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관롱집단(關隴集團)의 등장
관롱집단의 등장은 북위(北魏)의 7대 황제였던 효문제(孝文帝)가 실행한 호한융합(胡漢融合) 정책으로부터 시작된다. 효문제는 선비족과 한족의 융합을 적극적으로 권장하였으며, 한화(漢化)내지 한족화(漢族化)를 모색하였고, 수도를 평성(平城, 오늘날의 산서성 大同)에서 하남성의 낙양으로 이전하여 기존의 선비족 기득권층을 약화시키는 정책을 펼친다. 그러나 이러한 효문제의 호한융합정책은 기반이 다져지지 않은 상황에서 급진적으로 실행해나간 한계를 지녔으며, 결국 북위가 분열하게 되는 근본적인 원인이 됐다.
당시 화북지방을 통일한 북위의 주축 군대는 중앙의 근위군과 북방 변경의 군진 병사였는데, 이는 모두 호족들이 담당하고 있었다. 북위를 창건한 명예로운 군사로서 훈공에 따라 관료로 나아갈 수 있었던 이들은 효문제의 개혁아래 임관자격이 박탈됨으로써 불만이 커져가고 있었는데, 이런 상황에서 효문제의 수도 이전으로 더욱 홀대를 받게 된 평성 북방 변경의 수비진이었던 육진의 불만은 폭발하게 된다. 결국 519년 근위군인 우림병의 폭동으로 시작된 호족들의 불만 표출은 524년 육진의 난(524-530년)으로 발전되면서 북위 왕조를 멸망의 길로 접어들게 하였다. 육진은 회삭진(懐朔鎮), 무천진(武川鎮), 무명진(撫冥鎮), 유현진(柔玄鎮), 옥야진(沃野鎮), 회황진(懐荒鎮)이었는데, 그 중 옥야진의 진민(鎭民)들이 가장 먼저 반기를 들었고, 곧 모든 육진들이 반란에 휩싸이게 되었다. 반란군은 남하하다 대패 하여 20만 명이 포로가 되었고, 조정에서는 이들을 하북 지방에 분산시켜 상황을 무마하려 하였지만 이들은 재차 곳곳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이러한 중에서 관동과 관서 두 지역에 새로운 세력이 나타나게 되었는데, 바로 구 육진 진민 출신인 고환(高歡)과 우문태(宇文泰)이다. 대량의 반란 진민을 수중에 넣은 고환은 한족 명문 세력과 합작하여, 533년 ‘하음의 변(河陰之變)’을 일으키고, 조정을 어지럽히던 이주씨를 물리치고 관동의 패권을 잡았고, 528년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관서 지역으로 들어갔던 우문태는 534년 진압군의 수장이 된 후 관서의 한족 호족과 합작하여 북위는 관동의 고환과 관서의 우문태로 양분되는 양상을 나타내게 됐다.
당시 관서 지방의 우문태는 관동의 고환의 세력에 비해 병력도 재력도 열악하였다. 이런 열세를 딛고 관동과 대적하기 위해서는 관서에 모인 호와 한의 융합에 매진할 수밖에 없었다. 유동해온 호족들은 관서지역을 새로운 고향으로 삼아 기존의 한족들과 연합했다. 우문태는 이 지역의 명칭을 딴 새로운 호한 합작의 정치 집단을 형성 시켰고 군사적으로 호한 합작의 병제인 부병제를 창설했다. 여기서 등장한 새로운 정치 집단은 이후 서위와 북주, 수, 당을 창업하게 되는 세력의 근간이 되었다.
중국 역사학의 대가 진인각(陳寅恪 1890-1969)은 이 새로운 집단을 지역의 명칭을 붙여 ‘관롱집단’이라 기술하였다.
2. 관롱집단(關隴集團)세력
관롱집단은 관롱 즉 관중(關中)과 농우(陇右)를 지역기반으로 하는 정치집단이었다. 이 집단을 주도한 것은 앞서 서술한 서위(西魏)의 우문태(宇文泰)였다. 우문태는 관롱을 중심으로 하여 종족적으로 호(胡 선비족)와 한(漢)을 혼합하였으며, 무력과 재지를 겸수한 자들을 한 덩어리로 만들어냈다. 특히 우문태는 동위와 남쪽의 양(梁)을 견제할 강력한 군부를 필요로 하여, 육진의 난 때 무천진(武川鎮)으로부터 남하한 세력을 중심으로 군사행정의 근간인 8주국 12대장군제(八柱國 十二大將軍制)를 국가 확립 기반으로 삼았다. 이 8주국 대장군들의 가문이 바로 관롱집단의 핵심이다.
관롱집단의 선조들은 모두 무천진 출신이라는 공통점이 있는데, 무천진은 북위(北魏)의 옛 수도 평성(平城)의 서북 음산산맥(陰山山脈) 안에 있던 수도를 방위하는 옛 육진의 하나였다. 우문태는 선비족의 우문부(宇文部)출신으로 4대조인 우문릉(宇文陵)때 이주하였고, 양견의 5대조인 양원수(楊元壽)는 무천진의 사마(司馬)였다. 또 당고조의 4대조인 이희(李熙)도 호걸을 거느리고 무천진으로 옮겨왔다. 북주, 수, 당의 세 왕조의 선조가 과거에는 같은 무천진에 자리 잡고 있었고, 그들이 곧 관릉집단을 탄생시킨 시조라 볼 수 있다.
관롱집단의 핵심은 단연 8주국 대장군의 우두머리 우문태이고, 그 아래로 위(魏) 왕실의 광릉왕 원흔(廣陵王 元欣)이 있었으며, 나머지 6주국 대장군이 12 대장군을 통솔하였다. 6주국 중에는 당고조(唐高祖) 이연(李淵)의 조부 이호(李虎)와 수문제(隋文帝) 양견(楊堅)의 아버지 양충(楊忠)이 따랐던 독고신(獨孤信)이 있었다. 이 6주국은 고대의 주제(周制)에 기초한 6관제와도 연관되고, 동시에 당시의 최고 문벌이기도 하였다. 이렇게 형성된 관롱집단은 서로의 가문끼리도 연결되어 있었는데, 여기서 재미있는 점은 6주국의 대장군이었던 독고신의 세 딸이 모두 황후가 된 점이다. 우문태의 아들인 북주(北周) 명제(明帝)의 황후와 양견의 처로서 훗날 수나라 문헌독고황후(文獻獨孤皇后), 당고조의 어머니 즉, 고조의 아버지인 이병(李昞)의 처는 모두 독고신의 딸로서 북주, 수, 당의 황후가 되었는데, 이는 관롱집단이 시간이 흘러서도 지배세력으로서 자리매김을 하고 있었다는 점을 뜻 한다. 서위에서 만들어진 관롱집단은 북주, 수, 당으로 내려오면서 나라의 주 세력으로 그 영향력을 발휘하기 시작하였으며, 점차 더욱 강한 지배력을 가지게 되었고, ‘북주, 수, 당나라 3백년의 통치계급의 변화는 이 관롱집단의 흥망성쇠와 같다’ 할 정도로 서위에서 발생한 우문(宇文), 양(楊), 이(李)씨를 중심으로 한 관롱집단의 영향력은 대단하였다. 당나라 초기까지 이 집단의 힘은 강성하여, 황실은 물론 창업 공신, 장상, 대신들 거의 모두가 이 집단에서 배출되었다.
3. 관롱집단의 몰락
관롱집단의 몰락은 당나라에 등장한 측천무후(則天武后)에 의해 시작되게 된다. 당태종(唐太宗)의 후궁이었던 무재인(후에 무측천(武則天)은 성은 무(武)씨이고 이름은 조(照)라 한다. 14세 때 후궁으로 들어가 재인(才人 : 정5품)이 되었는데, 태종이 죽은 뒤, 감업사(感業寺)로 들어가 여승이 되었다. 후에 당고종(唐高宗)의 황후였던 왕황후가 고종이 소숙비(蕭淑妃)에게 애정이 있는 것을 경계하고자 무재인을 후궁으로 들이게 한다. 고종의 후궁으로 들어온 무재인은 소의(昭儀 : 정2품)에 오르고, 왕황후가 의도한대로 소숙비에 대한 고종의 관심을 돌리게 하였으나, 이후 계략을 내어 왕황후를 폐후로 만들어 버린다. 이를 지켜보던 장손무기(長孫無忌), 우지령(于志寧), 저수량(楮遂良)과 같은 재상들은 관롱집단의 중심인물로 무측천을 황후로 옹립하는 것에 대해 무측천이 당태종의 후궁이었던 점을 들며, 강력히 반대하였다. 그러나 당시 재상이었던 이적(李勣)이 옹립파로 돌변하여, 배신함으로 결국 무측천은 황후에 오르게 되고, 관롱집단의 중심인물이었던 재상들은 실각을 하게 된다.
당왕조 창업 이래 북주의 시절부터 지배집단으로 세력을 떨치던 관롱집단의 몰락은 무측천이 황후에 책립됨과 동시에 시작되었으며, 그 뒤에도 고종의 모든 정무에 관여한 무측천이 관리를 등용함에 있어 문학에 밝은 지식인들을 등용해 관롱집단의 세력을 더욱 몰락의 길로 내몰게 된다. 오랜 기간 동안 권력을 잡아왔던 관롱집단도 점점 부패하고, 쇠퇴한 상태여서 당 현종 때에 이르러 관롱집단은 그 맥이 끊기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