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일대의 인진도군(因珍島郡), 임회면 일대의 매구리현(買仇里縣)이 있었다. 물론 이들 3개의 군현은 독립적인 행정 편제를 지니고 있었지만, 인진도만이 군(郡)이었음을 감안한다면, 역시 고군면 일대가 상대적으로 중시되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아마 명량해협 의 입지적인 조건과 관련된 것이었을 것이다. 이처럼 진도의 정치. 문화적 위상은 명량으로 대표되는 고대 해로와 깊은 관련성을 갖고 있음을 확인할 수가 있다. 서 이들 3개 군현은 도산현이 뇌산군(牢山郡)으로, 인진도군이 진도현(珍島縣)으로, 매구리현이 섬탐현(贍耽縣)으로 각각 이름을 바꾸면서, 군내면 지역이 현에서 군으로 승격되면서 매구리현(지산, 임회) 지역까지 영속현으로 삼고, 인진도군은 진도현 으로 격이 하강 되면서 무안군의 영속현이 된다. 다시 말하면 과거 상대적으로 중시되어 진도지역의 주도권을 지녔던 고군지역이 주도 권을 잃고, 대신 군내지역이 새로운 중심 세력으로 부상하게 되었다. 물론 고군지역과 군내지역의 세력이 이처럼 변화된 정확한 이유를 현존 자료로는 확인할 길이 없다. 또한 당시 진도현과 멀리 떨어져 있던 무안군이 진도현을 어떻게 관할하게 되었느냐 하는 점도 문제 이다. 은 백제시대에 비하여 군세가 크게 부상하였고, 이러한 변화와 함께 고대 해로의 요충을 무안군이 장악한다는 의미로도 볼 수 있어, 내부의 문제보다 외적인 영향의 결과 일 가능성도 없지는 않다. 대체로 군내지역은 친백제적인 성향이 온존 되었으며 고군지역은 통일기의 변화를 현실로 수용하는 친신라적인 변신을 하였던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되기도 한다. 그리고 후대의 일이기는 하지만 진도의 유력 성씨 중에 무안박씨가 세력을 떨치게 되는 것도 따지고 보면 이 같은 전 시기의 연고 때문이 라고 보여진다. 알려져 있으나 사실상 청해진을 거점으로 하는 장보고의 해상세력이 기반으로 삼은 것은 중국~신라~왜~를 연결하였던 고대 무역로였고, 바로 이곳 명량 해협은 그 무역로가 통과하는 큰 길목이었다. 뒤이어 선종의 발달과 고려의 청자문화가 중국의 강남지방 도자문화와 연계되면서 발달되 었던 것도 모두 이 해로를 이용하여 이루어진 문화상들이었다.
[고려시대] 가지며, 그 때문에 견훤과 왕건 간에 큰 싸움이 있었던 곳이었다. 왕건은 서남해 도서지역을 중심으로 했던 후백제 편향의 강한 반발세력의 무마에 신경을 곤두세우 고 있었고, 도서를 영속시키지 않고는 후백제의 견훤 세력 을 장악하기 어려웠음을 스스로도 실토하고 있었다. 견훤의 해상 지원세력들은 바로 압해도와 진도 일대의 섬 지역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별명이 수달로 널리 알려졌다 는 압해도의 능창(能昌)은 왕건이 가장 두려워했던 견훤 편의 장수였고, 당시의 역사기록들은 다른 여러 섬의 세력 들이 후백제를 도와 고려에 대항하고 있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따라서 왕건은 나주 공략에 앞서 호남 장악의 제1보로 진도와 고이도(현재의 신안군 압해면)를 연결하는 해로를 차단하면서 영산강 입구인 목포와 영암 덕진포를 거슬러 나주로 진입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때문인지 고군지역의 진도현은 고려 성립 이후 왕건 세력의 호남 기지인 나주목의 관할 하에 귀속되면서 진도군으로 다시 승격되었고, 군내· 임회지역의 가흥·임회현을 영속현으로 거느리게 된다. 이러한 역사가 바구리 섬 전설에 나주가 등장하는 이유와 사연이라고 추측한다. 바구리 섬을 나주와 무안이 자기 것 이라고 다투는 이야기의 핵심을 통일신라시대와 고려 초의 진도 역사를 통하여 구체적으로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군내면 금골산 5층석탑(지방문화재 78호)이다. 비록 건립 시기는 고려시대이지만 금골산 5층석탑의 기본 양식이 백제 석탑의 전통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은 바로 군내지역의 이 같은 백제 혹은 후백제 편향의 의식적인 지역 분위기와 전통을 뒷받침하는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비록 백제 혹은 후백제의 견훤 편에 섰다가 패자가 되고 결국 그로 인해 왕건을 도왔던(사실은 고군지역이 왕건을 도왔다는 근거는 불분명하고 왕건 세력의 부식 결과로 볼 수도 있음) 고군지역의 영속현으로 존속하기는 하지만, 아직도 군내지역의 토착세력들이 고려 시기까지도 전 시기 의 정치적 성향을 존속시키고 있음을 보게 되는 것이다. 사건이다. 삼별초(三別抄)는 1,000여 척의 선단에 가족과 공·사노비 재물을 싣고 강화를 출발, 1270년 8월에 진도의 용장성(龍藏城)에 웅거, 이듬해 5월 제주로 피해가기까지 전후 9개월 간 진도에 머물렀다. 당시 삼별초가 진도를 항 전의 기지로 선택한 것은 대체로 몽고병이 꺼리는 해전을 할 수 있는 섬이면서도 진도가 남쪽 해안의 여러 섬들 중 에서 크고 물산이 풍부하여 군량의 자급자족이 가능했다 는 점, 명량해협을 끼고 있어 전략상 요충이자 여러 조건이 응전에 유리하였다는 점, 삼별초나 무신정권의 기반이 있 었던 곳이라는 점 등이 손꼽혀지는데, 이는 진도 역사의 지리적 특성과 성격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록이 있다. 조선시대 영조 때의 진도 사람 김몽규(金夢奎)가 지은 『옥주지(沃州誌)』(1761)에 보이는 최충헌의 손자이 자 최우의 아들이었던 최항이 진도 용장사에 머물면서 전횡 을 하였다는 기록이 바로 그것이다. 특히 용장사는 고려실 록의 사고가 옮겨질 계획도 세워졌던 곳이며, 대규모 불경 간행도 있었던 곳으로 추정된다. 이는 무신정권과 진도와의 인연이 이미 오래된 것이었음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특히 배중손이 진도의 임회(현재의 남도포가 있는 면) 출신이라는 구전이 있는 점도 주목된다. 어쨌든 진도에 웅거했던 삼별초는 현재의 진도군 고군면 용장리 일대에 궁성(용장성)을 건설하고 주위에 대규모의 산성 (용장산성)을 건설하여 응전 태세를 갖추는 한편 그 세력을 확장하여 전라·경상의 해안과 남해·창선·거제 등의 30여 개 섬을 장악하고, 독자적으로 일본에 사절단을 파견하기도 하 는 등 명실상부한 해상왕국을 건설하여 몽고에 대항하였다. 나자 곧이어 고려 말 왜구가 창궐하였고 진도지역은 다시 그들의 침입로가 되었다. 왜구의 침입으로 서남해안 지역이 폐허가 되자 고려 정부는 이에 보다 적극적으로 대처하기 보다는 조창의 이설, 군현 치소의 이폐, 주민들의 이주 등 매우 소극적인 대책을 강구하고 있었다. ‘공도정책(空島政策)’ 은 바로 그러한 소극책의 대표적인 예였다. 이로써 바닷가의 섬과 해안지역 주민들은 내륙으로 그 터전을 옮겼는데, 진도 사람들이 고향을 버리고 80여 년 간이나 영암(시종면) 과 해남(삼산면) 땅에서 타향살이를 해야만 했던 것은 이 같은 과정의 산물이었다. 결국 왜구로 인한 혼란과 중앙정 부의 행정적 공백이 도서를 황폐화 시켜버린 셈이었다.
[조선시대] 지역에 대한 연해 주민의 이주도 급속히 전개되었다. 물론 이 시기의 도서 이주는 정부로부터 여러 종류의 규제를 받고 있었으며 때에 따라서는 쇄환·추포의 명령이 내려질 정도로 금지되어 있었다. 따라서 엄밀한 의미에서 당시의 도서 이주민은 이러한 제약과 한계를 뛰어 넘는 경우의 불법적 이주였던 셈이며, 그 수나 처지도 그렇게 양호한 것은 아니었다. 성격을 미루어 볼 때, 주민들의 이주가 계속 진행되었다.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나『고려사(高麗史)』 의 지리지와 비교하여 몇 배에 달하는 섬들이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기록되고 있는 것이 바로 그러한 이주의 결과를 말해주는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주민의 이주와 정착도 왜란의 와중에서 다시 한번 굴절되고 만다. 이후(17세기 전후)로 현주민으로부터 10~15대조 정도가 일반적이다. 현재의 섬 주민들이 최초 이주민으로 믿는 입도조는 바로 임진왜란 이후 새롭게 교체된 이주집단의 선착민이었던 셈이다. 17세기를 전후한 시기의 섬 지방 이주민들은 대개 해운로를 사이에 둔 내륙 연안의 주민들이거나 해로(당시는 조운로)를 따라 유리되어 온 사람들이었다. 따라서 진도의 조선시대 문화 저변에는 인접한 서남해 연안의 ‘조선 전기 내륙 문화’ 계열이 섬이라고 하는 특수한 자연환경 때문에 내륙과는 구조적으로 차이를 보이면서 또 내륙보다는 비교적 그 전통을 온존시키면서 살아남았을 가능성이 큰 것이다.
[근현대] 함께 혼란과 고통도 아울러 가져다주었다. 진도 지역은 해방의 소식이 전해지면서 온 도민이 환호작약하는 가운데, 일제에 충성을 다해 공출, 징발 등에 앞장서 온 면장이나 밀정 행위를 한 자 등을 징치(懲治)하는 등의 행위가 일어나기도 하였다. 같은 해 10월경이 되면서 조선건국준비위원회 진도군 지부가 결성되자 곧바로 인민공화국수립이 선포되었고 조선건국준비위원회는 바로 인민위원회로 개칭하였다. 그러나 한국에 진주한 미군사령부가 군정을 포고하면서 이를 불법단체로 간주하여 해산 명령을 내렸고, 주된 활동 인사들은 지하로 잠적하였다. 이후 대한독립촉성국민회의, 한국민주당 등의 진도군 지부 등이 속속 결성되면서 진도도 해방 후의 어느 공간이나 마찬가지로 좌·우익 간의 대립이 노정되면서 많은 대립과 갈등이 야기되었다. 선거를 거쳐 1948년 8월 15일을 기해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새로운 제도와 질서가 수립되어 가던 중 1950년 6월 25일에 발발한 한국전쟁으로 인해 처참한 전쟁의 참화를 피해갈 수 없었다. 1950년 8월 31일에 전라남도 해남군의 우수영으로부터 약 1개 소대 병력의 북한군이 상륙하여 진도를 접수하였다. 이후 10월 5일 철수했던 경찰 병력이 다시 진군해 와 진도를 수복하였고 북한군 및 그의 협조 세력들은 많은 수가 섬을 빠져나갔다. 그러나 50여 일간 진도군내에서 는 좌·우익 양 세력이 서로를 해치는 동족상잔의 참혹한 유혈극이 일어났다. 전쟁이 끝난 후 진도도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독재정권에 대한 투쟁, 경제개발 에의 참여, 교육 및 사회시설 등의 확충, 문화의 전승 및 육성 등 이런저런 일들을 겪으면서 발전을 거듭해 왔다.
[지산면 향우회 "기" 상징 안내]
※ 이 자료는 먼저 진도군 설명후 지산면을 설명하겠음,
고군면 일대 임씨. 김씨. 이씨. 한씨. 곽씨. 현재(진도읍. 군내면) 조씨. 궁씨, 평씨. 류씨. 정씨. 임회면 배씨. 박씨. 의신) 임씨. 김씨. 이씨. 라씨 1237년 삼별초 패망과 함깨 일본놈 침략과 노략질에 1350년 부터 나주, 영암 등지로 피난갔다.
금성박씨. 김해김씨. 제주양씨. 경주박씨. 진주정씨
위 성씨는 고려말 귀향살이나 피난와서 토착 일선김씨. 동복오씨. 남양홍씨. 비인최씨. 평강채씨. 경주김씨. 해남윤씨. 장흥김씨 집안 등은 혼인. 혹은 생산을 위하여 왔다가 토착, 진도군화 는 동백, 군조 는 백조이다.
**지산면 설명**
전라남도 진도군 서부에 있는 면으로 면소재지는 인지리이다.
지산면은 선사시대의 유물인 고인돌이 인지리를 비롯한
여러 마을에 산재되어 있으며, 삼국시대인 백제시대에는 임회면과 함께 매구리현에 속하였으며, 통일신라시대 경덕왕 16년에 첨탐현으로 바뀌어 뇌산군의 속현이 되었고, 고려시대 인조 21년 지방관인 현령이 파견되면서 임회현으로 바뀌어 진도현에 속하게 되었다.
지력산 일대에 이설하며 거주자가 늘어나 목장면이라 하였고, 관마리에 청을 두었던 감목관의 감독을 받아 오다가 순조 13년에 감목관 제도가 폐지되면서 군수 소속에 편입되었다.
1961년 인지리 마을 중앙에 위치하였던 면사무소를 현재의 서진도농업협동조합 지산지점 자리로 옮겼다가 1994년 3월 현재의 지산면사무소 청사를 신축 이전하여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대체로 300m 이하의 구릉성 산지를 이루며,
곳곳에 지력산(325m) 석적막산, 삼당산(272m), 동석산(219m) 등이 있다. 지산면의 북서쪽은 서해에 면해 있으며, 동북부와 서남부의 하천 연안에는 평야가 발달했다. 봉암저수지. 심동 저수지. 등 관개용 저수지가 많다. 주요 농산물은 쌀· 보리. 특용작물로 구기자, 유자, 참깨, 등이 생산된다. 수산물로는 김, 미역, 전복, 등이 유명하다. 인지리에서 는 <남도들노래>- (중요무형문화재 제51호), <진도씻김굿>- (중요무형문화재 제72호)이 전해내려오고 있다. 인지(仁智), 관마(觀馬), 삼당(三堂), 고야(古野), 앵무(鸚鵡), 길은(吉隱), 소포(素浦), 거제(巨濟), 보전(寶田), 와우(臥牛), 가치(加峙), 가학(加鶴), 심동(深洞), 오류(五柳), 송호(松湖), 등의 15개 동리가 있다 (법정리 기준, 행정리 기준은 36개). 면적 89.86㎢, 인구 4,289(2006년).
지산면은==> 안치. 거제. 물은향. 고길. 앵무동. 구옹점. 고야교. 보전. 독치. 와우동. 금이동. 가치, 세방. 세포. 심구미, 마사. 토장항. 오류동. 비려천. 관마청 .삼당리. 석교장. 하동. 연동, 정자목 200년이 훨씬 넘는 나무이다.
거주 를 시작 했으며, 현 거주 성씨는 순창설씨. 인동장씨. 광산김씨. 현동곽씨. 장흥임씨. 동복오씨. 박씨. 차씨 등... 인지리의 뜻은 (어질고 지혜롭다)는 뜻이니 좋은 이름이다.
고유명인데 (양지물)이라 하더니 인천리로 고정되었다. (민제골)은 독치 란뜻이다. 경주전씨. 연안차씨. 김씨. 최씨 기타 등 이 거주한다.
민산 일지언정 너무 노골적이라 인지리라 미화 하면서 인천은 떼어내고 나머지는 전과 같이 독치라고 부름,
♣, 인천 은 동리(마을) 전천 의 이름인데 다음 말하는 `독치` 와 구별하기 위하여 그 내(川) 를 인연 붙여서 축복의 뜻으로 붙인 이름이다. 터(장소)란 말로 보전과 똑같은 말,
동리(마을)이 커지면서 상. 하. 로 성촌되어 분리되다. 현재 상보전. 하보전. 으로 불린다. 밀양박. 제주고. 청송심. 소씨 등이 촌락을이루며 오손도손 즐겁게 사는 마을 이다. 관마청 (觀馬廳)은 수장 관리 하는 관청사 명(이름) 이다. 감목관의 관청이다. 삼당리라 명명하다. 내(內) 자 는 안내자를 써서 안에 깊숙히 위치함에 연유한다. 현풍곽. 밀양박, 해남윤. 등. (괴기) 라고 하고, 그 들을 (괴들)로 와전(訛傳) 하였다. 구태여 한자 명을 붙인다면 포기(浦基), 포야(浦野), 가 되겠는데 (갯갓터) 란 고야 전평까지 호수(湖水)가 들어왔으니 알만하다. 앵무가 될만한 대지와 산새 관계가 맺혀져 있을것이라 생각하며 대. 소. 의 뜻은 그 부락의 크고 작음 을 선.후. 관계로 호칭 하는데 있었으리라 믿어 진다. ♣, 고길리 는 1550년 시거씨족 박씨 바로 동정(洞庭) 까지 해수가 들어와 포변동리(浦邊洞里) 란 음역하여 고길로 미화되 고정되다. 개정된 동명이 되었다. 과연 (물은)이란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한역 대로 라면 라상서부처(羅尙書夫妻)가 본리(찬물내기) 안고랑에 숨어 설(舌)을 피(避)했다가 하지 에서 종신하여 부부묘가 현존 한지라 그로 인해서 (숨지말라)란 말인지 (물은 수은(水銀) 수현(水懸) 으로 물이 숨어있다. 물이 현근하게 좋다. 라는 뜻으로 진천(眞泉), 한천(寒泉), 이라 하는 명천을 (영골) 이라는 말은 불 분명한 와전된 표현이다.
창령조. 라주임. 남양홍. 경주정. 동복오. 신안주. 형충곽. 수원백, 진삼김.김해허.성안조.강씨등...
있어 소(所)자 를 소(素)로 쓰는것은 동음 미화의 소치이다
이 동리를 넘어가는 치(峙)고개가 소질매 형과 같다 하여서다.
지용기☞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do?docid=b20j0745a 삽소제 등이 기거 하던곳이라. 역사성으로는 알맞다. 하는데가 있는데 칡도 많으려니와 그형이 흡사 칡 머리와 같다.
김해김. 밀양박. 경주정. 등. 동리형격 이 와우형 이란 말이다. 금노리의 고명은 쇠누동이다. 죽산안, 밀양박. 밀양손. 인동장. 나주임. 평강채. 동복오. 해주최. 김해김. 이천서. 남평문. 송씨 등. 가치(駕峙) 즉 (멍애재) 란 뜻이다. 각제, 는 가제와 관련이 없는 말이다. 임씨. 서씨. 장씨. 등.
방안처럼 생긴 작은땅, 또는 동리란 뜻으로 세방이라함, 세(細)자는 가늘다는 뜻만이 아니라 적다는 뜻도 아니다 심구미(深仇味)로 불리다가 심동으로 (의역) 동명으로 고정,
근래에 와서 버드나무가 많아 오류동(五柳洞)으로 부르다가 30-40년전 작명 하면서 산사이로 달이 아름답게 떠어름으로 월촌(月忖)으로 미화 고정하였다, (월촌)에다 큰집을 짓고, 오류리에 (사랑방)을 둔다하여 어딘지 모르게 무리가 있다. 불리다가 옆마을 (대판)과 합쳐서 대천리라 바꾸어 동명 고정하였다. (송호리)로 명명해 (지오 금일) 했다고 현거주 촌노께서 전한다.
그 산 밑에서 해변(海邊)과 개옹간 약삼백미 정도를○○○○(←자료 읽지를 못함,) 장차 성목이 되면 미관을 무시 못하리라
유래는 천마시풍에서 산을 마분으로 보고 하는말이다 본리 남방산정묘(南方山頂墓) 를 선학등공(仙鶴登空)으로 본다. 그리하여야 가학이 되기 때문이다.
지산면향우회 "기" 설명 ▼ 군마 를 사육하던 지산면의 옛 명칭인 목장면에서 유례하고, 사육하던 군마의 관리 를 하던 "관마청" 이 관마리에 존재 했던 근거로 인해 "말" 을 형상화 하였고, "말" 색상은 고귀한, 특별한, 보물을 상징하는 황금색이며,
"말" 이 쓰고있는 "상마" 는 지산면이 민속의 보고이며 원조이고, 무형문화재 (중요무형문화재 제51호)남도들노래 가 있기에 "상마" 로 표현 하였다. "상마" 줄 끝의 원형은 하나로 뭉치는 면민화합의 뜻을 표현 하였고, 바탕색의 짚은 녹색은 진취, 미래, 를... 또한 푸르른 들녘과 풍년을 기약하고 "말" 이 푸른 초원을 달릴 수 있도록 상징 합니다. 지산면의 진취적인 미래와 발전을 표현한 "기" 가 지산면민 모두를 하나로 뭉치게하는 깊은 뜻을 품고 있기에 지산면의 미래는 밝습니다.
2011년 10월 16일 재경지산면향우회
※ 지산면향우회 기를 제작하면서 "세방낙조" 와 " 검정쌀" 을 함께 표현 하려 했으나 세방낙조는 보기엔 좋지만 뜨는해, 가 아니고 지는해, 이므로 표현하지 않으면 좋겠다는 여론이 있었습니다.
또한 검정쌀 역시 재배 농가가 지산면이 아닌 타 면에서도 경작을 하기에 특정 표현이 안된다 는 공론으로 배제하였음,
너무 많은 표현을 하면 기가 조잡스럽고 난잡 하기에 지산면의 상징적인 대표성만 표현 하였습니다.
상기 도안은 약 6개월에 걸쳐서 30여개의 도안 중에서 공론화 하여서 최종적으로 채택된 작품입니다. "말" 형상이나 "상마" 의 형상이 사진으로 찍은 실물이 아닌, 도안 작품이기에 보는 각도에선 여러가지 상상으로 이해를 하지 못하는 분도 있을 수 있으나 따뜻한 사랑 부탁합니다.
재경지산면향우회 바로가기 ☞ http://cafe.daum.net/jsmhh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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