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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강 스님은 … 전남 해남에서 태어났다. 17세(1982)에 대흥사 지운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20세에 해인사서 행자생활을 했으며, 그 해 자운 스님을 계사로 사미계를, 1988년 범어사에서 비구계를 받았다. 중앙승가대에 입학(1991)해 〈승가대신문〉 편집장과 총학생회장을 역임했으며, 전국불교운동연합 부의장과 범종단개혁추진회 공동대표를 맡아 종단 개혁(1994)을 도왔다. 백양사 서옹 스님을 모시고 참사랑운동과 무차선회(1998)를 기획해 한국의 선을 일반화하고 세계화 하는데 일조했다. 2000년부터 현재까지 미황사 주지를 맡아 한문학당, 템플스테이, 참선수행-참사람의 향기, 괘불재 등 다양한 수행과 교육문화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세상과 호흡하는 산중사찰의 전형’을 만들었다는 평가를 듣고 있다. 사진=박재완 기자 wanihollo@hyunb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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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가대 시절부터 불교 대사회적 역할 고민
서옹 스님의 무차대회 기획… 선풍 일으켜
한문학당, 참사랑 결사 등 소프트웨어 인기
미황사 템플스테이 참가기록 전남 사찰 최고
음악회·괘불재 등 행사 주인공은 지역주민
혹자는 한국불교가 정체 상황에 있다고 말한다.
신도 수는 늘지 않고,
내부 결속력도 낮은 상황인데
설상가상으로 불교의 0.8%만이 포교를 시도하고 있다고
(이 설문조사에서 기독교는 21.5%,
가톨릭은 4.7%가 전법활동을 하고 있다고 답했다)
하니 그렇게 생각할 만도 하다.
그래서인지 불교계에서는 시대에 맞는 포교 전략과 종책 개발의 시급성을 주장하며
다양한 포교관련 세미나를 빈번하게 열고 있다.
이런 점에서 눈에 띄는 성공사례가 있으니 바로 땅끝마을의 아름다운 절
해남 미황사다.
지금은 전국적으로 유명한 사찰이 됐지만 10여 년 전만해도 미황사는
많은 이들에게 낯선 절이었다.
교통 여건이 많이 좋아진 지금도 서울에서 자동차로 6시간,
부산·대구에서도 4시간 이상 걸리는 곳이라 여간해서는 찾아갈 엄두를 내기 어렵다.
그런데도 해마다 미황사를 찾는 사람이 10만 명에 달한다.
이 같은 이유는 달마산의 기암괴석을 병풍처럼 뒤에 두르고
장엄한 바다를 앞에 둔 경치 때문만은 아니다.
땅끝마을의 아름다운 절이라는 이름에 혹해서 오는 것도 아니다.
한문학당, 템플스테이, 참선수행 프로그램 ‘참사람의 향기’,
괘불재와 음악회, 해맞이·해넘이, 어르신 노래자랑 등
다채로운 프로그램으로 사람들을 불러 모으기 때문이다.
전국의 여러 사찰들이 미황사처럼 비슷한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지만,
굳이 먼 곳까지 찾아가는 이유는 무엇일까?
미황사의 성공 노하우를 묻자,
주지 금강 스님은 이렇게 답했다.
“땅끝마을 작은 절 하나가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 곳이 되기를 바라는
한 가지 마음뿐이었습니다.
또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제가 그들에게 해 준 것이라곤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차 한잔 대접한 것 뿐입니다.
또 미황사의 모든 행사에 지역민들을 주인공으로 세웠습니다.
화려한 볼거리보다는 이 행사의 주인은 누구인가에 골몰했습니다.
아마도 이것이 성공요인이 아닐까요?”
폐허나 다름없던 미황사를 전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템플스테이 사찰로 만들기까지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스님에게 들었다.
포교현장 누비던 ‘지게 스님’
전남 해남서 태어난 스님은 보이스카우트, 하이킹, 간부수련회 등
다양한 야외활동을 하면서 학창시절을 보냈다.
그러다 고등학교 1학년 〈육조단경〉을 읽고 감동을 받으면서
학교 선생님의 소개로 참선을 배우기 위해 대흥사 지운 스님을 찾았다.
금강 스님은 고등학교를 졸업 할 때까지
지운 스님에게 공양을 올리고 참선을 배우며 학교를 다녔다.
졸업 후 출가를 결심한 스님은 곧바로 해인사로 향했다.
해인사 참배를 하던 중
백련암 마당에서 前 조계종 종정 혜암 스님(1920~2001)을 만났다.
“무엇하러 왔느냐”
는 혜암 스님의 질문에 금강 스님은
“행자 생활하러 왔습니다”
고 답했다.
그러자 혜암 스님은
“너 잘 왔다.
이번 생에 태어났다 생각지 말고 공부하다 죽어라”
는 짧고 강렬한 한마디를 남겼다.
“당시 혜암 스님의 말씀은 저에게는 계율과도 같았습니다.
큰 울림으로 다가왔지요.
항상 무엇을 할 때마다 세속적 삶으로부터 나를 지켜주는 방패와도 같았어요.”
그렇게 해인사서 행자생활 하던 금강 스님은 1988년 범어사에서 비구계를 받았다.
금강 스님의 미황사 생활은 1989년에 시작됐다.
한때 12암자를 거느리고 400여 스님이 기거한 거찰이던 이 절이
비어있다는 소식을 접한 금강 스님은 은사인 지운 스님도 미황사로 모셨다.
출가 이후 은사 스님을 제대로 시봉한 적이 없었다는 죄송함이 그 이유였다.
749년(신라 경덕왕 8년) 의조화상(義照和尙)이 창건한 미황사는
1000년이 넘도록 명맥을 유지하다 1887년 이후 쇠퇴의 길을 걸었다.
금강 스님이 처음 미황사에 들어왔을 때는 대웅전과 응진전만 있었다.
절간에 응당 있어야 할 천왕문이며 일주문조차 없었다.
그때부터 금강 스님은 지게를 지고 돌을 나르며 무너진 축대를 쌓고
마당을 넓히고 나무를 정리하는 등 도량을 가꿨다.
이때 동네 주민들은 금강 스님을 ‘지게 스님’이라고 불렀다.
그러던 중 스님은
“시골에 있지만 말고 공부하자”는
출가 도반들의 말에 1991년 중앙승가대를 다니기 시작했다.
이때 스님은 승가대신문 기자와 학생회장,
전국불교운동연합 부의장,
범종단개혁 추진위 공동대표 등을 맡았다.
여기에 정토구현전국승가회라는 불교계 진보단체에서 활동하면서
불교와 사회의 만남을 체험했다.
8·15 특별기획 ‘친일불교 청산’에 대한 스님의 기사는 교계 안팎의 큰 호응을 받았다.
“1987년 민주항쟁과 광주 5·18 7주기 행사 등을 접하면서,
현대에 맞는 승가의 역할이란 무엇인지 고민해왔습니다.
승가대 재학시절 포교연구부에서는 늘
‘포교를 어떻게 할 것인가’ 고민하는 한편 토론도 쉬지 않고 계속 했지요.”
그래서 스님은 승가대 학생회장을 맡기 전까지
주말에도 제대로 쉬어본 적이 없을 정도로 광주 원각사 학생회, 중원불교대,
국립의료원, 능인선원 등 각종 법회를 맡아 포교현장을 누볐다.
1994년 종단개혁으로 종단 집행부가 자리 잡을 무렵에는
고산·혜정 스님을 모시고 포살을 하고, 선방에서 화두도 들었다.
다시 미황사에 돌아와서는 지게 대신 포크레인을 운전하며 불사에 전념했다.
그러다 백양사 방장 서옹 스님(1912~2003)의 부름을 받고 무차대회를 열어
선의 대중화에 일조했다.
“서옹 스님을 모신 3년이 인생의 큰 전환점이 됐습니다.
‘수행을 통해 사람들에게 역경을 극복할 힘을 주어야 한다’
‘정신적 지도자들이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느냐’
고 다그치던 스님의 가르침은 아직도 제 가슴에 남아 있습니다.”
그렇게 백양사에서의 ‘참사람 수행결사’는 시작됐고,
금강 스님은 일반인과 IMF 실직자들을 위한 단기 수행프로그램을 열어
뭇 삶의 아픔을 함께 하기도 했다.
미황사에 연간 10만명 다녀가는 이유
금강 스님이 본격적으로 미황사 살림을 맡은 것은 2000년 초반부터다.
1992년부터 주지를 맡아 중창불사를 시작한 미황사 前 주지 현공 스님이
2001년 금강 스님에게 주지 자리를 물려줬다.
현공 스님은 불사에만 전념해 대응보전과 명부전, 삼성각, 만하당, 부도암 등
전각 일곱 채와 세심당(수련원)·향적당을 비롯한 요사채 아홉 채를 복원했고,
부속건물 여섯 채를 신축했다.
그 사이 금강 스님은 전통 강원 시스템을 응용한
초등학생 한문학당, 템플스테이, 참선수련회 등
다양한 ‘소프트웨어’를 개발해 멀고 낯설었던 미황사를
친숙하고 아름다운 절로 바꿔놓았다.
미황사의 연간 템플스테이 참가자는 5000여 명에 달한다.
가을에 열리는 괘불재에는 1500~2000명이 다녀간다.
2000년 여름부터 방학동안 열고 있는 어린이 한문학당은 신청자가 많아
경쟁이 치열하다.
인기 비결에 대해 묻자 금강 스님은
“학창시절 보이스카우트 등 캠프활동을 많이 하면서
이런 프로그램을 기획하는데 익숙해진 것 같다”
며
“미황사에는 숲과 맑은 공기, 그리고 오래된 법당이 있다.
불편한 점이 있을 수 있지만 장점이 많다.
그 것을 살려서 한문학당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어린이들이 즐겁게 참여하는 것을 보고 자신감이 붙어
2002년 월드컵 기간부터 템플스테이를 시작했다”
고 말했다.
미황사가 템플스테이 프로그램을 운영하겠다고 했을 때
“그 먼 곳까지 누가 간다고 그런 일을 벌이느냐”
는 사람이 많았다.
하지만 2008년 미황사 템플스테이 참가자는 5118명으로
템플스테이 프로그램을 운영한 전남 지역 13개 사찰 가운데 가장 많았다.
유서 깊은 대찰인 백양사(3002명), 화엄사(2506명), 대흥사(2393)명,
송광사(2114명) 보다도 더 많은 사람들이 미황사를 찾았다.
미황사가 연간 10만 명이 다녀가는 사찰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먼저 손을 내밀고 환영하는 전통 덕분이다.
많은 사람들이 사찰을 찾아가지만 아는 사람이 없을 경우
잠시 쉴 자리도 찾기 어려운 낯선 공간이 된다.
하지만 미황사에선 방문객이 오면 누구나 기꺼이 안내자를 자청한다.
금강 스님은 누구든 차별 없이 자신의 방에서 차를 대접하고 이야기를 나눈다.
그리고 스님과 차를 마시고 돌아간 사람들의 입을 통해
‘미황사에 가면 주지 스님이 공짜로 차를 주고 인생 상담도 해준다’
는 소문이 퍼져나갔고,
미황사를 찾는 사람들도 늘었다.
금강 스님이 하루에 마시는 차가 80~150잔은 족히 될 정도다.
사람이 점점 늘어날수록 바쁘고 힘들지 않느냐는 질문에 스님은
“나의 생활에 맞추면 됩니다.
내 일상생활에 맞추어 손님들을 맞이하고 프로그램을 진행하기 때문에 괜찮습니다.
평소 제가 예불할 때 예불하고 밥 먹을 때 밥 먹고, 참선할 때 참선하고….
이런 식으로 자연스럽게 진행하면 10년을 해도 힘들지 않아요”
라고 답했다.
미황사는 지역주민을 사찰의 일원으로 끌어들이는 적극적인 친화전략을 활용했다.
산사음악회, 괘불재 등
사찰 행사에 지역민을 대거 참여시켜 주인공으로 만들었다.
매년 10월 열리는 괘불재에서 지역민들이 1년 농사의 수확물을 불전에 바치는
‘만물공양’도 이 행사의 핵심이다.
햅쌀, 콩, 깨 한되, 매듭공예, 떡, 박사학위 논문, 학교에서 받은 상장 등
각자 소중한 것을 공양물로 내놓는다.
산사음악회에서는 사하촌 주민들로 이뤄진 주부풍물패,
어르신 소리꾼 등이 ‘해남 들노래’와 남도 판소리,
청산도 바닷노래를 비롯한 지역의 전통문화를 선보인다.
덕분에 제1회 산사음악회 때부터 음향설비와 조명을 맡아온
해남의 한 전파사 대표는 이 지역 최고의 음향전문가가 됐고,
소리꾼 할아버지는 다른 곳에서도 초청 받을 만큼 유명인사가 됐다고 한다.
사찰이 지역민과 단절되거나 지역민을 들러리로 만들 게 아니라
지역민들과 함께 호흡해야 한다는 게 금강 스님의 지론이다.
“사실 도움은 제가 더 많이 받습니다.
부처님오신날 궂은 일 마다 않고 해주고,
마을 들머리에서 미황사에 이르는 길의 잡풀을 제거해주는 분들이
바로 마을 어르신들입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절에 번다한 일이 있을 때마다 두 팔 걷어붙이고 제 일처럼 뒷일 봐주는 분들은
언제나 그 분들입니다.
그러니 함께 나누며 더불어 살아가는 것이 마땅하다고 봅니다.
동업중생인 셈이지요.”
항상 대중의 고통 해소 발원
금강 스님은 세월호 참사 다음날 곧바로 현장으로 달려갔고
그날부터 매일 진도를 오가고 있다.
오전에는 미황사 일을 보고 오후에는 진도로 건너가
피해자 가족을 상담하고 예불을 올린다.
“진도 앞바다에 가면 유가족들의 자식 잃은 아픔과 괴로움이 느껴집니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지켜보고 있어야 하는 그 심정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생각하다
부모들이 기운 차릴 수 있는 일을 해야겠다 싶어 시작했습니다.”
이들에게 마음의 위안을 주려는 진도 스님들과
대흥사·송광사·화엄사·백양사 스님들이 팽목항과 체육관 옆에 임시 법당을 차렸다.
전국의 비구니 스님들도 달려와 밥도 제대로 넘기지 못하는 가족들에게
죽과 떡을 나눠주고 마음의 상처를 어루만져주고 있다.
스님은 생명과 사람을 존중하지 않고
돈과 책임 소재를 중시하는 풍조를 사고의 가장 큰 원인으로 꼽으며,
이러한 세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수행이 필요하다고 거듭 강조했다.
금강 스님은
“대립과 경쟁, 갈등이 가득한 세상을 살아가는 일반인들도
산중 스님들 못지않은 수행이 필요합니다.
저는 미황사가 지금 이 순간 고통을 겪는 이들에게
부처님의 가르침을 잘 전달할 수 있는 굉장히 좋은 도량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앞으로도 미황사가
국민들의 고통을 극복할 수 있는 수행의 공간으로 거듭나기를 발원할 뿐입니다”
고 말했다.
이렇듯 스님은 늘 사람 사는 세상에 대한 깊은 성찰과 연민,
무한한 애정을 갖고 어떻게 하면
대중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 고민하고 있었다.
금강 스님의 가장 친한 도반인 법인 스님(前 조계종 교육부장, 해남 일지암 암주)은
금강 스님의 책 〈땅끝마을 아름다운 절〉에서 금강 스님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누구는 이렇게 말한다.
금강 스님은 이벤트에 강하고,
기획력이 뛰어나고,
일을 매우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그러나 드러난 일을 유심히 보라.
그러면 사람이 제대로 보인다.
금강 스님이 10년 넘게 미황사와 살아오면서 이루어낸 것들은
모두 그의 깊은 진정성에서 비롯됐다.”
▲ 2000년 여름부터 방학동안 열고 있는 어린이 한문학당은 신청자가 많아 경쟁이 치열하다 |
▲ 금강 스님은 세월호 참사 다음날부터 매일 진도를 오가며 피해자 가족을 상담하고 예불을 올리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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