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녀의 색정 소리를 마음껏 노래 불렀던 백제가요 정읍사 지금 우리는 남녀 성기나 정사, 그리고 색정적 표현은 글쓴이도 망서려지고 했다가는 독자님들의 욕은 그만두고 카페를 문 닫아야 할 처지가 될지도 모르며 먼저 보냈던, 우리 조상들이 읊었던 詩經의 처녀의 음부에는 음모도 무성하다는 桃之夭夭 其葉蓁蓁도 욕을 바가지로 먹은 일이 있다. 그렇다면 오직 생식의 섭리대로 사는, 아니 이 우주의 섭리 상 생명들의 생식이 뭐가 더러우며 음란한 것인가? 즉 아기는 귀여우면서 그 아기를 만드는 일은 왜 음란하고 수치스런 것인가? 우리 하느님은 하나 둘 셋 ...열의 뜻을 밝히는 [진본천부경] 에서는 남녀가 산야에서 마음껏 사랑을 하고 결국 이 땅의 섭리대로 자식을 낳아 부족의 울타리를 만들고 그 울타리가 완성되면 열고 나가 타 민족과 피를 섞고 다문화 가정을 만들어 홍익인간 하라는 교훈이 바로 우리 민족의 주체 정신인 천부경이며 또 임금님 앞에서도 여인이 벌거벗고 엎드려 씨놀음(씨름)에 이긴 사내의 씨를 받겠다는 청동기 유물의 그림이 지금 미국 보스턴 박물관에 있는데 남녀의 성교가 지금 우리가 알듯 그렇게 부끄러운 것인가? 또 우리 선조들은 글자가 지금과 같이 기계화 되는것을 알기라 했는지 한자의 원형인 그림글씨 금문(金文)이 있음에도 다시 天地人을 상징하는 ㅇ ㅁ ㅿ을 만들어 원시한글을 만들었지만 먼저 말 했듯이 중국인들은 우리 조상이 만들어 썼던 그림글씨 금문이 뜻을 이해 하는데 쉬웠음으로 그 금문으로 갑골문을 만들고 결국 한자를 만든, 그래서 소위 천지를 다 본다하여 눈이 네 개가 된다는, 창힐이 그 아비와 한 여자를 다투다 남녀의 성관계는 음란한 것이고 그래서 여성의 생리조차 ‘더러븐 이슬’이며 그래서 산신제등을 지낼 때 남자들 끼리 잠을 자는 풍습이 되었고 그래서 지금 남녀의 성기 이야기나 정사 이야기는 시정잡배도 함부로 말 할수 없고 여러 독자님들도 마찬가지이니 그만큼 우리는 아직까지 중국의 종속국이고 한자의 노예라는 자탄을 하며 이 글을 쓴다. 그렇다면 우리 선조들이 불러 몇 왕조가 바뀌도록 변지 않은, 삼국(백제) 때 불렀다는 정읍사를 나름대로 해석해 본다. 정읍사. ( 모든 글자는 다 옛 한글 아래 점을 찍음) 달하 노피곰 도다샤 어긔야 머리곰비취오시라 어긔야 어강됴리 아으 다롱디리 어긔야 어강됴리 아으 다롱디리 全져재 녀러신고요 어긔야 즌대를 드러내욜셰라 어긔야어강됴리 어느이 다 노코시라 어긔야 내가논대 졈 그랄세라 어긔야어강됴리 이 노래는 백제의 민요가 한글이 없음으로 소리로만 전해지다가 조선조 세종이후로 국문으로 표기된 것으로, 어떻게 해석 하느냐에 따라 다른 내용이 된다. 견해 1 : '고려사악지(高麗史樂志)'에 전하는 배경 설화를 바탕으로, 행상 나간 남편의 야행 침해(夜行侵害)를 염려하는 아내의 정성을 나타낸 사랑의 노래로 본다는 견해 견해 2 : 고려 가요 '동동(動動)'과 함께 남녀간음지사(男女姦淫之詞)라 하여 폐기되었다는 '중종 실록(中宗實錄)'의 기록을 바탕으로, 행상 나간 남편이 다른 여성과 사랑에 빠지지나 않을까 하는 의구심과 질투를 드러낸 속된 노래로 보는 견해. 여기서 가장 의문이 되는 구절 1) 즌되를 드디욜셰라 2) 내가 논데 졈그를셰라 1) 즌되를 드디욜셰라 (1) '즌데'는 '진 데' , '진 곳' , 즉 '수렁물(진창물)이 고인 곳' 이고, '드디욜셰라'는 '디딜까 두렵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남편이 밤에 다니다가 도둑이 침해나 입지 않을까 두렵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2) '즌 데'는 '수렁물(진창물)이 고인 곳' 이지만 상징적으로는 주색(酒色) 또는 화류항(花柳巷)을 비유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따라서 '남편이 수렁과 같은 주색에 빠지면 어쩌나 두렵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도 있다. 2) 내가 논데 졈그를셰라 (1)'내가 논데'는 ' 내가 가는 곳(가는 길)'. '내가 가는 길'. '남편이 오는 길'이고, '졈그를셰라'는 '저물까 두렵다'는 뜻으로 본다. 그러므로 '남편을 마중하러 나가는 길(남편이 돌아오는 길)이 어두워질까 두렵다.'고 남편의 무사 안전을 걱정하는 뜻으로 해석할 수 도 있다. (2) 내가 논데는 내가 노는데, 즉 내가 성행위를 한는데 ‘점’은 흉, 점그랄세라는 흉이 될거냐? 정읍사' 관련 설화 (1)井邑 全州屬縣 縣人爲行商久不至 其妻登山石以望之 恐其未夜行犯害 托泥水之汚以歌之 世傳有登岾望夫石云 정읍은 전주 속현으로 이 고을 사람이 행상을 떠나 오래도록 돌아오지 않자, 그 아내가 산 위 바위에 올라가 남편이 있을 먼 곳을 바라보면서 남편이 밤길에 오다가 해나 입지 않을까 염려되어 이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남편을 기다리던 언덕에 돌(망부석)이 남아 있다고 한다. - '고려사악지. 그러나 이 고려사 아악지는 중국의 영향을 받아 남녀의 성교를 추잡하게 보는 1451년, 조선조 문종 때 써진 글이므로 믿을 수가 없다. (2) 고려사악지나 악학궤범은 다 조선조에서 기록되고 부르던 궁중음악으로 가사내용이 음란하여 중지 시켰다가 해석을 달리하고 불렀다던 노래이다. 그러나 행상나간 남편을 걱정하는 내용대로라면 조선조에서 중지를 시킬정도의 음란하다도는 볼 수 없다. 하여간 이 노래는 백제의 민요로 구전되어오다가 속악의 가사로 편입되었고 고려시대에 와서는 궁중악인 무고정재(舞鼓呈才)의 가사로 창(唱)되었다. 조선시대에 와서는 학연화대처용무합설(鶴蓮花臺處容舞合設)에서 〈처용무 處容舞〉·〈봉황음 鳳凰吟〉·〈삼진작 三眞勺〉과 함께 가창되었다. 〈악학궤범〉의 연행절차에 따르면 여러 기생이 〈정읍사〉를 부르는 가운데 8명의 여기(女妓)가 나와 절차에 맞춰 춤을 추고 북을 치는데 마지막에 악사(樂師)가 박을 치면 북을 멈추고 물러 나가고 음악이 그친다고 했다. 이 노래는 중종대(中宗代)에 이르러 음란한 노래라고 하여 궁중가악에서 제외되고 〈오관산 五冠山〉으로 대치되었다. 그러나 〈성소복부고 惺所覆藁〉·〈대악후보 大樂後譜〉·〈동국문헌비고 東國文獻備考〉 등의 문헌에 간단히 기록된 것을 통해 볼 때 이후에도 계속 연주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악학궤범》(樂學軌範)도 조선 성종 때에 편찬한 악서(樂書)로, 장악원(掌樂院)에 있던 의궤(儀軌)·악보를 정리한 것이다. 글쓴이 소견 우리 선조들은 시경을 보더라도 남녀의 정사를 위대하고 신성한 것으로 보았고 이 전통이 삼국때 까지 있었던 것인데 중국을 종주국으로 받드는 근세조선에 들어와 같은 여자를 부자간에 다투던 한자의 원조라는 창힐에 의해 남녀의 정사를 음란하게 보았다. 따라서 이 井邑詞는 情邑詞 일 것인데 조선조에 들어와 井邑詞로 바뀌었을 것이다. 정읍사 (모든 우리말 은 아래아점, 붉은 글씨는 글쓴이 해석) 달하 노피곰 도다샤 달(남근) 이 달처럼 돋으샤 어긔야 머리곰비취오시라 어쨋건 오랫동안 서 있으시라 어긔야 어강됴리 어쨋건 강하게 아으 아으(성교시 감탄사) 다롱디리 달렸구나(달이 매 달린 것 같이) 어긔야 어강됴리 아으 다롱디리 어쨋건 강하게 아 으 달이 매달렸구나. 全져재 全 저자(시장) 녀러신고요 알리시게요. 어긔야 즌데를 어쨋건 잔데를 드러내욜셰라 드러내게요. 어긔야어강됴리 어느이 어느이가 다 노코시라 다 놓케시리(알게요) 어긔야 내가논대 어쨋건 내가 노는데 (내가 성교하는데) 졈 그랄세라 흉이 그럴거냐(흉이 될 거냐) 어긔야어강됴리 어쨋건 강하구나. ..................................................... 이 내용은 한 계집이 강한 사내를 불러들여 동네방네 자랑하고 싶은 마음에 부른 노래. 이 노래가 불러 질 당시만 해도 남녀의 성교가, 특히 강한 사내를 만나는것이 자랑스럽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다음은 일본학자들도 그 뜻도 모르는채 일본의 국보로 알고있는 고대 가요집 만요슈(萬葉集)를 해독 하지만 이는 고대 우리말 성 교육서를 이두로 쓴 것으로 지금은 시중 잡배도 그런 말을 하지 못할정도의 음담패설이라 글쓴이도 망서려 지는 내용이다. |
첫댓글 마음 편안이 한줄한줄 새기며 읽어보니..참으로 옛 선인들의 잔잔한 풍류의 멋이 풍기는 듯~~
직설적이 아니라..경 하지도 않으면서 은은한 감칠맛이 나는 ...좋아요 좋아~~잘 읽었소이다 ,,김대감!~~감사!!
주무시나?
나 김대감이요
서대가암.ㅋㅋㅋ
에에라~~고얀지고...글을 읽으면서 머리속으로 상상하니..
아뿔사..아랫동네 거시기님이 에이-텐트를 치시고 옹달샘물을 마시려 하네..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