煮豆燃荳箕(자두연두기) : 콩깍지를 태워 콩을 삶는다.
조식(曹植) 192~ 232 중국 삼국시대 위나라의 시인이다.
자는 자건. 시호는 진사왕이고 중국의 가장 위대한 서정시인 중 한사람으로 불리며,
아버지는 삼국시대(三國時代)를 주름잡던 유명한 장군 조조(曹操)이다.
아버지가 중국의 1/3에 해당하는 북부지방을 지배하고 있을 때 다섯째 아들로 태어났다.
조식(曹植)
조조가문은 시인가문이라 불렸을 정도로 시문에 조예가 깊은 명사들이 많았는데, 그 중에서도 뛰어난 세명이 있었다.
그들을 3조라하여 "조조와 두 아들 조비, 조식"을 역사가들은 손꼽는다. 그 셋 중에서도 조식은 아버지 조조와 형 조비보다 재능이 더 뛰어났던 詩人이다.그러다보니 아버지인 조조로부터 늘 깊은 사랑을 받으며 어린시절을 보냈다.
실제로 조조는 조식이 일찍부터 보여준 문학적 재능에 깊은 감명을 받아 조비 대신 조식을 세자로 책봉하려고
마음을 정했을 정도로 애정을 보인적도 있었다. 이러다보니 조식은 커가면서 늘 형 조비에게 시기와 질투를 받았는데,
서진시대 진수가 쓴 정사 "삼국지"에서는 조비가 동생 조식을 더욱 괘씸하게 여기게 된 것은
당시 소년이었던 조식이 나중에 형의 아내가 된 견 부인과 사랑에 빠졌기 때문이라고 적고 있다.
조조에게는 조앙이..
자식을 낳은 15명의 비와 총 24명의 아들 그리고 5명의 딸이 있었다고 "진수의 삼국지"는 기록하고 있다.
자식을 낳지 못한 비까지 합하면 대략 40~50명은 넘을 듯 하다. 조조의 맏아들 조앙은 약관의 나이에
"효렴" 부모에게 효도를 하고 충성심이 강한자를 20만 명 중에 한 명 꼴로 나라에서 선발하여
모범인으로 여겨 관직을 주고 관리 했었다. 따라서 효렴에 천거되면 본인은 물론이거니와
그 집안과 고을까지도 큰 경사로 여겼던 것이 당시의 실상이었다.그중에 뽑힌 아들이었다.
당시 조조는 장수가 이끌던 진영을 공격하여 항복을 받아냈으나, 조조가 장수의 형인 장제의 아내를
강제로 첩으로 만들어 버리자 장수는 크게 원한을 품었고, 이 사실을 듣게 된 조조가 장수를 죽이려 했으나,
그 계획이 누설되어 장수가 먼저 조조의 진영을 쳐들어와 조조의 군사들을 대파하였다.
조조는 위기에 몰려 장수의 부하들에게 긴박하게 쫏기는 몸이 된다.
죽느냐 사느냐 긴박한 상황에 몰리자 조조의 맏아들 조앙은 자신이 타고있던 말을
아버지 조조에게 건네 태워 보내고 자신은 장수의 군사들과 맞서 싸우다
현장에서 죽었다고 전하는 아들이 바로 충성스런 조앙이다.
조앙 밑으로 조비의 바로 위의 형이 조삭인데, 기록에는 자세한 내용이 없는것으로 보아
어린나이에 아들 중에 가장 먼저 죽은것 같다. 그 다음이 조비이고 바로 밑 동생이 조창이고,
그 다음 다섯째가 지금 소개하는 조식이 된다. 서기 220년 조비는 치열한 경쟁속에 동생 조식을 누루고
후계자로 낙점을 받았고, 아버지 조조가 죽자 뒤이어 위왕에 오른다.
왕에 오르자, 동생 조식을 시기하고 은근히 괴롭히는 일이 줄기는 커녕 점점 더 심해졌다.
그에 따른 조식의 좌절과 불행은 그가 지은 詩 대부분의 주제가 되었을 정도였다.
조식은 형들인 조비와 조창과의 후계자 권력 다툼에서 밀려났지만, 그의 詩를 흠모하고
문학적인 정서와 깊이를 따르는 조정의 여러 대신들을 비롯해 전국의 많은 문사들이 그의 주변으로 모여들자
경쟁의식을 강하게 느낀 형 조비는 은근한 위기감을 느낀다. 마침내 동생 조식을 죽이기로 결심하고
그럴듯한 명분과 구실을 찾는데... 마침 아버지 조조의 장례식에 문상조차 오지 않은 것에 대한 불효죄를 물어
죽이고자 마음 먹고 동생 조식을 불러들여 다그치는데...
"네가 시를 잘 짓는다고 소문이 온 궁 안 밖과 도성인 허창에 파다하다는데,
그렇게 잘 짓는다면 내 앞에서 일곱 걸음을 걷는 동안 시를 지어보이라"고 윽박지른다.
"나와 너는 같은 형제이니 형제의 정을 넣어 시를 짓되 절대로 형제란 글은 한 글자도 넣어서는 아니된다
만약 합당한 시를 지으면 네 목숨은 살려줄 수 있지만, 짓지 못하면 너에 대한 소문은 모두가 헛소문으로
돌아가신 아버님과 나를 비롯한 세상을 능멸한 죄이니 절대로 용서 할 수 없으므로
죄를 물어 네 목숨을 거두겠다"고 몰아세운다.
조식은 대신들이 가득 모여 숨을 죽이며 지켜보는 대청에서 부들부들 떨며 스스로 걸음을 옮겨가
일곱 발자욱 중 마지막 일곱 번 째 발자욱에 가서 드디어 운을 떼는데...
이때 지은 詩가 가슴을 뭉클하게 만든 그의 名詩로 지금까지도 애송되는 조식의 "칠보시(七步詩)"가 그것이다.
칠보시(七步詩): 일곱 걸음만에 지은 시
煮豆燃荳箕(자두연두기) 콩깍지를 태워 콩을 삶는다.
豆在釜中泣(두재부중읍) 콩이 가마솥 안에서 눈물 흘리네
本是同根生(본시동근생) 본래는 같은 뿌리에서 생겨났건만
相煎何太急(상전하태급) 어찌 이리도 급하게 다려대는가~
조식이 시를 지어 읊으며 울먹이자... 좌중에 모였던 대신들을 비롯한 많은 관리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감탄속에 흐느꼈고, 어떻게든 구실을 잡아서 죽이려던 형 조비도
끝내 눈물을 주루룩 쏟으며 안타까운 형제의 정에 그만 흐느껴 울고 만다.
결국 동생 조식을 죽이지 못하고 살려 보내며 "다시는 도성으로 돌아올 생각은 말라"며
허창에서 먼 봉지로 떠나보낸다. 조식은 그 후로도 늘 형 조비의 경계속에 자주 봉지를 옴겨다녀야 했고
평생을 유랑생활을 하다시피 떠돌며 불우한 인생을 살다가 41세의 일기로 한 많은 세상을 떠났다.
- 주(註) -
진수(陳壽)의 삼국지(三國志)
"위서"에 실린 "조식정사"의 내용을 살펴보면 처음엔 총명한 조식이 조조의 총애를 받았으나,
조비에 비해 처세가 좋지 못하고 음주에도 절제가 없는 모습을 보이는 점과 천자만이 다닐 수 있는
동쪽 성문을 조식이 수레를 타고 거만하게 지나갔던 사건 때문에 조조의 군사로 있던 순욱에게
크게 혼이 난 이후부터 후계자 구도에서 멀어지게 되었다고 전한다.
게다가 조식을 중심으로 커진 세력을 경계한 조조가 아들 조식을 보좌하던 똑똑하고
머리가 비상한 양수를 괴심죄를 쒸워 죽인다. 양수는 조조의 마음을 휜히 꽤뚫어보며
무뢰하게 앞서감을 괘씸하게 여겨 아버지가 주살하자, 조식은 점점 불안을 느낀다.
후계자 탈락의 가장 결정적인 요인은 조조의 사촌동생이면서 장수였던 조인이 번성에서
관우에게 포위당했을 때 조조가 아들의 능력을 시험해보고자 조식을 장군으로 임명해
전쟁지역으로 보내려고 불렀는데, 술에 취해 골아떨어져 영을 받들지 못하는 일까지 생기자,
조조는 크게 화를 내며 아들에게 주었던 장군의 직위를 박탈해버렸다.
삼국지 "진사왕식전"을 인용한 "위씨춘추"에서는, 형 조비가 억지로 술을 먹여
일부로 취하게 만들었다고 적고 있으니...어느것이 사실인지는 모르나
아버지가 불렀으나 술에 취해 가지 못한 것은 사실인 듯 하다.
후계자를 두고 다툼 끝에 바로 위 친형 조비가 아버지 뒤이어 왕위에 오르자,
양수와 함께 조식의 보좌를 맡던 그의 친위세력들도 이런저런 죄를 쒸워 하나 둘 조비에게 죽임을 당했다.
조식은 궁궐에서 먼 변방의 봉지를 떠돌며 형 조비에게 자주 장문의 상소를 올려 나랏일에 대해 논하며
자신의 재능을 펼칠 관직을 청했으나 번번이 거절당했고, 결국 아내까지 원인 모르게 살해당하고
연이어 딸도 잃는 등, 절망하며 근심속에 살다가 4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고 정사는 기록하고 있다.
조식은 일찍부터
문학적 재능이 뛰어났다
어느날 조조가 땅을 파다가 동으로 만들어진 참새를 우연히 발견했는데,
그 장소에 웅장한 누각 세채를 모아서 짓게하고 누대의 이름을 "동작대"라 이름 지었다.
누대가 완성되자 완성을 기념하는 만찬을 열고 두 아들 조비와 조식을 불러 글을 짓게 했는데,
동생 조식이 지은 "동작대 부"는 그 뜻이 웅대하고 깊은 표현이 형 조비가 지은 문장을 능가하여
그때부터 부친 조조의 총애를 듬뿍 받았다.
첫댓글 감 사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