억 인구의 발이기 때문이다. 한 시간도 채 안 되어 낙양에 도착했다. 10시가 조금 지났다.
용문석굴(龍門石窟)은 평일인데도 인산인해였다. 입장료가 120위엔이었다. 우리나라 돈으로 치면 24,000원 정도이다. 어디를 가나 입장료가 녹녹치 않았다. 제일 싼 곳이 50위엔이었다. 중국의 70세 이상 노인들은 입장료가 면제되었다. 하지만 우리들은 어쩌다 한두 군데 빼고는 그런 대접을 받지 못하였다. 여기 와서 관광지 입장료와 케이블 카 탑승비, 시내 교통비 등을 무시하면 낭패를 볼 것 같다.
테러에 대한 공포가 생각보다 크고 그에 대한 대처가 짜증이 날 정도로 철저하였다. 비행기는 물론 기차를 탈 때, 지하철을 탈 때, 관광지나 박물관을 입장 할 때는 예외 없이 보안검색대를 통과하면서 사람과 휴대품을 검사받아야 한다. 이곳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석굴은 도록에서 보던 바와 다를 바 없고 오히려 넘치는 인파가 인상적이었다. 외국인들은 거의 보이지 않고 전부 중국인들이었다. 사람의 행렬에 갇히고 밀리면서 좁은 통로를 빠져나가기가 힘들었다. 날씨는 덥고 다리도 아팠다. 구련산 절벽을 걸을 때보다 더 피곤하였다. 마침 호수를 오가는 유람선이 있어 그것을 타기로 하였다. 시원한 호수 위에서 석굴을 바라보는 전망은 가대이상의 호사였다.
오른 쪽으로 향산사(香山寺)가 보였다. 당 나라의 백거이(白居易, 白樂天)가 벼슬을 버리고 은퇴하여 여생을 보낸 곳이다. 백거이는 이곳에서 친구들과 시를 짓고 술을 마시면서 주옥같은 시를 남겼다. 그는 학식이 높은 사대부를 위한 시를 쓰지 않고 글자도 모르는 서민들을 위해 노래(詞)를 지었다. 그는 당 현종(玄宗)과 양귀비(楊貴妃)의 사랑을 다룬 장한가(長恨歌)를 지을 때 초고를 빨래터로 가지고 가 읽어주며 그 부인들이 알아들을 때까지 고치고 또 고쳤다고 전한다. 이러한 시작(詩作)태도는 당시의 사대부로서는 파격적인 것이었다. 그는 남들이 깜깜 할 때 자유와 평등, 사랑을 깨치고 실천한 선각자였다.
백거이의 묘에서 배를 내려 광장으로 빠져나왔다. 도삭면으로 점심을 든 뒤 오후 3시쯤, 백마사(白馬寺)에 도착했다. 백마사는 중국 최초의 절이다. 광무제의 뒤를 이은 명제(明帝)가 꿈에 금인(金人)을 보고 이절을 세웠다 하기도 하고, 67년, 인도의 승려 가섭마등(迦葉摩騰), 축법란(竺法蘭) 등이 흰 말에 불경을 싣고 낙양에 도착하자 황제가 그들을 위해 이절을 지었다고도 한다. 입구에 ‘성스런 가르침이 서 쪽에서 왔노라.(聖敎西來)’는 글귀가 새겨진 일주문이 높이 솟아 있다. 절 안에는 관광객만 가득할 뿐 스님들은 보이지 않았다. 불당 좌우에 모란이 만발하였다. 경내를 한 바퀴 돌아 나오는데 ‘육조전(六祖殿)’이란 편액이 걸린 건물이 보였다. 들여다보니 달마(達磨), 혜가(慧可), 승찬(僧璨), 도신(道信), 홍인(弘忍), 혜능(慧能)의 좌상을 모셨다. 이분들은 선불교(禪佛敎)를 개창한 중국의 조사(祖師)들이다.
백마사 앞, 들판에서는 모란축제가 열리고 있었다. 높은 가름막 틈새로 그 안의 모습이 엿보였다. 사람들이 바글바글한 것 같다. 아낙네들이 팸플릿을 나누어주며 모란을 소개하고 있었다. 모란의 종류가 그렇게 많은 줄을 미처 몰랐다. 색깔별, 개화시기별, 파종시기별로 수백 종이나 되었다. 이 축제가 열리면 모란을 구경하고 모란을 사가기 위해 중국 전역에서 애호가들이 몰려온다고 한다. 그래서 갑자기 낙양시내의 호텔 방값이 두 배로 뛰었다고 김 대표가 혀를 찼다. 여인네들은 어린 소녀부터 젊은 처녀, 할머니들까지 모두 머리에 모란화관을 쓰고 다녔다. 윤 여사와 정 여사도 그렇게 했다.
김 대표가 택시를 잡아주며 관림(關林)으로 오라고 말한 뒤 다른 팀을 데리고 떠났다. 관림이란 소설 ‘삼국지’의 영웅, 관운장의 묘이다. 택시 기사는 젊은 여성이었다. 시가지를 벗어나 고속도로를 달리다 다시 시내로 들어섰다. 길이 많이 막혔다. 그녀는 뭐라고 몇 마디 묻더니 손가락으로 길 건너를 가리켰다. ‘관림상성(關林商城 꽌린상청))’이라는 대문이 보였다. 찜찜했지만 택시에서 내려 일행을 기다렸다. 20여분이 지나도록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김 대표에게 전화를 걸었다. “잘못 도착하셨습니다. 지금 계시는 곳에서 별로 멀지 않으니 슬슬 걸어오세요.”하였다. 핫도그를 파는 가게에 관림 가는 길을 물었다. 몸짓과 필담이 한 동안 오고갔다. 핫도그는 아주 잘 팔렸다. 중학생 또래의 소녀들이 계속 찾았다. 그래도 핫도그 주인장은 짜증을 내지 않고 나를 이해시키려고 애를 썼다. 마침내 1km쯤 내려가다 좌회전해서 다시500m 쯤 직진하라는 뜻을 알아듣게 되었다. 일행은 우리를 기다리느라고 입장도 못하고 광장에서 쉬고 있었다. 관림은 그냥 커다란 동산에 나무만 무성 할 뿐 한가했다. 수염을 무릎까지 늘어뜨린 관운장 상이 우리를 맞이했다. 이제까지 많이 본 익숙한 얼굴이었다.
여덟째 날
4월 18일, 아침 9시 반, ‘까오티’편으로 낙양을 떠나 10시 반쯤 화산북(華山北 화산베이)역에 도착했다. 호텔에 짐을 맡기고 작은 배낭에 비옷과 바람막이 겉옷, 물과 간식거리만 챙겨 화산 트래킹에 나섰다. 날씨가 잔뜩 흐리더니 기어코 비가 내렸다. 화산에는 다섯 개의 봉우리가 있다. 북봉(雲台峰, 1,614m), 동봉(朝陽峰, 2,090m,) 남봉(落雁峰, 2,160m), 서봉(蓮花峰 2,080m), 옥녀봉(玉女峰)이다. 옥녀봉은 원래 동봉에 속하는 봉우리였으나 여러 봉우리들의 한 가운데에 있는 것처럼 보여 독립된 봉우리로 특별대접을 받게 되었다고 한다.
북봉과 서봉에는 각각 꼭대기까지 바로 닿는 삭도(索道 케이블카)가 설치되어 있다. 그래서 트래킹 코스는 둘이다. 삭도를 타고 북봉에서 내려 서봉 쪽으로 걸어 올라가 그곳에서 삭도를 타고 내려오거나 그 반대로 서봉으로 올라가서 북봉 쪽으로 걸어 내려와서 삭도를 타고 내려오는 방법이다. 북봉에서 서봉 코스는 계속 오르막이어서 보통 3시간 정도 걸린다. 서봉에서 북봉 코스는 내리막이라서 두 시간이면 충분하다. 길은 외길이고, 모두 화강암을 깎아 만든 계단인데 너비 1m 안팎, 폭 20cm 쯤, 높이 30cm정도이다. 오르는 사람, 내려오는 사람이 한 사람씩 간신히 비켜갈 정도이고 계단을 디디면 신발의 절반만 바닥에 닿는다.
우리는 매표소 앞에서 잠깐 회의를 가졌다. 내외가 같이 온 팀은 서봉으로 올라가 산장에서 휴식을 취하다 북봉에서 올라오는 팀을 만나 같이 서봉삭도를 타고 내려오기로 정하였다. 비가 내려 계단이 미끄럽고 시야도 흐리기 때문이었다. 12시쯤 헤어졌다. 김 대표가 늦어도 오후 4시까지 북봉 팀이 서봉에 도착하지 않으면 더 이상 기다리지 말고 삭도를 타고 내려가라고 서봉 팀에 당부하였다.
12시 25분, 북봉삭도를 타고 올라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논검대(論劒臺)라는 곳이 나타났다. 무협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화산파의 검술연마장이라는 뜻이겠다. 소설의 인기에 영합하려고 억지로 꾸민 무대라는 것을 쉽게 알아볼 수 있었다. 왕모궁(王母宮)까지는 김 대표와 우리 넷이 한 줄로 잘 올라갔다. 그곳에서 비옷을 꺼내 입고 화장실에 다녀오니 일행이 보이지 않는다. 분명히 함께 올라 왔는데 글자그대로 오리무중이었다. 안개와 비로 화산 준봉의 웅장한 풍경은 고사하고 10여 미터 앞의 계단도 흐릿하였다.
나는 일행이 앞서 떠난 줄 알고 부지런히 그들을 쫓아갔다. 쉬지 않고 앞만 보고 올라갔다. 올라가는 사람 보다 내려오는 사람이 훨씬 더 많았다. 앞사람의 엉덩이와 신발만 보였다. 구름만 가득하여 좌우가 천야만야한 낭떠러지라는 것도 알 수 없었다. 도룡묘(都龍廟)란 표지판이 보였다. 화장실과 작은 매점이 있었다. 혹시 나를 기다리지나 않을까 이리저리 찾아보았으나 허사였다. 또 한참 올라가다 보니 창용령(蒼龍嶺)이란 푸른 글씨가 바위에 새겨져있다. 나는 반가웠다. 사전조사를 통하여 이곳이 동봉, 남봉, 서봉으로 가는 갈림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계단이 거의 수직으로 200m쯤 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때가 낮 1시 24분이었다. 계단은 생각한 것보다 가팔랐다. 똑바로 서 있을 수가 없을 정도였다. 머리를 앞 계단에 박고 자벌레처럼 기었다. 이 절벽은 화산 트래킹 코스 중 가장 힘들고 위험한 곳이다.
창용령에 올라서니 오운봉(五云峰) 휴게소가 지척이었다. 화장실도 있고 매점도 있으므로 그곳에서 기다리기로 하였다. 내가 일행보다 앞서 왔다면 더욱 좋고, 내가 뒤쳐졌다 해도 나를 찾아 창용령을 내려가는 수고를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배낭에서 계란을 꺼내 먹고, 초콜릿 바도 두 개나 먹었다. 그때 나의 전화기가 울렸다. 김 대표였다. 서로 위치를 묻는데 상대방의 육성도 함께 들렸다. 김 대표가 나의 2m 전방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때가 두시쯤이었다. 김 대표가 말했다. “선생님이 급히 올라가시는 바람에 예정시간보다 30분이나 단축되었습니다. 모두가 긴장되어 힘든 줄을 몰랐습니다. 정말 다행입니다.”김 대표는 잃었던 물건을 다시 찾은 듯 후련한 표정을 짓더니“제가 저 밑에서 선생님이 창용령 비탈을 올라가시는 모습을 망원경으로 보았습니다. 비옷 등에 새겨진 커다란 상표와 자맥질하듯 기어 올라가는 키 큰 모습을 확인했습니다.”
마치 일본도를 꺾어 세워 놓은 듯한 절벽이 보였다. 서봉의 거대한 석벽이라고 한다. 그 것을 배경으로 증명사진을 찍었다. 이어서 금쇄관(金鎖關)을 넘었다. 간혹 오르막이 있었으나 길은 평탄하였다. 사람들이 바글바글하였다. 아기를 안은 엄마는 물론 구두에 핸드백을 든 부인도 있었다. 모두 서봉 삭도를 타고 온 사람들일 것이다. 비를 뿌리는 구름 속이건만 사람들은 하나 같이 기쁜 표정이었다. 남천문(南天門)이라 쓰인 문을 통과하니 또 사당이 보였다. 근엄한 할아버지가 앉아계셨다. 뇌신전(雷神殿)이란 편액이 걸려있다. 도교의 성지(聖地)답게 묘당(廟堂)이 참으로 많았다.
남천문을 지나자 평안종(平安鍾)이란 종각이 있고 그 옆으로 장공잔도의 입구라는 글자판이 바위에 붙어있다. 평안종이라! 이런 아슬아슬한 산꼭대기에 생뚱맞지만 그럴 듯도 하다. 장공잔도(長空棧道)란 바위벽에 구멍을 뚫고 통나무를 끼워 만든 공중에 뜬 길이다. 원(元)나라 시대에 하원희라는 도인이 40년에 걸쳐 만들었다고 전 한다. 이 잔도는 너비 한 자, 길이 100m쯤이라는 데 스릴만점, 조망만점이라서 젊은이들을 그냥 지나가지 못하게 만든다. 인터넷을 검색하다보면 이곳을 소개하는 사진과 글이 수 없이 많다. 평안종 자리에서 장공잔도를 내려다보았다. 이런 날씨에도 사람들이 가득 차 있다. 들고 있던 우산이 바람에 날려가자 “와”하는 함성인지, 비명인지가 들렸다. 그들이 부럽기도 하고 걱정도 되었다.
평안종 아래 화장실에 들렀다가 매점에 들러 뜨거운 라면국물을 마셨다. 몸에 밴 한기가 사라지며 안도의 숨이 저절로 새나왔다. 남봉 정상에 올라 또 증명사진을 찍고 서봉삭도 입구에서 기다리던 일행을 만났다. 정확히 오후 3시였다. 삭도를 타고 내려오면서 구름 속에서 언뜻언뜻 드러나는 거대한 절벽을 보았다. 윤 여사가 “정말 굉장해요. 삭도 값이 아깝지 않았어요.”한다. 날씨가 좋았더라면 바위산의 윤곽 전체를 즐길 수 있었겠지만 이렇게 구름에 가려 부분만 보이는 것도 그에 못지않게 흥미로웠다. 테두리를 알 수 없는 유현함 속에서 상상력을 무제한으로 펼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저 높고 발붙일 데가 없는 절벽에 이런 구조물을 어떻게 세웠는지 그 기술이 놀랍다. 승차권에 길이 4,211m, 철탑지지대 28개, 객차 84대가 초속 6m로 운행하는 세계 제1의 삭도라고 쓰여 있다. 하지만 이 덕에 화산 영봉(靈峰)은 저자바닥으로 변했다. 옛 사람들은 겨우 바위에 구멍을 내 잔도나 만드는 것이 고작이었지만 요즘 사람들은 산꼭대기에 쇠줄을 걸고 앉아서 단숨에 올라간다. 신선이 내려와 산다는 화산의 신비는 이제 사라졌다. 사람들의 마음속에 살아있던 경건함과 간절함도 함께 사라졌다. 이것을 개발이라고 해야 할지, 파괴라고 해야 할지 혼란스럽다.
홀가분하였다. 일부러 체력, 담력 테스트를 하려한 것은 아니었지만 어려운 일정은 이제 다 치러냈다. 따뜻한 물로 땀을 닦은 다음 마른 옷으로 갈아입었다. 만찬자리는 흥겨웠다. 술을 하지 못하는 박 선생도 백주를 서너 잔이나 들고 노래도 흥얼거렸다. 내가 자벌레처럼 창용령을 기던 모습이 단연 화제였다. 김 대표도 은근히 걱정이 컸던 모양이었다.
아홉째 날
4월 19일, 토요일 한 낮, ‘까오티’편으로 서안북(西安北 시안베이)역에 도착했다. 바로 지하철을 타고 종루(鐘樓)로 갔다. 지하철은 작년에 개통되었다는데 들리는 말소리만 다를 뿐이지 서울의 지하철과 똑 같은 분위기였다. 종루거리는 사람과 자동차로 혼잡하였다. 10년 전, 여기에 왔을 때는 베이징 올림픽 준비로 도시전체가 부산했다. 도로를 넓히고 포장하고, 건물을 헐고 짓고 어수선 했던 것이다. 그래도 그때는 건물의 외양이나 사람들의 차림에서 옛날의 모습이 많이 남아 있었다. 지금은 완전히 다른 세상이 되었다. 서울이나 도쿄와 다를 바가 없다. 미끈미끈한 글래스타워에 명품 가방을 든 멋쟁이들이 활보를 하고 있었다.
서안은 서부대개발의 지휘본부이다. 서부란 이곳 섬서성은 물론 사천성, 감숙성, 청해성, 신장위구르 일대, 티베트 지방을 아우르는 말이다. 지금은 동해안지방에 밀려 주춤하지만 일단 개발에 탄력이 붙으면 중국대륙을 먹여 살리는 거대한 생산기지가 될 것이다. 그 가능성도 무궁무진하다. 티베트를 이곳 사람들은 서장(西藏 시짱)이라 부르는데 이는 서쪽의 거대한 창고라는 뜻이다. 티베트 고원의 지하에 어떤 자원이 얼마나 묻혀있는지 이제 슬슬 그 규모가 드러나는 중이고, 타클라마칸 사막에 어마어마한 석유와 천연가스가 묻혀 있다는 것이 착착 확인되고 있다.
감숙성(甘肅省 깐수성)의 성도 난주(蘭州 란조우)에서 돈황(敦煌 둔황) 밖 옥문관(玉門關 위먼관)을 잇는 1,000km에 달하는 초원길을 하서주랑(河西走廊)이라고 부른다. 황하 서쪽의 좁은 길이라는 뜻이다. 남쪽의 기련산맥(祁連山脈 치렌산)과 북쪽의 고비사막 사이의 좁고 기다란 초원지대이다. 좁은 곳은 겨우 1km, 넓은 곳이래야 100km미만이다. 평균고도 4,000m 안팎의 기련산맥의 만년설이 녹아내려 만들어진 초원이다. 하서주랑은 역대 중국 황제들을 잠들지 못하게 하는 골칫덩어리였다. 흉노와, 돌궐, 위구르, 티베트 인들이 그 길로 쳐들어와 약탈과 방화를 일삼았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말을 타고 바람 같이 나타났다 바람 같이 사라졌다. 농경민족인 중국인들은 그들의 기동력을 감당 할 수 없었다. 그 골칫거리가 이제 서부대개발의 대동맥이 되어 중국의 내륙과 신장 위구르, 우즈베키스탄, 모스코를 거쳐 함부르크까지 이어주는 생명선으로 거듭나고 있다. 이미 난주, 우룸치, 카스가르, 파미르의 쿤자랍패스를 넘어 파키스탄의 카라코람 하이웨이를 관통, 인도양의 카라치에 이르는 길도 확보되었다. 그 출발점이 바로 우리가 지금 서 있는 종루이다. 종루는 그 옛날 실크로드의 기종점(起終点)이기도 했는데 머지않아 그때의 성세(成勢)을 넘어설 것 같다.
이곳에서는 나흘 밤을 잔다. 워낙 유서 깊고 볼거리도 많은 곳이라 나흘도 부족할 듯싶다. 우리가 짐을 푼 호텔에서 비림(碑林)까지는 걸어서 30분이 채 안된다고 김 대표가 말했다. 성벽을 따라 서안의 이면(裏面)을 걸었다. 장의사와 약방, 안마시술소 같은 것이 띄엄띄엄 보였다. 일요일인데도 비림은 한가했다. 매표소 앞에서 일행은 망설였다. “무엇이 있느냐?”고 나에게 물었다. “중국의 역사와 예술과, 시문, 학문이 있다. 하지만 한문을 읽을 수 있다 해도 전문가가 아니면 돌덩이로만 보일 것이다.”라고 말했다.
비림 담장 곁의‘비림거리’는 살아있었다. 붓, 벼루, 먹, 종이 등 문방사우는 물론 옥 제품, 나무 조각품, 청동주물 등을 파는 골동품, 기념품 가게가 1km도 넘게 이어져 있었다. 10위엔짜리 옥팔찌도 많았다. 10위엔 이라면 원화로 2,000원이 채 안 된다. 옥이 그렇게 쌀까? 가게 주인장은 옥팔찌를 서로 부딪쳐 보이며 소리를 들어보라고 한다. 플라스틱은 옥처럼 맑은 소리가 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남문 쪽으로 빠져나와 한가하게 걷다보니 종루에 닿았다. 종루 서편 ‘이슬람거리’로 들어섰다. 을지로만한 거리에 사람들이 빽빽했다. 좌우로 음식점들이 어깨를 비비며 들어서 있었다. 면, 꼬치, 만두, 케밥, 엿, 석류, 그밖에 생전처음 보는 수많은 먹을거리들이 지천으로 널려 있었다. 고기를 빼먹고 버린 나뭇가지가 장 단지만한 플라스틱 통에 고슴도치처럼 꽂혀있다. 그런 통이 10m 간격으로 늘어서 있었다. 고기타는 냄새가 진동했다. 사람들의 악다구니도 요란하였다. 아마 지옥이 있다면 바로 이런 곳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먹자거리’의 뒷골목에는 옷과, 가죽제품, 가방, 액세서리, 골동품 등 정말 ‘이 세상에 없는 것이 없는 골목시장’이 숨어 있었다. 재주껏 바가지를 씌우고 재주껏 값을 깎는 묘기가 벌어지는 곳이다. 말이 전혀 필요 없는 곳이기도 하다. 계산기로 주인이 값을 찍으면 고객이 그 값을 지우고 싼 값을 제시한다. 한참 서로 밀고 당기고 흥정이 벌어진다. 하지만 가게 주인은 이미 눈빛으로 고객의 속마음을 읽어낸 터라 절반으로 값을 깎아 주어도 돈이 남는다. 고객역시 절반 값에 횡재했다고 흐뭇한 표정을 짓게 만드니 이곳이 과연 천당이 아닐까?
‘이슬람거리’는 이슬람교도들이 모여 장사를 하는 곳이라 술이 없었다. 그 거리를 빠져나가면 술은 팔지 않지만 술의 지참을 허용하는 이슬람 식당이 있었다. 그런 곳에서 꼬치구이와 ‘난’, 만두로 저녁을 들었다. 오랜만에 난을 다시 만났다. 난은 발효시키지 않은 밀가루 빵이다. 빈대떡 같이 생겼다. 터키에서부터 중동, 인도, 중앙아시아, 중국 북서부까지 방대한 지역에 거주하는 사람들의 주식이다. 갓 구어 낸 난은 바삭바삭하면서 고소하여 많이 먹어도 물리지 않는다. 맥주를 몇 잔하고 난에다 꼬치를 싸 먹었다. 양고기의 느끼한 맛이 없어졌다.
열흘째 날
4월 20일, 월요일. 화청지(華淸池)와 병마용(兵馬俑)을 보러가기 위해 서안역 광장으로 나가 버스를 기다렸다. 어디를 가나 마찬가지였지만 이곳도 사람들로 크게 붐볐다. 행선지를 알리는 팻말 별로 사람들의 긴 줄이 구불구불하였다. 버스가 도착하자 새치기 하려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그러자 뒤에서 “파이두이, 파이두이!”하는 외침이 들렸다. 줄을 서라는 뜻이다. 어떤 청년은 새치기 하려는 사람을 잡아 끌어내기도 하였다. 기차를 탈 때나, 삭도를 탈 때나, 풍경구(風景區)를 들어 갈 때나 여기서는 줄을 서지 않으면 전쟁터가 될 것 같다. 서로 아귀다툼하느라고 다치기만 하고 목적은 달성하지 못하는 사태가 벌어질 것이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말썽 없이 살아가려면 상호양보와 상호존중은 실천하면 좋은 미덕(美德)이 아니라 지키지 않으면 안 될 규범(規範)이 되어야 할 것이다. 버스에 오르자 어떤 젊은이가 나를 보더니 벌떡 일어나 자리를 양보했다. 서울에서는 경험하지 못한 일이었다. 시내버스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대접을 서안에 있는 동안 계속 받았다. 마음이 착잡해졌다.
화청지는 실망스러웠다. 외곽을 으리으리하게 정비해 오히려 주인공이 초라해졌다. 일행이 또 물었다. “내가 본 화청지는 시골 연못이나 다름없었고, 장생전도 중학교 체육관만 했다. 장개석 총통이 연금되었다는 곳도 응접실이 딸린 별채에 불과하다. 모양으로 화청지를 보려한다면 차라리 들어가지 말고 이제까지 간직한 이미지를 살리는 것이 좋다. 모양은 바깥이 훨씬 좋다. 비록 장한가(長恨歌)의 비익조(比翼鳥)와 연리지(連理枝)를 억지로 흉내 냈지만.”
진시황병마용박물관(秦始皇兵馬俑博物館)은 10년 전 그대로였다. 외곽에 광장이 넓어졌을 뿐이었다. 두 시간이상 샅샅이 돌아보았다. 그때는 사진 촬영을 엄금해 카메라를 입구에 맡겨야 했는데 그 제한이 풀렸다. 인파도 작아 감상하기에도 좋고, 사진 찍기에도 편했다. 그 당시, BC 200년쯤이라면 한반도에는 아직 국가다운 국가가 출현하지 않았다는 것이 학계의 통설이다. 그런데 이곳에서는 거대한 통일제국이 나타나고 철기문화가 꽃을 피워 농업생산이 급증했다. 이 점은 말없이 서 있는 병마용들이 증언해주고 있다. 저렇게 크고 정교한 토기를 구워낼 수 있으면 돌에서 쇠를 뽑아내는 기술도 탁월했을 것이다. 토기들과 함께 발굴된 창과 칼 등 무기와 마구(馬具), 전차(戰車)가 이를 말해 주고 있다. 토용(土俑)들의 표정이나 자세도 똑 같은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 밝혀졌다. 평범한 토기장도 이정도인데 뛰어난 장인들의 솜씨는 어떠할지 쉽게 짐작이 갔다.
열하루 째
4월 21일, 화요일. 하늘은 맑았으나 더웠다. 소안탑(小雁塔)을 보러 갔으나 정기 휴일이었다. 서운해 하는 일행들에게 나의 기억을 전해주었다. “이곳은 천복사(薦福寺)라는 황실의 원찰로 황태자가 즉위하기 전에 머물러 살던 잠저(潛邸)였다. 대안탑(大雁塔)은 현장(玄奘)법사가 인도에서 가져온 불경을 보관하던 서고(書庫 Archive)이었고 이곳은 의정(義淨)법사가 가져온 경전을 보관하던 곳이다. 마당에 말고삐를 매어 놓던 돌기둥이 수십 개 서 있었는데 그 꼭대기에 새겨 넣은 짐승들의 모양이 아주 정교하고 익살스러웠다.”
섬서역사박물관(陝西歷史博物館 산시역사박물관))으로 갔다. 10년 전 모습 그대로였다. 서안에 오면 놓치지 말고 꼭 들러야 할 곳이 여기다. 선사시대의 유물부터 하(夏), 상(商), 주(周), 진(秦), 한(漢), 남북조(南北朝), 수(隨), 당(唐)까지의 정치, 경제, 생활 모습과 그 유물을 체계적으로 분류해 전시해 놓았다. 중국에서 공식 인정하는 시대구분과, 나라, 지역, 부족들의 명칭 등 공부 할 것이 한정 없다. 여기도 사진촬영 제한이 없어졌다. 처음 이곳에 와서 받은 충격은 이번에도 되풀이되었다. 상(商)대의 청동기와 토기, 당(唐)대의 비단과 그림, 불상, 옥을 다룬 솜씨에 탄성이 저절로 나왔다. 기술(技術 Technology)은 지금 보다 못하지만 기예(技藝 Art)는 그때가 한 수 위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이 좀 남아 대자은사(大慈恩寺) 행 버스를 탔다. 대안탑을 보기 위해서였다. 대자은사는 커다란 공원으로 바뀌었다. 주변에 있던 주택과 상점들을 모두 쫓아내고 광장 같은 거리를 조성했다. 현장법사(玄奘法師)의 동상이 앞마당에 서 있고 그 뒤 매표소 건물을 넘어 대안탑의 절반이 보였다. 외부 광장의 위세에 눌려 절도 탑도 초라해 보였다. 대부분의 절이 공부하는 도량이 아니라 구경거리로 전락 했다지만 그 위축된 모습에 마음이 아팠다. 북방불교에 바친 현장 등 역경승들의 공덕은 불멸이라 할 것이다. 그분들의 번역이 없었더라면 부처님의 가르침은 보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산스크리트 원전은 거의 다 멸실되어 남아 있는 것이 극히 드물기 때문이다. 증명사진이나 찍자는 일행의 제의에 군말 없이 동의했다.
마지막 밤
마지막 날이다. 서안성벽을 둘러본 뒤 오후에는 쇼핑도 하고 짐도 싸기로 하기로 하였다. 이곳에서는 서안성벽(西安城壁)이라 부르지 않고 서안성장(西安城墻)이라 부른다. 담장이라는 뜻이다. 후한의 광무제가 장안(長安, 西安의 옛 이름)을 버리고 낙양(洛陽)을 도읍으로 삼자 장안성은 퇴락했다. 이를 명(明)태조 주원장(朱元璋)이 1374년부터 1378년까지 5년에 걸쳐 현재의 모습으로 재건하였다. 아래 폭 18m, 위 폭 15m, 높이 12m, 총길이 13,7km의 장방형 형태이다. 중국에 남아 있는 옛 성중 보존상태가 가장 좋다고 한다. 성벽은 모두 벽돌로 차곡차곡 쌓아 올렸다.
성벽과 해자 사이는 꽃과 나무가 심어진 아기자기한 공원이었다. 그 옛날 병사들의 주검이 켜켜이 쌓였던 곳이다. 노인들이 이곳저곳에서 태극권도 연마하고 스포츠댄스도 즐기고 있었다. 탁구장도 있고, 전통악기로 민요를 들려주는 곳도 있었다. 해자에는 유람선이 손님을 기다리고 있고 혼인을 앞둔 예비부부가 기념 촬영하는 모습도 보였다. 역대 황제들이 고대하고 고대하던 태평성대의 모습이다. 이 성의 주문인 남문에 올랐다. 원래 이름은 영녕문(永寧門 영닝먼)이다. 영원한 평화가 들어오는 문이란 뜻이다. 문루에서 북쪽으로 종각이 보였다. 직선 도로가 뚫려 있고 양쪽으로 빌딩이 늘어서 있다. 동쪽의 문창문(文昌門)과 서쪽의 주작문(朱雀門)사이를 걸었다. 낡은 옛집의 모래톱 같은 검은 기와지붕이 초현대식 빌딩의 미끈한 몸체 사이에 끼어 있다. 자전거를 타는 사람, 전동차를 타는 사람, 우리 같이 걷는 사람, 어느 백인 청년처럼 반바지로 뛰는 사람 등 가지가지였다.
호텔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마트가 있었다. 넓은 매장에 옷과 식료품, 공업제품들이 골고루 진열되어 있다. 고객들이 별로 없어 한가했다. 카트를 밀고 다니며 각자 필요한 물건을 샀다. 주로 술과, 과자, 목이버섯 등이었다. 마트에서 돌아오는 길에 ‘경덕진 도자기 대처분, 지하철 공사로 폐업.’이란 붉은 글씨가 눈에 뜨였다. 경덕진(景德鎭 징더젠) 도자기는 한 때 유럽 귀족들의 품계를 정할 만큼 귀한 몸이었다. 지금도 그 명성은 녹슬지 않아 누구나 하나쯤 갖고 싶어 하는 명품이다. 가게에 들어서니 주인장이 졸다가 눈을 떴다. 양해를 구하고 진열대를 둘러보았다. 까막눈인 나에게도 모양이나, 두께, 색깔, 문양 등이 얇고, 정교하고 깨끗하였다. 가격표가 붙어 있는데 너무 싸서 믿어지지 않았다. “쩐더?(진짜냐?)”하고 물었더니 자기 명함을 보여주며 뭐라고 한참 설명을 하였다. 세관 통과가 어렵지 않느냐하였더니 그는 그냥 웃기만 하였다. 가짜라도 싸다는 생각에 꽃병하나, 물병 하나를 샀다.
저녁에 마무리 파티를 가졌다. 모두들 김 대표에게 감사를 드렸다. 이동 할 때 마다 김 대표의 도움을 받았으므로 제대로 된 배낭여행이라 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우리들로서는 색다른 경험이었다. 기차, 버스, 택시, ‘빵차’, 그리고 오토릭셔를 타 보았다. 그 중에 제일 악동은 오토릭셔였다. 오토바이에 리어커를 연결한 것인데 차도건 인도건 닥치는 대로 달렸다. 이들은 꽉 막힌 길을 피해 가는 선수들이었다. 하지만 너무나 위험했다. 패키지 관광을 했더라면 맛도 못 볼 경험이다. 고급 호텔에서 묵고, 리무진 코치를 타고 다니며 현지 안내원의 해설에 고개를 끄덕끄덕하는 것은 서울 집 거실에 앉아서 텔레비전을 보는 것과 차이가 없다. 그 곳 주민들과 살갗이 부딪치는 접촉이 없으므로 아쿠아리움(Aquarium)의 유리통로를 걸으며 바다 생물을 구경하는 것과 같다. 이제까지 그런 여행을 많이 따라다녔지만 이번과 같은 모험도 없고 경이도 없었다. 많이 느끼고, 많이 배웠다.
4월 23일, 목요일 새벽. 서안에서 함양(咸陽 시안양)비행장으로 가는 길은 상쾌했다 시내 도로에는 어느새 물을 뿌려 놓아 먼지가 일지 않았고 고속도로에 들어서자 유럽 어느 도시의 외곽을 달리는 것 같았다. 가로수 대부분이 꽃나무였다. 잇따라 나타나는 과수원에는 하얀 배꽃이 만발했다. 지나다니는 차도 없어 경쾌하였다. 비행기에 오르니 서안에서 청도까지 두 시간, 청도에서 인천까지 한 시간이었다. 열흘이틀동안 지나다닌 곳을 단 세시간만에 끝냈다. 집에 돌아오니 우리 집 마당 귀퉁이에도 모란이 만개했다. 이 모란도 아마 그 옛날, 신라 선덕여왕 때 낙양에서 시집온 것일 것이다. <文白. 2015년 5월 2일. 토요일>
첫댓글 인생 70객이 다녀온 중국--중원 여행기--대단한 도전이네여--축하...무사귀국요...요셉
멋진 여정~
잘 다녀 오셨네요.
여행기 잘 보고 한 줄 올리고 갑니다.
미소가 가득하신 상푸의 맨 위 사진도 좋습니다.
중등 국어 교사였는지요? 다음에 차분히 읽어야겠어요 글을 잘 쓰십니다 마춤법 띄어쓰기까지요
40년전 모 신문 기자분들 모임이랍니다 ㅎㅎ
배낭 여행을 즐겁고 안전하게 마친걸로 자화자찬 하고 있습니다ㅎㅎ
그리고
다른걸 몰라도 구련산 종주 트레킹 완주 만큼은 어디가셔 자랑하셔도 됩니다,,,^^
다시 감사의 말씀 드립니다. 벌써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대~단들 하십니다. 긍정적 마인드도요. 여행으로 노년을 즐겁고 행복하게 그리고 건강을 다지시길 빌어드립니다.
멋진 모습 보여 주셔서 꽃 보다 할배 생각을 하게 하는 감동입니다.
아! 멋집니다~~
친구분들께 두고두고 자랑할만한 멋진 여행을 하셨습니다~~^^
잘 보았습니다.
같이 여행하는 듯 빠져들어 순식간에 읽어 버렸네요.
언젠가 이 루트를 꼭 한번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후기 중 단연코 best 로 추천!
잘 읽었습니다.가 보고 싶은 코스이군요, 맛깔나는 필치 감사드립니다. 건강하게 생활 하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