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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눈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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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스크랩 ?요동출토 금관과 금동신발및 장구
꿀짱 왕눈벌 추천 0 조회 471 13.04.13 23:18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요동출토 금관과 금동신발및 장구

 

 요동에서 출토된 금관과 금동신발및 요대등이다.특이한점은 금관과 신발등에 봉황으로 장식된 문장이 있다는 점이다.봉황을 금관으로 ?던 국가는 백제가 유일하게 알려져 있다.백제는 주로 요동반도의 서쪽을 점유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만주원류고》에 기록이 있고,《통고》에는 백제의 금주금마군(대련)을 고려가 남경으로 삼았다는 기록이 있다.아래의 자료들은 <중국유물사료전>이란 이름으로 서울정도 600년을 기념하기 위하여 94/10/5~11일까지 덕원갤러리에서 열렸던 전시출품작이다.용정(龍睛)콜랙션에서 주관하였다.

 

두개의 요패도 봉황의 문양이 양각되어있다.

 

 

금동신발에도 두마리의 용이 승천하는 모습으로 각인되어있다.

 

 

(傳)요령성에서 출토된 금관과 장신구     금관은 투각으로 되어있고 봉황이 승천하는 모습이 조각되어있다.고도로 새련된 정교한 작품이다.

 

아래 그림표는 심양의 정가와자유적 출토품목록중 일부이다.그중에서 금동신발은 출토품과 문양은 다르지만 전체형태가 유사하다.오히려 실물 출토품의 문양이 봉황문으로 우수한편이다.

 

심양 정가와자유적 출토품


 

다음은 백제시대 서기 500년 이후 매장된 공주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유물이다.위에 소개된 요령성 출토 유물과 어떻게 차이가 나는지 비교해보자.

 

백제무령왕릉 출토 금제장식

한국의 고고학계에서는  이 왕관의 장식을 당초문과 불꽃문양으로 해석하고 있지만 잘못된 해석이다.이것은 봉황이 하강하는 모습을 도식화한것이다.주로 사자들에게 씨워졌던 관들은 죽은자의 환생을 기원하는 뜻에서 용이나 봉황을 도식화 하였던 것이다.용이나 봉황은 사계절중 봄을 상징하기 때문이다.봉과 황을 구분하기 위해서 날개의 숫자를 달리하여 구분한 배려도 볼 수 있다.

 

             만약 봉황의 머리를 꽃으로 비유한다면 새의 부리로 표현된 모양은 설명할 수 없게 된다.

 

 

어떤 신발은 가릉빈가를 투조하기도 하지만 이 신발에도 봉황이 투조되었다고 믿어도 될것이다.

 

 


 

 

                         봉황과 용을 상과 하에 배치하고 중간엔 박산을 배치한 백제대향로이다.

                          여기서 밝산이란 만물을 소생시키는 삼신산을 의미한다.낙랑출토 향로

                          에서 보이던 접시받침이 용으로 변한 형태이다.접시받침은 삼신산이있던

                          바다를 상징하던 그릇이었다.그러나 접시는 한나라가 고조선을 침략한 이

                          후로 점점 제거되었다.

 

 밝산향로를 펼쳐놓은 산수문전이다.밝산위에 봉황을 배치하고 있다.

 

 봉황문전(鳳凰紋塼)

 

용문전(龍紋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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