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유아교육의 이론적 기초
유아교육의 이론적 기초는 철학적, 심리적, 사회·문화적 기초의 세가지 측면에서 고찰해 볼 수 있다. 이러한 유아교육의 이론적 탐색은 유아교육의 본질 즉 아동관, 학습관, 유아교육의 목적관을 바르게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1) 철학적 기초
유아교육의 철학적 배경으로 아동관의 역사적 변천 과정과 교육사상가들의 유아교육에 관한 관점의 흐름을 알아본다.
(1) 낭만주의(romanticism)
낭만주의는 프로이드, 게젤, 루소 등의 사상에 연유한 것으로 심리학에서 보면 성숙이론(maturation theory)에 해당하고, 인식론에서 보면 이성론(rationalism)에 속하며, 생물학 이론에서는 다윈의 진화론에 근거를 두고 있다. 낭만주의는 유아의 성장은 유아가 태어날 때 지닌 잠재능력의 계발로 보고 있다. 흔히 이 이론을 식물에 비유되기도 하며, 식물이 유전적 특성에 따라 성장하는 것과 같이 유아의 성장 및 발달도 식물의 성장과정처럼 설명하고 있다. 따라서 낭만주의는 각 유아의 자발적 성장 의미를 높이 평가하고 있으며 이 이론을 개화이론(unfolding theory)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낭만주의 이론은 아동중심적인 이론이며, 유아의 자유와 해방 및 독특성, 참신성 등을 강조하고 있으며, 유아교육의 목적을 건전하고 원 만한 성격형성에 두고 있다.
(2) 문화전수주의(cultural transmission)
문화전수주의는 서구사회에서 가장 전통적인 역사를 가지고 있는 이론이다. 이 이론은 교육을 하나의 사회화 과정으로 보고 기성세대가 축적한 지식, 가치, 신념, 태도 등을 다음 세대에 체계적으로 전달하는 과정으로 보고 있다. 이 이론은 심리학 이론에서는 행동주의(behaviorism), 인식론에서는 경험론(empiricism), 생물학 이론에서는 환경결정론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 이 이론은 초·중등 교육에서 잘 반영되고 있으며, 특히 미래의 사회생활을 준비하는 데 필요한 기초교과 기능의 숙독을 교육의 바람직한 목표로 설정하여 추진하고 있다. 유아는 환경의 의존적 관계에 놓여 있으며, 유아의 바람직한 성장 발달은 유아에게 제공 될 환경을 어떻게 잘 구조화하느냐, 학습경험을 어떻게 단계적으로 세분화하여 계획에 따라 제공하느냐에 달려있다고 본다. 특히 이 이론은 낭만주의 이론과 정면 대치되는 것으로서 개인이 갖는 내면적인 특성 및 상태의 인정보다 오히려 어떤 집단이 갖는 보편적·공통적인 특성을 더 강조하고 있다.
(3) 진보주의(progressivism)
진보주의 이론은 듀이, 콜버그, 피아제 등에 의해서 주장되고 있는 이론으로 낭만주의와 문화전수주의가 가지고 있는 단점을 보완하고 절충한 이론이다. 즉, 낭만주의가 개인이 가지고 있는 잠재능력의 가치를 과대평가 하였다면 문화전수주의는 상대적으로 환경이 가지는 중요성을 지나치게 크게 평가하였다는 점이다. 따라서 진보주의는 어느 한쪽의 입장에 극단적으로 의존하지 않으면서 유아의 발달은 유기체가 환경과의 끊임없는 상호작용의 결과로 갖게되는 경험의 재구성에 의해 진행된다고 보고 있다. 이 이론은 심리학으로는 인지발달이론, 인식론으로는 구성론, 생물학 이론으로는 상호작용이론에 근거를 두고 있다. 진보주의 교육목적은 유아에게 인지적 갈등을 유발시킬 수 있는 교육환경을 제공함으로써 유아의 발달을 조력할 수 있다는 측면이다. 따라서 유아의 경험들을 조직하고 발달시키는 힘은 유아의 창조적 사고이며, 이러한 사고활동은 문제상황 및 인지적 갈등장면 등에서 보다 활성화, 적극화된다고 보고 있다. 문화전수주의처럼 지식을 강조하고 있지만, 지식은 교사에 의해 제공되는 정보의 기억 내지 암송이 아니라 문제해결 상황이나 인지적 갈등 상황하에서 유아의 적극적인 상호작용에 의해서 지식이 획득된다고 보고 있다.
2) 심리적 기초
(1) 성숙주의 이론
성숙주의 이론이란 아동의 타고난 유전적 요인에 의해 인간의 성장과 발달이 결정된다고 보는 이론이다. 아동발달 이론 중에서 가장 역사가 오래된 이론이며 동시에 유아교육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이론으로 미국의 대표적인 아동심리학자인 게젤에 의해 체계적으로 정립되었다. 성숙주의 이론에 의하면 아동은 연령의 증가에 따라 성장할 수 있는 자질과 능력을 가지고 태어났으므로 그에 도움이 될 만한 건전한 환경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특히 학습환경은 유아가 학습활동을 자유롭게 선택하도록 안내해 주는 우호적인 교사와 잘 준비된 환경이 있어야 한다. 성숙주의 견해에 기초한 유아교육 프로그램은 유아에게 정서적으로 풍부한 환경을 제공함으로써 자기 표현을 충분히 도와준다. 준비도(readiness)의 개념이 이러한 견해의 중심이 된다.
(2) 정신분석 이론
정신분석이론은 19C 후반 프로이드에 의하여 주장된 것으로서 1960년대까지 유아교육 발전에 큰 영향을 가져온 이론중의 하나이다. 정신분석 이론에서 영아는 즉흥적인 만족을 요구하는 본능적인 욕구와 무기력함의 형태로 삶을 시작한다고 보고 있다. 아동발달은 성욕(libido)의 5단계 시리즈로 연결되며 한 단계에서 기본적인 충동이 해소되지 않으면 인성발달에 영구적인 결함을 초래한다고 하였다. 이와 같은 프로이드의 이론이 주로 생물학적 본능, 충동(drive), 부모, 자녀관계, 무의식적 감정에 역점을 두었다면 프로이드 제자인 에릭슨은 인간의 성격발달에서 성적인 측면보다 문화적, 사회적 요소를 강조한 심리·사회적 관계 즉 사회, 역사, 문화 등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이루어지며 특히 자아발달에 강조점을 주고 있다.
(3) 행동주의 이론
행동주의 이론은 1910년경 왓슨의 이론을 기초로 손다이크, 스키너, 반두라 등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이론체계로서 아동의 학습을 외부환경의 자극과 반응의 연합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설명하는 학습이론이다. 행동주의 이론에서는 학습은 전체적·통합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요소적 분석적 방법으로 보려는 입장이며, 학습은 크게 자극에 대한 반응의 관계로 보려는 것이며 나아가서 학습은 학습주체자의 목적이나 심리적 필요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생리적인 충동이나 기계적인 통제에 의해 기인된다고 본다. 뿐만 아니라 아동은 계속적인 반복과 연습 및 모방을 통해 학습자에게 강화나 보상을 주면 보다 잘 학습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행동주의 이론은 1960년대 저소득층의 유아를 위한 유아교육 프로그램 개발 등에서 널리 적용되었다.
(4) 인지발달이론
인지발달이론은 헌트, 블룸, 피아제에 의한 이론으로서 아동의 발달을 유전적 요인과 환경적 요인의 상호작용의 결과로 나타나는 발달의 과정이라고 보았다. 피아제에 의하면 아동은 능동적 존재로서 주변환경과 상호작용을 통해 적응해 가는데 적응의 과정을 동화와 조절의 상호작용이며, 이 두가지 적응과정이 균형을 이룬 상태를 평형이라고 하였다. 그는 인지발달이 인지구조의 계속적인 질적 변화로 일관된 과정이라는 그의 가설을 바탕으로 인지적 성장을 위한 지적발달은 감각 운동기(0∼2세), 전 조작기(2∼6세), 구체적 조작기(6∼11세), 형식적 조작기(11∼15세)등의 네 단계로 구분하고 인지발달을 촉진시키는 주요 요인을 성숙, 사물과의 물리적 경험, 사회적 상호작용, 평형화 등의 4가지로 보았다. 인지발달이론에서는 아동을 독특한 인지구조를 지닌 전인적인 존재로 보고 있으며, 아동의 발달도 예측 가능한 불변적인 순서에 따라 점진적으로 진행하는 과정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3) 사회적 기초
유아교육의 변천과 발전은 시대적, 사회적 변화와 일정한 관련을 맺어 왔다. 다가오는 21세기는 지금보다 훨씬 빠르게 급속도로 사회 각계 각층의 모든 분야에 걸쳐 급속한 변화가 예고된다. 이와 같은 미래 사회상은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 특징으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산업문명의 급속한 변화속도시대
둘째, 정보사회화 시대
셋째, 지역간, 국가간, 인류간 상호의존성 시대
넷째, 이데올로기 종말 시대
다섯째, 풍요와 결핍의 공존시대
이러한 미래의 시대적 변화는 곧바로 가정, 학교, 사회전반에 변화를 자극하고 유아교육의 방향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다. 오늘날 우리의 유아교육의 방향에 지대한 영향을 줄 것으로 기대되는 사회·문화적 요인들을 함께 논의 해 보자.
첫째, 가정기능의 변화
둘째, 여성의 경제활동참여 욕구의 증대
셋째, 세계화, 국제화 시대의 가속화
넷째, 성역할의 고정관념
다섯째, 문화적 전통성 회복
여섯째, 환경교육
일곱째, 통일 준비교육
2. 아동관의 변천
1) 고대사회
고대사회는 부족과 종족의 안전이 무엇보다 중요시되는 사회였다. 아동은 한 인간으로서의 당당한 권리를 가진 인격적인 존재였다기 보다 종족보존을 위한 수단적인 존재였으며 어른들의 성적욕망에 의해 태어난 귀찮은 존재로 여겨졌다. 아동의 이름도 노동이 가능하게 되는 7, 8세 경에 정식으로 주어졌다고 한다.
2) 중세사회
중세에 들어와서도 아동은 군사력과 경제력 확보의 수단으로 간주되었다. 중세 말기에는 아동 보호 사업과 서비스가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아동 보호는 동정적인 감정에 근거를 둔 종교적 자선행위였고 개인의 욕구나 권리를 존중한다는 인격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진 사업이 아니었다.
3) 근세사회
종전에는 아동들이 성인 범죄자나 병자 등과 함께 구빈원에 수용되었는데 17,18세기에 들어오면서 성인 범죄자나 병자들과 분리되어 일반 가정에 위탁되는 제도가 마련되었다. 산업 혁명과 함께 아동들의 노동력이 값싼 임금으로 요구되기도 하였다. 근세의 아동관은 18세기에 루소에 의해 변화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하였다. 스위스에서 출생한 루소는 자연주의 교육사상가로서 아동 중심 교육 사상을 전개하였다. 루소는 아동에게도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는 기회를 주어야 하며 개인적인 자유와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에 의하면 아동은 성인의 축소판이 아니었다.
4) 현대 사회
20세기는 '아동기 과학'의 시대라고 불리우며, 이 말은 20세기에 들어와 비로소 아동의 본성에 관한 과학적인 이해가 시도되었으며 아동에 관한 관심과 사업이 급격하게 늘어나고 있는 현상을 가르킨다. 피아제, 프로이드, 에릭슨 등과 같은 발달 심리학자들의 체계적인 연구 결과는 한 인간의 성장· 발달에 있어 아동기의 중요성을 크게 부각시켰으며 아동을 과학적으로 이해하는 데 이론적인 발판을 제공해 주었다. 스웨덴의 아동 학자 엘렌케이는 '20세기는 아동의 세기'라고 말하고 모든 인간이 생존, 발달할 수 있는 권리가 있듯이 아동들도 스스로를 최대한으로 추구해 나갈 권리가 있다고 보았다. 그녀가 주장한 아동의 여섯가지 근본원리는 다음과 같다.
첫째, 건강하게 출생할 권리
둘째, 건전하게 육성할 권리
셋째, 정상적인 가정생활의 혜택을 받을 권리
넷째, 교육을 받을 권리
다섯째, 정신적, 도덕적 훈련을 받을 권리
여섯째, 레크리에이션을 즐길 권리
3. 사상적 배경
1) 코메니우스
(1) 생애와 저서
코메니우스는 1592년에 현재의 체코슬로바키아인 모라비아(Moravia)에서 태어났다. 교회와 성경에 대한 종교적 믿음속에서 성장했으나 어린 시절에 부모를 여의고 잘 보호받지 못했기 때문에 라틴어를 배울 기회를 갖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나이도 많고 또한 지도하는 교사 역시 잘 지도해 주지 못했기 때문에 그는 다른 길을 찾아서 18세에 헤르본 대학에 가게 되었고 그 후 하이델베르크 대학에 가게 되었다. 성직자가 되기 전 몇 해 동안 교사생활을 했으며 전쟁 후 폴란드로 망명, 대학예비학교에서 가르치는 동안 그의 교육철학은 성숙하게 되었고 중요한 책들을 저술하게 된다. 1631년 Fanua Liguarum(The Gate of Languages Unlocked)을 출판하게 되고 이 책에서 라틴어의 단어들은 그것이 사물이나 개념들과 연상되지 않는 한 학생들이 활용할 수 점을 강조함으로써 라틴어 교수법의 새로운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또한 언어는 과학, 철학, 정치학 등을 가르치기 위한 도구로서 지도되어야 함도 지적하고 있다. 1632년 “대교수학”을 완성하게 되는데 모든 어린이들의 교육받을 권리, 교육원리, 교수법 등에 대한 포괄적이고 획기적인 업적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러나 이 중요한 저서도 그 시대 200여 년 동안 사장되어 있었다. 1840년대에 와서야 코메니우스의 사상과 저서가 재발견되게 되었다. 코메니우스의 생애는 비참과 불운의 연속이었건만 또 각지로 망명생활을 하는 속에서도 그는 교육자, 교육개혁가, 또는 교육저술가로서의 활동을 멈추지 아니하였다. 그리하여 근대교육의 건설을 위한 선구적인 교육개혁가로서 위대한 업적을 남긴 그는 다시 고국의 땅을 밟지 못한채 1670년 11월 15일 암스텔담의 객사에서 78세의 고령으로 비운의 일생을 마쳤다. 코메니우스는 많은 저서를 남기고 있으나 교육적인 것으로는 다음의 4종이 있다.
첫째, 라틴어 교과서이다. 4부로 성립되고 있다.
① 어학입문(1631)
② 어학전개(1633)
③ 어학비결(1648)
④ 어학보고(1648)
둘째, 언어교수론인 “어학최신교육법”(1648)이다.
셋째, 세계도회(1658) - 이것은 세계 최초의 그림이 든 교과서로서 직관교수의 구체화로서 교육사상에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
넷째, 일명 “모든 사람에게 모든 사물을 가르쳐야 하는 교술”(1657년)이다. 이것은 교육에 관하여 조직적으로 논술한 세계최초의 교육학서로 유명할 뿐만 아니라 그의 교육사상이 가장 체계있게 담겨져 있는 책이다.
(2) 교육사상
17C의 일반적 아동교육방법인 엄격하고 추상적인 주입식 교육방법을 비난하고 어린이의 자연성 개발에 적합한 인간적, 실물중심의 교육방법을 강조한 코메니우스는 사악하려하는 인간본성을 통제하기 위한 권위주의적, 체벌적 훈육방식을 지양하고 아동의 자발적, 자율적 활동이 허용되는 개방적인 훈육방식의 가치를 강조하였다. 또한 교육은 가능한 한 일찍부터 시작해야하며, 유아가 학습에 필요한 기능이 갖추어져 있기 전에 강요해서는 안되고 인간본성의 자연적 순서에 따라 진행되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코메니우스는 교육의 목적을 지식을 닦고 도덕심을 쌓아, 신앙심을 길러, 천국의 생활의 준비를 하는 데 있었다. 따라서 그 외의 모든 것은 다만 인간의 외면적인 수단에 지나지 않은 것이라 하였다. 코메니우스는 또한 교육방법론의 가장 기본적인 원칙은 “자연의 질서에 따라서”즉,“합자연생의 원리”였다. 코메니우스의 교육방법론을 이른바 객관적 자연주의라고 부르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와 같이 코메니우스의 교수방법론은 경험주의에 입각한 심리학적인 원칙을 기본으로 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코메니우스의 교수방법상의 둘째 원칙은 “직관주의”이다. 직관주의란 교육의 실제에 있어서 실물에 의한, 또한 직접적인 사물을 통한 교육을 말한다. 따라서 직관주의는 모든 경험적 지식을 중시하는 사상이다. 코메니우스의 교육론을 “사물교수론”이라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3) 학교제도
연령과 과제에 따라서 교육의 단계를 크게 네 가지 형태로 구분하고 있다. 즉, 유아기, 아동기, 소년기, 청년기로 구분하고 각 단계마다 6년간의 다른 구체적인 학교의 특성을 구안하고 있다.
① 유아기: 어머니의 무릎에서(모친학교)
② 아동기: 모국어 학교
③ 소년기: 라틴어 학교 또는 대학 예비학교
④ 청년기: 대학교와 여행
모친학교와 모국어학교는 남·여 어린이 모두를 위한 것이며, 라틴어학교는 좀더 집중적인 고등교육을, 대학은 교사와 미래의 지도자를 훈련하는 역할을 담당하도록 했다. 모친학교는 각 가정마다, 모국어 학교는 각 마을마다, 대학 예비학교는 도시 단위에, 대학은 각 지역이나 국가 단위에 설치하도록 제안하고 있다. 현재의 공립학교제도와 흡사하나 6세 이하의 어린이를 위한 교육은 가정에서 어머니가 담당하고 있는 점은 차이를 보이고 있다.
(4) 모친학교
모친학교의 목적과 교육방법에 대해서 코메니우스는 이 시기의 교육은 가정에서 이루어져야 하며 따라서 자연히 어머니가 교육을 담당하게 된다. 여기서 강조되고 있는 것은 누가 어디에서 교육하든 어린이들에 대한 올바른 교육이 필요하고 중요하다는 점이다. 여러 가지 자연스러운 방법을 통해 명확한 개념을 습득하도록 안내하고 분명하게 말하는 것, 사물의 명칭을 바르게 말하는 것 등이 강조되고 있다. 도덕적인 훈련에 대해서는 현대에서와 같은 자유로움을 전적으로 지지하지는 않았지만 그 시대의 엄격함과 억압적인 방법을 제안하지는 않고 있다.
(5) 유아학교
“대교수학”에는 자세히 언급되지 않았지만 후에 “유아학교”라는 책을 쓰게 된다. 어린이는 하느님께서 주신 가장 귀한 존재임을 강조하면서 그들의 안전과 건강이 보장되어야 하며 그들의 지적 능력, 언어, 도덕성 등이 잘 교육되어야 함을 설명하고 있다. 17세기의 상황은 어린이들은 원죄에 묶여 있다는 관념과 함께 사회적으로는 공장과 일터에서 심하게 다루어져 왔기 때문에 코메니우스의 이러한 생각은 획기적이 아닐 수 없었다. 또한 교육방법적인 측면에서도 프뢰벨에서처럼 놀이에 대해 구체화하고 있지는 않지만 어린이들의 모방현상과 놀이활동을 충분히 인지하고 그러한 방법을 활용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책에서도 6세까지는 어머니가 가장 최고의 교사임을 강조하면서 어머니들에게 구체적인 지도에 대한 안내와 충고를 주고 있다.
(6) 모국어 학교
6세에서 12세까지의 어린이들을 위한 교육기관으로서 코메니우스는 모국어를 배우기 이전에 라틴어나 다른 외국어를 가르치는 것은 비합리적이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모든 어린이들은 모국어학교에서 교육받아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고등교육을 받기 원하는 남자 어린이들도 직접 라틴어학교에 가기 전에 이 학교에서 교육되어야 함을 설득하고 있다.
(7) 세계그림지도
1630-1640년에 걸쳐 리사에 망명했던 기간에 코메니우스의 중요한 저술과 활동이 이루어졌음을 볼 수 있다. 30년 전쟁이 끝날 무렵까지도 그의 추방생활은 계속되었으나 “대교수학”을 통해 명성을 얻게 되었으며, 1641년 영국을 방문하여 뚜렷한 성과를 가져오지는 못했으나 큰 영향을 준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많은 다른 저서와 활동 중에서 1658년 출판된 “세계그림지도”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책은 아주 간단한 설명과 그림으로 이루어진 책으로서 학교교육에서 활용되는 책에 그림을 활용한 최초의 시도였다. 언어 또는 단어나 개념 이전에 그림으로 안내하는 기본적인 방법상의 원리를 실제적이고 체계적으로 적용한 것이었다. 아마도 시청각교육의 시초라고 말할 수 있다. 코메니우스 이후 18세기 초 어린이들에 대한 부당한 대우와 교육상황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개선을 위해 노력한 사람들로서 수잔나, 웨슬리, 와츠 등을 들 수 있다. 시대적으로 점차 <자연으로 돌아가자>는 사상이 일기 시작하고 있었다.
2) 로크
(1) 생애와 저서
영국의 철학자이며 정치사상가인 로크는 어려서 어머니를 잃고 법률가인 아버지 밑에서 자랐다. 14세에는 웨스터민스터 학교에 갔으며, 20세에 옥스포드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이어서 자연과학 및 의학을 공부하였다. 졸업 후에도 다년간 계속 모교에서 강사로 머물면서 연구에 몰두하였다. 한때는 외교관의 비서로 베르린에 머물면서 정치 경제학을 연구하기도 하였고 귀국 후에는 위그당의 당수 사프트베리 백작과 알게 되어 사프트베리가의 의사로서, 친우로서, 조언자로서 또는 가정교사로서 생활을 하였다. 로크의 운명은 정치가의 생애와 연결되어, 사프트베리와 두 차례나 망명한 바 있으며, 이 시기에 많은 논문을 발표하였고 끝내는 독신으로 일생을 마쳤다. 로크는 정치, 경제, 교육, 종교 등의 여러 분야에 걸쳐 많은 논문을 발표하였다. 로크는 베이컨, 데카르트, 홉즈 등의 저서를 읽고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그의 저서로는 “인간오성론”,“교육사상”,“정부론 2편”,“기독교의 합리성”등이 있다. 1693년 “교육사"라는 유명한 저술을 남겼다. 그는 아기가 태어날 때 백지(tabula rasa)로 태어난다고 주장했던 사람으로 이 견해는 지금까지도 그 맥을 유지하고 있다. 백지로 태어나므로 훈육과 환경에 따라 크게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로크는 1696년에 “가난한 아동을 위한 노동학교 계획서를 제안하기도 했는데, 이것은 저소득층 가정의 유아를 위한 탁아보호교육의 필요성을 주장한 것이다. 로크는 영국 경험론의 시조이며 경험주의 철학자, 정치학자, 경제학자, 의사이면서 또한 실학주의 교육 사상가이다.
(2) 교육사상
로크의 교육사상에는 여러 사상적 요소가 흐르고 있어서 확연히 어느 한 사상을 대표한다고 단정하기 어렵다. 그것은 때로는 실학주의 사상 체계를 또는 형식적 도야주의를 혹은 합리주의적 제요소를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로크의 교육사상의 주류는 실학주의의 기저에 입각하면서 그가 취한 형식도야설인 단련주의 입장은 그의 사상을 일관하는 근본사상이며 또한 그는 이 사상을 몸소 실천하였던 것이다. 또한 로크는 인간의 본성은 출생시에 이미 결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백지상태와 같으며, 유기체에 환경을 자극하여 만들어진 산물로써 인간의 본성이 형성된다고 보았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백지와 같으나 외부세계로부터 자극들을 아주 예민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종이라는 백지설(tabula rasa)을 주장하여 교육만능설을 주장하였다. 즉, 인간의 지식획득은 어린이의 외부세계 즉 물리적 사회적 환경으로부터 오는 것이지 선천적인 정신이나 영혼으로부터 유래되지 않는다고 보았다.
(3) 교육목적
로크는 교육의 목적을 품성도야에 두고, 유용한 신사를 양성함에 두었으며 신사가 구비해야 할 기본적인 요소는 그의 교육에 대한 고찰의 순서에 따라 신체적, 도덕적, 지적인 여러면을 갖추는 것이었다. 그리고 교육의 형식을 체육, 덕육, 지육의 셋으로 나누었는데 이것은 바로 그의 교육사상의 주 내용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첫째, 체육론에서 그는 인간의 행복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체육이 필요하다고 하여 체육을 교육에 있어서 제일 중시했다. 이는 자신이 건강치 못했던 체험에서 직접 체득했다고 한다.
둘째, 덕육론에서는 덕육의 목적은 자신의 욕망을 억제하고 이성에 따라서 행동하는데 있다고 했다. 자신의 의지를 타인의 이성에 복종시키는 습관이 없는 사람은 성인이 되어서도 자신의 이성에 복종할 수 없게 된다고 하였다.
셋째, 지육론으로 주지주의를 반대하고 서적의 학습을 거부하였다. 왜냐하면 학식이 풍부한 사람이라도 덕이 없으면 사회적으로 존경을 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에 지육에 필요한 것은 신사의 양육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와같이 體, 德, 知의 조화된 전인교육을 역설하였다.
그런데 우리가 로크의 교육사상에서 유의해야 할 바는 첫째로 로크는 일반서민의 교육에 관한 서술이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신사교육에 관한 것만으로 되었다는 것으로 명백하다. 둘째로 로크의 교육방법은 개인적 교수체계만을 예정했을 뿐 많은 학생을 상대로 한 교수가 아니라는 점이다.
(4) 교육내용
로크는 다른 도야주의자의 주장과 같이 협소한 교육과정에 만족하지 않았다. 즉 그는 고전교육에 있어서는 말하고 쓰는 것보다 읽는 능력을 발달시키는 데 관심을 두었고 모국어의 말하고 쓰는 것을 중시하였다. 이러한 교과목 외에 지리, 역사, 도화, 무용, 미술, 공예 등 광범위한 교육과정을 제시하여 영국신사를 양성하는데 필요한 학식을 주려고 한 점을 보면 실학주의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마음을 도야하고 발달시키기 위해서는 연습과 단련을 중시한 점으로 보면 본질적으로도 도야주의자라고 말할 수 있다. 그가 주장하는 형식도야설은 교육의 목적이나 내용보다도 교육방법에 있어서 특히 강조하였는데 그는 습관형성이라는 원칙을 가지고 모든 교육적 작용을 이루었다.
(5) 교육방법
로크의 교육방법은 학생이 바르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습관을 만들어 주기 위한 것이다. 그는 학습과정을 감각, 기억, 추리의 3단계로 생각하고 이 세가지 능력을 오로지 훈련으로 발달시킬 수 있다고 믿었다. 또한 그는 학습지도에 있어서는 될 수 있는 한 학생이 유쾌하게 학습할 수 있게 해야하며 엄격한 훈련에는 반대하였다. 상벌을 겸용하되 상은 공공연히 이를 표창하고 벌은 일반인에게 나타내지 않도록 하며 더욱이 체벌은 부득이한 경우에 한해야 한다고 하였다. 교육사적인 면에서 볼 때 학습에서 경험의 역할을 강조한 로크의 사상은 교육에서 감각적 실재론을 정당화한 최초의 사상가라 할 수 있다. 지식의 획득은 외부세계의 자극들을 지각하고 받아들이는 것으로부터 이루어진다고 보았으며 교육에서 아동의 모든 감각들을 개발시키는 교육방법을 제시하였다. 이에는 읽기 활동뿐만 아니라 보고, 맛보고, 냄새맡고, 만져보고, 듣는 등의 오관적 활동들이 해당된다. 자연히 로크의 사상은 여러가지 인간발달 영역중에서 오관을 소지한 신체적 발달에 역점을 두게 되었다.
(6) 교육기관
로크의 교육기관으로는 사회적 실학주의자들이 같이 가정교사에 의하여 자녀를 교육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고 주장하였던 바 이는 원칙적으로 귀족층의 자녀를 전제한 것이었다. 다만 일반서민의 교육에 대해서는 사회 정책적 입장에서 공장이나 도제제도에 의하여 단련함으로써 기술을 습득시킬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고 일단 귀족 계층과 분리해서 교육을 논하였다.
3) 루소
(1) 생애와 저서
18세기 프랑스의 철학가, 사상가, 작가인 루소는 스위스의 제네바에서 가난한 시계공의 아들로 태어났다. 생후 열흘만에 어머니와 사별하고 10세때 아버지마저 고향인 제네바를 떠나게 되어 루소는 어린시절을 속박과 천대속에서 자랐으며, 16세 때 드디어 제네바를 떠나 여러 곳을 방랑생활로 떠돌아다니던 중에 한 신부의 소개로 바랑부인의 집에 기식하게 되었다. 그 후 그는 다시 방랑생활을 하다가 21세의 청년이 되어 다시 바랑부인을 만나게 되었다. 1742년 그녀의 곁을 떠날 때까지 약 10년 동안, 루소는 많은 지식을 독학하였다. 1750년 38세 때에 디종 아카데미에서 모집한 현상논문에 응모, 그의 “학문예술론”이 당선되어 처음으로 그의 명성이 높아졌다. 1754년에 디종 아카데미에서 모집한 현상논문에 “인간불평등기원론”을 응모했으나 논술이 너무 과격하여 낙선되었다. 그러나 그 동안 루소의 사상은 더욱 체계화되었다. 1761년에 “新엘로이스”에서 그는 스스로의 꿈, 사상 그리고 자기애에 간직하고 싶은 여성의 초상과 사랑했던 풍경 등 모든 문제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1762년의 “사회계약론”은 오늘날 민주정치의 선구가 되어 프랑스혁명 및 미국독립의 성전이 되었다. 나폴레옹이 “만약 루소가 없었더라면 프랑스 혁명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한 말은 이것을 충분히 뒷받침 해주고 있다. 루소의 정치사상을 담은 사회계약론과 동년에 발간된 “에밀”(Emile)은 그의 교육사상을 집성한 것으로서 인간교육의 근본적 혁신을 제창한 교육의 성전이었다. 에밀은 교육학사상 불구의 명작이며 그의 교육사상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그 책의 제 4장에서 기성종교를 비난하고 자연종교를 주장하였기 때문에, 파리 고등법원은 에밀의 소각과 루소의 체포를 명령하였다. 루소는 박해를 피해 여러 곳을 전전하면서 독일과 영국에도 간 바 있었다. 1764-1770년 사이의 방랑생활 속에서 그는 “고백록”이라는 자서전을 썼으나, 그의 사후에 출판되었다. 이 책은 근대 낭만주의 문학의 도화선이 되었다. 그는 만년에 마음의 평온을 찾고 자기만의 세계에 조용히 잠기는 생활을 하다가 1778년 7월에 운명했다. 프랑스 혁명 11년 전이었다.
(2) 교육사상
루소의 근본사상은 자연주의, 합리주의, 자유주의에 입각하고 있다. 그의 전사상의 근저는 “자연은 선하고 사회는 악이다.”라는 근본명제에서 출발한다.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루소의 이 외침은 자연주의 사상을 잘 표현한 말이다. 그래서 " 자연은 선하고 사회는 악하다"라는 명제에서 그의 교육사상을 피력하고 있다. "자연스럽고 자유롭게 출생한 인간이 지금은 도처에서 쇠사슬에 매여 있다. 자기 자신이 다른 사람의 주인이라고 믿고 있으나 그 다른 사람의 노예가 자기 자신이다" 라고 사회계약론 서두에 갈파하고 있다. 자연은 인간을 착하고 자유롭게 그리고 행복하게 창조했으나 사회는 그것을 악하게 부자유스럽게 비참하게 만들고 있다. 그러므로 인간은 자연으로 돌아가서 자연의 순리를 따라야 한다고 그는 자연주의 교육가상을 표명하면서, "인간은 선천적으로 부여된 자연적 성정을 자유롭게 발전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인간과 자연의 성능은 선량한 것이기 때문에 어떠한 인공적 조작을 가할 필요없이 그대로의 선을 신장시키는 것을 교육의 임무라고 하였다. 그의 교육론을 피력한 에밀의 근본사상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신의 손으로부터 나왔을 때는 모두 착했으나 사람의 손으로 옮겨지면서 악하게 된다고 하여 인공적으로 문화를 부여하는 환경과 전통적 교육에 의하여 인간은 퇴락하는 것이므로 오직 자연성의 선, 미를 그대로 발전시키는 교육을 주장하고 있다.
둘째, 자유로운 계발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자유를 환언하면 자연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비인위적으로 피교육자의 내재적 생명의 자연 발현이 촉진되도록 방임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사상은 자연이 선미를 내재하고 있으며 스스로 계발되는 것이므로 자유스러운 계발에 의한 것이 보다 교육적이라는 이유 때문이다.
셋째, 개인으로서 발전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이러한 그의 사상은 사회를 저주한 점과 계약적 사회관(개인본위)에 입각한 교육 이상의 특색을 나타낸 것으로서 "인간교육은 순수하게 개개인의 자신을 목적으로 할 것이지 외적인 목적에 이끌릴 수 없는 것이다."라고 강조 했다.
넷째, 일반 도치의 이념이다. 여기에서 먼저 사회인과 대립되는 자연인, 자유인, 개인의 도야가 강조되고 있다. 사회인이란 특정한 전통적 사회에 의하여 제약된 사람으로서 이것은 사회와의 관계에 있어서 상대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는 사람이다. 여기에 대해 자연인이란 자신을 위하여 가치를 지닌 사람, 즉 순수인으로서 자연상태의 평등인이다. 이 순수하고 평등한 자연인은 관리도, 군인도, 실업가도 아닌 사람(순수인)이다. 그는 직업인 이전에 어린이가 먼저 인간적 상태에까지 충분한 인간 도야가 이루어지도록 교육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아동이 직업을 선택하기에 앞서 자연은 그 아동을 인간으로서 생활할 것을 순리로 하고 있다. 인간 도야가 이룩된 이후에는 군인이 되든지 목사가 되든지 조금도 상관없는 일이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직업 이전에 인간으로서 인간 교육을 강조한 이유는 일정한 직업 교육은 타직업에 부적응을 뜻하는 것으로서 직종의 변경이 있을 때 그 개인은 불행에 빠진다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일반적 인간 도야의 기초가 쌓인 사람은 필요한 경우에 대처할 수 있는 능력과 주어진 운명을 감수할 수 있는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3) 교육방법
루소의 자연적 인간주의의 교육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그의 교육방법도 자연적인 방법에 의존하고 있음은 당연한 귀결이다.
첫째, 아동 본위의 주관적 자연주의에 입각하고 있다. 즉, 아동 본위라 함은 교육의 기초를 아동 주관적 목적 개념을 주축으로 교육해야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피교육자인 아동은 자기 자신이 바람직하게 성장하려는 목적 가치를 내재하고 있으며, 성장의 충동을 가지고 선을 실현하려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이 성장의 충동을 신뢰하고 그를 바탕으로 하여 교수할 것이지 목사의 주관적 가치관이나 사회관을 강요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둘째, 자연전개의 이법을 적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성인들의 명령이나 지시에 순종되어서는 안되며, 아동의 부당한 행위에 대해서는 인위적인 제한을 피하고 사물에 대한 제한을 체험시키는 것이 가장 유효하다고 하였다. 그리고 부정한 행위에 따른 보상은 자연의 결과가 나쁘게 나타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적극적인 간섭과 주입을 피하고 최소한의 조력을 뜻한다. 예를 들면 창문을 찢었을 때 아동이 추위를 통감하도록 하는 것과 학습 환경의 정비, 통행길에 장해물을 제거하는 등 소극적인 조력이 오히려 아동의 적극적 행동을 기른다는 사상인 것이다.
셋째, 실학적 단련주의 피교육을 자연적 자유발전에 맡긴다는 것은 실사물을 통한 경교육을 의미하는 것이다 아동들의 자율학습은 실재장소에서 실존 사물을 대상으로 자연히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단련적 경교육이 이루어짐은 당연한 것이다(독서로부터 해방시키는 교육).
넷째, 형식적 도치주의를 지나치게 강조하여, 도덕 교육과 직업 교육을 경시하고 지적 교육을 배척한 점 등을 들 수 있다. 지적 교육으로서는 로빈슨 크루소 이외의 책은 필요없다는 주장으로서 그의 사상을 충분히 알 수가 있다. 이로써 그의 교육 방법은 아동본위 자연적 자유주의 형식주의를 취하고 있음이 명료하다
(4) 사회계약론
인간은 본래 자유로운 존재인데, 불가피하게 얼마간의 개인적 자유를 유보하면서 상호합의에 의해 안전하고 바람직한 정부를 형성함으로써 사회적 계약 속에 있게 된다. 따라서 대중들 자신이야말로 진정한 주권을 가진 사람들이며 정부는 단지 이들 대중의 전체의지에 의해서만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사람들에게 널리 퍼져갔고, 절대군주 정부와 왕권 신성주의를 강타하고 민주적인 정부의 형성운동을 일으키게 되었다. 미국의 경우 1776년 제퍼슨이 쓴 미국 독립선언서는 거의 루소에 의해 쓰여진 것과 맥락을 같이하고 있으며 프랑스의 경우 Rousseau의 사상이 직접 프랑스 혁명을 폭발하지는 않았으나 광범위하게 전파되었음을 볼 수 있다.
(5) 에밀(Emil)
“에밀”은 아동의 자발적인 성장을 강조한 책이다. 아동은 어린 시절에 나쁜 영향을 주는 사회적 영향으로부터 해방되어야 하고 교육은 태어나면서 시작해서 25세까지 계속되어야 한다고 그는 주장하였다. 자유와 개성이 학습의 조건이라고 강조하고 공교육을 제창하였다. 사회, 정치영역에서 크게 영향을 미쳤던 그의 기본입장은 교육영역에서도 에밀을 통해 구체화되고 있다. 역시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기본전제로부터 시작하고 있다. 모든 것은 선한 상태였는데 인간사회에 접하면서 변질되고 타락하게 된다고 전제하고 있다. 그의 온 정신은 인간사회의 조작적 측면에 철저히 대항하고 있었다.
(6) 모두를 위한 교육
루소는 기본적인 인간성에 대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으며 교육 역시 이러한 능력의 자연적 발달을 그 목적으로 해야 한다고 믿고 있었다. “에밀”의 가치는 교육이 부유층이나 상류계층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그 밖의 모든 사람들을 위한 것, 모두에 관심을 갖는 과정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이러한 생각은 사회계약론이 정치적 개혁에 크게 작용했듯이 교육에서는 페스탈로치를 통해 더욱 확산되었다.
(7) 어린이에 대한 연구와 이해
루소는 그 당시 교육자들이 어린이들에 대해 잘 알고 있지 못함을 지적하고 어린이들을 잘 관찰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어린이들을 성인이 되기 전에 어린이 그대로이어야 하는 것이 자연이며 이것을 거슬러 더 빨리 열매를 얻고자 하면 그 결과는 잘 성숙하지 못한 것이 되기 쉽고 또한 쓸모없는 것이 된다. 또한 지식을 암기하도록 하기 전에 어떻게 배울 수 있는가의 학습하는 길을 지도해야 한다. 지식의 양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실수를 통해 비울 수 있도록 해 주어야 한다. 지적인 내용, 도덕적인 측면 모두에 적용하고 있다. 직접적이고 순간적인 지시를 피하도록 한다. 어린이들의 잘못된 행동이 허락되지 않는다면 어떻게 그들이 옳고 그른 것을 가려내고 선택하는 것을 배울 수 있는가라고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루소는 에밀이라는 가상적인 학생의 교육과 발달과정을 유아기, 소년기(5-12세), 청소년기(12-15세), 청년기(15-20세)로 구분하여 설명하고 있다. 이와 함께 “에밀”의 마지막 장에서는 에밀의 바람직한 결혼상대자로 결정된 소피의 교육을 통해 결혼과 여성의 교육에 대해 기술하고 있다.
(8) 에밀에 나타난 루소의 교육관
(가) 유아기(1세-5세)
우리는 자율적인 자연인을 키울 것인가, 사회구조에 얽매인 시민을 키울 것인가 결정해야 한다고 지적하면서 아기가 태어난 후 그 본래의 특성을 잘 보유하고 사회악에 물들지 않게 하기 위해 어떻게 환경을 통제해야 하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교육은 자연으로부터, 인간으로부터, 사물로부터 우리에게 주어지게 되는데 생활 속에서 인간 본유의 내적인 특성을 발견하고 자율적인 자연인으로 키우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교육의 목적이라고 본다. 또한 신체적 발육에 중점을 두어 아버지는 자연의 교사, 어머니는 자연의 보모로서 건강에 유념하도록 해야한다. 의복과 침식 기거에는 단련을 체험시키고 가벼운 병에는 약을 쓰지 말것과 완구에는 자연물과 직결시켜 자연을 대상으로 완구를 삼아 양호에 주력하도록 하였다.
(나) 아동기(6세-12세)
감각기관의 훈련에 주력하여 실물의 양을 재고, 수를 계측하고 무게를 비교할 수 있도록 주의, 기억, 사고의 건전한 바탕이 될 수 있는 오관의 건전한 발달에 힘썼다. 건전한 육체가 건전한 소화기에 의해서 기대되는 것과 같은 것이다. 루소는 "너의 아이가 12세가 되었을 때 아직 바른 손과 왼손을 구별할 줄 몰라도 건전한 감각만 가지고 있으면 멀지않아 이성의 꽃이 필 것이다"라고 하여 독서교육의 암송은 무효할 뿐만 아니라 타인의 사상을 완구화하는 주문에 불과한 것이라 하였다.
(다) 소년기(13세-15세)
모든 어린이는 서로 다르기 때문에 교육은 이에 따라 각기 다르게 주어야 한다. 어린이들의 흥미와 욕구에 연관된 다양한 실제적인 활동에서의 직접적인 경험을 통해서 배울 수 있게 된다. 유아가 말하기 시작하고 걷기 시작하게 되면 많은 시도를 하게 된다. 울게 두고 잘못을 허용한다. 다치지 않도록 철저히 보호하는 것은 결국 유아가 아무것도 배우지 못하게 하는 것과 같을 것이다. 고통이나 실패는 그가 배워야 할 첫 번째 일일 것이며 지나친 위험한 상황에 놓여지지 않는 한 스스로 다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어린이는 어린이로서 존중할 것, 그의 욕구를 만족시킬 것, 지나친 잔인함과 지나친 방임 모두를 피할 것을 시사하고 있다. 이와 함께 교육의 실제적 방법으로서 복종이나 의무보다는 필요성이 강조될 것, 직접적인 도덕적 지시나 교훈, 말을 통한 설명을 대하는 소극적인 방법, 신체의 단련, 감각훈련 등이 언급되고 있다. 또한 이시기는 지적 도치기로서 이성의 눈이 뜨게 되고 호기심을 갖게 되며 사물에 대한 판단과 비판력이 생기게 되므로 지적 교수가 가능하다. 이러한 지식의 도야는 스스로 사물에 접해서 얻어져야 하고 발견해야 하고 스스로의 판단력을 배양해야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교육의 내용은 "생활에 유용한 경우에 뿐"이라는 공리주의를 택하였고, 독서로서는 오직 로빈슨 크루소만을 교재로 하였다. 이 교재 로빈슨 크루소는 자기의 힘으로 대자연에 도전하고 개척하여 필요한 생활의 지식을 획득하는 과정이 묘사되었기 때문이다. 직업인보다 자기의 능력으로 자기생활을 유지 개척하는 인간이 될 것을 바라고 그는 "에밀은 농부와 같이 일하고 철인과 같이 생각하는" 인간이 되어야 한다고 했다.
(라) 청년기(16세-20세)
타애적 감정의 양수과 종교도덕적 도치를 주로 했다. 도덕의 기초를 순지난 감정에 두고 종교는 순수한 도덕성에 의한 양심에 의해 신앙에 나갈 것을 강조하여 종교계의 배척을 받았다.
(마) 여자교육
소피는 에밀의 아내가 될 여자이다. 루소는 여자들에 있어서는 그의 근본 사상에서 예외로 취급되고 있다. 마치 애완용 인형같이 생각하는 일면을 볼 수 있다. 즉, 남자를 즐겁게 해주는 일이 여자의 천직으로 여기고 순종과 겸양의 미덕을 기르고 가사를 알뜰히 정리하는 것을 여자교육의 이상으로 삼았다.
4) 페스탈로치
(1) 생애와 저서
페스탈로치는 1746년 스위스의 취리히에서 태어났다. 5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가족에 헌신하는 어머니 슬하에서 자라게 되는데 이러한 격리된 가정환경이 페스탈로치를 일면 어색하고 수줍은 성격으로 만들었다고 본다. 8세가 되어 학교에 입학하는데 교사와 친구들과 잘 적응하지 못하여 열등한 학생으로 여겨졌다. 페스탈로치는 농촌생활을 좋아하게 되었고 또한 가난한 사람들의 비참한 생활에 대해 동정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성직자가 되기로 결심하고 15세에 취리히 대학에 가게 되며 신학을 공부하였지만 마을의 성직자가 되지는 않았다. 루소의 저서를 통해 개인적 자유의 이상, 순수한 생활, 광범위한 인본주의의 영향을 강하게 받게 되면서 신학을 포기하고 법률을 공부하여 실제적인 사회개혁에 큰 관심을 갖게 된다. 그의 이러한 혁신적 관점은 좌절되고 정치적 활동에 대한 희망을 잃게 되었다. 그는 사람들을 도울 수 있는 가장 최선의 길을 교육이라고 믿게 되었다. 1771년 페스탈로치는 새로운 집으로 옮겨 정착하게 되는데 이곳을 노이호프라고 불렀다. 1774년 이 집을 가난한 어린이들을 위한 집으로 제공하게 된다. 사회발전을 보장하는 길은 어린이 교육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그는 어린이들에게 일하는 법을 가르치고, 최소한 바르고 정확하게 말하는 법을 가르쳤다. 이 노이호프의 실험은 재정난으로 6년 후 문을 닫게 되지만 페스탈로치가 벌였던 노이호프의 교육과 활동은 교육사상 가장 큰 계기로 기록될 수 있다. 노이호프 빈민학교의 좌절과 재정난 속에서도 페스탈로치는 저술에 몰두하여 “은둔자의 저녁시간” “린할트와 겔트루트”등을 쓰게 된다. 이외에도 “겔트루트는 어떻게 그 자녀를 가르치는가” “유아교육 서한문”등이 있다. 1798년 슈탄스에 고아를 위한 학교, 1799년 부르크도르프에서의 교사생활, 1804년 이후 위베르동에 실험학교의 설립 등을 통해 빈민층의 어린이들을 위한 교육에 헌신하였다. 위베르동은 그 당시 국제적으로 교육혁신의 중심지가 되었다. 1799년 헤르바르트가 방문하게 되고, 프뢰벨도 페스탈로치의 학교를 방문하게 된다.
(2) 교육사상
페스탈로치는 교육사상에 있어서 일면 루소의 자연주의, 직관주의영향을 받으면서도 루소에게서 볼 수 있는 합리주의적인 경향은 볼 수 없고 오히려 종교적 심정의 도야, 모성애에 의한 유아의 교육을 중시하고 신인문주의 주정적인 면을 잘 나타내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는 단순한 교육사상가로서만 그치지 않고 교육의 실천을 통하여 스스로의 교육이론을 구체화했다는 점에서 루소와 판이하다.
(3) 교육의 목적
페스탈로치의 교육의 목적은 창조주에 대해서는 신이 주신 인간성의 여러 능력을 완성시켜서 양심적 행동과 봉사를 할 수 있게 하는 일이며, 사회에 대해서는 사회의 유용한 일원으로서 자주독립의 정신을 주는 일 그리고 개인에 대해서는 교육은 행복을 주는 일이었다. 이 교육은 아직 이성이 잠들고 있는 어릴 때부터 어머니의 모성애와 어린이의 사랑과 신뢰에 의하여 심정적인 습관교육으로서 행해진다. 심신이 함께 건전한 상태로 키우는 교육은 유, 소년기의 습관에서 달성되는 것이지만, 이것은 빠른 시기에 행해야 한다.
(4) 교육의 기본이념
페스탈로치의 기본교육이념은 민족과 민중의 발견으로부터 출발, 국민교육사상을 정립하고 인간의 영혼, 사랑, 신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교육목적은 인간에게 필요한 지, 덕, 체를 조화시켜 인간성의 여러 능력을 인간의 지혜에까지 향상시키기 위하여 동물적 상태에서 사회적 상태로, 나아가 도덕적 상태로까지 육성하는 것이다.
(가) 자연관: 자연은 인간성을 의미하며 감성적 측면이 강하고 인간자연이면서도 감각적 자연이다.
(나) 인간관: 인간은 선천적으로 본성, 본능, 소질을 가지고 있으며 이는 인간정신의 근본적인 정신력(지), 심정럭(도덕), 감각력(기술)으로 구분되어 이들의 조화로운 발전을 통해 전인교육을 달성하려는 것이다.
(다) 종교관: 신을 인간중심 즉 휴머니즘 입장에서 파악하고 도덕적 이상의 최정점을 목표로 하여 신앙이 인간교육의 근원이며 인간교육을 신성에 일치하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라) 가정관: 가정은 인간교육의 기본적 장이며 도덕성으로 구축된 작은 세계이다.
(5) 교육방법의 원리
페스탈로치는 교육방법의 기본개념을 구체적인 것에서 추상적인 것, 단순한 것에서 복잡한 것, 기지의 것에서 미지의 것으로 확대해 가는 것을 말하고 심리적 방법을 종합하여 직관교수에 힘써 확대해 가는 것을 말하고 심리적 방법을 종합하여 직관교수에 힘써 어린이들에게 명료한 관념을 심어 주고 발표력을 길렀다.
(가) 자발성의 원리 - 교육은 어린이의 능력을 그 내면에서 발달시키는 데 있다.
(나) 방법의 원리 - 교수는 무엇이든 근본적인 기본요소에서 출발, 연속적으로 다른 요소로 넘어가며, 끝으로 이것을 종합한다는 일정한 3단계의 방법
(다) 직관의 원리 - 모든 인식은 모두 직관에서부터 출발하며, 모든 직관의 기초로서의 수·형·언어를 중시해야 한다는 원리
(라) 조화적 발달의 원리 - 어린이의 여러 능력, 특히 정신력, 심정력, 기술을 조화있게 발달시키는 원리. 페스탈로치는 어린이의 내면에 아직 피지 않은 꽃봉오리로서, 인간성의 전능력이 내재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는 인간의 천직의 성능을 머리, 마음, 손 즉 정신력, 심정력, 기술력의 세 영역으로 나누고, 그 중에서도 마음(도덕적, 종교적)의 도야를 핵심으로 하는 여러 능력의 조화적 발달을 교육의 이상으로 하였다.
(마) 생활공동체의 원리 - 페스탈로치는 개성존중의 면과 함께, 교육상 생활공동체의 의의를 중요시하고, 가정에 있어서의 가정집단, 특히 어머니와 자식의 인격관계를 중요시하고, 어머니와 자식의 자연의 애정과 신뢰감을 도덕교육, 종교교육의 근저로 생각하고, 그것이 확대되면 자연히 시민으로서의 자질이 높아지고, 국민으로서의 자각이 강화되고, 나아가서 인류의 복지에 이바지하는 정신까지 발전한다는 원리
결론적으로 페스탈로치는 사랑과 수용을 바탕으로 하는 지도를 강조하고 어린이의 직접적 경험을 강조하며, 실제적 교육, 직업교육을 강조하고 있다.
(6) 현대교육에 미친 영향
(가) 자연주의 교육의 실용화: 진보주의 교육과 공통점을 지닌 그의 자연주의 교육은 현대의 심리주의, 과학기술주의 교육의 교수법으로 발전하였다.
(나) 아동중심주의 교육의 정착: 아동발달의 초기단계를 중요시한 아동중심주의 사상은 루소를 거쳐 신인민주의와 함께 페스탈로치에서 꽃을 피웠다. 아동과 접해 있는 환경을 중요시하고 아동의 자발적 활동과 관찰, 체험에 의한 창조적 활동이 강조되어 프뢰벨의 유치원교육, Parker school, Dewey school 등 구미각국에서 진보주의 교육운동의 원동력이 되었다.
(다) 현대교육원리의 확산: 페스탈로치의 교육원리는 인류역사가 연륜을 더해 갈수록 지구촌 어느 곳에서나 그 진가를 드높이고 있다. 자발성의 원리는 자기 활동, 노작활동, 목적의식 있는 활동 등의 직접 경험활동을 유도하는 동기를 부여한다. 외계의 사물을 감각기관을 통해 감각적 인식에서 사고작용을 거쳐 개념형성을 하는 직관의 원리는 현실접근, 체험심화, 표상 명료의 기능을 가지고 현대의 시청각 교육으로 발전하였다. 또한 사회화의 원리를 통해 지역사회의 특성과 자연적 방법에 일치되는 교육으로 연계시키고 개인적 소질을 개발·육성함으로써 사회활동에 적극 참여케 하였다. 이는 곧 진보와 개혁에 공헌하여 민주주의를 발전시켰으며 교육을 실현하여 마침내 현대산업사회를 가속화하게 되었다.
5) 프뢰벨
(1) 생애와 저서
프뢰벨은 1782년 독일 튀링겐의 기독교 목사아들로 태어났다. 생후 1년이 채 되기도 전에 어머니를 여의고 성직에만 열심인 아버지와 불친절한 계모 슬하에서 불행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1797년부터 2년간 삼림원으로 일하게 된다. 숲속에서의 명상은 그를 그의 선천적인 신비주의로 인도했고 과학에 대한 지식이 없었음에도 자연과 자연법칙에 대한 뛰어난 통찰을 갖게 되었다. 17세에 삼림원을 그만둘 때에 그는 그가 일생을 두고 강조했던 자연의 통합성에 대한 아이디어에 가득차 있었던 것 같다. 그 후 예나 대학에 가서 여러 방면의 공부를 하면서 통합과 연결의 개념을 발전시켰다. 그러던 중 페스탈로치의 영향을 받았던 한 친구의 권유로 가르치는 일을 맡게 되고 페스팔로치의 학교를 방문하여 2년간 그의 지도를 받게 된다. 1811년 괴팅겐 대학과 베를린대학으로 와서 과학과 광물학을 공부하던 중 독일전쟁에 참여하게 된다. 프뢰벨은 1826년 「인간의 교육」을 출판하게 된다. 그후 1830년 뒤늦게 아들을 갖게 되어 이 아기의 성장과정을 세밀히 관찰한 결과를 기록했는데, 이것이 유아에 대한 프뢰벨의 직접적인 연구의 시작이라고 생각된다. 1837년 50세가 되면서 프뢰벨은 은물과 작업에 대한 연구와 구체화를 시도하였고, 1840년 최초로 유치원(Kindergarten)이라는 이름으로 유아를 위한 교육시설을 설립하게 되었다. 1843년에 그의 중요한 저서 중의 하나인 「어머니와 유아를 위한 노래집」을 발간하게 된다. 그 당시 독일이 전반적으로 그러했듯이 프뢰벨도 사회개혁에 열정과 희망을 갖고 있었다. 프뢰벨은 1852년 To Womankind라는 긴 편지를 마지막으로 어린이 교육에 헌신했던 생애를 마쳤다.
(2) 교육사상
페스탈로치의 영향을 받은 독일의 철학자이며 교육가인 프뢰벨은 유아교육사상 처음으로 “킨더가든(Kindergarten)”이라는 말을 창안하여 사용하였다. 프뢰벨은 또한 놀이감을 특별히 고안하여 이것을 은물(恩物)이라 불렀다. 이것을 통해서 아이들이 우주의 조화, 다양성, 상호관련성 등을 배우게 되었다. 공, 정육면체, 원통에서 찰흙, 종이 오리기 등에 이르기까지 지금도 유아교육에서 활용되고 있다. 이것은 최초의 체계적인 교구개발이라 할 수 있겠다.
(3) 통일의 원리
신과 인간과 자연과의 불가분의 관계는 루소, 페스탈로치, 프뢰벨의 3자에 걸치는 공통된 교육사상이었다. 그러나 루소는 자연성에, 페스탈로치는 인간성에 그 중심점을 두었는데 반하여 프뢰벨은 신성에 그 중심점을 두고 있었다. 프뢰벨은 전일적인 구조로서의 인격을 발전시켜 “신성”을 발현시키는 것을 교육의 목적으로 하였다. 즉, 인간에게 내재한 “신성”을 충분히 전개시키는 것이 프뢰벨이 보는 교육의 본질이었다. 그런데 이 “신성”은 프뢰벨에 의하면 곧 창조성, 활동성인 바 어린이의 성장은 이 창조성, 활동성에 의하여 자라난다. 따라서 어린이의 성장은 결국 신성의 발현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신성은 자유스러운 교육, 자발적, 자기활동, 노작활동에 의해서 처음으로 실현되는 것이라고 하였다.
(4) 자기발달의 원리
페스탈로치의 직관의 원리는 프뢰벨에 이르러 자기활동의 원리로 바꾸어졌다. 자기활동이란 자기자신의 흥미로부터 생기는 것이며 자기자신의 힘에 의해서 기대되는 활동이다. 프뢰벨에 의하면 자기활동에 의해서 개개인이 ① 객관적 세계를 인식하고, ② 자기자신의 본성을 인식하고, ③ 자연과 인간의 양생명의 일부가 되는 과정을 인식한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프뢰벨은 교육을 창조적 자기발달의 과정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는 이 발달은 그의 소위 “내적발달”에서 생겨 나오는 것이며, 어린이들의 자발적 자기활동으로 달성된다고 하였다.
(5) 놀이(play) 및 작업(occupations)의 원리
어린이의 자연적 개발과정으로서의 가장 특색있는 자기활동은 놀이와 작업이라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프뢰벨에 의하면 놀이와 작업은 가장 유력한 교육의 수단이었다. 운동적 놀이는 행진, 뛰기, 무용 등이고, 작업적 놀이는 장난감 즉, 은물을 가지고 여러 가지의 형태를 구성하는 탁상놀이이다. 은물이란 아동이 신으로부터 받은 선물이라는 뜻이다. 아동들은 이 은물을 통하여 감각기관을 훈련하고 우주의 이법을 깨닫고 신성을 인식하게 하는 것이었다. 은물의 기본원리는 다음과 같다.
첫째, 유아가 자기의 본성에 따라 자유롭게 스스로 다룰 수 있을 것
둘째, 놀이는 단계에 따라 서로 연속성이 있어야 할 것
셋째, 은물을 통하여 유아의 인지능력뿐 아니라 마음과 의지도 함께 훈련되어야 할 것
(6) 연속적 발달의 원리
연속적 발달의 원리는 루소가 그의 “에밀”에서 시사하고 있으나 프뢰벨은 그것을 보다 명확히 하나의 원리로서 확립하였다. 연속적 발달이란 발달의 과정이 연속적임을 뜻한다. 즉, 인간의 생활·성장에는 각 단계에 있어서 끊임없는 연속과 계속이 있으며 단절이나 비약이 없다. 이러한 연속적 발달관은 교육상에 있어서는 아동의 현실을 중시하는 아동생활 존중의 교육원리가 되었다.
(7) 프뢰벨 교육이론의 현대적 의의
유아의 자발활동을 존중하고 흥미를 소중히 여기고 놀이의 교육적 가치를 중시하는 프뢰벨의 낭만주의 교육사상은 교사 지도 중심 문화 전달관의 전통적 교육보다 더욱 바람직하다고 볼 수 있다. 능력중심의 개인주의 사회인 오늘날을 살아가는 어린이가 삶에 대한 아름다움을 잃기 쉬운 때 프뢰벨의 자연주의적 교육사상은 더욱더 가치가 있다. 우주의 모든 개별적 존재들은 자신의 힘을 창조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것이며 이런 믿음은 이상주의의 표현일 뿐만 아니라 인간에 대한 일반적인 신뢰성, 인간의 영혼과 형이상학적 뿌리의 교육이 없는 한 순수한 교육이 될 수 없다. 프뢰벨의 교육이론은 그 해답을 주고 있다. 그의 교육사상은 오늘날도 변함없이 영향을 주고 있다.
6) 몬테소리
(1) 생애와 저서
몬테소리는 이탈리아 최초의 여의사로서 의학의 배경을 가지고 교육의 발달에 공헌하게 된다. 지체아들을 지도하면서 의학과 교육을 연합하고자 하는 그녀의 강한 노력은 전통적인 의학의 방법으로부터 벗어나게 했으며 자신의 부족한 점을 채우기 위해 다시 철학과 교육을 공부하게 된다. 1900년에서 1907년까지 몬테소리는 로마 대학에서 교수로 인류학을 강의하였다. 1907년 어린이집의 책임을 맡게 되면서 세겡의 방법을 정상 어린이의 교육에 본격적으로 적용해 보게 된다. 몬테소리의 저술과 활동들은 유아교육의 발달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어린이들을 관찰한 결과 정신발달의 연속적인 발달단계를 상정하고 각 시기마다 특별히 중요한 측면이 있음을 생각하였다. 오감의 발달 중 특히 시각과 촉각의 발달은 지적 성장과 추상적 개념의 이해에 기본적임을 발견하고 같은 과제를 반복하는 방법을 통해 유아들의 감각발달을 도와주는 교수자료들을 구안하였다. 준비된 환경으로서 3-7세까지의 어린이들이 마련된 교구 중에서 스스로 선택하여 활동함으로써 학습에 몰두하고 서로 도와줄 수 있는 교육활동을 체계화하였다. 몬테소리의 이론과 자료들은 1919년경부터 영국의 유치원에도 보급되기 시작하여 중산층을 위한 유아교육의 필요성에 크게 부응하게 되었다. 특히 준비된 환경의 개념과 교구들은 공·사립 유치원에서 사용하는 교육자료의 설계와 구안에 크게 영향을 주게 된다.
(2) 교육사상
이탈리아 최초의 여성 의학박사였던 몬테소리는 정신박약아 교육에 큰 관심을 갖고 독창적인 교재의 개발과 교육방법을 고안해 내어 정신박약아 교육에 공헌을 하였다. 몬테소리의 아동관은 각 아동은 누구나 그 자신을 발달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으로, 따라서 발달은 단계적으로 이루어진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몬테소리는 아동은 스스로를 자유롭게 표현하려는 욕구가 있으므로 실제의 경험을 통한 학습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자기발달’의 힘을 가지고 있는 아동을 돕기 위한 외적 조건은 ①정리된 환경, ②비주도적인 교사, ③과학적 교구라고 몬테소리는 주장하였다. 이 외적 조건과 아울러 몬테소리는 적극적 관여, 특히 손을 써서 작업하는 것을 중시하였다. 세번째 특징은 자기 교정자료의 사용이다. 자기 교정자료는 옳게 조작하지 않으면 문제가 안 풀리도록 되어 있는 자료이다.
(3) 교육원리
유아기, 아동기의 특성을 반추하면서 몬테소리는 발달의 5단계를 상정하였다.
첫번째 단계(출생 후 3년까지): 유아는 정서적, 지적 성장이 무의식중에 일어나 흡수하는 단계의 정신과 감성적인 시기를 거치게 된다. 이 시기를 몬테소리는 매우 창조적인 시기로 보고 있다.
두번째 단계(3-6세): 무의식 속에 있던 개념과 생각들이 의식적인 수준으로 나오게 된다.
세번째 단계(6-9세): 현실적이고 실제적인 모델이 형성되고 어린이들은 학문적인 기능, 예술적인 기능 등을 형성하기 시작한다.
네번째 단계(9-12세): 어린이들의 성격은 바깥 세상을 향해 개방되며 일생동안 지속될 지적 관심이 형성되어간다.
다섯째 단계(12-18세): 관심영역을 구체화하게 되며 일생의 과업을 선택하게 된다. 그러나 사회와 우리 문화는 이러한 선택을 미루게 한다고 본다.
이러한 단계에 따라서 교육은 재조직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특히 관심을 두었던 것은 첫번째, 두번째 단계인 출생 후-6세까지였다. 이 시기의 어린이의 환경은 자유롭고 아름다워야 하며 어린이들은 자신이 독립적이 될 수 있고 스스로 무엇인가 할 수 있음을 알게 된다고 설명한다.
(가) 자유와 자기활동: 어린이가 자유롭게 교구를 선택하고 자신의 흥미와 속도에 따라 마음대로 연습과 작업을 계속할 수 있는 환경을 중요시하고 있다.
(나) 감각교육: 몬테소리는 인간에게 감각기관과 감각기능의 정상적인 발달이 지적 발달, 정신발달에 매우 중요하다고 전제하고 있으며, 감각운동 기능의 교육은 3-7세 사이에 가장 효율적으로 이루어진다고 보고 있으며 성인의 전후에 이루어지는 감각교육은 별 성과가 없다고 생각된다.
(다) 읽기, 쓰기, 셈하기의 교육: 몬테소리는 4세가 되면 어린이들은 이러한 교육을 받을 준비가 되어 있다고 보고 문자와 숫자에 대한 기초교육을 실시하였다.
(4) 교육방법 및 교사의 역할
몬테소리의 방법에서는 활동은 주로 어린이가 하게 된다. 사물은 어린이들이 학습하도록 도와주게 된다. 어린이 스스로 자신의 흥미와 욕구, 속도에 맞추어서 자료의 대상을 선택하게 된다. 이러한 자료의 대상 또는 사물은 발달의 수단이 된다. 여기에서 능동적으로 활동하게 되는 편은 교사가 아니고 어린이인 것이다. 교사의 역할은 주로 관찰자의 역할이다. 교사는 아동의 잠재적 발달단계를 주의깊게 관찰해 보면서 각 아동의 최상의 능력수준에 알맞은 시범으로 보여 줌으로써 아동의 학습분위기를 이상적인 상황으로 유지시키도록 배려한다. 교사의 또 다른 역할은 교실을 잘 정리 정돈하여 항상 ‘준비되어 있는 환경’을 아동에게 제공함으로써 아동이 정돈감을 학습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몬테소리는 믿었다.
(5) 몬테소리 방법에 대한 비판
(가) 형식적인 감각훈련을 강조하고 그것을 달성하기 위해서 끝없이 반복되는 연습은 어쩌면 정신지체아를 위해서는 합리적일지 모르나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 또한 사전에 준비된 자료를 통한 감각훈련을 위한 형식적 연습은 유치원 활동에 잘 적용되지 못하고 있다.
(나) 자율적인 교육(auto-education)의 개념이다. 어린이들의 잘못이 교사에게 의해서 교정되는 것이 아니고 어린이 스스로에 의해서 자료의 특성에 의해서 이루어지게 된다. 그러나 가장 좋은 교육은 현명한 지도하에 이루어지는 자율적 요소임에 더 많이 공감하고 있다. 또한 한 번 학습한 내용의 과정을 다시 돌아가서 확인해 보고 탐색해 보는 과정을 통해 더욱 발전할 수 있는데, 몬테소리의 자기교정적 자료에서는 이러한 기회가 제한되어 있다는 점이 지적되고 있다.
(다) 교사의 역할에 대해서도 말없이 지도할 것이 제안되고 있는데 교사의 좋은 대화와 언어를 통한 지도의 중요성이 간과되고 있는 점 (라) 놀이기능의 부족, 어린이들간의 상호작용의 부족으로 유아의 어제(과거), 오늘(현재), 그리고 내일(미래)의 저자인 엘킨드는 비록 유아의 특성들을 과학적 증거에 기초하고 있다 할지라도 최근의 그 유아의 특성들은 실질적으로 최근의 대규모 사회에서 보다 일반적인 믿음들을 반영하고 있다. 선대 세대들의 과로한 진술에 대한 발전적 심리학자들의 반응의 방법들을 연구함으로써 엘킨드는 과학은 요소와 이론들을 생성하기 위한 처방책들보다도 진리를 찾기 위한 대화로써 간주되어지는 것이 보다 유용할 수 있다는 것을 설명한다. 그의 논지는 또한, 유아 자신의 이미지들의 변화로부터 이득되어진다는 상대이론을 제공한다.
유아는 자연의 선물이며, 유아의 상은 인간의 창조이다. 어떠한 역사적인 사건들에 있어서 교육적 습관을 결정하는 것은 자연의 선물보다도 아이의 상이었다. 그리고 인간의 창조적인 아이의 상은 그것이 올바를 때, 종종 나쁘게 된다. 잘못된 상은 진실한 것보다 강력하며 쉽게 붙잡힌다. 과거와 마찬가지로 현재에 있어서 유아에 대한 교육자로서의 우리의 임무는 자연의 선물에 단지 진실할 것뿐만 아니라 어떤 나이에 있어서도 유아의 건강한 교육을 위협하는 잘못된 이미지들에 대하여 싸우는 것이다.
4. 한국의 유아교육
1) 전통 사회의 유아교육
삼국 시대의 경우는 형식적 유아교육 기관이 거의 없었으며 대부분 유교와 불교의 가르침에 준한 가정 중심의 교육이었다. 고려 시대에 와서도 큰 변화는 없었으나 7,8세 아동을 위한 향교라는 지방 학교와 평민 소년을 위한 서당이 소수 존재했던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조선시대의 유아교육도 대부분 비형식적인 가정교육이 주를 이루었으며, 형식적인 유아교육 기관으로는 고려 시대부터 이어온 서당이 있었다.
2) 현대사회의 유아교육
우리나라 최초의 유치원은 1897년에 설립된 부산유치원이었다. 1900년에 인천에 인천 공립 유치원이 설립되었고 1913년에는 백인기에 의해 경성 유치원이 설립되었는데 이 경성 유치원은 한국인 3명과 교사 4명에 3학급의 아동 120 명으로 운영되었다. 1914년 미국감리교 선교사인 브라운 리가 이화학당에 부설 유치원을 세웠다. 1916년에는 박희도가 정동 교회 내에 현재의 중앙대학교 부설유치원의 전신인 중앙 유치원을 설립하였다. 이 유치원은 설립 주체, 교사, 교육 대상이 모두 우리 나라 사람이었기 때문에 명실상부한 한국 최초의 유치원이라고 볼 수 있다. 1922년에는 우리 나라 최초의 유치원에 관한 법적 규정이 포함된 '조선 교육령'이 공포되었다. 1949년에 마침내 대한민국 교육법이 공포되자, 여기에 유치원에 관한 조항이 146조, 147조, 148조에 포함되었다. 1961년에는 『아동복리법』이 제정됨으로써 6·25동란으로 인한 버려진 아동 보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법정 시설로서 탁아소에 대한 규정이 생기게 되었다. 1963년에 유치원 시설기준령이 공포되고 1969년에 최초의 유치원 교육과정령이 공포되자 우리 나라 유치원 교육은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본격적인 성장기에 들어갔다고 볼 수 있다. 1976년에는 부산과 서울에 공립 유치원이 설립되었으며 비로소 유치원 교육의 공교육화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그 후 공립 유치원의 수는 점진적으로 늘어나 1980년에는 40개 정도가 되었다. 1968년에 정부차원의 탁아사업이 확장되면서 명칭도 '탁아소'에서'어린이집'으로 바뀌었다. 1982년『유아교육진흥법』의 제정으로 다시'새마을 유아원'으로 개칭되면서 내무부가 관할하게 되었다. 1980년대에 들어와서는 그 이전의 노력이 밑거름이 되고 1979년 UN이 제정한 '세계 어린이의 해'에 발맞추어 우리나라 정부도 국가적인 차원에서 유아교육의 발전을 위한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이기 시작하였다. 1981년에는 1969년에 최초로 제정되었던 유치원 교육과정령의 3차 개정이 다른 각급학교와 함께 이루어졌다. 이 시점은 유치원이 공식적으로 초등학교나 중학교 등의 다른 각급 학교와 같은 차원에서 하나의 교육기관으로 인정된 역사적인 시점으로 간주될 수 있다. 1982년에는 『유아교육진흥법』을 제정· 공포하여 유아교육의 양적 확대와 질적 개선을 위한 노력을 꾸준히 해 왔다. 그 결과 1990년을 시점으로 우리 나라 유아교육 기관은 공· 사립 유치원과 새마을 유아원을 포함하여 전국적으로 10,520여 개소에 이르고 있으며, 전체 5세 유아 중 약 38만명이 취원하고 있다. 앞으로는 양적인 성장 못지 않은 질적인 개선을 위한 보다 적극적인 노력이 요청된다.
3) 북한의 유아교육
북한의 유아교육은 사회주의 교육학의 원리에 따라 어린이들을 혁명적이고 공산주의적으로 교육하는 데 선차적인 의의를 부여하고 사상 교양 사업을 체계적으로 진행하여 집단생활을 통해 그들 속에 조직적 생활 기풍과 고상한 도덕성을 키워 주는 곳이 바로 유아교육이라고 한다. 유아교육 기관으로는 탁아소와 유치원이 있다. 탁아소는 생후 3개월부터 3세까지의 유아가 다니며 일 탁아소, 주 탁아소, 월 탁아소 등이 있다. 유치원은 4세 이상의 아동이 다니며 높은반과 낮은반이 있다. 유아교육의 내용으로는 탁아소의 경우 단순한 언어 교육과 보행법, 노래, 유희 등이 있으며 순종심, 집단주의 정신, 김일성을 어버이로 섬기는 정신 등을 기른다. 또한 혁명가요와 각종 무기류의 조형 장난감을 이용한 전쟁놀이 등도 교육 내용으로 되어 있다. 유치원의 주된 교육내용으로는 읽고 셈하고, 쓰는 기초적인 교육, 김일성에 대한 고마움, 존경심, 맹종심을 고취하는 교육, 호전성과 적개심을 길러 주기 위한 각종 무기류를 이용한 전쟁놀이, 공산주의 우월성을 심어 주는 사상 교육, 엄격한 규율과 공산주의 사회 체제에 대한 복종심의 습관화 교육 등이 있다.
5. 서구의 유아교육
1) 19세기 이전의 유아교육
고대 플라톤의 교육관은 그의「국가론」에 잘 나타나 있다. 그는 유아기를 제1기(1세-3세: 요람기)와 제2기(3세-6세: 유희기)로 나누었다. 제1기의 아동들은 좋은 습관과 건전한 성격 형성을 위한 기회를 부여한다고 보았다. 또 제2기의 아동들은 국가에서 임명한 보모가 들려주는 신화와 동화를 듣고 이 보모로부터 올바른 행동 규범을 배웠다. 교육 대상은 수호자 계급에 해당하는 금과 은의 계급에 아동들에게만 국한되었다. 유아교육의 목적도 이상 국가 실현을 위헌 수단적인 성격을 띠었다. 플라톤의 제자인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스승과는 달리 금이나 은의 계급이 아니라 자유 시민 모두가 교육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즉 교육 기회의 평등화를 주장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7세 이하의 아동의 경우 어머니에 의한 가정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였으며 아동의 놀이 활동이나 경험의 교육적 타당성을 확인할 수 있는 가정교사가 있어야 한다고 보았다.
중세 사회는 기독교 사상에 의해 지배되었다. 아동은 성인의 축소형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성인고 같은 종교적 계율이 아동에게 요구되었다. 근세에 들어오면서 문예 부흥기가 시작된다. 이때는 인문주의 교육 사상에 근거하여 개인의 자유로운 표현과 창착활동 등이 중요시되었다.
2) 19세기 이후의 유아교육
(1) 유아학교의 출현
유아 학교는 1816년 영국의 실업가였던 오웬이 설립한 교육기관이다. 그는 이 학교를 원만한 품성과 바람직한 생활 습관을 기르는 곳으로 보고 인격형성신학원이라 불렀으며 아동과 성인을 대상으로 하였다. 이중에서도 2세에서 5세 사이의 아동들을 대상으로 한, 학교를 '유아학교'라고 불렀다. 이 유아학교는 현재의 영국의 유아학교 설립의 역사적 기원이 된다. 이 학교의 설립 의의로는 사회개혁의 의지를 교육을 통해 실천에 옮겼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또한 시기적으로 볼 때 프뢰벨의 유치원에 비해 약 20년 앞서 설립되었다는 점에도 역사적 의의를 부여할 수 있을 것이다.
(2) 유치원의 설립
유치원은 1837년 독일의 프뢰벨이 최초로 설립한 유아교육 기관이다. 그는 교육이란 신, 인간, 자연의 조화로운 관계를 깨닫게 해 주는 것이며 이 관계를 깨달을 수 있는 능력은 아동의 본성 속에 들어 있다고 보았다. 프뢰벨의 교육 사상을 몇 가지로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통일의 원칙: 우주 만물의 운동력과 창의력은 신의 의지에 의한 것임을 깨닫고 인간의 이러한 신과 통합을 이루어지도록 노력해야 한다.
둘째, 자기활동의 원칙: 유아는 이러한 신성을 賁달을 수 있는 본성을 타고나기 ?문에 아동 스스로의 자발적인 활동을 통하여 이 신성이 밖으로 드러날 수 있다.
셋째, 노작의 원칙: 인간의 본성은 노작을 통하여 실현될 수 있기 때문에 노작은 바로 삶 자체이다.
넷째, 사회화의 원칙: 원만한 사회생활에 필요한 협동과 예절이 유아교육에서 다루어져야 한다.
프뢰벨은 이상과 같은 그의 교육 사상을 실현하기 위해 은물을 제작하였고 노작활동을 선정하였다. 이 은물과 노작은 후에 수정·보완되어 지금까지도 유치원 교육과정의 기본이 되고 있다.
6. 세계 각국의 유아교육
1) 미국의 유아교육
미국의 유치원 교육은 1855년 독일에서 프뢰벨로부터 직접 교육을 받은 슈르츠 부인이 미국으로 이주하면서 시작되었다. 슈르츠 부인은 위스콘신 주의 워터타운에 독일 아동을 대상으로 독일말을 사용하는 유치원을 최초로 설립하였다. 1860년에 피바디가 보스톤에 영어를 사용하는 유치원을 설립하면서 미국의 유치원 교육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1913년 몬테소리가 도미하여 자기 교육법을 소개한 후 1915년 시카고 대학의 교수 부인들에 의해 3-4세의 유아를 대상으로 하는 유아원이 처음으로 설립되었다. 1965년에 시작된 헤드 스타트 프로젝트는 미국의 유아교육의 발전을 위한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이 프로젝트는 존슨대통령이 내세운 '빈곤 퇴치'운동의 일환으로 저소득층 가정의 아동들을 위해 국가에서 전국에 걸쳐 무상으로 유아교육 프로그램을 제공한 프로젝트이다. 이 프로젝트는 나중에 팔로우 스루, 홈스타트 프로그램을 낳기도 했다. 미국의 유아교육은 90% 이상이 무상으로 유치원 교육을 받고 있으며 유아원까지도 공교육화 될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유치원은 교육 대상의 연령을 1년 더 하향 조절하여 2년제 무상 유치원 과정까지도 제안되어 논의되고 있다. 초등학교의 학제도 K- 6로 되어 유치원 과정과 초등 학교 과정간의 관계가 더욱더 밀접해지고 있다.
2) 영국의 유아교육
영국의 유아교육은 1816년 오웬이 설립한 인격형성신학원에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1944년에 마련된 버틀러 교육법은 유아교육의 제도적 기틀을 마련해 주었다. 이 법에 따르면 유아교육 기관의 종류는 크게 네 가지로 나누어진다. 즉, 2-3세 아동이 대사인 유아원,3-5세 아동을 위한 유아 학급,5-7세 아동을 대상으로 하는 유아 학교,7-11세 아동이 다니는 초등 학교가 그 네 가지이다. 또 다른 형태의 유아교육 기관으로는 설립 주체와 운영 방법 면에서 앞의 유아교육 기관들과는 차이가 있는 놀이방이 있다. 이 놀이방은 교육 재정의 빈곤과 교사의 부족으로 정부에서 유아원 확대를 거부하자, 1961년에 어머니들이 자치적으로 조직한 교육기관이다.
3) 서독의 유아교육
종래의 중류층 이상 가정의 아동들에게만 제한되었던 유치원 교육이 모든 계층의 아동들에게 무상으로 제공되는 공교육으로 바뀌었다. 교육의 방향도 생활 중심, 사회 학습 중심, 다연령간 집단 편성, 부모의 적극적 참여, 지역사회 중심 등으로 개혁되어 지금까지 상당한 성과를 거두고 있다. 독일의 유아교육 프로그램은 '상황 중심'으로 명명되고 있다. 유치원의 대상 연령은 3-5세 아동이며 혼합 연령으로 구성된다. 놀이 중심, 상황 중심 교육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형식적 내용보다 유아의 전반적인 발달을 도모하는 내용을 교육 내용으로 구성하고 있다. 입학 준비 과정은 학교 유치원으로 불리운다. 독일에도 0-3세 아동을 장시간 동안 보호하고 양육하는 탁아소가 있으며, 다른 유아교육 기관으로는 결혼한 대학생들의 자녀를 대상으로 하는 탁아소와 대학 유치원, 6세에서 14세 아동에게 방과 후 탁아를 제공해 주는 기관 등이 있다.
4) 소련의 유아교육
소련의 유아교육은 볼셰비키 혁명을 기점으로 큰 변화가 있었다. 1917년 사회주의 혁명이 성공하자 소련 정부 내의 교육 인민위원부에 취학전 교육부가 생기면서 제도적 유아교육의 기틀이 마련되었다. 1944년에는 유치원 규칙을 제정하고 3세에서 7세의 아동을 대상으로 적극적인 집단주의 교육을 해 나갔다. 이러한 유아원, 탁아소, 또는 유치원은 교육과 운영의 일관성 유지를 위해 1959년에 단일 취학 시설에 통합되었다. 이 단일 취학 시설은 '보육 유치원'이라는 이름으로 생후 2개월부터 7세까지의 아동을 대상으로 하였다. 1962년에는 유치원 교육령이 공포되고 각 연령 단계에 맞는 교육 내용과 교육 방법이 정해짐으로써 소련의 유아교육은 더욱더 공산주의 정신에 입각한 집단주의 교육, 노동을 중시하는 종합 기술 교육, 협동심과 순종심을 기르는 도덕교육 등에 중점을 두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