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20일(화) 비,바람/ 오후에 갬
한국은 아직 어둠에 싸인 여명이겠지만 30분 빠른 동경시를 쓰는 일본의 하늘은 의외로 훤하다.
평소엔 한참 자고 있을 새벽 5시경에 일어나 세수를 한 후에 오늘은 귀국일이라 정갈한 방안 곳곳을 카메라에 담았다.
잔혹한 무사들이 사용한 무기인 단도나 화살을 완벽할 정도로 정밀하게 소형제작하여 전통공예품으로 상품화한 일본인들의 영특한 상술에 섬뜩함을 느낀다.
우리와는 너무나도 다른 생활상과 문화를 지닌 이웃 섬나라... 먼지 하나 없이 너무나도 깨끗한 가재도구며 방 안 구석구석, 심지어 쓰레기 하나 보이지 않은 번잡한 도시나 외진 시골의 골목마저도 세심하게 물걸레질을 한 것같은 정갈함을 느끼게 만드는 일본... 이런 가공할 정도의 깨끗한 선진국을 만든 일본인들의 부지런함과 몸에 베인 청결심에 대해서는 그저 경외감이 든다.
세상 유일하게도 왜 일본에 대해서만 특별하게 이런 감상이 드는 것일까?
역사를 살펴보면 그 나라나 민족을 알 수 있듯이, 알고보면 일본은 참으로 야만적인 나라다. '할복'이라하여 제 칼로 배를 가르고 창자를 꺼내 충성심을 보이며 죽는 무시무시한 민족은 오직 일본 뿐이며, 신권(神權)같은 권력자에 대한 부하단체의 충성심은 자본주의화 내지 민주주의화된 지금시대에도 거의 절대적이다.
인민을 하찮은 민초(民草)로 여기는 야만적인 민족성인만큼 목숨을 초개같이 여기는 무사들이 설치던 에도시대에 인민들은 권력자들의 충실한 개(犬)같은 낭인무사들을 두려움과 공포의 대상으로 여겼기에 조심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는 필요 이상의 친절을 베풀 수밖에 없었다. 그러한 뿌리깊은 성향이 관행과 습관이 되어 지금의 -겸손하고 배려심이 많은 친절한 일본인-으로 변한 것은 역사적인 긍정적 아이러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독보적인 일본인들의 청결한 민족성에 대해서는 우선 자연환경에서 그 해답을 찾아 보았다.
대륙과 연한 한국이나 중국은 매년 봄마다 타클라마칸사막이나 고비사막에서 날아오는 모래먼지(황사) 때문에 몸살을 앓는다. 강력한 대륙성고기압의 영향권에 있기에 1년내내 쾌청한 날이 드물다. 오죽하면 대륙으로부터 흘러내린 강물을 누런 황하라고 했을까.
자연환경이 지저분한 중국에서 먼 한국의 청량한 산중에 있는 절간이라해도 며칠만 지나면 깨끗한 방 안엔 먼지가 뽀얗게 쌓인다.
그에 비해 깨끗한 태평양기후대에 속한 일본의 하늘은 비가 오지 않는한 항상 맑고 깨끗하다. 한번 청소를 해 두면 며칠씩 청량감을 유지한다.(이 부분은 막연한 추측임^^)
이런 깨끗한 천혜의 자연환경을 참작하지 않기에 우리는 일본인들을 마냥 -깨끗한 민족성-이라고 여기며 일반화를 시키고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들은 침구를 처음상태 그대로 깨끗이 정돈하고서 가방을 챙겨들고 방을 나섰다.
우리를 맞이한 스님의 스승되는 70대처럼 보이는 노승을 처음으로 잠깐 대면했는데, 걱정근심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맑고 편한 얼굴이다. 민족이나 국적을 떠나서 종교에 심취한 도인들은 원래 이런 모습인가...?
오늘이 마지막이라는 생각에 이곳의 모습을 확인하기 위해 불켜진 유리창 내부를 새삼스레 살펴보니, 섬세하고 정교한만큼 복잡하고 요란한 일본 특유의 인테리어나 종교도구들로 가득한 사찰내부가 정밀하고 오밀조밀하다.
절간의 대웅전엔 통상 불상이 있어야 하는 법인데... 나무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를 믿는 일연종(日蓮宗)인 이곳은 창시자인 일본승려 니치렌스님(日蓮僧) 한분을 모시고 있는 게 특이했는데 의외로 작은 불상이라 한참동안 중앙을 살펴봐야 했다. 요란한 장식물에 싸여있는 모습에서 그의 존재감을 찾을 수 없다.
석탑이나 비석들로 가득한 불교식+서양식 가족묘지가 있는 일본식 묘원을 구경하고, 하숙방이 있는 본채 옆 요사채(스님 숙소) 문을 두드려 오늘은 시내구경 겸 걸어서 역까지 갈 생각이라며 조카가 인사하니 스님은 끝까지 친절을 베풀겠다며 나선다.
6시반경, 본찰을 배경으로 스님과 함께 인증샷을 한 후에 차를 타고 사가역으로 향했다.
차 안에서 우리는 처음으로 스님과 대화다운 대화를 나눴다. 유럽에도 몇번 갔었다는 그는 서울의 조계종 불교행사에 두번 참여했다며 나처럼 서툰 영어로 자신을 소개한다.
스님과 작별인사를 나눈 후에 노련한 조카는 역사 내 유료물품보관소에다 여행가방을 챙겨넣은 후 자동발권기에서 열차표를 뽑아 앞장선다.
오늘 일정은 일본인들이 신으로 섬기고 모신다는, 임진왜란때 끌려간 조선도공이 졸지에 일본도조(日本陶祖)가 된 이삼평 선생의 유적지.
오늘도 심상치 않은 찌푸린 날씨다.
벼가 누렇게 익어가는 들판... 한국과 많이 닮은 열차 밖 풍경이라 이제는 일본이 이국적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태풍에 의해 논바닥에 누워버린 추수기의 누런 벼가 가난했던 옛 어린시절을 상기시킨다.
이삼평 선생님에 의해 일본자기발상지가 된 가미아리타(上有田)역에 도착했다. 사가역에서 서쪽으로 40km, 열차로 55분. 요금1,450엔.
카메라를 품고서 빗속에 조심스레 사진을 찍는데 바람이 세차다.
중국 청화백자 이후로 서구인들을 유혹했던 세계적인 도자기 본산이라 곳곳에 온통 도자기로 장식되어 있는 게 이채롭기 그지없다. 특히 황금보다 비싸다는 아프가니스탄산 천연코발트인 청금석(靑金石)을 아깝지 않게 사용한 자금력이 새삼 놀랍다.
곳곳에 자리하고 있는 신령스럽고 고풍스런 유적들... 근본을 지닌 일본에는 있고, 근본을 상실한 우리나라에는 없는 것들 중 하나 아니겠는가.
국가지정 천연기념물인 유전대공손수(有田大公孫樹)라는 수백수천년 묵은 엄청난 크기의 은행나무가 위압적으로 서 있는 신사 한쪽 사무실 구석에 임시로 안치된 -도조 이삼평 옹- 도자기상이 산신령처럼 정좌해 있다. 특별한 안내판이 없어 제작년대를 알 수 없으나, 도조로 숭상하는 분이라 분명 사실적으로 제작된게 아닌가 싶다. 사적 안내판이 곳곳에 있는 이곳 유적지는 대부분 도로변에 있어 관람하기 편리한 장점이 있다.
하늘은 여전히 먹구름으로 가득하고 야속한 가랑비는 추적추적 한없이 내린다. 우리가 먼저 찾아간 곳은 조선도공들이 일본에서 최초로 발견한 도자기의 원료인 일본산 고령토 천산도석(泉山陶石)이라는 광산굴이 있는 곳.
언젠가 집에서 과자를 먹으며 재미있게 다큐영상으로 시청한 곳이지만, 낮으막한 돌산 자체가 전부 도자기의 원료로 쓰는 암석으로 이뤄져 있었고, 보다 순도높은 원료를 얻기 위해선지 돌산을 허물지 않고 굴을 뚫어 채석한 흔적이 인상적이다.
한국같으면 도공이나 일꾼들이 서로 많은 원료를 차지하려고 악다구니를 쓰면서 경쟁적으로 산을 무너뜨리고 이 지역을 아예 항폐화시키고도 남았을 것인데, 아직도 이곳은 관광지로 충분하고 넘친 아름다운 자연환경 원형 그대로 남아있는 것이 그야말로 불가사의라고 할 수 있겠다.
'도자기 흙= 고령토'라는 것만 막연히 알고 있는 나는, 호기심 어린 사람들이 만진 흔적이 역력한 부근의 황토빛이 어린 백색바위벽을 만져보고 유심히 살펴보았다. 화강암처럼 석질이 단단하지 않고 부드러운 사암처럼 손끝에 쉽게 부슬거린다.
대표적인 도자석을 보듬고 있는 아담한 안내판이 매우 인간적이고도 일본적이다.
조선인 도공 이삼평 선생을 신으로 모신 도산신사(陶山神社)로 가는 길 가 도예점 벽에 눈에 띄는 은은한 관음보살 그림이 있다. 자세히 보니 2cm×2cm 크기의 섬세한 작은 도편을 모자이크화로 만든 게 독창성이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