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날이 음력으로 이월 스무엿세. 양력으로 4월 1일 일요일이었다.
택일은 만세력을 보시며 큰아버지께서 길일을 뽑으신 거였다.
그런데 지금보다도 그 때는 만우절의 열풍(?)이 대단했었다.
낯선 서양 풍습이 처음 알려졌기 때문인지 4월 1일에는 선의의 거짓말은 물론, 악의의 거짓말도 난무했었다.
나의 모교 영문과 교수님 중에 이석곤 선생님이 계셨는데, 아버지께서 일부러 교수님을 찾아가서 자문을 구하셨다.
이 교수님과 아버지는 친분이 있는 사이셨다.
"여식의 혼인 날자가 만우절로 잡혔는데, 서양에서는 어떻습니까?'
"만우절에 혼인 안한다는 기록은 없군요 하하"
문제는 결혼식장이었다.
시댁에서는 큰며느리를 보는 일이고, 28살 약관의 나이 때부터 제자를 키워 내신 분이라 하객이 많았다.
우리 집은 일단 일가 권속이 번성한 집이고, 큰언니의 혼사이후 15년만의 일이었다. 일반 예식장으로는 비좁았다.
그래서 궁여지책으로 선택한 것이 경기여고 대 강당이었다.
경기여고 강당에서는 이따금씩 결혼식이 열렸다. 평일이 아니고 공휴일 학교에 수업이 없는 날이다.
졸업생이 원하면 승낙을 했다. 그리고 학교 화원의 나무와 꽃들을 강당으로 옮겨 장식하는 것도 허락했다.
당시 서울예식장의 아드님인 신한목씨가 신랑의 대학 동기이고, 사장이 아버지와도 지인이셨다.
서울예식장에서 강당을 식장으로 꾸미는 것을 도와주었다.
나는 이렇게 진행되는 일련의 일들이 남의 일 같았다. 다 아버지가 맡아서 하셨다.
그 때는 하객 답례품으로 제과점에서 카스테라를 주문하여 한상자씩 드리는 것이 일반적인 일이었다.
어머니는 혼수 준비로 바쁘신데, 우선 침구에 쓰일 솜은 딸이 스무 살이 넘으면 미리 남쪽의 목화밭에 가서
제일 실하고 질 좋은 목화를 사다가 기계로 껍질을 벗겼다. 당태솜이라는 것이다.
기계로 껍질을 벗겨도 씨와 껍질이 솜에 붙어 있기 마련이다.
어머니는 저녁밥을 다 먹은 밤에 한 소쿠리씩 덜어와서 손으로 일일이 아주 작은 껍질 조각이나 씨를 골라내셨다.
이 작업을 사오년 하여 말끔하게 정리된 솜을 혼인이 정해지자 솜틀집에 가서 트는데,
이부자리 용, 솜저고리 용, 솜바지 용, 버선 용, 방석용, 이렇게 용도대로 두께를 조절하여 틀어오셨다.
그리고 광목을 하얗게 바래 놓는 일이다.
광목을 들고 정능 냇가로 간다. 볕 좋은 날을 고르는데 당일만 볕이 좋아도 안된다. 사흘전 부터 뙤약볕이라야 한다.
우선 화덕 솥에 양잿물을 넣고 나뭇가지를 줏어다가 불을 붙여서 펄펄 삶는다.
황토물이 될 때까지 삶아진 광목을 냇물에 담아 말끔히 행구고 그 것을 바위에 널고 말린다.
다 마르면 다시 한번 삶는다. 그리고 말리고 행구고 삶는 작업을 하루 종일하면 누런 광복이 하얗게 된다.
저녁 어스름에 거둬 가지고 돌아온다.
집으로 와서는 풀을 먹이고 꾹꾹 밟다가 윤이 반지를 하게 날 때까지 다듬이질을 한다.
처음에는 다듬이돌에 놓고 다듬다가 나중에는 홍두깨에 둘둘 말아서 두 사람이 다듬이질을 하고
조무래기들이 양쪽에서 홍두깨를 잡는다. 요와 이불의 호청으로 쓰일 것들이다.
버선도 이 것으로 만든다.
이렇게 어머니가 제일 공들이시는 것이 이부자리였다. 이불 한번 하기는 어려우니 평생 덮을 이불을 하시는데,
이불을 하는 날이 잔치날이다. 고모, 이모, 숙모, 사촌올케들, 그날은 열명도 넘게 모여서 이불을 한다.
넓은 대청에서는 솜 두는 일을 하고, 안방에서는 솜을 다 둔 요와 이불에 호청을 입히고,
건너방에서는 재봉틀 돌리는 소리로 부산하다.
요는 큰요와 작은 요 이렇게 두개만 하는데 이불은 아홉 체를 하셨다. 짝수로 하는 게 아니라고 아홉체를 하신 것이다.
아주 한 겨울 이불 두채, 차렵이불 두채, 안팍 뉴똥으로 싼 보드라운 이불, 누비이불, 여름용 겹이불,
모시와 삼베를 겹으로 해서 만든 여름이불, 그리고 아랫목에 깔아 놓고 낮잠을 자는 편하고 예쁜 이불,
버선도 50켜레. 방석 열개. 이 모든 것을 하는 것이 제일 큰 일이었다.
사철 저고리는 바느질 집에다 맡기셨다. 그러나 치마와 속고쟁이, 속치마는 다 손수하셨다.
거기에 장농과 화장대, 재봉틀. 다리미. 인두. 인두 판. 반짓고리...안성 유기로 만든 놋대야.
놋주발 대접, 놋 요강, 은수저 두 벌, 밥상과 교자상. 이것이 딸을 시집 보내는 당시 서울 중류 가정의 품목이었다.
지금 같은 예단의 풍습은 없었다. 전자 제품 같은 것도 혼수에 들지 않았다.
어머니는 칠첩반상의 그릇과 장독대를 치장해 주셨다.
아들을 가진 댁에서는 청, 홍, 치마감을 넣은 함을 보냈고,
폐백을 드릴 때 입을 관례옷 한 벌, 그리고 저고리 삼작 (노랑, 분홍 연두)를 신부에게 내리고
금비녀나 노리개등 형편에 맞는 폐물을 절을 받으면서 주었다. 살림집을 마련하는 것도 남자측 몫이다.
나는 원래 결혼이란 것에 별다른 꿈이 없었다.
신분상승의 기회로 삼지 않은 것은 물론, 나락으로 떨어진다는 신분 비하의 걱정도 하지 않았다.
물론 위의 열거한 혼수 때문에 시댁의 눈총도 받지 않았고,
양가 어머니들께서는 과분하게 애쓰셨다고 서로 노고를 치하 하셨다.
당시 이 땅의 며느리는 죄목 없는 죄인으로 죄악시가 되었던 조선조의 남존여비의 잔해가 여전히 남아 있었다.
그래서 딸을 시집 보내는 어머니의 마음이 편하지 않았던 때였다.
어머니는 속보, 겉보에 술을 달며 한 땀 한 땀 정성을 다하셨지만, 분에 넘치는 겉치례를 하지 않으셨다.
대신 딸을 기르면서 "된시집"을 살게 했다. 잘 가르친 딸 이상의 혼수는 없다는 생각이셨던가?
정말 딸들에게 무서운 엄마였다.
그래서 나는 어떤 시댁을 만나도 겁나지 않았다.
우리 새언니가 며느리 노릇 하는 것을 계속 옆에서 봤었고, 큰댁의 종부 언니도 곁에서 살았기 때문에,
결혼에 대한 기대도 없었지만 두려움도 없었다. 요즘 신부들이 들으면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의 이야기다.
이렇게 준비된 (?) 며느리 감인데 너그럽고 친구 같은 신식 시어머니에,
신혼 첫날부터 시댁에서 묵지 않고 바로 내가 살 새집으로 들어가게 되었으니 나는 결혼에 대해 더욱 불안하지 않았다.
혼인날은 쾌청하였다.
그런데 그 밤에 천지에 눈이 내려 마치 한 겨울 같이 세상이 하얗게 눈으로 덮여 있었다.
호텔 유리창으로 발자국 하나 나지 않는 새하얀 세상을 바라보며 나는 속으로 말했다.
이렇게 백지 같은 도화지 위에 내가 그림 그리기에 따라 내게 펼쳐지는 생활이 달라지겠구나.
시작이 이렇게 하얀 길이니 나는 어떤 색, 어떤 발자욱을 이 도화지에 남겨야 되나?
스물 일곱살에 이미 애늙은이처럼 철이 꽉 들은 早老한 신부는 준엄한 계시 하나를 가슴에 묻었다.
삶을 바라보는 내 생각, 삶을 살아내는 내 태도가 내 인생의 그림이 될 것이라는....
(계속)
첫댓글 "스물 일곱살에 이미 애늙은이처럼 철이 꽉 들은 早老한 신부는 준엄한 계시 하나를 가슴에 묻었다."
스물 셋 철없던 신부와 너무 다른 결혼이야기..
조목조목 나열해주신 그 시절 혼인풍습, 잘 읽었습니다.
근데.. 만우절이라고 오시지 않은 하객은 없었는지요?ㅋㅋ
청첩장까지 거짓말이라고는 아무도 생각 안하더이다. 그런데 안 온 손님 중에는 혹시????
유선진 선배님. 안녕하세요?
올려주신 글들 감사합니다.
선배님의 친정, 시댁 모두 훌륭하시고
풍성한 결혼식까지 올리시고..
보기도 읽기도 상상하기도 좋습니다.
모쪼록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사실 이런 목록까지 쓰는 것은 돈으로 쉽게 하는 요즘 결혼준비보다 한가지라도 손으로 정성스럽게 장만하던 50년 전의 혼수 이야기가 하고 싶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때 양가에서는 모두 예단 풍습이 없었어요. 근친을 다녀 오면서 어른들 버선 한켤레씩 인사로 드렸지요. 나는 바로 살림집으로 들어갓기 때문에 근친도 생략했지만...인스턴트 食문화가 되면서 혼수장만도 인스턴트化. 카드를 가지고 상점에 가면 그날로 혼수준비가 다 되잖아요? 요즘은...
선진후배님,
글을 읽고 우리 언니들 시집갈 때 생각이 납니다.
나는 6,25 동란후 휴전하고 몇년 안 되었던 때라 그런지
마치 쉬쉬 하는 결혼처럼 뚝딱 하였습니다.
이것저것 준비없이요.
단칸방에 두 사람 자도 가득한데요.
성당에서 神父님주례로 '婚配'라는 결합의 미사는
나의 일생에 어떤 기쁨, 슬픔, 곤경속에서도 잊으면 안 되는 날이었습니다.
아이 다섯 하고 살아가는 과정에서 혼배때의 신부님의 말씀을 늘 되새겼지요.
선진후배님 결혼 축하드립니다.
다음 시리즈는 글 제목에서 "이 남자'가 '다른 남자'로 바뀔 것같네요.
긴 글이 술술 넘어가는 것이 후배님 글의 특징입니다.
갓 구어놓은 따끈따끈한 쿠키라 하던가요
선배님은 마음에 꽤 여유가 있는 新婦셨나 봐요? ㅎㅎ, 저는 주례가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어요. 그냥 덜덜 떨고만 있었으니까요. 16살 때 중공군 앞에서도 떨지를 않았는데, 그 때는 왜 그렇게 떨었는지?
선배님 , 이 무슨 대작이십니까 ... 정말 어느 때 누구에게라도 모범 답안이 될만한 이야기 입니다
옷 깃을 여미는 마음으로 읽습니다 . 선배님 , 이제는 정말 건강 하셔야 해요 아시지요 ?
연수씨, 무슨 대작씨이나? 자기의 결혼 이야기 쓰는 것이 참으로 조심스럽지요. 가만히 있으면 보통은 되잖아요? 써서 이득되는 일은 눈꼽만큼도 없는 어리석고 객적은 일이지요. 그런데 나는 왜 이 짓을 하고 있을까요? 나도 모르겠습니다. 굳이 이유를 단다면 사랑방에 대한 애정? 연수가 건강하라고 축원해 주니, 마음에 기쁩니다.^^
바로 그거에요 선배님 , 이렇게 글을 올리고 읽고 그리고 사랑하는 마음을 보내고 ... 언짢은 마음이 오가면 내 마음이 정말 더 아프고 ... 그러는 ... 정말 우리들의 사랑방에 대한 애정 이지요 ... 구지 설명 하지 않아도 우리들은 서로의 마음을 가늠하며 나누니까요 ... 선배님의 결혼이야기도 우리들의 일이니까요 ㅎㅎ
어느 새 이심전심이 되어버렸지요?ㅎㅎ
유선진 선배님!
1962년도의 혼인풍습 잘 알게 되어 감사 드립니다.
지금과 비슷한것도 있습니다.
좋은글 올려 주셔서 감사 드립니다.
오늘은 32도C 였습니다.
한여름 같습니다.
유선배님, 더운여름 건강하시기를 기원 합니다.
예, 지금과 비슷한 부분도 많이 있지요. 강산이 다섯번 바뀌는 사이 과학, 경제규모,가 100배 졍도 발전했으니 혼수 시장의 종목도 바뀌는 것은 당연. 다만 그 당시의 서울, 중류가정의 이야기를 하였어요. 경희씨도 더위에 건강하세요.
유 선진선배님, 선배님 글을 대하면 참으로 편안해져요. 눈이 더 나빠지지않기를, 그래서 글을 더 많이 쓰실 수있기를 빌어봅니다.
이 글은 이미 써놓았던 글이라 옮겨 오기만 하면 되는데, 다른 글 읽기가 아직 불편합니다. 그래서 어렵게 제 글에 올리신 댓글만 읽고 답례글을 쓰는 것 뿐이지요. 다른 선후배님의 글을 잘 읽지 못하여 댓글을 달지 못해서 죄송하답니다.
정말 60년대엔 재봉틀이 주요 혼수품목 중의 하나였지요. 60년대의 결혼문화가
그대로 생생합니다. 예단 같은 것도 시부모님 제외하고는 정말 버선 정도였는데,
언제부터 이렇게 오염이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예단으로 파혼이 되는 경우까지
있으니 말입니다.
서울 풍습은 시부모님 예단도 없었습니다. 각 지방마다 고유의 결혼풍습이 있는데, 그러다 보니 고장에 따라 경우 별로 주고 받았는데, 받는 것은 일단 기분이 좋으니까, 혼수가 자기가 쓸 것을 해가지고 가는게 아니라 받는 사람 위주로 준비하게 되어 예단 값에 치어, 요즘은 신부 자신의 것은 품목에서 없더라구요. 살면서 장만하라는 뜻이겠지요.
유선진 선배님!
그 시대의 결혼풍습 흥미있게 읽고있습니다.
잘하는 것인지 못하는것인지 몰라도
저는 풍습대로 안하고 친구들의 도움말을 듣고
하고 있습니다.
유선배님, 긴여름, 건강히 지내시기를 기원 합니다.
그럼요. 세간의 바람에 휘몰리지 않고 소신 있게 해 나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어요.
요즈음같으면 이불을 사는데요
이리 많은 일을 해야되니
그 예전에 일하는 사람없으면 ,ㅎㅎㅎ
아니죠
부잣집은 물론 일하는 사람이 있죠
뭐 그리 많은 과정을 거쳐야되는지요
그러니 물론 작품은 훌륭하겠지요
요즈음 사는 이불에 비하겠읍니껴???
눈이 아프셔서 답 글을 달면서도 어쩌시나하고
걱정아 됩니다요
넘 넘 수고가 많으신 선진선배님
아직 눈을 아끼고 있어요. 우루과이 전도 시청하지 않고 있다가 결과만 보았지요. 결과로만 보면 최선을 다 한 것 같군요. 이야기 4회 것을 올리려고 지금 들어왔습니다.
우와 결혼식에 참 할일도 많고 ... 그런데 왜 이렇게 황급히 문을 닫으셨어요. 얼마나 이야기가 많을 터인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