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9월 3일 토요일
1. 탐방지 : 소쇄원
2. 위치 : 전남 담양군 남면 지곡리 123번지
3. 날씨 : 맑음/황혼
4. 동반자 : 4649 산행팀(한철규대장, 민조홍, 소재림, 오병호, 유기동, 조진경, 하택호 그리고 나 (총 8명)
5. 어떻게 : 무등산 등반 후
<탐방기>
조선시대의 한국 정원으로 담양에 있는 양산보의 소쇄원이 항상 입에 오른다.
무등산 등반을 위하여 광주에 내려와 등산을 마치고, 소쇄원을 탐방하기 위하여 무등산 도립공원관리사무소의 주차장을 출발로 이곳 담양의 소쇄원에 도착한다. 그러나 시간이 너무 늦어 입장이 종료되었다. 사정을 하니 마음씨 좋은 관리인이 무료로 입장을 허락한다. 아마도 입장료는 청소년이 700원, 성인이 1000원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소쇄원)
1983년 7월 20일 사적 제304호로 지정되었다가 2008년 5월 2일 명승 제40호로 변경되었다. 전체 면적은 4,060㎡(지정구역), 118,866㎡(보호구역)이다. 이곳은 물이 흘러내리는 계곡을 사이에 두고 각 건물을 지어 자연과 인공이 조화를 이루는 대표적 정원이다.
제월당(霽月堂)과 광풍각(光風閣), 오곡문(五曲門), 애양단(愛陽壇), 고암정사(鼓巖精舍) 등 10여 동의 건물로 이루어져 있다. 제월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집이고, 광풍각은 정면 3칸, 측면 4칸의 팔작지붕집이다. 또한 광풍각에는 영조 31년(1755) 당시 소쇄원의 모습이 그려진 그림이 남아 있다.
홍문관(弘文館) 대사헌(大司憲)으로 있던 소쇄 양산보는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나 스승인 조광조(趙光祖)가 사사되자 모든 관직을 그만두고 고향인 이곳으로 내려와 소쇄원을 지었다.
[출처] 담양 소쇄원 [潭陽瀟灑園 ] | 네이버 백과사전
(양산보)
한편, 소쇄원 지어진 연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이 소쇄원을 만든 주인 양산보는 후손에게 “어느 언덕이나 골짜기를 막론하고 나의 발길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으니 이 동산을 남에게 팔거나 양도하지 말고 어리석은 후손에게 물려주지 말것이며, 후손 어느 한사람의 소유가 되지 않도록 하라”는 유훈을 남긴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 지역이 정유재란때 왜적들의 집중적인 공략을 받았기 때문에 소쇄원의 건물들이 불에 타버리고 주인의 손자인 양천운이 다시 중건하게 된 기록이 남아있으며, 5대손인 양경지에 의해 완전 복구가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소쇄원은 은둔을 위한 정자이지만 그의 곧은 뜻을 알게된 사림들은 소쇄원을 중요한 공간으로 인식하고 주인과 교류를 하게 됨으로서 열린 공간으로 호남 사림의 명소가 된 것이다.
소쇄원 주인과 교류하였던 인사들의 면모를 보면 면앙정 송순, 석천 임억령, 하서 김인후, 고봉 기대승, 제봉 고경명, 서하당 김성원, 송강 정철등 당대의 기라성 같은 선비들이었다.
이후 소쇄원은 양산보의 유훈대로 후손들의 극진한 보살핌을 받으며 15대에 이르고 있다.
소쇄원을 만든 사람은 양산보라는 사람으로 1503년에 태어나 1557년 생을 마감한 이다. 15살에 정암 조광조의 문하에서 수학하는데 스승이 바른 정치를 구현하다 기묘사화(1519년)에 연루되어 화순 능주에서 귀양을 살다 사약을 받고 죽게되자 17살에 고향으로 돌아와 평생 세상에 나가지 않고 은둔, 처사의 길을 걸었던 사람이다. 이는 선비가 불행하게도 때를 만나지 못하면 도를 마음에 담아둘 뿐 펼치지 못하며 교화는 자신의 집안으로만 그치고 넓혀지지 못한다는 옛적의 말을 볼 때 그로 인해 양산보는 선비의 큰 뜻을 펴지 못하였으나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지 않고 학문에 힘쓰며, 지역의 선비와 교류하고 나무와 화초를 가꾸고 원림을 조성하며 바른 삶을 살아간 선비의 본보기가 되었던 사람이었음을 알수 있다. 소쇄공의 행적을 기록한 글을 보면 “본래 덕성이 높은데다 또한 조용한 곳에서 오랫동안 학식을 함양했으니 알차고 참된 인격자로서 호남에서 위대한 선비로 존경받는 인물이 된 것이다. 안에서는 부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여 언제든지 부모 곁에 있으면서 환한 얼굴로 부모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조석으로 인사드리는 것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
일찍이 말하기를「사람에 있어서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보다 더 큰 것이 없다」하였으며 「사람의 자식된 자로서 부모에게 효도를 못하는 자를 어찌 사람이라 할 수 있겠느냐」라고 할 정도였다.
특히 그는 수백마디로 된 효부(孝賦)를 지어 효에 대한 근본정신과 사상을 밝혔다. 더욱이 한문에 밝지 않은 일반인들의 이해를 위해 한글을 세기어 적는등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기 때문에 퍽 감동적인 책이라 아니할수 없다.” 라고 후학인 이민서는 소쇄공을 얘기하고 있다.
그의 부인은 광산김씨로 정랑 김후의 따님이며 환벽당 주인인 사촌 김윤제의 누이였다. 결혼을 한 해는 언제인지 확실치 않지만 19세에 첫 아들을 낳고 21세에 차남인 자징이 태어나고 25세에 셋째 아들이 태어났으며 그 해에 부인이 죽게되었다는 기록이 전한다.
양산보의 생애는 크게 세가지로 구분 지을수 있다. 하서 김인후의 “소쇄정 즉사(소쇄정에 올라 즉석에서 지은 시)”가 쓰여진 것이 1528년인데 송강 정철이 지은 “소쇄원제 초정”이란 시에서 '자신이 태어난 해에 이 정자가 조성되었다' 하여 1536년으로 혼돈 되게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면앙정 송순의 “종제양언진소쇄정”이 1534년에 만들어진 것을 보더라도 1520년 중반 소쇄원이 만들어지기 시작하여 1536년경 1차적인 완성이 있었던 것으로 유추된다.
1517년 이전까지의 성장기와 1517년부터 1519년까지의 수학기, 그리고 1519년부터 생애를 마감할때까지의 낙향은일기로 쉽게 나누어 볼수 있는데 그중 은일기인 20대에는 이미 결혼을 했고 자식을 낳았으며, 소쇄원에 대한 일단의 공사를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30대에는 면앙정 송순, 하서 김인후, 석천 임억령등과의 학문적 교유와 더불어 구체적인 소쇄원의 조영에 들어갔으며 40대 초반에 완결을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40대 중반에는 벼슬길에 천거를 받았지만 나아가지 않고 은일하며 부친에 대한 효성을 다하였고, 50대에는 생을 마감하게 되었던 것이다. (출처: 소쇄원 홈페이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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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쇄원의 공간은 현존하는 판화로 1755년에 만들어진 소쇄원도와 1548년 하서 김인후가 쓴 소쇄원 48영에 의해서 그 공간의 활용을 이해할 수 있다. 현재는 1,400여 평의 담장 안 영역으로 이해되고 있으나 그 범위를 포괄적으로 보면 內園과 담장 밖 공간의 外苑으로 대별할 수 있겠다. 시간 상 외원은 방문하지 못하고 내원만을 살펴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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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표소를 지나 입구로 들어가는 길 양가에는 대나무가 심어져 있다.
(입구공간)
입구에 대숲길, 연못, 위교와 개울가의 버드나무가 있다. 현재는 넓은 마을길이 나있으나 1970년만해도 좁은 길이었다. 뿐만아니라 계곡을 따라 광풍각에 이르는 길도 있었다.
입구는 담장을 끼고 들어서며 계곡을에 이르기 전 모종처럼 세워진 정자가 있고, 이곳이 대봉대이며 이곳에서 계곡의 흐름을 즐겼다.
(대봉대 공간)
소쇄원 입구에서 담을 따라서 오곡문에 이르는 공간이며 작은 연못, 대봉대, 초정, 애양단 담장, 오곡류의 계류, 나무 홈대, 물레방아, 큰 연못과 오동나무, 대밭, 목백일홍 등이 있다. 특히 대봉대는 봉황이 내려앉는 곳으로 이상향에 대한 염원이며, 애양단은 따뜻한 부모의 사랑을 상징하는 공간이다.
(출처: 소쇄원 홈페이지에서)
입구에서 담장을 따라 오르니 담장에 오곡문(五曲門)이란 글씨가 쓰여져 있다. 이곳에는 문이 있었으나 지금은 없어지고 그 현판만을 담장에 남겨 놓았다.
(계류공간)
이채로운 수구, 오곡류 계곡과 외나무다리, 조담과 폭포, 광석, 옥추횡금, 탑암, 상석과 살구나무, 오동나무, 단풍, 창포 등이 있다. 오곡문 옆을 지나온 계곡물은 다섯 번 굽이쳐 오곡류를 이루고, 조담에 잠시 머문 다음 폭포로 떨어진다. 일부의 계곡물은 구멍이 파진 통나무를 지나 연못으로 모이고, 넘친 물은 수차를 돌리며 계곡으로 떨어진다.
오곡문을 통해 들어온 계곡물은 외나무다리를 배에 얹고 광풍각 아래로 흐른다.
(화계)
외나무다리와 매화, 소나무, 국화, 회화나무, 치자 등이 있다.
담장에는 송시열선생이 썼다는 소쇄처사양공지려(瀟灑處士梁公之廬)의 글씨가 새겨져 있어 '소쇄 양산보의 오두막 집' 임을 나타낸다.
(담장)
소쇄처사양공지려, 애양단, 오곡문의 글자가 새겨있다. (호화롭지 않은 전통적인 담장으로) 소쇄원의 영역을 한정해주고 감싸준다.
이곳 소쇄원의 주 정자로서 [제월당]이 중앙에 자리잡고 있으며 정자라기 보다는 생활을 할 수 있는 공간인 정사이다. 계곡과 건물의 사이에는 광풍각이 있고 광풍각은 계곡물의 넘침을 예방하기 위하여 계곡으로부터 축대를 쌓아 건물을 앉혔으며 이 제월당은 마당으로부터 축대와 계단을 만들어 건물을 높였다. 정면 3칸, 측면 2칸이라고 소개되어 있으나 측면은 1칸으로 보이며 정면 3칸 중 1칸은 방을 만들어 기거할 수 있도록 했으며, 2칸은 앞뒤, 좌측의 경치를 감상하기 위하여 트여진 공간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월당)
파초, 천간이라는 대숲이 있다. 제월당은 안채에 해당하며 방과 대청으로 구성된 평범한 가옥이다. 그러나 주인이 기거하며 소쇄원을 경영하였을 주 공간이다.
제월당 마당을 지나 작은 문이 만들어져 아래의 광풍각의 공간과 구분을 짓고 있다. 아마도 안채와 사랑채의 구분을 위하여 만드는 담장의 역활을 하고 있는 듯 하다. 그 문의 높이가 낮아 항상 고개를 숙이고 출입하며 겸손을 몸에 익히게끔한 뜻이 있지 않을까?
제월당 문을 나와 돌계단을 타고 내려서면 광풍각이 자리잡고 있다. 정면 3칸, 측면 4칸으로 측면의 중앙 2칸과 정면의 중앙 1칸에는 방을 만들어 밀폐된 공간을 형성하고 있으며, 사방에 문을 만들어 오픈 공간으로 변형할 수 있게 설계되어 있다. 외부의 객은 주로 이곳에서 환대한 곳으로 보인다.
(광풍각)
소쇄원의 중심건물로 사랑채에 해당하는 광풍각이 있고, 담장을 돌린 뒤뜰에는 복숭아 나무가 있는 도오가 있다.
광풍각 아래로는 깊은 계곡이 흐른다. 계곡을 건너서는 연못이 만들어져 있다. 이 계곡의 공간은 화류의 공간으로 나무와 연못, 화단을 만들어 즐겼던 것으로 보인다.
입구에서 담장을 따라 제월당으로 들어서고, 제월당 마당을 지나 문을 나와 광풍각에 이른다. 광풍각 서쪽에는 대나무 숲이 형성되어 있고 대나무 숲과 광풍각 사이에는 계곡을 건널 수 있는 다리가 놓여 있다. 그리고 그 아래에 연못을 만들어 아마도 물고기를 키우고 그 헤엄치는 물고기의 한가함을 즐겼으리라.
다리를 건너면 입구로 가는 길과 다시 만난다.
담양의 고장답게 대나무 숲이 시원함을 준다.
그러나 여유가 없어 앞서간 일행의 모습을 찾는데 바쁘다.
담양의 양산보 '소쇄원'의 탐방은 이렇게 마무리한다.
양산보는 건축에 관심을 가졌던 학자라고나 할까! 옛날에는 학문을 하고 재력이 있으면 현대와 같이 건축에 많은 관심을 가졌으리라.
인간의 삶이란 것이 의식주아닌가!
그 중 주(住)는 과거와 미래를 이어주는 공간으로 간주되기도 한다.
그래서 삶에 급급한 평민들은 기거할 공간만을 확보하면서 생을 마감했으나, 권력가와 재력가는 그 위세와 인생의 허무함을 느끼며 무엇인가를 남기려고 한것이 아니겠는가.
소쇄원은 현재의 규모로는 아담하지만 과거로서는 상당한 규모의 사교장이었을 것이다.
1548년 하서 김인호가 이 소쇄원을 보고 쓴 글 '소쇄원48영'을 보면 그 곳곳의 구성과 용도를 감탄하였다.
만약 양산보가 스승인 조광조의 사사에 회의를 품지 않았다면 지금의 소쇄원이 내려올 수 있었을까?
인생은 낙담과 좌절이 있어 그의 돌파구로서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가는가 보다.
첫댓글 깨끗하고 시원하다는 의미의 소쇄원........그곳에서 조금이라도 마음에 담아온것.......비움
굳은 의지로 사는 사람은 450여년이 지나도 이름을 남기고 흔적을 남기는구만. 난 비움보다는 흔적을 배우고 온것 같네.
자세한 설명을 곁들이니 좋구먼........찾아 올리느라 수고가 많네....
현장을 돌면서 배우고, 자료를 찾고 하니 즐거움이 두배구만. My pleasure!
눈에 보이는 것과 설명을 같이하니 더 많은 이해를 할 수 있어 좋네...고마우이....
조경에서 양산보의 소쇄원은 중요한 의미를 가지네. 한번 방문해 보고 싶었는데 대장 덕택에 이번 방문하게 되어 더 없이 기쁘네. 고맙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