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강 도마의 인도 전도와 인도인 허황옥을 통한 삼국시대 복음전파설
- 소제목; 한국인의 뿌리와 인도 콜카타 등 남방문화권 선교의 이유
1. 서론- 한국민족과 한국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뜻
한국교회사를 배우는 목적은 한국민족과 한국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기 위해서다. 우리 대한민국에 대해 국조 단군이 붙인 최초의 이름은 조선(朝鮮)이다. 조선(朝鮮)은 신선한 아침의 나라라는 뜻이다. 한국 최초의 장로교 선교사인 언더우드 목사의 부인인 릴리아스 호톤 언더우드(Lillias Horton Underwoods)는 이렇게 말했다; “한국에 대한 가장 적합한 이름은 한국인들에게는 ‘고요한 아침의 나라’라는 뜻을 가진 조선(Chosen)이라고 생각해 왔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선택하신(Chosen) 땅이기 때문이다.
한국은 기독교 역사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는 나라다. 개신교 선교 120년만에 개신교인이 전체 18.6%를 차지하고, 7%를 차지하는 가톨릭까지 치면 전체 인구의 25%가 넘는 사람이 기독교인이다. 한국은 전 세계에서 가장 성경을 많이 인쇄하는 나라이며, 세계에서 선교사를 두 번째로 많이 보내는 나라다. 미국 선교사가 현재 가장 많지만 대부분이 영어 선생을 하면서 간접적인 사역을 하는 경우가 많다. 한국은 선교 현장에서 직접 발로 뛰는 가장 부지런한 선교사를 많이 배출하는 나라라 할 수 있다.
또 현재까지 기독교 최대의 집회는 한국에서 열렸다. 1980년 여의도 광장에서 모인 <Here is Life>집회는 빌리 그래함을 주강사로 모였는데 단일 규모로 272만이 모여 세계 최대 기록이다. 두 번째로 많이 모인 것도 1973년 역시 여의도 집회인데 115만이 모였다. 기독교 역사상 두 번째로 많이 모인 이 기록은 1997년 9월말 브라질 캄프테마르치(캄보데마르치?) 비행장에서 세계 하나님의 성회 대회가 열리면서 갱신되었다. 이때 조용기 목사가 주강사로 초청되었는데 150만 이상이 모였다. 또 세계 최대의 교회 10개 중 6개가 한국에 있고, 최대 교회 50개 중 23개가 한국에 있다.
이 작은 나라 한국 땅에 4700만명의 인구 밖에 안 되는 이 나라에 이런 큰 축복을 내려주셨다. 이것은 기독교 사상 유례가 없는 부흥이요 성장이다. 한국 교회 초기 선교사들의 보고를 보면 한국교회는 이상하게 성장한다고 말했다. 1888년 미국북장로교 선교보고서에 의하면 ‘신비스러우리만치 빠른 성장’이 한국교회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1888년 12월 23일 언더우드의 편지를 보라; “씨가 뿌려지는 곳마다 그 씨가 뿌리가 나와 반드시 열매를 맺는 것 같다. 오늘날 이 땅에는 100여명의 교인을 가진 2개의 조직된 교회가 있다. 이즈음 서울에서는 복음서가 뿌려진 여러 곳에서 수백명이 보내오는 세례 청원을 받고 있다.”
놀랍게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위대한 인도의 시인 타고르는 한국을 “동방의 밝은 등불”이라고 말했다. 25시를 쓴 게오르규는 “온 인류의 빛이 동방의 작은 나라 한국에서 올 것이다”라고 예언했다. 얼마전 소천한 국제 CCC 창설자인 빌 브라이트 목사님은 하나님은 세계 선교를 위해 한국의 젊은이들을 쓰시기로 작정하셨다고 말했다. 국제 YWAM 총재인 로렌 커닝햄은 세계적으로 큰 부흥이 일어나 선교사를 배출할 4나라 중 한국이 들어간다.
1997년에 경제 전문지인 포브스지는 21세기에 세계 4대 강국이 될 수 있는 유일한 가능성이 있는 나라는 한국이라고 평가했다. 그 이유는 한국인의 특별한 민족성 때문인데 포브스지는 한국인의 민족성을 'hustle'이란 말로 표현했다. 이 말은 거칠게 밀어 제치면서 앞으로 나아가는 모습을 나타내는 동사다. 한국 사람은 다른 어떤 민족과 달리 거칠고도 급한 민족성을 갖고 있다. 한국 사람은 전 세계 240나라에 퍼져있다. 유대인보다도 많은 나라에 퍼져있는 셈이다. 내전이 벌어지고 있는 아프리카에도 한국 사람이 장사한다. 일본 상인, 독일 상인은 다 도망 갔는데 한국 상인은 도망가지 않는다. “왜 안 도망가냐?” “이래 죽으라 저래 죽으나 한번 죽는 것은 마찬가집니다. 한 밑천 잡아 한국에 돌아가서 큰 집 사서 사는 것처럼 살아야지요.” “그러다 총알 맞으면 어떡하냐?” “총알이 자기 한테까지야 오겠습니까? 지도 알아서 하겠지요.” 이렇게 겁이 없는 민족이다.
매운 고추를 더 매운 고추장에 찍어 먹는 민족이 세상에 있나? 없다. 세계에 유일무이한 민족이다. 펄펄 끓는 뜨거운 욕탕에 들어가면서도 “시원하다”고 하는 사람이 한국인이다. 뜨거운 국을 마시면서도 “시원하다‘고 말하는 사람이 한국인이다. 옛날에 이런 말이 있었다. 1분에 유럽인들은 25걸음, 미국인들은 27걸음, 소련 사람은 30걸음, 일본인은 38걸음을 걷는데 한국 사람은 55걸음을 걷는다는 것이다. 세계 여러 나라를 다녀봤지만 뛰어다니는 사람을 볼 수 있는 나라는 한국밖에 없다. 한국 사람은 이렇게 급하고 누구보다 빨리 변화에 적응하는 민족이다.
88 서울올림픽은 세계사의 큰 변화를 일으켰다. 88올림픽을 통해 세계의 수많은 사람들이 625로 폐허가 된 한국이 30년만에 놀랍게 성장한 모습을 경이롭게 지켜보았다. 한국은 88 서울 올림픽에서 세계 4위를 기록했다. 한강의 기적이라고 불려지던 한국의 경제부흥은 많은 제3세계 나라에 큰 희망을 주었다. 그 한국의 발전된 모습과 89년 평양축전을 비교하고 나서 공산권이 충격을 받았다. 결국 동독이 무너지고 독일이 통일되었다. 동독만 무너진게 아니다. 동구권이 무너지고 소련이 무너졌다. 분명 88 올림픽은 공산주의의 몰락에 큰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2002년 월드컵 때도 4강 신화를 이룩하면서 전 세계를 놀라게 했다. 이번에 대구 유니버시아드 대회 때는 비록 편파 판정이라는 문제제기가 되긴 했지만 세계 3위의 성적을 올렸다. 한국은 반만년의 역사를 자랑한다. 그러나 지난 5천년 동안 한국인은 굶주림을 면해본 적이 별로 없을 정도로 가난한 민족이었다. 언제나 먹을 것이 없어서 초근목피로 연명했다. 한국사 5천년 역사에 가장 빛나는 시기가 있다면 세종대왕 때인데 그때도 영의정을 하던 류관이 담도 없는 초가집에서 산 이야기가 나온다. 비가 오면 그 집 지붕에서 비가 샜다. 영의정의 집이 그 정도로 살 정도면 청렴결백한 것이 아니라 최고의 재상이 그렇게 밖에는 살 수 없는 국가가 초라한 것이다. 한국 사회가 굶주림을 면하고 그래도 이만치라도 경제적으로 잘 살게 된 것은 박정희 이후라고 생각한다.
지금 한국은 세계 경제규모 12위의 나라다. 우리는 한국사 5천년에 가장 좋은 시기에 태어났다. 그리고 한국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를 발견하는 그리스도인은 더더욱 좋은 때 태어났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도 한국사회는 희망이 없다고 단정하며 이민을 떠나는 40,50대가 늘어나고 있다. 요즘에는 20,30대까지 한국사회에 희망이 없다고 단정하고 한국을 떠나려 하고 있다. 한국 사람은 얼마나 요즘 절망하는지 매일 36명이나 되는 사람이 자살한다. 매 2시간에 3명씩 죽는다고 보면 된다. 온 나라가 탄핵 때문에 어지럽다. 이 나라를 떠나고 싶다는 사람은 날로 늘어가고 혼란은 극심하다. 그러나 이 나라의 희망은 처음부터 복음과 교회에 있었다. 이제 우리가 이 사명을 깨우쳐 주어야 한다. 한국을 향한 하나님의 뜻과 세계 선교에 쓰시고자 하시는 섭리를 알려주어야 한다.
놀랍게도 전 세계에서 가장 잘 산다고 하는 유럽의 스위스가 세계에서 가장 자살율이 높다. 상대적으로 가난한 나라인 이탈리아와 그리스가 자살율이 가장 낮다.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방글라데쉬가 행복지수는 제일 높은 것도 놀랍다. 절망은 없다. 한국민족과 한국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희망을 갖자. 21세기는 대한민국의 세기다. 21세기는 대한민국의 젊은 그리스도인들의 세기다.
2. 사도 도마의 동양전도설
이제 한국교회사 공부로 들어가 보자. 앞으로 5번에 걸쳐 개신교가 우리나라에 들어오기 전의 모습에 대해 공부를 해보고자 한다. 제일 먼저 도마가 인도에 복음을 전했으며, 인도인 허황옥은 우리나라에 삼국시대에 이미 복음을 전했다는 주장에 대해 살펴보기로 한다. 이미 한국 고대사를 공부할 때 자료가 미흡하다는 점을 살펴보았다. 그렇기 때문에 이 시기에 관한 역사는 많은 부분 상상력에 의존할 때가 많다.
인도인의 전설 중에 바울이 소아시아를 전도할 때, 도마와 바돌로매(나다나엘)는 동방으로 선교하여 도마는 인도에서, 바돌로매는 중국에까지 들어가 전도했다고 한다. 오순절에 성령 받은 사도들이 각기 선교지역을 분담받을 때, 도마는 파르티아(Partia), 안식국(安息國), 현재의 이란과 인도 지방을 담당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AD 46년에 인도를 향해 가던 중 에뎃사(Edessa)에 머물러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으니, 에뎃사는 도마의 동양 선교의 전초기지요, 선교본부가 된 셈이다. 에뎃사의 위치는 유브라테스(Euphartes) 강 상류 서안, 안디옥 동방 약 24km 지점에 소재하는 작은 도시인데, 고대 이름은 우루하이(Urhai)였고 BC 300년 경부터 에뎃사는 로마의 위협을 받다가 AD 216년에 로마의 식민지가 되고 말았다. 지금의 시리아 동북부 지역이다.
초대교회 사가 유세비우스(Eusebius)의 저서 ‘초대교회사’(4세기말에 편집)에 의하면 ‘아라이의 교의(敎義)’가 있는데, 당시 에뎃사 지배국 왕 아부갈 우가마(Abgar Ukama)는 팔레스타인에 있는 로마 대관(大官) 사비뉴스(Sabinus)에게 사절을 파견하였는데, 일행 중 한난(Hanan; 왕의 비서관)이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을 친히 뵈었고, 여러 가지 표적 행하시는 것과 가르침을 친히 듣고 귀국 후 국왕에게 그 사실들을 보고 하였다. 왕은 다시 한난을 예루살렘에 파견하여 예수님을 정식 초청하였다고 한다(이 사실은 요한복음 12:20-30 어간에 기록된 헬라인들이 예수님께 면회를 요청하고 자기네 나라로 모셔 가려고 하였던 사실이라고 한다).
예수님은 그 초청에 대하여 “그대가 나를 만나본 일도 없는데 나를 신뢰하는 일은 매우 고맙게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지금 갈 수 없으나 나 대신으로 제자 중 한 사람을 보내어 그대의 병을 고쳐주고 나라의 축복을 빌겠다”라고 회신과 아울러 보낸 사도가 도마라고 한다. 아마 국왕이 와병 중에 있어서 특별히 예수님을 초청했던 것으로 본다. 한난은 마침 화가였기 때문에 예수님을 초상화로 그려 갔는데, 그 그림으로 왕의 병을 위시하여 많은 병자가 낫게 하고 귀신을 쫓아냈다고 한다. 그리고 예수님의 얼굴은 사람이 그린 것이 아니고 천사가 그렸다고 믿었다.
또 다른 사료에 의하면 도마가 에뎃사에 파견된 것이 아니라 12사도 중의 하나인 다대오가 파견되었다고 한다. ‘아라이의 교의’의 주인공인 아라이는 다대오라는 것이다. 에뎃사를 중심으로 교회는 페르시야에 널리 퍼져서 114년 경에는 기독교가 페르시야 전역에 확산되었다고 한다.
초기 기독교 역사가들 중에 도마가 인도와 중국에 기독교를 전한 복음의 창시자로 보는 예가 발견된다. AD 3세기에 활약했던 도로테우스(Dorotheus) 감독은 도마가 파르티아, 미디아, 페르시아, 로마, 박트리아 사람과 조로아스터교도들에게 복음을 전한 후, 인도에 도착하여 전도하다가 카르미나에서 순교한 것으로 기록했다.
AD 5세기 말엽 성 제롬(St. Jerome)은 말하길 “하나님의 아들 예수는 부활후 40일 간 사도들과 함께 있었는데, 이와 같이 아버지 품에 있어 천사들과 함께 하고, 그는 도마와 같이 인도에, 베드로와 함께 로마에, 바울과 같이 이탈리아에, 디도와 함께 그레데에, 안드레와 함께 아가야에, 그리고 모든 사도들과 더불어 그들의 복음을 전하는 곳에는 언제나 함께 하였다”고 기록했다.
또 13세기 교회사가 발 헤브라에우스(Bar Hebraeus)는 “우리 주 예수님의 승천 2년 후에 도마가 동방에 복음을 선포하고, 또한 인도에 이 복음을 가지고 왔다”라고 기록하였다. 18세기 동방문헌의 편찬자 아세마누스(Joseph Simon Assemanus)는 야곱파의 시리아 교회가 옛날부터 성 도마를 추모하여, 그는 또한 인도의 최고의 전도자로 인정되었다고 단언하였다.
남인도의 말라바르(Malabar) 교회 전통에 따르면 처음으로 사도 도마가 인도 동쪽 해안에 있는 마드라스(첸나이)에 도착하여 전도하다가 점차 서쪽으로 옮겨 말라바르에 정착하여 전도활동을 벌인 것으로 되어 있다. 대개 말라바르에 전도한 시기를 AD 50년, 또는 57년으로 본다. 그는 중국 칸바릭(Khan-barig; 현재의 북경)까지 전도했고 몇 군데 교회를 세우고, 다시 인도로 돌아와 마일라풀(Mailapur; 오늘날 마드라스 지방)에서 전도를 계속했다고 본다. 결국 그는 미워하는 이교도 원주민에 의해 순교를 당했는데 순교한 연대는 AD 72년으로 보고 있다.
말라바르 교회가 쓰고 있는 기도일과서 안에 ‘성도마 제식문’이 있는데 그 내용에 다음과 같은 사실이 언급되어 있다. “성도마를 통하여 우상숭배가 잘못이라는 것이 인도사람들에게 알려졌고, 성도마를 인하여 중국 사람과 에디오피아 사람들이 진리를 알게 되었으며... 성도마로 인하여 생명에 관한 교리의 광명이 전 인도에 퍼지게 되었다. 성도마로 인하여 하늘 왕국이 저절로 날개를 펴서 중국에까지 가게 되었다.”
말라바르 교회에서 사용하는 찬송가 중에도 도마에 관한 구절이 발견된다. “인도 사람, 중국 사람, 페르시아 사람, 그리고 해도(海島)의 모든 사람들, 또 시리아, 아르메니아, 자바, 루마니아에 사는 모든 사람들은 도마를 추모하며, 그 이름을 높이어. 아! 그대는 우리를 구원한 자라고.” 이같은 전통에 입각하여 말라바르를 중심한 인도의 기독교인들은 도마가 인도 기독교를 창시한 인물이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3. 인도인 허황옥을 통한 삼국시대 복음전파설
심지어 가야의 김수로왕이 인도 여자인 허황옥과 결혼했는데 허황옥이 이미 도마에 의해 복음을 들었기 때문에 가야에 복음이 들어왔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한세대 교수인 김성일 장로다. 허황옥이 불교의 옷을 입고 온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이다. 교회사를 통해 분명히 네스토리우스 기독교인들은 절을 짓고 불교의 일파처럼 산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럼 인도인 허황옥도 그리스도인이란 말인가? 만일 김성일 장로의 주장을 받아들인다면 우리나라는 삼국시대에 이미 복음을 접한 것이 된다. 정말 그게 사실일까?
허황옥이 가야에 도착한 시기는 삼국사기의 기록에 의존하여 AD 48년 7월 27일로 본다. 김수로왕 역시 인도 사람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충남대 도수희 교수인데 그는 백제어를 40년이상 연구했다. 그는 김수로왕이 허왕옥과 대면했을 대 통역을 끼지 않고 자유롭게 대화했으며, 허황옥이 언제 어디서 올지 김수로왕이 미리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 두 사람은 인도의 같은 지방 출신이라고 주장했으며 그는 백제어를 연구하면서 김수로 이전의 삼한의 원주민들도 인도계였을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다.
그는 미국의 손꼽히는 언어학자인 김진우 교수의 입장에 따라 허황옥의 고국인 아유타(Ayutta)는 힌두의 서사시 라마야나(Ramayana)에 나오는 아요댜(Ayodhya)시(市)로 추청했으며, 이 도시가 AD 20년 큐샤나(Kushana) 군에 의해 함락당하자 많은 시민이 태국으로 이민하여 방콕의 북쪽 50마일 지점에 지금의 아유타야(Ayuttaya)라고 불리는 신도시를 건설했다고 본다. 여기서 허황옥이 가야로 들어왔다고 보는 것이다.
한양대 문화인류학과 김병모 교수는 자신이 김해 김씨라고 밝히면서 인도인들이 결국 김해 김씨의 조상이 때문에 김해 김씨는 얼굴이 까무잡잡하다고 한다. 그 역시 허황옥의 출신지에 비상한 관심을 가졌다. 허황옥은 아유타국 공주였는데 아유타국은 옛날 갠지즈 강에 있던 도시국가였는데 수로왕은 성이 김씨인데 아유타국 공주와의 사이에서 자손이 많이 나서 오늘날 수백만명에 이르는 김해 김씨와 김해 허씨의 조상이 되었다고 본다. 실제 인도에는 김해 김씨 문중에서 허황옥의 출신지를 찾아서 비석을 세운 일도 있다. 재미있는 것은 가락국의 국기(國旗) 또는 문장(紋章)은 물고리 두 마리가 마주 보는 쌍어문(雙魚文)인데 이것이 인도의 아유타국 옛 땅인 아요디아에서 많이 발견되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김병모 교수는 삼국사기에 허황옥의 시호가 보주(普州) 태후로 되어 있어 보주를 찾아보았더니 인도 땅이 아니라 바로 중국 사천성 안악의 옛 이름이 보주라며 여기서 후한 시대 AD 48년 경 중국 정부에 대해 반란이 일어나 반란 주동자들이 체포되어 강하(江夏, 오늘날의 무창) 지방으로 강제 이주되었는데 바로 허황옥도 그 반란을 주동한 집안의 한 여인으로 본다. 보주와 강하에서 쌍어문과 허씨 성을 가진 사람들이 있는 것을 발견하여 그는 더욱 확신을 얻었다. 허황옥은 AD 32년 생인데 기마민족 연합집단인 박트리아가 북으로부터 아요디아를 침입했을 때 아요디야는 무정부 상태에 빠졌고(BC 165년), 이때 허황옥의 6대 또는 7대 선조들이 고향인 아요디아, 즉 아유탸국을 떠났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요디아를 떠난 허씨 일족은 강을 따라 배를 타고 인도 서벵골주와 아삼 지방, 방글라데쉬를 거쳐 당시의 대리국(代理國, 현재 중국의 운남성)으로 갔다고 본다. 재미있는 것은 이 지역에 계속 쌍어문이 발견된다는 사실이다. 그는 결국 일본까지 이 남방계 사람들이 영향을 미쳤다고 보며 계속 쌍어문이 일본에서도 발견되는 것과 연결시켜 자신의 주장을 편다.
삼국사기에 의해 허황옥이 자신이 있던 곳에서 떠난 것을 5월로 본다. 가야에 도착한 것이 7월 말로 되어 있으므로 2달 반 전에 떠난 셈이고 허황옥이 있던 지역에서 2달 반 정도의 여행을 통해 가야에 도착한 것으로 간주할 수 있다. 그런데 도수희 교수는 김병모 교수처럼 중국 강하에서 출발했다면 이렇게 오래 걸릴 리가 없으며 분명히 인도에서 출발했다고 본다. 또 그가 이렇게 보는 중요한 이유는 허황옥이 ‘뱀이 옆구리를 두른 부처’를 가져왔는데 이런 것은 중국 불교 계통의 것이 아니라는데 근거한다. 그래서 도수희 교수는 방콕 근방의 아유타야(Ayuttaya)라는 도시에서 허황옥이 온 것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그러나 김병모 교수의 입장을 따르든, 도수희 교수의 입장을 따르든 김성일 장로의 입장은 근거가 희박하다. 어떻게 보더라도 도마가 인도에 복음을 전한 것이 최소 AD 50년 내지 57년이기 때문에, 허황옥이 AD 48년에 방콕 근처의 아유타야(Ayuttaya)에서 출발했건, 아니면 중국의 강하에서 출발했건 그 허황옥은 도마에 의해 복음을 들었을 가능성이 대단히 희박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허황옥에 의해 우리나라 삼국시대에 복음이 전해졌다고 주장하는 것은 설득력이 없다.
3. 한국인의 뿌리와 인도 콜카타 등 남방문화권 선교의 이유
현재 한국어와의 언어적 유사성이 주장되는 곳은 알타어권 터어키어, 우즈벡어, 아제리바이잔어, 몽골어, 깔묵어, 위구르어 등인데 주로 남방과 관련하여 일본어, 인도네시아어, 미얀마어, 싱할리어, 벵갈어, 라후어, 네팔어, 드라비다어 등이다. 백과사전 엔카르타(97년판)에서는 한국어를 알타이어 제어와의 관계가 멀다고 전제하고, 일본어와의 연관성만 밝혔는데(Although of uncertain linguistic affiliation, Korean may well be distantly related to the Altaic languages, or possibly to the Japanese language.) 주로 러시아나 북한 한글학자들은 이와 같은 입장을 취하고 있다고 들었다.
충남대 도수희 교수는 한국어의 모체가 되는 우랄 알타어가 있었는데 북방 알타이어의 영향을 한국어도 받았으며, 다만 우랄어 계통은 남쪽으로 영향을 주어 유럽의 헝가리어와 핀란드어에 영향을 미쳤고, 이것의 인도의 드라비다어에 영향을 주었으며, 이것이 한국어와 일본어 형성에까지 영향을 주었다고 본다. 충남대 강길운 교수도 우리 말의 계통을 알타이어계로 보지 않고 남방계의 영향이 더 큰 것으로 본다. 그외에도 서울대 언어학과 이현복 교수와 남방문화연구회 김병호 박사가 한국어를 남방계로 보고 있다.
19세기에 한국에 들어온 서양선교사에 의해 한국어의 계통에 대해 정리된 자료도 재미있다. 이것은 한국의 뿌리문제에 관한 연구라고 할 수 있다. 내용 중 만주에서 최초로 한글로 된 복음서를 번역한 존 로스(John Ross) 선교사가 투르크 제어들과 한국어가 그렇게 깊은 관계를 갖고 있지 않다고 본 점이 재미있다.
더 흥미를 끄는 것은 H.B. Hulbert 선교사가 도수희 교수와 유사한 결론를 내리고 있다는 사실이다. 중앙아시아에서 한국어의 모체가 된 언어가 북방어족과 남방어족으로 분리가 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북방어족은 투르크, 몽골, 퉁그스, 남만주, 고조선으로 갔으며 남방 어족은 남인도의 드라비다어, 방글라데쉬, 인도네시아, 대만, 한국 남부 지방으로 왔다고 본다. H.B. Hulbert 선교사는 1905년 남인도의 드라비다어와 한국어의 유사성을 주장하여 책을 한권 썼는데, 이 책은 최근에 영남대에서 번역이 되었다.
또 캘커타 한국문화원 원장인 권병희 선교사가 인도 서벵골주와 방글라데쉬의 벵갈어와의 유사성을 주장하여 책을 여러권 썼다. 또 네팔인 기안 스레스타(Dr. Gyan I. Shrestha)가 한국어와 네팔어의 유사성을 주장하며 영어로 책을 쓴 것이 있다. 그 외 라후어와 미얀마어, 싱할리어(스리랑카), 인도네시아어가 한국어와 유사하다는 지적들이 나오고 있다. 만일 언어적 유사성이 정말 밝혀진다면 인종족 유사성도 분명히 밝힐 수 있을 것이다.
2001년말 F/O를 통해 직접 이와같은 사실들을 현지에 확인할 수 있었다. 참 놀라운 것은 네팔 사람은 거의 우리와 똑같이 생겼다. 실제 인도 식당에서 우리가 한국사람이라고 끝까지 주장했는데도 네팔 사람으로 오해받아서 곤혹을 치른 일이 있다. 또 미얀마 사람이나 인도인 중 일부는 우리와 똑같이 생긴 사람들이 있었다. 방글라데쉬와 콜카타에 갔을 때 4달만에 현지 벵갈어로 강의를 하는 사람에 대해 들은 일도 있다. 너무나 놀라왔다. 위에서 언급한 지역은 대부분 한국 선교사들이 서구 선교사들에 비해 압도적으로 언어를 잘 하고 있는 것을 현장에서 확인했다.
우리의 전략적 선교지로 인도의 콜카타와 같은 남방문화권을 정한 이유는 이런 한국어 계통에 대한 연구가 바탕이 되어 있다. 언어적 유사성은 인종적, 문화적 유사성을 말해주기도 한다. 실제로 이런 지역에 가보면 생긴 모습이 우리와 너무나 똑같이 생긴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문화적 유사성도 많이 있었다.
도날드 맥가브란이 <Bridge of God>란 책에서 동질 문화권 선교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이와 같은 우리와 유사한 문화권에 선교하는 것은 가장 효과적으로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귀한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문화적 적응도 쉽고 백인들에 비해 한국인 선교사들이 현지어를 잘 구사하는 것을 통해 이 전략의 필요성과 타당성이 입증되고 있다.
현재 우리는 벵갈어권에 최대한의 관심을 갖고 있는데 이 지역은 1억 4천만의 방글라데쉬와 9천만의 인도 서벵골주(중심도시 콜카타), 그 외 주변의 작은 주들을 포함하면 대략 3억의 인구를 포함한다. 이 지역에 오종민 선교사 가정을 파송하여 전략적으로 10-20가량의 형제자매들을 파송하여 팀사역을 하려고 한다. 이 지역의 캠퍼스에 열매를 보게 되면 점차 다른 지역의 남방문화권으로 사역지를 확대해 나갈 것이다. 어떤 면에서는 중국도 남방문화권은 아니지만 유사문화권으로 간주할 수 있기 때문에 서북지역 란조우를 중심으로 사역을 하고 있다. 앞으로 우리의 해외 사역은 우리와 유사문화권에 집중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