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텍사스. 두 남녀가 자동차로 어두운 도로를 달려간다. 이들을 쫓던 의심스러운 차가 곧 지나친다. 애비는 남편이 운영하는 바의 직원인 레이와 불륜 관계. 남편 마티는 자신이 고용한 사립 탐정에게서 불륜의 증거 사진을 건내받고 분노한다. 레이를 해고한 마티는 2주치 급료를 요구하는 레이와 뉘우침이 없는 아내에게 분괴한 나머지, 사립탐정에게 두 사람의 청부 살인을 의뢰한다. 그의 분노심은 이미 가게 뒷 뜰에 훨헐 타고 있는 소각장처럼 불타고.
그러나 마티의 금고를 노린 음흉한 사립탐정은 두 사람을 죽인 것처럼 위조한 사진을 마티에게 보여준 후, 훔친 아내 애비의 총으로 그를 사살한 후 금고의 돈을 훔쳐 사라진다. 아내가 남편을 죽인 것으로 꾸민 것. 우연히 급료 문제 때문에 바에 들렀던 레이는 애비가 남편을 죽인 것으로 오인하고 범행 현장을 말끔히 치운 뒤, 아직 살아있는 마티를 차에 태워 외진 곳에 생매장해 버린다. 한편 범행 현장에 자신의 라이타를 놓고 왔다는 사실을 깨달은 사립탐정은 자신의 계획이 틀어졌음을 알고 현장을 치운 레이와 애비마저 저격하려하는데.
제작 노트<분노의 저격자>에서 코엔형제가 차용한 건 제임스 M 케인의 소설<우편배달부는 벨을 두번 울린다>. 초반부의 설정은 로만 폴란스키의 74년 영화 <차이나타운>을 떠올리게 하지만 따지고 보면 치정사건에 탐정이 얽혀들어가는 얘기구조는 고금의 필름 누아르 영화에서 익히 나왔던 소재.
다만 코엔형제는 급박한 리듬으로 전개되게 마련인 이 장르에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와 같은 유럽모더니즘 영화감독이 추구했던 " 죽은 시간"(극적으로 유용하지 못한 시간을 그대로 화면에 살려내는 것)개념을 신중하게 도입한다. 한껏 분위기를 잡으며 뭔가를 살피는 듯한 카메라 움직임이나 긴 화면호흡으로 리듬을 늘이는 것이다. 대중탐정 소설의 통속적인 주제와 필름누아르의 시각 스타일과 유럽영화의 어법이 기묘하게 결합된 영화이다.
리뷰 : 블러드 심플
사실 줄거리만으로 보자면 이 영화는 극히 단순하다. 남편과 남편이 운영하는 클럽에 근무하는 남자, 그리고 그 남자와 사랑에 빠진 아내. 남편은 사립탐정을 고용해 아내의 불륜을 추적하고 결국 청부살인을 사주한다. 하지만 이 닳고 닳은 치정극이 코언 형제의 손에서 재구성되는 과정을 지켜보는 건 한마디로, 마술 같은 경험이다. 인물들의 대사에 의존하지 않고도 공간에서 이야기를 끌어내는 능력이나, 인물들 뒤로 배치된 사물이나 적막함 가운데 퍼지는 사운드, 그리고 인물들의 움직임보다 한 템포 전에 혹은 뒤에 등장하는 그림자를 활용하는 능력은 경탄할 만하다. 무엇보다 한 공간 안의 인물을 다양한 각도에서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듯 포착해내는 촬영은 상황 속에 갇힌 인물들의 무기력함을 드러내는 데 더없이 적절하다. 그래서 이 영화를 이루는 각 장면들의 밀도는 상당히 높다. 그건 영화 속의 그 무엇 하나도 무의미하게 등장하는 법 없이, 모든 것이 정교하게 짜여져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 영화에서 남편과 아내, 아내의 연인, 그리고 사립탐정은 모두 하나의 줄기에서 파생된 인물들이지만, 그들은 각각의 이야기를 지니고 있다. 코언 형제는 인물들 각각의 사정, 나아가 그들의 심리를 개별적으로 부각하면서도 이를 하나의 맥락으로 꿰기 위해 오인의 구조를 이용한다. 말하자면, 진실이 밝혀지는 순간이 끊임없이 지연될수록, 인물들은 서로를 믿지 못하게 되고, 상황은 예측 불가능한 상태로 확장된다. 인물들은 자신의 행동을 추동하는 근본적인 원인을 잊은 채 죄의식과 공포와 신경증에 포획되어 극단으로 나아간다. 그리하여 살인과 죽음은 계속된다.
코언 형제의 이 정교한 데뷔작에서 <파고>를 떠올리는 건 어렵지 않다. 끝없이 황량하게 뻗은 도로 위를 불안하게 달리는 낡은 자동차, 인위적인 클라이맥스 없이도 처음부터 끝까지 거의 동일한 수준으로 유지되는 이상한 긴장감, 그리고 참으로 흥미로운 프랜시스 맥도먼드의 연기. 다만, <파고>에서는 과거에 비해 한결 느긋해졌으나 훨씬 더 냉정하게 독해진 감독의 시선이 느껴진다면, 이 작품에서는 때때로 데뷔작다운 뜨겁고 끈끈한 기운이 감돌고 있다. 어찌되었건, 최근 코언 형제의 흔적들(이를테면, <참을 수 없는 사랑>이나 <레이디 킬러>)에 실망을 금치 못하는 이들에게 <분노의 저격자>는 젊은 형제가 남긴 영원한 선물이다.
감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