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선대 참배 후기
관룡사 용선대 석조석가여래좌상(龍船臺石造釋迦如來坐像) 참배 후기
십여 년 전 창녕 관룡사 용선대 석조석가여래좌상을 보고나서 그때의 인상을 지울 수 없었다. 존경하는 초당 정영기(草堂 鄭榮基) 사부님께 은근히 여쭈어 보았다.
“용선대 석불을 보면 어쩐지 선생님이 연상 됩니다. 언제 한번 모시고 가고 싶은데 허락하시겠습니까? 결코 허무한 길은 아닐 것입니다.”
그때 선생님은 쾌히 승낙하셨지만 서로의 사정이 여의치 않아 차일피일 미루다 이번에 과감히 밀어붙여 성사 되었다.
아침 일찍 하남에 계신 사부님을 모시고 천리 길 창녕으로 가는 도중에 사부님께서
“창녕의 하정 노재봉(荷汀 盧在奉) 선생이 보고 싶다” 하셨다. 하정대부님께 전화로 말씀 드렸더니 몹시 반가워하셨다. 하정 대부님께서 반갑게 맞이하시며 낙동강변 좋은 음식점에서 자연산 민물장어구이로 점심대접을 해주셨다. 그리고 창녕읍 인양사(仁陽寺)에 들려 혜일(慧日)스님과 약속대로 동행하려 하였으나 코로나와 건강이 여의치 않아 꽃다발과 과자만 봉제수로 준비해 주셨다. 혜일스님께 깊이 감사드리며 하정대부님만 동승하여 목적지로 길을 재촉했다. 삼인은 불교신자가 아니다. 특히 하정대부님은 벗이 멀리서 찾아오니 그 기쁨에 험로를 기꺼이 동참하신 것이다.
창녕의 진산 화왕산(火旺山)의 주릉이 동남으로 치달리다 좌로 갈라지며 한 번 힘주니 관룡산(觀龍山)이요, 우로 한 번 우쭐하여 구룡산(九龍山)을 뽑아놓고 그 속에 천년고찰 관룡사를 품고 있다. 용선대는 바로 구룡산 칠 부 능선의 백 척 암봉 위에 있어 안일에 도취된 문약자는 감히 엄두도 못낸다. 하물며 군복무시 건각(健脚) 한 쪽을 국가에 바치고 지금 팔십 육세의 고령과 육중한 거구임에랴? 쉽지 않은 시도며 어쩌면 무모한 산행이었다. 그러나 선생님은 제자를 신뢰했고 제자는 선생님을 굳게 신봉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명찰 관룡사의 아담하고 신성한 분위기에 속기(俗氣)를 빼며 돌아보다 문득 혜일스님의 말씀이 떠올랐다.
“산에 올라가시는 길에 약사전 여래부처님께 무사기도 하시면 효험이 있을 것입니다.” 는 당부가 생각나 약사전 앞에서 경건히 묵례하였다. “오늘 저희들의 참배행사를 부처님의 가호로 무사히 마칠 수 있도록 살펴주소서“ 하고 빌었다.
각오를 다지며 오른 지 얼마 되지 않아 비탈길은 나무뿌리와 돌 뿌리가 노출되어 얼키고 설키어 쉽게 길을 열어주질 않았다. 저는 걱정이 되어 몇 번이나 하산하실 것을 아뢨지만 사부님께서는 생에 마지막 기회인만큼 꼭 오르겠다는 투지를 불태우시며 지팡이를 다잡으시고 저는 뒤에서 위로 밀어드리며 한걸음 한 계단 전력을 다하며 엎어지고 넘어지면서 올랐다. 금년이 팔순인 하정대부님은 기다리다 먼저 가셨는지 보이지 않았다. 사부님은 부처님을 참배키 위해 정장하신 양복이 땀과 흙먼지로 범벅이 되어버렸다. 그 옷은 얼마 전 효심 깊은 영식(令息) 내외가 새로 마련해준 질 좋고 맵시 있는 양복이었다.
전진과 휴식을 셀 수 없이하며 몇 굽이를 돌아 오르니 문득 시야가 트이며 저만큼 석양을 배경으로 창공에 우뚝 솟은 백 척 높이의 바위가 마치 허공에 둥실 뜬 뱃머리처럼 보이고 그 위에 의연히 앉은 불상이 보인다. 비로소 시야에 들어온 용선대에 감격하며 마지막 있는 힘을 다해 정상에 올랐다.
나는 마음속으로 선생님의 인내와 불굴의 투지와 고상하신 뜻에 무한의 존경심을 가지며 또 불가능한 일을 무사히 오를 수 있게 가호해주신 약사여래부처님께 심중으로 깊이 감사드렸다.
사람들은 보통 힘들여 높은 산봉에 오르면 만학천봉을 눈 아래에 깔아보는 정복의 희열로 환호성을 터뜨린다. 그러나 여기 용선대(龍船臺)에서는 그 기분은 잠시며, 곧바로 석조여래좌상의 신성하고 장엄함에 감화되고 숙연해진다. 용선은 반야용선(般若龍船)으로 저 세상으로 가는 배이며 대(臺)는 차안과 피안을 연결하는 나루터이다. 열반의 세계로 가는 배 삯은 돈과 권력도 아니고, 오직 오온(색,수,상,행,식)이다 공함을 직관하는 반야의 육바라밀(六波羅蜜:보시,지계,인욕,정진,선정,지혜)의 선업(善業)으로만 된다니 악업의 근원인 탐․진․치(貪瞋癡)를 떨쳐낼 수 있도록 우리의 인생을 엄숙하게 되돌아 바라볼 수 있는 곳이다.
우리는 처음부터 참배의 뜻으로 천신만고를 감내하며 왔으니 곧 바로 인양사 혜일스님이 준비해 주신 꽃과 과자와 초당선생님이 가져오신 주포(Johnnie Walker Blue label)와 불초가 준비한 찬불시를 제수로 진설하고 고유문을 봉독하고 특히 파격의 헌주례(獻酒禮)를 올렸다.
초헌은 초당선생께서, 아헌은 하정선생께서, 종헌은 제가 차례로 올리고 또 지어온 찬불시를 봉송하며 엄숙간략하게 참배의례를 진행하였다.
부처님께 술을 올린다는 말은 들어 본 적이 없다. 선생님께서도 저의 의아해 하는 표정에 원효대사(元曉大師)를 핑개대며 세상에서 제일 좋은 술이라며 올려드렸다. 이 파격을 부처님은 어떻게 받아드리실까? 신라의 고승 원효는 왜 월성의 백주대로를 만취한 채 활보했을까? 그것은 아마 인간의 청정한 자성(自性)을 억압하고 있는 법과 계율을 과감히 깨부셔 버리는 각자(覺者)의 몸부림이 아니었을까. 깬자의 혜안으로 보면 술은 술일 뿐 그것으로 속박 받지는 않는다. 이는 곧 대자유인의 풍류(風流)이다.
“큰 코끼리는 토끼 길에서 놀지 않고, 대오(大悟)한 자는 소절에 구속되지 않는다(大象不遊於兎徑, 大悟不拘於小節)” 라고 당(唐)의 영가현각(永嘉玄覺)은 증도가(證道歌)를 지어 외쳤다.
십여 년 전 나는 초당사부님과 이미 고인이 되신 죽포 조득승(竹圃 趙得升) 선생을 종유하여 도산서원을 탐방하였다. 퇴옹(退翁)의 생시 서재인 완락재(玩樂齋) 방문을 열어놓고 미리 준비하신 최고급 양주에 막 피어난 녹악백매(綠萼白梅) 꽃잎을 띄워 영전에 차례로 한잔씩 올려드렸다. 이 역시 고아한 풍류로 자부하며 숭모의 격세지정을 한시로 지어올린 파격의 례를 드린 적이 있다. 풍류(風流)란 소통에 걸림이 없음을 풍(風)이라 하고, 놀이에 절도(節度)가 있음을 류(流)라고 한다(疏通無碍曰風, 遊娛節度曰流). 이 멋을 모르면 어찌 진정한 남아라고 하겠는가.
십년 전 이 불상을 처음 알현하였을 때는 천년 세월의 풍상우로(風霜雨露)에 피어난 돌 꽃이 조화를 이루어 부처님의 전신을 덮고 있어 용선대의 장엄한 경치와 조화되어 천하제일의 불상으로 느꼈다. 이 위대한 예술품을 사부님께 보여드리고자 하였으나 지금은 관리자의 물지각한 행위로 그 고색창연한 멋을 말끔히 깎아 버려 금방 만든 불상처럼 신비감이 없었다. 사부님께 불상의 진면목을 보여드리지 못해 송구한 마음 금할 수 없어 예전에 찍은 사진을 드리며 용서를 구했다. 그리고 아쉬운 마음 부처님께도 시를 지어 올렸다.
청산 어느 곳에 먼지가 낀다고? 하물며 조옹(造翁)이 천년을 공들여 지은 부처님의 문채를 하루아침에 지워 버리다니 어리석은 중생들의 분별과는 상관없이 석불은 반야용선(般若龍船)의 선장으로써 고해의 중생들을 구제키 위해 또 천년의 세월을 묵묵히 이 자리를 지키고 계실 것이다.
음복(飮福)이 끝나갈 때 석양은 우측 화왕산 마루에 걸려 마지막 장엄한 노을빛을 천지에 뿌리고 있었다. 좌측 관룡산은 기암괴석이 병풍처럼 둘러있고 각양각색의 암상들이 마치 불국(佛國)의 무장(武將)처럼 부처님을 호위하는 듯하다. 저 멀리 남쪽에는 영취산(靈鷲山)이 울연히 저문 노을 속에 솟아있고 주변에는 여러 고봉들이 연꽃처럼 둘러있다. 일망무제 호연 장쾌한 준령의 품안에서는 화왕산에서 발원하고 관룡산 바위 밑에서 솟아난 샘물이 합쳐 옥천계곡에 명경지수(明鏡止水)를 만들며 흘러넘쳐 계성천이 되어 한 폭의 비단을 깔아놓은 듯 유유히 낙동강을 향해 흘러고 있다.
아! 이 고고 절속(孤高絶俗)한 승경에서 잠시나마 속진을 털고 크게 한번 심호흡하니 내 몸은 바로 신선(神仙)이요 만상이 진여(眞如)며, 촉목(觸目)이 전부 보리(菩提)가 아닌가! 부처님의 자비인가. 이 속물에게 웅혼한 무정설법(無情說法)을 관(觀)할 수 있어 가슴이 터질 듯하다. 일찍 연암(燕巖) 박지원은 광활한 요동벌판을 대하고 “참 좋은 울음 터로다. 가히 한번 울만하다” 라고 감격에 울면서 또 “비로봉과 황해도 장연의 금모래밭도 울어 볼만한 곳이다“ 라고 하였다. 만약 연암으로 하여금 이곳을 보게 했다면 무어라 했을까? 그리고 오늘 함께한 초당, 하정 두 선생님은 어떤 감회를 받았을까?
떨어지는 해에 맞춰 하산 할 때는 선생님의 걸음이 훨씬 수월하여 생각할 여유가 있었다. 영취산과 산재한 고찰과 유적을 상고할 때 이 지역이 얼마나 역사적으로 불교와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는지 짐작이 간다. 실제 여기 관룡사에는 신라시대에 우리민족의 자랑인 원효대사가 천명의 대중에게 화엄경전을 설한 곳으로 기록이 전하는 곳이다.
고려 말에는 신돈(辛旽)이 이곳 옥천사(玉川寺)에서 사비(寺婢)의 아들로 태어나 성장하였다. 훗날 공민왕의 신임을 받아 스스로 전민변정도감의판사가 되어 그 당시 지배계급이 강탈한 토지를 몰수하여 농민들에게 돌려주는 엄청난 개혁정책을 강행하고 핍박받는 백성들로부터 미륵불로 추앙 받았다. 그러나 기득권 세력의 야욕에 의해 꿈을 이루지 못하고 억울하게 복주(伏誅)되고 말았다. 그의 사상은 지척에 있던 용선대 석불의 영향이었다면 억측일까? 그는 현세의 개혁이 반야용선이라 보았고, 부처님은 저 피안으로 인도함을 반야용선이라 여겼을 것이다.
저기 허물어진 옥천사지 산 그림자 깊은 계곡 어디인가엔 그의 원혼이 지금도 떠나지 못하고 떠돌고 있는 것만 같다. 흥망의 역사는 언제나 승자의 편에서 쓰여 있으니까. 그래서 사마천은 “천도는 과연 옳은 것인가?(天道是也非也)” 라고 외치지 않았던가?
어둠이 깔리는 하산 길에서 더듬어 본 상념도 길과 함께 끝나고 무사히 행사를 마칠 수 있어 부처님께 감사드렸다. 그간 참고 견딘 허리의 통증이 한꺼번에 밀려왔지만 강행군을 이겨주신 두 분 선생님이 고마웠다. 어둠속에 잠기는 관룡사를 뒤로하고 하정대부님과 혜일스님의 배려에 다시 한 번 감사하며 귀경길을 재촉했다. 요통을 염려했지만 밤길 천리를 탈 없이 달릴 수 있었다. 그리고 초당사부님께 이 우제가 처음으로 선사(善事)를 한 행사가 되었기를 소망해 본다.
2021년 5월 15일 스승의 날에
제자 노 태 민 근상
첫댓글 노태민 수필가님! 참 좋은작품을 읽고 감명 깊었습니다
암상의 조화로 신비스런 관룡사 석가여래좌상 바람도 침묵했을 참배의례 신뢰와 열정으로
쌓은 사제의탑 천년의 향기로 영겁의 자취 길이 빛날 것입니다.
정영기 고문님
노태민 선생님의 품격 높은
기행문 잘 읽었습니다.
사제간에 또한 스님에대한 깊은 존경이 베어 있어 더욱 노태민선생님께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이 글을 올리신 고문님으로하여 한낱 문학도에게 좋은 화두를 안겨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