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출가를 꿈꾸는 그대에게
/ 법정 스님
저는 요사이 무척 바빴습니다.
제 얼굴을 보면 아시겠지만 추승구족,
가을 중은 다리가 아홉이라는 말을 실감하고 있습니다.
가을이 되면 산에 사는 사람들은
이것저것 월동 준비를 하느라 분주하게 뛰어다녀야 합니다.
더구나 그간 비가 많이 내려 도랑 팬 곳,
오두막으로 올라오는 오솔길 무너진 곳 등을
혼자서 보수하느라 많이 바빴습니다.
여러분들도 이곳에 열 시까지 나오려면 아침부터 바쁘시죠?
하지만 사람은 일거리가 있어야 합니다.
일거리가 있어야 그것을 통해 전체 삶에 탄력이 붙습니다.
일거리가 없으면 삶 자체가 시들고 활기가 없어집니다.
꼭 이런 법회가 아니라도,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일이라면
그 일을 통해 자기 삶에
새로운 에너지와 탄력과 리듬이 붙게 됩니다.
오늘 저는 출가와 출가 정신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불자들이 스님들에게 종종 묻습니다.
왜 스님이 되었습니까?
또는 기독교도들이 묻습니다.
왜 신부님이, 목사님이 되었습니까?
다들 이유를 알고 싶어 하지만,
복잡한 사연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될 때가 되어 된 것입니다.
열매가 떨어질 때가 되었기 때문에 나무에서 떨어진 것입니다.
출가는 집을 나온다는 뜻입니다.
종교 적인 의미에서는
집착과 타성의 집에서 훨훨 떨치고 나오는 것을 출가라고 합니다.
가출과 출가는 다릅니다.
출가는 자기 의지와 선택에 따라서 뚜렷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삶의 궤도를 수정하기 위해 나오는 것이고,
가출은 여러 가지로 상황이 좋지 않아
마지못해 집을 떠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쨌든 가출과 출가는
자기 삶의 궤도를 수정하려는 행위입니다.
삶이란 이런 게 아닌데 하고
회의를 거듭하다가 떨치고 나오는 것입니다.
가끔 집 나가고 싶은 충동 같은 것을 느끼지 않으십니까?
그것이 바로 출가 정신입니다.
일상이 따분하고 무의미하니까
무엇인가 새롭고 나답게 살 수 있는 길은 없는가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모두들 가출하라는 말은 아닙니다.
생각까지는 좋습니다.
일상의 삶 속에서도
소용돌이나 늪에 갇혀 허우적거릴 것이 아니라
거기에서 헤쳐 나올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마음먹기에 달려 있습니다.
삶의 환경이 여러 가지로 다르므로 한결같을 수는 없겠지만,
자신의 삶에 만족할 수 없어서 보다 자기다운,
보다 꽃다운, 보다 인간다운 삶은 없을까 찾게 되는 것이
바로 출가 정신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위해서 왜 출가하는가?
상황에 따라 다르지만
한 생각이 불쑥 일어나서 집을 떠나고 싶어지면
누가 기다리는 것도 아닌데 괜히 마음이 급해집니다.
꼭 불교적으로 출가 하는 승려들만 그런 것이 아니라
일단 덫에서 벗어나야겠다고 마음을 일으키면
한시가 바빠집니다.
저는 생각할수록 불가사의하고
도저히 해답을 찾을 수 없는 일이 하나 있습니다.
부처님 당시부터, 또는 그 이전부터도
중 모집한다는 광고 보고 출가한 사람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기독교에서는 신학대학이 있어서
신부나 목사 될 사람을 공고하고 모집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나라뿐 아니라
세계 어느 나라에도 스님을 모집해서 양성하는 곳은 없습니다.
다 제 발로 걸어 들어옵니다.
참으로 신비한 일입니다.
과거에도 그렇고 현재에도 그렇고 미래에도 그럴 겁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니고 어디서 부르는 것도 아닌데,
어느 순간 불쑥 마음이 일어나
집을 나와 산으로 들어가고 싶은 때가 있습니다.
본인 외에는 그 원인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저 자신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마치 때가 되어 익은 열매가 떨어지듯,
어느 날 한 생각이 일어나 자연스럽게 출가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전 생을 따지면 여러 사연이 있겠지만 모두가 그렇습니다.
누가 부르는 것도 아니고 기다리는 것도 아닌데,
저마다 삶을 훌훌 털고 떠나옵니다.
그것이 출가입니다.
내면에 일어나는 일들을 모르는 남들은
갑작스런 떠남을 보고 놀라겠지만,
본인으로서는 무의미한 일상과 타성의 늪에서 뛰쳐나와
새롭게 시작하고 싶은 것입니다.
모든 수도자가 처음 집을 나올 때 갖는 그 절실한 생각,
그 물리칠 수 없는 의지를 출가정신 혹은 구도정신이라고 부릅니다.
그 정신을 늘 기억해야 합니다.
처음 집을 나올 때의 그 때묻지 않은 절실한 마음을
전 생애에 걸쳐 지니고 있어야 합니다.
그 마음이 풀어지면 출가 정신 자체가 풀어집니다.
늘 깨어 있으라는 것은 그 뜻입니다.
늘 깨어 있으라는 것은 처음 출가 할 때의 마음을 잊지 말고
그것을 언제나 되새기라는 가르침입니다.
서산 대사의 <선가귀감>에 보면 이런 법문이 있습니다.
“출가하여 수행자가 되는 것이 어찌 작은 일이겠는가.
편함과 한가함을 구해서가 아니고,
따뜻이 입고 배불리 먹으려는 것도 아니며,
명예와 재물을 구해서도 아니다.
생과 사의 괴로움에서 벗어나자는 것이며,
부처님의 지혜를 이으려는 것이고,
끝없는 중생을 건지려는 것이다.”
이것이 출가 정신입니다.
이 각오, 이 정신을 늘 지녀야 합니다.
출가란 모든 집착과 얽힘에서 벗어나는 일입니다.
이것은 수행자에게만 해당되는 일이 아닙니다.
진정한 삶을 살아가려는 사람 누구에게나
이 출가정신이 필요합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이게 아닌데.’ 하는 생각이 든 적이 있다면
삶을 변화시켜야 하고,
낡은 타성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이혼하고 집을 나오라는 소리가 아닙니다.
그릇된 생활 습관과 잘못된 업에서 벗어나라는 것입니다.
새로운 업을 지으라는 것입니다.
초기 경전인 <숫타니파타>의 ‘출가편’ 에
부처님 자신이 출가에 대해 고백 하는 구절이 나옵니다.
“눈이 있는 사람은 왜 출가를 했는지,
그가 무엇을 생각하기 때문에 출가를 선택했는지,
그의 출가에 대해 나는 이야기하노라.”
여기서 말하는 ‘눈이 있는 사람’은 깨달은 사람입니다.
자기 자신의 출가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집에서 사는 삶은 비좁고 번거로우며 티끌이 쌓인다.
그러나 출가는 널찍한 들판이며
번거로움이 없다고 생각한 까닭이다.”
초기 경전이기 때문에 표현이 무척 소박합니다.
아무리 넓은 집에 살아도 비좁고 번거롭다는 것입니다.
먼지라는 것은 털어 내는 먼지만이 아니라
여러 가지 고뇌스런 일들을 뜻합니다.
세속적인 것은 거리낌이 많고 너무 번거롭기 때문에
어디에도 거리낌이 없는 널찍한 벌판에서 살기위해서,
한마디로 자유인이 되기 위해서,
모든 구속으로부터 벗어나
안팎으로 자유로워지기 위해서 출가했다는 것입니다.
출가했다고 해서 비좁고 번거롭지 않거나
티끌이 쌓이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올바른 출가수행 생활을 함으로써
번거로움과 비좁음, 티끌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어디에도 거리낌이 없어지게 됩니다.
“모든 욕망에는 근심이 따르는데, 출가는 평안하고 조용하다.”
집을 뛰쳐나왔다는 것은
집착과 욕망의 집으로부터 벗어나왔음을 의미합니다.
단순히 어떤 주거 공간, 어떤 지역에 있는 왕국,
그런 곳이 아니고
집착과 욕망의 집에서 떠나온 것입니다.
집에서 나온 사람은 집이 없는 사람입니다.
무주택자입니다.
전셋집도 없고 사글세 집도 없습니다.
수행자는 본래 자기 집이 없습니다.
자기 집이 있거나 개인의 재산이 있다면 수행자일 수가 없습니다.
본디 그렇습니다.
집착할 집이 없고 욕심 부릴 집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고뇌가 없습니다.
부처님은 집착을 바다에서 소금물을 마시는 것에 비유합니다.
더 많이 마실수록 더 목이 마르다는 것입니다.
마음이 어떤 대상에 대한 집착에 사로잡히면
우리가 얼마나 많은 기회를 가지고
그 집착을 충족시키든 결코 충분한 만족감을 느낄 수 없습니다.
그것은 곧 괴로움으로 이어집니다.
부처님은 기원정사에 머물 때 제자들에게 말합니다.
“진실로 아무것도 갖지 않은 사람은 행복하다.
지혜로운 사람은 어떤 것도 자기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자 보라,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이 여기저기에 얽매여
그 얼마나 괴로움을 당하고 있는가를!”
모든 욕망에는 근심이 따릅니다.
그냥 이루어지는 일은 없습니다.
일상적으로 흔히 경험할 수 있는 일입니다.
불필요한 욕구는 고통을 가져옵니다.
자기 주변을 정리해야 합니다.
어디로 이사 갈 때만이 아니라,
계절이 바뀔 때마다 정리하는 습관을 들여야 합니다.
너저분한 것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한때 필요해서 사들인 것들이
집 안에 쌓이면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어느 집을 가나 사람이 가구와 물건에 짓눌려 옹색해집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많지 않습니다.
물론 가족을 이루고 살 경우에는 우리 수행승들과 다르겠지만,
그래도 살 줄 아는 집과 너저분하게 늘어놓고 사는 집은 다릅니다.
내가 갖기는 짐스럽고 남 주기는 아깝고,
그런 것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늘 깨어 있는 것이 출가 정신이라면
물질의 더미에서 깨어나는 것 역시 출가입니다.
우리를 가두고 있는 비좁은 소유의 방에서 벗어나는 것이
곧 진정한 출가입니다.
출가 수행자는
소유의 자로 재었을 때 가진 것이 없을수록 부자입니다.
언젠가는 이 몸도 버리고 가야 합니다.
내 몸도 버리고 갈 텐데, 소유라는 것은 대단한 것이 아닙니다.
물론 한때 누구나 갖고 싶어 합니다.
친구가 어떤 물건을 사는 것을 보면 갖고 싶어집니다.
빨리 그런 것을 통과해야 합니다.
소유의 늪에 오래 갇혀 있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야 본질적인 삶을 이룰 수 있습니다.
세상이 복잡하기 때문에
단순하게 살아야 제 정신을 차릴 수 있습니다.
그러지 않으면 의식이 분산되어,
자신의 삶을 자주 적으로 살지 못하고
무엇엔가 휘말려 쫓기듯 살게 됩니다.
‘쇼핑하기 위해 태어난다.’란 말은
현대인의 삶을 한마디로 정의해 줍니다.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우유와 장난감과 기저귀에 이르기까지
끝없이 물건들을 사고 또 삽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계속해서 무엇인가를 사도록 현혹하고,
새로운 물건은 새로운 욕망을 부추깁니다.
“욕망에는 근심이 따르는데, 출가는 편안하고 조용하다.”
왕자 싯다르타는 집착과 욕망의 집을 떠납니다.
집이 없는 사람은 가장 자유롭습니다.
하늘을 지붕 삼고 땅을 잠자리 삼아,
어디에도 집착할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집착할 집이 없고, 욕심 부릴 집이 없습니다.
출가란 그런 것입니다.
괴로움의 원인은 집착입니다.
자식에 대한 집착,
살림에 대한 집착,
복잡해 진 관계에 대한 집착,
재산에 대한 집착,
명예에 대한 집착,
이런 것들 때문에 괴로움이 찾아옵니다.
출가란 집착의 집, 욕망의 집에서 벗어나는 일 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여행이 필요합니다.
일상의 굴레에서 벗어나
다른 세상으로 간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집을 떠났다가 언젠가는
영영 그 집으로 돌아가지 못할 날이 올 것입니다.
도중에 마주치는 어떤 사건 사고 때문만이 아닙니다.
그것이 죽음입니다.
따라서 여행을 통해 비본질적이고
일상적인 삶을 주기적으로 털어 내야 합니다.
그래야 다음에 몸을 바꿀 때 어디에도 매이지 않고,
홀가분하게 이쪽 정류장에서 저쪽 정류장으로 지나가듯이
그렇게 갈 수 있습니다.
인간이라고 불리는 우리 존재만이 아니라
동물, 곤충, 새들도 늙음의 법칙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간절히 원한다 한들,
우리 몸을 구성하고 있는 요소들을
원하는 상태로 유지하기는 불가능합니다.
우리에게는 그런 자유가 주어지지 않습니다.
이것은 큰 괴로움과 불만족의 원인이 됩니다.
그런데 이 불만족은 그것을 인식하는 순간
우리에게 자유를 주기도 합니다.
존재의 한계를 알게 되면 진정한 추구가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어떤 것이 마음에 들어 기쁘면 우리는 그것을 쫓아가려고 합니다.
만일 마음에 들지 않고 불쾌하면
그것으로 부터 벗어나고 싶어 합니다.
두 가지 경우 모두 현상에 속은 것입니다.
사실 마음은 하나뿐이며, 현상이 여러 개인 것입니다.
자기 자신에 대해 깨어 있지 못하면
현상들을 쫓아다니게 됩니다.
그것이 우리가 평화롭지 못한 이유입니다.
태국 출신의 고승 아잔차 스님은 말합니다.
“조금 내려놓으면 조금 평화로워질 것이다.
많이 내려놓으면 많이 평화로워질 것이다.
완전히 내려놓으면 완전한 평화와 자유를 알게 될 것이다.
그때 세상과의 싸움은 끝날 것이다.”
크게 버리는 자만이 크게 얻을 수 있습니다.
전부를 버리지 않고서는 전체를 얻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얻는가?
비본질적인 자기를 벗어 버리고
본질적인 자기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비본질적인 옷들을 벗어던지고
그것에 가려져 있던 본질의 나를 되찾는 것입니다.
그래서 출가를 이욕(욕망으로부터 결별 함),
또는 출진(먼지의 세상으로부터 떠남)이라 부릅니다.
벵골 지방의 성인 라마크리슈나의
<카타므리타(불멸의 말씀)>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한 남자가 강에서 목욕을 하기 위해
어깨에 수건을 걸치고 집을 나서려고 하자 그의 아내가 다그칩니다.
“당신은 아무 능력 없이 날마다 빈둥거리기만 하고 있군요.
내가 없으면 하루도 못 살 거예요.
이웃집 남자는 여러 명이나 되는 첩을 한 명씩 버리고 있다는데,
당신이라면 그런 일을 할 수도 없을 거예요.”
남자는 말합니다.
“한 명씩 버리고 있다고?
그런 사람은 다 버릴 수 없어.
진정으로 버리는 사람은 한 명씩 버리지 않아.”
아내가 어처구니없어하며 남편을 비웃습니다.
그러자 남자는 말합니다.
“진정으로 버릴 수 있는 사람은 바로 나야.
난 이렇게 아무 미련 없이 떠나거든.”
그렇게 그는 수건을 어깨에 걸친 채,
집도 아내도 뒤돌아보지 않고 곧바로 출가의 길을 나섭니다.
진정한 출가는 알아차리는 순간,
그 자리에서 버리는 것입니다.
하나씩 버리려고 하면 끝이 없습니다.
그 자리에 새로운 물건이, 새로운 인연이 맺어지기 때문입니다.
더 갖지 못해 부자유한 사람들이 있지만,
전체를 버리고 떠나는 사람은 그 순간 자유를 누립니다.
인간의 진정한 봄은 어디서 옵니까?
묵은 과거를 버리고 새롭게 시작할 때
새로운 움이 틀 수 있습니다.
그럼 저 자신은 왜 출가했는가?
무슨 이유로 세속을 떠났는가?
부처님이 지금 이 자리에서 물으면
저는 이렇게 분명하게 대답할 것입니다.
나답게 살기 위해서, 내 식대로 살기 위해서 집을 떠났노라고.
솔직히 말씀드려서
저는 세상이 무상하다거나 불교의 진리에 매혹되어서
집을 떠난 것이 아닙니다.
불교에서 말하듯이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서라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현재의 한국 불교는 중생 구제 운운할 자격조차 없습니다만,
무상한 게 어디 속세 뿐이겠습니까?
절이든 산중이든 무상하긴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출가 전에 저는 불교에 대해
아는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저의 출가는, 저의 존재의 절실한 요구였습니다.
때가 되었기 때문에 거부 할 수 없는 어떤 것이
저를 그 길로 이끌었을 것입니다.
자기답게 살려는 사람이 자기답게 살고 있을 때는
환희심으로 충만하지만,
그러지 못할 때는 고통과 번뇌가 따릅니다.
자기 몫의 생을 아무렇게나 소비해 버릴 수 는 없는 까닭에
저는 출가를 결심했습니다.
20대에 출가할 무렵,
저는 우주의 번뇌를 혼자 짊어진 것처럼
며칠 밤을 뜬눈으로 지새우면서
메아리도 없는 물음을 토하곤 했습니다.
6·25 전쟁으로 수많은 생명들이 죽어 가는 것을 보고나니
삶과 죽음에 대한 의문이
젊은 영혼 속으로 걷잡을 수 없이 밀려왔습니다.
자나 깨나 앉으나 서나,
‘나는 왜 살고 있는가?
나는 무엇이고 어디로 가고 있는가?
어떻게 하면 내 식의 삶을 살 수 있는가?’ 하는
의문들이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어떤 친구들은 바다를 건너기만 하면
새로운 세상이 있을 것이라 믿고 밀항선에 몸을 실었습니다.
그래서 돈 없는 친구들이 주머니를 털어
환송회를 열어 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극심한 존재의 고통을 이기지 못해
나머지 생애를 스스로 반납한 친구들도 있었습니다.
마침내 출가를 결심한 그때의 저의 심정은,
소설 <광장>의 주인공 이명준과 비슷한 것이었습니다.
남도 북도 아닌 중립국을 선택해 가다가
그 중립에서조차 바다로 뛰어내린 그런 심정이었습니다.
물론 저는 그 주인공과는 달리 삶을 포기하지 않고
내 식의 생을 끝까지 추구하려는 길로 들어섰습니다.
출가는 소극적인 도피가 아니라 적극적인 추구입니다.
누구도 어떻게 해 줄 수 없기 때문에
내 의지로써 내 삶을 재구성하려는 시도인 것입니다.
집을 떠나오기 전 제가 가장 아쉬워 한 것은 책이었습니다.
넉넉지 못한 살림에서 어렵사리 모은 소중한 책 들을
버리고 떠나는 것이 못내 망설여졌습니다.
그것이 저의 유일한 소유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것들을 차마 다 버릴 수 없어
서너 권만 챙겨 가기로 마음먹고 이 책 저 책 뽑았다가
다시 꽂아 놓기를 꼬박 사흘 밤을 되풀이해야 했습니다.
말 그대로 끊어버리기 힘든 집착이었습니다.
책에 대한 집착이나 재물에 대한 집착이나
인간관계에 대한 집착이나,
모두 집착이긴 마찬가지입니다.
결국 세 권의 책을 골라 짐을 꾸렸지만,
산에 들어와서 보니
그 세 권 모두 시시하고 별 도움이 되지 않는 책들이었습니다.
집착을 버리고 나서 보면 모두가 이와 같습니다.
침묵의 성자로 알려진 인도의 요가 수행자
바바 하리다스의 글에 나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수행자가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숲 속에서 홀로 살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다른 수행자 한 사람이 찾아 와 그에게
<바가바드기타>(‘신이 부르 는 노래’라는 뜻으로
인도 철학의 꽃) 한 권을 주고 갑니다.
수행자는 날마다 그 책을 읽기로 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쥐가 책을 쏠아 버린 것을 보고
수행자는 쥐를 쫓기 위해 고양이를 한 마리 기릅니다.
고양이에게 먹일 우유가 필요해지자
이번에는 젖소를 키웁니다.
이 짐승들을 혼자서 돌볼 수 없게 되자
그는 젖소를 키울 여자를 한 명 구합니다.
그렇게 숲 속에서 몇 해를 보내는 동안
수행자는 커다란 집과 아내와 두 아이와
젖소들과 고양이 무리들을 갖게 됩니다.
수행자는 어쩌다가 이런 신세가 되었는지
곰곰이 생각해보고는,
한 권의 책이
이토록 걷잡을 수 없는 사태를 몰고 온 것을 알아차리고
한숨을 짓습니다.
집착이란 이와 같습니다.
한 가지 소유물에 대한 집착이 새로운 집착을 부르고,
한 가지 인연이
더 많은 복잡한 인연들을 몰고 오는 것이 세간법입니다.
집에서 몸만 빠져나온 것을 가리켜 출가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단 하나의 집착이라도
미련 없이 털고 나올 수 있어야 진정한 출가입니다.
책이든 그림이든 연인이든
단 한 가지의 집착이라도 남아 있다면
그것은 아직 출가가 아닙니다.
출가는 일회적인 행위가 아닙니다.
결코 일회적으로 끝날 수가 없는 것이 출가입니다.
매번 일어나는 모든 집착으로부터
거듭거듭 떠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출가란 끝이 없는 탈출이며,
수행이란 일종의 장애물 경주와 같습니다.
궁극의 목적지에 이르기까지 끝없이
길 위의 사람으로 남아 있으면서
“나는 왜 출가했는가? 무엇을 위해 출가했는가?”를
끊임없이 되묻는 것이 참된 출가자의 정신입니다.
그 물음만 이 출가자를 깨어 있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지 않으면 그는 더 이상 출가자가 아닙니다.
하늘을 나는 새가 날개짓을 멈추면 추락하는 것과 같습니다.
또한 칼날이 무뎌지면 칼로서의 기능을 잃는 것과 같습니다.
칼이 칼일 수 있는 것은
그 날이 날카롭게 서 있을 때 한해서입니다.
누구를 상하게 하는 칼날이 아니라
버릇과 타성과 번뇌를 가차 없이 절하는 지혜의 칼날입니다.
자신을 붙들어 두고 근원적인 의문을 잊어버리게 만드는
모든 안락함, 편안함, 타성, 즐거움을
거듭거듭 떨치고 새롭게 출가해야 합니다.
출가는 떠남이 아니라 돌아옴입니다.
진정한 나에게로,
그동안 잊혔던 본래의 나로 돌아오는 길입니다.
출가는 소음과 잡다한 얽힘에서 벗어나 침묵의 세계로 들어섭니다.
말이 안으로 여물도록 인내함으로써 우리 안의 질서를 찾습니다.
중심을 바로 세워
진정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만 가려내는 그런 눈뜸입니다.
출가는 본래의 나를 찾아 나섭니다.
나는 누구인가 하고 스스로에게 묻습니다.
존재 속의 존재에게 간절히 묻습니다.
답은 그 물음 속에 있습니다.
출가는 안정된 삶을 뛰어넘어 충만한 삶에 이르려는 것입니다.
안정과 편안함은 타성의 늪입니다.
쉼 없는 탈출과 새로운 시작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변화가 없이는 죽은 존재입니다.
출가는 문명의 도구들을 뒤로하고 자연으로 다가갑니다.
인위적인 문명의 감옥에서 나와,
인간이 기댈 유일한 품인 자연 속으로 들어갑니다.
부처님은 숲 속에서 수행했고
숲 속에서 깨달음을 얻었으며 숲 속에서 가르침을 폈습니다.
파괴되지 않고 오염되지 않은 자연 안에서만 인간은
본래의 건강을 되찾을 수 있습니다.
출가는 스스로 단순하고 간소한 생활양식을 선택합니다.
가난은 수행자에게 겸손과 평안을 가져다주고
바른 정신을 지니게 합니다.
내가 가난해 봄으로써 이웃의 가난과 고난에 눈을 돌립니다.
출가자는 욕망에 따라 살지 않고 필요에 따라 살아갑니다.
그는 안으로 부유한 사람입니다.
출가는 경제 논리가 아니라 진리를 삶의 원리로 삼습니다.
출가는 세상에게 달라지라고 말하기 전에
자신이 먼저 달라지겠다고 다짐합니다.
출가는 무엇에도 매이지 않는 자유에 이르는 길입니다.
인간은 본디 자유로운 존재이며,
존재의 궁극적인 목표도 자유입니다.
물질, 온갖 관계, 심지어
자신이 따르는 종교로부터도 자유로워지는 일입니다.
출가는 고통입니다.
세상에는 두 가지 고통이 있습니다.
하나는 더 많은 고통으로 인도하는 고통이고,
하나는 고통의 끝으로 인도하는 고통입니다.
모든 욕망과 인연으로부터의 떠남은 결코 쉬운 길이 아닙니다.
생가지를 찢는 듯 한 아픔이 뒤따릅니다.
출가를 꿈꾸는 자에게는 그 아픔은 숙명과도 같습니다.
하지만 이 큰 고통을 통해
모든 고통의 끝에 이르는 것이 출가입니다.
▒ 이 글은 2003년 10월 5일,
길상사 불교문화강좌에서 설법하셨던 내용입니다.
출처: 월간 맑고 향기롭게 산방한담(山房閑談) 2018년10월
|
첫댓글 거룩하시고 慈悲하신 부처님 慈悲光明이 비춰주시길 至極한 마음으로 祈禱드립니다. 感謝합니다.
成佛하십시요.
南無阿彌陀佛 觀世音菩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