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년 전 인문학 강좌 “인간학 1”에서 전봉주 교수님을 처음 만났다. 오늘 아침 여전히 허망하고 안타까운 마음이지만 일 때문에 차를 끌고 출장지로 향하는데 그 때 그 강의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인간은 결정론적 존재이면서 동시에 비결정론적 존재다”라는 말씀이 또렷하게 기억났다. 휴게소에 차를 세우고 트렁크를 뒤지니 다행히 그 때의 강의 노트 일부가 있다.
“인간의 존재 사태가 한편 결정론적 사태, 다른 한편 비결정론적 사태로서 이 두 가지 사태는 동시에 동기적으로 발생, 전개된다. 그러므로 인간의 존재 사태는 논리적으로 양립할 수 없으나 실질적으로는 양립하고 있는 두 가지 사태가 동시에 동기적으로 성립하고 있는 사태로서 모순적 사태이다.”
당시 나는 이 문장에 매료되었었다. 여기에는 인간이 때로는 결정론적 존재 사태에 의해 비루한 상황에 처할 지라도 언제나 긍정과 희망을 가질 수 있는 존재적 가능성을 “비결정론적 존재 사태”로서 설파하고 있다. 이 문장에서 나는 인문학의 힘을 느꼈고 “철학자 전봉주”를 처음 만났다.
여러분도 한번 시험해보시라. 매일 매일의 일상에서 “비결정론적 존재 사태”를 한번쯤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의사결정의 수준이 달라질 것이다. 이것은 비단 한 개인의 삶뿐만 아니라 공동체의 미래에도 확장 적용이 가능하다. 결정론적 혹은 도식적 사고를 극복해 내는 발상과 에너지의 원천이 여기 있지 않은가!
언젠가 “인간학 2” 강의를 듣게 되리라 잔뜩 기대하고 있었건만, 이렇게 황망하게 가시니 몹시 야속하고 미우시다. 앞으로 인문고전의 독모에서 교수님의 빈자리를 볼 때마다 너무나 그리울 것이다.
철학자 전봉주 교수님, 이제 모든 것 내려놓으시고 영면하십시오.
이성식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