붕어빵과 교회
뉴저지 제자 교회 이 영기 목사
붕어빵에는 붕어가 들어있지 않다는 유머가 있다. 붕어빵이라고 부르는 것은 모양이 붕어처럼 생겼기 때문이다. 교회 안에 예수가 없다는 지적이
있다. 외형만 교회라는 말인 것 같다. 왜 교회들이 이런 소리를 들고
있는 것일까?
오늘날 교회를 두고 중세시대와 아주 흡사하다는 말을 한ㄷ다.
어떤 면에서 닮아 있을까? 중세 십자군 전쟁 당시 군인이 부족하여 이웃 나라에서
용병을 사왔다. 그리고 십자군이 되려면 형식적이나마 세례를 받아야 했다. 이런 형식적이고 엉터리 세례를 받으면서 용병들은 물 속에 들어가면서 칼은 물에 담지 않고 하늘 높이 처들었다고 한다.
이유는 다른 것은 몰라도 자신들에게 생명과도 같은 칼은 자신 마음대로 사용하겠다는 무언의 선언인 셈이가.
곧 신앙과 삶이 따로따로 라는 생각을 보여주는 것이다.
오늘날 미국 복음주의 개신교회의 가장 큰 이단 사설은
‘예수를 자기 마음에 한 번 영접하기만 하면, 무조건
천국에 간다’는 신학이론이라고 지적한다. 아마도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될 줄을 아셨던 것 같다. 신앙이 단순한 립서비스로 타락할 것을 아셨던 주님은 마태복음
7장 21절이하에서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 갈 것이 아니다 라고 선언하고 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면 천국에
들어간다고 배우고 믿은 우리들에게는 청천벽력같은 말이다. 성경은 제대로 읽어보면 답을 발견할 수
있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공개적으로 숨김없이, 복음은 처음부터 문도 좁고 출구도 좁다고 알려 주고부터 시작해야 하는데 교회들이 이를 간관한 것 같다. 예수를 믿는 것은 좁은 문으로 들어와 좁고 협착한 길을 걸어가야 하는 쉽지 않은 여정입니다 라고 말하면 누가 교회에 등록을
하겠는가? 라고 항변할 수 있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은 생명과 죽음의
문제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즉 좁은 문, 좁은 길은 생명의
문이요 생명의 길이다. 그외의 길은 다 죽음에 이르는 길이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가 선포하신 복음의 정답이다.
좁은 문, 좁은 길이
정답이다. 정답에 가까우면 정답으로 처주겠다고 세상과 사람들의 요구와 타협을 한 것은 변질된
복음이다. Almost Christian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정답에 가깝다는 말은 정답이 아니라는 말과 같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마태복음 7:13-14)
먼저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라고
말씀하고 있다. 문은 들어가거나 나가거나 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들어가고 나가는 것이 좁다는 표현은 문자적으로 주님과 함께 있다는 의미이다. 즉 주님과 함께
있기를 원하고 그렇게 믿는 사람, 예수님을 영접하는 사람은 좁은 길로 들어섰다는 뜻이다.
좁다는 뜻은 주님과 함께 있다는 뜻이다. 성경은 선포한다. 주님과 함께 하는 삶이 넓고 쾌적한 것이 아니라 좁다.
누가복음 13:24절 이하에서는 아주 분명하게 구원을 받는 사람이 많지 않을
것이라고 천명합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들어가려 해도
들어가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예수님의 분명한 가르침이다.
좁은 문과 길을 같은 의미이다. 문과
길이 어떻게 다른가?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이 영접하는 것이다. 그
다음은 좁은 길을 걸어가는 것이다. 길은 사람들이 많이 걸어다녀야 생기는 것이다. 문으로 들어가는 것과 길을 걷는 것이 동시에 기록되어 있는 것은 예수를 믿는 것과 예수를 닮아가려고 애쓰며 사는 것이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오늘날 복음은, 죄로부터 구원 얻어 영생이
아니라, 복잡하고 힘든 삶으로부터, 예수 믿어 좀 더 쾌적하고 안락한
삶을 얻는 복음으로 바뀌어 가는 것 같다. 이는 붕어빵에 붕어가 들어 있다고 우기는 것과
같다.
좁은 문을 들어가기 위해서는 많은 것을 버려야 한다.
비대해서는 들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 그 문에 맞게 영적인 다이어트가
필요하다. 그래야 문을 들어선 후에 길을 걸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넓은 길을 가는 이유는 다수는 틀릴 확율이 적을 것이라는 착각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틀렸다는 생각을 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니다. 믿음에는 다수결의 원칙이 적용되지 않는다. 좁고 협착한 문으로 들어가 그길을 가는 것이 생명의 길이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이다.
넓고 좁음의 차이는 쉽고 어려움의 차이가 아니라 생명과 사망의 갈림길임을 기억하며
오늘도 묵묵히 좁은 길을 걷는 생명의 삶임을 선포해야 할 책임이 교회의 책임이다. 이것이 오늘
교회들이 선포해야 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어떤 곤충학자는 나방이 고치를 뚫고 나오려고 무진 애를 쓰며 고생하는 것을 보고
안타까워 가위로 누에 고치의 구멍을 크게 잘라주었다.
틀린길을 만들어 준 것이다.
하지만 그 나방이 나온 후 다른 나방처럼 건강하지 못하고
비실비실하면서 결국 날지도 못하였다는 것이다
누에 고치에서 나방이 나온 출구는 아주 작다.
이 쑤시게 크기가 빠듯이 나올 정도의 크기이다.
어떻게 그렇게 작은 곳으로 나방이 나올 수 있을까?
죽은 것 같든 번데기에서 나방이 태어나면
아주 힘든 탈출구를 여는 필시적인 작업을 해야한다.
먼저 누에 고치안에서 침을 묻혀 바싹 마른 수천겹의 명주실을 적셔 부드럽게한다.
그리고 그 실들을 헤쳐 작은 출구를 만들고
몸부림치며 작은 출구를 뚫고 나와야합니다.
그러는 동안에 날개가 힘을 얻고 날수 있는 근육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영적 분투를 통과하지 못한다면 진정한 새로운 탄생은 없는 것입니다.
시작이 바르고 탄생이 바르지 못하다면 결국 비상(飛翔)하지 못할 것입니다.
새봄에 겨울에 포장한 아스팔트를 떠들고 나오는 새싻을 본적이 있습니다.
생명은 돌파하는 힘이 있습니다.
생명은 바람을 거슬러 날며
생명은 강물을 거슬러 헤엄칩니다.
생명이 없으면
바람에 날려가는 휴지쪽 처럼
유행따라 많은 사람들 가는 길을 따라 갈 것입니다.
이 글에는 맞는 말가운데 논리의 비약이 있슴을 알아야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피로 구원을 얻을때 마음에 믿어 한순간에 거듭나는것이 쉬운길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세상이 예수 이름만으로도 미워하고 영접하지 않습니다 죄인됨을 고백하고 주의 구원을 의지하는 사람은 일한거 없이 받는 구원이기에 우리의 노력이나 행위와는 무관합니다
다른 목적으로 구원얻은게 아니라면 참된구원은 어렵고 복잡한게 아닙니다 다만 그리스도인으로서 성장하는 길은 말씀을 사모함으로 성령을 따르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럼에도 그 노력이 마치 구원을 유지하기 위한 노력으로 인식한다면 그것은 복음을 모르고 하는 말인 것입니다
아멘 입니다.
마므레님.
미주 한국일보에 실린글 믿지 마시고
하나님 말씀을 믿으세요.
전도해 보셨나요?
믿음+행위 라면 누구나 쉽게 동의 합니다. 죽어봐야 안다 면 이해하기가 아주 쉽습니다.
믿음으로만 천국 간다. 예수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값을 대신 갚았다고 해 보세요.
우리의 구원이 < 행위가 안들어 간다는> 전도는 믿기 어렵구요
우리의구원이 믿음+행위 라하면 믿기 쉬어 합니다.
무엇이 좁은길 이지요? 마므레님.
구원얻는 사람은 극히 적습니다.
믿음으로 < 만 > 이라하면 경건해 보이질 않거든요.
행위를 덧붙여야 그럴듯 하지요. 그래야 거룩하고 경건하고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순결한 믿음 같지요?
속지 마십시요.
마므레님.
믿음+행위가 넓은길 입니다. 사람들의 본성은 그길을 선호합니다.
마므레님은 하나님을 기뻐하십니까?
진정 하나님을 사랑 하십니까?
일평생의 죄를 용서받은것이 감사해서....?.
좁은길은요.
구원의선물을 값없이 ,<받은자들이> 가야하는 길이 좁은길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