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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의 포크이야기
 
 
카페 게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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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지기방 스크랩 오세은
포크촌장 추천 0 조회 121 06.02.19 22:05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몇해전부터 가요마니아들 사이에는 오세은의 '고아'가 수록된 음반을 찾는 숨바꼭질이 한창이다. 그를 기억하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창작곡도 아닌 끌로드 제롬의 샹송을 번안한 '고아' 음반을 왜 "자켓이라도 한번 봤으면 좋겠다"며 찾아 헤매는 것일까? 그의 음반은 신중현 사단의 김정미와 함께 고가 희귀판의 대명사로 슬그머니 이름을 올리더니 강한 전염병처럼 애호가들을 감염시키고 말았다.

건축업 등으로 청계천 일대의 상권을 쥐고 있던 부자집 막내아들(4남2녀)로 태어난 오세은. 초등학교 6학년때 기타에 빠져 대학생이 되었던 60년대말에는 이미 기사가 딸린 자가용을 타면서 풍요로운 음악생활을 했을 정도다.

그룹의 모든 악기를 소유한 재력은 물론이고 탁월한 기타실력은 주변으로부터 선망의 대상이었다. 음악에 빠져든 것은 클래식기타 교본을 저술하고 후에 서유석의 기타스승이 된 셋째형의 영향이 컸다. 포크가수로 알려진 그는 사실 한국 록그룹의 2세대쯤 된다.

1967년 대학시절부터 아이돌스, 훌라워스, 영바이블스, 라이더스, 메가톤스로 이어지는 그룹들의 리드기타 겸 보컬리스트로 미8군 무대에 섰다. 아이돌스 때는 베이스를 담당한 서울대음대 출신의 차남학이 오세은을 보컬로 픽업했다.

이때는 창작곡보다는 외국 팝송이 주 레퍼토리. 당시 대개의 록그룹들처럼 음반 출시보다는 밤무대 라이브에 치중했고, 메가톤스 시절인 1971년 에 낸 캐롤판을 포함해 2장의 음반이 그룹시절 음반의 전부이다.

60년대말~70년대초반의 대학가는 통기타 열풍지대. 오세은도 TBC모닝쇼 방송 출연과 명동의 OB's캐빈 등 일반 업소에서 이연실과 함께 통기타를 치며 포크 리듬에 휘말린다.

1972년 12월10일 대학시절 때 작곡한 곡을 모은 데뷔음반 <오세은 스테레오 선곡집- 지구,JLS120631>을 발표했다.

수록된 12곡은 모두 애잔하면서 우수에 젖은 편안한 멜로디의 포크곡들. 대표곡인 '친구야'는 낮고 느릿느릿한 곡조로 처음보다는 들으면 들을수록 감칠 맛을 낸다. 대학가에선 제법 인기있는 레퍼토리가 됐다.

여학생 잡지의 모델에 나설 정도로 잘생긴 오세은이 김포들판을 배경으로 찍은 근사한 자켓 사진도 사진이지만 여러 곡의 백보칼을 자신이 직접 불렀다는 사실도 흥미롭다.

듀엣같이 들리지만 사실은 오세은의 두 목소리를 더빙한 것. 기타연주도 마찬가지다.

1집은 사실 완벽한 음반은 아니었다. 사전검열에서 사회성 강한 대부분 곡들이 퇴짜를 맞아 상당부분의 가사를 개작하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그는 "당시는 곡을 쓰기가 겁이 났을 정도였다"고 회고한다. 첫 앨범은 록사운드로 연주하고 싶었지만 MBC FM측에서 한양대 장일남 교수에게 대중적 분위기의 멜로디로 1면 편곡을 맡겨 버렸다고 한다.

김민기 등 초기 대부분 포크 가수들의 앨범제작에 참여했던 PD 김진성은 '친구야'를 타이틀곡으로 밀었지만 제작자들은 상업적으로 포장한 '그날이 오면'을 택했다. 2면을 들어야만 오세은류의 덜 익어 풋풋한 포크향기에 그나마 취할 수 있다.

2집(1973년 출시)에선 데뷔 앨범때 느낀 음악적 갈증을 달래려 어설픈 포크를 버리고 친구들과 5인조 록그룹을 만들어 블루스 계열의 록음악을 시도했다. 주목할 것은 70년대말~80년대 거의 모든 다방이나 카페, 고고장에서 업소의 영업마침곡으로 사용했던 딕 페밀리(서생원가족)의 <또만나요>의 오세은 오리지널 버전.

'지금은 우리가 헤어져야 할 시간 다음에 또 만나요...헤어지는 마음이야 아쉬웁지만 다음에 다시 만나요' 빠르고 경쾌하게 재편곡해 히트한 1977년의 딕페밀리 버전이 다분히 상업적이라면 오리지널은 느릿느릿하면서도 끈적이는 블루스 버전. 언뜻 다른 곡으로 착각할 정도다.

<또만나요>는 오세은 작곡 노래중 가장 대중적으로 파고든 히트곡이다. 2집에는 정미조가 부른 '그사람'의 오리지널 버전도 함께 수록되어 있다.

문제의 음반 3집<고아-지구,JLS120845, 1974년4월8일>. 지구레코드녹음실의 대형 프랑스 여가수 사진을 배경삼아 찍은 공식 발매 자켓과 실루엣으로 처리된 변형 자켓 등 두가지 버전이 있다. '고아'는 PD 김진성이 프랑스 원판을 들려주며 권유, 번안하여 취입한 히트곡이지만 정작 본인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다.

'고아'는 사실 음악적으로 대단한 곡이 아니다. 그렇지만 우수어린 멜로디에 담긴 염세적 메시지를 전달하는 오세은의 여린 목소리는 가슴을 저리게 하는 마력을 갖고 있다. 숨겨진 명곡은 2면의 두번째곡 <당신>.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8분30초라는 롱버전의 블루스곡이다.

3집의 희귀성은 '고아'의 가사가 사회불신을 조장한다는 이유로 금지딱지가 붙여졌기 때문이다. 좌절감을 맛본 오세은은 새로운 음악을 찾기 위해 국악에 빠져 설악산의 심산유곡으로 홀연히 잠적해 버린다.



한번도 아내의 장바구니를 들어준 기억이 없는 오세은. 행여 무거운 짐을 들다 손을 다쳐 연주를 못하게 될까 두려워서였다. 그는 음악을 늘 인생의 최우선 순위에 둔 외골수 스타일이다.

3집까지 록과 포크를 모두 섭렵했지만 음악적 성취감 보다는 마음 한편에 마치 큰 구멍이 뚫린 것처럼 허전했다. 그래서 3년간의 설악산 생활은 심신을 맑게 하는 명상의 시간이자 새로운 음악을 탐구한 모색기간이었다.

1975년부터 국립국악원의 김중섭 선생으로부터 대금과 단소를 배우면서 우리가락에 눈을 떴고 이후 박동진 선생에게 창과 판소리, 단가를 이양교 선생에겐 시조를 배우면서 국악의 깊은 맛에 점점 더 빠져들게 됐다.

1978년 4인조 혼성포크그룹<해바라기>의 한영애가 솔로데뷔를 꿈꾸며 곡을 부탁하는 바람에 오세은은 은둔에서 벗어나 세상속으로 되돌아왔다. 2,3집 시기에 만들어 놓은 '작은 농산'과 설악산 생활 때 만든 '설악산' 등 9곡으로 한영애의 솔로데뷔음반 <한영애 작은동산-유니버샬 SIS78105, 1978년12월>을 제작했다.

이 앨범에서 오세은이란 이름 석자는 어디에도 찾을 수가 없다. 금지된 3집이후 검열의 무게 때문에 모든 곡을 김동운, 우성삼 등 친구 이름으로 발표했기 때문이다.

한영애가 공식1집으로 주장하는 <여울목-서라벌. 1986년>에서는 그가 2곡을 작곡하고 기획, 편곡, 코러스, 연주까지 참여했다. 한영애의 끈적이는 느릿한 창법이 오세은의 그것과 흡사한 것도 이런 연유 때문이다.

4집<노래하는 나그네-한국음반 HC200122, 1981년12월24일>은 6년간의 음악 공백을 깨뜨린, 당시로서는 일반에게 생소한 국악가요앨범이다. 타이틀은 원래 '거리의 악사'였지만 왠지 모르는 가위눌림이 '노래하는 나그네'로 순화시켰다고 한다.

외국의 아트록 앨범 자켓을 능가하는 멋진 추상화 자켓은 홍익대 미대를 나와 경주대 미대학장을 역임한 김명호 교수의 작품. 자켓만으로도 4집은 마니아들의 시선을 끌어당기기에 충분하다.

대표 곡은 '노래하는 나그네'이지만 다운타운가에선 '여행'이 DJ연합회 인기차트 3위까지 오르고, 라디오방송의 주요 레퍼토리였을만큼 히트했다.

그러나 정작 본인은 "4집은 국악을 배우면서 산조를 마스터하지 못해 완벽한 수준이 아니었다. 열심히 했지만 깊이 있는 연주보다는 대중가요적인 노래 위주의 창법에 머물러 아쉬웠다"고 겸손해 한다.

4집의 10곡은 국악의 5음계 가락을 오세은의 기타, 손학래의 라이어콘, 박훈의 베이스, 김명곤의 오르간, 알토 섹소폰, 배수연의 드럼, 타악기 등 서양악기에 접목을 시도한데 의미가 있다.

재미있는 것은 2면 끝에 건전가요로 아예 <애국가>를 넣어버린 오세은식의 세상 비꼬기다.

4집을 내면서 그는 서양악기로 국악을 완벽하게 표현하기엔 실력이 모자란다는 사실을 절감했다. 그래서 어설픈 음반 발표보다는 7년동안 국악배우기에 혼신의 힘을 쏟는다.

또한 1983년에는 블루스록 연주에 필수적인 블루그라스 기타주법에 관한 교본을 집필하여 보급에 앞장섰다. 블루그라스는 에릭 클랩튼 등 서양의 대부분 일류 기타리스트들이 구사하는 주법으로 국내에서는 오세은이 독보적인 인물로 알려져 있다.

한국적 가락이 한층 농익은 5집<남사당-서라벌SKJY90008, 1988년8월8일>은 10여년을 국악에 몰두한 오세은 음악의 결정판이다. 서양 악기로 표현한 우리 국악의 5음계는 가슴 떨리는 감동을 줄 정도.

"태산이 높다하되 하늘아래 뫼이로다..." 오세은이 읊어대는 시조가락. 한영애, 이보임의 보컬과 어우러진 강강술래가 진양조, 중모리, 자진모리, 휘모리 등을 자유자재로 넘나들땐 현란한 환상음악 특급 그 자체이다.

진도아리랑, 한오백년의 오세은식 해석도 새롭다. 이 불후의 명반에서 압권은 아리랑블루스와 타령3,2,1. 가장 어려운 영산회상곡인 타령1, 경복궁타령 같은 일반적 타령을 타령2로, 가장 쉬운 각설이 타령인 타령3을 감상자들을 위해 쉬운 곡 우선으로 역순배열을 했다.

5집<남사당>에 왜 마니아들이 열광할 수밖에 없는가에 대한 정답. 이처럼 깊이있는 대중가요는 유래가 없다.

그의 음악은 정당한 평가를 받아야만 한다. 미발표 상태지만 판소리 완창에 버금가는 기타산조 연주음반의 완성으로 음악적 갈증은 어느 정도 해갈하였다. 그는 기타산조를 위해 앰프기타를 버리고 클래식 기타에만 전념했다.

최근 일본의 음악 제작자들이 자주 찾아오긴 하지만 상업적 농간에 환멸을 느껴 음악적 의욕이 많이 사라진 상태다.

요즘은 컴퓨터로 듣는 전세계의 새로운 음악듣기에 푹 빠져있다. 새롭게 시도하고 싶은 음악이 있다면 국악에 기초해 재즈와 접목한 테크노와 정통 블루스. 전설적인 인물이지만 베일에 가려있는 오세은. 그가 진정한 평가를 받아 다시 음악에 정진할 수 있도록 우리 가요계의 변화를 기대해 보는 것은 아득한 꿈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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