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경북도 청진에서 출생한 가수
이인권(李寅權;1919∼73)
은 6·25전쟁과 더불어 대구로 피란 내려와서
살았다. 이인권이 대구와 가졌던 인연은 그보다 훨씬 이전의 일이었다. 오케레코드사 전국순회공연을 비롯해 KPK악극단 순회공연 때 종종 다녀간
곳이기도 했다. 이인권이 대구에 들를 때면 공연을 마친 뒤 대구 중심가에서 악기점을 열고 있었던 작곡가 이병주의 사무실에 꼭 들러 환담을 나누곤
했다. 이병주와 이인권은 서로 동갑내기였으므로 남달리 교분이 두터웠다.
6·25전쟁이 발발하자 이인권은 아예 대구로 와서 계산성당 맞은 편 골목에
셋집을 얻어 살면서 날이면 날마다 이병주가 운영하는 오리엔트레코드사로 거의 출근하다시피 했다. 그곳에 가면 작곡가 박시춘·이재호, 작사가
강사랑·손로원·유호 등을 비롯하여 예전부터 친밀한 대중예술인들이 항시 포진하고 있었기 때문에 마음이 편했다. 이 오리엔트레코드사에서 이인권은
광복 이후 첫 취입곡인 '귀국선'을 비롯하여 '무영탑 사랑' '백제의 봄빛' '나의 등대' '추억의 백마강' '사랑의 복지' '미사의 노래'
'그리운 다방' 등을 발표하였다.
당시
이인권은 가수활동을 하던 아내와 함께 최전방 전선으로 위문공연을 자주 다녔다. 어느 지역인지는 확실치 않으나 이인권 부부가 무대 위에서 노래를
부르던 중 난데없는 포탄이 날아와 아내는 현장에서 즉사하고, 이인권은 파편에 다리를 찢기는 중상을 입었다. 야전병원에서 응급치료를 받은 뒤
이인권은 절뚝거리는 걸음으로 목발을 짚고 혼자 대구에 돌아왔다. 하지만 무대 공연 중에 아내를 잃은 무서운 충격과 고통에서 벗어날 길 없었다.
날이 갈수록 번민과 죄책감에 시달리며 차분하고 건실하던 성격의 이인권은 깊은 우울증으로 빠져들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이인권은 집 앞의 오래된 성당인 계산동 천주교회를 다니기 시작했으며, 독실한 신앙을 갖게
되면서 차츰 마음의 중심을 회복하게 되었다. 이따금 불쑥불쑥 떠오르는 아내 생각으로 잠 이루지 못하던 어느 겨울밤, 이인권은 아내의 넋을
위로하는 한 편의 가사를 이불 속에 엎드린 채로 써내려갔다. 그리곤 바로 오선지에 곡조를 옮겨 탱고풍 작품을 만들었다. 몇 차례 연습해보곤
곧바로 오리엔트레코드사로 악보를 들고 가서 이병주에게 취입을 부탁했다. 이 음반이 바로 '미사의 노래'(임영일 작사, 이인권 작곡, 이인권
노래)이다.
1953년 대구 오리엔트레코드사에서 발매된 이
음반에 대한 대중의 반응은 뜨거웠다. 전쟁 통에 사랑하던 가족을 잃고 줄곧 상심 속에 빠져있던 많은 사람들에게 이 노래는 크나큰 위로와 격려가
되었다.
'당신이 주신 선물 가슴에 안고서/ 달도 없고 별도
없는 어둠을 걸어가오/ 저 멀리 니콜라이 종소리 처량한데/ 부엉새 우지마라 가슴 아프다
두 손목 마주 잡고 헤어지던 앞뜰엔/ 지금도 피었구나 향기 높은 다리아/ 찬 서리 모진 바람 꽃잎에
불지마라/ 영광의 오실 길에 뿌려 보련다
가슴에 꽂아 주던
카네이션 꽃잎도/ 지금은 시들어도 추억만은 새로워/ 당신의 십자가를 가슴에 껴안고서/ 오늘도 불러보는 미사의노래'
이인권의 본명은 임영일(林榮一)이다.
오케그랜드쇼가 함경도 청진에서 공연 중일 때 무대 뒤로 작업복 차림의 한 청년이 찾아와 이철 사장과 작곡가 박시춘에게 노래
테스트를 받고 싶다는 뜻을 전했다. 마침 조용하던 시간이라 두 사람은 흥미를 느끼고 청년에게 노래를 시켰는데, 뜻밖에도 남인수의 '꼬집힌
풋사랑'을 너무도 분위기를 잘 살려 부르는 것이 아닌가. 당시 오케그랜드쇼는 결핵이 악화된 남인수가 공연에 불참해 풀이 죽어있던 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