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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2사태[ 十二十二事態 ]
10·26사건이 일어나 대통령 박정희가 암살된 뒤
합동수사본부장을 맡고 있던 보안사령관 전두환과 육군참모총장이자 계엄사령관인 정승화 간에는
사건수사와 군인사문제를 놓고 갈등이 있었다.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세력은 군부 내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하여
정승화가 김재규로부터 돈을 받았다고 주장하고, 10·26사건 수사에 소극적이고 비협조적임을 내세워
정승화를 강제 연행하기로 계획하였다.
이를 실천에 옮기기 위하여 11월 중순 국방부 군수차관보 유학성, 1군단장 황영시,
수도군단장 차규헌, 9사단장 노태우 등과 함께 모의한 후 12월 12일을 거사일로 결정하고
20사단장 박준병, 1공수여단장 박희도, 3공수여단장 최세창, 5공수여단장 장기오 등과 사전 접촉하였다.
그리고 12월 초순 전두환은 보안사 대공처장 이학봉과 보안사 인사처장 허삼수,
육군본부 범죄수사단장 우경윤에게 정승화연행계획을 수립하도록 지시하였다.
이 계획에 따라 12일 저녁 허삼수·우경윤 등
보안사 수사관과 수도경비사령부 33헌병대 병력 50명은 한남동 육군참모총장 공관에 난입하여
경비원들에게 총격을 가하여 제압한 후 정승화를 보안사 서빙고 분실로 강제 연행하였다.
한편, 총장의 연행에 저항할지도 모르는 특전사령관 정병주, 수경사령관 장태완,
육군본부 헌병감 김진기는 보안사 비서실장 허화평에게 유인되어 연희동 요정의 연회에 초대되었다.
연회 도중 총장의 연행사실이 전해지자 정병주·장태완 등의 육군장성들이 대응태세를 갖추려 하였으나,
이미 전두환이 박희도와 장기오에게 지시하여 국방부와 육군본부를 점령하게 함으로써
육군지휘부를 무력화시킨 후였다.
이와 같은 일련의 사태진전은 당시 대통령 최규하의 재가 없이 이루어졌다.
사후 승인을 받기 위하여 신군부세력은 최규하에게 압력을 가하여
총장연행 재가를 요청하였으나 거절당하였다.
이에 신군부세력은 국방장관 노재현을 체포하여 그를 통하여 대통령이 총장연행을 재가하게 설득하였다.
결국 최규하는 13일 새벽 정승화의 연행을 재가하였고,
이후 신군부세력은 제5공화국의 중심세력으로 등장하였다.
이 사건의 주도세력인 전두환과 노태우가 대통령으로 재임한 1993년 초까지 12·12사태는
집권세력에 의하여 정당화되었으나,
그후 김영삼정부는 하극상에 의한 쿠데타적 사건이라고 규정하였다.
[출처] 12·12사태[ 十二十二事態 ]|작성자 pinkdage
1979년 12월 12일은 한국 현대사의 흐름을 바꿔 놓은 날이다. 당시 합동수사본부장을 맡고 있던 보안사령관 전두환은 육군참모총장이자 계엄사령관인 정승화가 김재규로부터 돈을 받았다고 주장하고, 10·26사건 수사에 소극적이고 비협조적임을 내세워 강제 연행했다. 신군부세력은 정승화를 연행한 다음 대통령이었던 최규하를 협박해 13일 새벽 승인을 받아냈다. 이 군사정변으로 전두환, 노태우, 허화평 등 신군부세력은 한 손에 권력을 장악했고 당시 대통령 최규하와 육군참모총장인 정승화는 사실상 실각했다.
◆화려하게 부상한 신군부세력 [사진설명: 12.12 군사쿠데타 다음날 12월 13일 당시 경복궁 30경비단에 모여 있던 지휘관 전원을 모두 종로구 소격동에 있는 보안사령부(현 기무사령부)에서 아침식사를 하고 난 이후 찍은 사진..... 맨앞줄 왼쪽에서 두번째 최세창(3공수여단장)박희도(1공수여단장)노태우(9사단장)전두환(보안사령관)차규헌 (수도군단장)유학성(국방부 군수차관보)황영시(1군단장)김윤호(보병학교장)정호용(50사단장) 등등 둘째줄 맨 왼쪽 박준병(20사단장) 오른쪽에서 두번째 장세동(수경사 30경비단장) 맨 뒷줄 오른쪽에서 다섯번째 허화평(보안사령관 비서실장)허삼수(인사처장)김진영(수경사 33경비단장]
12·12사태로 힘을 얻은 그는 1980년 8월 대통령선거 단일후보로 나서 제11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12.12사태 주역들이 보안사령부에서 기념촬영] 육사 17기였던 허화평은 12·12사태 이후 신군부의 황태자라는 평을 받았다.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최규하와 정승화 31년 전인 1979년 10월 26일 서울 종로구 궁정동 안가에 유신(維新) 정권의 최고 실세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1979. 10.26 사건현장]
◆ 그때 그 사람들 김재규는 차지철뿐 아니라 박 대통령도 노렸다. [1979년 10.26 궁정동 만찬장에서 김재규의 현장검증 재연] 김재규는 정좌한 채 눈을 감은 박 대통령에게 총을 쐈다. [김재규의 부관으로 10.26에 가담한 박흥주대령의 딸들이 아빠의 사형을 막아달라고 호소하고있다] 김재규는 그 자리에서 체포됐고 이듬해 5월 대통령 시해 혐의 등으로 서울 구치소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합동수사본부장시절의 전두환 소장] 주도권을 잡은 그는 재빠르게 움직였다. 당시 김재규가 중앙정보부로 향했다면 사태가 바뀌었을 거라는 분석도 나온다.
12·12사태, '그때 그 사람들'
12·12사태는 군부 내 사조직인 ‘하나회’ 중심의 신군부세력이 일으킨 군사반란사건이다.
신군부세력은 박정희 대통령이 암살당한 이후 군부 내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한 목적으로 이러한 12·12를 계획했다.
정승화의 연행에는 허삼수·우경윤 등 보안사 수사관과 수도경비사령부 33 헌병대 병력 50명이 동원됐다.
연행은 대통령은 승인 없이 이루어졌다.
12·12사태를 계기로 신군부 세력은 권력의 중심으로 급부상했다.
특히 사건을 주도한 전두환은 군부 권력을 장악하고 정치적인 실세로 등장했다.
군사정부 시절부터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화를 갈구했던 김영삼, 김대중은 다시 한번 좌절할 수밖에 없었다.
역사의 한 분수령이었던 그날로부터 31년이 지난 지금 그때 그 사람들은 지금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12·12 사태는 하나회 소속 군인들의 입지를 지키기 위해 일어난 것이라는 분석이 있다.
하나회는 1964년에 전두환, 노태우, 정호용, 김복동 등 육군사관학교 11기생들의 주도로 비밀리에 결성한 조직이다.
10·26사태 이후 하나회소속 군인들이 장성진급 등에서 불리해지고 여러 분야에 걸친 자신의 월권행위가 문제가 되자 보안사령관이었던 전두환이 결단을 내렸다는 것이다.
전두환은 12·12사태의 기획자이자 집행자였다.
이듬해에는 민주정의당 총재가 되어 제12대 대통령에 당선했다.
‘보통 사람’ 노태우도 12·12사태의 수혜자였다.
전두환의 육사 동기인 그는 12·12 사태에 가담해 단숨에 신군부 내 핵심 실력자로 부상했다.
그는 제5공화국 기간에 외교·안보담당 정무 제2장관, 1982년 체육부장관을 거쳐 내무부 장관, 1983년 서울올림픽대회 및 아시안게임 조직위원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1987년 6월 항쟁으로 전두환이 대통령직선제를 수용했고 노태우는 민정당의 대통령 후보로 선출됐다.
당초 불리할 것이란 평을 받던 그는 양김(金)이 분열한 틈을 타 ‘보통 사람’이라는 구호를 부각시키며 제13대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허화평을 포함한 육사 17기들은 5공의 주도세력으로 등장했다.
그중에서도 허화평을 비롯한 허삼수 당시 보안사 인사처장과 수경사 33경비단장이었던 김진영은 17기의 트리오로 불렸다.
허화평은 1982년 대통령비서실 정무1수석비서관이 되면서 정권의 실세로 활동했지만, 전두환의 친인척이 관련됐던 장영자 사건의 처리 과정에서 전두환의 미움을 받게 되어 사임하였다.
당시 그는 장영자 사건의 원칙적 처리를 주장한 것으로 알려졌다.
최규하는 국무총리 재임 중인 1979년 10·26사태를 맞아 대통령 권한대행이 되었다가 같은 해 12월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그는 한국 헌정사상 정당에 관여하지 않은 직업공무원으로서 과장·국장·차관·장관·국무총리를 차례로 거쳐 대통령이 된 첫 번째 사람이었다.
그러나 신군부 세력의 12·12사태로 인해 대통령으로서의 통치권을 행사하지 못했다.
1980년 8개월 만에 사임해 역대 최단기 대통령이 됐다.
정승화 전 육군 참모총장은 12·12사태 때 신군부에 의해 강제연행되고 나서 대장에서 이등병으로 강등돼 군복을 벗는 등 군인이자 정치인으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정승화는 군 교도소 독방에서 일반 사병 죄수들과 똑같은 대우를 받으며 지내다 1980년 6월 형집행정지 처분을 받고 석방됐다. 군적(軍籍) 박탈상태는 지속됐다.
그는 1993년 김영삼 정부가 출범하자 12·12사태 피해자들과 함께 신군부 측을 고소, ‘12·12는 군사반란이었다’는 결론을 이끌어냈다.
1997년엔 서울지법이 그의 내란방조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 17년6개월 만에 완전히 명예를 회복했다.
밀린 군인연금 2억원을 받기도 했다.
◆눈물을 삼켜야 했던 민주화 세력
12·12사태는 박정희 대통령 서거이후 민주화를 기대했던 세력을 허탈하게 했다.
제3·4공화국 하에서 김영삼은 야당인 신민당 당수 등을 거치며 김대중과 함께 민주화 운동의 상징으로 떠올랐다.
12·12 사태 이후 전두환을 위시한 신군부가 정권을 잡자 김영삼은 가택연금을 당했다.
5공화국 시절에도 단식투쟁 등을 하면서 민주화 운동에 헌신했다.
14대 대통령에 취임한 그는 1995년 5·18 관련 특별법을 제정하고 전두환·노태우 등을 결국 법정에 세워 심판받게 했다.
김대중은 12·12사태 이후 특히 많은 고초를 겪었다.
신군부 세력이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김대중 일당이 정권을 잡기 위해 민중을 선동해 일으킨 봉기’로 몰아 내란음모 등의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기도 했다.
김대중은 1997년 대권에 도전해 대한민국 제15대 대통령선거에서 당선됐다. 그는 2003년 10월 서울고등법원에 ‘내란음모죄’에 대한 재심을 청구해 무죄를 선고받았다.
'10·26' 그 때 그 사람과 그 장소...지금은?
고(故)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은 김계원(金桂元) 비서실장, 차지철(車智澈) 경호실장, 김재규(金載圭) 중앙정보부장이 배석한 가운데 술잔을 기울였다. 여대생 가수 심수봉과 모델 신재순이 자리를 함께했다.
오후 7시40분쯤 잠깐 자리를 떴다가 돌아온 김재규가 갑자기 총을 뽑아들고 박 대통령 가슴을 향해 쐈다.
이 순간을 기점으로 한국 현대사는 격랑에 휩싸이게 됐다. 역사의 한 분수령이었던 그날로부터 31년이 지난 지금 그때 그 사람들과 그 장소들은 지금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박 대통령이 시해된 ‘10·26’ 사건을 촉발한 직접적 계기는 김재규와 차지철 간의 권력암투 때문이라는 견해가 우세하다.
실제로 김재규가 현장에서 가장 먼저 쏜 것도 차지철이었다.
차지철은 김재규의 총탄에 팔을 맞고 화장실로 도망갔다가 다시 방으로 돌아왔다가 김재규에게 배에 총탄을 한 방 더 맞았다.
차지철은 중앙정보부 소속 경비대원인 김태원이 쏜 총에 머리를 맞아 죽었다고 알려졌다.
김재규가 총을 쏘자 박 대통령은 “뭣들 하는 거야!”라고 소리를 질렀다.
긴박한 순간 총이 고장 나 뛰어나온 김재규는 박선호로부터 38구경 리볼버 5연발 권총을 낚아채고 돌아와 쓰러진 대통령의 머리 50㎝까지 총구를 들이대고 방아쇠를 당겼다.
사건 직후 그는 안가의 다른 곳에서 식사 중이던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동반해 용산 육군본부로 가서 사태를 장악하려 했지만, 뒤늦게 도착한 김계원 비서실장이 “김재규가 범인”이라고 정 총장에게 전달했다.
현장에 있었던 심수봉과 신재순의 운명도 순탄치 않았다. 심수봉은 “당시 계엄사에서 조사를 받다가 서울 한남동에 있는 정신병원으로 끌려가 한 달간 감금당했다”고 회상했다.
1981년까지 방송출연을 금지당하기도 했다. 신재순도 같이 조사를 받고 은둔에 가까운 생활을 하다 재미교포와 결혼해 미국으로 떠났다.
10·26의 최대 ‘수혜자’는 전두환 전 대통령이었다.
당시 국군 보안사령관으로 있던 그는 시해 사건 진상조사를 담당한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장을 맡아 ‘권력의 무대’를 장악했다.
그 해 12월 12일 대통령 암살장소에 있었다는 이유로 계엄사령관 정승화를 체포하면서 모든 권력을 손아귀에 넣었다.
최규하 국무총리가 대통령 권한대행을 거쳐 통일주체국민회의 선출 대통령으로 취임했으나, 전두환은 1980년 8월 최 대통령을 하야 시켰다.
전두환은 이어 육군대장으로 예편한 뒤 장충체육관에 소집된 통일주체국민회의에 대통령선거 단일후보로 나서 제11대 대통령 자리를 차지했다.
◆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진 10·26의 자리
사건 발생지인 궁정동 안가는 청와대 남서쪽 효자로와 창의문 길 교차로의 공원 자리에 있었다.
김영삼(金泳三) 대통령 취임 넉 달 뒤인 1993년 7월 안가는 헐리고 무궁화 공원이 됐다.
총을 맞은 박 대통령이 실려갔던 경복궁 동쪽 서울지구병원은 31년이 지난 지금 이전 논의가 한창이다.
2009년 초 이명박(李明博) 대통령은 이 병원과 옛 기무사 부지에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을 만들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청와대와 5분 거리인 '대통령 전용 병원'이라는 점 때문에 경호처가 난색을 보였다.
서울특별시 중구 충무로에서 동대문구 용두동까지 이어지는 삼일고가도로도 역사의 장소가 됐다.
박 대통령을 암살한 김재규는 정승화 육군참모총장과 함께 삼일고가도로에 들어섰다.
‘남산 중앙정보부로 갈 것인가, 용산 육군본부로 갈 것인가’ 고민하던 김재규는 병력 배치를 하려면 육군 본부가 좋겠다는 전 총장의 말을 따랐다.
'역사의 갈림길'이 된 삼일고가도로는 2003년 청계천 복원을 앞두고 건설된 지 33년 만에 모두 헐렸다.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남산 정보부 건물로 가 지휘소를 차리고 정부 요인들을 소집했다면 손쉽게 사태를 장악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남산 중정 본관은 현재 서울유스호스텔로 탈바꿈했고 지하취조실은 서울종합방재센터, 수사국 건물은 서울시 남산별관으로 쓰이고 있다.
이들 건물은 서울시가 '남산 르네상스 마스터플랜'에 따라 철거 계획을 밝힘에 따라 역사 속으로 사라질 운명에 처했다.
육군본부 벙커 총장실에 모인 최규하(崔圭夏) 총리와 각료 앞에서 김재규는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48시간 동안 비밀에 부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김재규가 박 대통령을 암살했다는 사실이 전해지면서 그는 허무하게 붙잡혔다.
김재규의 운명이 바뀐 육군본부는 1989년 계룡대로 옮겨갔다.
이 자리에는 1994년 전쟁역사와 6·25 등에 관한 전시실을 갖춘 전쟁기념관이 개관했다.
서울 용산구 육군 보안사 서빙고 분실로 끌려간 김재규는 이곳에서 전기고문까지 당하는 고초를 겪었다.
이 보안사 서빙고 분실은 훗날 12·12 쿠데타를 일으킨 신군부의 중요 거점으로 쓰이다가 헐렸고, 지금은 2004년에 지은 기무사 직원 아파트가 들어서 있다.
김재규가 수감됐던 ‘남한산성 군 교도소’ 자리에는 현재 국군체육부대가 자리잡고 있고, 당시 사형장이 있었던 서울구치소(옛 서대문형무소)는 독립공원으로 바뀌었다.
10·26 당시 김재규가 살던 서울 성북구 보문동 집은 현재 흔적도 찾아볼 수 없다.
도자기와 고서화 등이 많고 운치 있었다는 양옥집은 오래 전에 헐리고 그 자리에 4층 건물이 들어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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