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니엘은 하나님의 얼굴인데 |
김성호씨가 크게 빛을 들어내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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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1.01 통권 566 호 (p206 ~ 2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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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호택 기자가 만난 사람] |
‘특별수사’ 대부 김성호법무부 장관 |
“검찰 내 ‘썩은 사과’ 솎아내고, 마구잡이 ‘떼법’ 반드시 뿌리 뽑는다” |
눈물의 부산중 입학금 5300환
▼ ‘헌법 위에 떼법’이라는 속언이 있지 않습니까. 우리 사회에 법을 무시하고 집단의 힘으로 억지를 부려 목적을 관철하는 ‘떼법’이 성행하고 있습니다. “미국 케네디 대통령이 ‘국민이 신뢰하지 않는 정부는 이미 기능을 상실한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국민이 정부가 법을 제대로 집행하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면 국민의 신뢰를 상실하게 됩니다. 과거에 법을 좀 어겨도 관용하는 관행이 우리한테 있었던 것은 틀림없습니다. 일제 침략기에 생긴 문화거든요. 그 시대에 정부 요구를 거부하고 법을 어겨도, 어떤 면에서 애국자로 평가될 수 있었죠. 군사독재 정권 시절에도 인권이 억압된 면이 있었습니다. 거기에 대항해 위법적인 행동을 해도 정치권력의 정통성이 없기 때문에 그냥 용인되는 측면이 있었단 말이지요. 지금은 식민통치 시대도 아니고 군사독재 시절도 아닙니다. 정통성을 가진 민주정부입니다. 자기 의견을 자유롭게 전달할 수 있는 통로가 다양하게 존재하거든요. 그런데도 불법적이고 파괴적인 행동으로 아무런 관련도 없는 선량한 사람들한테 피해를 주고, 단속하는 공무원들한테 행패를 부려도 괜찮다면 이것은 법치국가로 볼 수가 없어요. ‘떼법’ 근절이 법무부 힘만으로는 안 됩니다. 다른 부처나 기업에서도 떼법과 쉽게 타협해버리면 안 됩니다. 불법 집단행동을 하는 노동조합에 대해서도 정말 법대로 해야 합니다. 뜨거운 난로에 손을 대면 데어야 합니다. 법을 어기면 그만큼 손해가 가야죠. 그래야 법을 지키지요.” 딱딱한 화제가 오래 이어진 것 같아 우리 모두 가난했던 1960년대로 이야기를 돌려보았다. 경남 남해에서 농사를 짓던 그의 부친은 논밭을 팔아 부산에서 건축업을 벌였으나 참담하게 실패했다. 부모와 5남매는 부산 연제구 거제동의 옹벽에 기대 지은 판잣집에서 살게 됐다. 과일상자에서 뜯어낸 판자로 바람과 햇볕을 가리고 지붕은 콜타르 칠을 한 루핑으로 덮었다. 집 한가운데로는 하수가 흘렀다. 공부를 잘하던 소년은 학교 친구들의 집을 옮겨 다니며 입주(入住) 과외교사로 초등학교 시절을 보냈다. 졸업할 때 5개 학급 300명 학생 중에서 1등을 했다. 부산에서는 경남중과 부산중이 최고였다. 그는 부산중에 합격했다. 그런데 입학금 5300환(화폐개혁 이전)이 없었다. 지금도 그는 입학금 액수를 기억하고 있다. 거제초등학교 수석졸업자가 중학교를 못 가게 되자 아버지와 삼촌이 나서 아는 국회의원을 찾아가 도와달라고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부산 브니엘고 개교 이래 최초 司試 합격자 그가 이번에 국회 인사청문회를 거치면서 그의 초등학교 생활기록부를 보게 됐다. 거기에 ‘부산중 진학’이라고 씌어 있었다. 그 시절에는 초등학교만 마치고 학교를 그만두는 학생이 중학교 진학자 수보다 훨씬 많았다. 그가 아마 부산중에 들어갔더라면 변양균 대통령정책실장, 송철호 고충처리위원장, 김성진 해양수산부 장관, 박정규 변호사와 동문이 됐을 것이다. 그는 그래도 나은 편이었다. 바로 아래 여동생은 남해에서 초등학교를 다니다가 중퇴하고 부산에서 공장에 다녔다. 그는 그 여동생만 생각하면 늘 가슴이 아프다. 집 근처 교회에서 박성기 목사가 공민학교를 만들어 중학교에 진학 못하는 학생들을 모아 가르쳤다. 두 학급이었다. 한 학급은 차고에서, 한 학급은 차고 옆 천막교실에서 공부했다. 차고 교실이 천막 교실보다는 나았다. 비가 오면 천막교실은 빗소리가 콩 볶는 소리처럼 요란하고, 교실에 물동이를 놓고 빗물을 받았다. 그는 교회에도 열심히 나갔다. 그가 고교 1학년 때 천막 학교가 브니엘실업고등학교라는 이름으로 정식 인가를 받았다. 중학교 졸업장은 없지만 고등학교 졸업장을 받을 수 있었다. 박 목사는 학생들에게 오뚝이 정신을 주입했다 |
아무리 던져도 다시 일어나는 오뚝이가 되라.’
‘칠전팔기(七顚八起).’
그가 학교 다닐 때 박 목사로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던 이야기이다. 학교 교훈이 무척 길었다. 그중 한 구절은 ‘나는 웃는 자와 함께 웃고, 우는 자와 함께 우는 사람이 되련다’였다. 학교엔 늘 가족적인 분위기가 감돌았다.
고등학교에 들어가고 2학년이 되면서 대한민국 경제도 나아졌고 건축업을 하던 아버지도 집을 한 채 지어 팔면서 형편이 피었다. 정규 중학교 진학도 못했던 그에게 대학 갈 운이 돌아왔다.
브니엘은 ‘하나님의 얼굴’이라는 뜻으로 성경 창세기에 나오는 지명(地名)이다. 야곱이 고향으로 돌아가던 길에 하나님의 얼굴을 보고도 죽지 않고 살아남았다고 해서 붙여졌다. 그런데 ‘하나님의 얼굴’ 학교에서는 대학입시 준비를 시키지 않았다. 상업선전과, 관광과 두 반이 있었다. 그는 관광과였다. 음악 미술 부기 주산에다 ‘민속대요(民俗大要)’ 같은 과목을 가르쳤다. 그는 고등학교 3학년 때 학교에서 데모를 주동했다. 영어 수학 국어만 가르쳐주고 미술 음악 체육은 좀 빼달라는 데모였다. ‘전인교육’만 받다가는 대학도 못 들어가고 취직도 못할 것 같았다. 학교에서는 데모 학생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오전수업만 했다. 오전에는 학교에서 공부하고 오후에는 집에서 독학을 했다.
서울대 입시를 치려면 제2외국어를 준비해야 했다. 그런데 실업고에서는 제2외국어를 구경할 기회가 없었다. ‘진학(進學)’지에서 고려대가 ‘안암장학생’을 모집한다는 기사를 읽고 원서를 보냈는데 ‘그 학교는 안암장학생 응시자격이 없으니 본고사에 응시하기 바란다’는 답장이 왔다. 고려대는 제2외국어 과목을 요구하지 않아 본고사에서 거뜬히 합격했다.
고려대 법학과를 졸업하고 1974년 제16회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브니엘고 개교 이래 첫 사법시험 합격자였다. 모교 교문에는 플래카드가 내걸렸다. 그는 고시 합격 전에 결혼하는 바람에 ‘처가 덕’을 보지 못했다.
▼ 공민학교에 다닐 때 중학교 모자 쓴 친구들이 부럽지 않았습니까.
“제가 키는 좀 작지만 다른 사람들을 그렇게 부러워하지 않았어요. 남의 집에 가서 살면서도 그랬죠. 생각이 좀 모자란지, 감성이 모자란지, 별로 부러워하지 않았어요. 좋은 중학교 모자 쓴 아이들 보면 길고 짧은 거는 대봐야 안다는 생각을 했죠. 좋은 학교 다니는 친구보다 실력이 떨어진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거든요. 오히려 나중에 사회에 나와서 보니까 학교라는 게 영향을 주더라고요. 학벌이 상당히 중요합디다.”
박주선 전 의원과의 인연
지금 젊은 검사들은 고교평준화시절에 학교를 다녀 그런 영향이 작을 것이다. 그러나 과거 검찰에는 경기고 서울고 경복고 용산고 부산고 경남고 경북고 광주일고 대전고 전주고 같은 명문고 인맥이 강했다.
“내가 검사 되고서 법무부 근무를 못해봤어요. 대형 사건만 터지면 불려다니며 고생하는데도 인사 때는 객관적으로 좋은 자리에 간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어요. 그때는 좀 섭섭했죠. 그래서 제가 법무부 장관으로서 인사를 참 잘해야겠다는 생각을 해요.”
▼ 입학금 5300환을 마련해 부산중에 들어갔더라면 당하지 않았을 서러움이군요.
“말하자면 그런 거지요. 우리끼리는 서로 알잖아요, 일을 처리하는 능력이 떨어져도 학교가 좋으면 커버되더라고요.”
그는 동창들과 돈을 모아 브니엘 장학회를 만들어 가난한 후배 50명에게 장학금을 지급하고 있다.
필자가 “지금은 평준화 세대가 밀고 올라오니 앞으로 검찰에 학벌 문제는 없겠군요”라고 말하자 김 장관은 “저는 그래서 고교평준화제도에 찬성하는 사람이지요”라고 말했다. 필자는 “평준화제도에도 보완해야 할 점이 있지만, 여기서 논할 문제가 아닌 것 같다”며 말머리를 돌렸다.
첫댓글 오목사님은 1회 졸업생입니다. 그리고 법무부장관 내정자가 아니라 국정원장 내정자입니다. 훌륭한 후배두신 거 축하드려야 하겠지요? 물론 하나님의 기름부으신 사자의 직분이 더 크지만요....ㅋ ㅋ
기도님이 내맘을 속 들여다보셧네 자랑스럽지요 저가 1회 학생27명 2회가 40여명이었으니....그러나 검사시절 때는 교회성도가 어려운 일당하여 한번 부탁한일..그러나 그후 사무처장 법무장관 한번도 찾아 간적없고 멀리서 축복만 하였습니다 바라기는 브니엘 학원을 박성기목사님이 되찾는데 이분이 역활을 좀 해주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