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매와 '인지저하증'
나병(癩病)은 일본에서 들어온 의학 용어였다. 우리말에선 '피부가 문드러지는 병'이라고 얕잡아 보는 '문둥병'이 널리 쓰였다. 나병을 뜻하는 영어 leprosy는 '피부가 벗겨지는 병'이라는 고대 그리스어 '레프라'에서 왔다고 한다. 1873년 노르웨이 의사 한센이 나병균을 발견한 뒤 그의 이름을 딴 한센병이 공식 의학 용어로 자리 잡았다. 우리 의학계도 오랜 병명 바꾸기 캠페인 끝에 2000년 국회에서 나병을 한센병으로 바로잡았다.
2010년 대한간질학회는 '간질(癎疾)'을 '뇌전증(腦電症)으로 바꾸며 '대한뇌전증학회'로 거듭났다. 뇌전증은 '뇌에 비정상 전기파가 생겨 경련성 발작을 일으키는 질환'이라는 뜻이다. 의사들은 간질에 찍힌 불치병의 낙인과 귀신 들린 병이라는 인상을 지우려고 병명을 과학적으로 바꿨다. 학회는 한자를 쓰는 중국과 일본의 학회에도 '뇌전증'을 함께 쓰자고 제안했다.
대한신경정신의학회도 '정신분열증'을 '조현병(調絃病)'으로 바꾸자는 운동에 앞장섰다. '현악기의 줄을 잘 고르지 못하는 병'을 뜻한다. 신경계에 일부 이상이 있어 행동이나 마음에 문제가 생기는 상태를 악기에 비유했다. 그간 환자와 가족들은 정신분열병이라는 병명 때문에 더 큰 고통을 받았다. 조현병은 2년 전 국회가 약사법을 개정하면서 공식 용어가 됐다.
고령화가 갈수록 심해지면서 치매(癡?)를 걱정하는 사람이 많다. 전문가들은 "치매 발견의 가장 큰 적(敵)은 자기 자신"이라고 말한다. 기억력이 예전만 못한 일이 잦은데도 대개 나이 탓으로만 넘긴다. 40~50대 이른 나이에 치매가 생기면 당황한 나머지 병 자체를 인정하지 않으려고만 한다. 치매도 불치병은 아니라고 한다. 초기에 증세를 발견해 진단받으면 약을 먹으면서 일상생활을 정상적으로 할 수 있다.
치매는 '바보, 또는 멍청한 정신 상태'를 의미한다. 노망(老妄)이나 망령(妄靈) 들었다는 멸시의 뜻이 담겨 있다. 그렇다 보니 사회 인식이 나쁘고 환자와 가족이 부끄러워해 병을 숨기다 악화되는 경우가 많다.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마르케스도 지난해 치매에 걸렸다고 한다. 글을 쓰느라 머리를 많이 쓴 사람도 어쩔 수 없이 걸리는 병이 치매다. 그래서 치매를 '인지(認知)저하증'이나 '노심병(老心病)'으로 바꾸자는 제안이 나왔다. 일본도 2004년 '치매'를 '인지증'으로 바꿨다. 병명부터 과학적이어야 사람들이 질병을 바로 보고 합리적으로 대처하는 자세를 갖게 된다.
- 조선일보 만물상 -
'포청천 개작두'
서울시장 후보 조순(趙淳)이 하얀 눈썹을 휘날리며 연단에 섰다. 서울대 축제 마당이었다. 그가 젊은 표를 겨냥한 발언을 이어갔다. "나는 서울의 ''하얀 포청천'이 되겠습니다. 서울을 안전하고 살아 움직이는 도시로 만들겠습니다." 1995년 첫 민선 시장 선거가 코앞이었다. 그해는 대만서 만든 TV 드라마 '판관 포청천'이 크게 인기몰이를 했다. 포청천은 11세기 중국 송나라 수도 카이펑(開封)의 부윤(府尹)까지 지낸 청백리이자 판관이었다.
조순은 포청천 덕에 당선됐다. 포청천이 워낙 추상같은 관료의 표상이었고, 시장(市長) 격인 부윤을 지낸 점도 겹쳤다. 선거 때면 여러 후보가 '조순-포청천' 선거 전략을 벤치마킹했다. 그러나 포청천이 죄인 처형 때 썼다는 '개작두'란 말은 입에 올리지 않았다. 너무 잔인했다. 그해 삼풍백화점이 무너지자 여론이 서울시를 꾸짖었다. 조순이 말했다. "포청천이 작두로 단죄하듯 한 번에 해결할 순 없다. 한약을 쓰듯 장기적 치유가 필요하다."
그 뒤 '포청천' 별명은 주로 체육계 심판들이 갖다 썼다. '그라운드의 포청천'이라고 불렀다. 집창촌 성매매 척결에 앞장섰던 여성 경찰서장에게는 '미아리 포청천'이란 별명이 붙었다. 공정거래위원장, 소비자원장도 포청천이라고 불러주길 은근히 바랐다. 전직 대통령의 비리를 파헤친 검사가 옷을 벗으면 일부에서 "'포청천 검사'가 드디어 떠난다"는 고별사를 읊었다. 올해 6·4 지방선거 때도 일부 후보가 포청천이란 말을 썼다.
2주 전 새정치연합 문희상 의원이 비상대책위원장을 맡으면서 포청천 얘기를 꺼냈다. "내 별명인 포청천처럼 공정한 전당대회를 준비하겠다." 며칠 뒤엔 "정당은 규율이 생명이다. 해당(害黨) 행위자는 개작두로 치겠다"고 했다. 비록 사석(私席)에서 한 말이지만 끔찍한 느낌을 줄 만큼 단호했다. "버릇없는 초·재선의 버르장머리를 고쳐 놓겠다"는 말과 겹쳐 서슬이 퍼렜다. 엊그제 세월호특별법 합의가 성사되자 그의 '개작두 엄포'가 통했다는 말까지 나왔다.
지금도 중국 허난성 카이펑에는 원조 포청천이 썼다는 형벌 기구가 그대로 남아 있다. 평민을 처벌할 때는 개작두, 귀족에겐 범작두, 왕족에겐 용작두를 썼다고 한다. 관광지가 된 당시 시 청사에 들어서면 돌에 새긴 글귀가 눈길을 끈다. '공생명(公生明)', 공정함이 밝음을 낳는다는 뜻이다. 많은 정치인·관료가 포청천을 닮겠다고 했지만 퇴임 뒤까지 그 말을 듣는 사람은 없다. '포청천 문희상'이 자신의 별명 값을 해낼지 궁금하다. - 조선일보 만물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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