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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진도 고성중학교 총 동문회 원문보기 글쓴이: 갯바람
대 |
왕 명 |
즉위년도 |
재위기간 |
약 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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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태조(太祖) |
8589-1392 |
6 |
휘는 성계(成桂). 고려 말 무신으로 왜구를 물리쳐
공을 세우고, 1388년 위화도 회군으로 고려를 멸망
시키고 92년 조선왕조를 세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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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
정종(定宗) |
8595-1398 |
2 |
휘는 방과(芳果). 사병을 삼군부에 편입시킴. 즉위 2
년 만에 방원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이 되었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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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
태종(太宗) |
8597-1400 |
18 |
휘는 방원(芳遠). 태조가 조선을 세우는데 공헌하였
으며, 왕자들의 왕위 다툼(왕자의 난)에서 이겨 왕
위에 오름. 여러 가지 정책으로 조선왕조의 기틀을
세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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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
세종(世宗) |
8615-1418 |
32 |
휘는 도. 태종의 셋째아들. 집현전을 두어 학문을 장
려하고, 훈민정음을 창제하고, 측우기, 해시계 등의
과학기구를 창제케 함. 외치에도 힘을 써 북쪽에 사
군과 육진, 남쪽에 삼포를 두었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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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
문종(文宗) |
8647-1450 |
2 |
휘는 향(珦). 학문에 밝고 인품이 좋았으며, 세종의
뒤를 이어 유교적 이상 정치를 베풀고 문화를 발달
시켰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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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
단종(端宗) |
8649-1452 |
3 |
12살에 왕위에 올랐으나 계유사화로 수양대군에 의
해 영월에 유배되었다가 죽임을 당함. 200년 후인
숙종 때 왕위를 다시 찾아 단종이라 하였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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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
세조(世祖) |
8652-1455 |
13 |
휘는 유. 단종을 좇아내고 왕위에 오른 수양대군. 국
조보감(國朝寶鑑), 경국대전(經國大典) 등을 편찬하
고 관제의 개혁으로 괄목할만한 치적을 남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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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
예종(睿宗) |
8665-1468 |
1 |
휘는 광(胱). 세조의 둘째 아들. 세조 때부터 시작한
경국대전을 완성 시켰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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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
성종(成宗) |
8666-1469 |
25 |
휘는 혈. 학문을 좋아하고 숭유억불, 인재등용 등 조선
초기의 문물제도를 완성함. 경국대전을 편찬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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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
연산군(燕山君) |
8691-1494 |
12 |
휘는 융. 폭군으로 무오사화, 갑자사화를 일으켜 많
은 선비를 죽임. 중종반정으로 폐위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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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
중종(中宗) |
8703-1506 |
38 |
휘는 역. 혁신정치를 기도하였으나 훈구파의 원한
으로 실패하고 1519년 기묘사화, 신사사화를 초래
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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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
인종(仁宗) |
8741-1544 |
1 |
장경왕후의 소생. 기묘사화로 없어진 현량과를 부
활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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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
명종(明宗) |
8742-1545 |
22 |
휘는 환. 중종의 둘째 아들. 12세에 즉위하여 을사사
화, 정미사화, 을유사화, 을묘왜변을 겪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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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
선조(宣祖) |
8764-1567 |
41 |
명종이 후사 없이 승하하자 16세에 즉위. 이이, 이황
등의 인재를 등용하여 선정에 힘썼으나 당쟁과 임
진왜란으로 시련을 격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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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
광해군(光海君) |
8805-1608 |
15 |
휘는 혼. 당쟁으로 임해군, 영창대군을 역모로 죽이고
(계축사화), 인목대비를 유폐하는 등 패륜을 많이 저
질렀으며 한편 서적편찬 등 내치에 힘쓰고 명나라와 후
금에 대한 양면 정책으로 난국에 대처함. 인조반정으로
폐위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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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
인조(仁祖) |
8820-1623 |
26 |
광해군을 몰아내고 왕위에 올랐으나 이괄의 난, 병
자호란, 정묘호란을 격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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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
효종(孝宗) |
8846-1649 |
10 |
휘는 호. 인조의 둘째 아들. 병자호란으로 형인 소현
세자와 함께 청나라에 볼모로 8년간 잡혀 갔다 돌아
와 즉위 후 이를 설욕하고자 국력을 양성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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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
현종(顯宗) |
8856-1659 |
15 |
휘는 연. 즉위 초부터 남인과 서인의 당쟁에 의해 많
은 유신들이 희생됨. 대동법을 전라도에 실시하고,
동철제 활자 10만여 글자를 주조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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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
숙종(肅宗) |
8871-1674 |
46 |
남인, 서인의 당파싸움(기사사화)과 장희빈으로 인
한 내환이 잦음. 대동법을 전국으로 확대하고, 백두
산 정계비를 세워 국경을 확정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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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
경종(景宗) |
8917-1720 |
4 |
휘는 윤. 숙종의 아들로 장희빈 소생. 신임사화 등
당쟁이 절정에 이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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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
영조(英祖) |
8921-1724 |
52 |
탕평책을 써서 당쟁을 제거에 힘썼으며, 균역법 시행,
신무고 부활, 동국문헌비고 발간 등 부흥의 기틀을 만
듬. 말년에 사도세자의 비극이 벌어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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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
정조(正祖) |
8973-1776 |
24 |
휘는 성?,이름 산(蒜)?,탕평책에 의거하여 인재를 등용
하고, 서적보관 및 간행을 위한 규장각을 설치함. 임진
자, 정유자 등의 새 활자를 만들고 실학을 발전시키는
등 문화적 황금시대를 이룩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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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
순조(純祖) |
8997-1800 |
34 |
휘는 공. 김조순(金組淳) 등 안동김씨의 세도정치 시
대. 신유사옥을 비롯한 세 차례의 천주교 대 탄압이 있
었음. 1811년 홍경래의 난이 일어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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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
헌종(憲宗) |
9031-1834 |
15 |
휘는 환(奐). 8세에 즉위하여 왕5년에 천주교를 탄
압하는 기해사옥이 일어났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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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
철종(哲宗) |
9046-1849 |
14 |
휘는 변. 헌종이 후사 없이 죽자 대왕대비 순원황후
의 명으로 즉위함. 왕2년 김문근(金汶根)의 딸을 왕
비로 맞아들여 안동 김씨 세도정치가 시작됨. 진주
민란 등 민란이 많았음. 병사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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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
고종(高宗) |
9060-1863 |
44 |
휘는 희(熙). 흥선대원군의 둘째 아들. 대원군과 민
비의 세력다툼, 구미열강의 문호개방 압력에 시달
림. 1907년 헤이그 밀사사건으로 퇴위함. 임오군란
이 일어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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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
순종(純宗) |
9104-1907 |
3 |
이름은 척(拓). 고종의 둘째 아들. 1910년 일본에 나
라를 빼앗겨 35년간 치욕의 일제시대를 보내게 됨.
이왕(李王)으로 불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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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망)9107-
1910 |
2. 복군 감격과 벅찬 귀도 행렬
세종대왕이 즉위와 동시에 먼저 왜구소굴인 대마도를 정벌하여 복속시키고 16여 년의 세월 동안 줄기차게 북방 여진족을 물리쳐 6진을 개척 완료(세종16년)하고 난 직후 세종19년(1437년) 비로소 <진도군>을 <해진군>에서 분리하여 본향섬에 복귀시키고 모두 섬으로 돌아가라 하고, 그로 모두가 87년 동안 내륙을 떠돌던 유랑을 비로소 청산하고 일제히 섬으로 돌아오던 날은 실로 그보다 번찬 감동이 없었으리라. 그로 해진군과 원진진도를 떠나던 당시 기나긴 행렬은 원진포 해창에서 바로 배를 타고 고천암-마로해협-진도 동북부 해안으로 들어선 선 일부가 있었으리라. 그리고 주류가 해진읍과 원진에서 육로로 고천암 해안을 따라 황산(남리) - 삼지원(옥동) 나루터에 이르러 배를 타고 울돌목을 건너 벽파진으로 들어왔으리라. 그 육로에서 일부는 황산(남리)-삼지원 도중 부곡반도로 먼저 내려서 부곡반도 끝에서 마로해협을 건너기도 했으리라. 그리고 진도군청 관아는 다시 천년 진도읍성인 고성으로 들어서고, 주민들은 다시 예 살던 고향집터 각처 마을들로 다시 돌아갔으리라.
3. 조선 새 진도 대역사(大役事) 국방요새구축
비록 백여 호 주민들이 떠나지 못하고 남아있었다고는 하나 87년 동안 주인 없이 비워둔 섬이 어찌 무사하랴. 왜구들에 의해 화려하던 천년읍 고성과 옛 관아며 고찰 등 귀중한 문화유산들은 다 불타고 무너진 폐허 속에 온전한 마을은 하나도 없고 드넓은 들녘들도 녹음방초 잡초들만 무성했으리라. 진도군 관과 주민들은 마치 170여 년 전 겨레 새 국가 <오룡국>을 세우던 그날처럼 관민 모두가 혼연일체로 하나가 되어 새 진도건설에 모든 열정을 바쳤다. 자신의 집을 짓고, 전답을 일구기 전 먼저 새 읍성과 산성을 구축하고 군청을 비롯하여, 왜구들을 막는 영원하고 굳건한 해안진성을 구축하기 위해 국가의 의지와 지원에 따라 신명을 바친 것이다. 그로써 회귀 2여 년 만에 지금도 생각키 어려운 엄청난 대역사를 완성하고 세종22년(1440년) 비로소 새 읍성(오늘의 읍성)으로 천읍하였다.
세종19-22년(1437-1440년)에 구축한 새 진도건설의 대역사는 이러하다.
새 진도읍성, 첨찰산성(읍성의 부성), 금갑포 수군만호 해안진성, 남도포 수군만호 해안진성, 지력산국영목장과 관마리 관마청, 조도권 -맹성리 맹성/관사도 관마청/관마군도 군마속장, 해남권 -문내와 화원반도 군마속장, 새 전라우수군 사령부 우수영건설(고려 때부터 무안에 있던 유명무실한 전라우수군 사령부를 울돌목으로 이전함) 등이다.
이 같이 다시 세운 진도는 진도 본도를 중심으로 서남부 해역 조도권의 해상군사력을 대폭 증강하고, 북쪽으로 목포 앞바다까지 이르는 화원반도 전체(문내면과 화원면)를 진도 지력산국영목장 관할의 속장지로 개발할 뿐 아니라 전라우수군 사령부까지 명량해협 울돌목으로 옮겨 다시 구축함으로써 조선 한반도 서남부 해안과 해역의 국가 최고최대 국방력을 갖춘 군사기지 요새가 되었다.
국가직할 주요군사시설 |
위치 |
관할 통치 체계 | ||
전라우수군 사령부 |
울돌목 |
진도군(읍성/철마산성) |
금갑진, 남도진(수군만호) |
조도 맹성 |
당시 남도수군진이 오늘의 조도와 신안권 섬들의 수군을 관할 통치함 | ||||
해남군 /무안군<당시 목포와 신안포함) / 함평군 / 영광군 / 완도군 /강진군 등 | ||||
진도국영목장 |
지력산 |
진도 관마청 |
조도속장 / 화원반도속장 | |
통신망 (한성-진도) |
남산-첨찰산/우수영-망금산-북산(진도읍)-첨찰산-여귀산-조도(신금산,돈대봉) |
4. 복군회도 이후 조선시대 진도역사 개요
개국과 더불어 확고한 조선의 의지로써 복군회도 하고 국가의 서남해 방위의 강력한 국방요새를 구축하고 힘찬 북소리와 함께 새 출항의 돛을 올린 진도는 생각만큼 삼한-백제-통일신라-고려 초중기 만큼 화려한 번영과 영광을 되찾지 못했다. 그 가장 큰 이유는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설 수밖에 없는 외침의 역사 앞에 조선이 그 국방에만 전념하여 바다의 문을 스스로 닫고 안에서 빗장을 가로질러 버렸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진도가 과거 화려한 해상무역 실크로드의 십자로에서 그 주역으로서 바다를 누빈 돛폭을 펼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부분적으로 국가차원의 국제교류와 자체 내에서 소소한 영산강무역 정도는 있었겠지만 과거 국가가 적극적으로 앞에 나서 넓은 세계로 돛폭을 펼칠 때와 어찌 같을 수 있었으랴. 가슴을 열고 돛폭을 활짝 펴고 나아가야 할 진도가 오히려 국가의 강력한 의지에 따라 이를 악물고 칼과 창만을 고추 세우고 바다의 문을 닫은 채 어느 놈이 오는가? 하고 눈을 부라리며 응시하고 있게 되고 말았으니, 진도는 오직 땅으로만 살아야 했다. 그러나 워낙 비옥한 옥주고을 넓은 땅이라 1년 농사 지어 주민이 3년 먹고 남는 풍요로운 섬이기 때문에 엄청난 국방비를 지출하는 속에서 진도는 여전히 농경시대의 총아로서 내륙의 군현보다 기본적인 풍요를 누릴 수 있었다.
1440년 새 읍성 천읍과 함께 출발한 진도향교와 향토유림! 이는 조선의 국시 억불승유 사회를 실현할 국민교육의 조직적인 국가교육기관으로서 한성 성균관에 예속되고 전국 향리에 설치된 공교육기관 이었다. 몽골침략에 이어 왜구들의 침략 그리고 87년 동안 섬을 비운 사이 진도의 화려한 불교는 이미 사라지고 말았지만 조선의 국시와 진도유림권력 앞에 이미 민중의 삶으로 굳어진 불교문화마저 역사의 뒤안길만 뒤척이게 되고 말았다. 조선이야말로 새 시대와 사회의 대변혁이었다.
진도는 고인돌이 말하는 만큼 고조선 삼한시대로부터 겨레숨결의 원류원형인 마고문화의 천도(天道)사상에서 무속(巫俗)신앙과 당(堂)문화가 가장 활발하게 민중 속에 터를 다졌고, 그 것은 흔히 “유불선도(儒彿仙道)”라고 표현하곤 하는 복합적인 정신문화를 말한다. 곧 고조선 단군국조의 통치이념인 "인내천 홍익인간“을 뜻한다. 모든 사람이 곧 하늘의 존재이니 그 모두에게 두루 이로운 세상을 펴고 이루는 길이다. 그럼에도 유교 그도 이기이원 주리 성리학으로 서고 그것을 절대 선으로 여기는 유아독존의 조선은 그 자신의 율법에 스스로 빠지고 집착하여 마치 바다의 문을 닫아버린 것과 똑 같이 유교유학 중에서도 이기이원 주리 성리학이 아니면 그 모든 것을 철저히 배격하고 파괴했다. 그로써 조선에 이르러 단순한 불교 억압 차원이 아닌 확대된 자리에서 겨레 마고문화를 비롯한 복합적인 정신문화를 송두리째 파괴한 것이다. 그게 곧 조선의 유교유학이었다.
그러한 조선성리 유학은 중앙권력 쟁투의 치열한 당파와 사화로 이어져 고려 때와는 비교할 수 없는 정도로 구한말까지 끊임없이 이어지고, 특히 고려에 이어 진도는 다시 국가 제1급 유배지로 고착되고 말았다. 그로 국가권력부 정승급 최고위 명신, 학자, 선비 문신들이 집중적으로 진도에 유배되어 꼬리를 물었다. 그리고 그런 위대한 유배인물들이 진도향교유림들에게 사표와 배움과 받듦의 표상이 되어 주리지 아니하고 오히려 크게 대접받으며 진도후학들을 가르치게 됨으로써 진도의 유학은 물론 사림까지 어느 내륙보다 크게 발전하였다. 그들이 그렇게 진도주민들 속에서 생사고락을 함께 하며 남긴 무수한 학문, 문집과 시들은 진도의 정신과 붓 예술(시와 서)를 더욱 발전시키고 꽃 피우며 들녘사람들의 문화예술(화, 창무악속)과 접목되어 조화를 이루었다. 학문의 자리에서 그러한 조선의 자체모순에 빠진 이기이원의 허상을 짚고 조선성리학에서 최초로 이기일원의 심학을 세운 소재 노수신의 업적이 거기에 있다.
이 같이 조선의 모든 정책이 국시 이기이원 성리로 통하는 자리에서 당초 눈부시게 출발한 조선은 스스로 자체모순에 빠져 끝내 이웃 일본을 바로보지 못하고 임진왜란을 맞고 사회당장만이 꼬리를 물어, 근세세계 대변혁의 파고마저 바로보지 못한 채 오만의 자폐에 빠져 물밀듯 치고 들어오는 식민제국주의 파고 속에서 끝내 이웃 일본에게 나라를 상실하고 말았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진도의 자리에서 가장 간략하게 요약하면 대체로 다음과 같다.
1. 서남해역국방요새 구축과 출발
2. 바다의 문 폐쇄
3. 진도향교와 억불승유문화
4. 조선 제1급 정배지 고착과 유배문화
5. 임진왜란과 명량대첩
6. 19세기 식민제국주의 파고와 진도도호부
7. 동학군의 최후저항 지
8. 조선과 대한제국은 끝내 스러지고
<다음 14회 연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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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진도 고성중학교 총 동문회 원문보기 글쓴이: 갯바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