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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그러진 창작, 표절 읽기
– 정해원 시조집 『산길을 걸으며』에 드리워진 표절 그림자
신기용(문학평론가)
1. 들어가기
남의 시조를 베끼고, 자신의 시조를 짜깁기하여 발표하는 행위에 누가 돌을 던져야 하나?
시문학(1979)으로 등단한 시조시인 정해원(이하 그)의 시조집 『산길을 걸으며』(2011)에는 표절 그림자가 곳곳에 드리워져 있다. 그는 이 시조집 129쪽 서두에서 “등단 30년이 넘었다. 습작부터 셈을 하면 사십 년의 세월을 보냈다.”라고 스스로 밝히고 있지만, 그의 작품은 습작 수준이다. 아직도 남의 시조를 모방하고, 표절하고 있다는 의혹 때문이다.
표절에 관한 비평은 그 결과로 말미암아 한 사람의 인생을 망가트릴 수 있는 문제이므로 신중을 기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평자가 2012년 《예술부산》 1월호에 최초 비평할 때와 문예지 《문장21》 여름호에 재반론할 때 자신의 시조를 짜깁기한 자기 표절에 대해서 예를 들면서 언급하였고, 시조집 말미 ‘제언의 글’이 남의 글을 짜깁기한 가치 없는 글이라고 언급하였다. 그러면서도 표절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만은 피했다. 그가 스스로 반성하고 성찰하기를 기대했었기 때문이다.
이제 평자는 더는 에둘러 말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직접 언급하지 않으면 그가 또 독자를 기만할 것이라는 기우 때문이다. 그래서 바로 정곡을 찔러 그의 표절 시조를 명확히 밝히고, 그가 등단 30년을 넘겼지만, 허울에 불과한 가짜 시인임을 증명해 보이려고 한다. 시인으로서 비윤리적인 표절 행위를 숨기려고 온갖 변명과 넋두리는 물론 평자에 대한 인신공격을 펼쳐 놓던 그에게 그래도 최소한의 예의를 갖춰 제한적으로 제시한다.
2. 표절 그림자 읽기
2-1. 이상범의 「가을손」 그림자
그의 시조집 『산길을 걸으며』의 표제 시조이면서 대표작 중 하나인 「산길을 걸으며(3)」은 이상범(1935~ ) 시인의 「가을손」을 표절한 흔적이 뚜렷하게 드러난다. 이 「가을손」은 시조집 『꿈꾸는 별자리』(태학사, 2001)의 「서시」로 수록되어 있다. 아래와 같이 비교하며 읽어 본다.
어느 가을 외진 산길 혼자서 걷습니다
가을볕을 손에 모으면 하늘빛이 고입니다
손끝엔 푸른 물감이 묻어나고 있습니다.
억새꽃 은빛물결 출렁이며 밀려와서
온 갖가지 시름들을 말갛게 씻어 내면
바람은 하얀 꽃술을 흩날리고 있습니다.
미운 것 고운 것이 부질없다 생각하며
산 너머를 손차양하고 물끄러미 바라보니
내 인생 남은 날들의 가얄 길도 보입니다.
– 정해원, 「산길을 걸으며(3)」 전문
두 손을 펴든 채 가을볕을 받습니다
하늘빛이 내려와 우물처럼 고입니다
빈손에 어리는 어룽이 눈물보다 밝습니다
비워 둔 항아리에 소리들이 모입니다
눈발 같은 이야기가 정갈하게 씻깁니다
거둘 것 없는 마음이 억새꽃을 흩습니다
풀 향기 같은 성좌가 머리 위에 얹힙니다
죄다 용서하고 용서 받고 싶습니다
가을 손 조용히 여미면 떠날 날도 보입니다
– 이상범, 「가을손」 전문
위와 같이 그의 「산길을 걸으며(3)」과 이상범 시인의 「가을손」을 비교해 보면, 교묘히 구마다 시어를 바꾸기는 했으나, 소재를 비롯한 어휘, 시적 발상, 통사 구조, 시적 구조 등을 표절하였다는 것을 대번에 알 수 있다.
원작인 「가을손」의 모든 행이 ‘–니다’체로 종결하듯이 그도 대부분 ‘–니다’체로 종결한 것과 진하게 표시한 부분만 비교해 보더라도 쉽게 표절임이 드러난다. 더 구체적으로 표절 그림자를 밟아 가면서 추적할 필요성이 없을 정도로, 누구나 읽는 순간 표절임을 알 수 있다.
• 가을볕을 손에 모으면 하늘빛이 고입니다 = 두 손을 펴든 채 가을볕을 받습니다/ 하늘빛이 내려와 우물처럼 고입니다
• 억새꽃 (……) 흩날리고 있습니다. = 억새꽃을 흩습니다
• 온 갖가지 시름들을 말갛게 씻어 내면 = 눈발 같은 이야기가 정갈하게 씻깁니다
• 미운 것 고운 것이 부질없다 생각하며 = 죄다 용서하고 용서 받고 싶습니다
• 가얄 길도 보입니다. = 떠날 날도 보입니다
위와 같이 그가 일부 시어를 그대로 차용한 것만으로도 표절 시비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이를 우연의 일치라고 이해하려 해도 소재, 어휘, 시적 발상, 통사 구조, 시적 구조 등 여러 층위에서 표절에 근접한 유사성 때문에 창작의 독창성을 인정하기 어렵다. 이를 두고 ‘일그러진 창작’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한마디로 말해 ‘표절’이다.
앞의 평자의 주장에 대해 그는 2012.9.2. ‘현대시조 창작 연구회’ 카페에서 “이상범 선생의 ‘가을 손’의 원초적 심상은 필자와 같은 것 같다. 이미지의 조작과 창조는 필자와 보법이 다른 것 같다. 이미지의 전달에 있어 ⓵시인의 최초 이미저리의 재현, 조작, 창조한 이미지의 재구성과 ⓶시인이 언어를 빌어 비유해낸 완성된 시는 시어 선택의 한계, 비유의 부적절성에 의해 처음 시인이 구상 했던 것과는 차이가 있게 된다. ⓷그리고 독자가 보는 이미지는 시인과는 직접 경험, 간접경험 등 스키마가 다르므로 감상할 때 다르게 느끼게 되는 괴리가 있게 된다. 시인이 느끼지 못했던 것을 독자는 느낄 수도 있다. 그래서 ‘가을 손’에 필자 나름대로의 설명을 붙일 수는 없다. 다만, 첫째수의 물의 이미지가 둘째수의 ‘눈발 같은 이야기가 정갈하게 씻깁니다’ 가 오기 위해서는 둘째 수 초장의 이미지가 물의 이미지가 오버랩 되면서 연결되었으면 하는 아쉬움은 있다. 이것도 이상범 선생과 필자는 스키마가 다르기 때문에 그냥 지나치면서 하는 말일 뿐이다. 그리고 이상범 선생은 ‘풀 향기 같은 성좌’ ‘눈발 같은 이야기’ ‘우물처럼 고입니다’ 등 직유법을 사용하여, 이미지를 선명하게 표현하여 원관념과 보조관념의 개념을 분명히 하고 있으나, 필자는 시작(詩作)에서 직유법을 잘 사용하지 않는다.”라며 표절을 부인하였다.
그가 표절을 부인하고 있지만, 동일한 시어가 같은 위치에 있다는 것에 주목해 보면, 의심할 여지도 없이 표절임이 확연해진다. 1연 중장 뒤의 구 “하늘빛이 고입니다 = 우물처럼 고입니다”, 2연 중장 뒤의 구 “말갛게 씻어 내면 = 정갈하게 씻깁니다”, 3연 종장 마지막 구 “가얄 길도 보입니다 = 떠날 날도 보입니다” 등의 시어를 동일한 위치에 배열해 놓았음은 우연성과는 거리가 멀다.
그는 남의 시조를 표절한 것에 그치지 않고 자신의 시조에서도 흔적을 남기고 있다. 「산길을 걸으며(3)」 3연 중장 “산 너머를 손차양하고 물끄러미 바라보니”에 주목해 본다. 이 시조집에 함께 실린 「2월, 오늘 다시 봄을 보며」라는 시조의 2연 종장과 비교해 보면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시적 발상이 너무나 똑같다.
미운 것 고운 것이 부질없다 생각하며
산 너머를 손차양하고 물끄러미 바라보니
내 인생 남은 날들의 가얄 길도 보입니다.
– 정해원, 「산길을 걸으며(3)」 3연
일찍이 소식 끊고 연락 없는 그 친구가
지난겨울 잘 견뎠다고 기별이나 줄까봐서
이마에 손차양하고 행여나 싶어 바라본다.
– 정해원, 「2월, 오늘 다시 봄을 보며」 2연
「산길을 걸으며(3)」은 《실상문학》 51호에, 「2월, 오늘 다시 봄을 보며」는 《문학도시》 87호에 그가 발표한 시조이다. 그는 원고청탁을 받으면 자신의 시조와 남의 시조를 짜깁기하여 발표했을 것이라는 추측을 가능케 한다.
2-2. 당나라 시인 장구령의 「조경견백발(照鏡見白髮)」 그림자
『산길을 걸으며』의 표제 시조이면서 또 다른 대표작 중 하나인 「산길을 걸으며(5)」도 표절 의혹이 짙다. 중국 당나라의 시인 장구령(張九齡; 673~740)의 오언절구인 「조경견백발」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기 때문이다.
이 오언절구는 장구령이 당 현종 때 재상에서 물러난 뒤 자신의 심정을 읊은 시이다. 그 내용은 “옛날에 푸른 뜻을 품고 나라를 위해 힘을 다했으나, 모든 일이 뜻대로 되지 않았다. 늙어서 재상의 자리에서 밀려난 뒤,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백발을 바라보며 스스로 불쌍히 여길 줄 몰랐다.”라고 신세타령한 시이다. 「산길을 걸으며(5)」에 드리워진 장구령의 그림자를 읽어 본다.
시오야 밝은 밤을/ 하염없이 걷습니다.
달빛은 은혜로운/ 불음佛音으로 쏟아지고
겹겹이/ 고이는 월광月光/ 거울 되어 비칩니다.
비치는 내 모습을/ 측은하게 바라보며
청운靑雲의 꿈 어디 두고/ 빈손으로 걷습니다.
오늘은/ 조경견백발照鏡見白髮/ 회한悔恨으로 밀립니다.
– 정해원, 「산길을 걸으며(5)」 1, 2연
宿昔青雲志(숙석청운지) 지난날에는 청운의 뜻이 있었는데
蹉跎白髮年(차타백발년) 어영부영하다 보니 백발의 나이가 되었구나
誰知明鏡裏(수지명경리) 거울 속의 이 모습을 누가 알았으리
形影自相憐(형영자상련) 형상과 그림자가 서로 바라보며 불쌍히 여길 줄을
– 장구령, 「조경견백발(照鏡見白髮)」 전문
위와 같이 그의 「산길을 걸으며(5)」는 장구령의 오언절구 「조경견백발」의 그림자가 너무나 짙게 드리워져 있음을 단박에 알 수 있다. 그가 「산길을 걸으며(3)」에서처럼 시어를 교묘히 바꾸기는 했으나, 표절 혐의를 벗을 수 없을 것 같다.
「산길을 걸으며(5)」의 2연 종장에서 ‘조경견백발’이라는 시어를 차용하였다 하여 그것만으로는 표절이라 단정하여 말할 수는 없는 일이다. 장구령의 ‘조경견백발’의 뜻인 ‘거울에 비친 백발’ 혹은 ‘거울을 비춰 백발을 보다’라는 주제와 ‘거울’과 ‘백발’ 등의 소재를 차용하여 시적 변주를 하였다고 그가 주장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나아가 ‘월광’을 ‘거울’과 겹쳐 놓았는데 어떻게 시상이 장구령의 오언절구와 일치하느냐? 하고 따질 수도 있을 법하고, 2연은 장구령의 오언절구를 패러디한 글이라 우길 수도 있을 법하다.
하지만 주제와 소재를 비롯한 어휘, 시적 발상 등을 꼼꼼히 비교해 보면 오언절구를 현대 시조로 변환해 놓은 것임을 알 수 있다. 아마도 인터넷에서 떠돌아다니는 「조경견백발」의 번역본을 기준으로 삼았을 가능성이 높다. 그의 시조와 시적 구조가 너무나 흡사하기 때문이다. 이를 증명하기 위해 인터넷에서 떠돌아다니는 번역본과 그의 시조와 비교해 본다. 오언절구의 ‘불쌍히 여기다’를 ‘측은하게’로, ‘이 모습’을 ‘내 모습’으로, ‘청운의 뜻’을 ‘청운의 꿈’으로 교묘히 시어를 바꾸어 놓았지만, 표절 흔적이 사라지지는 않았다.
• 거울 되어 비칩니다.// 비치는 내 모습을 = 거울 속의 이 모습을 누가 알았으리
• 거울 되어 비칩니다.// 비치는 내 모습을/ 측은하게 바라보며 = 형상과 그림자가 서로 바라보며 불쌍히 여길 줄을
• 청운靑雲의 꿈 어디 두고/ 빈손으로 걷습니다. = 지난날에는 청운의 뜻이 있었는데
• 조경견백발照鏡見白髮 / 회한悔恨으로 밀립니다. = 어영부영하다 보니 백발의 나이가 되었구나
이것이 우연성 때문일까? 주제, 소재, 어휘, 시적 발상 등 여러 층위에서 표절에 근접한 유사성 때문에 창작의 독창성을 인정하기 어렵다. 앞에서 지적한 「산길을 걸으며(3)」처럼 ‘일그러진 창작’이 빚어낸 베끼기 수준의 ‘표절’이라 여겨진다.
만일 그가 원작인 「조경견백발」이 너무나 유명한 시라서 누구나 차용임을 알아차릴 수 있어 그 출처를 밝히지 않았다고 우기면서, 차용 또는 패러디[Parody]한 것이라고 항변한다면 굳이 반박할 필요성은 없을 것 같다. 표절의 그림자가 너무나 짙게 드리워져 있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위의 평자의 주장에 대해 그는 2012.9.2. ‘현대시조 창작 연구회’ 카페에서 ‘패러디’라고 항변했다. 그 내용은 “‘청운의 꿈’은 모두가 한 번씩은 입에 담아보는 보편적인 관용어다. 여기의 靑雲之志와 照鏡見白髮도 많은 사람이 아는 하나의 상징적 시어로 작용하는 것이며 이 시조의 전체를 지배하는 것은 아니다. 만일 둘째 수만을 단수로 만들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장구령의 시를 패러디 한 것으로 볼 일이지 표절로 보기는 어렵다고 본다. 여기서는 첫째수와 마지막 수를 보충해주는 기능밖에 하지 않는다.”라고 궁색한 변명을 했다.
그가 ‘패러디’가 풍자성과 해학성을 포함하는 용어임을 모르는 걸까? 평자는 앞서 “‘조경견백발’이라는 시어를 차용하였다 하여 그것만으로는 표절이라 단정하여 말할 수는 없는 일이다.”라고 인정했다. 그러나 그 어디에도 인용 출처를 밝히지 않은 상태이고, ‘불쌍히 여기다’를 ‘측은하게’로, ‘이 모습’을 ‘내 모습’으로 ‘청운의 뜻’을 ‘청운의 꿈’으로 교묘히 시어를 바꾸어 놓은 것은 ‘패러디’가 아닌 베끼기 수준의 ‘표절’임이 분명하다.
「산길을 걸으며(3)」처럼 이 시조에서도 남의 시를 표절한 것에 그치지 않고 자신의 시조에서 짜깁기한 그림자를 밟을 수 있다. 「산길을 걸으며(5)」 1연 초장 뒤의 구 “하염없이 걷습니다”와 3연 중장 마지막 구의 “정처없이 갑니다”에 주목해 본다. 이 시조집에 함께 실린 「산길을 걸으며(4)」 1, 3연과 비교해 보면 위치가 똑같다.
시오야 밝은 밤을/ 하염없이 걷습니다.// (……)// 나 또한/ 이 밤을 질러/ 정처 없이 갑니다.
– 정해원, 「산길을 걸으며(5)」 1 연, 3연
첫눈 온 산길 따라/ 하염없이 걷습니다// (……)//창백한/ 하얀 낮달은/ 정처 없이 흐릅니다.
– 정해원, 「산길을 걸으며(4)」 1 연, 3연
「산길을 걸으며(5)」와 「산길을 걸으며(4)」는 워드 작업할 때 한 편의 시조를 놓고 두 편의 시조로 개작했다는 추측을 가능케 한다. 또한, 「산길을 걸으며(4)」 1연 중장 앞의 구 “육각의 결정結晶들이/ 설화雪花로 폈습니다”에 주목해 보면, 이 시집에 함께 실려 있는 「빙점氷點」의 2연 중장과 앞의 구는 동일하고, 뒤의 구는 시어를 교묘히 바꾸어 놓았지만, 시상은 같다.
육각의 결정結晶들이/ 설화雪花로 폈습니다
– 정해원, 「산길을 걸으며(4)」 1연 중장
육각의 결정結晶들이 보석처럼 반짝이면
– 정해원, 「빙점氷點」 2연 중장
이처럼 이 시조집은 남의 시조의 표절 그림자뿐만 아니라, 광범위하게 자신의 시조를 짜깁기한 흔적이 곳곳에서 드러난다.
2-3. 고려 말(조선 초) 학자 김극기의 「남천(南川)」 그림자
『산길을 걸으며』의 표제 시조이면서 대표작 「산길을 걸으며」도 표절 흔적이 남아 있다. 고려 말(조선 초) 학자인 김극기(金克己; 1379∼1463)가 경주 남천(南川)의 풍광을 읊은 시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산길을 걸으며」에 드리워져 있는 김극기의 그림자를 아래와 같이 비교하며 읽어 본다.
호젓한 산길 걷다/ 문득 멈춰선 발길
햇살은 나뭇잎 사이/ 실바람에 반짝이면
그리워/ 못잊을 얼굴들/ 幻影처럼 흔들린다.
나직한 목소리로/ 그 이름들을 부르다가
푸른 하늘 우러르며/ 南天을 바라보니
한 조각/ 하얀 구름이/ 山頂에 걸려있다.
– 정해원, 「산길을 걸으며」 1, 2연
(……)/ 아름다운 경치 찾아 길을 나섰네/ 토령의 산마루에 오르려고 하다가/ 물 맑은 문천가에 머물고 말았네/ 푸른 하늘 우러러 아득히 바라보며/ 언덕에 올라 고요히 귀를 기울였네/ 첩첩이 쌓인 산은 병풍처럼 둘러 있고/ 일렁이는 잔물결은 거울처럼 맑구나/ 구름의 끝자락엔 고니가 날아들고/ (……)
– 김극기, 「남천」 부분
「산길을 걸으며」 2연 중장에 주목한다. ‘푸른 하늘 우러르며/ 南天을 바라보며’라는 두 구에서 비슷한 시어를 차용하였다 하여 그것만으로는 표절이라 단정하여 말할 수는 없다. 그의 ‘南天’과 김극기의 ‘南川’은 분명히 다르다. ‘하늘’과 ‘강’, 시적 배경이 다른 것은 맞다. 하지만 그는 이렇게 인터넷에서 글을 따와서 교묘히 시어를 바꾸어 가며 남의 시를 베껴 왔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2연에서 김극기의 ‘南川’을 ‘南天’으로 바꾸었지만, 시적 발상이 비슷하다. 1연 “호젓한 산길 걷다/ 문득 멈춰선 발길”에서도 김극기의 시적 발상이 그대로 녹아 있다. 다시 말해 “길을 나섰네/ 토령의 산마루에 오르려고 하다가/ 물 맑은 문천(남천의 다른 이름)가에 머물고 말았네”를 시조 운율에 맞춰 “호젓한 산길 걷다/ 문득 멈춰선 발길”이라고 줄여 놓은 것이다.
• 호젓한 산길 걷다/ 문득 멈춰선 발길 = 길을 나섰네/ 토령의 산마루에 오르려고 하다가/ 물 맑은 문천가에 머물고 말았네
• 푸른 하늘 우러르며/ 南天을 바라보니 = 푸른 하늘 우러러 아득히 바라보며
• 한 조각/ 하얀 구름이/ 山頂에 걸려있다. = 첩첩이 쌓인 산은 병풍처럼 둘러 있고/ (……)/ 구름의 끝자락엔
이것 역시 우연성 때문일까? 소재, 어휘, 시적 발상 등 여러 층위에서 표절에 근접한 유사성 때문에 창작의 독창성을 인정하기 어렵다. 앞에서 지적한 「산길을 걸으며(3)」과 「산길을 걸으며(5)」처럼 그 어디에도 인용 출처를 밝히지 않은 ‘일그러진 창작’이 빚어낸 베끼기 수준의 ‘표절’ 의혹에서 벗어날 수 없다.
위의 평자의 주장에 대해 그는 2012.9.2. ‘현대시조 창작 연구회’ 카페에서 “필자가 과문해서 그런지는 몰라도 김극기라는 학자는 몰랐다. ‘푸른 하늘 우러러’는 시인이 아니라도 김극기가 아니라도 수많은 사람이 입에 올리고 사용하는 일종의 일상어이다. ‘남천(南天)을 바라보다’도 이상적인 세계를 기다린다거나 님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이 사용하고 있으며 많은 시인묵객이 대춘부(待春賦)를 부를 때 단골로 나오는 구절이다. 굳이 김극기의 남천(南川)을 가져다 붙여서 표절이라고 말할 필요는 없다.”라고 항변했다.
그가 부인하더라도 의혹의 핵심은 1연의 “호젓한 산길 걷다/ 문득 멈춰선 발길”가 “길을 나섰네/ 토령의 산마루에 오르려고 하다가/ 물 맑은 문천(남천의 다른 이름)가에 머물고 말았네”를 시조 운율에 맞춰 “호젓한 산길 걷다/ 문득 멈춰선 발길”이라고 줄여 놓았다는 것, 2연 중장 ‘푸른 하늘 우러르며/ 南天을 바라보며’가 “푸른 하늘 우러러 아득히 바라보며”와 시어와 시상이 흡사하다는 것이다.
평자가 「산길을 걸으며」를 ‘자기 표절’ 시조임을 월간 《예술부산》 1월호 최초 비평 때와 《문장21》여름호에 재반론할 때에도 대표적 예로 든 시조이다. 3연의 “포근한 풀밭 위에/ 팔베개하고 누워본다”에 주목해 본다.
포근한 풀밭 위에/ 팔베개하고 누워본다
– 정해원, 「산길을 걸으며」 3연 중장
그 누가 팔베개하고 내 옆에 와 눕는다.
– 정해원, 「풀밭에서」 1연 종장
이처럼 「풀밭에서」 1연 종장 “그 누가 팔베개하고 내 옆에 와 눕는다.”와 「산길을 걸으며」 3연 중장 “포근한 풀밭 위에 팔베개하고 누워 본다”를 비교해 보면, 시적 발상을 비롯해 한 개의 장을 그대로 베껴 옮겨 놓은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산길을 걸으며」는 김극기의 시적 발상을 베끼고, 또 자신의 시조에서도 베낀 이중 표절에 해당한다고 말한다면 무리일까?
2-4. 당나라 시인 백거이의 「對酒」 그림자
『산길을 걸으며』의 표제 시조이면서 대표작 중 하나인 「산길을 걸으며(6)」도 표절 의혹이 짙다. 중국 당나라의 시인 백거이(白居易, 자 樂天; 772~846)의 칠언절구인 「對酒」, 일명 「백년을 산다 한들」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다.
또한, 「산길을 걸으며(6)」에는 2005년 월간 《한울문학》으로 등단한 受天 김용오의 「산다 한들 백년을 산다든가」의 그림자도 드리워져 있다. 그 시는 낭송시로서는 적합하지만, 개념어의 차용이 곳곳에 등장하므로 가치 있는 시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런 시를 그는 베꼈을 가능성이 있다.
백년을 산다한들/ 남은 생이 얼마겠소
오늘도 산마루에/ 저녁 해가 지고 있소
내 마음/ 네 마음 섞으며/ 남은 날을 살고파라.
– 정해원, 「산길을 걸으며(6) 」 3연
百歲武多時壯健(백세무다시장건) 백 살을 산들 건강한 때 얼마이며
一春能幾日晴明(일춘능기일청명) 봄철이라 한들 맑은 날 얼마이랴
相逢且莫推辭醉(상봉차막추사취) 이렇게 만났으니 마다말고 마시며
聽唱陽關第四聲(청창양관제사성) 양관의 서글픈 이별가나 듣세나
– 백거이,「對酒(백년을 산다 한들)」 전문
벗이여!/ 인간사 새옹지마塞翁之馬 요/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 라/ 하질 않았던가// 오오라 벗이어/ 인간사 火화라 함은/ 과욕過慾에서 비롯된다는 걸/ 왜들 모른다들 하오리까//
(……)// 산다 한들 百年을 산다든가// (……)
– 受天 김용오, 「산다 한들 백년을 산다든가」 에서
「산길을 걸으며(6)」의 3연 초장에 주목한다. “백년을 산다한들/ 남은 생이 얼마겠소”는 너무나 잘 알려진 백거이의 시 「백년을 산다 한들」을 차용한 것임을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그렇다고 그 문장을 차용한 사실만으로 표절이라 단정하여 말할 수도 없다. 하지만 아래와 같이 「산길을 걸으며(2)」 2연과 「산길을 걸으며(6)」 3연과 잇대어 놓고 읽어 보면 受天 김용오의 시 「산다 한들 백년을 산다든가」의 그림자가 뚜렷하게 드리워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아무것 가진 것 없는/ 애초에 빈손인데
두고 온 것 버린 것이/ 있을 리 없는 것을
산 아래/ 아련한 마을/ 저녁연기 피어난다.
– 정해원, 「산길을 걸으며(2) 」 2연
백년을 산다한들/ 남은 생이 얼마겠소
오늘도 산마루에/ 저녁 해가 지고 있소
내 마음/ 네 마음 섞으며/ 남은 날을 살고파라.
– 정해원, 「산길을 걸으며(6) 」 3연
「산길을 걸으며(2)」의 2연과 「산길을 걸으며(6)」의 3연과 잇대어 놓고 연작 시조임을 고려해 보면, 시상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게 연결하여 受天 김용오의 시 「산다 한들 백년을 산다든가」와 아래와 같이 비교해 보면 표절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음이 확연해진다.
• 아무것 가진 것 없는/ 애초에 빈손인데/ 두고 온 것 버린 것이/ 있을 리 없는 것을 =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 라
• 백년을 산다한들 / 남은 생이 얼마겠소 = 산다 한들 百年을 산다던가
그는 자신의 시조에서 “아무것 가진 것 없는/ 애초에 빈손인데/ 두고 온 것 버린 것이/ 있을 리 없는 것을”이라고 한마디로 인생사 ‘공수래공수거’임을 표현해 놓고 남의 시조를 베끼고, 자신의 시조를 짜깁기하는 표절을 왜 했을까?
위의 평자의 주장에 대해 그는 2012.9.2. ‘현대시조 창작 연구회’ 카페에서 “백거이의 ‘대주’가 아니라도 우리 큰고모님이 노래한 내방가사에도 그리고 회심곡이나 만가(輓歌)에도 자주 나오는 ‘백년을 산다한들’ ‘공수래공수거’를 백거이의 그림자라는 것도 모자라 김용오가 누군지는 모르지만, 그런 잡지가 있는지도 모르는 월간 《한울문학》까지 들먹이는 것이 우습기도 하다.”라고 주장하였다.
여기서 그는 현대시조가 지향하는 시어의 독창성을 외면하고, 구시대의 관용 문구 차용을 답습하고 있음을 스스로 시인한 것이다. 또한, 관용 문구를 너무 많이 차용하면 낡은 표현이라고 비판을 받을 수 있다는 것과 표절 의혹에 휘말릴 수 있다는 창작의 기초를 지키지 못했음을 인정한 셈이다.
2-5. 나옹선사의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 하고」 그림자
시조집 『산길을 걸으며』의 ‘序詩’에도 시상의 표절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고려 무학대사의 스승인 나옹선사(1262-1342)의 선시(禪詩)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 하고」의 그림자이다. 종장 “청풍靑風은/ 그것마저도/ 버리고 가라 하네.”를 유심히 읽어 보면, 시적 발상과 문장 구조가 비슷함을 알 수 있다.
산길을 걸을 때는/ 모든 것을 두고 간다.// 한 조각 흰 구름과/ 산새 한 쌍 같이 간다.// 청풍靑風은/ 그것마저도/ 버리고 가라 하네.
– 정해원,「서序」 전문
靑山兮要我以無語(청산혜요아이무어)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 하고
蒼空兮要我以無垢(창공혜요아이무구) 창공은 나를 보고 티 없이 살라 하네
聊無愛而無憎兮(료무애이무증혜) 사랑도 벗어놓고 미움도 벗어놓고
如水如風而終我(여수여풍이종아)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 하네
– 나옹선사,「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1연
그가 나옹선사의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 하고」의 시상을 차용한 것임이 분명하다. 단지 시상을 차용하였다 하여 표절이라 단정하기는 어렵다. 표절 의혹이 짙을 뿐이다.
하지만 나옹선사의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 하고/ (……) 벗어놓고/ (……) 살다가 가라 하네”를 그는 ‘靑山’을 ‘靑風’으로 바꾸고, 현대 시조의 운율에 맞게 “청풍은/ 그것마저도/ 버리고 가라 하네.”라고 문장을 줄여 놓았음을 알 수 있다. 결국, 문장 구조가 동일하다. 이 때문에 더욱 표절 그림자가 짙어진다.
2-6. 자신의 시조를 짜깁기한 여러 흔적
평자가 월간 《예술부산》 1월호에서 자기 표절에 대해 언급하면서, 자기 표절의 대표적인 예로 「입춘에」 1연 종장 “오늘은 현관 앞에다 춘방을 붙입니다.”와 「아버지」 1연 종장 “오늘은 춘방春榜을 써서 현관 앞에 붙이신다.”를 지적하기도 했다. 이 글에서는 「어느 봄날」 1연 중장 “입춘 날 아침에는 춘방春榜을 붙이시고”를 추가하여 지적한다.
오늘은 현관 앞에다 춘방을 붙입니다.
입춘대길立春大吉 만사형통萬事亨通 붙이는 손끝에는
– 정해원, 「입춘에」 1종장, 2연 중장
오늘은 춘방春榜을 써서 현관 앞에 붙이신다.
입춘대길立春大吉 건양다경建陽多慶 양쪽으로 붙이시고
– 정해원, 「아버님」 1종장, 3연 중장
입춘 날 아침에는 춘방春榜을 붙이시고
– 정해원, 「어느 봄날」 1연 중장
위와 같이 「입춘에」와 「아버지」를 비교해 보면, 「입춘에」 2연 중장 “입춘대길立春大吉 만사형통萬事亨通 붙이는 손끝에는”와 「아버지」 3연 중장 “입춘대길立春大吉 건양다경建陽多慶 양쪽으로 붙이시고”도 ‘만사형통’과 ‘건양다경’이라는 말만 바꾸고 서로 짜깁기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여기서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아버님」이라는 시조가 제20회 성파시조문학상(2003) 수상작이라는 것이다. 영남 지방에서 그나마 이름난 문학상인데 심사 과정에서 그의 광범위한 베끼기와 짜깁기 행위에 대해 진짜 몰랐을까?
평자가 「어떤 봄날」의 3연 종장 “내 가슴 한 언저리를 구비 돌아갑니다.”와 「밤에 흐르는 강(2)」 2연 종장 “내 가슴 한 언저리에서 철썩이는 강물소리.”도 최초 비평 때 이미 자기 표절임을 지적했었다. 이 글에서 추가하여 「부나비로 죽고 싶다」의 2연 종장 “세월의 언저리를 돌아 철썩이며 흘러간다.”도 서로 짜깁기한 것임을 제시한다.
내 가슴 한 언저리를 구비 돌아갑니다.
– 정해원, 「어떤 봄날」 3연 종장
내 가슴 한 언저리에서 철썩이는 강물소리.
– 정해원, 「밤에 흐르는 강(2)」 2연 종장
세월의 언저리를 돌아 철썩이며 흘러간다.
– 정해원, 「부나비로 죽고 싶다」 2연 종장
또한, 「밤에 흐르는 강(2)」 1연 초장 “강물은 흐느끼며 밤을 질러 흘러간다.”와 「별빛 지는 밤에」 3연 종장 “세월은/ 덧없이 흘러/ 밤을 질러가누나.”도 서로 짜깁기한 것임을 제시한다.
강물은 흐느끼며 밤을 질러 흘러간다.
– 정해원, 「밤에 흐르는 강(2)」 1연 초장
세월은/ 덧없이 흘러/ 밤을 질러가누나.
– 정해원, 「별빛 지는 밤에」 3연 종장
그뿐만 아니라, 「입동에」 1연 초장 앞의 구 “개암나무 가지 끝에”라는 시구가 「나무」 1연 종장에도 그대로 짜깁기 되어 있고, 「빙점氷點」 1연 중장 앞의 구 “미루나무 가지 끝에”라는 시구가 「한 사내의 실루엣」의 2연 초장 앞의 구에 그대로 다시 등장하고, 「샛강」 3연 종장에 “미루나무 위로”도 등장한다. 이것은 서로 짜깁기한 흔적이라 볼 수 있다. 아래에서 비교하여 읽어 본다.
개암나무 가지 끝에/ 살이 비치면
– 정해원, 「입동에」 1연 초장
창창한/ 개암나무 가지 끝에/ 세월저편을 바라섰다.
– 정해원, 「나무」 1연 종장
미루나무 가지 끝에 북풍이 에고가면
– 정해원, 「빙점氷點」 1연 중장
미루나무 가지 끝에 걸어둔 석양 속으로
– 정해원, 「한 사내의 실루엣」 2연 초장
저 멀리 미루나무 위로 구름 한 조각 흘러간다.
– 정해원, 「샛강」 3연 종장
위와 같은 평자의 주장에 대해 그는 2012.9.2. ‘현대시조 창작 연구회’ 카페에 자신의 심정을 토로했다. “자기 표절이라고 한 것들을 보고 나는 내심 게으름을 실감했다. 나는 작품을 발표하고 나서는 잊어버리는 버릇이 있다. 원고 청탁이 왔을 때 써둔 작품이 없을 경우에는 새로 작품을 쓰게 되는데 그때 나도 모르게 그런 구절이 가끔 들어간 것 같다. 설사 그랬어도 작품집을 묶어서 낼 때는 한번 일별해서 보고 바꿨어야 했는데 나태한 것 같다. 꼭 그런 구절이 아니라도 얼마든지 다르게 표현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강물을 많이 노래하다보면 미루나무가 자주 등장하게 되고 개암나무가 있는 산에 올라가게 되면 개암나무를 자주 마주치게 된다. 그것을 피해서 일부러 미루나무나 개암나무를 보고 느낀 이미지나 시상을 수양버들이나 소나무로 바꾸면 더 이상 한 것이 아닌가?”라고 반성보다는 변명의 길로 내달렸다.
그의 ‘다음 블로그’와 ‘네이버 블로그’에 탑재해 놓은 시조만 보더라도 그가 말한 “나는 작품을 발표하고 나서는 잊어버리는 버릇이 있다.”라는 말이 거짓임을 알 수 있다. 그가 발표한 글의 자료가 온전히 저장되어 있다. 일부는 수상작, 발표 연도, 매체까지 기록해 놓고 있다. 원고 청탁이 들어오면 그 자료를 이용해 짜깁기했을 가능성도 있을 것 같다.
한국인은 불편한 진실과 두려운 진실이 들통 나면 대개는 자신의 우둔함을 솔직히 시인한다. 그래야 이해와 용서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는 왜 반대의 길로 자꾸 달려가려고 할까?
3. 맺음말
이처럼 그는 세상에 드러나지 않은 불편한 진실과 두려운 진실을 간직하고 있었다. 평자의 입장에서 보면 그의 우둔한 진실을 읽어 낸 것이다.
앞에서 살펴본 「산길을 걸으며(3)」, 「산길을 걸으며(5)」, 「산길을 걸으며」만 읽어 보더라도 1개 연 정도는 남의 시를 베꼈고, 1개 장 정도는 자신의 시조에서 짜깁기하였음이 명확하므로 이중 표절이라 해도 무방할 것 같다. 어쩌면 평자가 알지 못하는 또 다른 시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을 수도 있다.
만일 그가 ‘포스트모더니즘’ 추종자라면 “여기저기 작품을 잘 따다 조합하여 발표하는 것이야말로 하나의 창작 기법이다.”라고 항변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포스트모더니즘’ 추종자는 아니다. 아직 구시대 시조를 답습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한자어와 관용 문구를 시어로 절제 없이 채택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증거가 된다.
지금까지 읽어 낸 표절의 그림자만 해도 이 시조집은 작품집으로서 자격을 잃었다. 그가 이후에 어떠한 궤변과 평자에 대해 인신공격을 가해 오더라도 이미 등단 30년을 넘긴 시인의 수준이 아니므로 더 이상의 논박은 무의미하다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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