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구문화 생생 톺아보기
1. 대구문학관과 향촌문화관
대구는 영남학맥이 뿌리내린 곳이며 기라성 같은 예술인들을 양성하고 배출해낸 자랑스러운 예향의 도시다. 특히 문학부분에서 걸출한 문인들이 한국문학사에 불후의 족적을 남긴 근현대문학의 도시다. 대구문학관은 대구문학의 역사성을 기리고 문학의 정신을 계승 발전시키고자 설립되었다.
대구문학관은 1912년 대구 최초로 건립된 선남상업은행 대구지점의 건물을 리모델링하여 조성한 문화시설로 2014년 10월 30일 개관하였다. 현재 1,2층은 ‘향촌문화관’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3,4층에 ‘대구문학관’을 운영하고 있다. 지하 1층에는 대한민국 제1호인 ‘고전음악 감상실인 녹향’이 자리 잡고 있다. 녹향은 1946년 10월 향촌동에서 축음기 한 대로 시작하였으며 지금은 원래의 자리는 아니지만 녹향을 살려야한다는 취지에서 지금 이곳으로 이전하였다.
향촌문화관은 1층은 대구 향촌동 주변의 근대 모습을 담은 공간이다. 과거 우리 부모님 세대의 생활상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2층은 문화예술인들의 아지트라 할 수 있는 향촌동 다방, 음악감상실, 주점 등을 재현해 놓았으며 유명 예술인들을 사진으로나마 만날 수 있는 있는 공간이다.
대구문학관은 다양한 상설 및 기획전시를 통해 한국 근, 현대문학에 체험 기회를 제공함으로 누구에게나 열린 문학창작공간이자 친숙한 공간으로 문학인구의 저변확대를 운영목표로 삼고 있다.
3층 전시실은 대구근대문학의 찬란한 결실을 상징적으로 전달하는 공간으로 대구문학관 소장 자료를 활용하여 1920~60년대 대구문학사 및 문인을 소개하고 작품을 전시하고 있다.
상징 조형물은 죽순을 형상화하여 대구문학의 새로운 미래 의지를 표현하며 죽순처럼 대구문학이 뻗어나가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겨있다. 작가와의 동행은 대구, 문학, 인생과 관련된 이미지와 문인들의 어록을 바탕으로 대구문학이 걸어온 골목길을 재현했다. 대구문학 아카이브에는 20~60년대 대구 문단사와 문인 47인을 소개하며 작품을 전시하고 있다. 명예의 전당에는 대구가 고향인 민족시인 이상화, 사실주의 소설의 대가 현진건, 감각시의 지평을 연 이장희 선생을 소개하고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그외 명작갤러리, 명작과 춤추다, 명작스캔들 코너가 마련되어 있다.
4층 전시실은 대구근대문학을 집중 조명하는 기획전시 개최 및 다양한 문학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자료 전시의 원칙은 대구 출신 또는 거주 작가 중 문학적 공적이 한국문학사나 지역문학사에 자리매김 될 수 있는 작가나 작품을 중심으로 전시되고 있다. 전시되고 있는 문인으로 이육사, 박목월, 유치환, 김춘수, 구상, 이영도 선생 등 우리 문단사에 기라성 같은 분들을 소개한다. 자료의 수시 교체 전시 및 기획은 물론 다양한 문학교실이나 세미나 등을 통해 보완하고 공론화해 나간다.
문학관은 학생들과 시민들이 쉽게 접근하여 지역의 문학과 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문학교육의 장소이다. 문학관의 관람객은 유치원생에서부터 연세 지긋하신 할아버지 할머니까지 계층이 다양하다. 병아리들이 선생님 인솔 하에 줄지어 들어오면 앙증맞고 귀여운 인형의 행진을 보는 듯하다. 중, 고등학생들은 현장 학습을 목적으로 문학관을 찾는다. 학생들은 야외 수업이 주는 해방감으로 들뜬 마음이 표정에서도 읽힌다. 관람 문화가 많이 정착되어 스스로 질서를 잘 준수하니 우리 사회의 성숙한 의식을 느낄 수 있다.
가장 진지한 관람객은 머리가 희끗희끗하신 분들이다. 시간 여유가 많은 분이라 세세하게 읽고 관심을 보인다. 해설사가 모르는 문학의 외적인 부분을 생생하게 증언해 주신다. 향촌동 골목에 관심이 많은 분은 소싯적 인근에 살았거나 젊은 시절 이곳으로 왕래가 잦았던 분들이다. 옛 추억담에 젖어 풀어내는 이야기보따리 속에는 전쟁으로 힘들고 가난하게 살았던 삶들이 떡시루처럼 쟁여져있다. 켜켜이 쌓여있던 속내가 한번 봇물이 터지면 걷잡을 수 없이 술술 풀려나온다.
젊은이들은 부모님 세대가 어떻게 살았었는지 궁금해 하며 발걸음을 옮긴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향촌동을 찾아와 사진을 찍고 풍물 사를 돌아보며 공감하는 시간을 가진다. 부모님들은 기억에서 잊히고 묻혀 버린 일상사를 이제 뒤돌아보며 추억에 젖어보는 시간을 가진다. 독특한 색깔과 수많은 이야기가 담겨있고 함께 공유할 수 있어 즐겁게 발품을 들인다. 마술처럼 멀리 서울이나 부산 등 타 지역에서 과거 대구의 모습과 문화예술인에 관심을 보이며 찾아온다.
대구문학관과 향촌문화관은 유치원생에서부터 노인까지 다양한 계층의 문화공간이다. 과거로 떠나는 시간 여행의 공간에는 볼거리 즐길거리가 많다.
2. 대구 최고의 번화가였던 북성로
북성로는 대구읍성의 북쪽 성벽을 헐고 낸 신작로이다. 읍성시대에 공북문이 있었다. 북쪽에 계시는 임금을 향해 손을 모아 공경의 뜻을 표한다는 의미를 가진 문으로 대안성당 북쪽의 두 길이 모여 북성로와 만나는 지점에 있었다.
대구읍성 허물기는 일제에 의해 북성로 쪽부터 시작되었으며 성벽을 허물자 북성로는 자연스럽게 상업의 중심지가 되었다.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이 몰려 살았던 곳으로 대구 최고의 번화가였으며 이곳에 은행이 들어선 것도 이때 즈음이다. 대구에서 최초로 전기가 들어온 곳도 이곳이라 그리 멀지 않은 시대에 밤이 되면 주위는 캄캄했지만 이 골목은 불야성을 이루었다.
당시 대구 최초의 백화점이었던 미나까이 백화점이 자리 잡은 곳도 북성로다. 일본인이 운영하는 백화점은 5층 건물로 엘리베이터가 설치되어 있었다. 백화점에는 엘리베이터를 타보려고 밀려드는 사람들로 초만원을 이루었다하니 이 골목의 번성기를 상상할 수 있다.
더욱이 북성로는 향촌동과 맞닿아 있어 전성기를 누렸다. 도로 양쪽으로 2,3층 규모의 낮고 좁은 건물이 다닥다닥 붙어 있다. 그것은 거리에서 보이는 폭에 따라 세금을 매긴 탓에 폭은 좁고 안쪽은 깊게 건물을 지었기 때문이다. 건물은 북향이 많은데 이것은 북향을 선호하는 일본인들의 특성이 담겨 있고 같은 상가라도 북향의 상가 땅값이 더 비쌌다.
골목이 한동안 전성기를 누리다가 광복이 되었다. 철공소, 금속과 같은 기계와 철물점이 들어섰다. 1950년대에는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오는 군수물자와 공구, 철물을 모아 판매하는 상인들이 모여 들었다. 현재 공구 골목은 해방이후 미군 부대가 들어서면서 공구 상점들이 옮겨와 형성되었다. 1970년대에는 제3공단, 이현공단과 같은 산업단지가 들어서자 그에 따른 용품을 사러 오는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루었다. 1990년대 들어 산업공구 골목으로 발전하였으며 북성로는 대구의 산업과 함께 흥망성쇠를 같이 했다.
번화가의골목은 돈이 많은 사람들로 상권이 활발했던 곳이라 많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북성로에 다방이 많아 예술가들의 아지트이기도 했다. 이곳은 한국전쟁시 피난 온 문인이나 예술가들이 다니던 곳이었다. 가난해도 마음만은 부자였던 예술가들은 인근의 골목에서 문학과 예술의 이야기꽃을 피웠다. 한치 앞을 가늠할 수 없는 시절에 지식인들은 전쟁으로 인한 현실과 앞날에 대한 불안감을 이 골목에서 토로하였다. 북성로 골목은 한 때 문학과 낭만이 공존하는 골목이었다.
근래에 ‘북성로 근대건축물 리노베이션 사업’이 진행되고 있다. 보존 가치가 높은 근대건축물의 원형을 살려 문화 자산으로 활용하려는 사업이다. 일제강점기에 지은 목조 건물인 삼덕상회를 매입하여 카페로 꾸몄다. 이곳에서 예술가들의 그림이나 사진전이 정기적으로 열린다. 또한 미곡창고로 이용했던 목조 건물을 ‘북성로 공구 박물관’으로 개조하여 이 건물의 2층은 공구를 이용한 체험학습 공간으로 활용한다. 또한 일본식 가옥이나 오래된 집을 리모델링하여 새로운 공간으로 거듭 나는 곳이 곳곳에 있다.
언제부턴가 산업공구 골목은 검단동 유통단지를 조성하여 이전을 권유하고 있지만 사람들의 발길은 여전히 ‘길거리 공구점’으로 향하고 있다. 그래서 요즈음도 북성로 하면 공구 골목을 떠올린다. 시대와 함께 많은 변화가 있었던 북성로에 하루 속히 옛 명성을 되찾는 곳으로 거듭나길 바란다.
3.어가길과 수창학교
달성공원 입구 도로 중앙에 거대한 청동상이 있다. 조선 순종황제의 입상이다. 이 길은 순종 어가가 지나간 길이다.
황제의 순행은 지방의 시정을 살피고 백성의 고통을 헤아린다는 명분이었지만, 실제로는 일제에 의해 계획된 것이었다. 하지만 그 당시 황제의 대구 방문은 큰 의의가 있다.
1909년 1월 7일 조선의 마지막 임금 순종황제가 임시열차로 대구역에 도착했다. 나라가 망하기 직전 이또오 히로부미가 계획한 것이다. 고종의 강제 퇴위 이후 흉흉해진 민심을 달래고자 한 행사성 순행이었다. 황제는 첫날을 대구에서 보내고 타 도시를 순행하다 1월 12일 귀경길에 달성토성을 방문하여 기념식수를 했다.
수창초등학교는 1907년 중구 교동에 있던 대구향교에서 신식교육의 필요성을 지각한 지식인들이 사립수창학교를 설립하였다.
수창학교와 순종황제의 인연은 1909년 경부선 개통을 축하하는 의미로 순종황제가 순행할 때, 일본으로 모셔가려 한다는 헛소문이 돌아 수창학교 학생들이 경부선 철로에 드러누워 길을 막으려 했었다. 늦게 사실을 알게 된 순종황제는 학생들의 의기에 감명하여 수창학교에 은사모를 하사하셨다.
그 이유로 학교가 폐교 위기를 맞았지만 2007년 개교 100주년을 맞았다. 개교 이래 가장 오래된 학교 이름을 지닌 역사가 깊은 수창 초등학교다.
수창 초등학교 담벼락에 순종 어가가 지나간 그때의 모습을 재현해 놓았다. 순종황제 궁정열차와 어가 행렬 모습을 사진과 모형으로 살펴 볼 수 있다. 어가길은 부끄러운 역사라 하여 없애야 한다는 여론도 있었지만, 역사적 사실이기에 후손들에게 제대로 알려야 한다는 주장이 더 설득력을 얻었다.
과거의 아픈 역사를 교훈 삼아 더 나은 내일을 바라보며 반성과 역사 재인식 등 미래지향적 역사공간으로 활용되기를 바래본다.
4. 달성공원-대구 역사와 함께한 옛터
달성達城 토성은 삼국시대에 자연적인 구릉을 이용하여 쌓은 토성이다. 토성은 영남의 중심도시로서 대구의 대표적인 유적지다.
성곽 아랫부분 출토품 중에서 초기철기 시대에 등장하는 조개더미나 목책의 흔적 등 다양한 유물이 나왔다. 유물로 보아 청동기 시대 이후 토착 집단이 생활의 근거지에 쌓은 성으로 초기 고대국가 형태를 이루었던 것으로 추정한다.
달성토성은 고려시대에는 달성서씨 집성촌이었고 조선시대는 행정과 군사의 중심지였다. 이러한 유서 깊은 토성은 일제의 침략과 함께 1905년 공원으로 지정되었다. 이곳에 대구신사大邱神社를 조성하였으며, 놀라운 사실은 일본의 공원처럼달성공원을 꾸몄다. 아름드리 일본 향나무가 공원 곳곳에 조성되어 그 시절을 생각하게 한다.
달성공원 안에는 지방문화재 제3호인 관풍루가 있다. 경상감사가 누상에서 세속을 살핀다는 뜻인 ‘관풍세속’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관풍루는 현재 달성공원 북쪽에 옮겨 세워져있다. 구한말 조선의 국운이 기울 무렵, 대구 읍성을 철거 할 때 이 건물만 옮겨 놓은 것이다.
넓은 잔디광장과 동물원이 잘 조성되어 예나 지금이나 대구 시민의 힐링 장소다. 내가 초등학교 시절, 타지에서 친척이 우리 집을 방문하면 필수적으로 들르는 곳이었다. 학교에서 학년별로 소풍을 가면 달성공원에 자주 갔었다. 주말 매표소에는 구경 온 사람들로 줄을 서서 기다리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정문에서 거인과 눈을 마주치는 것이 신기하였고, 볼거리가 많지 않던 시절 코끼리와 호랑이, 사자, 곰 등을 보는 것이 마냥 좋았다. 특히 여름에는 물개가 시원한 물에서 헤엄치며 물살을 가르는 모습을 보면 우리들이 더 시원하게 느껴져 인기가 많았다.
세월이 흐르니 토성이 지닌 역사적 중요성과 가치가 잊혀져가는 것이 안타깝다. 그래서 토성 복원계획을 마련해야 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달성공원이 옛 모습으로 복원이 되어 역사와 자연 문화가 잘 어우러진 아름다운 공간으로 거듭나 대구시민에게 사랑받는 공원이 되었으면 좋겠다.
5. 선교사 주택과 청라 언덕, 3.1만세 운동길
지하철 2호선을 타고 청라언덕 역에서 내려 동산의료원 남문 쪽으로 길을 따라 동산을 오르면 청라언덕이 나온다. 청라란 푸른 담쟁이넝쿨을 말하며, 선교사 사택에 심은 담쟁이가 붉은 벽돌을 타고 올라간다고 해서 붙여졌다. 이 언덕에 대구의 기독교가 지역사회에 뿌리내려 정착한 곳이다.
이곳에는 미국에서 건너온 초기 선교사들의 사택이 있다. 사택은 지난 100여 년간 지금의 동산의료원과 함께 대구의 역사로 호흡한다.
처음 이 언덕은 달성 서씨 문중 땅이었다. 서씨 문중에서 공동묘지로 사용하는 버려진 땅이었는데 선교사들이 쌀 3가마니 값을 치르고 이사한 곳이다. 선교사가 심은 대구 최초의 서양 나무는 능금나무인데 자손목으로 대구를 능금 주산지로 만든 계기가 된다.
옆에는 마르타 스윗즈 선교사가 살았던 사택이 풍경으로 자라 잡고 있다. 이 집은 1907년 일제에 의해 대구 읍성이 철거될 때 읍성 돌을 주춧돌로 깔았다. 그 위에 붉은 벽돌을 쌓아 집을 올리고 지붕은 기와를 얹어 한국적 정취를 풍긴다.
그림 같은 주택을 가로지르면 챔니스 주택이 눈에 들어온다. 동산병원을 발전시킨 마펫 병원장이 거주한 곳이다. 챔니스 주택 건너편에 블레어 주택은 교육 역사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대구 3.1운동 사진이 전시되어 민족애를 고취시키는 장소다.
한국 최초의 피아노가 사문진 나루터로 들여와 이곳 선교사 집에 놓여진다. 사람들은 난생 처음 듣는 피아노 소리를 ‘귀신통’이라 불렀다.
두 주택 사이에 이은상 작사, 박태준 작곡의 ‘동무 생각’ 노래비가 청라언덕을 지키고 있다. 청라언덕은 동무 생각의 노랫말이 배경이 된 곳이다. 박태준 선생이 계성고등학교를 다니던 시절 신명여고 여학생을 짝사랑했다. 고백도 못하고 끝난 사랑이지만 마산에서 교직 생활을 하며 이은상 선생을 만나 자신의 추억을 이야기했다. 이에 영감을 얻은 이은상 선생이 노랫말을 쓰고 박태준 선생이 작곡하여 알려진 노래다.
스윗즈 주택의 옆길은 3.1운동 길이다. 시내 쪽으로 내려가는 90계단이 있다. 만세운동을 준비했던 학생들이 경찰의 감시를 피하고자 이곳에 모여 서문시장으로 몰려갔다. 계단 곳곳에 3.1운동 정신이 어려 있다.
청라언덕은 사랑의 동산이다. 3.1운동 길은 나라 사랑의 길이다. 선교사는 사명감으로 태평양을 건너온 것 또한 사랑 정신이다. 또한 박태준 선생이 여학생을 짝사랑하며 애태웠을 마음이 떠올려진다. 서로 다른 동기로 시작되었지만 하나로 보면 아가페의 숭고한 사랑이 깃든 곳이다. 대구의 몽마르뜨로 자리매김한 청라언덕은 드라마 촬영 장소로 사랑 받고 있다. 대구 기독교가 뿌리 내린 과정이나, 3.1운동의 역사를 알고 싶은 사람에게 추천한다.
6.이상화 고택과 서상돈 고택
대구는 민족시인 이상화의 고향이다. 1901년 4월 5일 서문로에서 부친 이시우와 모친 김신자 사이 사 형제 가운데 둘째로 태어났다. 첫째 형은 독립운동가 이상정, 둘째 이상화, 셋째 우리나라 초대 IOC 위원을 지낸 이상백, 넷째 수렵인 이상오 형제다. 사람들은 이들 네 형제가 모두 걸출하다하여 용봉인학으로 불린다.
선생은 아버지께서 일찍 돌아가셨다. 어린 시절에는 큰아버지 밑에서 기숙학교인 우현서루에서 교육을 받았다. 그 뒤 서울에서 학교를 마치고 대구에 있을 당시 1919년 3.1운동이 일어났다. 선생은 지인들과 거사 모의를 하였지만 주동을 했던 인물들이 검속되어 차질을 빚었다. 유학을 꿈꾸며 일본으로 건너갔지만 이듬해 관동대지진으로 귀국하여 서울에서 작품 활동을 했다.
선생은 1920년대를 기점으로 활발한 문학 활동을 했다.1921년 현진건의 소개로 《백조》 동인이 되며, 1922년 《백조》창간호에 「말세의 희탄」을 발표하면서 문단에 데뷔한다. 1926년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개벽》 70호에 발표하여 문단의 주목을 받는다. 주요 작품으로 「나의 침실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이별을 하느니」 등이 있다. 선생의 시비는 현재 달성공원에 있다.
선생은 몸을 던져 투쟁하는 혁명가는 아니었지만 나라를 사랑했고, 우리 말과 글을 사랑했으며, 고향인 대구를 사랑했다. 교남학교 교사 시절 젊은이들을 깨우치는 데 온 힘을 기울였다.
이상화 고택은 대구에서 태어나 고택에서 생을 마감한 선생의 항일 민족정신을 되새겨 볼 수 있는 장소다. 마흔넷 안타까운 나이에 광복을 보지 못하고 저세상으로 떠나셨다. 조국이 처한 식민 치하의 울분을 글로써 표현했던 시는 우리들의 가슴에 영원히 남아있다. 고택은 한 때 사라질 위기에 처했으나 2008년 ‘이상화기념사업회’가 관리를 맡으면서 보존되고 있다.
이상화 고택의 맞은편에 서상돈 고택이 있다. 서상돈 선생은 조선 말기의 기업인이자 관료였고 민족 독립운동가다. 대구에서 지물 행상과 포목상으로 성공한 분이다. 1907년 정부가 일본에 빚을 많이 져 국권을 상실하자 광문사 사장인 김광제와 함께 금연으로 나라의 빚을 갚자는 국채보상운동을 벌였다, 국채보상운동 기록물은 2017년 10월 31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다.
7. 약령시 축제와 화교 소학교
현대백화점 뒤 약재상들이 들어선 거리를 약전골목 또는 약령시라 한다. 대구의 약령시는 전국에서도 널리 알려진 약재시장이다.약령시는 조선조 효종 연간에 시장이 개설 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랜 350여 년의 전통을 이어온다. 시작은 경상감영 마당에서 열렸으나, 1908년 지금의 위치로 옮겨왔다.
옛날부터 대구에 약령시장이 서면 멀리 함경도와 황해도부터 강원도 산골, 지리산 자락 등에서 약초를 지고 온 사람들이 대구에서 20일 동안 머물며 물건을 사고팔았다. 멀리 중국에서도 약령시에서 한약재를 사 갔다하니 그 명성이 자자했음을 알 수 있다. 그 당시 ‘영 令바람 쐰다’는 말이 있었다. 전국의 약령시를 한바퀴 돌아보는 것을 뜻하던 말인데, 대구 영 바람을 안 쐬면 약효가 없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대구약령시한방문화축제’는 조선시대 약령시 개장행사를 현대적으로 승화시킨 축제로 1978년 이래로 해마다 개최되고 있다. 약령시축제는 지역의 명소 약전골목을 무대로 전통 약령시의 맥을 잇고 명성을 되살리기 위해 약령시보존위원회 주최로 열린다.
약령시 축제 행사장에 들어서면 순하고 향긋한 약초 내음이 기분을 좋게 한다. 특히 요즈음은 건강의 관심이 많아지면서 현대인들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약령시 축제는한약에 관련된 다양한 행사와 시음회, 참여마당등 한방 체험 프로그램이 가득하다.
축제장에는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많은 관광객이 찾아온다. 약전골목 곳곳에 심마니, 포도대장, 야바위꾼 등 약령시의 다양한 캐릭터를 만날 수 있다. 특히 ‘약령밴드’는 활기가 넘치는 거리를 만들고 축제장의 감초 역할을 하는 등 다양한 볼거리도 제공한다. 약령시축제는 2001년부터 문화관광축제로 지정되었다. 한방문화의 전승보존과 진수를 국내외에 널리 알리는 대표적인 한의약 축제로 자리매김한다.
약전골목북쪽으로 대구화교 초등학교가 자리 잡고 있다. 학교 출입문 벽면에 중국의 역사적 인물이 그려져 있다. 초등학교는 우리나라 초등학교에 비교해 규모가 작고 열약해 보인다. 초등학교 건물 옆에 화교협회가 있다.
화교협회 건물은 대구 지역 부호인 서병국의 주택이었으나 화교협회에서 매입하여 지금도 사용하고 있다. 붉은 벽돌를 쌓아 벽체를 만들고 화강석을 사용하여 화려하다. 대구 지역의 대표적인 근대 건축물로 1929년에 건립되어 등록문화재 252호로 지정되어 있다.
약령시 축제가 우리 한의학의 우수성과 함께 약령시가 번창 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또한 화교 초등학교를 통해 우리문화와 중국문화의 활발한 교류의 장이 되었으면 한다.
8. 대구의 큰 장, 서문 시장
대신동에 터를 잡고 있는 서문시장은 조선 시대부터 3대 시장으로 불릴 만큼 크고 번창한 곳이다. 60년대 말까지만 해도 경상도, 충청도, 전라도의 상권을 움직였으며, 섬유 거래량은 전국의 절반을 차지했다. 사람들이 서문시장에 가면 큰 장에 간다고 했을 정도였으니 시장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서문시장 곳곳에는 미로처럼 이어진 상가가 있어 재래시장의 분위기와 추억을 느낄 수 있다. 화재로 소실된 건물에 현대화 시설을 추진하고 편의시설을 갖추면서 서문시장은 근대와 현대가 공존하는 모습이다.
서문시장은 지금도 큰 장의 규모를 가지고 있다. 대구 경북 인근에서 소매상인들이 모이는 도매 시장이다. 시장은 6개 지구로 형성되어 포목 직물 의류 등 섬유 관련 품목이 주종을 이루고, 청과물 건어물 신발 그릇 등이 구색을 갖추고 있다.
어린 시절, 나는 서문시장의 인근에 살았다. 엄마를 따라 시장에 가면 큰 소쿠리에 이고 나온 생선이나 밭에서 농사지은 단골 할머니의 채소를 주로 사곤 했다. 또한 집에서 몇 가지 옷을 지을 천을 사고 소 천엽이나 쇠고기 국거리를 샀다.
그 시절에는 서문시장이 직물이나 포목 등 섬유가 차지하는 비중이 높았다. 시장 인근의 골목에는 가내공업 형태로 베 짜는 소리가 들렸다. ‘찰가닥 찰가닥’ 섬유 기계 돌아가는 소리가 밤이 늦도록 흔하게 들을 수 있었다. 우리 집에도 작은 공장이 있었는데 섬유 염색, 원단가공, 옷 만드는 가내 수공업을 위해 공장에 전세와 사글세를 얻겠다는 사람들로 활기를 띠었다. 하지만 그 소리가 언제부턴가 가뭇없이 사라졌다.
지금은 서문시장에 지상철 3호선이 생겨 생동감과 함께 세대교체가 이루어져 생기와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 시장을 한 바퀴 돌면 볼거리 먹거리 즐길 거리가 가득해 재충전의 시간을 가질 수 있다. 야시장을 개장하여 인기 코너에서는 대기자의 행렬이 이어진다. 밤이 즐거운 야시장은 대구의 새로운 밤 관광지로 인기를 끌고 있다.
큰 장은 시민과 학생들이 모여 독립을 외친 대구 만세운동의 발상지다. 만세운동의 시작점은 큰 장 입구인 현 섬유회관 건너편 옛 서문치안센터 앞이다.일제가기미년 3.8 만세운동의 집결지였던 것을 못마땅하게 여겨 서문 밖인 지금의 동산동과 시장북로 일대에 흩어져 있던 시장을 현재의 위치로 옮긴 것이 지금의 서문시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