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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피아, 관료+마피아인가? 관료+유토피아인가? (바람구두의 유리병편지, 2014-05-26 12:53:59)
1. 관료제와 법치주의
세월호 참사 이후 익숙해진 용어 중 하나가 이른바 '관피아'란 말입니다. 저 때의 관(官)이란 말 그대로 '벼슬+마피아'의 합성어인 것이지요.
막스 베버는 근대산업혁명 이후 등장한 '관료제(Bureaucracy)'가 사회를 유지하는데 있어 가장 유용하고 이상적인 조직형태라고 여겼습니다. 사회학 개론 시간에 배울 법한 내용이긴 하지만 반복해보면 관료제란 '합리적 지배'의 형태로 세습에 의거하는 '전통적 지배', 특별한 자질을 갖춘 지도자에게 정서적인 신뢰와 충성에 기반하고 있는 강력한 리더십을 의미하는 '카리스마적 지배'와는 근본적으로 구분되는 지배의 유형을 뜻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관피아' 논란 속에는 합리적 지배의 형태를 가장한 전통적 지배와 카리스마적 지배의 요소가 모두 녹아있기 때문에 문제가 됩니다. 이런 현상이 빚어지고 있는 가장 큰 까닭은 관료제의 가장 중요한 요소인 '합리성'이 오랫동안 훼손되어 왔기 때문입니다. 관료제에 있어 합리성이란 구성원들이 합의한 일정한 법률이나 규칙에 의해 지배의 합법성을 인정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관료제와 법치주의'는 표리관계를 이룬다는 것이지요. 관료제의 합리성과 관료주의는 사실 다른 말이 아닙니다. 관료제에 있어 합리성은 이 조직의 장점이자 동시에 단점이며 한계이기 때문입니다. 관료제가 그들 스스로에게뿐만 아니라 사회에도 제공하는 '안정성'의 기반은 이들이 법대로 한다는 것이고, 우리가 때로 이것을 관료주의로 비판하는 까닭은 융통성 없이 법대로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진국에서는 관료주의의 병폐를 보완하기 위해 민간조직의 역동성을 관료제에 수혈하기 위해 노력하고, 민간(시민사회와 정치의 영역)에서 이를 보완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입니다.
다시, 정리해보겠습니다.
관료제에서 중요한 것은 합리성(법치주의)이고, 관료제가 멀리해야 할 것은 첫째. '세습' 또는 세습되는 전통적 권위에 대한 순종, 둘째. 특정한 지도자에 대한 정서적인 신뢰와 충성에 기반한 카리스마적 지배에 대한 복종 그리고 세번째가 조직 자체의 안정을 위해 '법'을 방패삼아 공공성을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앞의 두 가지 문제는 사실 '전제왕정의 신료제(臣僚制)'가 지니고 있는 특징과 정확하게 겹치기 때문이지요.
2. 공화정제의 관료제(官僚制)와 전제왕정의 신료제(臣僚制)
'공화정제에서의 관료제(官僚制)'에 대비할 만한 행정체계로 '전제왕정의 신료제(臣僚制)'를 들 수 있습니다.
대한민국은 해방 이후 민주공화정 체제를 채택하고 있으나 정부 수립 이전과 이후의 역사적 전통과 문화를 살펴보면 여전히 대한민국의 현대 관료제는 전제왕정의 신료제에 가까운 특성들을 보이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전제왕정의 봉건적 유습(유교주의 문화)에서 관료란 전통적으로 지배계급의 일원이자 지식엘리트 계층으로 지방 아전을 제외한 관인(官人)은 소수의 지배계급에서만 배출될 수 있었습니다. 그에 따라 관료(이때의 관료란 하급공무원이 아닙니다. 하급공무원은 아전에 가까운 것이지요)들은 법적, 구조적인 지위와 달리 자신들을 지배계급의 일원으로 인식하는 권위주의적인 의식과 행태(유교적 관존민지 사상의 영향에서 완전히 벗어났다고 할 수 없겠지요)를 지닐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들은 관료로서 자신의 행위 동기를 '합리성'에 근거한(다시 말해 법치주의) 근대적 의미의 관료라기보다 왕에게 맹목적으로 충성하였던 신료에 가까운 셈이지요. 이들의 의식 속에는 민관이 평등하거나 관료가 민간의 지배를 받는(민주와 공화) 전통을 내면화하지 못했습니다. 대한민국 건국 역사가 어느덧 반세기를 넘겼지만, 여전히 일반 국민들은 관공서에 가면 아무 이유 없이 위축되기 십상입니다. 직접 국민을 면대면하게 되는 하급 공무원에 대한 인식은 민주화 이후 '국민에 대한 봉사(civil servant)'라는 측면에서 많이 변화되었지만, 기본적으로 공무원 조직 내부의 작동 원리는 여전히 신료제의 성격(지역과 학연, 혈연 등의 연줄)에 따르는 부분이 많은 것이지요.
여기에 권위주의 정치체제 아래에서 모든 정보를 독점하고, 상황(사태)에 대한 정의마저 국가와 독점하는 상황에서 관료들에 대한 민간의 감시(국회를 비롯해 시민사회)는 아무 효과를 발휘할 수 없었습니다. 공무원 내부의 위계 중 가장 대표적인 것 중 하나가 '국가공무원'과 '지방공무원'의 차등 의식입니다. 지방공무원에 대한 국가공무원의 차등 의식은 널리 알려져 있지요. 이들을 선발한 것, 이들의 일상(승진과 좌천, 포상과 처벌 등등)에서 시민은 멀리 있고, 국가는 가까이 있습니다.
3. 권위주의 독재체제와 함께 병들어간 관료제
한국사회의 많은 부분들이 이중적인데, 관료제 역시 그렇습니다. 관료제가 표방하는 형식적인 이념과 추구하는 가치는 미국을 비롯한 서구의 영향을 받고 있지만, 그 내용을 채우고 있는 것들은 식민지 시대로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일본식 제도들이란 점도 그렇습니다. 여기에 더해 오랫동안 지속되어 왔던 권위주의 (독재)체제는 한국의 관료제를 더욱더 병들게 해왔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해방 이후 이승만에 의한 친일파 척결의 무산이었습니다. 이승만은 자유당은 물론 그 누구와도 권력을 나누려 하지 않았습니다. 4월 혁명의 경우만 살펴보더라도 자유당 일각에선 권력재창출이 좀더 쉬운 내각책임제를 수용하고자 했으나 이승만의 반대로 인해 무리한 부정선거를 획책한 결과였습니다. 이후 5`16군사정변으로 집권한 박정희는 만주국을 세운 군국주의 일본에서, 군국주의 일본이 배운 독일제국에서, 또 독일제국의 원뿌리가 되는 프로이센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지배체제를 형성하고자 했습니다.
궁극적으로 유신체제가 추구한 국가형태는 '군대를 가진 국가가 아니라 국가를 가진 군대'였다는 점에서 프로이센의 병영국가와 연결됩니다. 프로이센의 계몽주의는 카리스마를 지닌 계몽군주에 의한 통치, 이에 복종하는 신료제도였습니다. 이것을 간단히 정의하기는 어렵겠지만, 식민지에서 해방된 발전국가들에게서 흔히 보이는 형태이기도 했지요. 박정희 정권은 표면상으로는 '국가에 대한 사명감, 엄격한 공직기강, 청렴성' 등을 강조하였으나 실제 그 알맹이를 채운 것들은 군부 엘리트들과 그('우리가 남이가'라는 지역주의, 전통적 지배 체제)에 협조적인 일부 민간엘리트들과 권력을 나누어 통치하는 형태였습니다.
지역연고를 중심으로 한 연고주의, 지역주의는 변형된 인종주의로서 군부 내에서는 TK세력을 '하나회'로 엮고, 대통령의 고향인 구미와 영남을 엮어 이 지역 연고를 이용하지 않으면 관료제 내부에서 출세하기 어려운 구도를 만들었습니다. 이것은 조선시대 중기의 당파보다 조선후기와 말기의 문벌에 의한 세도정치에 가까운 성질을 갖고 있었습니다.
태양왕 루이 14세는 "짐이 곧 국가"라고 했는데, 박정희 정권은 '대통령이 곧 국체'였고, 유신은 대통령의 영구집권을 위한 요식행위였습니다. 이런 흐름은 전두환 정권에 이르기까지 고스란히 이어졌습니다. 이와 같은 관료제의 흐름에 일어난 최초의 균열로 저는 87년에 일어난 박종철 열사 고문치사사건을 듭니다. 이 사건 이전에도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국가가 고용한 공무원들에 의해 고문당하고, 심지어 군이나 수사기관 등에서 고문, 고문후유증으로 의문사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처벌받지 않았습니다. 관료제의 합리성이 존재하지 않았던 시대였지요.
전제왕정 체제 아래에서 신료집단의 목숨을 건 충성은 그 왕조가 대를 이어 거듭될 것이란 사실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즉, 내가 죽더라도 왕 또는 그 왕을 계승한 후손에 의해 나와 나의 가족이 보호될 것이란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가능했던 충성이었습니다. 유신에서 5공으로 이어지는 군부독재 메커니즘에서 관료제의 작동방식과 기능 역시 이와 매우 흡사했습니다. 물론 거기에 더해져 국가에 반대하는 '빨갱이'는 '비국민'이고, '비국민'은 국가의 보호도, 심지어 인간도 아닌 반인권적 반공주의의 영향도 빼놓을 순 없겠죠.
4. 민주화와 관료제
87년 무렵, 5공은 더 이상 불법을 자행한 관료제를 보호할 수 있을 만한 권력을 지니고 있지 못했습니다. 유신에 이어 5공화국으로 이어지는 과정은 국가가 강권력(하드파워)의 수치를 점차 올려가지 않으면 더 이상 정권의 안전을 담보할 수 없는 상황으로 민주화의 열기가 높아졌고, 시민사회가 더 이상 이를 용인하지 않는 수준까지 성장해가는 과정이었습니다. 유신을 지탱하기 위해 부마항쟁에 대한 강력한 탄압이 필요했고, 유신체제를 물려받기 위해 군부세력에게 광주학살이 필요했다는 것은 그만큼 이에 대한 저항이 만만치 않았다는 반증이었습니다.
5공 정권 말기에 이르러 5공화국을 지탱할 수 있는 강권력은 한계에 다다랐고, 바로 그 시점에서 터진 죽음이 박종철 열사의 죽음이었습니다. 국가 또는 조직에 의해 보장받을 줄 알았던 자신들의 안전이 버림받자 이들은 감옥에서 매일 같이 울면서 억울함을 호소했습니다. 이들이 억울했던 것은 자신들의 행위가 일탈이거나 개인적인 범죄가 아니라 그 조직의 관행(慣行)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민주화 10년, 많은 관행이 바뀌었습니다. 대통령이 국가정보기관을 이용해 민간을 사찰하는 관행, 정치조작행위, 언론기관에 정보기관원이 상주하며 뉴스나 보도내용을 관리하는 관행, 방송사 사장을 비롯해 공사기관에 특정 지역 사람을 심는 행위 등등이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정권 교체 이후 이 모든 관행은 또다시 과거의 관행으로 대체되었습니다. 위당 정인보 선생은 일제 36년은 우리 말을 빼앗고, 심지어 우리 이름마저 빼앗았는데 이것을 본래 우리 것으로 되돌려 놓는데 최소 20년은 밤잠을 자지 않고 노력해야 우리 민족이 정신을 차릴 수 있을 거라 했습니다.
2004년 노무현 전 대통령의 탄핵 소추도 형식적으로는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성 의무에 관련된 사항이었습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선거기간 중 자신이 속한 열린우리당에 대한 지지발언을 하였다고 지적된 후, '공직선거 및 선거부정방지법'이 정한 중립의무 및 대한민국 헌법 위반으로 당시 야당인 한나라당으로부터 탄핵 소추를 당해 대한민국 헌정 사상 최초로 대통령직 재임 중 대통령직 권한이 정지되었던 것이죠. 그 내용이야 어찌되었든 민주화 불과 10년 만에 대통령의 정치적 중립성 위반을 운운하며 탄핵 국면이 조성되기까지 하였던 경험이 있었던 겁니다. 그러나 그로부터 10년도 흐르기 전인 2012년 공무원에 의한 민간인 사찰과 국정원에 의한 조직적인 정치개입이 공공연하게 이루어졌음을 목격하게 됩니다. 그리고 지난 대선에선 정부 각 기관들이 조직적인 선거 개입 문제가 단순한 의혹이 아닌 상당한 근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사실로 밝혀지기도 했습니다.
이승만 독재 12년, 박정희 독재 18년, 전두환, 노태우 13년이었습니다. 일제 36년에 빼앗긴 제 정신을 찾는데 불철주야 노력해도 최소 20년이 걸린다는데, 군부(민간)독재가 43년이었으면 우리 사회가 제대로 된 사회로 돌아오는데 걸리는 시간은 얼마나 필요했을까요?
5. 관료제의 재생산 구조
김영삼 문민정부 이후 관료사회에 유행한 말은 다음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복지부동(伏地不動)'이고 다른 하나는 '면종복배(面從腹背)'였지요. 이 두 가지 말을 하나로 합치면 '보신주의(保身主義)'가 됩니다. 이는 관료제가 멀리했어야 할 두 가지 지배질서 '전통적 지배와 카리스마적 지배' 이외에 세 번째 문제, 바로 관료주의의 소산입니다. 5년 단임제 대통령 제도 아래에서 대통령은 5년마다 한 번씩 바뀌게 됩니다. 5년마다 한 번씩 대통령의 출신지역과 성향에 따라 관료조직이 재편성된다는 뜻입니다.
이런 재편 과정은 관료조직의 안정성을 해치게 되고, 지난 43년간 지역주의와 연고주의에 의해 능력과 무관하게 운영되어온 관료조직은 이미 그들 스스로 경쟁 없는, 감시 없는 가두리 양식장 속에서 지역 속의 지역으로 새로운 연결망을 형성합니다. 이른바 '라인'이지요. MB가 집권했을 때 우리가 가장 많이 들었던 라인은 바로 '영포'라인이었습니다. TK나 PK같은 광역의 지역연고주의가 아닌 더욱 협소해진 연고관념이 관료제의 새로운 현상으로 등장한 것입니다. 이것은 관료주의가 더이상 정치나 시민사회에 의해 영향받지 않는 상황에서 그들 스스로 재생산구조를 갖췄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관피아'인 것이지요.
새로운 정부가 들어서면 각 부처의 장차관을 선임합니다. 이들을 관료 출신으로 임용할 것인지, 정치인 출신으로 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습니다. 장차관은 실질적으로 행정직이 아니라 정무직에 가깝기 때문이지요. 따라서 대체로 장관은 대통령과 국정철학을 공유하는 인물이 담당하고, 이를 보좌하는 형태로 관료조직 내부를 잘 알고 있는 관료 출신을 차관으로 임용해 왔습니다.
정치인 출신 관료(policrat)는 대통령과 정치적 운명을 같이하며 자신이 맡은 부처뿐 아니라 국정 전반에 대해 책임을 지기 때문에 우리 헌법에서도 국정 최고 심의기구인 국무회의를 먼저 구성하고, 국무위원 중 장관을 임명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장관은 편의상 한 부처를 책임지도록 하고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국정 전반에 대한 정치적 식견 또한 갖추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임명된 장관이라도 얼마 지나지 않아 관료들에게 포획(捕獲)되는 일이 발생합니다.
부처 소속 차관 이하 관료들은 모두 한 식구입니다. 그들은 처음부터 같은 부처에서 관료 생활을 시작했고, 대통령은 그나마 5년 임기가 보장되어 있지만, 장관은 언제 떠날지 알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누구랑 사회생활 더 오래 하겠어?' 같은 분위기가 조성될 수밖에 없습니다. 게다가 이들 대부분은 정치관료인 장관보다 해당 분야와 업무에 대한 전문적 지식이 앞섭니다. 업무수행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부처 특유의 기술적 노하우 역시 정치관료보다 기술관료가 앞섭니다. 더군다나 우리나라의 장관들 수명은 다른 나라들보다 짧은 편입니다. 그만큼 대통령이 정치적으로 빚진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장관들조차 처음에는 대통령의 의지를 자신이 맡고 있는 해당부처에 관철시키는 일을 하다가 나중에는 반대로 관료조직의 의견을 대통령에게 전달하는 역할을 하게 됩니다. 이른바 '전도흑백(顚倒黑白)'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지요.
국가권력은 시장으로 넘어가고, 국가운영은 관료조직의 손아귀에 들어갔습니다.
6. 관피아 해체의 가장 좋은 방법, 민주주의
MB에 이어 박근혜 정부가 출범했습니다. 아주 오래 전 일도 아니므로 기억하고 계시겠지만 다시 한 번 이야기해보면 이번 대통령은 취임 후 50여일 지나도록 정부조차 구성하지 못했습니다. 정부조직법이 국회에 계류되어 있어서 개편이 예상되는 부처의 장관 자리가 오랜 동안 공석으로 남아 있었던 탓도 있었지만, 인선의 첫 단추라 할 수 있는 첫 번째 국무총리 후보자의 자진 사퇴 이후 가까스로 국무총리가 정해졌으나, 국정의 최고 심의기관인 국무회의는 취임 후 2주가 지나서야 겨우 개최될 수 있었습니다. 야당이 발목을 잡았다는 볼멘소리도 통할 수 없는 것이 우리가 보고 아다시피 현재의 야당은 역대 최약체, 역대 최악의 야성을 보여주는 정당이란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새로 생긴 해양수산부는 장관 후보자의 자질이 심각한 문제가 되어 여당 내부에서조차 ‘어렵다’는 반응을 보이다가 부서 출범 후 한 달 가까이 되어서야 대통령에 의해 임명이 강행되었습니다. 게다가 박근혜 정부는 그 어느 때보다 관료들을 사랑하는 정부였습니다. 그것은 초대 장차관 후보자들의 면면만 보더라도 알 수 있습니다. 한국 관료제를 실질적으로 운영하는 장차관 35명 가운데 26명(74%)이 관료 출신이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 이후 한국 정치사에서 벌어지고 있는 가장 특이한 현상은 정치를 배제하면 할수록 인기를 얻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후 대통령 후보로 떠오르는 인물일수록 정치 경력이 짧거나 정치와 무관한 분야에서 일하다가 대중적인 인기를 등에 업고 정치인이 되는 특이한 현상이 반복되기 시작합니다. 어쨌든 여의도 정치와 담 쌓고, ‘일하는 정부’를 강조했던 MB정부 첫 내각 41명 중 관료 출신은 27명(66%)이었던 것도 높은 수치였지만, 박근혜 정부에 와서는 관료 출신이 장관을 차지하는 비율이 더욱 높아집니다.
이외에도 외부기용이 많았던 차관급 외청장 17명 중에서도 11명이 관료 출신이었습니다. MB가 여의도정치와 담을 쌓았다면 박근혜 정부는 아예 정치와 담을 쌓으려 했던 셈입니다. 심지어 대통령 측근으로 정무적 기능이 강한 청와대 비서관 40명 중에도 관료 출신이 16명이나 됩니다. 이쯤되면 박근혜 정부는 아예 정치를 하지 않는다는 대중적 인식을 줄 수도 있겠지요. 어쩌면 이것이 박근혜 대통령의 잇따른 실책에도 불구하고 비상식적으로 높은 지지율의 비결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청와대와 정부에는 대중의 시선에 낯익고, 혐오하는 여의도 인사 자체가 거의 없었습니다. 과연 좋은 일일까요?
물론 주변에 정치관료(policrat)가 적다는 것은 대통령이 정치보다 행정을 중시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국정운영에 있어 정치적 소통을 통해 국민의 의견을 수렴하기 보다는 관료들의 전문성에 의존해 대통령의 의지를 관철시키겠다는 의지의 표명이기도 합니다. MB정부 보다 박근혜 정부가 국민과의 소통에 있어 더 큰 한계를 드러내는 까닭, 유례없는 조문조작파문 등이 빚어지는 까닭은 박근혜 정부 주변에 이미 관료들에 의한 인의 장막이 두텁게 생겼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흔히 특정분야에 전문성을 가진 '기술관료'를 '테크노크라트(technocrat)'라는 이름으로 부르는데, 우리 사회에 이 말이 등장했던 배경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이 말이 우리 사회에 처음 등장했던 것은 동구현실사회주의의 붕괴 원인을 지적하기 위한 용도로 등장한 것이었습니다. 박근혜 정부는 신임 총리로 안대희 전 대법관을 선정하고, 검사 출신인 안대희 신임총리 내정자는 자신의 과거 경험을 이용해 '관피아'를 척결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냅니다. 그러나 그 자신조차 퇴임 후 5개월 만에 전관예우를 이용해 16억 원의 수익을 거둔 사람으로, 하루 평균 1,000만원을 벌어들인 사람입니다. 그 자신이 전관예우의 관행이란 적폐(積弊)를 이용한 사람이었습니다.
솔직히 박근혜 정부 주변에는 그만한 사람도 없구나란 생각이 아니 드는 것은 아니지만, 인사청문회 때마다 우리 사회의 관행에 저항해온 사람이 이다지도 없는 것인가란 자탄을 이번에도 반복하는가란 안타까움이 들었습니다. 관행을 반드시 나쁜 것으로 볼 필요는 없겠지요. 만약, 우리가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이 닦는 관행이 없었다면 우리 치아는 모조리 썩어버렸겠지요. 이처럼 좋은 관행과 전통이란, 다시 말해 훌륭한 문화를 사회적 합의 아래 가진 사회는 어떤 결정을 내릴 때 불필요하게 소모되는 에너지가 적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그리고 보수주의란 무엇이든 관행대로 했을 때 뒤탈이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어떤 보수일까 되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군(軍)에 대한 민(民)의 우위’가 깨지는 순간, 군사정권이 등장합니다. 만약 ‘관(官)에 대한 민(民)의 우위’가 깨진다면 어떤 정권이 등장하게 될까요? 어쩌면 우리는 이미 그것을 ‘세월호 참사’를 통해 보고 있습니다. 민의를 대변한다는 정치가 관료보다 반드시 우수하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관료주의의 병폐를 막고, 관피아를 해체하여 투명하고 능력있는 사회가 되기 위한 방법은 무엇일까요?
저는 우선적으로는 공무원들에게 제한되고 있는 민주주의가 허용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공무원 노조 스스로 공무원이 시민이며, 시민의 봉사로서 공직에 임하고 있다는 자부심과 자각이 있을 때에만 비로소 관존민비의 권위주의가 깨지고, 이와 같은 자부심을 바탕으로 관료사회 내부의 투명성이 제고되며 서로를 효과적으로 견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 지금 우리 사회에 필요한 것은 민주적이고 현명한 정치적 리더십과 정교한 법적·제도적 설계입니다. 관행대로 했을 때 뒤탈이 없다고 생각하는 보수주의가 아니라 관행대로 하면 문제라고 생각하는 적극적이고 개혁적인 진보가 필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