품위가 있는 죽음은 국가와 사회에 과연 얼마만한 가치가 있는가?
안락사[安樂死, euthanasia], 허용되어야만 하는가?
2006년 가을, 독일의 대표적인 시사주간지 『슈피겔』은 알렉산더 니히트와 그의 어머니의 숙명적인 삶을 보도하였다. 사건은 2002년 10월의 어느 날 밤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베를린에서 고등학교졸업 자격시험을 치르던 수험생 한 사람이 자동차에 치어 두개골에 중상을 입고 중환자실에 실려 갔다. 학생에게는 아무 잘못이 없었다. 두개골이 부서졌고 대뇌의 대부분이 손상을 입었다. 어떻게든 치료방법을 찾아보려고 애를 썼지만 손을 댈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거의 4년 동안 알렉산더는 혼수상태에서 깨어나지 못했다. 말을 걸어도 반응이 없었고 정상적인 의식을 다시 살릴 수 있는 가능성은 전혀 없었다. 어머니의 입장은 명확하였다. 아들이 이런 식으로 계속 살고 싶지 않을 것이란 것이 그녀의 의견이었다. 그러나 베를린의 주치의들은 알렉산더의 삶을 인공적으로 계속 붙잡아두기 위해 의료장비를 계속 가동시켰고, 자신의 주장을 조금도 굽히지 않았다. 어머니는 법원에 몇 년째 소청을 하였지만, 그녀의 소원을 거절하고 있는 법원의 태도도 완고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법원의 입장은 단순한 것 같지만 그 내막을 조금만 깊이 들여다보면 매우 복잡하였다. 독일의 의사들은 환자의 의사에 반해서 그의 삶을 인공적으로 연장할 수 없도록 되어 있지만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다. 혼수상태에 빠져 있는 환자의 경우에 의사는 도대체 어디에서 그러한 의사를 확인한단 말인가? 자신의 아들은 이러한 상황에서는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을 것이라는 어머니의 의견을 묵살하고 의사들은 알렉산더를 계속 인공적으로 살려놓는 것 이외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깨어날 수 없는 혼수상태에 빠진 환자들을 다루어야 하는 경우에 얼마나 많은 어려운 문제들이 서로 얽혀 있는지를 잘 알 수 있다. 법적인 판단과 윤리적인 고려, 뿐만 아니라 죽음에 임박하거나 깨어날 수 없는 의식불명 상태에 빠진 인간들의 의사표시 및 권리행사에 관련된 문제 등이다. 이러한 문제가 발생하면 이에 대해 의견을 제시할 권리는 누구에게 있고, 결정을 내리는 것은 누구에게 허용되는가? 그리고 이러한 과정에서 의사의 행동반경은 과연 어디까지일까? 죽음에 직면한 환자들의 치료를 중단함으로써 그들이 자연적인 죽음을 맞이하도록 하는 일이 의사에게 허용되어 있을까(수동적 안락사)? 모르핀 같은 강력한 진통제를 사용하는 경우에 이것 때문에 환자가 보다 빨리 죽을 수도 있다. 의사는 이러한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환자의 고통을 일단 덜어주는 것이 허용되는가(간접적 안락사)? 의사는 환자의 분명한 의사표시에 따라 스스로의 삶을 종결시키는 것을 도와주어도 좋을까(자살행위에 대한 조력)? 마지막으로 의사는 환자의 소청에 따라서 약품 또는 독극물 등을 통하여 그를 죽여도 좋을까(능동적 안락사)?
독일에서 가장 명확하게 법적인 조치가 취해지는 경우는 능동적인 안락사이고, 이는 처벌 대상이다. 독일연방공화국 형법 제216조는 ‘상대방의 요청에 의한 살인’에 대해서 규정해놓고 있는데, 그 내용은 “피살자의 명시적이고 진지한 요청에 의해서 살인을 저지른 자는 6개월 이상 5년 이하의 징역형에 처한다”는 것이다. 만일 의사가 환자로부터 명시적인 동의를 받지 않고 그의 죽음을 결정하였다면 살인죄로 엄중한 처벌을 받을 수도 있다는 의미이다. 형법 제216조는 시민의 입장에서 보면 자신의 그릇된 판단으로부터 시민 스스로를 보호하는 기능이 있을 뿐만이 아니라, 누군가가 개인적인 이유로 다른 사람을 죽여놓고서 법정에 나서서는 피살자 스스로가 원했던 일이라고 항변하지 못하도록 아예 쐐기를 박아두고 있다. 법에 이러한 바리케이트를 쳐두는 것은 분명 의미가 있는 일이지만, 과연 모든 경우에도 유의미한 것인지는 더 논의해보아야 한다.
유럽 각 나라들의 법적인 기준들은 서로 다른 양상들을 보여주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능동적인 안락사를 직접적으로 허용하고 있는 나라는 지금까지 단 한곳도 없다. 간접적인 허용이 이루어진 경우는 2001년 네덜란드와 2002년 벨기에에서 확정된 판례를 통해서였다. 능동적인 안락사가 지속적으로 금지된다는 점은 이전과 마찬가지였지만, 특별한 상황이 입증되는 경우에는 선고유예를 함으로써 형을 면제해주는 것이 관례였다. 네덜란드의 수많은 의사들은 늦어도 1969년 이후부터 비공식적으로 능동적인 안락사를 시행하였기 때문에 네덜란드의 법원은 이러한 현실을 일차적으로 감안하였고, 또 다른 한편에서는 국민들 중에서 과반수 이상은 공식적으로 안락사를 반대한다는 정황을 무시하지 않는 판단을 내린 것이다. 2001년 이후로 네덜란드 의사들에게는 다음과 같은 경우를 모두 충족시킬 때에 한해서 능동적인 안락사가 허용되고 있다. ①환자가 이를 명시적으로 요구하는 경우, ②또 다른 의사가 조언자와 증인의 자격으로 참여하는 경우, ③의사가 자신의 행위를 검찰에 신고하여 해당기관이 안락사의 과정을 감찰할 수 있도록 만든 경우이다.
능동적인 안락사를 허용하거나 처벌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지닌 사람들에게 중요한 논쟁 대상은 자기결정권이다. 자기를 책임질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삶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도 의사 결정권을 갖는다는 주장이다. 독일의 현행 기본법을 여기에 맞게 해석해보면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규정이 여기에 해당될 것이다. 삶에 대한 자기 결정권이 인정된다면 죽음에 대한 권리도 마찬가지라고 봄이 마땅하다는 해석이다. 여기에서 흥미로운 사실은 능동적인 안락사를 찬성하는 사람뿐만 아니라 반대하는 사람도 칸트를 논거로 내세우고 있다는 점이다. 반대론자들은 칸트가 주장한 것처럼 인간은 목적 그 자체이기 때문에 인간의 삶은 무조건적인 ‘불가침성’을 지니고 있고, 따라서 인간 그 자체를 떠나서 어떠한 명목으로 ‘합목적적으로’ 이용되지 못한다. 능동적인 안락사는 다른 사람을 죽이는 권능이 누군가에게 부여되었다는 의미인데, 이를 반대론자의 입장에서 다시 해석해보면, 인간은 자기 스스로에 대한 자유로운 의사결정을 포기하고 자신의 삶에 대한 처분을 남의 손에 맡긴다는 뜻이고, 이는 자유로운 인간이 다른 사람의 처분에 따라서 그 운명이 결정되는 목적물이 된다는 것이다. 프라이부르크 비교형법학 명예교수인 알빈 에저는 이를 두고 인간을 ‘합목적화’ 시킨 결과라고 잘라 말하고 있다. 그러나 칸트의 논리를 출발점으로 삼고 있는 이 논쟁의 초점은 확고한 내용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예를 들면 내가 완전히 자유로운 상태에서 자살할 것을 결심한 경우와 내가 병상에 누워서 몸을 움직일 수 없는 상태이기 때문에 나를 대신해서 나를 죽여 달라고 누군가에게 부탁을 한 경우가 있다고 하자. 이 두 경우 사이에 실질적인 차이는 과연 무엇일까? 나의 자유로운 의사에 반하여 나를 살려두는 사람이 나를 오히려 ‘합목적적으로’ 상대한 것이 아닐까? 우리가 알고 있기로는 칸트 자신도 나이가 들면서 치매를 몹시 두려워하였고, 치매가 걸린 삶은 그에게 더 이상 가치와 의미가 없다는 결심을 이미 세워두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시대에는 간접적인 안락사와 같은 근대적인 처치방법도 이용되지 않았고, 알츠하이머나 치매의 경우에는 치료를 중단한다 해도 이것이 직접적인 사망원인이 되지 않았다. 이러한 점을 모두 종합해보면 칸트는 적어도 자기 자신에 대해서 능동적인 안락사를 적용할 일이 발생하면, 이에 찬성하는 입장이라고 할 수 있다.
능동적인 안락사를 허용해야 한다는 주장이 통계조사를 기초로 해서 제기되고 있지만, 그러한 주장의 신뢰성은 여전히 회의적이다. 능동적인 안락사에 대한 권리를 요구하는 ‘인간적인 죽음을 위한 독일 협회’는 매년 여론조사기관을 통해 설문조사를 실시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현재 약 80퍼센트의 독일인들은 능동적 안락사를 허용해주어야 한다는 입장이다. 이 조사를 의뢰한 협회 입장에서 보면 이러한 결과는 매우 고무적이고 명백한 시그널이었다. 사람들이 원하는 것이 확실해졌으니 이제 정치가들이 최종적으로 이를 현실화시켜주면 되는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도덕적인 요청으로서 통계자료를 사용하는 것은 절대적인 기준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참고자료에 불과하다. 예를 들어보자.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동성애자에 대한 거부감이 독일 전역에서 들끓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여론에 근거하여 1960년대처럼 동성애자들을 구속하여 처벌해야 한다는 주장을 과연 내놓을 수 있을까? 2001년 9월 11일에뉴욕의 세계무역센터와 워싱턴의 국방부에 대한 여객기 테러 사건이 일어났다. 그 직후에 설문조사를 하여 독일에 살고 있는 신앙심이 강한 이슬람교도들을 추방해야 옳은지를 물었다면 아마도 찬성이 절반을 넘겼을 것이다. 그러나 똑 같은 조사를 오늘 다시 한다면 그 반대의 결과가 나올 것이 분명하다. 설문조사의 결과는 피조사자들의 격정을 반영할 뿐만이 아니라 질문의 성격에 따라서 매우 큰 영향을 받는다. 능동적인 안락사를 거부하는 ‘독일 호스피스 재단’이 통계 조사기관에 의뢰하여 4년 전에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질문의 형태를 약간 다르게 해보았다. 피조사자에게 능동적인 안락사의 찬반만을 중점적으로 묻는 것이 아니라, 고통 완화 의학의 수단과 방법론을 설명해주고, 이를 알고 있는지도 같이 물어보았다. 고통 완화를 의미하는 단어 ‘팔리움 Pallium’은 라틴어로 원래 외투를 의미하지만 환자의 고통을 치료해주는 것이 아니라 덮어준다는 뜻으로 전이되어, 보통 완화라고 번역되고 있다. 고통 완화 의학은 죽음이 임박한 환자들의 처치 및 간호 방법을 총망라하고, 환자들의 증상을 가능한 한 완화시켜서 살아 있는 순간까지 고통이 없이 살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 그 목표이다. ‘독일 호스피스 재단’의 설문조사 결과는 ‘인간적인 죽음을 위한 독일 협회’의 것과 비교하면 전혀 다른 양상을 보여주었다. 능동적인 안락사와 고통 완화 의학, 두 가지를 모두 알고 있던 피조사자들 중에서 능동적인 안락사에 대해 찬성을 한 비율은 35퍼센트도 안 되었기 때문이다. 나머지 56퍼센트의 피조사자들은 고통 완화 의학을 병원에서 보다 강하게 적용하기를 희망하였다. 한 사회의 행복과 고통의 수치를 알아내기 위해 통계의 도움을 받고 있는 공리주의자들 입장에서 보면 설문조사의 신뢰성은 상당히 미묘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독일에서 능동적인 안락사 허용과 관련된 세 번째 논쟁은 현행법이 지닌 모순에서 비롯된다. 독일에서 매년 사망하는 사람 숫자는 80만 명에서 90만 명에 달하는데, 그 중에서 적어도 3분의 2는 병원과 양로원에서 사망하고, 가까운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집에서 죽는 경우는 극소수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들 가운데 의사 또는 호스피스의 능동적인 조력을 받으며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는 것 같다. 최근 10년 동안에 300명이 넘는 독일 사람들이 돌아오는 항공권을 끊지 않고 스위스로 죽음의 여행을 떠났다는 것이 그 반증이다. 이들은 ‘디그니타스Dignitas’ 또는 ‘에그지트 Exit’와 같은 안락사 협회로부터 일정한 절차에 따라서 독극물을 입수하고, 이를 스스로에게 투여하여 품위가 있는 죽음을 맞이하였던 것이다. 법적인 개념을 따져보면 이들은 스스로의 “자살에 대해서 부차적인 도움”을 받은 것으로 되어 있다. 스위스와는 달리 독일의 경우에 자살에 도움을 주는 행위가 허용된다는 법조문도 없지만 그렇다고 금지되어 있다는 문구 역시 찾아볼 수 없다. 게다가 치명적인 독극물의 판매가 곧바로 능동적인 안락사를 주도했다는 혐의로 연결되지도 않는다. 일명 청산칼리로 알려진 독극물 시안화칼륨의 판매자를 처벌할 수 있는 유일한 규정은 마취제법 위반이다. 독일의 사법당국은 이것 때문에 현재 딜레마에 빠져 있다. 상업적인 목적을 지닌 안락사 협회의 사업내용은 범죄 혐의가 높은 것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자살을 취급하는 사업을 근본적으로 금지시키는 법안도 사실상 없기 때문이다. 마인츠 대학교의 법철학 전공교수 노어베르트 회어슈터의 의견에 따르면 사법당국이 능동적인 안락사 문제에 구체적으로 개입하지 않았기 때문에 법에 구멍이 뚫린 것이다. 회어슈터는 안락사를 허용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단, 그 전제로 안락사가 환자의 자유로운 의사에 따라서 진행된다는 것을 실질적으로 보증하는 절차가 어떻게든 마련되어야만 하였다. 그는 다른 사람의 자살을 유도하거나 후원한 자는 5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는 법규를 동시에 신설하자고 제안하였다. 안락사가 환자의 완전한 자유의지에 따른 것인지는 아무리 검증해도 모자랄 수 있기 때문이었다. 회어슈터의 안락사 허용 주장은 본질적으로 선호 공리주의 원칙에 근거를 두고 있고, 이러한 점에서 또 다른 제2의 기준을 제시하고 있다. 안락사를 원하는 환자의 소망과 의도도 중요하지만, 주변에서 이것을 도와주고 있는 사람들의 동기도 이에 못지않은 고려의 대상이라는 것이다. 누군가가 어떤 일을 하도록 유도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동기가 분명히 있는 것이고, 그러한 동기도 각각 다를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리주의는 어떤 행위의 동기는 제쳐두고 오로지 결과만을 고려하고, 이는 공리주의의 대표적인 결함이다. 전쟁 중에 직속상관의 명령에 따라서 수백 명의 사람을 죽인 군인과 자신의 탐욕을 채우기 위하여 힘없는 노파를 때려서 죽인 범죄자 중에서 누가 더 악질적인 살인자일까? 당사자나 사회 일반의 입장에서 결과만을 따지고 드는 도덕은 지나치게 근시안적이다.
거의 대부분의 선호 공리주의자들은 능동적인 안락사를 하나의 권리로 인정하고 있다. 이 문제의 당사자, 즉 통상적인 경우에 죽음이 임박한 환자에게 이익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리주의에 반론을 펴는 사람들은 당사자의 범위를 놓고 논쟁을 벌이고 있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수동적 안락사와 간접적인 안락사를 먼저 살펴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수동적인 안락사는 환자의 요구와 일치하는 경우에 독일에서 허용되고 있다. 의사는 환자의 의사에 반해서 그의 생명을 인공적으로 연장시킬 수 없도록 되어 있지만, 알렉산더 니히트의 사례에서 볼 수 있었듯이 의식불명 상태에 있는 환자의 의사 확인이 문제가 되는 경우에는, 당사자는 의사표시 불능상태이기 때문에 이해 당사자의 폭이 갑자기 넓어져서 복잡한 문제를 발생시키고 있다. 간접적인 안락사 역시 독일에서 허용되고 있다. 간접적인 안락사에서 가장 빈번하게 사용되는 방법은 “임종으로 편안하게 인도하기 위한 진정제 투여”이다. 고통 완화 의학에서와 마찬가지로 죽음을 눈앞에 둔 환자들에게 견딜 수 없는 고통이 찾아오면, 모르핀과 같은 진통제를 다량 투여하는 것이다. 물론 치료가 아니라 고통을 마취시키기 위한 방법이기 때문에 대부분의 환자들은 혼수상태에 빠져든다. 의사들은 환자가 살아 있는 마지막 며칠 동안이라도 그의 삶이 가능한 한 견딜 만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하지만 충분한 수분을 공급해주지는 않는다. 환자의 몸에서 수분을 급격하게 고갈시키면서 고통 완화 요법을 사용하면 환자는 보통 2,3일 후에 수분 부족으로 사망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간접적인 안락사 방법은 고통 완화 의학의 발상과 일치하고 능동적인 안락사와는 확연하게 구분되고 있다.
임종을 앞둔 환자에게 진통제를 투여하는 것은 특히 호스피스 병원에서 통상적으로 사용하는 방법이고, 안락사를 위한 인간적인 대안으로 이해되고 있다. 독일에서도 진통제 투여는 간접적인 안락사에 통상적으로 사용되는 방법이지만, 실제적인 처방은 베일에 가려져 있다. 간접적인 안락사를 위한 진통제 투여 환자의 숫자도 알려져 있지 않고, 이러한 환자를 별도로 신고할 의무도 없다. 이론적으로는 간접적인 안락사 방법이 사용된다고 하지만 그 실제를 따져보면 이것이 언제나 능동적인 안락사와 완벽하게 구별되지는 않기 때문에 불명확한 경우가 적지 않다. 예를 들어 간접적인 안락사를 공공연하게 오용하여 사회적인 물의를 일으킨 몇몇 사건들이 최근 수년 동안에 발생하였는데, 환자들이 진정으로 무엇을 원하는가가 항상 문제였다. 과다한 진통제 투여로 치료가 사실상 중단되고, 그 상태에서 고통이 완화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는 것을 환자들이 제대로 알고 있는지, 그리고 그들이 진정으로 그러한 죽음을 원하는지를 확인하고 검증하는 절차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독일에서 현재 진행되고 있는 간접적인 안락사의 수는 적어도 수천에 달할 것이라고 추산된다. 그러나 이러한 확인 절차가 없는 간접적인 안락사의 경우는 충분히 검증된 절차에 따라서 진행되는 능동적인 안락사보다 더 위험할 수도 있다는 것이 전문가의 의견이다.
법치국가에서 능동적인 안락사의 허용과 통제를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가장 중요한 논거로 토론되고 있다. 전체적인 내용을 파악하기 위해서 다시 한 번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①능동적인 안락사에 대한 요구는 자유로운 인간의 기본권이고, 자기결정권의 일부이다. ②독일 국민들은 대부분 능동적인 안락사의 합법화에 찬성하고 있다. ③능동적인 안락사는, 자살에 대한 조력 및 간접적인 안락사에 비하면, 그 절차 및 진행과정이 보다 투명하고 검증도 더욱 용이하기 때문에 수단으로서 허용되어야만 한다.
위에서 언급한 3가지 논거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반론들이 제기 되고 있다. 이들은 능동적인 안락사의 허용에 반대하는 입장이다. ①능동적인 안락사가 허용된다는 사실 자체가 상황에 따라서 환자와 의사 사이의 신뢰관계를 깨뜨릴 수도 있지 않은가? ②능동적인 안락사는 의사들은 ‘도와주고 치료해주는 사람’이라는 사회 도덕적인 통념에 위배되는 것은 아닌가? ③환자가 능동적인 안락사를 원한다는 것을 완벽하게 검증할 수 있는 실질적인 방법이 과연 있는가? ④능동적인 안락사를 합법화시키는 경우에 우리 사회는 죽음에 임박한 환자를 어떻게 다루는 것이 마땅한지를 근본적으로 새로운 각도에서 문제 삼을 수밖에 없고, 그럴 경우에 우리의 공동체적인 삶의 조건들이 손상되지 않겠는가? ⑤능동적 안락사는 우리 사회에서 안전장치 역할을 하였던 ‘댐의 붕괴’로 이어지지 않으리란 보장이 어디 있는가? 능동적 안락사의 합법화는 이 방법을 사용할 것을 간접적으로 강요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의미이다. 예를 들면 보호자들을 만족시키거나 또는 의료보험의 부담을 덜기 위한 수단으로 능동적 안락사가 전락할 수 있는 개연성이 있는 것이다. ⑥ “죽음을 선택할 자유”가 조만간에 “삶에 머무는 것이 눈치가 보이는 부자유”로 변질되지 말란 법이 있는가? ⑦능동적인 안락사의 허용은 많은 비용이 들지만 보다 인간적인 대안이 되는 의료정책, 예를 들면 고통 완화 의학에 대해서 보다 많은 투자를 포기하는 결과를 가져오지 않을까?
위의 반론 중에서 의사와 환자의 관계를 다루는 ①과 ②에 대해서는 곧바로 답을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질문들은 철학적인 문제가 아니라 개인의 심리적인 상황에서 파생되었고, 동일한 상황은 없다. 능동적인 안락사의 가능성이 상존할 경우에 의사와 환자가 서로를 부담스러워하는 관계로 변할 수 있는 개연성은 있지만,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그 밖에도 능동적인 안락사가 허용되는 경우에도 환자를 죽이는 것을 의사의 책무로 생각하거나 이를 강요당하는 느낌을 갖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③과 ④는 보호자에 의한 능동적 안락사가 오용될 수 있는 가능성을 문제 삼고 있는데, 이는 근본적으로 입법 및 사법 당국의 능력과 관련이 있다. 과연 해당기관들이 법적인 장치를 물 한 방울 샐 틈이 없을 정도로 촘촘히 만들어서 최대한의 투명성을 보장해낼 수 있느냐가 문제이다. ⑤와 ⑥은 넓은 의미에서 철학적인 문제이다. 능동적인 안락사가 불러오게 될 사회적인 변화와, 죽음이 임박한 환자에게서 능동적인 안락사의 선택을 기대할 수 있는 상황은 거꾸로 환자에게 일종의 압박이 될 가능성을 부각시키고 있다. 문제의 중심에서 특히 사회 윤리적인 차원이 논의되는데,이는 안락사 논쟁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안락사의 허용이 가져오게 될 사회적인 변화를 어떻게 평가하고 미리 대비하고자 하는가? 네덜란드의 경우를 보면 2001년 이후 능동적인 안락사의 실제 현황을 다룬 3개의 대규모 연구가 보고되어 있다. 네덜란드의 병원에서 삶을 마감하는 환자의 숫자는 매년 14만 명에 달했는데, 이 중에서 약 4,500명은 의사의 약물주사로 능동적인 안락사에 곧바로 도달한 경우였고, 이보다 약 4배가 많은 숫자의 환자들은 과도한 진정제를 투여하여 간접적인 안락사에 이르렀다. 이 두 가지 경우로 죽음에 도달한 환자의 숫자는 해마다 변화가 거의 없었다. 능동적인 안락사의 권리를 찬성하는 사람 수가 상존하고 있다는 것이 입증된 셈이다. 사회적인 ‘댐의 붕괴’는 기우에 지나지 않았다. 스스로의 요청에 의해 의사 손에 죽음에 이른 환자의 수는 그 사이에 전혀 증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능동적 안락사 허용에 적대적인 사람들도 이 보고서에서 반대의 빌미를 찾아내었다. 명쾌하게 해명할 수 없는 경우가 매년 몇 건씩 발생하여 결국 보호자와 병원 사이에 법적인 분쟁으로 발전하였기 때문이다. 수많은 비판가들은 이 밖에도 미신고 된 안락사가 더 있으리라고 추측하였고 그 숫자는 짐작할 수도 없기 때문에 통계에 잡히지 않았다고 주장하였다. 현재까지 나와 있는 의학적인 자료들을 종합해보면, 안락사와 관련한 윤리 전반에 관해서는 명확한 언급을 찾아볼 수 없는 실정이다.
이제 ⑦의 반론을 검토해볼 차례가 되었다. 능동적인 안락사를 합법화하는 경우에 비용이 많이 드는 대안을 포기하는 결과가 나타날 것이라는 것이 반론의 요지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독극물 주사보다는 고통을 완화시켜서 죽음을 맞이하는 요법이 보다 나은 선택이라고 직관적인 의견을 내놓을 것이 분명하다. 이러한 직관적인 감정은 인간의 본성에 깊게 뿌리를 박고 있다. 똑 같은 결과에 도달한다고 해도 수동적으로 방임해서 당사자가 죽는 것과 능동적으로 그를 죽이는 것은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나는 것이다. 따라서 살인에 가담하지 말라는 기본적인 금칙은 “인간의 삶은 신성하다”는 종교적인 도그마에서 비롯된 결론이 아니다. 오히려 종교적인 도그마는 인간의 기원에서 시작되어 현재까지 이어지는 직관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고 봄이 타당하다. 따라서 인간의 삶에 ‘신성’이 사라진 원인이 오늘날의 종교가 노쇠한 데에 있다는 진단은, 근거가 매우 약하다고 할 수 있다. 모든 시대와 문화를 들추어보면 무차별적인 살인을 저지른 적이 많은 것 같지만, 그런 것은 사실상 예외에 불과하다. 살인을 망설이는 것은 매우 자연적인 현상으로 기독교 자체보다도 오히려 역사가 더 길기 때문이다. 능동적인 안락사의 권리를 찬성하는 사람들도 대부분 능동적인 행위와 수동적인 방임 사이에 의미상의 차이가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 이들은 직접적인 안락사 방식을 아무리 많이 비판한다고 해도 독극물 주사가 근본적으로 더 나은 방법이라는 주장까지는 삼가고 있다. 능동적인 안락사는 그 밖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는 확신이 섰을 때에 비로소 동원할 수 있는 마지막 수단,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닌 것이다.
지금까지의 논의를 중심으로 우리는 두 가지 결론을 도출해낼 수 있다. 첫째로 국가는 고통 완화 의학을 후원하고 간접적인 안락사를 가능한 한 인간적이고 투명하게 시행하는 데에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만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선 당장의 고통을 못 이겨 능동적인 안락사를 원하는 일이 없도록 만들어야 한다. 불치의 병에 심한 고통을 받는 사람들이 인생의 마지막 며칠 동안에 겪는 결정적인 문제는 의학적인 것이 아니라 심리적인 것이다. 따라서 한편에서는 자신의 죽음을 스스로 결정한 한 인간의 권리를 있는 그대로 진지하게 받아들여야겠지만, 이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그러한 결정이 내려지게 된 상황들을 또 다른 한편에서 면밀하게 검토하는 일이다. 능동적인 안락사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환자의 권리가 제대로 충족되었는지에 있다기보다는, 오히려 죽음을 결심하도록 만든 인생의 상황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고통 완화 의학은 의사와 환자 모두에게 보다 인간적인 선택이 된다.
두 번째의 결론을 이야기해보자. 만일 능동적 안락사가 허용된다면 죽음 밖에 출구가 없는 몇몇 경우에는 마지막 수단으로서 능동적 안락사가 곧바로 ‘정상적인’ 수단이 되는 사태가 발생할 것이다. 이러한 상황이 되면 보호자들은 죽음에 임박한 환자에 대한 수고를 가능한 한 빨리 덜려고 할 것이고, 병원은 병원대로 마지막 며칠 또는 몇 주 동안 환자를 가능한 한 고통이 없도록 만들려는 노고를 별도로 기울이지 않아도 될 것이다. 네덜란드에서 작성된 연구보고서의 통계가 이러한 불안을 입증해주지는 않았지만 거의 모든 유럽 국가들의 건강의료 재정이 파산 지경이라는 것을 감안해보면 자신의 죽음에 대한 자기결정권이 역으로 작용할 개연성은 얼마든지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능동적인 안락사가 허용되는 경우에 환자가 죽음을 선택하면 적어도 의료보험에 더 이상 부담을 주지 않게 되고, 이러한 사회적인 기대치는 묵언의 압력이 되어 환자에게 되돌아가는 것이다.
건강보험정책의 예산을 끊임없이 절감하려는 시대에서 결정적인 질문은 품위가 있는 죽음은 국가와 사회에 과연 얼마만한 가치가 있는가로 압축된다. 이러한 문제의식 아래에서는 자신의 죽음에 대한 인간의 자기결정권이 라는 논쟁은 상대적인 것이 되고 만다. 독일 병원에서 수동적, 간접적 그리고 능동적인 안락사가 실제로 어떻게 적용되고 있는지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지만 어떠한 경우이건 간에 법철학 및 도덕철학적으로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 있는 능동적인 안락사보다는 나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