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인으로서의 李承晩 대통령
오영섭 ㅣ 연세대학교 현대한국학연구소
Ⅳ. 이승만의 한시 세계
여기서는 이승만의 다양한 한시를 편의상 ①사물과 동식물과 인간의 모습과 기능, ②감옥생활의 어려움과 애환, ③이상과 포부 및 구국대책, ④독립과 건국에 대한 열망, ⑤한국전쟁의 참상과 애민의식, ⑥가족에 대한 사랑과 인생의 무상 등 6가지로 구분하였다. 한성감옥서 시절의 한시에 나타난 이승만의 옥중생활, 정치관과 시대인식 등에 대해서는 차후의 연구과제로 돌리고, 여기서는 위의 6가지 분류에 해당하는 몇 수의 시를 선별하여 소개하는 선에서 그치고자 한다.
3. 이상과 포부 및 구국대책. 옥중에서 이승만은 "자신을 3년간이나 뜻을 펴지 못하고 묶여있는 천리마"라고 표현하였다. 그 만큼 이승만은 옥중에서 자신의 울적한 심회를 토로하는 시를 많이 남겼는데,「회포를 읊다」[談懷] 62)도 그러한 시들 가운데 하나이다.
一生胸海不平嗚 덧없이 가슴속에 불평만 쌓이는데
雨打風飜浪易警 비 뿌리고 바람 불어 물결처럼 출렁이네
籠鶴遙懷雲萬里 우리 안의 두루미 만리의 구름을 그리고
林禽孤夢月三更 숲새의 외로운 꿈속에 달은 이미 오밤중
? 書爲伴行裝淡 책 보따리와 친구 되니 행장도 가볍고
匣劒知心性命輕 목숨을 아끼햐 갑 속의 칼만이 알아주네
世事黃金髓處有 세상살이 황금이야 가는 곳마다 있거늘
貧寒那得誤經營 가난이 어찌 경영을 그르칠 수 있으랴.
이승만은「이유형의 팔조시에 화답함」[和白虛八條詩]이라는 시에서 대한제국이 나갈 바를 제시하였다. 즉, 그는 정치의 급선무는 외교라는 외교제일주의노선에 따라 국가가 고립의 형세에 빠져서는 안된다고 주장하였다. 이어 그는 자유로써 백성을 다스리고 구법을 폐기하고 신식을 받아들이라고 주장하였다. 마지막으로 그는 양병은 전쟁을 막는 수단일 뿐이지 국가발전을 보장해주는 것은 아니니 무엇보다도 교육을 진흥시켜 자주와 부강의 기틀을 닦아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63)
圖治先在篤交隣 정치의 급무는 외교에 있고
臨事當問達變人 일일랑 능한 분에게 물어보시라
憂國戒存孤立勢 외로우면 나라가 위태롭다오
導民務作自由身 자유로서 백성을 인도합시다.
法僞恐後無泥舊 그릇된 옛 법은 선듯 고치고
從善爭前寞厭新 신식도 좋으면 받아들이소
敎育俊英今最急 오늘엔 교육이 가장 중요해
養兵唯止壓邊塵 양병은 전쟁을 막을 뿐이고
4. 독립과 건국에 대한 열망. 아쉽게도 이승만이 독립운동기에 지은 시를 13수밖에 남아있지 않다. 이중에서 8수가 1920년 11월부터 1951년 5월 사이에 지어진 것들이다. 당시 이승만은 임병직과 몰래 화물선에 올라 중국인의 시신을 담은 관과 함께 선창에서 하룻밤을 지낸 다음에 선상으로 올라온 경험이 있었다. 64) 이승만은 이를 다음과 같이 읊었다.
民國二年至月天 민국 2년 동짓달 열 엿셋날
布哇遠客暗登船 하와이서 남몰래 배를 탔다네
板門重鎖洪爐煖 겹겹의 판자문에 화로불은 따뜻하나
鐵壁四圍漆室玄 사면이 철벽이라 칠흑 같이 어두웠네
山川渺漠明朝後 내일 아침이면 산천도 아득하리니
歲月支離此夜前 이 밤엔 세월도 어찌 길다냐
太平洋上飄然去 태평양 바다 위를 둥실 떠가니
誰識此中有九泉 이 안에 황천객을 누가 알랴
독립운동기에 이승만은 미주와 구주와 하와이를 오가느라 많은 시간을 보냈다. 이렇게 무료한 시간을 이승만은 책도 보고 시도 지으면서 보냈을 것으로 보인다. 1935년 늦가을에 지은「태평양 배위에서」[太平洋丹中作]은 부평초처럼 떠돌며 독립운동에 종사하느라 항상 고향과 육친을 그리워한 이승만의 처지를 잘 나타내고 있다.
一身汔汔水天間 물 따라 하늘 따라 떠도는 이 몸
萬里太平幾往還 만리길 태평양을 몇 번이나 오갔는가
到處尋當形勝地 어떤 명승지도 보잘 것 없으니
夢魂長在漢南山 꿈속에도 내 나라 漢南山일네 65)
이승만은 1947년 1월 28일 남한단독정부 수립의 필요성을 역설하였고, 이어 9월 15일 남한만의 총선거 실시를 주장하였다. 이때를 전후하여 이승만은 국민통합과 남북통일의 염원을 담은「가을 달밤에」[秋月夜]란 시를 지었다.
願與三天萬 내 염원은 삼천만 동포랑
俱爲有國民 나라 있는 백성이 되고 지고
幕年江海上 늘그막에 시골로 돌아가
歸作一閒人 한가한 사람으로 지내련다
5. 한국전쟁의 참상과 애민 의식. 한국전쟁 중에 이승만은 피난지 부산에서 인민생활의 피폐상을 아파하였다. 이승만의 한국전쟁 인식과 애민의식은 1951년 봄에「전쟁중의 봄」[戰時春]과「제비를 읊음」이란 시에 잘 나와있다.
半島山河漲陣烟 강산을 바라보니 진 치는 연기 자욱하고
胡旗洋帆翳春天 중공 깃발 서양 돛대 봄 하늘을 가리웠네
彷徨盡是無家客 이리저리 떠도는 이들 집 없는 나그네요
漂泊誰非辟穀仙 나다니는 이들 누구나 생쌀 씹고 다니네
城市遺墟餘古壁 거리엔 남아있는 옛 벽만 우뚝하고
山村燒地起新田 산 마을엔 새로이 화전을 일구었네
東風不待干戈息 전쟁이야 그치건 말건 봄바람은 불어 대고
細草遍生敗壘邊 피 흘려 싸우던 들엔 속 잎 돋아 나오네
燕子喃喃去復回 강남 갔다 돌아와 재잘거리는 제비들
舊巢何去只寒灰 제 집은 어디 가고 잿더미만 남았다고
莫將萬語論非是 이러니 저러니 말들 삼지 마소
戰世如今孰不哀 난리통에 안 슬픈이 뉘 있으니
6. 가족 · 고향에 대한 사랑과 인생의 무상. 이승만은 1896년 모친이 사망했을 때에 자식으로서 효도를 다하지 못한 애달픈 심정을「울면서 읊음」[雩南唫哭]이란 시로 풀었다.
鞠育情恩卄二年 정성껏 길러주신 스물 두 해
伊今身髮正軒然 이제 와선 몸과 머리 정말로 훤칠하네
未奉靈柩安士宅 영구를 받들어 장사를 못 뫼시니
戴頭寧不愧蒼天 머리 들어 저 하늘에 어찌 부끄럽지 않으리
이승만은 감옥 안에서도 부친을 모시지 못한 자신의 불효를「어버이를 위로함」[慰親]이란 시로 풀었다.
數幅箋中筆二枝 두어 폭 편지 속에 붓이 두 자루
感恩有淚奉書時 아직 읽지도 않았는데 눈물이 앞을 가리네
養精違訓供無酒 효도를 못하여 공양에 술도 못올리니
獻壽乏誠頌以詩 헌수하는 정성으로 시를 올립니다.
繫獄罪輕天有鑑 옥에 매었으나 죄는 가벼우니 하늘의 살핌이고
報君義重孝難思 임금 보답에 의리가 중하니 효는 생각 어려워
今年縱末斑依侍 올해는 비록 색동옷으로 모시지를 못하오나
惟幸陽春在不遲 오직 따뜻한 봄이 머지 않았음이 다행이네요
해방 후 고국에 돌아온 이승만은 양녕대군을 모신 지덕사를 방문했을 때에 과거를 회상하는「옛 집을 찾아」[訪舊居]란 멋들어진 시를 지었다.
桃源古舊散如姻 어렸을 적 옛 친구들 뿔뿔이 흩어져
奔走風塵五十年 50년 풍진 속을 분주히 오갔네
白首歸來桑海變 흰머리로 돌아오니 모든 것이 변하여
東風揮淚夕陽邊 66) 사당 앞의 봄바람에 눈물만 짓누나
대통령 취임시에 이승만의 나이는 이미 70대 중반을 바라보고 있었다. 따라서 이후 지어진 이승만의 시에는 과거를 회상하고 인상무생을 노래한 시들이 주종을 이루고 있다. 1956년 봄에 가는 봄을 아쉬워하며 지은「봄을 보내며」[餞春]란 시에는 말년기 이승만의 회고적 정조를 잘 나타내 주고 있다.
春事年女去太忙 해마다 봄은 이리도 바삐 가는데
東君歸駕繫無方 저무는 저 해를 잡아맬 길이 없구나
古今才子佳人恨 옛부터 재자 가인 탄식해 하는 말들
花柳樓臺易夕陽 꽃을 보는 다락에선 석양이 빨리 온다고
이승만은 1957년 이강성을 양자로 들일 때에 지은「느낌」[有感]이란 시에서 죽음을 앞둔 말년의 나이에 고향을 그리워하는 首邱初心의 절절한 심경을 드러냈다.
十生九死荷生人 몇 번이나 죽을 고비
六代李門獨子身 살아 온 육대 독자
故國靑山徒有夢 고향 산천 꿈에도 못 잊건만
先塋白骨護無親 선영에 묻힌 백골 돌아볼 이 없네
주)
62. 신호열 번역본에는 제목이「牢中述懷」(옥중에서 회포를 노래함)으로 되어있다.
63. 이승만은 감옥에서 지은 시에서 고종의 전제황권을 칭송하거나 거기에 은근히 기대는 태도를 보였다. 이는「군왕의 조서를 받들며」[奉恩詔] ·「관에서 내린 이불」[官衾] 등의 시에서도 확인된다.
따라서 같은 시기 이승만이『독립정신』에서 민주공화제에 대한 차선책으로 제기한 입헌군주제는 국
민주권과 모순되지 않는 영국식의 입헌군주제가 아니라 전제군주가 입법 · 사법 · 행정 분야에 대해 상
당한 권한을 발휘하는 프로이센식이나 일본식의 개명군주제에 가까운 입헌군주제였을 가능성이 높다.
64. 유영익,『이승만의 삶과 꿈』, pp. 150-154.
65. 1938년 3월 독립운동계의 거목 안창호가 타개하였다. 이승만은 "대동강물도 목이 막힌 듯이 울어댔다"며 라이벌 안창호의 죽음을 애도하는「천고의 애국자 안도산」[島山千古]란 시를 지었다. 妻子天涯哭 처자는 하늘가에서 울고 / 親朋海外驚 친한 벗은 해외에서 놀랐네 / 國亡人又去 나라가 망하자 사람마저 떠나가니 / 嗚咽狽江嗚 대동강물도 목 맺힌 듯 울어대네.
66. 이 시는 제4연 마지막 구절 3자는 이승만의 친필시에는 '夕陽邊'으로 나오나 공보처 간행의『우남시선』에는 '古祠前'으로 되어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